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마 무신의 기억-292화 (292/298)

# 292

292. 이데아.

292.

찰박!

시리도록 투명한 호숫물이 빠르게 붉은 핏물로 물들어간다. 순식간에 주변이 핏물로 자욱하게 물들었다.

“하아.”

씻어내고 지워내도 뼛속 깊이 스며든 붉디붉은 냄새는 영혼까지 붉게 물들이는 것 같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랬기에 이 끝없는 살육의 길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는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한 것은 몸부림치면 칠수록 깊은 늪에 빠진 서글픈 사슴처럼 더 많은 피와 살육에 젖어 들어야만 했다는 사실이다.

스르르륵! 촤아아아악!

그 순간 물결에 파문을 그리며 뭔가 빠르게 쇄도하더니 호수에 몸을 담그고 있던 사내에게 짓쳐 들었다.

그것의 실체는 실로 거대한 악어였다. 호수에 퍼진 붉은 핏물에 식욕이 동한 모양이었다. 호수에서 나타난 은밀한 살육자에 의해 사내는 갈가리 찢어져 죽임을 당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악어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사냥하려던 사냥감은 그 어떤 포식자보다도 위험한 사람이라는 것을······.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테세우스는 표정조차 변하지 않고 몸을 움직여 악어의 공격을 피하고 그 목을 두꺼운 팔로 휘감았다.

우두두둑!

그것으로 끝이었다.

휘감은 팔 사이에서 뭔가 으깨지는 묵직한 소음이 울려 퍼지더니 거대한 동체를 지닌 악어는 움직임을 잃고 그대로 축 늘어졌다. 테세우스의 팔에 휘감긴 부분은 마치 압축기에 찍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형태를 잃고 푹 들어가 있었다.

풍덩!

테세우스는 아무렇지 않게 악어를 저만치 던져버렸다.

핏물을 씻어내는 것조차 쉽지 않다. 테세우스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호수에서 나왔다.

“괜찮으십니까?”

주변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전사들이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이 모든 일은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저들은 미처 대응하지도 못했다.

테세우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젖은 물기를 닦아내고 마른 옷과 갑주를 착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의 병사들 몇몇이 테세우스를 거들었다.

그때 숲을 헤치고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바로 사비누스였다.

“음?”

나디르는 호수를 둥둥 떠다니는 거대한 악어의 사체를 바라보고 미간을 좁혔다. 누가 악어를 죽였는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악어의 목과 머리 부분이 처참하게 뭉개져 있었다.

테세우스는 사비누스를 바라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무구를 착용하며 입을 열었다.

“특별한 소식이 있나?”

“······.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군단은 마우레타니아, 누미디아 왕국을 잃고 이집트까지 퇴각한 상황입니다. 루쿨루스는 폰토스, 비티니아, 갈라티아 지역을 잃었고 카파도니아에서 분전 중이긴 하나 소식을 전달받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파르티아와 아르메니아가 독자적으로 전쟁을 치르는 중이긴 하나······.”

역시 알 수 없다는 뜻이리라. 당연했다. 외부의 적은 물론 내부의 적과도 전쟁을 치러야 했으니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인들을 로마 시민으로 선포하고 저들을 규합해 효율적으로 막아내고는 있으나 많은 지역을 잃었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저희가 파악할 수 있는 건 이것이 전부입니다. 아틀란티스는 매우 조직적으로 지중해 전역을 점령해가고 있습니다.”

지중해뿐만이 아닐지 모른다.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마야 문명이 있던 중앙 아메리카 지역이나 저 멀리 한나라 역시 이상 현상에 고통받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너무 멀다. 무엇보다 그들의 상황을 파악한다고 해서 현 상황이 나아지지도 않는다. 테세우스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또 다른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그들을 이끄는 자는 스파르타쿠스였고 오이노마우스 역시 함께 하고 있었다. 시칠리아에 도망친 저들은 히스파니아의 사비누스에게 몸을 의탁한 것이었다.

호라티우스의 죽음과 연관이 있는 자들이라 사비누스는 처음에는 성을 내며 스파르타쿠스 등을 죽이려고 했지만, 무슨 생각에서인지 스파르타쿠스가 이끌고 온 모든 이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들은 이제 테세우스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

“남은 부족들의 협조를 얻어냈습니다. 이제 모든 켈타이족은 테세우스 님의 명령을 따를 것입니다.”

그건 다시 말해 히스파니아 전 지역이 테세우스의 손아귀에 떨어졌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별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남은 무구를 마저 착용할 뿐이었다. 그렇게 모든 무구를 갖춰 입은 테세우스는 말발굽 소리에 눈을 들어 그 방향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나디르가 이곳을 향해 빠르게 말을 달리고 있었다.

“워 워.”

이윽고 다가온 나디르는 급히 말에서 내린 뒤 테세우스에게 말했다. 그의 표정은 침통하기 이를 데 없었다.

“테세우스 님! 이미······.”

나디르의 말에 테세우스는 표정을 크게 굳혔다.

카이사르에게 말했듯 아틀란티스에 대한 내용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설명할 길이 없다. 항우, 리처드, 서후의 기억을 어떻게 얻었는지 설명할 길이 없듯이 말이다. 그저 이상 현상이 발생했을 때 단편적이긴 하나 이 모든 내용이 떠올랐고 반드시 막아야한다는 일념 하에 로마로 향했다.

로마의 군사력은 세계 최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실제로 극심한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아주 효율적으로 저들의 계략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대로 다시 1년만 버틴다면 ‘오르’는 그 힘을 대부분 잃어버릴 것이고 그리되면 역사를 뒤바꾸려 했던, 그리하여 멸망 당할 아틀란티스의 운명을 바꾸려 했던 아틀란티스인의 야욕도 무산된다.

다만 자신의 예상대로 오르의 이상 현상으로 인해 나타난 인물이 자신이라면 오르가 모든 힘을 잃게 되었을 때 그때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육체를 점거했던 아틀란티스인이 오르와 함께 사라지는 것처럼 자신도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자신은 아틀란티스인을 막는 것이 아니라 저들을 도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갈등이 테세우스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결단은 이미 내렸다. 이상 현상이 발발하고 기억을 얻은 자신이 로마로 향하던 그때 이미.

하지만 심란한 마음까지는 테세우스도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예측이 사실인지 오해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존재 자체가 부정당할 수 있다는 데 심란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아틀란티스는 사라져야 한다. 리처드와 서후의 기억에서도 아틀란티스는 존재하지 않는 신화속 이름에 불과했다. 그것이 본래 역사다. 무엇보다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자 모든 이들을 영원히 노예로 부리려는 아틀란티스를 돕는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정체성을 말살하는 행동이다. 스스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동이다.

그럴 수는 없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세상으로부터 부정당하더라도 자신을 스스로 부정할 수는 없었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 자신의 이름에 걸맞은 행동이 아니다.

타인에 보기엔 카파도니아에서 로마로 이동한 것이 전부였겠지만, 테세우스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로마로 떠났다. 그 형언할 수 없는 무거운 심정은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오롯이 테세우스만의 것이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반드시 막으리라.

그런데 아틀란티스인은 자신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아니 알았다고 별수 없었으리라. 테세우스는 굳은 표정으로 나디르를 바라봤다.

차마 입을 열지 못하던 나디르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 아틀란티스 대륙을 발견했습니다. 이미······. 이미 융기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따라서 저마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나디르와 테세우스를 바라봤다. 그 마음 저편에 극심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음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테세우스 역시 침묵을 지킨 채 입을 열지 않았다.

오르는 세계 각지로 퍼졌다. 지중해 전역만 막아서 될 일이 아니었고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다만 지중해에 퍼진 오르만 처리해도 저들의 야욕을 분쇄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다.

‘어쩐지 저들의 저항이 약해진다싶더니 그래서였던가?’

히스파니아 지역이라고 왜 아틀란티스인이 없었겠는가? 테세우스와 그를 따르는 전사들에게 모조리 죽었을 뿐이다.

‘이미 아틀란티스 대륙이 융기한 이상 방어전은 의미가 없다.’

테세우스는 나디르에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배를 건조하고 해군을 육성할 것을, 아울러 아틀란티스 대륙이 출현할 지역의 탐사를 명했다. 당초 히스파니아로 온 이유 또한 단순히 자신의 영향력이 강해서가 아니라 이 지역이 아틀란티스 대륙 출몰 지역과 가까운 곳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달라진 건 없다. 앞을 가로막는 적은 그게 누구든 쳐부수면 될 뿐.”

테세우스의 담담한 말에 전사들은 아까와는 다르게 형형한 눈빛으로 그를 주시했다. 무신이라 불리는 테세우스와 함께라면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 사실이 저들의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나디르.”

“예!”

“배를 준비해라!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배와 병력을 동원해 아틀란티스로 간다. 그 땅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도륙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사비누스!”

“예. 하명 하십시오.”

“상황이 안정되는 대로 아틀란티스로 지원병력을 보낼 것을 각국에 보내라! 아틀란티스 대륙이 융기한 이상 힘들 것으로 보이지만, 사람 일이란 모르는 것이니 요청해서 나쁠 건 없겠지.”

“알겠습니다. 그리 전달하겠습니다.”

“준비해라. 패배하면 우리의 미래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너희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미래도 사라진다. 그러니 죽더라도 결코 쉽게 죽지마라! 알겠느냐?”

“예! 알겠습니다!”

“놈들을 찢어 죽이자!”

“와아아아아!”

“와아아!”

BC 68년 늦가을, 테세우스는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아틀란티스를 침공한다.

*

끝없이 늘어선 청동상과 중간중간 위치한 황금상, 화려하지만 부서진 석상들이 즐비했다. 오색으로 번쩍이는 갑옷을 걸친 병사들이 그곳의 거리를 활보하며 부서진 잔해를 치우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때 도시 전체에 커다란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뿌우우웅! 뿌우우웅!

그 소리에 병사들의 표정이 대번에 변하더니 저들은 급히 한 곳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쿵쿵쿵!

놀라운 것은 병사들 하나하나가 2m에 육박하는 거구들이었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거대한 자들로만 이뤄졌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흥! 감히 아틀란티스 대륙을 침공할 생각을 하다니.”

바다를 빼곡히 덮은 선단을 바라보며 오색 갑주를 걸친 장수가 비웃음을 터트렸다. 심지어 이들의 장수는 무려 3.5m에 이르는 거구였다. 이쯤 되면 이들 모두가 거인족이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생각보다 너무 빠르군. 저 방향이라면 히스파니아 지역에서 나타난 놈들인가?”

노예 놈들이 침공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기에 따로 대비하지 않았고 대비할 필요도 못 느꼈지만, 그렇다 쳐도 너무 빨랐다. 아틀란티스 대륙이 융기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장수는 눈매를 좁히며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과거 저열한 노예의 육체로 히스파니아 지역을 횡행할 때 나를 죽인 놈이 떠오르는군.”

“음? 무스타파 님을 말입니까? 아무리 이데아의 은총을 입지 않은 육체라고 해도······.”

아틀란티스인, 곧 아틀라스족은 이곳 아틀란티스 대륙에서 오르를 이용하면 노예의 육체라고 해도 본래 자신들이 지녔던 육체만큼 몸집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들 아틀라스족은 본래부터 거인족이었다.

“매우 뛰어난 놈이었지. 기묘한 놈이었어. 그만한 무예를 가진 자는 여태껏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듣기로 내 복수를 위해 달려들었던 자들도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더군. 재밌는 놈이지 않나? 왠지 모르게 저곳에 그놈이 있을 것 같군.”

무스타파는 메마른 입술을 혀로 핥으며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하. 아무리 대단한 놈이라고 해도 오리칼쿰으로 무장한 아틀라스족의 군대에 비할 수나 있겠습니까? 이름을 알려주시면 그 머리를 무스타파 님께 바치겠습니다.”

“아니. 아니 발견하면 산채로 데려와라. 놈이 두려워하며 죽는 것을 감상하고 싶군. 테세우스. 테세우스라고 했다.”

“테세우스?”

“왜 아는 놈인가?”

“히스파니아 지역에서 저희 아틀라스족을 많이 살해한 놈입니다. 놈에게 이를 가는 자들이 매우 많지요.”

“하하하하. 역시 살아있었나? 그럼 반드시 있겠군. 으하하하!”

무스타파는 진득한 살의가 배어있는 웃음을 목청이 터지라 터트렸다. 아틀라스족에게 붙잡혀 노역하고 있던 이들은 그 소리에 귀를 막을 지경이었다.

*

뱃전에 서서 아틀란티스 대륙을 바라보던 테세우스는 거대한 체구의 병사들이 여유롭게 서 있는 것을 확인했다. 거인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 테세우스는 미간을 좁히며 저들을 탐색하다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이 땅의 모든 것을 말살하기 전에는 살아 돌아갈 생각을 하지 마라! 너희의 땀! 너희의 피! 너희의 목숨! 너희의 모든 것을 불살라라! 나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테세우스가 앞에 설 것이니 두 다리가 없다면 두 팔로 기어서라도 나를 따를 것이며 두 팔도 없다면 이로 물어뜯어서라도 놈들을 죽여라!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와아아아아!”

“죽여라!”

둥둥둥! 둥둥둥!

첨벙!

얕은 바다에 뛰어든 테세우스는 라티우를 들고 오색빛을 내는 갑주를 걸친 거구의 병사들, 곧 아틀라스족을 향해 매섭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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