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4화 (5/81)

<4. 세상 속으로>

<죽을 위기를 넘어야 강해진다고? 그런 위기가 안 오는 것이 강자다.>

-800년 전의 라-반더,

해일을 가르는 자, 파레인

☆ ☆ ☆

‘죽음, 혹은 죽음의 위기.’

이는 자신의 가치관과는 정 반대에 위치한,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였다. 실제로 그는 역사서에서 보았던 몇몇 무장들의 이야기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그 옛날 자신을 단련하기 위해 대북벽을 홀로 넘어간 남자, 이클립스다

죽음의 위기에 처해 필사적으로 싸우는 것은 이해가 갔다.

하지만 강해지려고 자신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처넣다니?

이건 완전 본말이 전도된 행위가 아닌가.

대북벽 너머는 ‘인세에 소환된 지옥’이라는 소문이 이미 일반인들 사이에 자자했다. 집안에만 박혀 지내는 자신도 알 정도로…….

혹시 몰라 닥쳐올 위기를 넘기고 살아남기 위해 평소 강해지려고 수련하는 것이지, 강해지려고 자신을 일부러 죽음의 위기에 몰아넣다니?

실제로 이클립스라는 무장은 그랑-반더라는 경지를 이룩한 무장이었음에도 100년 전, 북벽을 넘어간 이후로 지금까지 소식을 들을 수 없다. 죽었다는 뜻이다.

놀라운 것은 죽음을 무릅쓰고 수련한 이 무장을 존경하는 사람이 지금도 수두룩하다는 것.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다지만… 시안 입장에서 저 이클립스라는 사람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무장 중 하나였다.

이렇듯 자신은 철저히 생존을 추구하고 있었기에 평소 수련을 빙자한 자살을 철저히 무시하며 배격해왔다.

여기에는 로만 백작도 동의하였기에 강하게 몰아붙이지는 않았다.

놀랍게도 그의 형, 리안은 저 수련법의 맹신도 중 하나였다. 자신이 자살수련을 대놓고 비판하고 다니지 못하는 이유도 형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고민에 빠져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지금의 상황을 타파할 방법은 오직 저 방법뿐임을 온몸이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저 생각을 처음 머릿속에 떠올린 순간, 심장이 두근거리고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머릿속의 또 다른, 이제까지 애써 무시해왔던 무의식이 사방에서 속삭였다.

저 길이 네가 가야 할 길이라고. 저 길로만 간다면… 자신이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면… 이제까지 그랬듯이 자신의 몸과 머리는 또다시 길을 인도하여 주리라.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벽을 박살 낼 수 있는 방법을…….

사실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모른 척했을 뿐이다. 다른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애써 부정하던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확실해졌다.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실제로 죽을 수도 있지만 방법은 단 하나뿐이라는 걸…….

<예전의 그 길을 되찾고 그려내기 위해서는 자신을 죽음에 몰아넣어야 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시안은 결론을 낼 수 있었다.

‘포기하자.’

그렇다, 포기하면 되는 것이다. 비록 자신의 무의식이 끊임없이 외치고 있지만… 그래서 좀 찝찝한 기분이 계속 들기는 했지만…

인간이란 자고로 이성의 동물이 아니겠는가? 미쳤다고 죽을 위기에 자신을 몰아넣는단 말인가? 끊임없이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생명의 본질이다.

아버지도 항상 말씀하셨다. 항상 공명심에 눈멀지 말고 자신의 목숨을 최우선으로 챙기라고……. 그의 형은 아버지의 말을 잘 지키지 못하는 것 같지만 착한 아들인 자신은 아버지의 말을 매우 잘 지키고 있으며, 앞으로도 잘 지킬 생각이었다.

그리고 자기합리화일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안전한 수도 근처에서 어떻게 죽을 위기에 처한단 말인가? 여러모로 포기하는 게 맞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가 되니 마음이 매우 편안해졌다.

다른 길이 있을지 몰라 포기하지 못하고 몇 달을 고민했지만… 방법이 하나뿐인 걸 안 이상, 그리고 그 길이 불가능한 것을 안 이상(적어도 자신에게는) 완전히 포기하고 아주 마음 편하게 다른 길을 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 이제부터는 사교계에 나가 보기도 하고… 악기도 좀 배워 보고… 승마도 좀 하고… 귀족으로서 교양을 쌓는 것이다!’

시안은 날이 밝으면 자신의 확고한 결심을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말씀드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해보기로 했다.

‘하, 좋다… 진작 이렇게 할걸. 마음이 편안하구만…….’

무의식의 외침 따위는 저 멀리 한구석에 처박아버린 시안은 수많은 귀족가의 여성에 둘러싸여 능숙한 솜씨로 악기를 다루고 교양을 자랑하는 미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침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밤은 왠지 잠이 잘 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 ☆ ☆

날이 밝았다. 오랜만에 상쾌한 얼굴로 일어난 시안은 미소를 지으며 바깥을 바라보았다.

오늘부터 무엇을 할까 즐거운 고민을 하며 시안은 옷가지를 정비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다른 귀족가에서는 하녀들이 수발도 들어주고 옷도 입혀주고 세수도 시켜준다는 데 우리도 그러면 안 되냐는 이야기를 예전에 꺼냈었는데 그 말을 들은 아버지의 표정을 본 후로는 깔끔하게 포기하였다.

아래로 내려가니 이미 어머니와 아버지는 앉아 계시고 옆에서 하녀들이 열심히 식사 수발을 들고 있었다. 어제저녁 케라벨 백작님이 가신 이후로도 무언가 이야기할 것이 많으셨던지 늦은 시간까지 대화를 나누시던데, 그래서 그런지 두 분의 표정은 살짝 피곤해 보였다.

“오, 시안 왔느냐. 어서 식사부터 하거라.”

그렇게 말한 부모님은 다시 식사에 집중하셨고 시안 또한 식사에 집중하였다. 식사 중에는 소소한 이야기만 오갈 뿐 중요한 주제는 오가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고 하인들이 차를 내오자 눈치를 보던 시안은 뭔가 분위기가 평소와는 다름을 느꼈다.

아버지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이고, 어머니는 식사가 끝나자 자리를 비켜준다며 저 안쪽으로 들어가셨다.

“음… 시안, 어제 케르벨 백작이 왔다 간 것은 알고 있지?”

적막을 깨고 말을 꺼낸 로만 백작은 시안을 지긋이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예, 아버지.”

“그래. 이번 수호대 선발시기에 대한 이야기란다. 어제 케르벨 백작이 와서 나에게 이야기해주고 갔지. 수호대의 선발식이 다가온 건 알고 있겠지?”

여기까지 말한 로만 백작은 잠시 말을 멈추고 시안을 바라보았다.

수호대의 선발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시안도 알고 있었다. 5년 전 집안에 난리가 났었는데 모르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의 형인 리안이 수호대로 가겠다고 엄청나게 고집을 피웠던 것이다. 셀린느 부인이 결사반대를 외치며 말렸기에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지만 시안은 그 당시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곳으로 끌려가면 실력이 강한 순서부터 위험한 곳으로 끌려간다는 것을 안 것도 5년 전이다. 그 이후로는 누구에게도, 심지어 아버지에게도 실력을 감추고 있는 시안이었다.

자신은 형과 달리 절대로 갈 생각은 없었지만 세상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조금의 귀찮음을 감수하기로 하고 내렸던 결정이었다.

피할 수 없다면 모르지만 자처해서 위험한 곳으로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듣기로 가장 위험한 곳인 대북벽 트라즈-13섹터는 대륙에 단둘뿐인 라-반더 중 하나와 엑자일 대법도회의 일곱 별 중 셋이 배치된 것도 모자라, 태양신과 전쟁신의 대주교 급 인재들이 줄줄이 배치되어서 지키고 있다고 한다. 인세의 지옥과도 같다는 소리다.

“네.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 정확한 시기야 모르지만요.”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곧이지.”

“그렇군요. 그런데 무슨 일인지요? 아, 설마 형이 또 이번에 그쪽으로 가겠다고 한 건가요?”

그 말을 내뱉은 시안은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그곳으로 왜 자처해서 부득불 들어가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의미였다.

형은 자신과는 달리 유명인사에 실력을 몽땅 드러내고 있기에 그곳에 가게 되면 아시탈 급, 재수 없으면 트라즈 급의 지역에 배치될 것이 틀림없다.

심심찮게 네 개의 뿔을 가진 하리쟌들이 돌아다니고 마스터들, 그리고 심지어 그랑-반더들도 죽어나가는 그런 곳에 수련을 위해 들어가려고 하다니… 이번에도 어머니가 눈물을 한 바가지는 쏟아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다.

“아니, 네 형은 그곳으로 가지 않는단다. 오 년 전과 달리 리안은 이제 어느 정도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있으니… 섣불리 그런 곳으로 빠져나가 왕가 쪽에 부담을 주기는 싫겠지. 네 어머니에게는 다행으로 말이다.”

“정말 다행이네요. 오 년 전에는 정말……. 휴… 가겠다는 가문이 넘쳐나는데 그런 곳을 배려해야지요.”

‘굳이 죽으러’라는 말을 ‘가겠다’는 말 앞에서 생략한 채로 시안이 대답했다.

“가겠다는 가문은 넘치고 인재들도 많지만 믿을 만한 이가 드물지. 모두 시커먼 속을 숨기고 있으니… 그래서 갈수록 선발식이 치열해지는 것이고.사실 어제 이야기한 바로는 너도 그 목록에 올라가 있었다.”

로만 백작이 무슨 별세계 이야기 하는 듯 여유만만인 그의 아들을 보며 조금 놀려줄 요량으로 말했다.

“예? 아니, 무슨 말씀을… 아버지?

예상대로 그의 둘째 아들은 말도 안 된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며 화들짝 놀랐다.

“왜 그리 놀라느냐? 선발식에서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실력이 아닌 신뢰이다. 실력 있는 인재야 많지만 모두 나라보다는 파벌, 파벌보다는 가문, 가문보다는 개인이 우선이지. 그렇게 치면 우리 가문만 한 곳이 없다. 이제 슬슬 알 녀석이 왜 그러느냐?”

“그거야 그렇지만…….”

“하지만 걱정 말아라. 거절했단다. 왕가에 대해 우리는 책무를 지고 있지만 강제할 사람이야 없지. 나도 그런 험지에 자식을 보낼 생각은 없단다. 이번에 너를 부른 이유는 다른 이유다.”

“무엇입니까?”

다행히도 최악의 상황을 모면한 시안은 조용히 아버지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알다시피 너도 이제 나이가 찼으니 슬슬 가문을 위한 책무를 수행해야 한다. 더 이상 어린 나이는 아니니까. 어제 케르벨 백작과 한 이야기는 그것이다. 이제 수호대 선발이 진행되면 수도는 평소보다 훨씬 바빠지게 된다.

수호대까지 갈 필요는 없지만 이번 기회에 수도에 머물면서 형을 도우며 여러 가지를 배워 오거라.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아버지… 그렇게 갑작스럽게……?”

“언제까지 가문에 얹혀살 생각은 아니었으리라 믿는다. 시안, 너도 이제 성인이고 왕가와 가문의 혜택을 입었다면 그에 걸맞은 책무를 수행할 때가 되었다.”

안절부절못하며,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기 싫어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아들은 보며 로만 백작은 쐐기를 박았다.

아들이 지금은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지만 상황이 좀 느긋해지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려고 할 것이다. 그 전에 못박아두려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어쩔 수 없지요.”

잠시 고민하다가 의외로 순순히 순응하는 아들을 보며 로만 백작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요즘 사춘기라 통 말을 듣지 않는 아들이 거부하면 또 골머리를 썩어야 하는데 다행히 자신이 생각한 정도로 철이 없진 않은 것 같았다.

“음? 그래? 다행이구나. 그렇다면…….”

로만 백작은 다시 이야기를 진행하며 어제 케라벨 백작과 이야기하며 결정한 세부사항을 아들에게 전달하기 시작했다.

세상경험 없는 둘째 아들이 걱정되긴 하지만 이것이 최선이라 믿으며… 나머지는 케르벨 백작이 잘 인도해주리라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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