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 만물상점 재오픈-01 -->
“박사님. 1단계 프로젝트가 드디어 완성되었습니다.”
“오오. 그게 정말인가?”
시얀의 말에 타누스 박사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결정체와 프로그램이 합쳐져서 전혀 새로운 형태의 괴수가 태어나기 직전이었다. 오랫동안 오직 이것에만 매달려온 타누스 박사이기에 평생의 꿈을 이룬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동안 괴수들의 심장에 결정체를 심어 놓는 것 때문에 필드는 잠정 개점휴업 상태였다.
그로 인해 샤이언 종족 내에서 말들이 많았다.
우주 말살 프로젝트는 계속 연기되었고, 눈에 보이는 성과는 전혀 없었다.
성질이 급한 고위층 인사들 사이에서 반발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어떻게 1년 동안 기다릴 수 있냐’며 당장 필드를 열 것을 주문했다.
타누스 박사와 시얀은 모든 것을 다 갖춰 놓은 상태에서 우주 말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상부의 지시를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생명의 씨앗’이라 불리는 구슬의 행방이 묘연했다.
그것이 있어야 더 강력한 결정체를 만들 수 있는데, 이래서는 애초부터 제시간 안에 목적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였다.
결국 타누스 박사와 시얀은 아쉬운 대로 단계별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계획의 변경은 이랬다.
원래 결정체가 만들어지면 괴수들 사이에 등급이 정해진다.
그 등급에 따라 시얀이 프로그램을 괴수들의 머릿속에 다운로드 하는 것이었다.
즉, 능력이 낮은 1단계 괴수들에게 레벨에 맞지 않는, 엄청난 양의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하면 결국 능력이 따라가지 못해 몸이 폭발할 가능성이 높았다. 때문에 1단계 결정체에는 그에 맞는 1단계 프로그램을 만들어 괴수들의 머릿속에 다운로드 해준다.
1단계 프로그램은 데이터의 양이 그리 많지 않다. 원래 프로그램을 완성하려면 짧으면 6개월에서 길면 1년 이상 걸려야 하는 시간을 이런 식으로 하면 한두 달 안에 대폭 단축할 수 있었다.
타누스 박사와 시얀은 1단계 괴수들을 1성급 몬스터로 불렀다.
“박사님. 1성급 몬스터로 과연 지구를 정복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그들의 무기가 우리 샤이언 종족이 수천 년 전 쓰던 재래식 무기라 해도 1성급 몬스터로는 어려울 것 같은데 말이죠.”
“나도 자네와 같은 생각이긴 하지만, 그래서 더 괜찮을 것 같지 않나?”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생각해 보게. 지구는 우주 말살 프로젝트를 처음 시행하는 곳일세. 그렇다면 몬스터의 위력을 정확하게 실험하고 연구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것도 그렇군요.”
1성급 몬스터라고 완벽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 보완할 부분이 있고, 장점이 될 만한 부분도 있었다.
지구의 인간들이 1성급 몬스터와 싸우게 되면 아마도 그런 부분들을 더 자세히 알게 될 것이었다.
그런 부분들을 고치고 수정해 나가면 결국 2성급 몬스터가 완성될 것이었다.
“하지만, 지구인의 능력으로는 1성급 몬스터도 벅찰 걸세. 지구의 인간들이 가진 무기를 모두 동원해도 쉽지 않을 걸?”
“박사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결정체에는 재래식 무기가 통하지 않도록 설계가 되어 있으니까요.”
타누스 박사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운트다운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 ☆ ☆
양범수의 신고로 출동한 소방차가 사건 현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창고가 불에 타 전소된 뒤였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별다른 인명 피해는 없었다.
동하가 커다란 탈출구를 만든 덕분에 창고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창고 안에는 여전히 연기에 질식해 의식을 잃고 쓰러진 사람들과 천장에서 녹아버린 잔해들이 떨어져 끝내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여기저기서 안타까운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려댔다.
하지만, 누구하나 창고 안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불길을 뚫고 창고 안으로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였다.
그때, 동하가 수정을 밖에 내려놓고 다시금 불길 속을 뛰어들었고, 창고가 무너지기 직전에 사람들을 모두 구해서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밀려오는 감격에 서로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데 없습니까?”
“정말 당신처럼 용감하면서도 무모한 사람은 처음 봅니다.”
“어떻게 저 불길 속을 뛰어들어 사람들을 구할 생각을 합니까?”
사람들이 동하에게 몰려들어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동하가 누구인지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지만, 목숨을 걸고 사람들을 구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사실 동하가 목숨을 걸고 사람들을 구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자욱한 연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대로 능력을 펼쳐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멀쩡한 모습으로 밖에 나가면 안 될 것 같았다.
동하는 스스로 머리를 마구 헝클어 놓고, 옷도 여기저기를 태워 상당히 낭패한 모습을 연출했다.
하나 정작 화상을 입거나 상처를 입은 모습조차 없어서 사람들이 수상하게 생각할까 다소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딱 한 사람만 빼고.
수정은 아까부터 계속 이상한 눈빛으로 동하를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봅니까?”
“흐음. 아무래도 이상해. 동하 씨, 나에게 숨기는 거 없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말이 그렇잖아요. 하늘을 막 날아다니는 것도 그렇고. 불길을 뚫고 탈출구를 만든 것도 동하 씨였죠?”
그때는 수정이 너무 놀라 눈을 감는 바람에 동하가 어떻게 탈출구를 만들었는지 자세히 보지는 못했었다. 그게 두고두고 아쉬운 수정이었다.
동하는 피식 웃었다.
사실 수정이 의심을 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동하도 처음부터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던 터라 공간이동 보다는 그나마 변명할 거리가 있는 경공을 펼쳐서 빠져나왔던 것이다.
“나는 수정 씨가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네. 내가 새도 아니고 어떻게 하늘을 날아요.”
“하지만, 동하 씨가 분명 하늘을 나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요.”
“수정 씨를 안고요?”
“예.”
“그렇다면 확실히 잘못 본 거네.”
“뭐라고요?”
“수정 씨 은근히 무겁던데.”
“내, 내가 어디가 어때서요?”
“아까 얼마나 무거웠는지 압니까? 나 혼자 하늘을 나는 것도 불가능한데, 수정 씨를 안고 하늘을 날아요?”
하긴, 이건 수정이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일이긴 했다.
그리고 동하가 하늘을 날았다면 당시 창고에 같이 있던 많은 사람들도 봤을 텐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이상하게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정말 하늘을 날았는데…….”
“아무래도 수정 씨가 너무 놀라서 헛것을 본 것 같아요. 그렇다고 창피한 일은 아닙니다. 사람이 너무 극한의 상황에 처하면 그럴 수 있다고 하더군요.”
“끙!”
그렇다면 아까 왜 그렇게 놀라서 동하의 품에 안긴 거지?
수정은 여전히 의아한 생각이 들어 동하를 쳐다보았지만, 이젠 뭐가 뭔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그나저나 뭔가 이상해.’
다른 사람들은 경황이 없어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생각하고 넘어간 모양인데, 동하는 그렇지 않았다. 합선이 되고 불이 난 것까지는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이라 해도 불길이 이렇게 빨리 번질 수 있는 건가?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매직 카메라의 능력으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면 혹시 자세한 정황을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러려면 모든 스텝들과 연출팀까지 일일이 창고 앞에 세워놓고 사진을 찍어야 했다.
‘역시 그건 안 되겠군.’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할 적당한 명분이 없었다.
더구나 부상을 입고 병원에 이송된 사람도 있고, 사태를 수습한다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도 있어서 사실상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 ☆ ☆
배우는 이미지를 먹고 사는 직업이다.
남기석은 오랜 무명 생활 끝에 드라마 한 편 잘 만나서 갑자기 빵 하고 뜬 케이스였다.
원래는 2~3회 출연하고 하차하는 조연이었는데, 의외로 여주인공을 향한 일편단심 캐릭터가 시청자들에게 사랑받으면서 조금씩 비중이 늘어났고 결국 남자 주인공과 삼각관계를 이루는 것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지고지순.
일편단심.
그러한 이미지가 지금 남기석이 팬들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였다.
한데, 불길 속에서 자신만 살겠다고 사람들을 버리고 도망친 것이 알려지면 그의 이미지에 엄청난 타격이 올 게 뻔했다.
어떻게 얻는 인기인데.
아까는 무조건 살고 싶다는 생각에 본능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지만, 막상 사람들이 모두 무사히 빠져 나오자 불안하고 초조해서 어쩔 줄 몰랐다.
모든 사람들이 경멸의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제길.”
자칫 잘못 하면 힘들게 얻은 인기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릴 판이었다.
그는 고민을 하다 자신의 소속사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소속사 대표는 한때 조폭으로 있다가 엔터테인먼트를 차린 인물이었다.
아직도 그의 소속사가 조폭과 연관이 있다는 루머가 파다했고, 대부분 연예계 종사자들은 가급적 그의 소속사와 마찰을 빚지 않으려고 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냐?”
남기석의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달려온 이구환이 인상을 잔뜩 쓰며 물었다.
과거 조폭 출신답게 이구환의 인상은 무척이나 험악했다. 거기에 인상까지 쓰니 무술 유단자인 남기석도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남기석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다친 사람들을 외면하고 먼저 빠져 나왔단 말이냐?”
“예, 사장님.”
“등신 같은 놈. 대중 앞에서는 최대한 가식을 떨라고 했잖아. 최소한 도와주는 척이라도 했어야지.”
남기석도 지금 그러지 못해서 후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상황에서 남들이야 죽건 말건 자신의 이미지 관리에 힘써야 했다.
밖으로 빠져 나올 때 부상당한 사람을 한 명이라도 부축해서 나왔다면 지금처럼 이미지가 곤두박질 칠 걱정은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어떻게 하죠, 사장님?”
“흐음. 양범수 실장이 먼저 빠져나왔다고 했지?”
“예.”
“좋아, 따라와.”
이구환이 남기석을 데리고 양범수에게 다가갔다.
상황이 난처하긴 양범수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나마 그는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사는 사람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실장님, 안녕하십니까?”
“여어, 이게 누구야? 이 사장이 여긴 어쩐 일이오?”
“왜겠습니까? 기석이 때문에 급하게 올라왔습니다.”
“아. 그거 말이군.”
양범수가 입맛을 다셨다.
표정을 보면 별로 얘기하고 싶은 기색이 아니었다.
그때, 이구환이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기석이에게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스텝의 실수로 벌어진 일이라고 하더군요.”
“그것도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액션 촬영 중에 서로 합이 맞지 않아서 생긴 일이지.”
물론 그것 역시 남기석의 실수라 할 수 있었다.
“흠흠.”
이구환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실장님께서 조금만 도와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인가?”
“그들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모든 비난의 화살을 향하게 만들 생각입니다. 그래야 기석이나 실장님이 조금은 자유로워지겠죠.”
“그래서?”
“그 다음에 기석이가 사람들을 도와주었다고 언론에 흘려야죠.”
“여기서 본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게 가능할까?”
“그러니까 실장님께 도와달라고 부탁드리는 거 아닙니까?”
“이 사람아. 내 코가 석자인데 어떻게 도와?”
“기석이가 실장님을 구해서 데리고 나왔다고 언론에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실장님도 사람들을 외면하고 혼자 도망쳤다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고 기석이는 또 기석이 나름대로 실리를 얻을 수 있게 되겠죠.
“이 사장 보기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군. 하지만, 사람들이 믿을까?”
“하핫! 실장님 눈 밖에 나면 이 바닥 생활도 끝이라는 걸 모두가 아는데, 설마 어떤 미친놈이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겠습니까?”
“흐음.”
그건 사실이었다.
그만큼 방송계에서 양범수의 파워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언론에 알려지면 남기석의 이미지는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좋아질 것이 뻔했다.
하지만, 양범수는 딱히 내키지 않았다. 막말로 남기석이 얻는 것에 비해 양범수가 얻는 것은 별로 없었다.
이구환이 풀썩 웃었다.
“물론 맨입으로 도와달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조만간에 비너스의 리더 예린이와 실장님께 찾아뵙겠습니다.”
성상납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비너스는 4인조 걸 그룹으로 요즘 한창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비너스의 리더 예린은 청순한 얼굴과 늘씬한 몸매로 인기가 많아 요정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 사장, 그게 가능해? 예린이는 전에도 내 스폰을 거절한 적이 있어서 말이야.”
“예린이가 이런저런 자리에 불려나가는 걸 아주 싫어하긴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에는 확실히 말을 듣게 하겠습니다.”
“좋아. 어디 한번 추진해 보자고.”
양범수의 입술이 탐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