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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 만물상점-8화 (8/167)

<-- 8화 : 오빠가 그럴 리 없어-01 -->

미현이 집에 온 것은 6시 직후였다.

오늘은 보충수업이 없어서 그동안 밀린 빨래를 하는 날이었다. 그리고 청소도 하고 내일 아침에 먹을 밥까지 하려면 시간이 없었다. 7시까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미현은 이제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이지만, 나이에 비해 일찍 철이 든 편이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세상 걱정 모르고 공주처럼 살았었다.

한 번도 자신의 손으로 밥을 하거나 청소를 한 적이 없던 미현이었기에 처음에는 실수가 많았다. 밥을 태운 건 물론이고 음식의 간도 짜고 매워서 먹기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제법 능숙해진 상태였다.

콩나물 무침이나 시금치 등 나물을 만드는 게 가장 쉬웠고, 김치 담그는 것도 이제 어렵지 않았다.

미현은 중학교 때까지 전교 10등 안에 들 정도로 공부를 잘했지만, 올해 인천으로 이사를 오고 학교도 전학을 오면서 성적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공부할 만한 환경도 아니었지만, 미진의 뒷바라지를 위해 일찌감치 대학을 포기했던 것이다.

성혜가 혼자서 힘들게 일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쉬운 게 아니었다.

성혜는 몸이 약해서 잔병치레가 많았다.

그런 그녀가 요즘엔 아침 일찍 출근을 해서 밤 12시에 집에 돌아오고 있으니, 보는 것만으로도 안쓰러워 미칠 것 같았다.

그래서였다.

미현은 3년을 더 공부해야 하지만, 미진은 겨우 1년밖에 남지 않은 상황.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지금부터 미진의 등록금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미진은 모르는 일이었다.

아마 미진이 알면 펄쩍 뛸 것이 뻔했다.

지금도 미진은 충분히 미현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사실 지난달까지만 해도 미진이 대학을 포기하고 취업을 해서 돈을 벌겠다는 것을 미현이 간신히 막았다.

일단 언니가 먼저 대학에 가면 2학년 때부터 열심히 공부를 해서 자신도 꼭 대학에 가겠다는 말로 미진을 설득했던 것이다.

하나 현실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대학생이 세 명이나 있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시기적으로 그랬다.

동하가 내년에라도 군대를 가면 미현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해서 복학하게 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동하와 미진, 그리고 미현까지.

세 남매가 동시에 대학을 다녀야 하는 것이다.

인생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동하가 대학을 포기하면 미현도 대학에 가겠다는 꿈을 꾸겠지만, 애당초 동하는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이었다.

한없이 착하고 속이 깊은 미현이지만, 동하만 생각하면 열불이 치밀어 올랐다.

한창 꿈이 많을 나이였다.

당연히 미련이 남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미현은 별 불만이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당장 학교를 때려치우고 본격적으로 돈을 벌고 싶었지만, 그건 절대 미진이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아서 억지로 참고 있었다.

“아무래도 밥은 못 먹고 가겠지?”

배도 고프고 날도 더워 몸이 끈적거렸다.

하지만, 밥을 먹을 시간이 없어서 12시가 되기 전까지는 굶어야 할 것 같았다. 그나마 편의점에 가면 날짜가 막 지난 빵이나 햄버거는 먹을 수 있는데, 저녁을 먹지 못한 날은 그렇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미현이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주택의 뒤쪽으로 걸어 돌아갔다. 반지하 방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었다.

“응?”

문득 미현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작은 마당에 빨래들이 널려 있는 게 보였던 것이다.

“언니가 왔나?”

원래 미현이 해야 할 빨래들이었기에 가장 먼저 미진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험 기간이 아닌지라 미진이 일찍 왔을 리 없었다.

“그럼, 엄마가 일찍 오셨나?”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성혜는 요즘 부쩍 힘들어서 밤에 잠을 잘 때 무의식중에 신음을 흘리곤 했었다.

그런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미현은 하루만이라도 쉬라고 했었는데, 성혜는 악착같이 아픈 몸을 이끌고 출근하곤 했다.

“엄마도 참.”

아파서 일찍 왔으면 그냥 쉴 것이지 빨래는 왜 한 건지 속이 상했다.

미현이 문을 열고 성혜를 불렀다.

“엄마!”

하지만, 이내 그녀는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반지하 골방은 10평 규모의 크기에 주방이 딸려 있었다. 때문에 문을 열면 주방부터 골방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동하가 주방에서 한창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오, 오빠!”

☆ ☆ ☆

그리운 얼굴이었다.

이렇게 살아서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단지 미현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동하는 마음이 찌르르 울리고 당장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무언가 속에서 울컥하고 치밀어 올랐다.

이미 머릿속에는 미현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몇 가지를 골라 놓고 연습을 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결국 동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동하는 미현이 눈치 채지 못하게 소매로 눈가를 쓱 한 번 훔치고 말했다.

“학교 갔다 오니?”

여전히 미현에게 등을 진 상태였다.

마음 같아서는 미현을 끌어안고 한바탕 울고 싶었지만, 동하는 최대한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있었다.

“응? 응!”

미현이 조심스럽게 대답하면서도 선뜻 방 안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마음 한쪽에 동하를 원망하는 마음이 컸다.

또한 친남매 사이면서도 모르는 사람보다 더 어색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동하가 그녀를 돌아보며 웃었다.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슬렀고, 한결 가벼워진 상태였다.

“미현아, 배고프지? 조금만 있으면 다 되니까 일단 씻고 와.”

흠칫!

미현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동하를 쳐다보았다.

“뭐하고 있어? 어서 씻지 않고?”

“오, 오빠! 무…… 무섭게 왜 그래?”

미현의 얼굴은 정말로 겁에 질려 있었다.

그녀에겐 강도가 칼 들고 위협을 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지금 동하의 행동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동하가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항상 욕을 달고 살았던 동하였기에 미현을 부를 때면 이름 대신 “야, 이년아!”를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친여동생에게 ‘쌍년!’이라고 부른 적도 많았다.

당연히 밥상을 차려 준 일도 없었다.

아니, 밥상을 차리는 건 항상 막내인 미현이었고, 반찬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동하는 밥상을 엎기 일쑤였다.

진상도 그런 진상이 없었다.

때문에 미현은 밥에 물을 말아 먹을지언정 동하에게는 계란말이나 소시지 등이 있어야만 했다.

그러니 무서울 수밖에.

지금만 해도 그랬다.

동하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저러는지 몰라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서, 설마 내가 아르바이트 하는 것을 알고 돈을 빼앗으려는 걸까?’

동하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미현이 돈을 주지 않으면 때려서 빼앗아갈 인간이 동하였다.

미현은 방에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에휴!’

동하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마음 한편으로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했다.

여동생이 이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개망나니처럼 살았다는 것인가?

정말 갈 길이 멀다는 느낌이 들었다.

“날이 더워서 시원한 김치말이 국수 했다. 하지만, 맛은 보장 못해!”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 동하의 모습에 미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김치말이 국수가 무슨 음식인지 언뜻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미현은 따듯한 국물만 알고 있지 시원한 김치말이 국수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하지만, 지금 따듯한 국물이니 시원한 국물이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동하가 음식을 했단다.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이건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일이었다.

어쩌면 역설법이라고 자신에게 뭔가 해코지하기 위해 일부러 웃고 다정하게 말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엄마!”

미현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도망치듯 밖으로 빠져나갔다.

조금씩 휴대폰이 대중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동하의 반지하에는 그 흔한 유선전화조차 없었다. 전화를 하려면 주인집에 양해를 구하고 써야 하는 것이다. 급한 일이 아니면 전화를 쓰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다급한 상황이었다.

“어, 엄마!”

“미현아,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엄마가 바빠서 통화를 하지 못할 것 같구나!”

“엄마, 큰일 났어. 오빠가 이상해!”

“그게 무슨 소리야? 오빠가 이상하다니?”

“오빠가 계속 나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얘길 한단 말이야.”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런 말을 듣고 피식 웃음이 나와야 한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하지만, 성혜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느껴졌다.

“호, 혹시 동하가 너 아르바이트하는 걸 안 거니?”

성혜 역시 동하가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그런 건 모르겠지만, 엄마가 당장 와 봐야 할 것 같아.”

“미현아. 지금은 엄마가…….”

이제 막 6시가 되어가기 때문에 한창 바쁜 시간이었다.

곤혹스럽게 말하는 성혜에게 미현이 쐐기를 박았다.

“엄마! 오빠가 음식을 했단 말이야.”

“뭐, 뭐라고? 동하가 뭐를 해?”

“음식이라구, 음식! 그것도 나를 주겠다고 음식을 했단 말이야.”

“맙소사!”

성혜는 눈앞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평소의 동하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갑자기 무서운 생각마저 들었다.

“미현아, 엄마가 당장 갈 테니까 가급적 오빠 곁에 가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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