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두 개의 아이디-01 -->
동하는 요 며칠은 하루 종일 수련과 운동에 매진했다. 이미 한번 갔다 온 필드였지만, 여전히 긴장되긴 마찬가지였다.
따르릉!
동하가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데 핸드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동하 씨. 저 수정이에요.
“예, 안녕하셨어요?”
-덕분에 바쁘게 지내고 있어요.
말 그대로였다.
원래 수정은 기획서가 통과되면 동하에게 밥을 사주겠다고 했지만, 이번 달 안에 멤버십 카드를 발표하는 문제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수정은 전화로 동하에게 양해를 구하고 약속을 뒤로 미룬 상태였다.
-동하 씨, 드디어 멤버십 카드 발표일이 정해졌어요.
“그게 정말입니까?”
마침 동하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이번 달 30일이에요.
“정말 잘 됐네요.”
-호호! 어떻게 동하 씨가 저보다 더 좋아하시는 것 같네요.
“그런가요? 사실 이번 기회에 다온텔레콤의 주식을 사볼까 싶어서요.”
“정말이요? 왠지 동하 씨가 주식이 오를 거라고 확신하는 것 같아서 제가 다 기쁘네요.”
“주식은 반드시 오릅니다.”
“그래요. 주식이 오르면 저도 돈 많이 벌고 좋죠.”
수정은 다시 한 번 동하의 자신감에 감탄했다.
30일까지면 앞으로 15일 남은 셈이었다.
시간이 굉장히 촉박했을 텐데도 이번 달 안에 발표하는 것을 보면 수정이 얼마나 열심히 뛰어 다녔는지 알 수 있었다.
수정은 발표가 끝난 다음에 만나자고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동하는 하던 운동을 마저 끝내고 집에 가서 씻고 나왔다. 그리고 곧장 증권사 지점으로 향했다.
오늘도 지점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들은 벽에 설치되어 있는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동하는 4억 원이 넘는 돈을 모두 다온텔레콤에 투자했다. 액수가 워낙 크다 보니 약간 긴장이 되기도 했지만, 그는 약해지던 마음을 다잡았다.
반드시 오른다.
더구나 동하는 아직 가야할 길이 멀었다.
벙커를 짓는 데 드는 비용을 200억 원으로 낮춰 잡는다 해도 이제 겨우 5억 원밖에 모으지 못했다. 물론 이 5억 원은 제약회사에 투자한 돈까지 모두 합친 것이었다.
동하가 회귀한 지 이제 고작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지난 상태였다.
그걸 생각하면 5억 원이란 돈은 엄청난 의미가 있었다.
지금 돈을 버는 속도라면 5년 안에 충분히 벙커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동하는 이제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기왕 벙커를 만드는 거 시간을 5년에서 3년으로 단축하면 좋은 일 아닌가? 물론 3년을 2년으로 줄일 수 있으면 더 좋은 일이다.
동하는 그런 각오로 달려가고 있었다.
‘반드시 단축한다.’
그래서였다.
승부를 걸어야 할 때는 최대한 냉정하게 승부를 걸어야 한다.
믿을 건 맨주먹 밖에 없는 빈털터리 신세인 동하가 2년 안에 벙커를 만들고 멸망을 대비하려면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 접근하면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은 승부를 걸어야 할 때였다.
동하는 수중에 돈이 4억 원 밖에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지점을 나온 동하는 본격적으로 필드에 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물과 음식은 필수였다.
물은 마트에서 2리터짜리로 20병 넘게 준비했다.
그리고 먹을 음식은 즉석식품 위주로 준비했다.
필드에 가면 무조건 7일 이상 버텨야 한다.
초코바나 빵 같은 것으로만 매 끼니를 해결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동하는 버너와 부탄가스. 그리고 코펠 등 등산 용품으로 인벤토리를 가득 채웠다. 누가 보면 진짜 어디로 등산 가는 줄 오해하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동하는 옷이 찢어질 것도 대비해 몇 벌의 옷도 더 챙겼다.
“참, 덮고 잘 이불도 있으면 좋겠군.”
침낭도 성능 좋은 것으로 샀고, 혹시 몰라 간이용 침대까지 준비했다.
게다가 베개 하나와 운동화도 여유분을 한 개 더 준비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저녁이 다가왔다.
그것으로 준비는 모두 끝마쳤다.
카운트다운까지는 이제 하루도 남지 않았다.
☆ ☆ ☆
이번에도 동하는 과실에서 밤을 보냈다.
그날도 새벽에 일어나 운기행공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어플에 숫자가 2분으로 바뀌어 있었다.
동하가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어플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정확히 00:00이 되는 순간 동하의 눈앞에 공간이 일렁이는 듯싶더니 온몸이 공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번에도 새하얀 공간이었다.
양쪽 벽에서 붉은 빛이 쏟아져 나오며 동하의 몸을 스캔했다.
띠링!
-테스터 인증 완료.
그와 동시에 하얀색 벽에 동하의 상태가 떴다.
-종족: 무림
-단계: 실버
-순위: 250,000명 중 199,980등
-VVIP: 상위 0.01~0.02%. VIP: 상위 0.021~0.2%.
“어?”
가장 먼저 동하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단계였다.
예전에는 비기너였는데, 지금은 실버 등급으로 바뀐 것이다.
실버 등급으로 바뀐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등급이 상향 조정되었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순위도 달라져 있었다.
무려 5만 명 넘게 껑충 뛰어 199,980등이었다.
단 한 번의 필드로 순위를 5만등 이상 끌어올린 것이다.
동하는 이렇게 순위가 껑충 뛸 줄은 몰랐지만, 약간은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날 동하가 강시던전과 스켈레톤던전을 클리어 했을 때 각각 호칭이 주어지고 회원 승급에 유리하게 작용할 거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아직 동하의 위로 수많은 테스터들이 있긴 하지만, 첫 시작치고는 나쁘지 않은 결과라 생각했다.
하지만, 동하는 이런 전례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비기너의 순위는 딱 200,000등까지였다.
그리고 총 세 번의 필드를 거쳐서 그것들을 합산해서 순위를 산정하고 등급을 조정하는데, 단 한 번의 필드로 등급이 올라간 사람은 동하가 처음이었다.
하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대부분 필드를 뛰어서 포인트를 얻는 건 많아봐야 몇 백 포인트가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세 번을 한다고 해도 많아봐야 6천 포인트가 최대였다.
그렇게 세 번의 기회에서 포인트가 부족한 사람은 멤버십 카드를 회수 조치 당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대치된다.
“근데 이건 왜 아직까지 안 없어지지?”
동하를 스캔하기 위해 양쪽 벽에서 쏟아져 나온 붉은 빛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예전 같았다면 인증이 끝나면 바로 없어졌는데, 오늘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띠링! 띠링! 띠링!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들리며 새하얀 방에 붉은 빛이 번쩍 번쩍 거렸다.
그와 동시에 괴음이 들려왔다.
-시스템 오류. 무림 종족에 이어 판타지 종족의 흔적도 발견이 되었습니다. 인증은 하나의 아이디로만 가능합니다.
“어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난데없이 두 개의 아이디라니.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만물상점에서는 두 개의 아이디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시스템 오류가 떴던 것이다.
양쪽 벽면에서 다시금 동하를 스캔하기 위해 붉은 빛이 쏟아져 나왔다.
띠링!
-테스터 인증 완료
-종족: 판타지
-단계: 비기너
-순위: 250,001명 중 250,001등
-VVIP: 상위 0.01~0.02%. VIP: 상위 0.021~0.2%.
“끙! 이게 뭐야?”
동하는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시스템 오류로 또 하나의 아이디가 생긴 것이다.
그건 순위를 보면 알 수 있다.
아까 무림 종족으로 인증을 했을 때만 해도 분명 250,000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띠링!
-필드 1관을 개방합니다.
공간이 일렁거린다고 느낀 순간 동하는 동굴 안에 서 있었다.
동굴이 시작되는 지점인지 눈앞으로 통로가 길게 펼쳐져 있는 반면 동하의 등 뒤에는 동굴의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풍경이었다.
왠지 강시던전과 너무 많이 닮아 있었다.
심지어 동굴 양 옆으로 횃불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모습까지 비슷했다.
띠링!
-본인의 능력으로 출구를 찾아 나오세요. 제한 시간은 7일입니다. 실패 시 멤버십 카드 회수 및 접속을 차단합니다.
“아 놔.”
괴음의 경고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히 일치했다.
그렇다는 건 예전에 들어왔던 강시던전이 틀림없었다.
동하는 짜증이 치밀어 오르려고 할 때였다.
생각해 보니 그리 나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어차피 이곳은 포인트를 많이 벌면 장땡인 곳이었다.
더구나 예전에 골렘던전을 클리어하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라 눈을 반짝거렸다.
“까짓 거 좋다.”
인생 뭐 있나?
“무조건 세 개의 던전 모두 클리어 해서 포인트 대박을 터뜨린다.”
☆ ☆ ☆
동하의 생각대로였다.
그는 판타지 종족으로 인증이 바뀌면서 비기너로 처음 필드를 시작하는 것으로 세팅이 된 상태였다.
처음 필드를 경험하는 사람은 모두 조건이 똑같았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동하는 판타지 종족으로 인증이 되었다는 점이었다.
“좀비네?”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모습이 영락없는 좀비였다.
하지만,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라는 것이 조금 달랐다.
동하는 백보신권으로 좀비들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놈들은 너무 약했다.
가볍게 펼친 백보신권으로도 좀비들은 맥없이 나가 떨어졌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첫 번째 필드를 뛰기에는 동하가 너무 강하다고 봐야 한다. 그는 원래 실버 등급이 아닌가?
아무튼, 판타지 종족의 신분으로 백보신권을 펼치는 역사적인 순간인 셈이었다.
다음에도 좀비는 두 마리였다.
이번엔 마법을 사용했다.
“매직 애로우!”
화살 하나가 날아가 좀비의 미간을 관통했다.
이곳은 마나가 많아서 그런지 마법을 펼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마법은 수련을 많이 하지 못해서 보조 수단으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동하는 남은 좀비 한 마리는 백보신권을 날려 처리했다.
그 이후부터 동하의 행보는 그야말로 파죽지세 그 자체였다.
막힘이 없었다.
동하는 순식간에 좀비던전을 돌파했다.
좀비던전도 피보나치수열의 공식으로 되어 있었다.
강시던전과 다른 게 있다면 이곳은 처음 시작이 두 마리라는 점이었다.
당연히 그 끝에는 강시보다 많은 68구의 좀비들이었다. 더구나 좀비들은 가벼운 보호장비를 입고 있었고, 손에는 검을 들고 있었다.
처음 좀비던전에 입장하는 사람이라면 꽤나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정상이었다.
하지만, 동하는 이미 공력이 3성 이상 있는데다 불사지체와 거인의 힘 역시 각각 8%로 높아진 상태였다.
띠링!
-좀비던전의 모든 좀비를 소탕한 최초의 인물로 등록되었습니다.
-당신의 용기와 노력에 감명 받아 좀비 학살자의 칭호가 수여됩니다. 회원 승급에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보상으로 1,000포인트를 추가로 얻었습니다.
경험은 이래서 무서운 법이다.
강시던전을 클리어 했을 때는 거의 탈진하다시피 했었는데, 지금은 약간 땀을 흘리는 정도였다. 동하가 그때보다 강해진 것도 있지만, 이곳의 상황을 잘 알고 있다 보니 거침이 없었던 것이다.
동하는 인벤토리에서 물을 꺼내 한 모금 마신 다음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그닥 배가 고프지 않을 것을 보면 많은 시간이 지난 것 같진 않았다.
동하는 이내 다음 던전으로 향했다.
이미 한 번 왔던 곳이라 예전처럼 미로에 속지 않았다. 그 덕분에 스켈레톤던전에 도착하는 시간도 많이 단축할 수 있었다.
꼬르륵!
동하는 그제야 배가 고파졌다.
전하고 비교하면 엄청나게 빠른 페이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전에는 이때쯤이면 3일이란 시간이 지났을 텐데, 지금은 고작 반나절 밖에 안 된 것 같았다.
동하는 시간 단축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세 개의 던전 모두 클리어 하는 건 물론이고 얼마나 시간을 단축하느냐에 따라 보상이 달라질 테니 반드시 노리고 볼 일이었다.
동하는 스켈레톤던전에 들어서기 직전에 휴식을 취했다.
이곳은 일종의 안전지대였다. 던전에는 안전지대들이 있어서 휴식도 취할 수 있고, 잠도 잘 수 있었다.
동하는 인벤토리에서 버너를 꺼내고 코펠에 물을 부어 가져온 즉석식품을 요리해 먹었다.
준비해온 커피까지 한 잔하고 나서 어느 정도 소화가 되었다고 싶은 순간에 동하는 스켈레톤던전에 들어섰다.
놈들은 한 마리부터 시작했다.
그렇다는 건 이후부터는 강시던전 때와 똑같은 피보나치수열의 공식대로 따라간다는 뜻이었다.
이번엔 마법을 많이 활용했다.
놈들의 수가 많아질수록 1서클 마법으로는 한계가 있지만, 그럴 때마다 적절하게 무공과 불사지체 그리고 거인의 힘을 이용해 스켈레톤던전을 돌파했다.
띠링!
-스켈레톤던전의 모든 스켈레톤을 소탕했습니다.
-당신의 용기와 노력에 감명 받아 스켈레톤 슬레이어의 칭호가 수여됩니다. 회원 승급에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보상으로 100포인트를 추가로 얻었습니다.
“엥?”
동하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보상이 생각보다 적어서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이내 황당한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스켈레톤던전을 처음으로 클리어한 사람이 바로 동하 자신이었던 것이다.
“나 참.”
이건 어떻게 자신이 자신과 경쟁하는 꼴이 아닌가?
그래도 아직 실망할 단계는 아니었다.
던전에 들어온 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았거니와 다음에 동하를 기다리는 던전은 골렘일 게 틀림없었다.
일전에 동하에게 악몽을 선사했던 바로 그 골렘던전이었다.
“오냐, 좋다.”
드디어 복수혈전의 서막이 시작되려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