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2화 (3/81)

<2. 불씨>

왕국의 수도 로아-티안의 남쪽 문을 나와 마차를 타고 30분 정도 향하다 보면 투박하지만 아름다운 백색의 외관을 가진 저택을 찾아볼 수 있다.

왕국 수도의 외곽에 존재하는 이 저택은 뒤로는 수려한 광경의 콘-티안 산맥을 등지고 있고, 정면은 저 멀리 수도의 아름다운 왕궁인 토베-티안(TOBBE-TIAN)을 바라보고 있다.

석양이 질 무렵 가주를 방문할 기회를 얻은 자라면 저택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가주실에서 석양 아래 붉은빛에 덮여가는 아름다운 왕궁의 절경을 운 좋게 감상할 수도 있다.

이러한 위치와 저택의 외관을 보면 어떤 귀족가나 돈 많은 부잣집의 별장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저택의 정체는 다름 아닌 티안 전체에 이름 높은, 로아-티안의 수호자. 로만 백작이 거주하고 있는, 백작령이다.

로만의 백작령에 처음 방문하는 사람은 두 가지에 놀란다.

첫 번째, 저택의 주위에 위치한 수려하고 아름다운 경관에 놀라고.

두 번째, 오직 저택 하나로만 구성되어 있는 너무나도 소박한 규모의 백작령에 놀라게 된다.

일반 백성들에게는 커다란 규모이지만 자그마한 자작의 성에도 상주인원이 일이백을 가볍게 넘어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저택의 크기는 항상 역대 근위기사단의 장을 맡아온 명문가인 로만가의 위치를 대변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작다.

하지만 로만 백작가는 오로지 자신들의 무력을 쌓고 티안을 지키는 데 충실할 뿐, 자신들의 세력을 쌓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렇기에 오로지 왕실 직할령에 위치한 저택 하나와 소수의 가신들만을 거느리고 수도 근처에서 왕가를 수호하는 임무에 충실하다.

이러한 것들 때문에 로만 백작가의 명성은 더더욱 높아졌다.

명예를 지키고 왕가에 충성하는 전형적인 무장의 표본이라고.

이러한 명예로운 로만가의 저택 꼭대기에 위치한 집무실에 오늘 손님이 방문해 있었다.

“여기서 수도의 경관을 보는 것도 오랜만입니다……. 제가 은퇴하면 이런 자리를 찾아서 꼭 저택을 하나 지어야겠습니다. 허허.”

로만 백작의 집무실에서 저 멀리 보이는 로아-티안의 광경을 보며 케르벨 백작은 나지막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이곳에서 보는 경관은 로만 백작과 친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유명했다.

로만 백작과 친한 이들은 답답할 때 이 광경을 보고 싶어 일부러 로만 백작과 친하게 지낸다고 농을 던지는 이들도 있었다.

“하하! 항상 말하지 않나. 내가 좋아하는 보물들 중 하나라고. 그나저나… 이번 일은 어찌 진행되고 있나. 자네가 오기 전에 미리 보내준 서신으로 대충은 들었네만…….”

왕국의 역사를 기록하고 왕가의 스승을 담당하는 케르벨 백작을 바라보던 로만 백작은 식탁 위에 준비된 차를 마시며 이번 방문의 본론에 대하여 물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전해드려야겠지요……. 우선 수호대의 선발공고가 날아온 건 알고 계시지요?”

“그거야 모를 수가 없지. 대북벽의 수호대를 뽑는 일인데… 벌써 오 년이 돌아왔나 보군.”

로만 백작은 그 당시를 떠올리며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 ☆ ☆

<대북벽>

이미 400년 전에 멸망한 제국과 키안 왕국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장벽을 말한다.

제국이 멸망 전 사용한 금지된 대마법은 남아있는 제국의 영토를 모조리 오염시켰고 이미 저 너머 대수림에서 넘어온 하리쟌의 소굴이 된 지 오래였다.

방어선을 펼치지 않으면 하리쟌들이 넘어와 라-시안 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들 것을 우려한 7왕국은 하리쟌들이 오염된 영토를 모두 차지하고 라-시안 쪽으로 넘어오기 전에 제국과 7왕국 사이에 지어져 있던 엄청난 길이의 장벽을 개조하고, 보수하고, 연장하는 7년의 대공사 끝에 키안 왕국과 오염된 제국의 영토 사이에 대북벽이라는 방벽을 세우는 데 성공한다.

방벽을 세우기로 한 결정은 실로 훌륭하였다.

제국이 멸망한 지 불과 10년 만에(즉, 방벽이 완성된 지 3년 만에) 하리쟌들은 그 놀라운 번식력으로 제국의 영토를 모조리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었다.

비록 자기들끼리 영역다툼을 하고 싸우느라 정신이 없어 방벽까지 밀려나온 개체들은 상당히 힘이 약한 개체이지만 뿔 하나의 하리쟌도 마을 하나 몰살시키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대북벽은 그러한 하리쟌들을 막아 세우는 데 훌륭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점점 시간이 갈수록 하리쟌들의 세력이 강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대부분이 뿔 하나 급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강해져 이제는 기본이 뿔 두 개이고, 간간이 뿔 네 개의 괴물들도 출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병사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에 7왕국들은 일반 병사들이 아닌, 전문적으로 반데르를 수련한 무장들, 반더들을 투입하여 북벽을 수호하기로 결정하였다.

비록 북벽과 접경한 나라는 키안 왕국 하나뿐이지만 대북벽을 지키지 못하고 무너지면 다른 나라들도 막대한 피해를 입는 것은 마찬가지이기에 이해관계를 뒤로 미루어놓고 7왕국이 합심하여 수호대를 결성하였다.

대북벽을 지키는 수호대의 특징은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하나, 너무나 위험하다.

둘,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을 얻어 온다.

“음… 저번에는 나라샤 후작 쪽에서 13명이 들어갔고… 왕가 쪽에서는 11명이 들어갔지……. 올해는 차이가 더 벌어질 수도 있겠지?”

로만 백작이 오 년 전의 수호대 선별식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수호대는 위험하기는 하지만 얻을 것이 너무나도 많다.

보물 중의 보물, 탈릭 스톤은 시작에 불과하다.

그곳에 간 무장들의 사망률은 50퍼센트가 넘지만 죽음을 겪는 생사의 위기 속에서 단련된 무장들의 전투력은 놀라울 정도로 상승된다.

그리고 그렇게 대북벽에서 돌아온 무장들은 가문에 엄청난 힘이 되어준다.

이 때문에 각 측 세력이 자신의 인재를 수호대에 들여보내기 위하여 총력을 기울이기 때문에 수호대에 들어가는 숫자는 곧 세력과 얼추 비례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각 귀족가와 왕가가 물밑에서 주고받으며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 때문이다.

오 년 전에는 후작 측이 13명, 왕가 측이 11명, 중립세력이 6명이 들어갔다. 자신이 들어갔던 30년 전과는 확연한 차이이다.

30년 전 자신이 들어갔을 때는 왕가 측이 25명, 나라샤 후작을 중심으로 한 귀족가 측 세력은 단 7명에 불과했다. 그만큼 벌어져있던 세력 차가 단 25년 만에 역전이 된 것이다.

그리고 올해는 그 차이가 더 벌어질 수도 있다.

“그렇습니다. 사실 들어가는 자들은 큰 문제가 아니지만…….”

“그렇지. 이제 저번 기수의 수호대가 나오면… 세력판도가 바뀌겠군. 다들 잘 여물었을 테니 말이야…….”

대북벽으로는 엄선되고 엄선된 인재만 보내진다. 하지만 그 빈자리는 크지 않다. 각 가문들은 핵심 세력을 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 눈앞에서 상대가 칼을 갈고 있는데 핵심세력을 그 위험한 대북벽으로 보내는 것은 전쟁 중에 손에 들고 있는 칼을 벼린다고 대장간으로 보내는 것과 똑같다.

하지만 그들이 나중에 돌아올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북벽으로 뽑혀 간 인재들은 강철이 제련되는 것처럼, 오 년 동안 지극히 정련되고 벼려져 수도로 돌아오게 된다.

오 년을 하리쟌과 죽고 죽이며 살아왔으니 그 기세와 흉포함은 말할 것도 없다.

“…아마 나오자마자 난장판이 될 것입니다, 수도가.”

“그럼… 이번에 온 목적이 단순히 날 보러 방문한 것도 아니겠구먼…….”

로만 백작이 씁쓸한 표정으로 케르벨 백작을 보며 말했다. 이 강직한 친구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얼추 짐작이 가서 그런 것이다.

“리안 가지고는… 수도 상황을 억누를 수 없다는 말인가?”

“…네. 리안 경의 실력이야 알지만… 리안 경과 3근위기사단 정도로는 나라샤 후작 측의 과격한 행위를 막지 못 할 것입니다.”

“음…….”

로만가의 대공자 리안 폰 로만은 이미 2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반더의 2단계, 익스퍼트의 벽을 깨고 3단계인 마스터의 경지에 들어섰다.

비록 어린 나이이지만 최근 기록에서 93,000이라는 높은 반데르 수치를 기록한 리안 대공자는, 이미 콘-티안 산맥의 주기적인 토벌전에서 그 실력을 입증하였으며 이미 ‘로만의 젊은 사자’라는 호칭을 얻었을 정도이다.

그리고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제3근위기사단의 역대 최연소 단장을 맡으며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앞으로 다가올 사태를 억누르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케르벨 백작의 말을 들은 로만 백작은 무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생각이 정리된 터인지 그가 입을 열었다.

“우선 자네가 걱정하는 바는 무엇인지 알겠네. 자네는 이번 귀환으로 인해 시작될 ‘이양전’을 걱정하는 것이겠군.”

“네. 나라샤 후작 측의 성향을 보면… 이번 ‘이양전’은 쉽사리 넘어갈 것 같지 않습니다. 아마 수호대가 돌아오면 본격적으로 시작하겠지요…….”

“일단 내 의견은… 거절일세. 이건 나까지 나설 일은 아니야. 중립을 지켜야 한다네.”

그 말을 들은 케르벨 백작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왕당파 쪽에서 자신에게 지원을 요청하였고, 자신도 평화를 유지하는 쪽을 바라고 있었던지라 이런 제안을 들고 오기는 했지만 이는 기사단장인 로만 백작에게 너무 무리한 요청이었다.

왕실 기사단은 대대로 ‘이양전’에는 끼어들 수 없었다.

케르벨 백작의 표정을 지켜본 로만 백작은 한마디 더 덧붙였다.

“하지만 자네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 자네는 이번 사태가 너무 격하지 않게, 피를 보지 않고 흘러갔으면 하는 입장이겠지. 나라샤 후작은 강경파이고, 목적을 위해서는 꽤나 과격하니까.”

나이 차는 있지만 오랫동안 알고 지내며 친구로, 조언자로 서로에게 힘이 되었던 사이인 로만 백작은 케르벨 백작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네, 그렇습니다. 이대로 진행되면… 수도는 난장판이 됩니다.”

“내가 그런 자네를 위해 해결책을 주겠네. 시안 이 녀석을 데리고 수호대가 아닌 수도로 가게나. 분명 자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야.”

“…대공자가 아닌 2공자 말입니까?”

케르벨은 이해를 하지 못하였다. 겨우 17살의 시안이 무슨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로만 백작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케르벨 백작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케르벨 백작은 아직 자신의 둘째 아들에 대해 잘 모르기에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이다.

어차피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둘째 녀석을 집안에만 보듬어 둘 수 없다. 바깥세상으로 내보낼 때가 되었다.

아들 녀석은 이제까지는 책으로만 세상을 접해오고 말로만 세상을 배워왔다. 이제는 직접 몸으로 느낄 때가 되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번 기회에 자신과 친구, 아들의 고민을 모두 해결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좋으리라.

‘후… 걱정되는구나. 한창 혈기왕성할 나이인데… 괜한 짓을 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되었지만 더는 미룰 수 없다.

여기까지 생각한 백작은 이제까지 자신이 숨겨왔던 사실을 케르벨 백작에게 말하며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기 시작하였다.

☆ ☆ ☆

『탈릭 스톤과 하리쟌에 대한 단문』

<탈릭 스톤과 하리쟌>

하리쟌은 고대어로 ‘재앙’이라는 뜻이 붙을 정도로 인간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녀석이지만 녀석이 죽으면서 남긴 시체는 인간에게는 축복과도 같다.

껍질은 질기고 단단하기 그지없으며, 피는 영약으로 사용할 수 있고, 고기는 그 맛을 본 사람은 천금을 들여서라도 다시 찾는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요소들이 아니다.

재앙 속의 희망. 다른 말로 판도라라고 불리는 탈릭 스톤. 이것이 하리쟌의 몸에서 나오는 핵심 중의 핵심이다.

세상을 뒤트는 힘, 엑사르(EXAR)를 사역할 수 있게 해주는 원천.

특별한 몇몇만이 두서없이 다룰 수 있었던 미지의 힘, 엑사르를 탈릭 스톤과 접목시켜 다루는 법을 체계화시킴으로써 전국시대의 지역 대륙 구석의 소국에 불과했던 제국은 단 몇십 년 만에 대륙을 통일하고 수백 년간 대륙을 지배할 수 있었다.

비록 칼-굴과의 전쟁에서 공멸하고 말았지만 수백 년간 대륙을 지배한 제국의 힘의 결정체인 엑사르를 사용하게 해주는 매개체가 탈릭 스톤이다.

이름은 ‘STONE’이지만 채굴이 불가능하고 오직 하리쟌의 몸에서만 나와 그 희소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게다가 사용가치는 국력을 좌지우지할 정도이니 국가에서 탈릭 스톤의 획득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

-대법도회 강의록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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