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290화 (290/298)

# 290

290. 불가사의.

290.

테세우스는 피로 물든 라티우를 들고 파르티아의 본대로 천천히 말을 이끌었다.

다만 무슨 명령을 받았는지 나디르 등은 적 기병을 도륙한 장소에서 질서정연하게 대열을 이루고 서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활시위에 걸어놓은 화살과 같은 모습이었다. 언제든 손을 놓으면 쏜살같이 날아가 단번에 적의 심장을 꿰뚫을 화살 말이다.

파르티아의 병사들은 테세우스를 극도로 경계했지만, 그 누구도 테세우스에게 무기를 휘두르는 자가 없었다. 자크완은 파르티아에서도 알아주는 용사다. 그런 용사가 단번에 참살당했다. 바로 눈앞의 이 무시무시한 로마인에게 말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가 다가오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머.. 멈춰라!”

파르티아 지휘관이 긴장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그제야 테세우스는 말고삐를 잡아채어 말을 세웠다. 그리곤 자신에게 말을 꺼낸 지휘관을 무심히 바라본 뒤 소리쳤다. 테세우스의 눈빛을 마주한 지휘관은 그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마치 항거할 수 없는 맹수와 눈을 마주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 적장은 누구냐?”

이에 미간을 꿈틀거린 수레나스가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말을 이끌고 앞으로 나섰다. 물론 호위병들의 삼엄한 경계에 둘러싸인 채로 말이다.

“파르티아 수렌 가문의 수레나스. 내가 이들을 이끌고 있다.”

테세우스는 가만히 수레나스를 바라봤다. 수레나스 역시 테세우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를 바라봤다. 그렇게 묘하고도 짧은 침묵이 감돈 후 테세우스가 입을 열었다.

“정전을 요청한다.”

수레나스는 다시 미간을 꿈틀거리며 반문했다.

“정전? 지금 정전이라고 했나? 무용이 뛰어나다는 건 알겠지만, 스스로를 너무 과신하는군. 아군은 너희의 두 배다. 너희 로마군과 다르게 이곳 카르하이 평야의 이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기병들이 대부분이고. 이미 두 배가 넘는 로마군을 물리친 내가 이제 와 아군의 반도 안 되는 로마군을 상대로 정전을 맺는다?”

테세우스는 무심한 눈빛으로 수레나스를 바라봤다.

“파르티아와 로마는 너무 멀다. 단기간에 서로를 멸망시키는 건 불가능에 가깝고 설혹 상대를 멸망시키더라도 점령지를 유지할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로마가 그러하니 파르티아는 말할 것도 없겠지.”

“감히! 파르티아를 비하하는 것인가?”

“자국에 대한 자부심으로 눈이 어두워진 장님이었나? 전면전에 돌입하면 로마가 우세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크라수스의 정벌이 무모하긴 했으나 이러한 정벌이 이뤄졌다는 것이 그 방증이 되겠지.”

“흥! 이곳의 전투도 시작하기 전에는 로마군이 우세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결과는 어떠하지?”

수레나스의 도발적인 언사에도 테세우스는 여전히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지금은 너희가 우세하니까 계속해서 전쟁을 하겠다는 뜻인가? 그것을 원한다면 그렇게 하라. 대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책임? 감히!”

“장군! 명을 내려 주시면 저자의 목을 베어오겠습니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이에 수레나스의 부하 장수들이 분통을 터트리며 저마다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정작 수레나스는 눈매를 좁혔을 뿐, 어떤 분노도 터트리지 않았다. 수레나스는 테세우스가 말을 꺼낼 때 크라수스가 있던 방향을 향해 슬쩍 고개를 움직이는 것을 봤다. 말의 저의는 곧 우세하던 크라수스가 처참한 지경에 이른 것처럼 너 또한 네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실로 오만한 자다. 자크완과 카타프락토이 1,500기를 불과 몇 분도 안 되는 사이 모조리 도륙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지만, 그것이 승전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수레나스는 말없이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전장의 흐름이 완전히 달라졌다. 아니 테세우스 저자가 흐름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전투를 재개하면 궁지에 몰린 로마군은 테세우스라는 보검을 내세워 극심하게 저항할 테니 설혹 승리하더라도 자신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 수렌 가문을 따르는 자들이 줄어든다는 뜻이니 오히려 아르사케스 왕가와 오로데스 왕이 바라던 대로 이뤄질 뿐이다.

테세우스는 침묵을 지키는 수레나스에게 다시 말했다.

“이곳의 전투가 어떤 식으로 끝을 맺든 결국엔 휴전 내지 정전으로 끝을 맺게 될 것이다.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피를 흩뿌리는 수밖에.”

수레나스는 굳은 표정으로 테세우스를 노려봤다.

무서운 사내다. 일신의 무용만으로도 천하를 놀라게 할 사내이건만, 전쟁을 넘어서 그 저변에 깔린 미묘한 흐름까지 읽고 있었다.

왜 지금까지 이런 사내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단 말인가? 아니 처음부터 크라수스가 아니라 테세우스 이자가 군을 이끌었더라면? 온몸이 오싹해졌다. 실로 무서운 사내다. 자크완의 복수는 떠오르지도 않을 정도로.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라고 했나? 기억하지. 당신의 이름. 당신의 무용. 그리고 당신의 지략 역시.”

수레나스는 그 말을 던진 후 큰소리로 전군에 명령에 내렸다.

“회군한다!”

*

크라수스는 진영에 합류한 테세우스를 향해 버럭 화를 내듯이 질문을 던졌다.

“왜! 왜 전쟁을 멈춘 것이오? 왜?”

지난날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본 테세우스의 무용은 그 짝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대단했다. 사자와의 전투, 수백 명의 검투사들과의 전투, 대미는 디오클레스와의 전투였다. ‘테세우스’라는 이름을 로마시민들에게 각인시킨 사건이니까.

디오클레스는 30명의 검투사들과 홀로 싸워 이긴 사내였고 맹수들을 맨손으로 쳐 죽이거나 찢어 죽이는 괴력의 검투사이기도 했다.

다만 그래 봐야 검투사였다. 괴력과 무용이 놀랍긴 하지만 정예병들을 투입하면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는 존재. 디오클레스를 죽인 테세우스라고 해서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오늘 크라수스는 똑똑히 목격했다. 로마 군단병을 무참히 유린한 경악스러운 카타프락토이 1,500기를 향해 홀로 진격하는 테세우스를 말이다. 그리고 저 매서운 기병을 하나도 아니고 수백 명, 그 이상을 홀로 도륙했다. 그것도 순식간에.

자신의 두 눈을 믿을 수 없었고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지난날 검투장에서도 대단했지만, 수백 명의 검투사를 모두 죽인 것도 아니었고 그곳은 검투장이었다. 살육을 목적으로 둔 전장이 아니라 유희를 목적으로 둔 검투장 말이다.

테세우스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무기를 휘두르면 모든 것이 갈가리 찢어졌다. 말과 기병이 한꺼번에 양단되는 건 일도 아니었고 저 강력한 기병들이 바위를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가는 물방울처럼 살점과 피를 흩뿌리며 전장 곳곳에 흩뿌려졌다. 심지어 저들이 걸친 갑주는 무거운 중갑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지난날 본 광경은 오늘의 광경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누가 테세우스를 막을 수 있을까? 대체 테세우스는 신화 속 신들을 떠올리게 할 능력을 갖추고도 왜 그것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은 것일까? 수많은 의문이 소용돌이쳤지만, 크라수스의 마음을 사로잡는 단어는 하나, 바로 승리였다.

아군이 열세이긴 하나 테세우스와 함께라면 승전할 수 있다. 그랬는데······. 분명 그랬는데!

“대체 왜 전쟁을 멈춘 것이란 말이오? 승전할 수 있지 않소? 승전할 수 있는데 왜 저들을 물러가게 내버려 둔 것이란 말이오?”

이해할 수 없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크라수스는 테세우스를 더욱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엄청난 무력을 가지고도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은 테세우스를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테세우스는 싸늘한 눈빛으로 크라수스에게 말했다.

“누구를 위한 전쟁이고, 누구를 위한 승리인가? 이미 수많은 자가 당신의 야심으로 인해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도 아직 부족한가? 정녕 크라수스, 당신의 피가 대지를 적신 후에야 그 불꽃을 사그라뜨릴 텐가?”

테세우스의 추상같은 기세에 분통을 터트리던 크라수스는 숨이 막힐 정도의 압박을 느꼈다.

“읏! 내.. 그러니까 내 말은.”

“즉시 로마로 회군하시오. 헛된 야심은 당신 목숨 대신 죽은 것으로 여기고.”

테세우스는 그 말을 끝으로 냉정하게 돌아섰다.

크라수스는 말머리를 돌리는 테세우스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주변을 살폈다. 지휘관이나 병사들은 전의를 잃었고 테세우스를 경탄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과 다르게 자신을 원망의 눈초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쟁은 끝났다. 파르티아 정벌은 실패했고 자신의 야심 찬 계획도 이것으로 끝이다. 자신이 절대 바라지 않던 잔인한 현실이지만, 그래도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테세우스로 인해.

인생의 좋고 나쁨의 미묘한 지점을 헤아리며 잠시나마 미몽에서 깨어난 크라수스는 테세우스를 향해 외쳤다.

“왜 그러고 있는 것이오? 대체 왜?”

자신이 바라는 모든 것을 움켜쥘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도 대체 왜? 대체 왜 움켜쥐지 않는단 말인가? 살아남은 지휘관과 병사들의 눈빛을 보라. 비단 아군뿐만이랴? 파르티아군조차 테세우스를 향해 경탄했다. 이를 로마 전체로 확대할 무력이 부족한가? 병력이 부족한가? 금력이 부족한가? 아니면 지략이 부족한가? 아니면 배경과 신분이 부족한가? 불가사의 그 자체였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 크라수스를 떠나갔다.

*

얼굴을 검은 천으로 가린 자들이 어둡고 거대한 석실에 모여 있었다. 석실 가운데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문양이 잔뜩 그려져 있었는데 그 주위로는 역시 거대한 원이 그려져 있었다.

“비스무트는?”

“확보했습니다. 하지만 오리칼쿰, 오레이칼코스를 연성하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상관없다. 어차피 그건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지중해 전역은 물론 그 이상까지도 영향을 미칠 테니 첫 단계로는 그만하면 되었다. 무엇보다 이미 안배가 실현되기 시작했다. 시기를 늦춘다면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될 터! 들어라! 대멸망의 시대 고도로 축약된 ‘오르’는 세계 각지로 퍼졌다. 그 오르는 신화 속의 괴수를 낳기도 했고 신화 속 영웅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바로 이 ‘오르’야말로 저 위대한 아틀란티스인들의 찬란한 유산이자 안배였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목소리를 드높이며 다시 말했다.

“아틀란티스인의 기억을 얻은 우리가 진정한 아틀란티스인으로 변화하려면 세계 각지로 퍼진 오르를 활성화시켜야 한다. 너희들도 기억하겠지만 이 피라미드는 오르를 활성화시키기에 아주 훌륭한 매개체이다. 노예놈들이 위대한 아틀란티스를 따라한다고 만들었겠지만, 이것의 진정한 용도는 모르는 어리석은 자들이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오르’가 무슨 일을 일으킬지 알 수 없습니다. 지난번 시험삼아 시행한 일에 화산이 폭발하고 커다란 해일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자칫하면 모든 세계가 붕괴할 수도 있습니다.”

“알게 무엇이냐? 아틀란티스인 안배가 이뤄지면 바닷속 깊이 가라앉은 찬란하고 위대한 아틀란티스 대륙이 융기할 것인즉 우리는 그곳에서 진정한 아틀란티스인이 될 것이고 나머지 모든 저열한 민족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노예가 될 것이다. 그러니 대계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아틀란티스의 위대한 왕이 도래하시면 너희의 기억은 노예의 육체를 점거하며 영원히 생을 이어가게 될 것이니! 아틀란티스를 위해 기꺼이 죽어라! 죽는 것은 잠깐이나 너희가 누릴 영광은 영원할 것이다!”

“기꺼이 아틀란티스를 위해!”

“기꺼이 아틀란티스를 위해!!”

저들은 엄숙하고도 희열에 찬 어조로 광신도처럼 소리쳤다.

“시작하라!”

“알겠습니다!”

저들은 제각각 기묘한 문양이 새겨진 단검을 들고 36 방위를 점거하고 섰다.

“아틀란티스를 위하여!”

“아틀란티스를 위하여!”

그런 뒤 저들은 일제히 동일한 말을 뱉음과 동시에 자신의 목을 서슴없이 단검으로 베어버렸다.

촤아아아악!

촤아아악!

석실바닥을 가든 메운 붉은 피는 문양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고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는 중앙에서 알 수 없는 말을 쉴 새 없이 중얼거리다가 그 역시 단검으로 자신의 목을 베어버렸다. 소름끼칠 정도로 기괴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음산하기 그지없는 붉은 빛이 요동치더니 석실 안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웅!

화아아아아아악!

그리곤 폭발이라도 하듯이 하늘을 향해 순식간에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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