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일론 드 키리온>
키리온 자작가의 저택은 엘-루아 거리, 11구역에 위치하고 있다.
수도인 로아-티안에 거점을 두고 카란 왕국과 티안 왕국, 콘 왕국과 곡물 및 철광석을 거래하여 부를 쌓은 키리온 자작가는 비록 작위는 낮은 편이지만 그 막대한 부를 이용하여 왕당파의 중요한 가문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대대로 상인 가문이었던 키리온 자작가에 내려오는 말이 있었다.
<자신이 잘하는 걸 해야 한다. 이것저것 찔러보지 말고 돈이나 벌어라. 돈은 힘을 부른다.>
맞는 말이지만 이는 한계가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무력을 가진 놈이 무식하게 계약을 어기거나 난장을 피우면 강제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가문 내부에 신뢰할 수 있는 무력집단을 갖추는 것은 키리온 자작가의 오랜 숙원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로만 백작가와 같은 재능을 타고나는 것은 아니다. 자작가는 자식들이 태어날 때마다 축복식을 거행하며 자신의 세력이 과세함을 건재하였지만 동시에 이 축복식을 통하여 높은 재능을 가진 자식들이 태어나길 바랐다.
그러던 키리온 자작의 오랜 숙원을 이루어 줄 인재가 태어났다.
<일론 드 키리온>
현재 2남 5녀를 가진 키리온 자작가의 3녀는 축복식에서 40이라는 높은 수치를 기록하였다. 이에 고무된 키리온 자작은 일론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몸에 좋다는 것은 다 구해서 먹이고, 일부러 유명한 검 선생을 불러 수련을 시키며 일론을 키웠다. 동시에 키리온의 자질을 믿고 내부로는 일론이 이끌 무력집단을 키웠다.
일론은 키리온 자작의 기대와 투자를 배반하지 않았다. 익스퍼트의 벽을 뚫고 차곡차곡 올라가 마스터의 벽까지 올라간 것. 불과 30이라는 젊은 나이에 익스퍼트의 끝을 바라보았지만 매우 욕심이 많았던 일론은 여기서 만족할 수 없었다.
실패를 몰랐던 그녀는 한 단계 더 가문을 끌어올리기 위해 과감하게 수호대에 자원하였다. 만약 살아 돌아오기만 하면, 탈릭 스톤을 이용한 재력과 자신의 무력으로 키리온 자작가는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일론이 돌아왔다. 마스터가 되어, 탈릭 스톤을 가득 거머쥐고는.
키리온 자작가는 잔뜩 흥분상태가 되었다. 한 단계 더 나아갈 힘을 축적했다는 자신감과, 이제 곧 다가올 폭풍에 대비하기 위한 긴장감으로.
그리고 그 폭풍의 주인공인 일론은 현재 저택에서 창 바깥의 거리를 바라보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사람 저기서 또 저러고 있네.’
일론은 바깥에서 엘-루아 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있는 가란-티아 하나를 쳐다보았다. 꽤나 거리가 있었지만 마스터의 안력에 이 정도의 거리는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
시안 폰 로만. 그 유명한 로만가의 2공자. 자신들이 꿈에서도 가지기 원했던 무력을 태어날 때부터 보장받은 남자.
파티장에서 벌였던 소동은 제법 흥미로웠다. 그 꼴 보기 싫은 쟈크 녀석의 손을 뭉개버리다니. 상대편의 레논은 그 소동을 리안이 벌였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나라샤 후작가가 시비를 걸기 위해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자신은 똑똑히 보았다. 구석에서 시안 2공자와 악수를 한 후 데굴데굴 구르는 쟈크 녀석을.
쟈크는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고, 우리들 열넷 중 가장 약한 녀석이긴 했지만 그래도 마스터.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양의 반데르를 몸에 두르고 적을 박살 낸다.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해머를 쓰며 아귀 힘을 다져온 쟈크의 손을 박살 내다니, 평범한 인물일 리가 없다. 애초에 로만가의 2공자가 평범하다면 그게 더 웃기리라.
자신만 본 것은 아니리라. 파티장 구석이었다고는 하지만 아예 보이지 않는 위치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 자리에서 떠들어봤자 별 이득이 없고 아직 명확한 정보가 없기에 다들 입을 다물고 어떻게 이용할지를 고민하고 있겠지.
다들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가 추가적인 조사를 진행하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자신도 그랬으니까.
후루룩.
옆에 놓인 차를 마시며 일론은 자신에게 조사되어 올라온 몇 장의 보고서를 살폈다.
로만 백작가의 뒷조사를 본격적으로 하는 것은 부담스러워서 무리하지 않고 정보를 수집했다. 세간에 도는 정보를 추려서 올라왔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정보가 너무 없었다. 대충 요약하자면 이 정도가 될 듯하다.
<시안 폰 로만 조사 보고서>
-로만 백작가의 둘째 아들. 현재 17살
-축복식 당시 반데르 수치 57(추가 특이 사항: 대법진이 작동하지 않아 카인 폰 로만 백작이 직접 수치를 발표)
-각종 영역에 신기할 정도로 재능이 없음. 로만 백작가에 다녀온 선생들의 말을 취합한 결과 악기, 승마, 독서, 역사, 지리, 천문, 정치학, 전쟁론 등 다방면의 인문 및 교양에 극히 미약한 성취속도를 보임
-현재 케라벨 백작가에 거주 중
-가란-티아 재직 중(추가 특이 사항: 교육기간 동안 셀린 드 키라인 공녀와 업무상 충돌)
-현재 엘-루아 거리 3구역부터 14구역까지 구역 할당(추가 특이 사항: 케르벨 백작이 뒤에서 영향력 행사)
-가란-티아 에서의 동료들 평가는 극히 낮음
-지닌바 무력은 확인된 바 없음.
“하하하하!”
보고서를 보고 있자니 괜히 유쾌해진 일론은 크게 웃었다.
정리해보니 여러 부분이 수상했다. 그 난폭하기로 소문난 푸른 전차와 충돌하고도 멀쩡하고 쟈크를 엿 먹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순찰구역이 너무나 수상했다. 3구역부터 14구역이면 왕당파와 고위귀족들이 잔뜩 몰려 사는 거리이다. 케르벨 백작이 곧 이 거리가 전쟁터가 될 것을 몰랐을까? 로만 백작과 친한 케르벨 백작이 친구의 둘째 아들을 아무것도 모르고 여기에 집어넣었을까?
무언가 있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그리고 이건 단순한 느낌이지만 그걸 알아내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자료가 너무 부족하다. 군부의 상위무장이나 근위기사단에 재직 중이라면 정기적으로 측정해야 하는 반데르 수치를 기반으로 판단이라도 해보겠지만… 고작 가란-티아에게까지 그 비싼 반데르 수치검사를 실시하지는 않는다.
이럴 때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몸으로 뛰어야지.’
보니까 이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무장들 간의 핵심정보는 결국 몸으로 부딪쳐야 얻을 수 있는 법이다. 종이로 백날 끄적거려봐야 죽은 정보이다.
그렇게 생각한 일론은 앞으로의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어차피 상단 일은 자신이 아닌 가족들이 한다. 그렇다면 자신은 앞으로 다가올 싸움을 대비하는 게 맞다. 그때를 위해 최대한 정보를 모아야 한다.
☆ ☆ ☆
‘그것참… 고만 좀 지켜들 보지……. 방금 지나간 11구역의 집이 키리온 자작가라고 했던가…….’
방금 전까지 자신을 지켜보던 시선이 사라진 것을 느끼며 시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키리온 자작가라면 왕당파로 이번 수호대의 귀환자 중 하나를 배출한 집안이다. 자신을 지켜보던 자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일론이라고 했던가… 이래서 사고 치면 안 되는건데…….’
그날 이후 이곳, 엘루아 거리를 지나가면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이 동시에 느껴지고 있다. 제 딴에는 안 보인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게 눈에 반데르를 철철 두르고 지켜보면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다. 대부분이 그날 보았던 수호대의 귀환자들이거나 고위무장들이다.
일반인이라면 몰라도 반더들 특유의 그 기운은 잊어버리고 싶어도 잊기 힘들다. 특히 마스터 정도 되는 기운들은 운용 시 그 특유의 파장이 그대로 풍겨 나오기 때문에 한번 보기만 한다면, 그리고 수도 안에 있다면 발현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코앞에서 대놓고 관찰하면 모를 수가 없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저들은 모를 것이다. 자신이 만난 사람들 중 이런 것이 가능한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었다.
사실 자신도 이런 것이 가능해진 것은 오 년 전부터이다. 세상이 열리고 눈과 귀가 아닌, 또 다른 것으로 세상이 인지되기 시작한…….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이 찝찝하기는 했지만 해가 되는 것도 아니고 딱히 반응하기도 뭐해서 당분간은 견디기로 했다. 자신이야 퇴근하면 그만이니까. 설마 케르벨 백작의 저택까지 쫓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시안은 곧 퇴근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깨닫고 설렁설렁 14구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교대는 14구역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미리 대기하고 있어야 오늘도 집에 일찍 들어갈 수 있다.
시안은 자신의 안일한 생각을 반성하였다. 설마 집까지 쫓아올 줄이야!
시안은 눈앞의 일론 드 키리온을 보며 자신이 이 여자를 과소평가했음을 깨달았다.
“안녕하세요, 시온 공자. 반가워요. 우리 구면이죠? 키리온 자작가의 일론이라고 합니다. 계속 얼굴 볼 사이인데 기회 될 때마다 친해지면 어떨까 해서 찾아왔어요.”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정원에 누워있던 자신의 눈앞에 떡하니 나타났다. 이 여자가 아까 자신을 위아래로 쓱쓱 훑던 그 눈길을 다시금 떠올리며 시안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 반갑습니다. 그런데 계속 얼굴 볼 사이라는 게 무슨……?”
“저희 앞거리의 치안을 담당하고 계시잖아요. 연약한 여성인 저는 시안 공자 같은 분이 지켜준다는 생각을 하니 정말 마음이 든든하답니다.”
같은 수호대 출신 동료들이 들으면 혀를 찰 소리이다. 연약한 여성이라니! 일론이 대북벽에서 하리쟌들을 토막 내어 죽이는 것을 본 그들 입장에서는 절대로 동의 못할 소리이다.
그리고 동의 못하기는 시안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여성이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위기에 처할 환경이라면, 샬롯 양 같은 사람은 방공호에 들어가 평생 나오지도 못해야 한다. 셀린 양 정도면 또 모르겠다만.
“아… 도움이 된다니 다행이군요.”
하지만 대놓고 비웃을 수는 없는 터라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리고 사실 안쪽에서 나오는 흉험한 기세를 제외하면 눈앞의 일론 양은 훌륭한 미인이었던 터라 솔직히 눈은 호강하는 느낌이었다.
35살이라는, 자신의 두 배가 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스무 살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동안인 얼굴과, 순진해 보이는 눈매와 어울리지 않게 몸 전체에 탄탄하게 붙은 근육은 샬롯 양 같은 귀족가의 여식이 아닌, 한 마리의 표범 같은 묘한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그 뒤로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던 일론 양은 어느덧 좀 친해졌다고 느꼈는지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시안 공자는 자신에 대한 적대감이 있지는 않은지 쉽게 마음의 문을 열어 주었다. 애초에 경계심이 그리 많아 보이지도 않았다. 단지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느낌은 났지만…….
‘신기하네… 겉으로 보면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는데…….’
대화하는 도중 기감을 올려 상대를 살피는 것은 정말 무례한 행위 중 하나이기에(이것은 상대에게는 내가 너를 치기 위해 수준을 한번 탐색해 보겠다, 이런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굉장히 무례한 행위이다)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지만 대화 중 끊임없이 살핀 상대는 너무 특색이 없었다.
무장에게는, 특히 강대한 무장들에게는 그 특유의 느낌이 있었다. 수련법이나 반데르-로아, 성격, 모두 무장마다 다르지만 강력한 무장들의 단 하나의 공통점.
<끝없는 수련과 그로 인해 몸에 배인 습관, 그리고 그로 인해 몸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기도>
이건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읽으려고 해서 읽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의 온몸이 말하고 있다. 내가 강해지기 위해, 위로 올라가기 위해 이 정도로 노력해왔다고!
하지만 이 남자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좋게 말하면 자유롭고 하고 싶은 대로 사는, 나쁘게 말하면 나태한 그런 느낌.
하지만 이런 타입을 본 적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다. 대북벽에는 별의별 인재들이 몰려들고 강자 아닌 자가 없는 그곳에서 자신은 눈앞의 남자와 같은 느낌을 풍기는 자들을 만나본 적이 있다.
<세상의 법칙을 뒤트는, 이능 사용자. 엑서(EXER)>
<엑서>
세상의 법칙을 뒤흔들 수 있는 강대한 힘, 엑사르를 계산과 이성으로 제어하여 사용하는 대법도회의 법도사들과는 다르게 연구 없이, 술식 없이, 탈릭 스톤 없이도 타고난 재능으로 엑사르를 사역할 수 있는 이들.
엑사르를 다루는 방법을 학문으로까지 발전시킨 엑자일-대법도회와는 다르게 그들의 기술은 연구와 재현이 불가능하다. 수련하면 능숙하게 쓸 수야 있겠지만 철저하게 태어날 때부터의 재능과 감성, 창의성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같은 방법으로 절대 발현할 수 없다.
엑서들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강한지는 엑서들마다 모두 다르지만 적어도 대북벽 너머에서 본 엑서들은 항상 자유롭고 즐겁게 즐기다 가는 삶을 추구하는 자들이 많았다(그래서인지 대북벽 너머에는 엑서인 자들은 거의 없었다. 너무나 고된 환경이기에……).
‘그래, 생각해보니 로만가의 2공자이고 반데르 수치가 높다고 하여도 굳이 반더가 되란 법은 없지… 엑서가 될 수도 있었군.’
그렇다면 이제까지 있었던 일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반더는 게으르면 높은 재능을 타고나도 절대 강해질 수 없다. 반더로서 쟈크의 손을 뭉개려면 마스터라는 뜻인데, 역대 라-반더의 경지에 올랐던 자들도 17살에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엑서는 상당히 높은 수준까지 강해지는 것이 가능하다. 게다가 굳이 강하지 않아도 능력의 종류에 따라 쟈크의 손가락 뼈마디 한두 개 부러트리는 수준은 가능하리라.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지만 우선 대략적인 방향을 설정한 일론은 이를 확인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방법이 있지.’
엑서는 엑서끼리 서로를 느낀다.
어떠한 원리인지는 모르겠다. 반더들처럼 서로의 기세를 읽는 것도 아니고 법도사들처럼 상대의 주위를 휘감고 있는 엑사르의 흔적을 살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에 따르면… 그냥 느껴진다고 한다. 마치 쌍둥이가 서로를 느끼듯, 부모가 자식을 알아보듯, 상대를 보는 순간 알 수 있다고 한다.
불확실한 정보는 모르니만 못하다. 이번 기회에 아예 확실히 알아보는 게 좋다고 생각한 일론은 키리온가의 저택에 머물면서 자신들의 일을 도와주고 있는 엑서를 떠올렸다. 출신지는 불분명하지만 이용가치가 높은 능력에 B급이라는 높은 등급에 반하여 높은 수준의 봉급과 조건을 제공하고 자신의 집에 식객으로 잡아두고 있다.
“공자, 이번에 이렇게 초대해주셔서 대접도 해주시고 감사해요. 호호.”
“……? 저는 딱히 초대한 적이…….”
“그래서 보답으로 한번 저희 쪽 집으로 초대를 하고 싶네요, 마침 일하시는 구역에 저희 가문이 위치하고 있으니 끝나고 잠시 들러주시는 건 어떨까요? 편하게 오셔서 식사라도 드시고 가세요. 케르벨 백작님 댁의 식사도 맛있겠지만 저희 집은 콘 왕국부터 카란 왕국까지의 유통을 담당하는 가문. 그곳에서 들어오는 진귀한 식재료로 요리한 음식들이 있답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싱긋 웃으며 말하는 일론의 말에 시안은 마음이 흔들렸다. 시안은 본가에서는 검소한 식단으로만 생활하였기에 최근 케르벨 백작가와 수도의 맛집에서 맛볼 수 있는 훌륭한 음식들을 맛보면서 식도락에 눈을 뜬 상태였다.
키리온 자작가에만 들어온다는 진귀한 재료에 맛있는 식사라니… 흔들리는 시안의 눈동자를 본 일론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쐐기를 박았다.
“특히 저희 요리사는 예전에 왕궁의 주방에서 오랜 시간 동안 일한 분이에요. 항상 진귀한 재료를 바치는 국왕께서 저희 자작가를 어여쁘게 보아주셔서 자신의 요리사 중 몇 분을 키리온 저택으로 보내주셨죠. 혹시 이틀 후 저녁은 어떠신가요? 그때 콘 왕국의 대남해에서 잡힌 살론 새우가 올라오는 날이거든요. 왕실에 납품될 용도이지만 저희 저택의 저녁식사로 맛보실 수 있어요.”
그 말에 무너진 시온은 그냥 마음 편하게 먹고 오기로 했다. 식사 정도만 하고 오는 것이라면 귀찮은 일이 생기지는 않으리라.
“흠흠… 이렇게까지 청해주시는데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요. 이틀 후라고 하셨지요? 시간 맞추어 가겠습니다.”
“잘 되었네요.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오늘 대화 즐거웠어요.”
약속을 확정한 일론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시안은 그런 일론 양을 현관까지 배웅해주었다.
☆ ☆ ☆
키리온 자작가에 들어간 시안은 안내인을 따라가며 아름다운 자작가의 경치를 감상하며 식사가 준비되어있다는 정원으로 나아갔다.
엘-루아 거리를 걸어 다니며 느낀 건데 각 가문은 모두 웅장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이 들지만 가문의 성격에 따라 그 조각양식이나 풍겨오는 느낌이 모두 달랐다. 무장가의 느낌은 좀 더 강직하고 단단하며 위엄이 느껴지는 쪽의 느낌이라면 키리온 자작가와 같은 상가는 좀 더 자유롭고 화려한 느낌이다.
저택의 뒤뜰에 위치한 정원에 도착한 시안은 정원의 가운데에 있는 정자로 안내를 받았다. 그곳에는 이미 기본적인 세팅이 완료되어 있고 일론을 비롯하여 처음 보는 인물이 하나가 앉아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일론 양.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시안 공자… 저번에 초대받은 보답을 하는 것뿐인데요. 아, 그리고 소개해 드릴게요. 이쪽은 저희 가문을 위해 힘써주시고 계시는 슈빌 양이세요. 흔치 않은 엑서이시죠.
수도 바깥에서 저희를 도와주시다가 오늘 돌아오셔서 소개해드릴 겸 식사에 초대했어요.”
“안녕하세요, 시안 경, 반갑습니다.”
“아, 슈빌 양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엑서라니,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계시군요.”
간단한 소개가 이어진 후 식사가 시작되었다. 식사는 소소한 이야기를 하며 즐겁게 진행되었다.
‘신기하군…….’
시안은 눈앞에 앉아있는 슈빌 양을 보며 생각했다. 엑서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보는 건 처음이다. 반데르와는 전혀 다른, 신기한 기운이 심장과 뇌 주위를 휘감고 끊임없이 심장박동에 맞추어 확장과 수축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 기운들의 움직임은 예전에 보았던 법도사와는 또 달랐다.
법도사들은 반데르가 아닌, 엑사르를 사용하긴 하지만 운용방식은 오히려 반더들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절도 있고 계산되어 있는 움직임을 보이며 심장에서 나와 몸의 구석구석을 정해진 길로, 일정한 흐름에 따라 움직인다. 특히 이적을 발현할 때의 그 움직임은 마치 잘 조련된 군대의 움직임을 보는 듯하다.
하지만 엑서들은 법도사와 같은 엑사르를 운용하지만 같은 기운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심장박동에 맞추어 뇌를 스치고 지나간 기운들이 끊임없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슈빌 양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운은 심장의 박동에 따라 퍼졌다가 줄어들기도 했지만 슈빌 양의 기분에도 영향을 받는 듯했다. 살론-새우를 입안에 넣고 씹을 때마다 뇌를 스치던 엑사르가 주위로 확 퍼져 나가니 말이다.
‘그나저나 이 맛은 다른 분들께도 한번 맛보여 드리고 싶군. 정말 대단한 맛이야.’
눈앞의 음식들을 먹으며 생각했다. 이런 맛이 있다니! 콘 왕국에서 들여온 해산물을 마학을 사용하여 보관하여 들여왔다는데 그 맛이 정말 훌륭했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콘 왕국의 해상도시, 마르티아를 꼭 한번 가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식사에 집중하고 있는데 슈빌 양에게서 퍼져 나온 그 기운이 자신의 몸 주위까지 휘감아 돌았다. 어떻게 된 건가 해서 고개를 들어 슈빌 양을 보았는데 슈빌 양은 기분 좋게 식사만 하고 있을 뿐 별로 자각이 없어 보였다.
그럼 이건 그냥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건데… 그런데 왠지 저 기운을 자신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시안은 자신의 주위를 휘감은 엑사르를 훅 하고 끌어당기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런데 그러자마자 엑사르가 격하게 반응하더니 자신 쪽으로 훅 하고 몰려오는 것이 아닌가?!
이를 본 시안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놀라서 급하게 그 흐름을 끊어냈다.
갑작스럽게 엑사르의 흐름이 쭉 하고 빨려나갔다 돌아오자 엑사르의 근원지였던 슈빌 양의 심장과 뇌가 놀란 듯이 엑사르의 흐름을 원래대로 돌리려는 듯이 강하게 수축했다.
“허억!”
“무슨 일인가요, 슈빌 양?”
갑자기 숨이 멎는 듯한 소리를 내며 심장부근을 움켜쥐는 슈빌을 보며 걱정스러운 듯 일론이 물었다.
“…아니에요, 일론 경. 갑자기 놀라서 그랬습니다.”
붉어진 얼굴로 아직도 두근거리고 있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슈빌은 대답했고, 이를 본 시안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으시다니 다행이다. 큰일 나는 줄 알았네…….’
잠깐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식사는 다시 정상적으로 진행되었고, 모든 식사가 끝난 후 시안을 배웅하고 접객실로 돌아온 일론은 슈빌을 불러 물어보았다.
“슈빌 양, 어떤 것 같나요? 그에게서 엑서 특유의 기운이 느껴지는가요?”
“음… 그게…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엑서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이런 적은 처음인데.”
“그게 무슨 뜻이지요?”
“엑서들끼리 만나면 무언가 느낌이 오거든요. 무언가가 얽히며 상대의 생각이나 심장의 박동이 묘하게 겹치며 공조하는… 그런 느낌. 그런 느낌으로 엑서를 파악할 수 있지요.
이건 상대의 수준이나 능력의 종류와는 상관없어요. 엑사르 간의 동조라는 느낌이 드니까요. 시안 공자에게서는 그런 느낌이 들지는 않았는데…….”
“그러면 엑서는 아니라는 건가요?”
“그러기에는 또 뭔가 있는 것 같은 게… 동조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중간에 저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느낌이 왔어요. 이런 걸 느꼈던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뭔지 모르겠지만……. 큰 도움이 못 되어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일하느라 바쁘실 텐데 오늘 와주셔서 감사하지요.”
큰 수확을 얻지 못한 채 슈빌을 돌려보낸 일론은 혼자 남은 상태로 고민에 잠겼다.
“하… 뭔가 확실한 게 없구나… 이렇게 비밀이 많아서야…….”
차라리 리안 공자에게 물어볼까, 란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까지 하기엔 부담스러웠던 일론은 결국 천천히 알아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이제는 바빠지기에 신경을 쓸 시간이 없지만 여유가 되면 언젠가는 확인할 기회가 오리라 생각하고… 오늘의 식사가 굉장히 만족스러운 듯 보였으니 가끔 초대하여 친분을 쌓으면 되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진 일론은 생각을 그만두고 자신에게 정리되어 올라온 오늘자 보고서를 읽었다. 사실 시안 경은 자신의 개인적인 호기심이었고 필수적인 일은 아니었지만 다른 일은 이야기가 달랐다.
보고서를 중간쯤 읽던 일론은 인상을 찌푸렸다.
‘대놓고 한판 붙자고 하고 있구나.’
얼핏 평온해 보이는 엘-루아 거리와는 다르게 현재 티안 왕국의 전역이 들끓고 있다.
영지 간에는 아직 큰 사건이 터지지 않았지만 끊임없는 국지전으로 이에 대한 해결을 요청하는 귀족가들의 탄원이 끊이지 않고 있었고, 왕궁에서는 칼만 안 들었지 도둑놈보다 더한 귀족가 놈들은 이제 완전히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는지 끝없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야금야금 압박해 들어오고 있었다(더 큰 문제는 이놈들이 조만간 칼도 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귀족파도 이제까지는 몸을 사리고 힘을 축적해야 한다는 (비교적) 온건파의 힘이 강성했지만 그들조차도 강경파들이 공격적으로 자신의 세력을 불려나가자 자신들이 먹을 것이 없어질까 봐 경쟁적으로 상대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일론은 몸이라도 풀면 답답한 마음이 해소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보고서를 내려놓고 지하에 있는 수련장으로 몸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