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1화 (2/81)

<1. 이상한 축복식>

<인간의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건 거짓말이다. 당장 너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걱정 말아라, 반데르가 있으니.>

300년 전의 라-반더(RA-BANDER),

태양검 리비아스의 어록

☆ ☆ ☆

<로만가에서 한 세대에 세 명의 후손만 나왔다면 티안은 지금쯤 대북방 너머를 점령했을 것이다!>

티안 왕국의 백성들과 귀족들 사이에서 항상 전해져 오는 말이다.

각 왕국마다 유명한 가문들 앞에 항상 따라오는, 어찌 보면 흔한 수식어일지 몰라도 티안 왕국에서 로만가문의 위치가 어딘지를 알려주기에는 이보다 적합한 문장이 없다.

위의 문장은 두 가지를 말해준다.

첫째. 로만에서 태어난 자들은 그 누구보다 강하다.

둘째, 그만큼 강하지만 손이 매우 귀하다.

선천적으로 로만가에서 태어난 자들은 유난히 무력의 상징과 같은 반데르 수치가 높은 자들이 많았다.

유전적으로, 생물학적으로 전투를 위해 태어난 자들!

로만가에서 태어난 자들은 역대로 모두 자신이 강자임을 증명하였다.

수많은 마스터가 수십 년을 단련하여도 될까 말까 한 <그랑-반더>를 배출해 낸 무장명가.

그것이 바로 로만가이다.

매 세대 전략병기 급의 무장인, 한 나라에 고작 서넛밖에 나오지 않는 그랑-반더를 매 세대 배출하니 그 혈통의 위대함에 모두들 놀랄 따름이다.

하지만 티안에게는 안타깝게도 로만가에서 태어난 자들은 대대로 일당백, 아니 일당천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그 손이 귀하였다.

나라에서조차 로만가의 인물들이 내전으로 죽는 것을 엄격히 금하고 통제하고 있으니, 로만가의 인물들이 이 티안 왕국에서 얼마나 소중하면서도 희귀한 재원인지 알 수 있다.

이러한 로만 백작가에서 소공자가 태어났다.

그러한 소식에 티안이 들썩였다.

대공자 하나만 해도 든든한데 손이 귀한 로만가에서 2공자가 탄생하다니!

이를 축하하기 위해 티안의 전역에서 티안을 지탱하는 귀족들이 로만가에 몰려들었다.

이것이 왕실 근위기사단장을 맡고 있는 로만 백작의 저택에서 삼 일째 파티가 벌어지고 있는 이유였다.

☆ ☆ ☆

“백작님! 정말 축하드립니다. 2공자를 얻으시다니! 이는 대제께서 우리 티안을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하하!”

“음. 고맙소이다, 키안 남작. 이번에 키안 남작도 딸을 얻었다고 들었는데! 부인을 닮아 그렇게 귀엽다고 들었소이다.”

파티에서는 로만가의 가주인 카인 폰 로만 백작이 쉴 새 없이 덕담을 하며 다가오는 귀족들과의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음… 영 피곤하구만… 아무리 그래도 3일간 연속으로 파티라니…….’

백작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카인 폰 로만 백작!

로만 백작가의 13대 가주이자 ‘대제의 축복’이라는 그랑-반더의 반열에 오른 위대한 무인이다.

그랑-반더란 무장들에게는 꿈의 경지이다.

오죽하면 7대 왕국 중 하나인 티안 왕국에도 단 셋밖에 존재하지 않겠는가?

타고난 핏줄과 높은 수치의 반데르 위에 수많은 노력과 재능, 그리고 기술을 녹여내어 육체와 정신을 가다듬고 수십 년간 벼려내어도 도달할 수 있을까 말까 한 경지가 바로 그랑-반더의 경지이다.

심지어 다른 그랑-반더의 평균 연령이 65세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54세라는 젊은 나이는 그의 위대한 경지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위대한 무인도 약점은 있으니, 바로 사교계의 생활과 정치활동.

강대한 무장인 로만 백작이지만 수련에 전념하느라 평소 사람을 대할 기회가 많지 않았고, 케르벨 백작을 비롯한 굉장히 친한 몇몇과만 인간관계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이렇게 자식이 태어난 행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모르쇠로 일관할 수는 없는 법.

그것이 혼자서 다섯 뿔의 하리쟌도 때려잡을 수 있다는 위대한 무인인 로만 백작이 여기서 땀을 뻘뻘 흘리며 취미에도 없는 웃음을 짓고 있는 이유이다.

‘후… 도대체 이런 걸 잘하는 사람들은 뭐 하는 자들인지 모르겠군…….’

로만 백작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물론 겉으로는 열심히 접대성 인사를 짓는 것을 잊지 않았다.

평소에 영 웃지 않기 때문에 접대적인 미소를 지어도 남들이 보기에는 즐거워 보인다는 장점을 십분 활용하고 있는 백작이었다.

‘첫째를 낳았을 때는 이것보다는 그래도 나았던 것 같은데…….’

둘째는 손이 귀한 로만 백작가에서는 정말 흔한 일이 아니었다.

아마 자신의 이름은 로만가, 더 나아가 티안의 역사에 길이 남을 수도 있었다. 둘째를 본 몇 안 되는 가주 중 한 명으로 말이다.

역대로 로만가에서 둘 이상의 자식을 낳았을 경우 티안의 세력은 크게 부흥하고는 했다.

그렇기에 단순한 소공자의 축복식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다.

“하하! 카인백! 오랜만일세. 오랜만에 수도로 오니 참 공기가 좋구만. 자네 덕일세. 이런 일이라도 있어야 가끔 와서 수도구경을 하지 않겠는가?”

“오! 반갑습니다, 셀라인 백작님.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도대체 이 양반은… 타란 왕국이랑 붙어있는 양반이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온 거야…….’

눈앞의 셀라인 백작은 타란 왕국과 붙어 있는 셀라인 백작령에서 교역을 통해 부를 쌓고 그 세력을 불려온, 전형적인 전통귀족이다. 자신들 로만 백작가와 마찬가지로 건국 시조 때부터 그 대를 이어온 정통 명문세력가인 것이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상태로 왕가와 귀족파의 사이에 서서 꿋꿋이 중립을 지킨 채 실리만 취하고 있어 양쪽 모두로부터 눈엣가시 취급을 받고 있는, 그래서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수도까지 오지 않는 백작이 여기까지 오다니.

그 정도로 로만 백작가에서 소공자의 탄생은 보기 드문 일이다.

‘아니지… 능구렁이 같은 양반이 그거 하나 때문에 올라왔을 리는 없고… 이번 기회를 타서 어떻게 세력구도가 변하는지 살펴보려고 올라왔겠지…….’

로만 백작은 현재 귀족파와 왕당파 간의 치열한 대결구도를 떠올리며 눈앞의 백작의 진짜 목적을 알아챘다.

현재 티안 전체는 ‘왕당파’와 ‘귀족파’로 나뉘어 세력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나라샤 후작을 중심으로 실리를 기반으로 뭉친 강대한 신세력, 귀족파.

키라인 검공을 중심으로 뭉친 기존의 기득세력, 왕당파.

국왕의 숙부인 키라인 검공은 티안 왕국을 통틀어 최고로 치는, 티안 왕국 제일 무인이다.

비록 키라인 검공은 정치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지만 그 묵직한 존재감만으로도 ‘왕당파’를 결집시키고 있다.

‘귀족파’의 수장은 마찬가지로 그랑-반더에 올라선 나라샤 후작이다.

군사강국인 카란 왕국과 접하고 있어 대대로 군사력을 갈고닦아야 했던 나라샤 후작령에서 태어나, 놀라운 재능으로 채 55세가 되기 전에 그랑-반더의 경지에 오른 그는 그 자신의 무위와 카리스마, 세력을 바탕으로 귀족가를 통합하여 세를 급속히 늘리기 시작하였다.

나라샤 후작의 놀라운 능력으로 왕가로 기울어져 있던 균형추는 서서히 귀족가로 기울기 시작하여 현재는 비등하게 평형을 맞춘 상태이다.

셀라인 백작은 이러한 상황을 이용할 수는 없는지 알아보려고 직접 이곳, 수도인 로아-티안으로 올라온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이번 소공자의 탄생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을 것이다.

소공자의 탄생을 핑계 삼아 티안의 귀족이란 귀족과 수많은 고위인사들을 한자리에서 살필 수 있으니 말이다.

‘사실 여기 모인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모여 있겠지…….’

속으로 로만 백작이 중얼거렸다.

앞의 셀라인 백작이 특이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오늘이 마지막이니 다행이다. 시안이 힘들지는 않을까 걱정이구나…….’

로만 백작이 상념에 빠져있는 동안 파티는 어느덧 마무리에 접어들었고 이번 파티의 주인공, 소공자 시안 폰 로만을 위하는 가장 중요한 마지막 순서만이 남아있었다.

대제의 축복을 확인하는 축복의 의식.

‘축복식’이다.

‘축복식’

파티의 마지막 날에 행하는 이 의식은 귀족가에서 새로운 직계 후손이 태어났을 때 행하는 축복이다.

원래는 단순히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귀족들이 모여 아이의 안녕을 기원하는 형식적인 행사였으나 엑자일-대법도회가 세상에 제공한 놀라운 대법진은 이 행사의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내 몸의 한계를 뚫고 끝없이 단련할 수 있는, 대제의 축복과도 같은 입자.

<반데르(BANDER)>

대법진을 통해 몸속에 내재되어 있는 이 위대한 가능성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로만 백작은 준비되는 축복식을 바라보며 자신의 둘째가 어느 정도의 수치를 가지게 될지 궁금하였다.

축복식이 시행되는 나이에 반데르의 수련은 불가능하다. 오로지 스스로의 자질에 의해 쌓인 반데르만이 몸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즉, 축복식에서 나온 수치는 그 아이의 재능과 직결된다.

높으면 높을수록 나중에 인간을 탈피하여 초인의 길을 걷는 데 유리하다.

‘흠… 그래도 우리 가문인데 50은 넘겠지?’

위대한 무인이었던 태양검의 수치는 전해져 오는 기록에 따르면 자그마치 85에 해당했다고 한다.

태어난 지 100일 된 아이가 85라면 그야말로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마다 반데르가 증가했다는 뜻이다.

태양검 정도는 아니지만 로만 백작 자신의 경우는 55였고 대공자인 리안의 경우는 자신보다도 높은 60이어서 모두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태양검과 비교되어서 그렇지, 평균적인 그랑-반더들의 수치가 50을 좀 넘고 일반 귀족가가 25가 안 되는 데에 비하면 그야말로 놀라운 기록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도중 드디어 축복식의 시간이 다 되었다.

‘어서 아내와 아이를 데리러 가야겠군.’

백작이 잠시 파티장을 나가 가까운 곳에서 쉬고 있던 아내와 아이를 데리러 간 동안 대법도회에서 파견된 3급 법도사가 축복식의 진행을 시작하였다.

“자! 그럼 이제 대 티안 왕국의 수호무장인 카인 폰 로만 백작의 둘째 공자인 시안 폰 로만 공자에 대한 축복식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 주십시오!”

‘축복식’은 국가마다 어느 정도 형식이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인 틀은 유사하다.

그 나라의 국교에 해당하는 신관과 대법도회에서 파견 나온 법도사에 의해 진행되며 축복식을 진행하는 귀족가문의 격에 따라 다른 급수의 귀족이 파견 나온다.

로만가는 백작가이니 3급 법도사와 티안이 섬기는 전쟁신의 수석사제에 의해 진행된다.

수석사제가 진행하는 상징적 의미의 의식은 금방 끝났다.

예전에는 훨씬 길었지만 결혼식 주례가 점점 짧아지듯 점점 그 시간이 줄어들었다.

지루하기에 모두가 싫어했으니까.

중요한 것은 ‘반데르’의 재능을 측정하는, 대법진의 의식이다.

“그럼 이제 대법진을 가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이에게 무궁한 대제의 축복이 있기를!”

사람들은 대법진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로만 백작이 대법진 위에 살포시 올려놓은 자그마한 아이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이는 어머니 품속에 안겨서 자고 있다가 로만 백작의 품으로 옮겨지면서 갓 잠이 깬 상태였다.

이목구비가 로만 백작을 꼭 닮은 것을 보니 지금은 살이 통통하게 올라 동글동글한 이미지이지만 크면 단단한 이미지로 자리 잡을 것이 분명하다.

법도사는 아이를 위한 축언을 마치며 대법진을 작동시켰다.

이어 어린아이에게 영향을 크게 주지 않도록 섬세하게 반데르의 흐름을 조작할 수 있도록 설계된 대법진에 따라 기운이 아이의 몸을 타고 들어가며 아름다운 빛을 사방으로 영롱하게 뿌리기 시작했다.

영롱한 빛이 아이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때로는 아이를 스쳐 가기도 하고. 입으로 나왔다가 코로 나오기도 하고… 그러면서 아이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듯이. 꼼꼼히 구석구석 살피는 듯이 휘감았다.

이윽고 빛은 점차 그 힘을 잃어가며 사그라졌다.

측정이 거의 끝나가는 것이다.

이제 작업이 끝나면 아이의 반데르에 대한 친화력을 나타내는 숫자가 공중으로 화려하게 퍼져 나가면 축복식이 끝나는 것이다. 이 기능은 즐거움을 더하기 위하여 법도회에서 서비스 차원으로 추가한 기능이었다.

그러던 와중 갑자기 이변이 생겼다. 이미 결과가 나올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법진이 희미한 빛을 띠며 작동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무슨 일이지?”

사람들이 중얼거렸다.

자세히 살피니 법도사가 당황하여 법진과 아이를 다시 살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비상사태에 당황한 것이다.

☆ ☆ ☆

<아, 나도 몰랐지… 그런 놈이 태어날 줄은. 솔직히 너희들은 알았냐? 뭐라 하지 마, 좀. 내가 제일 힘드니까.>

-OOO가 자신을 몰아붙이는 무장들에게 한 변명

☆ ☆ ☆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정식 3급 법도사인 제라프는 당황하여 중얼거렸다. 분명히 숫자가 뜰 시간이 지났는데도 숫자가 뜨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대법진은 작동을 멈추지 않고 탈릭 스톤을 끊임없이 소모하고 있었다. 그 비싼 탈릭 스톤을 말이다!

수식을 꼼꼼하게 살피고 법진에 이상이 없는지를 살펴보았지만 모두 정상이다 .

탈릭 스톤도 로만 백작가 행사에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되기에 습득한 지 얼마 안 된 녀석을 챙겨온지라 잔여량이 모자랄 리가 없었다.

매뉴얼에 상기되어있는 모든 이상상황을 머릿속으로 돌려보며 체크했는데도 이상한 점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이유는 단 하나인데…….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게?’

제라프는 속으로 자신이 축복식 진행에 대하여 인수인계 및 교육을 받을 때를 떠올렸다.

축복식의 대법진은 기본적으로 몸 내부의 반데르를 측정한다.

하지만 아이의 몸속, 그것도 100일밖에 안 된 아이의 몸속에 많은 양의 반데르가 있을 리 없다. 이제까지 최고기록으로 남아있는 수치도 88에 불과하다.

‘불과’라고 하지만 태양검 리비아스의 수치가 85였고 쿠라단의 수치가 86이었다.

그러니 이 대법진을 설계할 때는 기본적으로 97까지만을 측정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는 막무가내로 정한 수치가 아니다. 대법진 연구 시 가장 효율적으로 반데르의 흐름을 조정할 수 있는 수치가 97까지였기 때문이다.

그 이상 반데르를 투입 시 섬세한 제어를 하려면 탈릭 스톤의 소모량이 15퍼센트 이상 증가하게 된다.

미리 말했다시피 탈릭 스톤은 매우 비싸다.

그래서 인수인계 당시 위의 선배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만약 97이란 숫자가 넘는 아이가 있으면 어떠한 현상이 나타나는지…….

‘그런 현상이 지금 눈앞에 나타나고 있다니…….’

하지만 아직 확신할 수 없다.

만약 이런 사태가 날 경우의 매뉴얼은 없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로만 백작의 의아한 눈초리와 탈릭 스톤 사용량 추가청구를 막기 위해서는 최대한 빨리 이 사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실수로 인한 추가청구비용은 연구비에서 자동으로 삭감된다)

3급 법도사는 카드게임으로 딴 자격증이 아닌 것이다. 이럴 때 당황하지 않고 해결해야 프로가 아니겠는가?

‘우선 수식을 바꾸고… 이런 식으로 흐름을 바꾸면…….’

제라프는 잽싸게 수식 군데군데를 수정하고 자신의 엑사르(EXAR)를 발현하여 흐름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비록 나중에 추가된 기능인, 수치가 하늘로 표시되는 기능은 작동하지 않을지 몰라도 반데르의 측정 한계치는 사라지게 된다.

‘됐다!’

비로소 아이의 주위를 휘감고 있던 빛이 빨려 들어가며 법진이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휘황찬란한 빛이 터지며 그 결과가 제라프에게 측정되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지?”

“끝난 거 같은데 왜 수치는 뜨지 않는 거야?”

단상 앞에 몰려 있던 귀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저 빛은 축복식의 끝을 알리는 빛임이 틀림없다. 그들도 한두 번 씩은 봐왔던 빛이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숫자가 뜨지 않았다는 것이다! 로만가 소공자의 잠재력을 알려주는, 반데르 지수가!

객석의 사람들이 당황하는 동안 더 당황한 것은 제라프였다.

‘음……?’

제라프는 방금 자신에게로 들어온 측정결과가 올바로 나온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런 수치는 본 적이 없어서이다.

“무슨 일인가? 지금 어떻게 진행이 되고 있는 것인가?”

고민하고 있는 제라프에게 어느새 다가온 로만 백작이 안색을 굳히며 물어보았다

“아… 그게…….”

‘그래, 이왕 나온 수치… 백작에게만 말해주고 판단을 맡겨야겠다.’

제라프는 짧은 사이에 계산을 끝냈다.

자신의 실수는 아니지만 이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추가적인 문제를 불러올 수 있는 사안은 백작에게 말해주고 책임을 양분하는 것이 나으리라.

그런 결정을 내린 제라프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백작에게만 수치를 전달하였다.

“……!”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백작은 금세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단상에 서서 모여있는 귀족가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여러분! 갑작스런 사태에 당황하셨을 듯합니다. 우선 여러분을 초대한 주최자 입장에서 축하해오러 주신 여러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라프 경의 말에 의하면 현재 마법진에 사소한 오류가 생겨 수치를 제대로 표기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측정은 완료되었으며 그 결과를 지금 저에게 말해주었습니다.”

그 말에 모두가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비록 수치를 직접 보지 못하면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그건 사람에 따라서 다른 법이다.

대대로 신뢰와 강직, 충성을 가치관으로 지켜온 로만 백작이 이런 사소한 일에 거짓말을 할 리가 없는 법이다.

“제 두 번째 아들인 시안의 수치는… 57입니다!”

분명 높은 수치이지만 그와 동시에 미묘한 수치에 사람들은 모두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로만 백작보다는 조금 높고, 대공자보다는 낮은 적당한 수치였다. 혹시 모를 ‘라-반더’의 자질을 기대한 자들 모두 애매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이어 축하의 박수를 치기 시작하였다.

“축하하오, 로만 백! 로만은 앞으로 크나큰 두 개의 기둥을 얻었구려!”

“든든하시겠소. 앞으로 전쟁신의 무궁한 가호가 있길 바라오!”

로만가에서 벌어진 ‘이상했던 축복식’은 이렇게 끝이 났다.

그 후로 제라프는 따로 로만 백을 만나 수고비용으로 과할 정도의 추가비용을 받으며 일은 깔끔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리고 축복식 도중에 있었던 가벼운 해프닝은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차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월이 빠르게 흘러갔다.

2공자인 시안의 나이가 어느덧 열일곱이 될 때까지…….

☆ ☆ ☆

『반데르 관련 보고서』

<반데르란 무엇인가?>

인간의 가능성은 무한하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평범한 인간이 하늘을 날 수 있는가? 평범한 인간이 하리쟌과 싸우고 집채만 한 바위를 들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인간의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것은 단지 무한한 방향으로 향하여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일 뿐. 인간 개개인의 가능성은 어찌 보면 명확하다.

만약 반데르의 존재가 없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반데르’

고대어로 ‘축복’이라는 단어에서 따온 이 입자는 말 그대로 인간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존재이다. 생명체의 내부에 존재하며 인간 기존의 한계 따위는 가볍게 박살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미지의 입자.

이 입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상식에서 벗어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산을 부서트리고 맨몸으로 폭풍과도 맞서고, 혼자서 능히 일반인 천 명을 당해낼 수 있는, 그런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반데르의 존재가 입증된 것은 400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위대한 가능성을 입증한 자들은 그 이전에도 남아 구전으로, 벽화로,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1000년 전 하리쟌과 거친 자연환경으로부터 고통 받고 흩어져 있던 부족들을 처음으로 통합한 대제 브록시안이다.

대제 이후로도 반데르(BANDER)의 사용자, 통칭 <반더(BANDER-발음이 다르다)>는 꾸준히 관찰되어 왔다.

그들은 용사라고 불리었고, 전사라고도 불리었으며 때로는 대장군으로, 때로는 영웅으로, 때로는 왕으로 각지에서 활약했다.

이러한 놀라운 세상의 축복인 ‘반데르’는 태어나서 평균적으로 100일 정도까지는 외부의 어떤 요소도 반데르의 증가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오직 아이 스스로의 선천적인 자질만이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고로 축복식이란 새로 태어난 인재가 ‘반데르’에 어느 정도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지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다.

…<중략>…

이 수치는 왕가에서 귀족가를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왕국이 건설될 시절 왕가에서 미리 경쟁자를 알아놓고 견제, 혹은 제거하기 위하여 귀족가의 축복식에서는 반드시 그 수치가 표기되도록 법령을 바꾼 것.

안 바꾸면 반역이 되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귀족들은 재능을 낱낱이 공개하는 이 위험한 의식을 행할 수밖에 없었고, 특히 강대한 귀족가의 경우에는 하기 싫어도 이미 축복식을 실행한 귀족들의 눈치가 보여 실행할 수밖에 없었다.

…<중략>…

+추가

축복식이 문화로 자리 잡은 후 단순한 행사임이 아니라 그 집안의 힘을 나타내는 요소로 자리 잡았다.

한번 할 때마다 대법도회와 교구에 지불해야 하는 탈란트가 입이 쩍 벌어질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손이 많은 영세한 귀족가의 경우는 그들 모두 축복식을 할 여력이 없어 재능이 있어 보이는 몇 명만 선택하여 하는 경우도 많았고, 반대로 비록 작위는 낮더라도 그 세력이 강대하면 여러 번의 축복식을 행하여 자신의 세를 과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엑자일 대법도회 정기월간지

<이 달의 이적> 11월 발간호, 사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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