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가란-티아>
‘근 열흘 사이에 수많은 것이 바뀌었구나…….’
시안은 언제나 북적거리는 수도의 거리를 옆의 선임들과 천천히 걸으며 생각했다.
‘네가 무슨 자리를 맡게 될지는 케르벨 백작가에 가면 자세히 전해 줄 것이다. 로만가의 명성을 드높이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귀족으로서의 품격을 지키고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명심하도록 하고, 제발 사고 치지 말거라!’
집을 떠나오기 전에 아버지인 로만 백작이 신신당부한 말이다. 뭔가 반박을 하고 싶었는데 자신이 생각해도 확신이 없는지라 그냥 듣고만 있다가 나왔다.
왕궁, 토베-티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케르벨 백작의 저택은 로만가의 저택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위치하여 있기 때문에 집을 떠나 마차로 세 시간 정도가 걸려 도착했다.
도착한 자신을 마중한 케르벨 백작은 간소한 환영식을 마친 후 곧바로 자신이 어떤 일을 하면 되는지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시안은 그날부터 케르벨 백작가에 머물며 지금까지 나름 성실히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수도 치안 유지대라…….’
수도 치안 유지대, 가란-티아(GUARRAN-TIA).
수도 티안에서 왕궁을 제외한, 수도 전역의 치안을 맡는 이들을 통칭하는 호칭이다.
가란-티아는 단순한 어중이떠중이 집단이 아니다. 왕궁을 지키는 곳이 왕실 근위기사단이라면, 그 외의 수도를 지키고 치안을 유지하는 임무를 맡은 곳이 가란-티아다.
수도는 특성상 다른 도시에 비해 고위귀족들이나 강자들이 많기 때문에 대형사고가 터지는 건수가 굉장히 높은 편이었다. 자존심 넘치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놈들을 모아놓으니 그러한 사고가 안 터지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이러한 사고가 일어날 경우 신속한 수습을 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경비, 치안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도 상당 수준의 직책과 무력이 필요하다. 어버버한 놈으로 채워놓으면 사고 친 놈이 도망가 버리거나 제어가 안 되는 것이다.
그런 목적으로 입안되어 만들어진 가란-티아는 개개인에게 상당한 수준의 무력이 요구되고, 그에 더불어 높은 수준의 현장 지휘권과 더불어 제한된 면책권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가란-티아는 까다로운 입단으로 유명하다. 여러 가지 시험과 더불어 인적성 검사가 준비되어 있으며 실적평가를 하여 판단력과 무력이 떨어진다고 판단되면 가차 없이 튕겨 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수준의 봉급과 각종 권한, 더불어 꾸준히 직급이 올라가면 왕실 근위기사단으로도 들어갈 수 있는 특별채용권이 있기에 항상 높은 경쟁률을 자랑하고 있었다.
자신의 형인 리안도 처음에는 여기서부터 시작하였다고 들었다. 가문의 후광을 등에 업고 가기 싫다고 하며… 비록 1년도 안 되어 왕실 근위기사단으로 올라갔지만 말이다.
하지만 자신은 그러한 후광을 기꺼이 이용할 준비가 되어있었기에 시험을 보겠냐는 케르벨 백작의 물음에 당당하게 추천장을 받고 낙하산으로 들어갔다.
첫날 들어간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눈초리는 정확히 세 종류였다.
하나는 소문의 2공자에 대한 호기심.
또 하나는 저렇게 허약해 보이는 녀석이 진짜 로만가의 2공자인지에 대한 의심.
마지막으로 후광을 업고 들어온 녀석에 대한 경멸.
백작가의 이름이 있기에 대놓고 경멸과 의심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따돌리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더불어 자신을 은근슬쩍 파악하려는 눈초리도…….
‘당장 옆의 선임들부터 그러고 말이야.’
신입은 선임 둘과 순찰을 돌며 셋이 팀을 이루어 일주간의 교육기간을 가진다. 교육기간이 거의 끝나감에도 선임들은 정말 기본적인 것만 가르쳐 줄 뿐 자세한 사항은 하나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듣기로는 어느 남작가의 자제와 상인가의 자제라는데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이 대놓고 느껴졌다.
하지만 자신에게 딱히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꼭 인수인계해야 할 항목을 건너뛴 것도 아니니 그냥 이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서로에게 관심을 안 두는 것이 훨씬 더 편하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일도 편했다. 이야기를 듣기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가 터진다 하여 골머리를 앓는다는 이야기를 들어 긴장하고 있었는데 이제까지는 아무런 일도 터지지 않았다.
변화한 환경이 생각보다 자신의 마음에 훨씬 들어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시안이었다.
일도 편한 데다 집에 가면 백작님의 아리따운 따님인 샬롯 양과 나누는 대화도 즐거웠다. 조신한 샬롯 양을 보면 어머니인 셀린느 부인이 생각나고는 했다.
이상하게 샬롯 양은 자신의 생활태도를 보고 묘한 눈초리로 쳐다보긴 했지만 말이다.
기분 좋은 생각을 하던 중 저 멀리서 뭔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 ☆ ☆
수도에서 곡물과 향신료의 유통을 책임지고 있는 라론 상단주의 둘째 아들인 타론은 옆의 신입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에 로만 백작가의 2공자가 들어온다는 이야기에 모두가 기대를 가졌다.
이전에 들어온 리안 대공자는 가란-티아의 모든 기록을 최단 시간 내로 갈아치우며 최연소로 왕실기사단에 입단하는 역사를 세웠으니까.
다들 의견이 분분하였다. 2공자가 과연 1공자의 기록을 갈아치우고 새로운 역사를 세울 수 있는지. 비록 낙하산으로 들어왔다지만… 로만 백작가의 자제라면 보증수표 아니겠는가? 적어도 타론 자신은 쓸데없이 시험을 치르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2공자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 1주에 걸쳐 타론은 자신의 기대감이 점점 실망감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가란-티아의 행정관이 길을 잘못 들어 찾아온 줄 알았다. 그 정도로 무장의 느낌이라고는 전혀 나지 않는, 그런 녀석.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무장은 결국 반데르로 강함이 갈리고, 2공자가 찍은 57이라는 수치는 손꼽힐 정도의 수치이다(타론 자신은 33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금방 착각임을 알게 되었다. 무력은 비록 확인해본 적이 없어 모르겠지만 이 녀석의 생활태도를 보니 무력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이런 녀석이 강하다면 이는 전쟁신의 치명적인 실수임이 분명하다! 그럴 정도로 나태했다.
가란-티아의 특성상 무력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기에 기본적인 치안업무 외의 시간은 대부분을 수련을 하며 보냈다. 자신만 하여도 가란-티아에 배정되어 있는 전용 숙소에서 머물며 동기들과 함께 하루 종일 수련을 하고 업무를 보내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2공자라는, 시안 이 녀석은 전혀 달랐다.
<칼 출근, 칼 퇴근, 월급 받은 만큼>
1초라도 일찍 온 적이 없고 끝나자마자 본관에서 뛰쳐나가는 녀석의 행태를 보니 어이가 없을 뿐이다.
심지어 저번에는 바로 옆 건물에서 사건이 터졌다는 소식이 들려와 달려가고 있는 도중에 근무시간이 끝났다고 집에 가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 사건은 성질 더럽기로 소문난 나서스 백작이 얽힌 사건이었다. 그 사건의 뒤처리를 하느라 저녁수련도 빼먹고 녹초가 되어 숙소로 돌아온 것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린다.
그 이후로 결심했다. 앞으로 일이 터지면, 이 녀석에게 몽땅 떠넘겨 버리겠다고! 이렇게 옆의 동기인 캐란과 합의한 그는 적어도 자신의 교육기간이 지나기 전에는 사건이 터지길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기회가 왔다! 저 멀리서 뭔가 깨지고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옆의 신입과 동기를 끌고 요란한 소리가 나는 사건의 진원지로 달리기 시작했다
☆ ☆ ☆
가란-티아들의 동선은 유기적으로 배치된다. 평소 감시하는 구역은 분할하여 돌아다니되 사건이 생기면 즉각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조원들이 달려갈 수 있도록.
타론과 캐럿이 평소에 담당하고 있던 구역은 평상시는 그다지 큰 사건이 잦은 구역이 아니었다.
중상층의 평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구역이기에, 하류 귀족들이나 부유한 상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구역이나(어딜 가나 어중간한 녀석들이 항상 문제인 법이다) 최하층의 주민들이 사는 트라안 거리 같은 구역보다는 훨씬 평화로웠다.
그렇기에 자신의 조에 신입이 들어온 것인데 무슨 마가 낀 것인지 일주일도 안 되는 기간에 사건이 둘이나 터진 것이다.
‘아니지, 하나는 행운인 건가.’
아직도 며칠 전 발생한 사건을 생각하면 이가 갈리는 타론은 이번 사건이 자신의 옆에 있는,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신입을 제대로 엿 먹여줄 수 있을 만한 사건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했다(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가 보니 이미 거리는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꼴을 보니 거리 한가운데에서 싸움이라도 난 듯한 모양새처럼 보여 타론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서 발생한 싸움의 대부분은 보통 평민들끼리의 난투극이나 용병들 간의 싸움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 힘없는(?) 계급들이 수도의 경비를 책임지는 가란-티아에게 반항할 수 있을 리 없고, 그렇다는 이야기는 이번 사건은 도착하는 순간 종결이 된다는 것이다. 신입의 기만 세워주게 생겼다.
이대로 고이 신입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안타까워하며 좌판 거리로 진입하였는데 상황은 타론이 생각하던 것과는 다소 다른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 ☆ ☆
선배들이 갑자기 허겁지겁 소란이 난 방향으로 뛰길래 덩달아 뛰기 시작한 시안은 이 선배들이 참 직업의식이 투철하다고 느꼈다. 이 정도로 시민들의 안녕을 바라는 태도를 가지고 있기에 가란-티아의 일원으로 활동할 수 있으리라.
매일 숙소에서 먹고 자는 걸 보니 수도에 집을 못 구할 정도로 가난한 것 같아 좀 안쓰러웠는데, 이런 훌륭한 태도를 가지고 있으니 언젠가 성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찌 되었건 소란이 벌어지고 있는 거리 안으로 진입한 시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거리는 이미 난장판이었다. 이미 일반 주민들은 대피한 지 오래인 것 같았고, 거리 구석구석에 깔린 좌판은 여기저기 날아가 널브러져 있는 사내들로 박살이 나있었다.
아니, 무리‘들’ 간의 대치라고 볼 수는 없어 보였다. 한쪽은 분명 남자를 중심으로 수많은 사내들이 모여 있었지만 한쪽은 홀로 매서운 눈매로 반대편을 노려보고 있었다.
“뭔가 동화책에서 많이 본 것 같은 구도군요. 한 명의 여기사를 둘러싼 불량배 여러 명이라니. 그렇지 않습니까?”
안쪽의 구도를 본 시안이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이런 이야기, 어릴 적에 책에서 많이 읽었던 것 같다. 비록 어머니가 강제로 앉혀놓고 읽힌 것이긴 했지만…….
미모의 여기사에게 찝쩍거리던 귀족가의 공자가 호위병까지 동원하여 어떻게 해보려다가 실력을 숨기고 있던 여기사에게 단체로 두들겨 맞고 실려 나간다는 장면.
자매품으로는 여주인공도 실력을 숨겼지만 역시 실력을 숨겼던 악당에 의해 위기에 처했을 때, 근처에 실력을 숨기고 있던 남주인공에 의해 도움을 받고 러브라인을 타는 설정이 있었다. 이 책을 읽고 역시 실력을 숨기는 것은 역사적 트렌드라며 내심 동질감을 얻었던 기억이 났다.
옆에서 떠드는 시안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상황을 살핀 타론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상황을 보니 예상과는 달리 귀족 간의 대치상태였다. 평상복을 입었다지만 맨몸으로 건장한 사내 서넛을 작살낸 여성이 반더가 아니라면 더 이상하리라. 반대쪽 무리는 딱 봐도 내가 귀족이라고 온몸으로 어필하고 있는 젊은 사내 하나를 중심으로 호위병으로 보이는 무리가 우르르 뭉쳐있었다.
그렇다면 이번이 이 신입을 엿 먹일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되리라.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타론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봐, 어서 들어가서 상황을 통제하도록 해봐. 언제까지나 우리가 해줄 수는 없는 일이지. 마침 교육기간이 끝나기 전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좋은 경험이 될 거야.”
“그 말이 맞다. 기본적인 것은 모두 숙지했으니 별문제 없을 것이야. 마침 오늘은 퇴. 근. 시. 간까지도 넉넉히 시간이 있으니 그 전에 정리할 수 있겠지.”
옆에서 캐란도 타이밍 좋게 거들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월급을 받는 동안에는 밥값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니(얼마나 열심히 할지에 대한 기준은 마음속에 존재한다) 교육기간 동안 선임이 지켜볼 때 한번 해보아야 다음에 일을 처리할 때도 편할 것이다.
‘뒤에 선임들도 있는데 큰일이야 없겠지…….’
하는 데까지 해보다가 여차하면 뒤의 선임들에게 떠넘기고 뒤로 빠지겠다는 생각을 하며(그러기 위해 교육기간에 선임들이 붙어있는 것 아니겠는가!) 시안은 어떻게 할지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보자… 우선은 상황을 통제하고 우리 신원을 밝힌 후 당사자들의 신분을 확인하는 것이었나.’
시안은 아직은 다 외우지 못하여 옆구리에 매달고 있는 매뉴얼의 1단계를 떠올리며 눈앞의 난장판을 향하여 천천히 걸어 나갔다.
“안녕하십니까. 가란-티아 소속 시안이라고 합니다. 지금부터 상황을 통제할 것이니 통제에 따라주시고, 여기 계신 당사자 분들은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신분증을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렁설렁 다가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가란-티아를 보며 셀린은 자신의 기분이 저 밑바닥까지 가라앉음을 느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렇게 꼬인 것일까.
처음 기사단을 나올 때까지는 분명 기분이 좋았다. 자신이 아끼는 친한 동생이 자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며 호출했을 때까지만 하여도 딱딱한 기사단을 나와 오랜만에 맛있는 디저트를 먹으며 재밌는 대화를 할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아끼는 동생에게 줄 선물도 준비했다.
갑옷을 벗고 오랜만에 평상복을 입은 것도 좋았다. 평소 매일 입고 다니는 갑옷은 비록 엑자일-대법도회에서 탈릭 스톤을 사용한 최신 제련법이 사용되었기에 가볍기 그지없지만 고리타분한 법도사들이 만든 것이라 그런지 디자인이 매우 따분하고 칙칙했다. 그러한 갑옷을 벗고 평상복을 입으니 괜히 기분이 더 좋아졌다.
기사단 숙소에서 동생이 사는 저택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으니 비번을 이용하면 여유 있게 다녀올 수 있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외출에 나섰다.
여기까지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기분이 가라앉기 시작한 것은 중간에 어떤 놈팡이가 꼬이면서부터이다.
이것이 평상복의 단점이다. 평소에 입고 다니는 근위기사단용 갑옷을 보고 시비를 거는 머저리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평상복을 입으면 눈도 못 쳐다볼 피라미들이 달려들어 지분거리고는 했다. 자신 같은 미모의 여성이 감수해야 할 운명이다. 평소 같으면 신분패라도 들고 다니며 쫓아냈겠지만 가까운 거리에 무슨 일이 있으랴 싶어 숙소에 놔두고 온 것이 문제였다.
만약 기사단에 들어가기 전이었더라면 이렇게 기분이 나빠질 일은 없을 것이다. 기분이 나빠지기 전에 눈앞의 이 녀석은 다진 고기가 되어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기사단에 들어간 이후로는 그럴 수 없다. 기사단이 비번 및 외출 시 바깥에서 사고를 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금기까지는 아니다. 하지만 예전에 성격대로 자신에게 지분거리던 놈을 외출 중에 곤죽으로 만들어 놓았다가 할아버지에게 불려가 특별수련을 한번 받은 이후로는, 절대 사고를 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인간의 한계를 늘려준다는 반데르가 원망스러웠던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조용히 끝내려고 했다. 이 일이 할아버지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되니까. 그렇게 몇 놈을 다듬어주면 보통 이쯤에서 꼬리를 내리기 마련인데 이 겁 없는 녀석은 자신이 누구인지 아냐고 고래고래 난리를 피우고 소리를 질러대었다.
그 결과 이런 상황까지 온 것이다.
가란-티아까지 온 이상 조용히 해결하기는 물 건너갔다.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이제 하나뿐이다.
<입막음>
가문의 권위를 빌리는 것은 정말 싫어하는 일이지만… 이 일이 할아버지의 귀에 들어가 특별수련을 한 번 더 받는 것보다는 나으리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한 셀린은 가란-티아라는 녀석은 놔두고 눈앞의 패거리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시안은 자신을 내버려두고 눈앞의 패거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여성을 바라보았다.
여성이 다가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패거리들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다. 이미 기세에서 눌렸기 때문이다. 시끄럽게 떠들며 난장을 피웠지만 그것은 겁에 질린 고양이가 털을 세우는 것처럼, 공포에 질려 날뛰는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여성이 코앞까지 다가갔음에도 불구하고 패거리의 누구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패거리에게 도착한 여성이 귀족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소곤거리며 무언가를 보여주자 남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윽고 뒤이어 여성이 뭐라고 하자 남자는 굽신거리며 주위의 호위병들에게 지시를 내렸고 그들은 이미 곤죽이 된 동료들을 챙겨 망가진 좌판거리 한구석으로 처박혔다.
사태를 관망하다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선임들은 어느덧 천천히 걸어와 시안의 뒤에 서서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패거리의 상황을 정리한 여성은 이윽고 시안을 바라보며 똑바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나는… 키라인 공작가의 셀린 드 키라인이라고 한다. 이 일은 내부문제로 무사히 해결되었으니 조용히 넘어갔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반 협박조로 뇌까리는 여성을 보며 시안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여자는 지금 자신을 호구로 보고 있는 게 틀림없다.
거리 한복판에서 이 난장을 쳐놓고는 이제 와서 내부문제라니? 그걸 믿으란 말인가? 상대편을 저렇게 두들겨놓았는데?
그리고 자신이 공작가의 인물이라는 것도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어떤 할 일 없는 공작가의 여식이 호위병도 없이, 평상복으로 평민 거주지역을 노닐다가 시비가 붙는단 말인가?
실제로 뒤를 돌아보니 선임들도 수상하다는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선임들은 셀린 드 키라인이라는 인물을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그 여자는 35살로 눈앞의, 많아 봐야 스무 살 정도로 보이는 여성과는 나이 대가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시안은 여성이 한 말을 한 귀로 흘리고는 그녀를 바라보며 매뉴얼의 두 번째 항목에 적힌 대로 말했다.
“그렇다면 신분증을 제시해 주십시오. 그리고 지소로 같이 가서 합의서를 작성하시고 피해보상 지불보증서를 작성해주시면 됩니다.”
“으드득! 신분증은 가져오지 않았지만… 신분에 대한 증명은 이것으로도 가능하리라 믿는다. 그리고 내부문제이니 합의서는 필요 없을 터이고… 피해보상은 저기 널브러져 있는 내 부. 하. 녀. 석들이 해결할 것이니 이대로 해결하면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그렇게 이를 바드득 갈며 말한 여성은 자신의 손아귀를 내밀었다. 이윽고 가녀린 손에서 푸른색의 운무가 휘감아 나오기 시작하더니 아름다운 백합 문양을 손바닥 위에 형성하였다.
시안은 뭔 짓을 하냐는 표정으로 뚱하게 바라보았지만 뒤의 두 선임은 새파랗게 질렸다. 키라인 공작가 비전의 반데르-로아를 운용할 때 나오는 저 특유의 푸른 백합 모양은 키라인 공작가의 상징이 틀림없었다. 눈앞의 이 여성이 셀린 드 키라인인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키라인 공작가의 인물이라는 것은 확실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 일을 덮는 것이 나으리라. 여기서 원칙대로 처리한다고 하여도 키라인 공작가의 인물이 자신들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겠지만(이를 부드득 갈고 있는 모습을 보니 확신할 수는 없었다) 저 정도로 숙이고 들어오면 체면을 세워주어 좋게 좋게 끝내는 것이 모양새가 좋은 것이다.
여기까지 판단한 타론은 눈짓으로 캐란과 뜻을 맞추고는 눈앞의 자칭 셀린 양을 향해 입을 열려고 하였다.
그 순간 멀뚱히 손아귀를 보다가 옆에서 매뉴얼을 뒤적거리던 시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음… 그러한 인증방식은 조항에 나와 있지 않은데요. 신분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만약 신분증이 없으시다면 지소로 같이 가셔서 신분을 보증할 만한 인물이 올 때까지 같이 계셔야 합니다.
아! 그리고 말씀하신 대로라면 조항에 따라 합의서와 피해보상 지불보증서 작성은 필요 없을 듯하군요.”
뒤의 선임 둘이 새파랗게 질리건 말건 매뉴얼에 적힌 대로 발언을 마친 시안을 보며 셀린은 자신의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 끊어짐을 느꼈다.
아까부터 쌓이고 쌓인 짜증과 분노에 눈앞의 이 녀석이 불을 던진 것이다!
애초에 가란-티아에 들어올 정도의 녀석이 반데르-로아를 운용할 때 나오는 각 가문의 문양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 녀석은 알고도 자신의 불리함을 이용하여 자신을 능욕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판단이 선 셀린은 할아버지에게 지옥 수련을 받더라도 오늘 개값을 물기로 결심하고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야, 이 자식아!”
분노에 가득 찬 셀린의 주먹이 시안의 얼굴을 향해 바람을 가르며 날았다.
☆ ☆ ☆
시안은 날아오는 주먹을 보며 고민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매뉴얼에서 읽지 못한 것이다.
성실하게 근무하는 자신에게 막무가내로 주먹을 날리다니… 이제까지 귀족가의 여식이라면 자신의 어머니인 셀린느 부인이나 케르벨 백작님의 여식인 샬롯 같은 조신한 여성만 보아온 시안에게는 아주 참신한 경험이었다. 이런 야만 원숭이 같은 여자가 있다고는 들었지만 자신이 맞닥트리게 될 줄이야!
평소대로라면 그냥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레이디와는 드잡이질 하는 게 아니라고 어릴 적부터 어머니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으니까. 어머니는 이런 상황이 오면 자신이 여자라고 해도 봐주지 않고 엉덩이를 걷어찰 것을 예측하셨는지 유독 항상 강조해서 말씀하시곤 하셨다.
하지만 자신이 여기서 자릴 피하면 뒤에 서있는, 지금 이 상황에 질린 선임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자신을 억압하려고 하는 가란-티아라는 조직 자체에 반감을 품고 있는 듯 보이는 저 여성에게 반 곤죽이 될 때까지 두들겨 맞을 것이다.
그런 안타까운 상황을 피하기 위해 시안은 날아오는 주먹을 보며 자신이 이 상황을 해결하기로 마음먹고 매뉴얼을 다시 들었다. 자신의 방식대로 해결하는 건 이미 늦었으니 남은 건 조직의 룰대로 해결하는 방법뿐이다.
아직도 자신의 턱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주먹을 힐끗 본 시안은 허리춤에 있던 매뉴얼 북을 꺼내 들었다. 찢어질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아주 튼튼히 만들어져 그런지 찢어지지 않았다.
아직 주먹이 날아오려면 한참도 더 시간이 남았다. 저 정도라면 지금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항을 매뉴얼 북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 ☆ ☆
분노에 가득 찬 셀린은 다음 상황을 열심히 머릿속으로 계산하고 있었다.
‘우선 강냉이 세 개 날리고… 그다음에 왼 갈비, 오른 갈비… 그다음에 명치… 그리고…….’
열심히 다듬어 줄 곳을 계산하며 적어도 이 녀석이 가란-티아 전속 병원에 적어도 4-5주는 머물러 있게 만들리라고 다짐한 셀린은 이어지는 상황에 당황하고 말았다.
‘어?’
분명 자신의 주먹을 맞고 턱이 날아가야 하는데 그 녀석이 어느새 턱만 살짝 돌려 주먹을 피한 상태로 허리춤에 걸려있던 책을 읽고 있는 것이다.
언제 피한지도, 언제 빈손이었던 녀석의 손에 책이 들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처음부터 책을 보고 있는 녀석의 옆 빈 허공을 향해 전력으로 헛스윙을 날린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다. 이제까지 자신이 날려먹은 턱이 몇 개인데 헛스윙을 하겠는가.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후속타를 넣지 못한 자신을 바라보던 녀석은 갑자기 책을 탁 덮더니 말했다.
“현재 상황은 공무집행 방해와 가란-티아 폭행혐의가 추가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아직까지는 공무집행 방해 수준이니 별도의 반항이 없다면 하루간 가란-티아에 구류되거나 보증인의 신원보증과 보석금을 내고 풀려날 수 있는 수준이군요. 만약 반항하겠다면 제압에 들어갑니다.”
사무적으로 국어책을 읽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줄줄이 읊었지만 왠지 저 표정은 자신이 반항을 해주었다면 좋겠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러한 표정은 잘 알았다. 왜냐면 자신이 그랬으니까.
근위기사단 일을 하며 탈세 등의 부정행위에 연루되어 반항하는 고위귀족을 상대할 때의 자신이 항상 저런 표정을 지었다. 반항의 제압이라는 합당한 명목 아래 재수 없는 상대를 두드려주려고.
그런 생각이 들자 정신이 번쩍 들며 무심코 눈앞의 있는 녀석의 눈을 바라보았다.
만약 자신의 추측이 맞는다면 이 녀석은 자신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의 강자이고… 눈을 바라보는 순간 강렬한 기세가 쏟아져 나와서 기선을 제압해야 하는데(이 역시 자신이 자주 쓰던 방법이다. 물론 자신은 이렇게 한 후 그만두지 않고 제압당한 상대를 몇 번 더 다듬어 주었다)…….
‘엥?’
전혀 그렇지 않았다. 기가 죽을 정도의 기세가 눈에서 쏟아져 나온다거나… 자신을 제압한다거나… 전혀 그런 게 없다.
그냥 평범했다.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상당한 수련을 쌓아야만 들어갈 수 있는 가란-티아에 있는 것이 이상할 정도.
단지 남자치고는 너무 아름다운 푸른 눈동자.
그 눈을 보는 순간 맥이 탁 풀려버렸다. 그러고는 분노가 가라앉고 서서히 제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으아……!’
먼저 사고를 친 것도 모자라서 가문의 힘을 빌려 상황을 수습하려고 하고, 거기에다가 가란-티아에게 주먹까지 휘두르다니. 자신이 평소 혐오하던 종자들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한 것이다.
아무리 할아버지에게 혼날 것이 두려웠다지만, 분노에 눈이 돌아갔다지만, 눈앞의 녀석이 재수 없었다지만, 이건 옳지 않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셀린은 뻗었던 주먹을 회수하고 양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퉁명스레 내뱉었다.
“뭐해? 묶어. 그리고 주먹 휘둘러서 미안하다.”
잘못은 했지만 눈앞의 녀석은 여전히 재수 없었기에 끌려가기로 결정된 후에도 날이 선 사과가 나왔다.
한동안 할아버지에게 구르고, 근위기사단에서 구르려면 죽은 목숨이지만… 지금이라도 이런 식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좋다는 판단이 서니 셀린의 마음은 오히려 편안해졌다.
시안은 갑자기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며 얌전해진 눈앞의 여자를 보고 생각보다 막무가내는 아니구나… 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보고 쫄았다거나…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자신은 이미 그렇게 반데르를 줄줄 흘리고 다니는 팔푼이 짓은 열 살 때 졸업했으니까.
매뉴얼에 따르니 선제폭행을 가할 수 없어 내심 이 막무가내 여자가 반항을 한번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시안은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좋게 좋게 상황이 풀린 것에 대하여 만족하기로 했다. 실제로 뒤의 선임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좋아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지부까지 같이 가시겠습니다. 아, 그리고 신원보증인으로 누구를 부를까요?”
“내 신원보증인은… 근위기사단의 3단장, 리안 폰 로만으로 하겠다……. 으… 3기사단 부단장 셀린 드 키라인이라고 전하면 될 것이다.”
갑자기 형의 이름이 나오자 시안은 깜짝 놀랐다. 이 다혈질의 여자 입에서 형의 이름이 나오다니.
‘뭐… 상관은 없는 일이지.’
설령 이 여자가 형에게 자신의 험담을 늘어놓는다고 하여도 자신은 매뉴얼대로 상황을 해결한 것뿐이다. 찔리는 부분이 단 하나도 없음을 재차 점검한 시안은 자신이 이 상황을 잘 해결했음을 자랑스레 여기며 뒤에 서있는 선임들을 바라보았다.
게으른 데다, 추가적으로 눈치까지 없는 이 신입을 답이 없다는 눈으로 바라본 캐란과 타론은 그래도 일이 더 커지지 않은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더 이상 사고를 치지 않도록 신입을 퇴근하라고 시키고 셀린을 둘러싸고 지부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 ☆ ☆
<케르벨 백작의 고민>
케르벨 백작은 저택의 집무실에 앉아 창가 바깥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입에 간식을 물고 들어오는 시안의 모습을 본 백작은 시계를 확인하였다.
‘여섯 시 팔 분……. 저 아이도 참… 하루도 빠짐없이 정말 칼같이 맞춰서 돌아오는군.’
일을 시작한 근 열흘 이래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칼같이 퇴근하는 시간을 보며 백작은 생각했다.
가란-티아 본관의 거리가 여기서부터 팔 분 정도 걸리는 것을 생각하면 시안은 정확히 여섯 시가 되자마자 직장을 박차고 나온다는 소리이다. 교육기간인데 저렇게 눈치 보지 않고 칼같이 집에 오다니… 간이 큰 건지 잘려도 상관없다는 건지…….
나태하긴 한데 저 정도면 참 근면성실하게(?) 나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모습만을 보면 자신의 딸, 샬롯이 시안 저 아이를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로만 백작의 이야기를 들어버린 케르벨 백작은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믿기지가 않는군……. 겨우 저 나이에 그랑-반더인 로만 백작보다도 강하다니.’
케르벨 백작은 열흘 전 로만 백작의 저택에서 백작과 한 대화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곳에서 로만 백작에게 들은 시안에 관한 이야기는 각종 정보와 기록을 다루는 케르벨 백작의 입장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야기였다.
‘하고 싶은 것만 한다. 힘든 걸 싫어한다. 결과가 나오지 않는 건 더 하기 싫어한다. 그런데도 강하다. 심지어 나보다도!’
완전 무장의 이상적인 성품과 정반대이다. 남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을 싫어한다는 점만 차이가 있을 뿐 전형적인 귀족가의 망나니 도련님의 성격이다.
하지만 실력만큼은 이미 백작 자신보다 더 위. 지금은 백작 자신도 아들이 어느 정도인지 잘은 모르겠다고 한다.
그다음에 나온 이야기는 더 믿기 힘들었다. 태어나서 축복식에서 측정했던 수치. 법도사에게 큰돈을 주고 엑사르를 이용하여 비밀서약까지 하게 만들어야 했을 정도의 수치. 로만 백작도 케르벨 백작이 아니었다면, 그리고 그의 진실한 조언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라면 절대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497>
백작은 이 수치가 알려지는 순간 아이가 외부의 폭풍에 휩쓸릴까 두려워하여 저택 안에서 시안을 키우고 외부인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했다. 적어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질 때까지.
정말 말도 안 되는 수치. 저 수치를 듣는 순간, 케르벨 백작은 시안이 왜 저런 성격을 가지게 되었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칼을 휘두르는 게 너무나 쉬우니 다른 어려운 게 재미있을 리 없다. 그리고 대충해도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되는데 열심히, 힘들게 하고 싶을 리가 없다.
케르밸 백작은 오히려 아이가 더 삐뚤어지지 않고 이 정도 선까지 머물도록 교육한 로만 백작과 셀린느 부인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너무 잘나면 폭주하기 마련이다.
어쨌건 케르벨 백작은 처음에는 단순히 수호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러 갔지만 우연찮게 나오게 된 시안의 이야기를 듣고 로만 백작과 자신, 그리고 시안이 모두 원하는 상황이 오도록 새로이 판을 짜기 시작했다.
<로만 백작은 제멋대로 살아온 자신의 둘째 아들이 사회로 나가 제 몫을 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올바로,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다.>
<시안은 피해 안 끼치고, 피해 안 받고,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했다(이 판단은 로만 백작, 시안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여 내렸다).>
<케르벨 백작 자신은 지금 이 상태의 평화가 더 지속되기를 원했다.>
지금 현재 수도는 평화로워 보이지만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수호대의 선발식 때문이 아닌, 이제 곧 귀환하는 수호대 때문이다.
사실 수호대로 뽑혀 나가는 인재들은 우수하지만 각 진영의 핵심 전력이 되기에는 모자란 바가 있다.
그렇기에 수호대로 뽑혀가는 것이다. 5년 후의 보험의 의미로. 그렇기에 중요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큰 의미가 없다.
진정한 각 진영과 가문의 핵심 전력들, 마스터들과 그랑-반더, 2급 법도사 이상의 강자들은 이곳 수도인 로아-티안에서 똬리를 틀고 칼을 간다. 빈틈이 보이면 단숨에 상대방에게 꽂아 넣기 위해서…….
우습지만 목숨을 걸고 대륙을 지키는 대북벽보다도 자신들의 작은 전장에서 더 강력한 전력을 투입하고, 서로를 갉아먹는 것이다.
귀족들은 천성이 이기적이고 잔혹하다. 항상 남의 것을 빼앗아 왔고 누군가를 밟고 올라왔기에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초식동물은 풀만 먹어도 살 수 있지만 육식동물은 누군가를 잡아먹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겉으로는 명예와 이성으로 무장했지만 이는 쓸데없는 분쟁을 피하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속내는 누구보다도 폭력적이고 짐승에 가깝다. 상대보다 내가 강하다고 느끼는 순간 달려들어 물어뜯는다.
이제까지는 서로의 세력 차가 크지 않으니 싸우면 피해가 클 것 같아 잠잠한 상태이지만 곧 5년 전 수호대로 나갔던 인원들이 돌아오고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 수도는 전쟁터가 될 것이다.
5년 전에 뽑혀 나간 수호대들은 그때도 각 진영에서 나이에 비해 누구보다도 강하고, 가문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그런 존재들로만 구성되어 대북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5년 동안 폭력과 전쟁, 죽음으로 점철되어 살아온 그들은, 그만큼 폭력적이고, 그만큼 강해져서 돌아온다. 5년 전의 투자가 훌륭한 결과로 자라나 이곳, 수도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화약고 같은 이곳에, 더할 나위 없이 성대하게 불을 붙일 것이며 이양전의 시작을 알릴 것이다.
‘이양전’
이를 막기 위해 케르벨 백작은 미리 판을 짜기 시작했다. 이제 곧 있으면 수호대가 돌아온다.
그러기 위해 시안을 집어넣은 곳이 수도 치안대, 가란-티아다. 지금은 수습기간이라 가장 편한 곳에 배치했지만 이제 수습이 끝나면 전쟁의 한복판이 될, 왕궁과 고위 귀족가가 밀집되어 있는 거리를 담당하게 될 것이다.
케르벨 백작이 딱히 시안에게 이래라저래라 요구할 생각은 없었다. 굳이 반감만 살 것 같기도 하고 효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대로 된다면, 그리고 시안이 자신이 맡은 직무를 잘 해내기만 한다면 시안과 로만 백작, 그리고 자신 모두가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이 흘러갈 것이다.
‘잘 되어야 할 텐데… 생각대로……. 부탁한다, 시안.’
여기까지 생각한 케르벨 백작은 시안이 앞으로 자신의 역할을 잘 해 주길 바라며 상념을 접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셀린 이 아이는 왜 안 오는 거지? 오늘 샬롯을 보러 온다고 하지 않았나? 이상하군. 약속을 어기는 아이가 아닌데…….’
요즘 이것저것 불만이 많은 샬롯이 위로를 받기 위해 오늘 셀린을 초대한 것으로 아는데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은 것을 깨달은 케르벨 백작이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딱히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거리도 멀지 않기에 딱히 무슨 일이 생길 일도 없다. <근위기사단의 푸른 전차>라고 불리는 그 아이를 어떻게 힘으로 해볼 수 있는 존재가 많은 것도 아니고… 그것도 수도 한복판에서.
무슨 사정이 있어도 다른 연락이 없었으니 곧 오겠거니, 라고 생각한 케르벨 백작은 식사를 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오늘 시안과 샬롯이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이야기를 해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