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유일무이-03 -->
동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한기문이 원래 이렇게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한데, 오늘따라 과하게 친절했다. 그렇다는 건 분명 무언가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었다.
동하는 그게 무엇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내가 미셜 화장품에 투자를 한다니까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군.’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는 법이다.
원래 증권회사 입장에서는 고객들이 위험한 종목에 투자를 하려 하면 상담도 해주고 경고를 해주기 마련이지만, 한기문은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지금 한기문의 표정을 보면 적극적으로 투자를 권할 기세였다.
‘후후! 그렇단 말이지?’
한기문이 지금이라도 마음을 곱게 먹었다면 동하도 생각을 달리 먹었을지 몰랐다.
하지만, 한기문은 도저히 구제가 불가능한 인간이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동하가 미셜 화장품에 투자를 한다고 하는데도 한기문은 경고 한 마디 해주지 않았다.
하긴, 처음부터 이럴 줄 알고 한기문에게 미셜 화장품 주식을 사겠다고 미끼를 던진 동하였다.
그랬다.
동하가 한기문이 보고 싶어서 서초지점까지 찾아온 게 아니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다.
남의 불행을 즐기고 심심풀이 오징어 땅콩처럼 떠벌리고 다니는 인간에겐 그와 똑같은 상황을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동하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형, 요즘 미셜 화장품 주가는 어때? 조만간에 신규 브랜드가 나온다는 말도 있고, 기대를 해도 될 것 같단 소리도 들었거든.”
풋!
동하의 마음을 전혀 모르고 있는 한기문은 그저 웃음이 나왔다.
어디서 들은 건지 모르지만, 말도 안 되는 찌라시였다.
미셜 화장품 측에서 신규 브랜드를 출시한다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시장의 기대치는 전혀 생겨나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주가에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증권가에서 미셜 화장품의 성공을 예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미셜 측에서 조만간 TV 광고도 내보낼 예정이란 소문도 있었지만, 이미 등을 돌린 소비자들의 마음을 얻기에는 역부족이란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지금 분위기로는 회사가 망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한데, 미셜 화장품의 주식을 산다고?
이건 아예 망하려고 작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죽하면 애널리스트들이 미셜 화장품에 대한 투자 의견을 ‘의견 보류’로 변경하고 잠정적으로 분석을 중단한 상태였다.
이건 그만큼 기업 가치가 극도로 불안하단 뜻이었다.
정상적이라면 여기서 충분하게 상황을 설명해주고 다른 종목을 추천해 줘야 하지만, 한기문은 동하에게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오히려 은근슬쩍 동하를 부추겼다.
“타이밍은 좋은 거 같다.”
“정말?”
“그럼. 지금처럼 주가가 많이 떨어져 있을 때는 약간의 호재만 있어도 치고 올라갈 여지가 충분하거든.”
“역시 형을 찾아오길 잘 했네.”
분위기는 제법 훈훈했다.
누가 보면 사이좋은 선후배 사이인줄 착각할 정도였다.
“투자는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데?”
“정보가 확실하다면 크게 못할 이유도 없지.”
“호오, 그래?”
이거야 말로 한기문이 바라던 바였다.
“돈만 많으면 그게 가장 좋지. 이런 경우에는 여러 곳에 나누어서 하는 분산 투자보다는 한곳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게 훨씬 유리할 거야.”
“그렇구나. 아무튼, 오늘 여러 가지로 고마워.”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긴 한데, 그렇다고 내 말을 맹신하면 안 돼. 주식이라는 게 워낙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라 네가 신중히 생각하고 결정을 해야 한다.”
한기문이 속으로 교활하게 웃었다.
이렇게 말을 했으니 나중에 동하가 손실을 입어도 그는 충분히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은 셈이었다.
피식.
동하는 속으로 웃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한기문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자 동하 역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참, 계좌는 있고?”
“응! 마침 인천에서 거래하던 곳이 매일증권사였어.”
“그럼, 계좌는 따로 만들 필요는 없겠고……. 돈은 가지고 왔지? 내가 지금 바로 미셜 화장품 주식을 사 줄게.”
“그래 줄래?”
동하가 말과 함께 가방에서 매일증권사 통장을 꺼냈다.
하지만, 막상 한기문에게 통장을 건네주려다 말고 잠시 머뭇거렸다.
“왜?”
“생각해 보니까 위험부담이 있을 거 같아서. 일단 조금만 투자하는 게 낫겠지?”
“아, 아니 갑자기 왜?”
“만에 하나 신규 브랜드가 잘 안 될 수도 있잖아. 미셜 화장품이 예전에도 그랬었지?”
끙!
한기문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이러다 정말 조금만 투자할까 싶어 괜히 마음이 초조해졌다.
“그건 그렇긴 한데…… 그래도 잘 생각해 봐. 이런 기회가 또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가?”
“그래. 주식이라는 게 말이지. 신제품이 출시되고 난 다음에 주가가 오르면 그때는 쉽게 들어서기 어려운 법이야. 괜히 고점에서 사서 물릴 수도 있는 거고.”
“흐음. 그 말에도 일리가 있는데?”
“그렇지? 그럼 내가…….”
“그래도 안 되겠다. 역시 위험부담이 있으니까 소액으로 시작하는 게 좋겠어.”
“그, 그래?”
한기문은 속에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소액으로 시작하겠다고 하던가.
많은 돈을 투자할 것처럼 해서 잔뜩 기대하게 만들어 놓고는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한기문은 맥이 풀린 표정으로 창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창구에 보면 여직원들 있지? 소액 거래는 저쪽에서 하는 게 더 빠를 거야.”
하지만, 그는 동하가 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 ☆ ☆
서서히 점심시간도 끝나갈 무렵이었다.
한기문은 화장실에 가서 대변을 보면서 담배를 한 대 피웠다. 그리고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들고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한데, 창구가 무척이나 분주했다.
김 대리는 물론이고 손 차장과 마 부장의 모습도 보였다.
“무슨 일이 생겼나?”
한기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 대리는 몰라도 손 차장과 마 부장이 동시에 창구에 나와 있는 건 무척이나 이례적인 일이었던 것이다.
‘응?’
동하의 모습도 보였다.
지금쯤이면 벌써 미셜 화장품 주식을 사고 없을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 창구에 있다는 게 의아했다. 그러고 보니까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동하의 표정은 무척이나 차가웠고, 손 차장과 마 부장은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김미정 씨. 저기 왜 저래요?”
“부장님이 한기문 씨를 한참 찾았어요.”
“나, 나를요?”
한기문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손 차장이 한기문을 불렀다.
“한기문 씨. 이쪽으로 오세요.”
“예, 차장님.”
한기문이 쭈뼛거리며 다가갔다.
본능적으로 왠지 모를 위압감이 느껴져 자신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손 차장이 두 눈에 살벌한 기운을 담은 채 한기문에게 물었다.
“자네, 최동하 씨 알지?”
“예? 예.”
“설마 자네…… 아까 최동하 씨에게 미셜 화장품의 주식을 사라고 적극적으로 권했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아, 아니 그건 그런 게 아니라…….”
“사실인지 아닌지만 말해. 미셜 화장품 주식을 권한 적 있나?”
주르륵!
한기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그제야 동하에게 미셜 화장품을 추천만 했지 위험 요소에 대해 설명한 적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미셜 화장품은 ‘의견보류’ 종목이었다.
그렇다면 종목을 상담해 주는 과정에서 위험 요소에 대해서도 말을 해 주어야 정상이었다.
한데, 한기문은 오히려 소액 투자를 하겠다는 동하에게 이런 기회가 다시는 없으니 잘 생각해 보라며 권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어떤 증권사에서도 고객에게 손실이 뻔히 예상되는 종목을 추천해 주는 곳은 없었다.
“그건 그냥 농담으로 말한 겁니다. 동하가 소액으로 투자를 해보겠다고 해서…….”
“맙소사. 그럼 최동하 씨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단 말이야?”
손 차장과 마 부장은 기겁을 했다.
그들은 처음 동하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설마 했다.
이건 도저히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미친놈을 봤나? 너 지금 제정신이야?”
“누구 망하는 꼴 보고 싶어?”
주식 시장은 의외로 좁다.
만약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매일증권사는 이미지에 엄청난 타격을 입을 건 불을 보듯 뻔했다.
한기문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입사하고 이렇게까지 깨진 건 처음이었다. 분위기가 너무 심각해서 단순히 깨지는 것으로 끝날 것 같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그깟 소액 투자자 한 명이 무에 그리 대단하다고.
더구나 미셜 화장품에 투자하겠다고 먼저 말한 사람은 동하였다.
한기문은 끝까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번 일은 제 실수이니까 동하가 입은 손실은 제가 보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봐, 한기문 씨. 자네 눈에는 220억 원이 소액으로 보이나?”
“220억 원이라니요?”
“최동하 씨가 투자하려던 금액이 220억 원이란 말이야.”
“예에?”
한기문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이건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동하가 100억 원을 벌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설마 그 며칠 사이에 100억 원을 넘게 또 벌었단 말인가?
아니, 그전에 여기서 왜 갑자기 220억 원이 튀어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아까 동하는 소액 투자로 시작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저,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동하야, 네가 말 좀 해봐?”
“형은 끝까지 사람을 실망시키는구나! 그럼, 소액 투자자에게는 얼마든지 위험 종목을 추천해서 손실을 입혀도 된다는 소리네?”
“그, 그런 말이 아니라…….”
“형을 믿고 투자를 하려고 찾아온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사람 뒤통수를 치는 건 아니지. 하마터면 형 말을 믿고 220억 원을 투자했다가 크게 손해를 볼 뻔 했는데, 이거 어쩔 거야?”
“저, 정말 미안하게 됐다.”
“됐어. 220억 원을 투자하려는 사람에게 이런 거지같은 대접이나 하고. 내일 본사에 찾아가서 단단히 따질 거니까 각오해 두는 게 좋을 거야.”
“동하야. 한 번만 용서해주라. 어렵게 구한 직장인데, 그럼 나 잘려.”
한기문의 얼굴은 새파랗게 변했다.
피식!
동하가 차갑게 웃었다.
“지금 형 직장 잘리는 것만 중요해?”
“도, 동하야?”
“형이 나하고 입장을 바꿔 놓아도 그런 말이 나오는지 궁금하네.”
손 차장과 마 부장의 얼굴 역시 하얗게 변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최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한기문 사원은 이제 6개월 정도 밖에 안 된 신입사원이라 아직 부족한 것이 많아서…….”
“이보세요, 부장님. 지금 그걸 변명이라고 합니까?”
“일단 화를 푸시고…….”
“부장님 같으면 지금 화를 풀게 생겼습니까? 아무리 신입사원이 개념이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고객에게 손해 볼 걸 뻔히 아는 종목을 추천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매일증권사는 그런가 보죠?”
“그, 그건 정말 오해십니다. 우리 매일증권사는 고객님의 돈을…….”
“아아. 됐습니다. 220억 원도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고객님의 돈은 개뿔. 자기 돈이 아니라고 너무 무책임하게 아무 종목이나 추천해 주는 거 아닙니다.”
끙!
마 부장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가 시선을 돌려 무서운 표정으로 한기문을 노려보았다.
“최 선생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부르르!
한기문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마 부장의 적개심 어린 눈빛에서 그의 운명을 감지한 것이다.
“그건 그쪽이 알아서 하시구요. 저는 언론사에도 제보를 할 거고 본사에 찾아가서 단단히 따져 물을 겁니다.”
동하가 선전포고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최 선생님!”
“제발 한 번만 재고해 주십시오.”
어떻게 보면 본사보다 더 무서운 곳이 언론사였다.
이번 일이 언론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 매일증권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을 수도 있었다.
손 차장과 마 부장은 주차장까지 동하를 따라가 사정을 했지만, 동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벤틀리를 타고 사라져 버렸다.
마 부장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멍청한 놈 한 명 때문에 줄줄이 목이 날아가게 될 판이었다.
“으으. 누가 저런 멍청한 놈을 서초지점에 뽑아가지고는…….”
“죄, 죄송합니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꺼져. 안 꺼져?”
마 부장은 자신이 동하였어도 기분이 더럽고 불쾌해서 언론사며 본사며 찾아다니며 단단히 따져 물을 것 같았다.
“내일 안으로 무조건 해결해. 어차피 이번 일 해결해도 너는 사표를 써야겠지만, 만에 하나 매일증권에 피해가 생기면 네놈이 모두 물어야 할 것이다.”
그것으로 한기문의 인생도 끝이었다.
엄청난 실수를 했으니 다른 증권회사에 이직을 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해진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