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영업의 신-03 -->
학교 축제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그리고 동하는 일상으로 돌아가 수련에 매진했다.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갔다.
순식간에 열흘이란 시간이 지났다.
동하는 매일 새벽마다 뒷산에 올라 운기행공을 하고 백보신권을 수련했다.
백보신권은 수련을 할 때마다 위력이 점점 더 강해졌다. 무엇보다 동작과 자세가 능숙해지면서 모든 초식이 물 흐르듯 펼쳐졌다.
첫째 날은 5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조그만 돌멩이 하나 으스러뜨리지 못했지만, 열흘이 지난 지금은 10미터 정도 떨어진 아름드리 소나무를 쓰러뜨렸다.
하지만, 좋아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적어도 3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나무를 쓰러뜨려야 진정한 백보신권이라 할 수 있었다.
동하는 이제 겨우 시작인 셈이었다. 지금은 10미터 떨어진 소나무를 겨우 쓰러뜨리는 수준이지만, 다음 필드까지는 10일 정도가 남아 있어서 백보신권을 좀 더 끌어올릴 시간적인 여유는 충분했다.
동하는 백보신권까지 수련이 끝나면 산을 내려와 1시간 정도 동네를 달렸다.
그리고 곧장 헬스장에 가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근육을 단련 했다. 이제는 벤치프레스나 스커트의 무게가 비약적으로 올라갔지만, 주변에 보는 눈이 많아서 무턱대고 무게를 높일 수도 없었다.
대신 횟수를 늘리는 방식으로 부족한 운동을 채웠지만, 사실 2시간 정도 웨이트 트레이닝을 마치고 나와도 별로 힘이 들지 않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혼자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는 것인데, 현실적으로 지금은 무리였다.
마법을 따로 수련하지는 않았다.
집으로 귀환한 다음날 마나심법을 운용해 봤었는데, 마나가 부족해서인지 제대로 수련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오전을 수련과 운동으로 보내고 오후가 되면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들었다.
일종의 학점관리인 셈이었다.
몬스터들이 침공하기 전까지 군대에 가지 않으려면 학교에 남아 있어야만 한다.
학점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취업을 할 생각도 없었고, 장학금 받을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동하는 그저 F학점만 안 받을 생각으로 적당히 공부하고 적당히 수업을 들었다.
동하가 지금 한창 역점을 두고 있는 건 역시 잉크 사업이었다.
그는 지난 10일 동안 여의도와 종로. 그리고 테헤란로 등을 돌며 다섯 곳의 대기업 본사에 들어갔고, 다섯 개 기업 모두 성공적으로 잉크와 토너를 쓸어왔다.
영업의 신의 효과는 기대했던 것보다 더 탁월했다.
처음에는 잡상인 취급을 하던 사람들도 막상 영업의 신을 복용하고 다시 가서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동하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업의 신이 만능은 아니었다.
무작정 말만 잘 한다고 믿음이 높아지고 신뢰가 커지는 것이 아니었다.
동하는 몇 번의 경험을 통해 새롭게 알아낸 사실이지만, 상대에게 음료수 등을 주며 친근하게 다가가면 호감도가 좀 더 높아졌고, 상대의 고민을 들어주거나 기분을 맞춰주면 기하급수적으로 호감도가 상승했다.
그렇게 성의를 보인 이후에는 여지없이 동하에게 잉크와 토너를 주었다.
어차피 그쪽 회사에서는 그냥 두면 내다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니 동하에게 주던 쓰레기장에 버리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동하가 처음에 들어간 곳은 재계서열 90위 안에 들어가는 건설 회사였다.
그리고 두 번째 회사는 70위였다.
동하는 그런 식으로 조금씩 순위를 높여 다섯 번째엔 30위 회사까지 들어가 잉크를 수거했다.
회사의 규모가 클수록 수거할 수 있는 잉크와 토너의 양도 덩달아 많아졌다. 그리고 영업의 신을 어떻게 사용해야 그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지도 확실하게 알아냈다.
“아니, 오늘은 어딜 들어갔기에 잉크와 토너가 이렇게 많나?”
“신성그룹 아시죠?”
“정수기와 학습지 등으로 유명한 그곳?”
“예, 오늘은 신성그룹 본사에 들어갔다 나왔거든요.”
“세상에…….”
김명한은 할 말을 잊었다.
신성그룹은 재계서열 30위 안에 든다.
어지간한 사람은 심장이 떨려서 들어갈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김명한은 며칠 전에 동하가 찾아왔을 때만 해도, 잘생긴 청년이 과연 얼마나 버틸까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동하를 보며 로또 맞은 것처럼 기뻐했다.
잘해도 너무 잘했다.
동하가 가져오는 잉크와 토너의 양은 그의 상상을 초월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혼자서 처리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도저히 김명한 혼자서 처리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그는 수도권과 지방에 있는 인맥을 총동원해서 그 양을 처리해야만 했다.
이제 조금씩 잉크 충전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고, 시장 규모도 해마다 성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리필 잉크를 찾는 손님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는 추세였다. 마침 그럴 때 동하가 나타난 것이었다. 잉크 충전방이 조금씩 요동치기 시작했다.
☆ ☆ ☆
한 달에 딱 한 번.
동하의 가족들이 다 모이는 날이 있다.
그건 매달 첫 번째 일요일로, 그날은 바로 성미의 식당이 쉬는 날이었다. 미진은 학교에서 공부하다 5시 정도가 되면 집으로 돌아왔고, 미현도 그날만큼은 아르바이트를 쉬었기 때문에 매달 첫째 주 일요일은 가족들이 유일하게 함께하는 날이 되었다.
동하는 저녁에 가족들을 데리고 패밀리 레스토랑을 찾았다. 예전에는 자주 외식하던 곳이었지만, 지금 형편으로는 감히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성혜는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동하야, 우리 형편에 무슨 외식이니? 그냥 집에서 밥이나 먹자꾸나!”
아무리 적게 먹어도 10만 원은 기본으로 깨질 게 뻔했다.
“괜찮아요, 어머니. 제가 요즘 일을 좀 하거든요.”
“네, 네가?”
“오빠가? 지금까지 일한 적 한 번도 없잖아?”
서프라이즈한 수준을 넘어 내일 서쪽에서 해가 뜰 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다.
“오빠, 농담이지?”
“요즘 학교에 다니고 있지 않았어?”
“자자, 자세한 얘기는 저녁을 먹으면서 하고, 일단 자리에 앉자.”
동하는 며칠 전에 예약해 두었기 때문에 기다리지 않고 바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미진과 미현은 주문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걱정하며 성혜의 눈치를 보았다. 일을 하고 있다는 동하의 말을 들었음에도 선뜻 그 말을 믿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나원, 참.”
동하는 가볍게 혀를 차고 대신 음식을 주문했다. 원래 미진과 미현은 이런 음식들을 좋아 했다. 지금은 형편이 어려워서 감히 먹으러 갈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는데, 눈치를 보면 무척 먹고 싶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동하는 그녀들을 생각해서 포크 립과 스테이크. 파스타 등을 잔뜩 시켰다.
“무, 무슨 음식을 이렇게 많이 시켰어?”
“너희들 이런 거 좋아하잖아.”
“그, 그렇긴 하지만…… 돈이 많이 나오잖아.”
“아까도 말했지만, 오빠 일한다고 했지? 요즘 돈 좀 벌고 있다.”
“진짜? 무슨 일을 하는데?”
“잉크 관련 업종인데, 사무실을 돌면서 영업하는 거야. 집안이 어려워졌는데, 장남이 되어서 한심하게 가만히 놀고 있을 수는 없잖아?”
어느 집안에서든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게 동하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문제였다.
성혜와 미진. 그리고 미현은 이젠 더 이상 놀랄 것도 없을 줄 알았는데, 동하가 한 마디 할 때마다 계속 입속에서 ‘억’ 하는 소리만 나왔다. 확실히 요즘 동하는 그녀들이 알고 있던 개망나니 최동하가 아니었다. 의젓해졌을 뿐만 아니라 듬직해지고 믿음직스러워서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요즘 같아서는 길거리에서 동하를 만나도 알은 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미진과 미현은 요즘엔 동하에게 먼저 말도 걸고 인사도 하곤 했다.
“오빠, 영업 힘들지 않아?”
“일을 하면 학교는 어떻게 하고?”
“후후! 수업 다 끝나면 잠깐 하는 거야. 정상적으로 학교도 가고 수업도 듣고 있어.”
“그런데도 돈을 많이 번단 말이야?”
“그러게. 나도 몰랐는데, 내가 영업에 엄청난 소질이 있더라고.”
“헤! 나는 오빠가 농담도 할 줄 아는지 처음 알았는데.”
“풉!”
미현의 말에 미진이 마시던 물을 뿜고 말았다.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이전 생애에서 동생들과의 이런 식의 화기애애한 대화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동하는 빙그레 웃었다.
이런 것이 가족의 소중함이리라.
“어머니!”
동하는 성혜에게 봉투를 하나 건네주었다. 처음부터 너무 많이 주면 오히려 성혜가 의심을 할 것 같아서 100만 원만 넣었다.
그것만으로도 성혜는 충분히 감동을 받았다.
사고뭉치 개차반 아들이 난생 처음 일을 해서 번 돈이다.
그녀는 너무 기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 내렸다. 예전 같았다면 돈을 받아도 전혀 기쁘지 않았을 것이었다. 혹시 나쁜 짓을 해서 돈을 벌어온 건 아닌지 걱정부터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동하라면 정말 영업을 해서 돈을 벌어왔단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요즘 동하는 믿음직한 아들로 변해 있었다.
성미의 식당만 해도 그랬다.
구운 김으로 만든 돈가스 김밥 등 동하가 알려준 음식들이 손님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었다.
특히, 인상대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면서 젊은 손님들이 많아졌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미현이는 이제 아르바이트 그만 두고 공부해. 너 중학교 때까지 전교 10등 안에 들 정도로 공부 잘했잖아.”
“그, 그건…….”
“알아. 미진이 대학 때문에 그런 거. 너희들 등록금은 오빠가 책임질 테니까 이제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대학 들어가면 공부하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때는 취업이 무의미해진다.
그리고 몬스터가 1차 침공하기 전까지는 그녀들이 최대한 캠퍼스 생활을 즐기고 놀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동하는 이번엔 미진에게 봉투를 건네주었다.
“뭐야, 이건?”
“학원비다. 낯간지러우니까 무지 감동스럽더라도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마라.”
“쳇, 뭐가 감동이야? 예전에 오빠가 내 학원비 빼앗아 간 거 생각 안 나?”
말은 그렇게 해도 미진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었다.
미현은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동하가 아무것도 주지 않자 결국 참지 못하고 말했다.
“오빠, 나는 뭐 없어?”
“너는 아르바이트 했잖아. 당분간 용돈은 그것으로 써라.”
“이힝! 그런 게 어디 있어?”
미현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 모습에 동하는 물론이고 성혜와 미진도 덩달아 따라 웃었다.
☆ ☆ ☆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이었다.
동하는 학교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여의도로 향했다.
여섯 번째로 공략할 대상은 다온텔레콤이다.
다온텔레콤은 시가총액 순위 코스피 50위로 그리 높진 않지만, 다온전자의 계열사 중 하나로 자금력이나 규모 면에서는 지금까지 동하가 도전한 곳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었다.
사옥만 봐도 그랬다.
20층짜리 빌딩 전체를 다온텔레콤이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엔 건물 출입자들을 경비들이 관리했다.
보안이 지금처럼 강조되지 않던 시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긴, 예전엔 드라마를 보면 구두닦이들이 자유롭게 사무실을 들락거리며 구두를 수거해 가서 닦거나 야쿠르트 아줌마들이 대기업 본사를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야쿠르트를 배달했다.
아무튼, 잡상인은 대부분 건물 경비에 가로 막혀 건물 안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한 전쟁은 1층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동하는 이미 몇 번의 경험으로 노하우가 생긴 상태였다.
그는 인근 카페에서 커피를 테이크아웃용으로 포장해 양손으로 나눠 들었다.
더운 여름이기에 커피 종류도 대부분 아이스카페모카 등 비싼 것으로 채웠다.
“아이리스에서 왔는데요, 인사과에 이미경 대리님 계시죠?”
없을 리가 없다.
동하는 토요일에 답사하러 왔다가 퇴근하던 이미경 대리의 신상내역이 눈앞으로 밀려들어오는 것을 보고 머릿속에 기억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잠깐만 기다려. 확인 전화 좀 해 보고.”
“에이, 그걸 언제 확인하고 그래요. 이렇게 많이 주문한 걸 보면 부장님이나 과장님도 시키신 것 같은데. 그러다 얼음 다 녹으면 저만 욕먹지는 않을 걸요?”
동하가 두 손에 가득 들린 여덟 개의 아이스커피를 보여주자 경비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 반응이면 그동안의 경험으로 봐서 거의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빨리 전해주고 나올게요.”
동하는 재빨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바로 옆에 부서 배치도가 걸려 있었다.
“어디 보자…….”
동하는 총무부를 찾았다.
대부분 회사에서 사무용품이나 비품 등을 담당하는 부서가 총무부였기 때문이었다.
“13층이네.”
마침 지하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1층으로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