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8화 (9/81)

<8. 충돌>

요즘 식도락에 눈을 뜬 시안은 엘-루아 거리에서 조금 나가면 위치해있는 ‘카락의 뿔’이라는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다시 순찰을 재개하기 위해 구역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빨간 폭죽이 솟구쳐 오르더니 하늘 쪽으로 날아가 크게 터졌다.

‘으잉? 빨간 폭죽?’

일반적으로 가란-티아들은 넓은 범위의 수도를 빠짐없이 순찰해야 하기 때문에 평소에는 단독으로 순찰을 다니며 작은 사건들은 스스로 해결하는 형태로 치안을 유지하고 있지만, 가란-티아 한 명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건이 터지기 마련이다. 이럴 경우를 대비하여 몇 종류의 신호탄이 지급되었다.

붉은 폭죽과 푸른 폭죽.

붉은 폭죽이 터지면 그 폭죽이 보이는 범위 내의 가란-티아들은 폭죽이 터진 구역으로 지원을 나가 같이 해결한다. 주로 평민들의 사고가 아닌 강자들의 충돌 시 붉은 폭죽이 터진다.

푸른 폭죽은 근위기사단의 출동을 요청하는 폭죽이다. 1, 2기사단은 왕궁 내부를 벗어날 수 없지만 3기사단의 경우 유사시의 수도 치안의 임무도 같이 맡고 있다. 가란-티아들의 힘만으로 해결이 힘든 사건이 터지면 현장책임자의 판단 아래 푸른 폭죽을 발사한다.

붉은 폭죽이 터졌다는 것은 이미 위급상황이란 뜻이니 별도의 형식적인 절차 없이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즉각적으로 제압에 들어가 피해를 줄이는 것이 가란-티아가 할 일이다.

여기까지 떠올린 시안은 손에 들려있던 디저트를 한입에 삼키고 폭죽이 터진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이 개자식이!”

“덤벼 봐라, 나라샤 후작의 앞잡이 녀석아!”

도착했을 때 이미 상황은 개판이었다. 보아하니 어느 귀족가와 왕당파끼리 식사를 하다가 시비가 붙어 칼질을 시작한 모양인데, 식당은 이미 한쪽 벽면이 박살이 나있었고 싸움판은 거리까지 넓어진 지 오래였다.

자신이 가장 먼저 도착한 모양인지 옆에 서있는 가란-티아 한 명은 이미 싸움을 말리는 것을 포기하고 주변의 시민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시안은 한숨부터 나왔다. 저번에 봤던 셀린 양도 그렇고, 이 몰상식한 놈들은 싸움에도 세련미가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던지고 부수고 짓밟고…….

자신들 딴에는 주변 지형지물을 활용하며 싸우는 것이겠지만 시안 자신이 보기에는 환경파괴범에 불과했다(예전에 자신이 읽어본 시내 전투교범-기본편은 건물주에 대한 배려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싸움이 벌어졌다 하면 건물 한 채는 기본이라니…….

기본적으로 붉은 폭죽이 터지면 가란-티아의 안전을 위해 인원이 집결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제압에 들어가지만, 그러다가 식당이 더 박살 나면 저기서 울상을 짓고 있는 식당 주인은 오늘 저녁 목이라도 매달 기세이다.

형식적인 절차는 필요 없기에 즉각적으로 제압에 들어가기로 한 시안은 칼집째로 들고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이봐! 기다려!”

뒤에 놀란 눈으로 자신을 부르는 가란-티아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들어가 싸우고 있는 녀석들 뒤통수에 칼집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빠악! 빡! 빠악!

“억!.”

“이 비겁한 녀석! 뒤에서!”

생각보다 실력이 있는 녀석들인지 각 진영별로 한두 놈 골고루 쓰러지자마자 놀라서 자신을 향해 칼을 휘둘러왔지만 이미 늦었다. 이런 훤히 보이는 칼에 맞아줄 정도로 저기 있는 녀석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시안은 사이좋게 뒤통수에 골고루 칼집을 먹여주었다.

“정리 끝났습니다. 엘-루아 구역 담당자 시안, 문제 해결하고 원 구역으로 복귀하겠습니다.”

“아… 그래. 수고했네, 시안 경.”

얼떨떨한 표정으로 사건을 바라보던 구역 담당자는 이윽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의 노란 폭죽을 쏘아 올리기 위해 주머니를 뒤져 하늘로 향했다. 그러고는 곧이어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그 표정에 무슨 일인가 싶어 하늘을 본 시안은 표정을 와락 찡그렸다.

사방에서 붉고 푸른 폭죽들이 터져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 ☆ ☆

“후…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이제 끝난 건가?”

“네, 셀린 경. 수고하셨습니다.”

출동을 마치고 돌아온 셀린은 최근 근무 중 가장 힘든 날이었다고 생각했다.

6발의 푸른 폭죽과 39발의 붉은 폭죽.

오늘 하루에만 터진 가란-티아 신호탄의 개수였다.

수련 중에 하늘을 바라본 셀린은 처음에는 무슨 반란이라도 일어난 줄 알았다. 이 정도의 신호탄 숫자는 태어날 때부터 수도에 살았던 셀린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곧이어 전달받은 피해보고서를 본 후에는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건물 28채 파손, 방화 7건, 민간인 부상자 132명, 사상자 3명, 가란-티아 부상자 35명, 근위기사단 부상 4명, 피해액 983,000골드……. 맙소사… 이게 무슨 일이야, 도대체.”

예상이야 했지만 이건 너무 심하다.

어젯밤 예산을 결정하는 왕궁-대회의에서 귀족파와 왕당파 간의 갈등이 심해져서 칼부림이 일어날 지경인 걸 보았을 때 오래지 않아 터질 것 같기는 했지만(다행히도 그 자리에는 로만 백작이 균형을 잡아서 일단 넘어갔다.) 당장 다음 날부터 이 난리라니…….

“그래도 생각보다는 가란-티아의 부상자가 적습니다. 사상자는 한 명도 없고요.”

자신을 보좌하는 보좌관의 말을 들은 셀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시안이 떠올랐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가 있는 녀석.

동시에 너무 많은 사건이 터져 우선순위를 어디에 둘지 고민하던 자신에게 지시하던 리안 단장의 말이 떠올랐다.

‘붉은 폭죽은 별 걱정하지 말고 푸른 폭죽이 터진 구역만 집중하라고 했던가… 그쪽은 해결될 거니까.’

그때는 바쁜 와중이기도 하고, 또 붉은 폭죽이 터진 구역은 우리 영역이 아니기에 우선 급한 사건부터 집중하라는 뜻인 줄 알고 흘려들었데 돌아와 여유를 가지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뜻이 아닌 것 같았다.

리안 단장은 붉은 폭죽이 터진 구역은 무난하게 해결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굳게 믿고 있는 근원에는 동생이 있으리라.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강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굳이 붉은 폭죽만 방어하라고 놀려둘 이유가 없지…….’

생각해보니 시안의 외모에 자신이 선입견을 가진 것일 뿐(그리고 아직도 보기에는 약해 보이긴 하지만), 정황상 상당한 강자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럴 때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임무의 양을 조절하는 것이 자신이 할 일이 아니겠는가? 마침3기사단의 부단장인 자신에게는 유사시 가란-티아를 지휘하여 치안을 통제할 수 있는 치안통제의 권한이 있다.

여기까지 떠올린 셀린은 드디어 예전의 빚을 갚을 때가 왔다고 생각하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샬롯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귀찮은 걸 엄청 싫어한다는데 이는 훌륭한 선물이 되리라.

‘후후, 내일부터 잘 부탁한다고.’

☆ ☆ ☆

“…이게 뭔가요?”

자신의 앞으로 날아온 한 장의 공문을 보며 시안은 가란-티아 행정 담당관을 보며 물었다.

“시안 경 앞으로 날아온 협조요청공문입니다. 제3근위기사단에서 왔군요.”

시안은 종이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다 놓고 꼼꼼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가란-티아 엘-루아 구역 담당자 시안 폰 로만 경은 현재 수도의 치안 통제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므로 제3근위기사단 부단장 셀린 드 키라인 경의 지휘 아래서 유사시 추가적인 치안업무를 담당한다.>

“…이거 혹시 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왔습니까?”

“아니요. 시안 경에게만 날아왔어요. 그래서 저희도 이상하게 생각하기는 하는데…….”

그러면서 행정 담당관은 자신들은 더 이상 모르겠다고 말한 후 본연의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잠깐 형이 나에게 일을 맡겼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뭔가 수상한 구석이 많았다. 형은 자신에게 이런 걸 시킬 리가 없었다. 게다가 직속 지휘관이 셀린이라는 것도.

하지만 시안은 마음을 편하게 먹고 머리는 비우기로 했다.

고민한다고 다른 방법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때려치울 거 아니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현재의 직장이 굉장히 마음에 들어(머리를 안 써도 된다는 점에서) 때려치울 생각이 전혀 없는 시안은 무리한 요구도 아니고 그냥 현실에 순응하기로 했다.

어제 같은 일이 자주 있을 것도 아니고… 유사시라고 하니 평상시에는 자신의 임무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절대 추가로 지급되는 월급과 월차에 유혹된 것이 아니다.

생각을 마친 시안은 자신의 앞에 있는 문서에 요청업무를 수락한다고 서명을 완료했다.

☆ ☆ ☆

‘젠장, 젠장, 젠장!’

수락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은 왜 단 일주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걸까!

푸른 폭죽이 터진 곳으로 달려가며 시안은 생각했다.

첫날 이후 하루가 멀다 하고 수도 내에서는 사건과 사고가 터지고 있었다.

사방에서 터지는 사고로 인하여 치안이 허술해진 틈을 타 수도 외곽지역까지 문제가 번지면서 가란-티아는 수도 외곽 쪽으로 인원을 추가 배치했고 부족해진 중심부 인력 배치는 3근위기사단이 해결하게 되었다.

원래는 자신도 따라가서 외곽지역을 담당해야 하지만 저번의 문서에 사인했기 때문에 따라가지 못한 상태로 기존의 순찰범위는 족히 세 배는 넓어졌고 추가로 푸른 폭죽까지 자신의 담당이 되어버렸다.

“표정 좀 펴는 게 어때? 네가 여기서 열심히 하는 만큼 리안 경이 편해진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지 않겠어?”

옆에서 달리고 있는 셀린도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이 녀석을 조금 놀려줄 목적으로 협조를 요청했지만 지금은 정말 탁월한 판단이었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고 있었다.

이 녀석과 일한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엄청 강하잖아, 이 녀석.’

싸울 때 강해 보이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녀석이 싸우는 것은 평소 녀석의 생활태도와 똑같았다.

결코 과한 힘을 담지도 않고 무리를 해서 휘두르지 않았다. 흥분하지도, 과시하지도 않고, 기운을 남발하지도 않았다. 어찌 보면 나태하고 어찌 보면 적극적이지 않은 그런 한번 한번의 휘두름.

하지만 옆에서 계속 보고 있자니 그런 칼질 하나하나에 소름이 돋았다.

마치 숙련된 나무꾼이 평생 반복해온 나무질을 해온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마치 이런 상황이 올 줄 알고 평생 연습하며 단 한 번의 칼질을 준비한 것처럼.

모든 휘두름이 그 상황에 가장 적합하다. 단 한 번도 의미 없는 행동이 없다. 낭비가 없다.

자신은 아직까지 이 녀석과 다니면서 이 녀석이 휘두른 칼질을 한 번이라도 피한 녀석을 본 적이 없다. 세 놈이면 세 번, 다섯 놈이면 다섯 번, 상대가 누구이든 어떤 상황이든 간에.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의 주먹을 피한 게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때 자신이 참기로 한 것 역시 정말 잘한 결정이었다.

이 녀석이 요즘 짜증이 나서 그런지 사고 친 녀석들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칼집에 감정이 엄청 들어가 있는데, 더 난장을 피웠으면 자신도 그렇게 두들겨 맞았을 것이다. 보아하니 업무 중에는 여자라고 봐주는 경우가 결코 없었다.

‘세상은 불공평해.’

셀린은 없어 보이지만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열일곱 살에, 그것도 놀고먹으면서 저런 무력을 가지다니.

어느덧 푸른 폭죽이 폭발한 곳에 도착한 셀린은 옆에 있던 시안의 칼집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 자신도 밥값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난전에 뛰어들었다.

☆ ☆ ☆

그논 남작가의 2공자, 키알은 귀환 후의 지금 상황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지방에 있는 작은 가문인 그논 남작가의 2공자로 태어난 그는 축복식처럼 사치스러운 것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받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의 재능이 있었다.

열심히 수련을 하고 반데르를 갈고닦던 그는 나라샤 후작의 눈에 띄어 그의 아래서 검술과 반데르-로아를 사사받게 된다. 레논 대공자와 함께 수련을 하며 착실하게 경지를 올려나가던 그는 나라샤 후작의 아래에서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지만 단 하나가 부족하다고 느꼈고 항상 거기에 목말라 있었다.

전투!

수도는 너무 평화로웠다. 자신이 사고를 치면 나라샤 후작에게도 누가 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어디 가서 자신의 성격을 항상 억누르고 있어야 하는 바람에 키알은 화병이 걸릴 지경이었다. 얌전한 대련으로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실제로 키알은 다른 사람들처럼 마스터의 벽을 넘겠다든가, 탈릭 스톤을 모아와 가문을 부흥시키겠다든가의 이유로 대북벽의 수호대에 지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수호대에 지원한 이유는 좀 더 본질적인, 인간 본연의 비틀린 욕구에 가까웠다.

<마음껏 때려죽이고 찢어도 된다는, 파괴에 대한 무제한 허용!>

사실 수호대의 생활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던 키알은 그곳에 아예 남을까 고민도 하였지만 나라샤 후작이 자신에게 베푼 은혜를 갚기 위하여 동료들을 따라 수도로 돌아왔다.

하지만 지루한 생활을 각오하고 돌아왔던 수도는 예전 자신이 떠났던 수도와는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며칠 전 나라샤 후작의 말을 들었을 때 그는 그의 귀를 의심했다.

‘마음껏 때려 부숴라. 시비를 걸고, 참는 적은 모욕하고 덤벼오는 적은 짓밟아라.’

안 그래도 참고 있던 녀석들에게 이 말은 기폭제가 되었다.

자신의 동료들은 사방에 흩어져서 수도 곳곳에서 사고를 치고 있었다. 억눌려 있던 욕구를 푸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점잖게 해결하는 녀석도 있고, 자신보다 약한 녀석들만 골라가며 집요하게 괴롭히는 녀석도 있고…….

하지만 자신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관심이 있는 자는 오직 자신의 상대가 될 만큼 강한 자! 수호대에 있을 때 동료 간의 전투는 절대금지였기에 억눌려 있던 욕망을 여기서는 마음껏 풀 수 있다.

그 이유가 자신이 크라벨 백작가의 대공자인 캐런을 찾아온 이유였다.

시비를 참으면 재미없다. 다른 다섯 녀석들은 그럴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시간낭비다. 자신은 상대를 모욕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녀석은 시비를 참을 리 없으니까 분명 자신과 재미있게 놀아줄 것이다.

역시나 녀석은 자신의 도발에 어김없이 걸려들었다.

“이 자식! 겨우 나라샤 후작의 종놈인 주제에 나를 모욕하다니!

북벽에서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죽여버리겠어!”

그러고는 자신이 원했던 대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주변의 건물이 박살 나고 땅거죽이 뒤집어졌다. 마스터의 반데르가 검에 맺혀 형성되는 막강한 에너지는 부수지 못하는 것이 없다.

가란-티아 녀석이 푸른 폭죽을 쏘긴 했지만 우리 둘의 싸움을 누가 말릴 수 있는 사람이 오리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적어도 3근위기사단의 단장이라는 애송이 녀석이 올 때까진 계속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후작님의 명을 지키며 자신의 스트레스도 풀 수 있으니 일석이조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흥에 젖어있던 키알은 흥에 겨워 눈앞의 캐런이 휘두른 크라벨 검가 특유의 표범 모양 검기를 피해내며 다시 달려들었다.

빠악!

그런데 그 순간 뭔가 깨지는 소리가 나며 캐런 녀석이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갑자기 고꾸라지다니! 무슨 일인가 하고 순간 당황한 키알은 갑자기 후두부를 강타하는 강렬한 충격과 함께 자신의 시야가 천천히 어두워짐을 느꼈다.

“이… 무슨…….”

꺼져가는 정신을 애써 부여잡는 키알의 귀로 투덜거리는 불평이 들려왔다.

“와… 이 양반들, 그새를 못 참고 이렇게 많이 부숴놨네. 귀족이라는 양반들이 체통이 없어, 체통이. 절제하면서 싸우면 좀 좋아? 실력도 어느 정도 있는 분들이…….”

그것이 키알이 들은 마지막 한마디였다. 아래로 끝없이 끌려 내려가는 느낌을 받으며 키알은 정신을 잃었다.

시안은 아까부터 말없이 옆에서 걸어가고 있는 셀린을 바라보았다.

“근데 셀린 양은 괜찮습니까? 아까 한 사람은 귀족파지만 그 상대편은 왕당파였지 않습니까.”

“그게 어때서?”

“음… 그러니까… 셀린 양은 근위기사단 출신이니… 키라인가면 같은 왕당파 소속이기도 하고… 혹시 기분 나쁘거나 그러지 않으실까 해서…….”

그 말을 들은 셀린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시안을 바라보았다.

“너 혹시 정치학이나 기초 왕국사학이나 그런 거 안 배웠니?”

“음… 그게… 배우긴 배웠는데…….”

어물거리는 시안을 보며 셀린은 리안 경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자신의 동생을 가르치던 선생님들이 금방 포기해서 걱정된다고.

‘이런 거 보면 신이 공평한 거 같기도 하고 말이야…….’

한숨을 쉬며 셀린은 친절히 설명해주기로 했다. 이 녀석도 어느 정도 돌아가는 상황을 알고 있어야 알아서 판단할 수 있으리라.

“잘 들어. 왕실 기사단은 티안의 왕가를 위해 일하는 거야.”

“그러니까요.”

“왕이 누구이든지 간에, 왕가가 어디이건 상관없지, 근위기사단은 티안의 왕가를 외적으로부터 지키고 티안의 문제를 해결할 뿐이야.”

아직도 이해를 잘 못한 시안을 보며 셀린은 추가적인 설명의 필요성을 느꼈다. 예전에 자신의 여덟 살 먹은 사촌에게 이야기했던 기억을 떠올려 설명해주면 적당하리라.

“음… 그러니까 지금의 국왕이 누구이신지는 알지?

“알지요. 크라단 쿤 티안… 음, 3세?”

눈앞에서 불경죄를 대놓고 저지르고 있는 시안을 바라보며 셀린은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2세야. 어쨌든 간에 이상하다 생각한 적 없니? 지금 티안의 역사가 400년인데 겨우 2세라는 것이?”

“아, 그러네요. 왜 그런 거죠?”

“왜냐하면… 우리 나라는 왕가가 있지만 세습제는 아니니까……. 정확히 말하면 왕가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왕가가 된다. 그리고 티안을 이끌어나가는 거지. 지금의 왕가는 그래도 꽤나 우수한 편이야, 2세까지 이어오기는 했으니까.”

“아… 그럼 반란으로 왕의 자리를 차지한 건가요?”

“어디 가서 그러게 떠들고 다니면 끌려갈 수 도 있으니까 조심하고. …반란은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이양? 이라고 할까.”

여기까지 말한 셀린은 목을 축이고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왕가는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는 들어봤니? 왕가의 위치는 누구나 탐내는 자리이지. 하지만 그만큼 책임이 막중하다. 서쪽으로는 강국인 타란 왕국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야 하고 동쪽으로는 막나가는 놈들인 카란 왕국으로부터 왕국을 막아내야 돼. 그리고 쿠라단 협곡으로 이어진 콘 왕국과의 외교에도 신경 써야 하지.”

침을 삼키고 셀린은 말을 이었다.

“이걸 해내려면 어중간한 능력으로는 어림도 없어. 바깥으로는 군사력과 무역, 정치, 외교를 끊임없이 신경 써야 하고 안쪽으로는 내부의 힘을 결집하여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유지하고 외부와 싸울 힘을 얻어야 한다. 그렇기에 왕가에게는 누구에게도 따를 수 없는 명예와 권리가 주어지지만 그에 따른 책임과 능력이 없으면 안 된다. 만약 그런 자가 왕가에 앉으면 나라가 망가지게 되지. 주변 세 왕국이 사이좋게 우리 왕국을 나눠먹으려고 덤벼들걸.”

“아… 그렇다면?”

“그래. 그러한 능력을 가진, 그리고 티안 왕국 전역에 입증해낸 가문이 왕가가 된다. 자격이 있음을 입증하지 못하거나, 혹은 상대편의 능력이 더 막강함을 인정해야 할 상황이 오면 왕가는 그 가문에게 자리를 양도하고 내려오지. 그리고 그들을 도왔던 가문이 왕당파가 된다. 그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양전’이야. 정확히 말하자면 <왕권 이양전>이지. 지금의 왕가나 왕당파는 그 능력을 입증하여 저번 세대의 왕가나 왕당파를 밀어내고 자리를 이양 받은 거야. 밀려난 쪽을 숙청하진 않지. 그들이 만약 순순히 순응만 한다면 적당한 자리에 앉혀 티안의 힘으로 활용할 수 있으니.”

이런 것이 몇백 년간 반복되다 보니 지금은 세대교체가 이루어질 때 얌전히 왕가의 자리를 이양한다. 상대가 굳이 목숨을 빼앗을 생각이 없다면 전력을 보존했다가 후손들의 세대에라도 재기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손에 쥔 것을 놓치기 싫어 끝까지 저항하는 가문은 존재한다. 그런 경우 숙청의 대상이 된다. 내부에 반동분자를 남겨놓을 수는 없으니, 케르벨 백작은 세대교체에서 이런 부분을 걱정하는 것이다.

“음, 그래도 이해가 안 가는데요. 왕실기사단은 왕가를 지키는 게 임무가 아닌가요?”

“왕가를 지키지만 누구의 가문이라도 상관없다는 거지. 근위기사단이 나설 때는 티안이 위기에 처한 상황뿐이다. 왕실기사단에 들어오면 가문이 귀족파나 왕당파라고 하더라도 내전에 절대 개입할 수 없어. 그럴 만한 사람들만 뽑고. 오히려 세대교체는 나라 전체에서 보면 아주 바람직해. 티안을 구성하는 백성들과 귀족가들을 더 잘 이끌어갈 능력 있는 가문이 왕이 되면 티안은 더 부흥하게 될 거니까.

그래서 왕실 근위기사단을 비롯한 3대 무장가, 7대 무장세력, 티안 소속 왕실 법도회 등 티안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는 세력들은 내전에 끼어들어 한쪽 편을 드는 일은 없어. 그들이 손상되면 바로 바깥쪽에서 치고 들어 올 테니까. 항상 두 세력 모두를 멀리서 지켜보다가 선을 넘으면 개입할 뿐이야.

자신의 가문의 힘을 증명할 조건이 되는 것은 오로지 귀족가들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힘뿐이야.”

그제야 시안은 왜 로만 백작이 항상 중립을 표방하면서도 왕실의 근위기사단장을 맡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방법이 오히려 가장 중립을 지키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형이 3근위단장을 맡은 것도 이해는 간다.

이제야 이해가 갔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시안을 보며 셀린은 이 녀석을 자신이 잘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행동하게 놔두기에 이 녀석의 무력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경지가 어딘지 모르겠어. 설마 벽을 넘은 건 아니겠지?’

머릿속에서는 반신반의하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반쯤 인정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 녀석은 이미 축복받은 위대한 자, 그랑-반더일 가능성이 크다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기습이라도 키안과 크라벨을 그렇게 뒤통수 후려치기로 깔끔하게 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애초에 마스터 간의 싸움이 벌어지면 그 근처에는 마스터가 아니라면 접근도 하지 못한다.

수호대에 일단 가서 살아 돌아오는 자들은 대부분이 마스터이다. 애초에 그 정도의 자질이 없다면 수호대 입단시험에 통과하지도 못한다. 그렇게 5년마다 적게는 다섯에서 많으면 열을 넘는 숫자들이 마스터의 숫자에 추가된다. 공식적으로 티안에 존재하는 마스터의 숫자는 97명이다.

그중 이번 내전에 참가한 왕당파 소속이 17, 귀족파 소속이 26이다. 각 귀족가와 왕당파 가문, 수호대에 있던 무력들을 모조리 집결한 숫자이다.

나머지는 왕실기사단, 7대 무장세력과 3대 무장가, 그리고 거의 없지만 중립 귀족가 등에 골고루 분포되어 티안을 지탱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자신과 리안 경 같은 경우는 마스터 중에는 하위권에 속한다. 자신은 거의 마지막일 것이고 리안 같은 경우는 70위 정도 되려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3기사단의 단장과 부단장을 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이미 많은 마스터들이 각자의 위치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이 외곽지역의 핵심지역에서 장군의 역할을 수호하며 카란과 타란의 국지적 도발을 제압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두 번째, 티안 전역의 문제를 해결하여 대법진과 이동수단을 이용해 돌아다니는 1, 2근위기사단과는 달리 3기사단은 수도 내의 치안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따라서 마스터 간의 충돌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국경에 비해 무력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위의 이유로 중요한 외곽지역과 근위기사단, 무장세력의 자리를 메꾸고 나면 상대적으로 3기사단에까지 돌아올 마스터의 숫자가 거의 없다. 3기사단의 마스터는 자신과 리안 경, 그리고 다른 부기사단장을 포함하여 셋이다.

하지만 마지막 이유가 가장 중요하다.

세 번째, 리안 경은 로만가의 혈통을 타고났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랑-반더가 될 것이니까. 그때를 위해 미리 단장의 위치에서부터 경험을 쌓아 나중에 그랑-반더가 되고 왕실기사단장이 되었을 때 원숙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한다.

많은 이들이 리안 경을 존경하고 좋아하지만 뒤로는 시기하는 사람도 많다.

그 이유는 단 하나이다. 그가 젊어서, 그가 무력이 강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나이가 어리다고 칼이 안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리안 경보다 무력이 강한 자는 수도에만도 서른 명은 넘는다. 그럼에도 다들 리안을 시기하는 이유.

<로만가의 혈통을 타고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언젠가는 그랑-반더가 될 것이니까.>

마흔 되기 전에 마스터가 된 사람도 많다. 마흔이 넘어 된 사람도 있다. 그들은 마스터가 넘어가며 활성화된 육체를 사용하여 끊임없이 강해진다. 반데르의 축복을 받은 몸은 늙을수록 더더욱 강해진다.

하지만 그들 모두 그랑-반더라는 벽을 넘어서는 데 실패한다. 너무나도 높아 하늘산맥과 같고 너무나도 깊어 마치 무저갱 같은 절망을 주는, 그 이름.

수많은 사람이 도전했다 실패하고, 실패하고, 또 실패한다. 실제로 100명에 가까운 마스터들 중 그랑-반더는 단 셋뿐이다. 모두가 천재 아닌 사람이 없고 뼈를 깎아가며 살아오지 않은 사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리안 경은 넘을 것이다. 역대 로만가의 가주들은 모두 그랬으니까. 그리고 리안 경도 그럴 것이다.

그것이 리안 경이 마스터가 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3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것이 옆의 녀석을 도저히 그랑-반더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유이다.

☆ ☆ ☆

현재의 크라단 왕가 이전의 왕가인 살라데르 왕가는 100년 가까이 왕가를 유지해 온, 강성한 가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3대 무장가 중의 하나였으니.

초대가주로부터 개발되어 해를 거듭하여 발전해온 가문 특유의 반데르-로아, ‘번개의 꽃’은 티안에서도 비할 바가 없는 우수한 반데르 수련법이었다.

이러한 반데르 수련법을 기반으로 안정적으로 많은 수의 마스터를 배출해 낸 살라데르 가문은 그 강력한 무력뿐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유통과 철광석에 대한 권리를 독점하다시피 하고 수많은 귀족가를 거느리며 무난히 그 전의 왕가보다 자신의 우수함을 증명했고 ‘이양전’에서 승리하여 왕권을 이양 받았다.

그리고 왕권을 이양 받아 더 강성해진 살라데르 왕가는 특별한 경쟁자 없이 근 백 년간 무난하게 티안 왕국을 이끌었다.

하지만 이런 강성한 살라데르 왕가의 왕권이 바뀌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7대 가주 이후 살라데르 왕가에 그랑-반더가 태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크라단 후작가의 종속가였던 키라인 자작가에서 그랑-반더인 현재의 키라인 검공이 태어났다.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세력은 급격히 반전되었다. 그랑-반더가 살라데르 왕가 전체를 상대로 싸울 수는 없지만 살라데르 왕가가 국력을 결정짓는 그랑-반더를 공격할 순 없었다.

그러는 동안 그랑-반더인 키라인 폰 크라단의 힘을 등에 업고 크라단 가문은 급격하게 가세를 키웠고, 귀족가를 통합하여 살라데르 왕가에 도전했다.

그리고 명분과 무력, 세력까지 밀리게 된 살라데르 왕가는 왕권을 내어주고 기존의 3대 무장가로 돌아왔다.

키라인가의 가주인 키라인 검공은 자신을 중심으로 힘 싸움을 해볼 수도 있었지만 자신이 왕국의 운영에 전혀 소질이 없음을 알고 크라단 가주가 티안을 부흥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오히려 허심탄회하게 크라단 가의 가주에게 왕권을 넘겼다. 크라단 왕가의 시작인 것이다.

그리고 크라단 왕가는 키라인가를 공작가로 임명하고 왕당파의 수장으로 삼음으로써 2대에 걸쳐 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크라단 가문 자체의 세력도 강했고 크라단 왕 자신도 유능했지만 키라인 검공이 큰 역할을 했음을 빼먹을 수 없다.

<크라단 왕가가 그랑-반더의 힘으로 왕권을 가졌다면 똑같은 그랑-반더인 자신이 그렇게 못할 이유가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랑-반더가 된 순간 나라샤 후작이 가졌던 생각이었다. 나라샤 후작은 원래부터 야심이 굉장히 큰 사내였다. 자신이 왕이 되어 티안을 더 강성하게 키우고 건방진 타란 놈들과 재수 없는 카란 녀석들을 찍어 누르리라는 생각이…….

이제까지는 완벽하다. 주위에 수많은 인재들이 있었고 끝없는 노력 끝에 세력, 무력, 재력 모두 왕가보다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이는 왕당파에서도 느끼고 있으리라.

이제는 티안 전체에 설득하고 보여주는 일뿐이다. 자신의 가문이 왕권을 가지기에 더 적합한 가문임을! 티안을 더 부흥시킬 수 있는 가문임을!

이미 티안 전역에서 그러한 과정이 순조로이 이루어지고 있다. 각종 상권에서는 자신들의 상단이 기존 왕당파의 점유율을 야금야금 삼켜가고 있었고 가문 간의 결집도 순조로이 이루어지고 있다. 여러 가문 구석구석 자신들의 힘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번에 터트린 사건은 그저 기세를 꺾어놓기 위한 아주 사소한 해프닝 중 일부였을 뿐이다. 그저 계획의 시작일 뿐인데 여기서부터 이렇게 막히다니… 애초에 무장 간의 차이가 심하기에 막히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왕당파 놈들의 기세를 짓밟아놓고 알아서 기도록 유도할 생각이었는데.

‘어처구니가 없군…….’

“…그래서, 키알은 지금 구금되어 있던 걸 풀어서 데리고 왔다고?”

“네, 그렇습니다. 현재 후두부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가 방금 깨어난 상태여서 가문 내부의 엑서에게 치료를 부탁한 상태입니다.”

나라샤 후작은 보고를 듣고 한숨을 쉬었다. 이 녀석은 어딜 가서 이렇게 두드려 맞고 온 걸까.

이 녀석뿐이 아니다. 다른 지역 녀석들은 적당히 하다가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지만 엘-루아 거리를 중심으로는 몽땅 구금되었다. 그중에 이 녀석도 있을 뿐.

“3근위기사단이 그 근처로 몽땅 투입되었나?”

그럴 수 있다. 엘-루아 거리라면 치안이 핵심일 테니.

“…아닙니다. 저희도 이해할 수 없는데 리안 단장이 그 거리 중심에는 가란-티아 한 명과 셀린 부단장만 배치하고 오히려 전역으로 근위기사단을 흩었습니다.

그래서 예정보다 근위기사단들이 빠르게 도착하는 바람에 생각만큼 오래 시간을 끌 수 없었습니다.”

나라샤 후작은 무슨 일인가 고민해보았다. 처음에는 왕당파 무장들에게 기습을 받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게다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거기서 사고 친 왕당파 무장들 역시 같이 끌려갔다고 한다.

“안되겠군. 이야기로만 들으니 모르겠어. 키알을 한번 만나봐야겠다. 안내해라.”

그러고는 보좌관을 따라 나라샤 후작은 치료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싸우다가 뭣도 모르고 기절했다고?”

“…네, 후작님, 면목이 없습니다. 저도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후 키알의 상처를 살핀 후작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딱히 네가 면목 없을 필요는 없을 것 같구나.”

“예?”

“아니다. 그만 쉬어라.”

키알을 치료실에 놔둔 채로 집무실에 홀로 올라온 나라샤 후작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뭐지…….’

상처를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아니, 애초에 마스터 중에서도 실전에서 단련되어 상당한 수준인 키알이 한 번에 기절했단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난전 중이라 기습에 당한 것이라고 믿고 싶었을 뿐.

변수가 나타났다.

‘어디서 새로운 그랑-반더가 나타난 거지…….’

뚜렷이 새겨진 후두부의 그 상처는 타격의 존재가 키알보다 압도적인 강자임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수준이 떨어지면 모르겠지만 그랑-반더에 이른 자신은 알 수 있다.

자신이 키알을 제압하기로 결정하면 딱 저러한 상처가 나오리라. 애초에 키알이 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 키알이 면목 없을 일이 아니다.

키라인 검공이나 로만 백작일 리는 없다. 그 당시 자신과 키라인 검공, 로만 백작 그 셋은 왕실의 내궁에 고위귀족들과 모여 대회의를 진행 중이었으니까. 나라샤 후작은 자신도 대회의에 꾸준히 참석함으로써 변수가 될 수도 있는 그 둘을 내궁에 묶어놓았다. 셋을 제외한다면 무장들의 전력은 자신들 쪽이 월등하니까.

외부에서 왔을 리도 없으니… 어딘가에서 숨어 있던 그랑-반더가 나온 것이다. 최악은 이자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이렇게 되면 계획이 완전히 달라진다.

양쪽 모두 기절시킨 걸로 보아 단순히 중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확신할 수도 없다. 단순한 변덕일 수도 있고 귀족파 인물일 수도, 왕당파 인물일 수도 있다. 가능성은 적지만 외부의 세력일 수도 있다. 엘-루아 거리를 중심으로 그런 것을 보아 단순히 은거하고 있다가 시끄러워서 때려잡은 것일 수도 있다.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확실하다고 해도 문제다. 이번에 한 일만 보면 소동을 원하지 않는 듯한데 이런 식으로 이 정체불명의 그랑-반더가 양쪽 모두 견제하면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

자신은 상황의 유지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변화를 원하고 더 나아가 승리를 원한다.

계속해서 정체불명의 그랑-반더가 수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제압한다면, 더 나아가… 혹여 변심이라도 해서 자신들을 적대하기라도 한다면 이번에 귀환한 수호대와 기존 마스터 전력으로는 막을 수가 없다. 왕당파를 압박한다는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다.

당장 자신만 하여도 자신의 진영 마스터 스물여섯이 몽땅 덤벼도 조금 위험하기야 하겠지만 모조리 찢어놓을 수 있다. 심지어 이런 식으로 각개격파 당하기라도 한다면… 모두 저택에 모여 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 오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나라샤 후작은 <그 존재>들을 동원해야 하나… 그런 생각까지 했다.

자신이 카란과 타란, 두 왕국과 싸울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가지게 해준 존재들.

목적이 같지 않았다면 결코 같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걸 자신이 가지고 있고 자신이 원하는 걸 그들이 가지고 있었기에 같은 배에 탈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한 후작은 자신의 생각이 너무 나아갔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위험하다. 이렇게 내전에까지 동원할 존재들이 아니다.

게다가 아직 새로운 존재의 그랑-반더에 대해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운이 좋으면 그랑-반더가 아닐 수도 있지 않겠는가.

우선은 좀 더 상황을 지켜보아야겠다고 생각한 후작은 수도를 좀 더 흔들어보기로 했다. 숨어있는 그랑-반더의 반응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결과를 기반으로 그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야 앞으로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후작은 아래 참모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앞으로의 세부 방향을 결정하기 위해서.

☆ ☆ ☆

“아, 몰라몰라. 전 퇴근입니다.”

시안은 마지막 녀석을 후려쳐 눕히곤 퇴근시간이 되었음을 깨닫고 칼집을 챙겼다.

저 멀리 푸른 폭죽이 하나 더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시안 입장에서 저건 교대자 몫이다. 안 그래도 요즘 엄청 고생하고 있는 게 억울해서 더 근무할 수 없다.

“…흐우…….”

칼집을 챙기는 시안을 본 셀린은 기묘한 한숨을 쉬었다. 이 녀석은 도대체 프로라는 자각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렇게 직업윤리가 없다니… 푸른 폭죽이 터졌다면 저곳은 이미 박살이 나고 있을 텐데 퇴근시간이 딱 되자마자 가는 시안을 보고 셀린은 샬롯이 왜 이 녀석을 싫어하는지 이해가 되고 있었다.

어쩌면 엄청나게 프로라고 할 수도 있겠다. 딱 돈 받는 만큼만 일하니까.

근 열흘간의 경험으로 말려봤자 의미 없음을 깨달은 셀린은 그냥 포기하고 자신이라도 달려 나갔다. 근처 근위기사단을 도와야 한시라도 빨리 제압할 수 있으니까.

달려가는 셀린을 보며 시안은 양심이 좀 찔리긴 했지만 자신은 정말 엄청나게 일했다며 자기합리화를 시전했다.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프로이다. 돈 받은 그 이상으로 결과를 내고 있으니까!

근 3일간 엘루아 거리 근처에서만 집중적으로 푸른 폭죽이 터져 나왔다.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구역만! 덕분에 자신만 엄청나게 고생했다. 이 달의 일등 가란-티아를 뽑으면 그건 당연히 자신이 되어야 한다(셀린이 시안에게 시말서를 쓰게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것을 시안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걸 리안 경이 달래고 있다는 것도).

게다가 이번에 사고 친 녀석들은 어디서 무슨 범죄를 저질렀는지 저 멀리 감시자를 달고 왔다. 자신은 사고 친 게 없으니 이 녀석들을 감시하는 게 틀림없다.

아주 중증의 범죄자임이 틀림없다. 이 녀석들을 감시하는 녀석들이 따로 존재하고 있다니!

그래서 이 녀석들은 정의의 이름으로 특별히 더 다져주었다(절대로 하루만 기절시키면 다시 와서 난장을 피울까 봐 전치 2주 치로 뽑아준 것이 아니다).

물론 자신이 이 녀석들을 때려눕히는 것이 들키면 더 귀찮아질 것 같아서 감시자들을 먼저 살포시 기절시킨 후 눈앞의 범죄자 녀석들을 때려주었다.

사실 감시하는 분들도 반성 좀 해야 한다. 범죄자 녀석들에게 들킬까 봐 거리를 두고 감시한 것은 좋았지만 그렇게 반데르를 칭칭 두르고 눈에 힘을 주다가 범죄자들이 눈치채면 어쩌려고 하는가? 실제로 자신에겐 들키지 않았는가.

비록 열심히 공무를 수행하시는 분들을 기절시키는 것이 안타깝긴 하지만 덕분에 범죄자들을 자신이 잡아넣어 주었으니 돌아가시면 아마 포상휴가라도 받게 되실 것이고 그걸로 만족하실 것이다.

‘아… 휴가라도 안 나오나…….’

피로에 지친 시안은 정말 간절하게 휴가를 갈구하고 있었다. 하루 열 시간에 가까운 근무는 자신에게 너무 가혹했다.

☆ ☆ ☆

‘안되겠다. 처리한다.’

더 많은 전력을 손상시킬 수 없어서 딱 3일만 더 흔들어 보았다. 상황을 보니 정체불명의 그랑-반더가 죽이거나 불구를 만들지는 않으리라 생각하고 내린 판단이었다.

일부러 평소에 기고만장하고 자존심이 드센 귀환자 아이들을 섞어서(두드려 맞을 것이 뻔하니 이번 기회에 좀 반성하고 얌전해지라는 의미에서) 엘-루아 거리 근처에서 집중적으로 시비를 걸게 했다. 시간도 다르게… 장소도 다르게… 그리고 귀환한 아이들을 보낼 때는 그 옆에 감시역을 딸려 보냈다. 멀리서 관찰하여 새로운 그랑-반더의 존재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하여.

자신이 직접 가서 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자신이 대회의장에서 빠져나오면 당장에 키라인 검공도 쫓아 나올 것이다. 그러면 의미가 없다.

그렇게 해서 보냈는데… 상대가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귀환한 아이들도 모조리 두드려 맞았을 뿐더러 감시하고 있던 아이들도 모조리 기절했다. 마스터가 피우는 난동인지라 주변 일반인들도 모조리 도망가서 누가 때려눕혔는지 본 백성들도 없다.

그래도 알아낸 사실이 몇 가지 있다.

1. 엘-루아 거리를 중심으로 셀린 제 3근위기사단 부단장이 담당하고 있는 구역에서만 기절한다.

2. 8:00-18:00이 넘어가면 더 이상 개입하지 않는다.

3. 수백 미터 바깥에 있는 감시역도 기절한 것으로 보아 조력자가 있는 듯하다. 법도회에 문의해본 결과 감시마법을 사용하면 비슷한 결과를 낼 수 있다고도 한다.

4. 자신이 시험해본 것을 알아챈 것 같다. 근 3일간 시비를 걸었던 아이들은 더 큰 부상을 입었다. 자신에 대한 경고가 틀림없으리라.

5. 자신의 구역에서, 정해진 시간에만 난장을 부리며 가란-티아 흉내를 내는 것을 보니 더 이상 자신의 정체를 캐지 말고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 같다.

셀린 부단장이 그랬을 리는 전혀 없다. 햇병아리인 데다 경지를 숨기고 있다고 하더라도 겨우 35살에 그랑-반더일 리가 없다.

그 구역 가란-티아가 로만 백작가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듣고 잠시 의심해보긴 했지만… 열일곱 살 풋내기라는 소리를 듣고 관심을 돌렸다.

새로운 그랑-반더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데도 실패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앞으로 후작의 방향을 정하는 데 영향을 미치진 않으리라. 정보가 확실하진 않아도 결단을 내려야 한다. 시간이 없다.

“엘-루아 거리 바깥쪽은 계속 흔들어라. 그 안쪽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네, 알겠습니다.”

자신의 명령을 듣고 실행하러 내려간 참모를 뒤로하고 나라샤 후작은 좀 더 생각을 해보았지만, 이제와 다른 방법을 찾기에는 시간과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이렇게 정체를 드러내기 싫어한다면 찾아낸다고 해도 영입할 수도 없으리라. 시간이 많다면 천천히 찾고 시간을 들여 회유하겠지만 이미 달리는 호랑이에 올라탄 형세이다. 시간이 없다.

다른 구역을 흔들면서 엘-루아 구역에만 전력을 투입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엘-루아 구역에 있는 키라인 검공과 왕당파를 두려워하여 그런다고 생각할 것이다. 다른 곳을 흔드는 것을 멈추어도 다른 귀족들은 그렇게 판단할 것이다. 이러면 안 된다.

만약 이런 짓을 할 그랑-반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번 계획은 아예 시행하지도 않고 다른 계획을 찾았을 것이다.

차라리 이렇게 수도가 혼란할 때 어떻게든 처리해 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후작은 일단은 이번 한 번만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비록 그랑-반더를 이런 식으로 처리하기는 아깝지만 어차피 이런 식으로 숨어있을 자가 나중에라도 자신들을 도울 것 같지는 않았다.

수도 한가운데서 싸우면 너무 눈에 띄지만 그들이 가진 힘이라면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다.

그랑-반더가 아쉽기는 하지만 자신이 왕이 되지 못한다면 쓰지 못하는 <그들>의 전력이 더 아쉽다.

판단을 내린 후작은 자신의 집무실 구석에 위치해있는 소형 대법진을 열었다. 자신의 영지인 나라샤 후작령에 머물고 있는 그들에게 연락을 하려는 것이다.

부르면 순식간에 올 것이다. 그런 자들이니까. 그리고 알아서 처리해 줄 것이다.

만약 나라샤 후작이 사고를 치고 있는 게 시안인 줄 알았다면 장기휴가를 내림으로써 아주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을 문제를.

시안이나 나라샤 후작 둘 모두에게 안타까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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