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4
294. 아틀라스.
294. 아틀라스.
주변에 모습을 드러낸 거인은 신장이 3m가 넘었던 디오클레스를 연상하게 만드는 거구였다.
그러나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그 디오클레스는 테세우스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디오클레스보다 월등하게 강한 기세를 발하는 놈이긴 하지만 어쨌든 테세우스가 겁을 집어먹을 사람이 아니란 건 너무나 명확했다.
테세우스는 창을 늘어뜨린 채 놈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라티우로 단번에 놈의 급소를 꿰뚫어 죽여버릴 심산이었다.
‘날이 많이 갈렸다. 놈들의 무기가 내가 가진 무기보다 성능이 뛰어나다는 소리. 그렇다는 말은······.’
일반 전사들의 무기는 놈들을 상대하기에 더욱 좋지 않다는 소리였다. 무기는 갈려 나가고 부숴져도 상관없다. 나중에 고치면 되고 바꾸면 되니까.
하지만 죽은 사람은 다시 살릴 수 없다.
아군을 수송한 선단은 다시 히스파니아로 돌아가게끔 명령을 내렸다. 더 많은 병력을 아틀란티스 대륙으로 수송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수가 무한하지는 않다. 아니 그 전에 선발대가 괴멸 수준의 타격을 입는다면 앞으로의 전투는 미래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1만. 고작 1만이다. 아틀란티스인이 고작 1만뿐일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테세우스는 향후 전투를 계획하며 놈을 바라봤다.
“테세우스! 네놈이로구나! 정말 네놈이었어!”
자신을 아는 것 같은 어투에 테세우스는 눈매를 좁히고 살펴보았으나 알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무스타파! 무스타파를 기억하는가? 내가 바로 그 무스타파다!”
“무스타파?”
왜 기억하지 못하겠는가? 그가 남긴 기묘한 금속, 비스무트를 들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까지 확인하러 갔던 장본인이 바로 테세우스인데 말이다. 다만 무스타파라니?
“그랬던 건가? 네놈 아틀란티스인이었군.”
무스타파가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여유롭던 모습이 기이했던 테세우스는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놈이 아틀란티스인이었다면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었을 테니까. 오르를 사용하면 육체를 점거해 언제든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 여겼을 테니까.
하지만 테세우스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오르를 통해 기억이 전승되는 것이 정말 생명을 이어가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은가 이 말이다. 일례로 테세우스, 자신은 항우, 리처드, 서후 세 사람의 기억을 이은 사람이지만 항우도 리처드도 서후도 아닌 다른 사람이다. 바로 테세우스 말이다. 한때는 본인을 서후라 여겼던 적이 있지만, 아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그러니 눈앞의 거인은 그저 무스타파의 기억을 이은 또 다른 사람일 뿐이다. 기억을 보존함으로 영원한 생을 유지한다? 글쎄. 자신이 보기엔 어리석음의 결정체나 다름없다.
‘아틀란티스인이 말하는 영원한 삶은 영혼을 다른 육체에 불어넣는 것이 아니라 아틀란티스 대륙 어딘가 각인된 아틀란티스인의 정보를 ‘오르’를 통해 육체에 새기는 것에 불과하다. 기억과 영혼은 엄연히 다르다. 기억은 영혼을 대신하지 못한다. 어떤 의미에선 고대인의 기억으로 고도로 세뇌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본인을 아틀란티스인이라 믿도록.’
그럼 이들이 아틀란티스인이 아니냐? 그건 또 아니었다. 어쨌든 저들은 스스로를 영원한 삶을 이어가는 아틀란티스인이라 확고하게 믿고 있었으니까.
테세우스가 보기엔 미몽의 굴레에 빠진 어리석은 자들이었지만, 대화나 이성으로 풀 수 있는 일은 분명 아니었다. 이 모든 미몽의 시작은 정체불명의 힘 ‘이데아’로부터 비롯된 것이니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아니 이데아의 영향력을 제거하기 전에는 그 미몽에서 벗어나게 만들 방법이 없었다. 이에 테세우스의 목표는 점점 더 명확해졌다.
“크크크. 기억하는군. 그래! 나는 위대한 아틀라스의 무스타파다. 네놈을 만나길 학수고대해왔다. 네놈의 목숨을 취할 날을 말이다!”
“나는 너를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테세우스는 눈앞의 무스타파는 본적이 없다. 현재 그를 대면하고 있지만, 역시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이 자리에서 죽여버릴 테니까.
아틀란티스 대륙이 융기한 이상 무스타파의 기억을 가진 자가 다시 나타날 수도 있지만, 엄연히 별개의 존재다. 아니 다시 나타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모든 아틀란티스인, 곧 아틀라스족을 말살시키기로 굳게 결심했으니 그게 누가 되든 도륙할 뿐이다.
“뭐라?”
테세우스는 무스타파가 반문하거나 말거나 땅을 박차고 그에게 짓쳐 들었다. 놈이랑 잡담하고 있을 시간 따위는 없다. 죽이면 기력이 회복되는 능력은 오히려 전보다 더 강해진 것으로 보이니 지칠 이유가 없고 지금도 아군은 아틀라스족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그러니 놈이 오지 않는다면 직접 가서 죽인다.
순식간에 무스타파에게 다다른 테세우스는 라티우로 반원을 그리며 라티우의 허리를 베어갔다.
부우우웅!
오르를 통해 아틀라스족에 비견되는 육체로 성장시킨 무스타파는 패배를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하지만 테세우스와 전투를 치러본 적이 있던 무스타파였기에 그를 경시하는 마음은 품지 않았다. 예전 기억도 기억이지만 아틀라스 병사를 베어버리는 모습만 봐도 경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무스타파는 오히려 그 사실이 마음을 즐겁게 만들었다. 보복할 즐거움이 있는 적수가 아닌가 이 말이다.
“크흐흐흐. 네놈은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무스타파 역시 들고 있던 창을 휘둘러 테세우스의 라티우를 맞이해왔다.
카앙!
이윽고 창과 극이 청명한 소음을 내며 허공에 울려 퍼졌다.
무스타파는 당연히 자신의 창이 테세우스의 무기를 밀어낼 것으로 판단했다. 아무리 힘이 강해도 체형에 따른 평균이 있는 법이다. 어린아이가 아무리 단련해도 단련하지 않은 성인보다 힘이 셀 수는 없다.
테세우스와 무스타파의 차이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무스타파의 힘이 더 강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설혹 힘이 비등하더라도 무기에 실린 체중을 생각하면 테세우스가 밀리는 것이 정상이다.
물론 무스타파가 온 힘을 다해 휘두른 건 아니었지만, 이런 결과가 나타났다는 건 실로 많은 것을 시사했다. 따라서 무스타파는 대번에 표정을 굳히며 한 발자국 정도 가볍게 물러섰다.
물러서며 힘을 비축한 무스타파는 창을 거둠과 동시에 벼락같이 내질렀다.
부우우웅
무스타파의 창은 테세우스의 가슴 중앙을 향해 날아갔다. 머리나 목젖이 치명적인 급소이기는 하나 타격면적이 협소한 만큼 수비자가 그만큼 공격을 회피하기도 쉽다. 당연히 자신의 공격을 쉽게 피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진 않는다.
하지만 막상 손을 나눠보니 피하지 못할 것이라 여기는 것이 더 비현실적인 추측이었다. 따라서 무스타파는 테세우스가 피하더라도 더 큰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는 부위를 노렸다.
*
창과 극이 맞부딪친 순간, 무스타파의 창이 뒤로 슬쩍 밀렸고 무스타파는 그 즉시 체중을 뒤로 옮겼다가 다시 창에 그 무게를 실어 가슴을 향해 내질렀다.
실로 기민한 움직임이었다. 손해를 입은 것을 확인하기 무섭게 물러섰고 그 물러섬은 역습을 위한 준비 시간을 마련했다.
심지어 그 찰나에 신장 차이까지 제대로 활용하고 있었다. 창을 위로 내지르는 것보다 아래로 내지르는 것이 훨씬 더 강맹한 위력을 지닌다. 체중을 실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중력의 도움까지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성벽 위의 병사가 성벽 아래의 병사보다 유리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기병의 돌격이 무서운 이유 중 하나 역시 보병보다 높은 곳을 선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던가?
한 발자국 물러선 것만으로 충분한 추진력을 얻기는 어려웠겠지만, 무스타파는 신장 차이로 인한 우위를 활용해 그 부족함을 메웠다. 실로 절묘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무신이라 불리는 사내였고 이와 같은 별호에 충분히 걸맞은 사내였다.
무스타파가 한 발자국 물러선 순간, 테세우스는 오른발의 뒤꿈치가 바깥으로 향하게끔 땅을 강하게 박찼다.
쐐에에엑!
테세우스의 몸은 그 오른발을 축으로 빠르게 회전했고 무스타파의 창은 회전하는 테세우스의 가슴팍을 스치고 지나갔다. 놀랍게도 무스타파가 물러서는 순간 이미 무엇을 노리고 움직인 것인지 예측한 것이다.
“흥!”
하지만 무스타파 역시 회피할 것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코웃음을 터트리며 내지른 창을 다시 회수함과 동시에 섬전(閃電)처럼 여러번 내질렀다.
훙! 훙! 훙!
무스타파의 창은 테세우스의 몸을 당장에라도 찢어발길 것처럼 매섭게 날아들었다.
그러나 테세우스는 벼락이 내리꽂히는 것처럼 날라오는 무스타파의 창을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한 마리 연어처럼 유려하게 피해냈다. 그렇게 테세우스는 벼락의 숲을 거침없이 헤집고 들어가 기어코 그 숲의 거대한 나무를 베어났다.
까가강!
무스타파는 대경한 표정으로 분분히 물러서며 목 아래 갑주에 선명하게 새겨진 흔적을 바라봤다. 오리칼쿰이 예리하게 갈라져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오래되었다고는 하나 그 오리칼쿰이 말이다.
급히 물러서지 않았다면 잘려나가는 것은 오리칼쿰이 아니라 자신의 목이 되었을 것이다.
“테.세.우.스. 이노옴!”
이에 무스타파는 자존심에 극심한 상처를 입었다. 지난날 테세우스에게 죽임을 당했을 때에도 여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방심한 탓에 당한 부분도 있었고 본래의 힘을 되찾으면 테세우스를 단번에 베어버릴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예전 아틀라스족의 육체와 비견되는 육체를 얻었고 이번엔 전처럼 안일한 마음으로 테세우스를 상대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궁지에 몰린 건 테세우스가 아니라 무스타파, 본인이었다.
혹 그때 자신만만했던 자신의 판단이 틀렸던 것일까? 아니 그건 틀리지 않았다. 단지 놈이, 테세우스가 자신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발전했을 뿐이다. 테세우스가 예전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놈의 머리는 이미 땅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이 무스타파의 자존심을 크게 건드렸다. 길어야 10년은 되었을까? 아니 10년도 너무 길다. 그 짧은 세월 동안 테세우스는 모든 부분에서 우위에 있던 자신을 넘어설 정도로 발전한 것이다.
투구 속, 형형하게 빛나는 테세우스의 눈빛에서 별다른 긴장감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무스타파로 하여금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의 눈빛은 시종일관 무심했고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적진을 홀로 돌파하여 사실상 아군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적의 감정 따위는 테세우스에게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적이 분노하든, 좌절하든, 공포에 질렸든 알게 뭔가? 적의 감정을 파악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지만 그 모든 것은 오직 적을 분쇄하기 위한 용도일 뿐이다.
두려움은 말할 것도 없고 적이 분노를 터트린다면 그것 역시 좋다. 적이 감정을 분출하는데 사용한 그 찰나의 시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니까.
테세우스는 분통을 터트리는 무스타파에게 바람처럼 쇄도해 라티우를 휘둘렀다. 그에게서 흥분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얼음장보다도 차가운 눈빛이 투구 속에서 요요히 빛날 뿐이었다.
훙후훙!
치명적인 급소를 향해 날아오는 테세우스의 공격에 무스타파는 분통을 마저 터트리지도 못하고 방어하기 급급했다. 누가 봐도 무스타파가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급소를 보호한 오리칼쿰 갑주 곳곳이 형편없이 부서졌다.
“이 노예 놈이!”
“무스타파 님을 보좌해라!”
그때 후미에 있던 다른 지휘관이 급히 명령을 내렸고 그와 동시에 테세우스를 둘러싸고 있던 아틀라스 병사들이 테세우스를 향해 창을 내질렀다.
무스타파 뒤쪽에서는 3m에 육박하는 거구들이 사나운 기세를 발하며 짓쳐 들고 있었다. 그들은 누가 봐도 무스타파의 호위대처럼 보였다.
기다란 창이 좌우 측면과 후방에서 한꺼번에 내질러졌다. 이에 무스타파를 거침없이 압박하던 테세우스는 휘두르던 라티우를 휘두르던 기세 그대로 놓아 무스타파를 향해 집어 던졌다.
붕붕붕붕!
이에 라티우는 테세우스의 강한 힘으로 인해 맹렬하게 원을 그리며 무스타파를 향해 쇄도했다.
“이놈이!”
무스타파는 대결에 끼어든 병사들의 모습에 다시 분노했지만, 그보다도 흉흉하게 날아드는 테세우스의 무기를 처리하는 것이 우선이라 창을 강하게 휘둘러 창을 튕겨냈다.
그러는 사이 테세우스를 향해 내질러진 아틀라스 병사들의 창은 테세우스 몸 지척까지 다다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