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287화 (287/298)

# 287

287. 전란의 시대.

287.

“아악!”

“일어서시오.”

이시아스 왕녀는 벌겋게 변한 자신의 팔을 바라보며 고리눈을 하고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너무하세요!”

“왕녀보다 약한 힘으로 상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조차 이기지 못한다면 왕녀는 무기를 잡지 않는 것이 나을 것이오.”

이시아스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테세우스에게 반문했다.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어요. 하지만 저만 해도 저만한 사람을 이렇게 날려 보내지 못해요. 그런데 어떻게 저보다 약한 힘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상대방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힘을 이용한다면 왕녀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기예요.”

테세우스는 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 검을 내려놓았다.

“후우. 여기까지 하겠소. 날카로운 검을 앞에 두고도 긴장하지 않으니 호신에는 문제가 없겠지. 그러니 왕녀의 모든 훈련은 여기서 끝내겠소.”

테세우스의 말에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지은 이시아스가 급히 입을 열었다.

“제가 혹 심기를 어지럽힌 것이라면 용서하세요.”

“아니 오해요. 그 때문이 아니라 오늘을 마지막으로 왕녀의 훈련을 끝내고자 했소. 하여 일부러 더욱 거세게 밀어붙였던 것이고. 오늘 보니 치열한 전장에 서지 않는 한 별문제는 없을 듯하군. 그러니 예정대로 마치겠소.”

“다시 오지 말라는 소리인가요?”

테세우스가 무심한 표정으로 이시아스를 바라보자 이시아스는 붉게 변한 얼굴로 소리쳤다.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이 무심한 사내가 이젠 정말로 자신을 내치려고 하는 것이다.

“정말 몰라서 이러시는 건가요? 왕녀인 제가 무예가 부족해서 당신을 찾아온 것 같아요?”

“······.”

“아니면 당신과 어울리기엔 너무 천박하고 부족한 사람이라서 저를 멀리하는 건가요? 제가 이렇게까지 말을 해야 하나요?”

이시아스를 가만히 바라보던 테세우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여인이요.”

“그럼 왜 저를 멀리하는 건데요? 당신이 권력에 관심이 없다는 것도 잘 알아요. 그러니 테세우스, 당신만 원한다면 왕녀의 신분도 내려놓고 따라가겠어요. 당신 삶의 날카로움에 베일 것이 두려운 것이라면 두 팔로 나를 꼭 안아주면 되는 것 아닌가요? 흥! 당신은 지독한 겁쟁이예요!”

테세우스는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당차게 자신의 속마음을 꺼내는 이시아스를 바라봤다. 이에 이시아스도 질세라 테세우스를 노려봤다.

나날이 더해가는 알 수 없는 불안함을 이 가녀린 여인과 나눠도 되는 것일까? 겁쟁이라. 그녀의 말이 옳다. 그 불안함이 두려워 이시아스의 마음을 알고도 외면했고 지금 역시 내치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그녀의 마음도 마음이지만 메마른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따스한 온기를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향기로운 꽃잎이 잔혹한 전장 위에 떨어져 피로 물들지 않았으면 했다.

고작 하룻밤 쾌락에 지나지 않을 일에 누군가 평생을 고통받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상대가 그렇지 않더라도 무엇보다 스스로를 기만하고 싶지 않았다. 남편 없는 아내, 아비 없는 자식.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피할 수 없는 굴레가 될 테니까.

그러나 이미 그녀는 자신에게 물들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자신을 따르겠다는 그녀의 말이 진심인지 거짓인지도 모를 사내가 아니었고 그 무엇보다 아침이슬에 정신이 팔려 온몸이 젖는 것도 모르듯 테세우스 역시 그녀에게 물들었다.

이것을 직시하고도 외면한다면 그야말로 두려움이 삶을 지배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자신의 두려움이 자신에게 깊게 물든 이시아스의 삶까지 일그러뜨릴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이에 테세우스는 이시아스에게 묵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나를 사랑한 것을 후회할 것이오.”

그 말에 이시아스는 환하게 웃으며 테세우스를 와락 껴안아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그의 품에 파묻었다.

“아니요. 그럴 일은 없어요. 무엇보다 후회를 해도 내가 해요.”

“뭐. 그렇겠지.”

테세우스는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자신을 껴안은 이시아스의 머리를 오른손으로 쓰다듬었다.

‘이시아스의 후회가 그녀의 것이듯 나의 두려움도 나의 것이다. 모조리 베어버리리라.’

서늘한 눈빛으로 마음을 가다듬은 테세우스는 이시아스가 말했듯이 그녀를 자신의 품에 꼭 안아주었다.

*

테세우스는 그 길로 카파도니아의 아리오바르자네스 왕을 찾아가 이시아스와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테세우스의 능력을 탐내던 아리오바르자네스 왕으로서는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에 아리오바르자네스 왕은 테세우스와 이시아스의 결혼식을 카파도니아 전역에 공표하려고 했지만 아르메니아의 사신이 들고 온, 곧 티그라네스 2세가 보낸 서신에 의해 잠시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 서신은 전쟁을 담고 있었고 그 전쟁은 카파도니아와도 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아르메니아는 파르티아와 접경하고 있기에 두 왕국 사이에 많은 전투가 있었소. 비록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왕이 로마의 폼페이우스에게 패하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뛰어난 왕이오. 그런 그의 예측이니 결코 무시할 수 없소.”

티그라네스의 서신은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원정을 거론하고 있었다. 일단 서신이 작성된 경위는 이러했다.

정작 로마에서는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정벌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파르티아와 사이가 좋지 않은 아르메니아는 국익과 부합되는 일이라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에 티그라네스 2세는 파르티아 정벌을 위해 움직인 크라수스를 성대하게 맞이했다.

티그라네스 2세는 파르티아군의 약점을 크라수스에게 알려주고 아울러 아르메니아의 산악지대를 이용해 파르티아를 침공할 것을 제안했다. 산악지대가 험난하기는 하나 기병이 주 병과인 파르티아를 상대로 지형적인 이점을 차지할 수 있고 사막지대를 지나는 것보다야 훨씬 안정적으로 정벌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막지대를 통과하여 파르티아의 주요 도시를 단번에 함락시킬 생각을 품고 있었던 크라수스는 티그라네스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군을 사막지대로 이끈다. 누구보다 빨리, 누구보다 혁혁한 공을 세우고 싶은 크라수스의 야욕으로 인한 결정이었다.

이러한 크라수스의 행보를 크게 염려한 티그라네스 2세는 서신을 작성해 카파도니아로 사신을 보낸다.

“크라수스가 정벌에 성공한다면 걱정할 일이 없지만 티그라네스 왕의 말대로 패배한다면 파르티아는 그 기세를 몰아 아르메니아와 카파도니아까지 쳐들어올 수 있습니다.”

“으음. 그건 너무 비약 아니오? 파르티아의 오로데스 왕도 로마와 전면전을 펼치길 원하지 않을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로마와의 전쟁으로 국력이 많이 쇠약해졌다고는 하나 아르메니아가 그렇게 쉽게 뚫리지도 않을 것이고 이곳 카파도니아는 그 아르메니아에서도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이 지역 로마에 대한 반감을 생각하면 비약이라 보기도 어렵습니다. 셀레우코스 왕국이 파르티아 왕국의 침공에 함께 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셀레우코스 왕국이? 흥! 파르티아는 셀레우코스 왕국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왕국이오. 그런 곳이 파르티아 왕국과 협조를 해?”

“최근 들어 셀레우코스 왕국 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병력을 증강하고 있다는 건 더 이상 비밀이랄 것도 없는 일이니 가능성이 없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또한 파르티아가 로마와 전면전을 치르지는 않더라도 그 위용을 떨치고자 얼마든지 로마의 우호국들을 침탈할 수 있는 노릇입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패전했을 때의 상황을 추측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소? 크라수스가 승전한다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오.”

“하지만 티그라네스 왕은 사막지대를 통과한 로마군이 파르티아군과 싸운다면 대패를 면치 못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바로 그렇기에 대책을 세우고자 사신을 보낸 것이고 말입니다.”

“아니 대책을 세우고자 했다면 로마에 사신을 보낼 것이지 아르메니아보다도 소국인 우리 카파도니아에 사신을 보내서 무슨 대책을 세우겠다고? 티그라네스 왕이 혹 무슨 술수를 부리는 것이 아닌지 확인해 봐야 합니다!”

카파도니아의 신하들이 치열하게 논쟁하는 이곳에는 테세우스도 자리하고 있었다. 아리오바르자네스 왕이 함께하길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아리오바르자네스 왕은 손을 들어 모든 음성을 잠잠하게 만든 뒤 테세우스에게 말을 꺼냈다.

“이 서신은 테세우스, 당신에게 온 서신이오.”

아리오바르자네스 왕이 손짓하자 한 병사가 화려한 쟁반에 담긴 서신을 테세우스에게 바쳤다. 테세우스는 말없이 봉인을 뜯고 서신의 내용을 살폈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 카파도니아에서 들은 기묘한 소문을 조사해보다가 당신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소. 로마에 걸출한 인물들이 많다고는 하나 당신처럼 대단한 무용을 지닌 사람은 없을 것이오. 당신이 소문처럼 그토록 대단하다면 로마가 패전하는 것은 막는 것이 좋지 않겠소?..... 생략>

리처드의 기억을 가진 테세우스는 크라수스가 어떤 식으로 죽음을 맞이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파르티아 정벌 실패로 자신의 아들과 함께 죽었고 그의 죽음을 조롱하기 위해 파르티아군이 목구멍에 녹인 금을 부었다던가?

지금껏 자신을 적대했던 인물이니 죽든지 말든지 신경 쓸 이유가 없었지만, 로마가 패배하고 역으로 파르티아가 강성해진다면 티그라네스 왕의 예측대로 이곳 카파도니아도 전장이 될 수 있었다.

‘어떤 나라도 승전할 수 없게끔 만들면 되겠지.’

테세우스는 티그라네스 왕의 서신을 옆에서 타오르는 화로에 던져 태운 뒤 아리오바르자네스 왕에게 말했다. 자신이 출정한다고 한다면 티그라네스 왕이 파르티아 북쪽을 유린한다고 했던가? 뭐 그 정도면 크게 위험할 것 같지도 않았다.

“물자만 지원주십시오. 전쟁을 끝내고 오겠습니다.”

아리오바르자네스 왕은 반색하며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그렇게 해주겠소? 얼마든지 지원해주겠소이다. 병사는 얼마나 필요하시오?”

“좋은 말과 충분한 보급이면 충분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병사는!”

아리오바르자네스 왕은 반발하려는 신하를 제지한 다음 입을 열었다.

“알겠소이다.”

며칠 뒤 테세우스는 나디르를 비롯한 1,200명의 전사들과 완전무장을 갖추고 총 2400필이 넘는 말을 이끌고 크라수스가 진군한 방향으로 달려갔다. 말이 지치면 갈아타기 위해 아예 한 사람 당 두 필의 말을 지급한 것이었다.

*

크라수스는 4만 5천에 이르는 대병력을 이끌고 파르티아로 빠르게 진군하다가 파르티아의 수레나스라는 장군이 이끄는 2만 명의 기병들에게 큰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이 지역은 카르하이 평야로 불리는 곳이었다. 역사에서 크라수스가 목숨을 잃은 바로 그 평야였다.

“스쿠툼 들어!”

“크아아아악!”

“대열 유지해! 무작정 놈들을 쫓아가지 말란 말이다!”

“아아악 내 팔! 커헉!”

스쿠툼 사이로 들어온 화살에 박힌 병사가 고통에 울부짖다가 다시 날아온 화살에 목이 꿰뚫려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놈들을 쫓아라!”

“불가능합니다. 병사들의 체력이 이미 바닥입니다.”

“놈들을 쫓지 않고 어떻게 전투에서 이길 수 있단 말이냐?”

“일단 후퇴해야 합니다. 지형이나 아군이 처한 상황 모두 너무 불리합니다. 폭염으로 인해 병사들은 물도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이길 수 있는 전쟁도 패배하고 말 겁니다.”

“하지만 무슨 수로 후퇴한단 말이냐?”

크라수스는 답답하다는 심정으로 지휘관에게 소리쳤다.

수레나스가 이끄는 파르티아 궁기병들이 로마군을 둘러싸고 쫓을라치면 도망치고 물러서면 따라와서 화살을 날리는 통에 로마군 전체가 과녁판이 된 것처럼 옴짝달싹도 못 하고 화살에 얻어맞았다.

기병에 유리한 평야라는 지형의 문제도 있었지만, 사막지대를 지나며 고갈된 체력이 가장 큰 문제였다. 로마군이 평야에서 기병들과 전투를 치러보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한 지휘관의 말대로 이런 군대로는 어떤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둘 수 없었다.

“간교하게도 아군이 지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전투를 걸은 것이 분명합니다.”

“젠장! 놈들의 카타프락토이가 다시 돌격해 옵니다!”

카타프락토이는 파르티아 특유의 충격기병으로 말에 마갑을 씌우고 기병 역시 중무장을 한 중장기병이기도 했다. 이들의 돌격력은 무시무시했다. 간신히 형성한 스쿠툼의 대형조차 단번에 파쇄해버릴 정도로 말이다. 중세의 기사를 연상케 만들었다.

카타프락토이는 대형 기병창을 들고 돌격했는데 이 창으로 병사 두세 명씩을 한번에 꿰뚫는 무시무시한 돌격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로마 병사들의 체력이 남아있었다면 이런 현상이 벌어지지 않았겠지만, 현재로서는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었다. 이들의 숫자는 1500명 남짓했지만,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들이 로마군의 진형을 부수면 파르티아의 궁기병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들개처럼 달려들어 로마군을 아예 벌집으로 만들어버렸다.

로마군에도 기병이 있었지만 숙련된 파르티아 기병에 비하면 숙련도에서 이미 월등한 차이가 났고 기병 역시 극도로 지친 상황이라 상대가 되지 않았다.

“레가투스! 지금은 방법이 없습니다. 서둘러 후퇴해야 합니다. 제가 병사들과 함께 활로를 뚫어보겠습니다.”

용맹해 보이는 장수가 크라수스에게 급히 말한 뒤 병사들과 함께 포위를 뚫기 위해 전진했다. 그러나 그 용맹함이 무색하게 카타프락토이에게 갈가리 찢겨나가고 들개 같은 궁기병들에게 살점을 뜯어먹혔다.

강철로 이뤄진 비는 쉴 새 없이 로마군의 스쿠툼을 두들겼고 언제고 단단할 것 같은 스쿠툼마저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크아아아악!”

전장 어디를 둘러보든 로마군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로마군이 자랑하던 전투대형이나 엄정한 군기 역시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잔혹한 살육에 이른 처절한 비명만이 로마군 전체에 음울하게 울려 퍼질 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