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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드 만물상점-9화 (9/167)

<-- 9화 : 오빠가 그럴 리 없어-02 -->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데 40분이 걸렸다.

퇴근길과 겹쳐서 평소보다 10분 이상 더 걸린 셈이었다.

버스가 신호등에 한 번 걸릴 때마다 성혜는 초조와 두려움에 어쩔 줄 몰랐다.

성혜의 머릿속에는 온통 안 좋은 생각들만 떠올랐다.

일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다.

미진은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서 방학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서 겨우 학원비를 마련했었는데, 그걸 동하가 알고 강제로 빼앗아간 것이다. 당연히 미진이 돈을 주지 않으려고 했고, 화가 난 동하가 주먹으로 미진의 얼굴과 배를 때렸다.

한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위급한 상황이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어서 더 무섭고 두려웠다.

동하는 지금까지 손에 물 한 방울 묻혀본 적이 없었다. 자기 손으로 라면 한 번 끓여 먹은 적이 없던 동하였다.

그만큼 성혜가 동하를 너무 귀하게 키운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 동하가 엇나갔는지는 몰라도 지금 동하가 음식을 하고 있다는 건 결코 정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성혜는 지금도 충분히 힘들고 괴로웠다.

그나마 미진과 미현 때문에 간신히 버티고 있는데 여기서 동하가 또 다시 사고를 치면 그땐 성혜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미현이는 이제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기에는 너무 착하고 예쁜 아이였다.

하지만, 왠지 동하가 벌써 미현이를 때리고 돈을 빼앗아갔을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반지하 골방으로 들어섰다.

“미현아!”

성혜가 문을 벌컥 열었다.

하지만, 단칸방에는 그녀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 턱 하니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

식탁은 그리 크지 않았고, 다리를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낡은 식탁 위에는 세 그릇의 김치말이 국수가 있었다.

빨간 김치 국물에 고명은 김치를 작게 썬 것이 전부였다.

원래 조미김을 부셔서 넣으면 더 맛있겠지만, 지금 형편에 조미김을 사서 넣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동하는 이 정도만 해도 맛은 충분하다 생각했다.

“어머니!”

동하는 다시 한 번 울컥하는 마음을 가까스로 참고 성혜를 쳐다보았다.

그립다 못해 사무치게 보고 싶던 성혜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 보게 된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감격스러웠다.

“어, 엄마!”

미현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처음 성혜에게 전화를 걸 때만 해도 그녀는 겁에 질려 있었다.

하지만, 식탁이 차려지고 세 그릇의 김치말이 국수가 모두 차려진 모습을 보았을 때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비주얼만 보면 정말 그럴듯한 음식처럼 보였다.

물론 동하의 말처럼 맛은 당연히 없을 것이다.

그래도 지금 분위기만 보면 동하가 뭔가 나쁜 짓을 할 것 같진 않았다.

그것이 못내 이상하긴 했지만, 괜히 성혜에게 전화를 해서 난리법석을 떤 건 아닌지 후회가 일었다.

성혜를 부른 것 때문에 동하에게 혼날 줄 알았는데, 동하는 오히려 따듯하게 웃어 주며 국수를 한 그릇 더 만들었다.

그런 동하의 모습이 영 적응이 되지 않는 미현이었다.

분명 평소와는 너무 달랐다.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부터가 따듯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한 번도 그런 동하의 모습을 본 적이 없던 미현이었기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겨우 한 번으로 지금까지 개망나니 동하의 모습을 지우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 어쩌면 저런 모습도 일부러 연출한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이게 다 어떻게 된 거니?”

성혜는 눈빛으로 미현에게 물었다.

하지만, 모르기는 미현 역시 매한가지여서 고개를 흔들었다.

성혜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식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동하가 사고를 치지 않은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미현이 무사한 것을 보고 가장 먼저 안도의 한숨부터 나왔으니 말 다한 셈이었다.

그렇다고 안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아직 동하의 의도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모의 마음이 다 그렇듯 성혜는 왠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집안이 망하고 더 난폭해지고 삐뚤어지던 동하였기에 공중에서 외줄 타기하듯 항상 조마조마하던 성혜였다.

성혜는 모든 게 자신의 잘못처럼 느껴졌다.

유학가기 전까지만 해도 동하가 저 정도의 망나니는 아니었었다.

그때 동하 혼자 유학을 보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괜히 친구들 말만 듣고 부러워서 동하만 딸랑 보낸 것이 실수였다.

동하만 보면 눈물이 나오는 성혜였다.

장남이 잘되어야 집안이 잘되는 법인데, 이건 어떻게 된 것이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를 치고 나쁜 짓을 일삼고 있으니 억장이 무너질 만했다.

그래도 성혜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이제나저제나 동하가 마음을 잡고 착실하게 살까 싶어 매일 기도하고 있었다.

“동하가 물국수를 했구나!”

성혜가 말과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았다.

“김치말이 국수래요.”

미현이 대신 말했다.

아르바이트를 나가려면 시간이 없었다.

원래는 국수를 먹지 않고 그냥 가려고 했지만, 그러기에는 동하의 보복이 너무 무서웠다. 물론 생전 처음 음식을 한 동하의 성의를 무시하기도 힘들었다. 그렇다고 성혜가 오지 않은 상태에서 혼자 먹기도 그래서 계속 기다렸던 것이다.

“김치말이 국수?”

성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음식이 있던가?

따듯한 국물이면 몰라도 이건 척 봐도 시원한 국물이었다.

물론 여름이 되면 국물을 시원하게 만들어 먹기도 했지만, 그러자면 호박과 숙주나물 등 몇 가지 고명이 들어가야 맛있는 법이다.

한데, 이건 김치가 전부였다.

더구나 육수에 김치 국물을 섞은 거 같은데 이런 식으로 하면 국물이 텁텁해지고 물국수 고유의 맛이 사라지게 된다.

‘하긴, 동하가 음식을 한 적이 없으니 뭐 당연한 일이겠지.’

성혜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사고를 치지 않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미현이 무사한 걸 보고 하늘에 감사 기도를 했을 정도였다.

그녀는 맛이 없어도 맛있게 먹어 줄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으로 한 젓가락 떠서 먹었다.

☆ ☆ ☆

동하는 자취 경력이 10년이 넘었다.

물론 이전 생애에서였지만, 불구자의 몸으로 비참하게 10년 이상 살았던 동하는 어지간한 음식은 다 할 수 있었다.

김치말이 국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냉면 육수는 처음 만들어본 것이지만, 그래도 맛은 어느 정도 자신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지금은 고작 김치말이 국수가 전부였지만, 나중에는 가족들이 돈 걱정하지 않고 호강시켜 주겠다고 다짐했다.

“어머니, 어떠세요?”

“그, 그게…….”

성혜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맛에 성혜의 움직임이 멈춰 섰다.

평소 먹던 물국수 맛이 아니었다.

일단 육수부터가 달랐고 김치 국물이 들어가서 텁텁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그것 때문에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이건 식당에서 팔아도 될 것 같아.’

성혜는 멍하니 동하를 쳐다보았다.

부엌에 음식을 만들었던 흔적들이 없었다면 어디서 사 온 음식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엄마, 맛이 어떤데 그래?”

저렇게까지 아무 말도 못할 정도면 정말 맛이 없는 것 같았다.

미현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김치말이 국수를 노려보았다.

마치 눈앞에 사약을 앞둔 사람처럼 저걸 먹어야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국수를 몇 가닥 먹었다.

“으응?”

미현도 깜짝 놀라 동하를 쳐다보았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맛이었다.

이렇게 심플한 비주얼에서 어떻게 이런 환상적인 맛이 나올 수 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원래 그녀는 딱 한 젓가락만 먹고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그냥 나가려고 했었는데, 전혀 생각지 못했던 맛에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오, 오빠! 너무 맛있어요.”

“다행이네. 미현아, 많이 먹어라.”

지금까지 미현이 자신 때문에 극도로 긴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따듯하게 웃어 주어도 미현은 여전히 경계의 눈빛을 풀지 않았다.

동하는 그녀의 불신을 하루 이틀만에 풀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줄 날이 올 터였다.

동하도 국수를 먹었다.

‘흐음. 식초를 조금 더 넣어야 되는구나! 신맛이 약간 부족해. 그리고 설탕은 조금 덜 넣으면 딱 좋겠군.’

그래도 처음 만든 냉면 육수가 이 정도면 성공이라 할 수 있었다.

“미현아, 너 빨리 먹어야 하지 않아? 아르바이트 가야 한다며?”

“아차, 그랬었지.”

미현은 그때까지도 멍한 표정으로 동하를 쳐다보고 있다가 동하의 말에 화들짝 놀라 김치말이 국수를 폭풍 흡입했다.

그렇게 2분이 채 지나지 않아 국수는 물론이고 국물까지 싹싹 비웠다. 헌데도 여전히 부족한지 입맛을 다셨다.

동하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양이 부족한가 보구나! 오빠 거라도 더 먹을래?”

“헤헤! 아니에요, 오빠! 이제 아르바이트 가야 될 시간이라서…….”

눈치를 보면 더 먹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집안이 망한 이후 이런 별미를 먹어 본 게 지금이 처음이었다.

한창 성장할 나이인 미현에게는 참기 힘든 유혹이었다.

하지만, 선뜻 동하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여전히 동하의 의도를 몰라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들었다.

“괜찮아! 오빠는 별로 배가 고프지 않거든.”

동하는 자신의 그릇에 있던 국수를 절반가량 덜어 주었다.

미현은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다 성혜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냥 먹으라는 눈짓을 하고서야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또 한 그릇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운 미현은 잘 먹었다는 말과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러 밖으로 나갔다.

그 사이에 성혜도 그릇을 완전히 비운 상태였다.

배가 터질 것 같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자신의 아들이 처음으로 해 준 음식이었다.

아무리 배가 불러도 국물 한 방울 남길 수 없었다.

그녀는 물어보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일단 동하의 말투부터 이상했다.

분명 어제만 해도 상스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오늘은 의젓해도 너무 의젓했다.

동하의 입에서 ‘어머니’란 말은 난생 처음 듣는 소리였다.

눈빛도 차분하게 가라앉아서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어디 그뿐인가?

평생 손에 물 한 방울 묻혀본 적이 없는 동하가 성혜도 모르는 김치말이 국수를 어떻게 알고 한 것이며, 먹던 국수를 미현에게 덜어 준 자상함까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성혜는 왠지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동하가 계속 이런 모습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평생의 소원이었다. 생각만 해도 무언가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은 안심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동안 동하의 모습이 너무 개차반이었다. 그래도 성혜는 속내를 숨기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동하의 음식 솜씨가 이렇게 좋은 줄 몰랐구나!”

“어머니도 맛있게 드셨습니까?”

“맛이 있다마다.”

동하가 처음 만들어 준 것이라 맛있는 게 아니었다.

익숙한 듯하면서도 색다른 맛에 온몸이 절로 반응할 정도였다.

“그, 근데 동하야! 혹……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사람이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착해진다는 말이 있다.

성혜는 혹시 동하가 불치병에 걸린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벌써부터 눈가에 눈물이 맺히려고 했다. 아무리 못난 아들이라도 자식은 자식이었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어머니!”

동하는 진땀을 흘리며 성혜를 안심시켜야 했다.

하지만, 자신이 죽었다가 회귀를 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말을 해도 믿어줄 리 없겠지만, 그러자면 9성급 S몬과 함께 죽었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이건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허황된 소리였다.

‘그나저나 김치말이 국수가 생각보다 반응이 좋네.’

동하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무언가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갔다.

괜찮은 사업 아이템이 떠올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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