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8
288. 불가사의.
288. 불가사의.
수레나스는 파르티아의 명가 수렌 가문의 젊은 지도자였다. 그는 최근 들어 왕 다음가는 권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가 어디 소풍이라도 떠날라치면 짐을 나를 낙타 천 마리와 마차 이백 대가 움직이곤 했다.
수렌 가문의 지도자는 파르티아 왕을 추대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에 파르티아 내에서 그의 가문을 멸시할 자는 없었고 아직 짧은 기간이지만, 수레나스는 여러 차례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다.
한마디로 그는 부와 명예 그리고 걸출한 능력까지 갖춘 파르티아의 떠오르는 영웅이라 할 수 있었다. 본 역사에서 크라수스 3~4만 군대를 1만 기병으로 쳐부수고 그를 살해한 장군도 바로 수레나스였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역시 좋지는 못했다. 파르티아는 중세시대의 봉건제와 같은 체제를 가진 국가였기에 수레나스의 가문과 그가 얻은 명성은 왕가에 큰 위협이 되었고 이로 인해 결국 처형당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흥하길 원하지 망하길 원치 않는다. 흥하는 것이 좋고 망하는 것은 나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다만 흥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 망하는 것이 나쁜 것인지 그건 알 수 없다. 흥하게 만든 그것이 결국 망하게 한다면 그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망하게 한 그것이 결국 흥하게 한다면 그건 나쁜 것인가 좋은 것인가? 알 수 없다.
어쨌거나 로마와 아르메니아의 침공으로 수레나스는 카르하이 평원의 로마군을 견제하기 위해 움직였고 오로데스 왕은 파르티아 북부로 군을 이끌어 아르메니아군을 상대하기 위해 움직였다.
파르티아의 상황이 본 역사, BC 53년보다 안정적이었던지 수레나스는 2만에 이르는 병력을, 오로데스 왕 역시 2만에 이르는 병력을 이끌고 아르메니아의 티그라네스 2세를 상대하러 움직였다. 오로데스 왕은 티그라네스 왕이 뛰어난 인물이기에 자신이 직접 상대한다고 했지만, 실상은 티그라네스의 군사 이동은 파르티아를 압박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로마도 파르티아도 전면전을 펼칠 상황이 아니었기에 패전이든 승전이든 적정선에서 마무리되리라 판단한 오로데스 왕은 느긋하게 이번 전쟁의 승패를 기다렸다. 로마가 승전한다면 품 안의 가시 같은 수레나스를 처리할 기회가 될 것이고 수레나스가 승리한다면 북진을 하든 남진을 하든 파르티아의 영향력을 주변에 떨치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누가 봐도 수레나스의 승리로 굳어지고 있었다.
*
크라수스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학살당하는 로마군을 바라봤다.
“티그라네스 왕의 조언을 들었어야 했다. 모두 내 불찰이다. 내 불찰이야.”
뒤늦게 아르메니아를 통과해 파르티아를 침공했어야 했다고 후회했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지나간 일에 대해선 소용이 없다.
4만 5천 중 주변에 남아있는 병사는 1만 명도 채 되지 않았다. 나머지 3만 5천 이상이 적에게 살육당했거나 포로로 잡혔거나 그도 아니면 도망쳤다는 소리였다.
자신과 전투를 치른 파르티아의 장군, 수레나스는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전쟁을 무르고 돌아갈 것을 제안했다.
크라수스는 그때마다 코웃음을 치며 화의 제안을 거절했다. 크라수스로서는 당연했다. 반대를 무릅쓰고 파르티아 정벌을 강행했는데 파르티아 땅도 밟아보지 못하고 귀국한다면 그 무슨 망신이겠는가? 하지 않는 것만 못한 일이었다. 크라수스로서는 반드시 이번 정벌에 유의미한 공적을 얻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모두 끝이다. 부와 명성, 어쩌면 자신의 생명까지도 이 뜨겁고 척박한 카르하이 평야에서 모두 메마르고 말 것이다.
입안이 바짝 메마른 크라수스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 적장 수레나스에게 항복한다고 전해라.”
어지간하면 끝까지 결사 항전해야 한다는 소리가 한두 번은 나오기 마련인데 지휘관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어떤 말도 뱉지 않았다. 이유는 명확했다. 그야말로 처참한 대패였고 항복을 하지 않는다면 오늘 이 평야에서 살아남을 로마군이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크아아아악!”
“아아악!”
아닌 게 아니라 전장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은 모두 아군의 것이었다.
음울한 침묵 가운데 크라수스의 마지막 명령을 이행하러 이동하려는 와중 저 멀리 한 무리의 기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 지원군이다!”
“지원군이야!”
또다른 기병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로마 병사들은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저들이 들고 있는 깃발을 보고 로마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파르티아 기병이 깃발을 바꿔 든 것일 수도 있지만 치열한 전장에서 깃발을 바꿔 든다는 것은 어리석을 정도로 무모한 전략이었고 무엇보다 대승을 거두고 있는 파르티아군이 그런 일을 행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저들은 로마의 지원군이 분명했다.
“지원군이라고? 대체 누가 지원군을 보냈지? 아니 그보다 병력이 얼마나 되더냐?”
크라수스는 화색이 든 표정으로 지휘관에게 말했다.
하지만 대답하는 지휘관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기병의 규모를 볼 때 천 명 정도가 전부인 것으로 보입니다.”
크라수스는 답답한 표정으로 짧게 반문했다.
“······. 천 명?”
“어찌할까요?”
지금의 질문은 예정대로 항복할 것인지 아니면 항전할 것인지 묻는 말이었다.
천 명이든 백 명이든 지원군이 도착했는데 어찌 항복을 청하겠는가?
하지만 천 명이라니. 천 명으로 지금의 전황을 어찌 뒤엎겠는가? 오히려 더 큰 피해만 낳을 뿐이라 여긴 크라수스는 어떤 말도 뱉을 수 없었다.
“······.”
“엇! 저 깃발은?”
그때 한 지휘관이 좀 더 명확해진 깃발의 문양을 보고 기함을 터트렸다. 다른 지휘관 역시 그것을 알아본 모양인지 급히 소리쳤다.
“테세우스다! 테세우스야! 불타오르는 창의 문양은 테세우스의 군대가 들고 있는 특유의 문양이 분명합니다.”
“뭐? 테세우스라고?”
카파도니아에 있던 테세우스가 왜? 줄곧 적대관계 있던 테세우스가 왜 자신을 구원하러 왔단 말인가? 크라수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바람처럼 평야를 달려오는 테세우스의 기병들을 바라봤다.
크라수스는 부끄러운 마음과 동시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뭔가 알 수 없는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그가 지원군으로 나선 이유야 아무래도 상관없다. 잊지 않겠다. 살아남는다면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
크라수스는 테세우스의 이름을 크게 외친 다음, 지휘관들에게 명령했다.
“항복은 없다. 항전한다!”
“알겠습니다!”
이윽고 크라수스의 진영에서는 힘찬 트럼펫 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졌다.
뿌우우우우웅!
*
수레나스는 눈매를 좁히며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로마의 기병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번쩍이는 갑주를 온몸에 걸친 혈기왕성해 보이는 장수가 큰소리로 외쳤다.
“염려 마십시오. 카타프락토이를 데리고 놈들의 지원군을 단번에 박살 내겠습니다. 그리되면 저 로마놈들도 더는 항전할 생각을 품지 못하고 벌벌 떨며 수레나스 장군께 엎드릴 것입니다.”
자크완의 말대로 저들을 박살 내면 로마군의 마지막 희망까지 모조리 짓밟을 수 있을 터, 수레나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자크완! 카타프락토이를 이끌고 놈들을 궤멸해라! 단 말을 다루는 실력이 심상치 않은 것으로 보이니 절대 방심하지 마라!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놈들을 모조리 도륙하고 오겠습니다! 가자! 파르티아의 전사들아!”
“와아아아아!”
두두두두. 두두두.
수레나스의 명령이 떨어지게 무섭게 자크완은 카타프락토이 1,500기 모두를 데리고 진격했다. 로마군이 지쳤다고는 하나 수차례의 돌격에도 단 한 명도 전사하지 않았으니 이들의 실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
바람처럼 달리는 말 위에서 테세우스는 온통 피로 물든 카르하이 평야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역시나 대패를 면치 못한 모양이었다. 더 큰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이번 전쟁에 참여했지만, 작은 이유로는 크라수스에게 입은 호의를 기억하기 때문도 있었다.
거래로 인한 것이었고 호의 역시 지난날 모두 갚았지만, 크라수스의 존재로 인해 자신의 모든 일이 수월해진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물론 그 후 크라수스가 자신을 적대한 부분이 워낙 커서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번 전투에 나서고자 결정한 부분에 지난 호의가 아예 영향이 없지는 않았다.
데메트리우스에게도 온갖 악한 일을 당하고도 테세우스가 지독하리만치 복수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던가? 그럴 힘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아니다. 테세우스는 복수의 순간에도 나름의 자비를 베풀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이유야 어쨌든 데메트리우스가 자신의 목숨을 구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테세우스는 원한도 호의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원한은 흐르는 물 위에 새기려 하고 호의은 반석 위에 새기려 했다. 대개는 그 반대다. 원한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돌 위에 새기고 호의는 영원한 망각의 강 위에 흘려보낸다.
테세우스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더더욱 은혜와 호의를 잊지 않고자 했다. 살의와 광기가 자신을 지배하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죽일 힘과 보복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한 테세우스가 치밀어오르는 살의와 광기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어떤 면에서는 그의 모든 능력보다도 대단했다. 원한과 미움을 조금이라도 품었던 사람이라면 원한과 미움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르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답답하기까지 하지만 바로 이러한 점이 테세우스의 가장 큰 강점 중 하나였다. 테세우스를 따르는 전사들? 맞다. 먼저는 테세우스의 무력에 매료되었다.
하나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듯 외향적인 매력은 화려하기는 하나 오래가지 않는다. 테세우스를 따르는 이들이 테세우스를 그토록 따르는 이유는, 심지어 본인을 떠나라고 말해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무력보다도 그의 인품에 매료됐기 때문이었다.
천하를 오시할 무력과 능력을 지니고도 테세우스는 기본적으로 성품이 오만하지 않다. 테세우스라고 오만한 성품이 왜 없겠느냐마는 답답할 정도로 항상 본인을 가두고 주의시킨다. 아예 이해하지 못할 부분은 아니다. 항우와 리처드의 길을 따르지 않기 위한 나름 처절한 노력과 고뇌의 결과였으니까.
어쨌든 저들이 보기에 테세우스는 마치 끝없는 구도의 길에 오른 수도자처럼 마음과 육체를 매일같이 갈고 닦았다. 자신들이 테세우스라면? 테세우스의 능력을 지니고도 테세우스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항상 아니었다.
바로 이러한 부분들이 테세우스가 저들에게 어떤 부와 명예나 직위를 보장해주지 않더라도 테세우스를 존경하고 끝까지 따르는 이유였다. 이를테면 상관과 부하의 관계가 아니라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고 해야 할까?
테세우스는 호라티우스의 이름에 따온 ‘라티우’라는 이름을 붙인 극을 가볍게 돌려 쥐면서 뒤를 따르는 나디르 등에게 외쳤다.
“죽는 것은 허락하지 않겠다.”
“알겠습니다!”
테세우스는 극을 휘둘러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들을 모조리 쳐냈다. 나디르 등은 테세우스가 만들어준 다마스쿠스 강철로 이뤄진 방패를 앞세워 화살로부터 말과 자신을 보호했다.
방패가 아니더라도 주요부위는 모두 다마스쿠스 갑주로 보호되고 있었고 저들의 실력 또한 화살에 얻어맞아 죽을 정도가 아니었다.
파르티아 궁기병들이 쏟아낸 강철의 비가 테세우스의 기병들 위에 미친 듯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테세우스를 비롯한 전사들은 그 어떤 피해도 보지 않고 바람처럼 짓쳐 들었다.
“미친!”
“저... 저럴 수도 있는 건가?”
콰지지직!
“크아아악!”
“아아악!”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황당한 상황에 미처 기동할 기회를 놓친 궁기병들이 테세우스의 극 아래 갈가리 찢겨나갔다. 그뿐이랴? 테세우스를 선두로 송곳니 모양의 진형으로 짓쳐 들던 창을 치켜든 테세우스의 기병들에게 저마다 꼬챙이가 되어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크라수스군을 괴롭히던 궁기병의 두꺼운 포위가 순식간에 돌파되는 순간이었다.
*
수레나스는 황당한 표정으로 테세우스의 진격을 바라봤다. 지금껏 로마군을 무수히 살육한 궁기병들이 무슨 놀란 메뚜기떼처럼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말을 다루는 실력이 어찌나 대단한지 궁기병들은 미처 피하지도 못하고 처참하게 도륙당했다.
“저들은 대체? 아니 선두에 선 저 사내는 대체 누구냐?”
하지만 부하에게 물을 것도 없이 로마군에서 울려 퍼지는 함성을 듣고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로마군은 테세우스가 궁기병을 격파하기 무섭게 그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테세우스!”
“테세우스!”
“테세우스!”
마치 그것이 신의 가호라도 되는 듯 연신 외치며 종전의 모습과 다르게 빠르게 진형을 구축하고 있었다. 심지어 도망쳤던 로마군들도 본대로 합류하고 있었다.
이에 수레나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테세우스?”
짧게 반문한 수레나스는 자크완이 이끄는 파르티아의 정예기병 카타프락토이 1,500기와 테세우스가 이끄는 1,200기의 기병이 머잖아 격돌할 전장을 심각한 표정으로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