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칼-키라트>
“오랜만이군. 잘 지내고 있었나?”
나라샤 후작이 자신의 저택 아래에 위치한, 지하의 비밀공간에서 허공에 대고 말을 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허공은 아니었다. 허공에서는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었으니까. 마치 사람의 형상을 띤 것처럼. 그리고 그러한 일렁거림은 한둘도 아니었다.
나라샤 후작의 말에 그 일렁임에서는 음산하지만 묵직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물론이다……. 여기는 정말… 천국 같더군……. 음식들은 맛이 좀 없는 것 같지만…….>
“하리쟌 고기가 질린다고 한 건 당신들이 아니었나. 하하. 사실 어딜 가서도 하리쟌 고기보다 맛있는 것은 찾기 힘들지.”
<…그런가. 모든 게 완벽한 곳은 아니군…….>
“어쨌든 이렇게 빠르게 와줘서 다행이군.
연락을 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도착하다니, 언제 보아도 신기한 능력이야.
사정은 다 들어서 알고 있겠지?”
<그렇다… 우리의 목표에 방해가 되는 자가 있다고 들었다……. 너희들의 말로 그랑-반더… 라는 자를 잡아서 죽이면 된다고 하였나?>
“그래. 이번에 어떤 작자가 훼방을 놓고 있어서 말이야. 누군지도 모르겠지만… 뭐… 그 정도 알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물론이다. 그런 걸 못해서야 어찌 동맹 사이에 신뢰가 싹틀 수 있겠는가… 한곳에 계속 숨어있으려니 좀이 쑤셔 하는 아이들이 몇 명 있었는데… 이번에 그 아이들을 데려왔다.>
“그래. 자네들 모두가 다 올 필요는 없었겠지. 이런 일로 말이야.”
후작은 말하면서도 입이 썼다. 그랑-반더인 자신이 자신의 입으로 그랑-반더를 해치우는 일이 별 볼 일 없는 일이라고 하다니…….
비록 무력이 자신의 가장 큰 무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후작이지만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면… 바로 들어가겠다. 사정을 들으니… 급하겠더군. 하루빨리 처리하는 것이 좋겠어. 당신과 비슷한 수준의 파장을 가진 자겠지?>
“그렇다네. 여기 기본적인 내용이 정리된 서류가 있네. 아, 그리고 여기 있는 두 인물들은 건드리면 안 된다네. 계획이 크게 어긋나게 되니까. 지금 계획을 틀어막고 있는 그랑-반더만 처리해주면 되네.”
그러면서 나라샤 후작은 보고서와 로만 백작과 키라인 검공이 그려진 초상화를 보여주었다.
이들은 비록 다른 노선을 걷고 있지만 나중에 티안을 위해 힘이 되어 줄 자들이다. 게다가 차지하고 있는 입지 또한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에 처리해도 큰 후폭풍에 휘말리게 되리라.
<알았다……. 당신은 계획대로 일을 진행하고 있도록… 그쪽은 우리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하지……. 키라트… 나가서 찾아와라……. 우리는… 후작이 제공해 준 곳에 머무르고 있겠다……. 키라트가 찾게 되면… 행동을 시작하지.>
그 말을 끝마친 후 일렁거리던 사람 형상의 물결 중 가장 작은 물결이 바로 사라졌고, 그 뒤로 물결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지하의 밀실에는 나라샤 후작만이 남게 되었다.
‘후… 이 선택이 최선인지 모르겠군…….’
저들은 정말 타국과의 전쟁까지 가서야 꺼내려고 했던 최후의 패다.
처음에 저들과 접선했을 때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기쁨에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날카로운 칼날은 위험하지만 손잡이만 잘 연결하여 사용하면 무엇보다도 훌륭한 무기가 되니까.
저들의 능력만 잘 활용하면, 자신의 대에서 티안의 세력을 크게 넓힐 수 있으리라.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그는 저들을 자신의 후작령 한구석에 숨겨놓고 저들을 활용할 수 있는 최고의 상황을 만들기 위해 기존의 계획을 모두 갈아엎고 다시 판을 짜왔다.
저들은 모두가 두려워할 만한 자들이고, 또 모두가 저들을 두려워해야 하지만 그 대상이 티안이어서는 안 된다. 그 대상은 카란과 타란이 되어야 했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위험한 맹수인 저들을 통제하고 변수를 관리해야 했다.
이러한 저들의 위험성을 생각하면 이런 곳에서 사용할 자들이 아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더 이상 아껴놓았다가 이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면 써먹지도 못한다.
비록 정체불명의 그랑-반더의 무력이 아깝기는 했지만… 자신의 계획대로라면 무력은 저들만으로도 충분하다. 우선 자신이 왕가를 차지하기만 한다면 그랑-반더 하나의 숫자로 대세가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나라샤 후작은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판단을 내렸으니 된 것이다. 뒤는 저자들이 알아서 해주리라.
그러고는 지하의 밀실을 나와 참모들을 만나러 작전실로 향했다. 상황이 변하였으니 계획을 좀 더 다듬고 변수를 관리해야 한다.
☆ ☆ ☆
시안은 요즘 전쟁신께서 자신을 돌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최근 푸른 폭죽이 터지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저번에 강력범죄자들 몇 명을 후려쳐 잡아넣었던 소문이 퍼진 모양인지 엘-루아 거리는 최근에 큰 사건이 터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상하게도 자신의 구역을 제외한 다른 구역에서는 비슷한 빈도로 사건이 터지고 있었지만,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이라고 언제까지 운이 좋지 않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게다가 다른 구역에 사건이 터진 탓에 요즘 자신에게 찰싹 붙어 동행하던 셀린도 그쪽 구역을 지원하러 나갔다.
즉, 완벽하게 재앙의 날(시안은 폭죽이 터지고 셀린과 합류하게 된 날을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이전으로 돌아온 것이다.
없어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다더니…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고 생각한 시안은 이제야 돌아온, 그리고 언제 깨질지 모르는 평화로움을 더 적극적이고 더 격렬하게 즐기기로 하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엘-루아 거리를 순찰하던 시안은 이상한 것을 발견하였다.
‘…저게 뭐지?’
무언가 구름 같기도 하고 물결 같기도 한 투명한 것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딱 보아도 엄청 수상한 물체가 지나다니는 자리 뒤로는 허공이 일렁거리며 주위 배경을 어그러트리고 있었다.
아무리 투명하다고 해도 저 정도라면 보일 법도 한데 지나가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 정체불명의 물체 곁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고, 그 물체도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듯 거리 구석구석, 사람들 사이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뭐 하는 거지? 냄새라도 맡는 건가?’
이곳은 저번에 자신이 강력범죄자를 때려잡은 곳이었다. 정체불명의 물체는 아직 한창 수리가 진행 중인 거리를 돌아다니며 왔다 갔다 하고 있었는데 왠지 시안의 눈에는 묘하게 냄새를 맡는 듯한 모양새로 보였다.
아무리 봐도 너무나도 수상한 정체불명의 물체를 보며 시안은 지금의 상황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1. 아무리 봐도 너무너무 수상하기 때문에 가서 체크하고 가란-티아로서의 임무에 충실하게 임한다.
2. 자신 말고 주변 사람들은 저것을 보지 못한다. 그렇다는 뜻은 자신도 보지 못했다고 우기면 나중에 문책 당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저 녀석과 엮이면 엄청나게 귀찮아질 것임을 온몸이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이렇게 정리해보니 시안은 고민할 것도 없는 사안을 자신이 고민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지나간다.’
상황을 정리해보니 자신이 저 물체에 엮일 이유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멀리서 발견했으니 이에 감사하고 피해 가면 되는 것이다.
시안은 속으로 다시 한 번 전쟁신에게 기도하며 엘-루아 거리 옆으로 나 있는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그 순간, 자신을 발견한 듯한 그 정체불명의 물체가 자신 쪽으로 맹렬한 속도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제발 지나가라… 지나가라… 제발!’
시안은 모른 척 계속해서 자신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번에는 전쟁신께서 자신을 버린 모양이다.
끊임없이 일렁거리며 다가오던 물체는 어느새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왔고 자신에게 기묘한 흐름을 쏘아 보내기 시작했다.
그 흐름이 며칠 전 일론 양의 집에서 슈빌 양에게서 흘러나오던 흐름과 유사함을 느낀 시안은 무심코 그 흐름을 튕겨내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신의 앞에 있던 물체가 격하게, 마치 혼자서 지진이라도 맞은 것처럼 지금보다 훨씬 더 격하게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일렁거림이 흩어지고 그 앞에 웬 조그마한 여자아이 하나가 툭 하고 떨어져 나왔다. 그러고는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곧바로 뒤로 넘어가 기절하고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고…….’
그걸 지켜보고 있던 시안은 주변의 웅성거림을 느끼며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탄식의 한숨을 내뱉었다.
☆ ☆ ☆
칼-라샤는 이곳의 후작이라는 자가 마련해 준 공간에서 동료들과 쉬며 임무를 위해 떠난 자신의 동생을 떠올렸다. 잘 해낼 것이다. 칼의 이름을 이어받은 아이니까.
그 아이의 능력은 온갖 듣도 보도 못한 이능을 행사하는 엑서 중에서도 특이하다.
칼-키라트. 자신의 사랑스러운 여동생.
자신이 살던 곳은 지옥이었다. 자신은 태어났을 때부터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생존>
오로지 살아남는 것만이 가치 있다. 자신뿐만이 아니다.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싸우고 또 싸워야 했다. 죽이기 위해 달려드는 하리쟌들을 죽이고, 그 고기를 먹으며 살아가고…….
그러면서 끊임없이 내려갔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그곳으로 갈수록 하리쟌들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물론 결코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
아주 천천히… 수백 년에 걸쳐… 일곱 장로들의 지시에 따라 자신들은 끊임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멸망한 제국의 땅을 거치며…….
수백 년에 걸친 그들의 이동을 가로막은 것은 거대한 장벽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을 지키는 인간들을 만났다.
대북벽을 보고 고민하고 있던 자신들이 만난 인간들의 대장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장벽을 몰래 넘는 것을 도와주고 자신들이 살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자신들은 드디어 살아남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저주받은 제국의 영토에 수백, 수천 명의 동료의 시체를 남기고.
이곳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좀이 쑤실 정도로…….
자신들이 본 인간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을 맞이한 인간들의 대장인 나라샤 후작은 이곳에서 굉장히 강한 축에 속하는 강자라고 한다. 그 이야기를 하며 자신들의 동료들과 웃었던 기억이 난다. 정말 평화로운 곳 같다고.
자신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길래 자신을 포함하여 열한 명의 동료가 장로님을 따라 나왔다. 목 하나 따는 데는 너무 많은 것 같기는 했지만 다들 좀을 쑤셔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로님도 청을 들어주었다.
키라트가 이번에 죽여야 할 자에 대해 정보를 알아오면 자신들은 행동을 시작할 것이다. 사실 자신도 키라트가 어떤 방식으로 그렇게 사람을 잘 찾아내는지, 온갖 것에 대한 정보를 모아오는지는 잘 몰랐다. 동생이 자세히 말해주지는 않았기 때문에.
사실 서로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서로에 대하여 묻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기기에… 다만 믿고 맡길 뿐이다. 그리고 결과로 보여주면 된다.
이제까지 자신들의 길잡이 역할을 한 키라트 역시 이번에도 자신들이 갈 길을 알려줄 것이다. 쭉 그래왔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칼-라샤는 여동생에 대한 관심을 눈앞의 디저트라고 불리는 것에 돌렸다. 음식은 하리쟌 고기보다 맛이 없지만 이 디저트라는 것은 기가 막혔다. 기회가 있을 때 많이 먹어두고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며 한입 디저트를 베어 문 라샤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 ☆ ☆
<엑서만큼 신기한 존재는 없다. 그들은 무슨 능력을 가졌을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기에. 아, 물론 그래 봤자 내가 이기지만.>
150년 전의 라-반더,
‘검은 달’ 카라-칼이 남긴 어록 중에서
☆ ☆ ☆
칼-키라트. 자신의 이름. 동료들을 이끄는 길잡이.
자신에게는 어릴 적부터 숨겨져 왔던,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능력이 있다. 오로지 자신의 언니 라샤만이 알고 있는 능력.
자신을 제외하면 이러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들어본 적이 없다. 심지어 이곳에 와서 추가로 몰래 조사해 보았을 때도.
<어떤 것을 보면 옆의 허공에 이상한 것이 보인다. 정확히 말하면… 그 물건이나 상황, 사람에 대한 정보>
어떤 경우는 자세하고 어떤 경우는 불친절하다. 어떤 경우는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이 나열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놀랍도록 정확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도움이 된다.>
자신의 이 능력은 자신뿐 아니라 동료 전체를 생존으로 이끄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되어 주었다. 실제로 자신이 이 능력을 개화한 이후로 평소대로 왔다면 100년이 넘게 걸렸을 거리를 단 10년 만에 주파하고 대북벽에 다다를 수 있었다. 자신들이 인간들의 대장을 만나도록 유도한 것도 이 능력이다.
나라샤 후작이라는 자에게 처리할 자에 대한 정보를 아무것도 듣지 못했지만 장로님이 걱정하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다.
칼-키라트, 자신이라면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장로님의 옆에 서서 나라샤 후작과의 대화를 듣던 도중 어김없이 허공에 이상한 창이 떠올랐다. 어떤 물건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특이한 상황이 되면 허공의 창은 자신에게 가야 할 길을 알려주고는 했다.
[퀘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나라샤 후작의 부탁. YES/NO]
아직도 퀘스트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임무… 라는 뜻 정도로 알아듣고 있다.
만약 임무를 받아들이면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지 상세한 방향이 뜬다. 그리고 도와줄 정보도 끊임없이 제공된다. 불친절하긴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
수락한다고 눌렀더니 이번에도 부가적인 임무가 발생하며 그에 대한 정보가 주르륵 나열되었다.
[나라샤 후작의 부탁을 받아들이셨습니다.]
[5장로의 명에 따라 엘-루아 거리로 가십시오. 그리고 그곳에서 정체 모를 인물에 대한 흔적을 찾아내십시오]
[보상: 경험치 1450. 5장로의 신임 유지. 탐색 스킬의 숙련도 소량 상승]
엘-루아 거리라는 곳이 어딘지 몰랐지만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옆에 지도의 모양으로 나타날 테니.
칼-키라트는 여기까지 생각한 후 밀실에서 나와 지도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생각보다는 우선 행동이다. 그곳에 도착하면 또 자신에게 추가적인 정보를 제공해줄 것이다. 항상 그래왔으니까.
지도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엘-루아 거리라는 곳은 웅장하고 깔끔하였다. 예전 지나가다 본 제국들의 폐허가 복원되면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임무가 없었다면 천천히 이곳을 관광이라도 하며 그 ‘디저트’라는 것을 파는 가게를 찾아 다녔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
지도가 자신을 안내한 곳은 이러한 거리에서도 조금 이질적인 곳이었다. 박살이 나있었으니까. 그곳을 수리하기 위해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엘-루아 거리에 도착하셨습니다.]
[미션: 전투의 흔적을 찾아라!]
-이곳은 나라샤 후작 측의 귀환자인 쿠론(근위기사단 출신, 44세)와 왕가 측의 귀환자인 리리안(근위기사단 출신, 43세)이 맞붙은 전투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둘은 이곳에서 전투를 벌이다 정체불명의 인물에게 제압을 당하였다. 그의 흔적을 찾아라.
퀘스트는 이번에도 쓸데없이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며(자신이 여기서 맞붙은 자들 출신과 나이를 알아서 어디에다가 쓴단 말인가) 자신에게 할 일을 가르쳐 주었다.
어차피 자신은 마을에서 내려오는 특유의 은신술인 젠가르-클랑을 운영하고 있으니 주변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천천히 찾아보면 되리라.
그렇게 생각한 키라트는 주변 물건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뒤져보기 시작했다.
[! ‘쿠론 경의 검에 부숴진 돌’을 발견하였습니다.]
[! ‘리리안 경의 검집 장식’을 발견하였습니다.]
[! ‘식당 주인의 바람 피운 증거’를 발견하셨습니다.]
한동안 쓸데없는 정보가 허공을 가득 메웠지만 포기하지 않고 꼼꼼히 찾아보았다. 퀘스트가 자신을 이곳에 안내했다는 것은 이곳에 반드시 흔적이 있다는 뜻이니까.
그렇게 생각한 키라트는 마침내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정체불명의 인물이 떨어트린 단추’를 발견하셨습니다.]
[미션: 향의 흔적을 찾아라.]
-정체불명의 인물이 떨어트린 단추를 발견하였다. 단추의 주인은 분노에 가득 차 검을 휘두르다가 실수로 단추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 인물의 향이 아직 단추에 조금 남아있다. 이 향을 추적하여 정체불명의 인물에 대해 밝혀라.
‘이 정도야 간단하지…….’
키라트는 향을 쫓기 위해 자신이 미션에서 얻은 스킬을 발동시켰다. 이 기술은 자신의 동료들을 수많은 위험에서 구해준 역사가 있다
[스킬 <쟈르반의 후각> 발동]
-후각이 숙련도에 따라 크게 향상됩니다.
-특정한 향을 기억하였습니다.
-너무나도 미세하게 남아있는 양이라 인물의 15m 안에 접근하여야 알 수 있습니다.
후작이 준 보고서에 따르면 그 인물은 이 근처에 사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조금 귀찮긴 하지만 이 근처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샅샅이 훑으며 다니면 되리라.
그렇게 생각한 키라트는 거리 한가운데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향을 맡기 시작했다. 정체불명의 인물을 찾기 위하여…….
오래지 않아 키라트에게 정보창이 울렸다.
[스킬 <쟈르반의 후각> 추적 성공]
-정체불명의 인물이 흘린 단추의 향이 느껴집니다.
-현재거리: 13.55m
허공에 나타난 정보를 보고 주위를 두리번거린 키라트는 이윽고 향이 가리키는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뭐야, 스킬이 틀린 거 아냐?’
자신의 기술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실망시킨 적이 없지만, 이번에는 의구심이 들었다.
자신이 바라본 곳에는 이곳을 아리송한 표정을 바라보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자에게는 특유의 강자라는 느낌이 느껴지지 않았다.
죽음의 땅이라는 북대수림에서 살아 돌아온 자신은 짐승에 가까운 수준의 육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강자와 위험함을 집중적으로 느끼는 이 감각은 자신을 배신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저 남자에게는 그러한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그랑-반더라고 하였다. 그랑-반더 수준이라면 내 감각을 벗어날 수 없는데…….’
하지만 정황상 저 남자가 자신이 찾고 있는 남자임이 확실해 보였다.
정보창과 스킬들은 자신을 속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고, 더군다나 남자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확실해 보인다.
자신을 보고 엄청나게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옆길로 돌아가려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선 강자임에는 틀림없다. 이곳의 말로 마스터라는 자들도 자신의 은신술을 쉽사리 느끼지는 못한다.
여기까지 생각한 키라트는 좀 더 확인이 필요함을 느끼고 저 남자가 돌아가기 전에 확인을 해보기로 했다.
만약 저 남자가 자신이 찾는 그랑-반더라면 자신의 은신술로는 접근도 할 수 없지만 자신에게는 은신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5장로님도 자신이 모든 스킬을 발동하면 찾지 못한다. 비록 공격할 의사를 가지면 바로 들키지만 말이다. 하지만 자신은 우선 확인만 하고 올 것이니 괜찮을 것이다.
[스킬 <요정여왕의 발걸음> 발동]
-다른 차원에 한 발을 걸쳐놓게 됩니다. 존재의 흔적이 크게 줄어듭니다.
{스킬 <암흑 속에서> 발동]
-주위에 대한 동화력이 크게 상승됩니다. 오감으로부터 자신을 숨길 수 있는 능력이 크게 증가됩니다.
[스킬 <기억의 잔향> 발동]
-자신에 대한 인지가 크게 감소합니다. 이는 반데르 및 엑사르에 대한 인지에도 적용됩니다.
스킬을 바리바리 발동시킨 키라트는 은신술 젠가르-클랑까지 극도로 운용하며 빠르게 그 남자를 향해 접근했다. 가까이만 가면 허공에 정보가 뜰 것이다. 자신은 그걸 확인만 하면 된다.
역시나 그 인물의 앞에 도착하자마자 허공에 창이 올라왔다.
[정체불명의 인물 발견!]
-흔적을 찾아 정체불명의 인물을 발견하였다.
-임무완료: 경험치 1450 획득. 5장로의 신임 유지. 탐색 스킬의 숙련도 소량 상승
-돌아가서 5장로에게 보고하고 다음 행동을 기다리시오.
임무완료가 뜨는 것을 보니 이 남자가 틀림없다. 하지만 자신의 임무는 여기까지가 아니다. 이 남자는 죽여야 할 남자이니까.
최대한 정보를 모아가야 한다. 이렇게까지 가까이 왔는데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게 더 수상하게 느껴진 키라트는 스킬을 발동하였다.
[스킬 <아랑가르드의 눈> 발동]
-상대에 대한 탐색을 시작합니다.
상대를 파악하고, 더 나아가 구체적인 약점을 찾을 수 있게 해주는 놀라운 스킬.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는 스킬이다.
예전 마을 전체가 이동 중에 여섯 뿔의 하리쟌 둘을 만났을 때도 이 스킬 덕에 다들 살아남을 수 있었다. 비록 10장로가 7장로가 되고 인원은 대폭 줄어들었지만… 이 스킬이 아니었다면 전멸은 아니더라도 지금보다 훨씬 더 적은 숫자만이 이곳으로 넘어왔으리라.
그때였다.
[분석 성공! 대상: 시안 폰 로만]
[…분석실패! 이름 외의 정보는 상대와 자신의 레벨 격차가 너무 심하여 읽을 수 없습니다.]
[스킬이 간파 당하였습니다. 스킬이 취소됩니다.]
[너무 격차가 큰 상대에게 기술을 시도하였기에 반동이 돌아옵니다.]
‘…어?’
순간 키라트는 자신의 내부를 누군가가 망치로 후려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스킬이 취소당한 반동이 자신의 몸을 덮친 것이다.
순식간에 내부의 흐름이 진탕된 키라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느새 젠가르-클랑을 비롯한 모든 스킬이 풀렸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수도 없을 정도로 어지러웠다.
주위가 빠르게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며 키라트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 ☆ ☆
“…그래서 이렇게 근무를 팽개치고 여기서 쉬고 있는 건가?”
“팽개치다니요…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습니다.
이 아이가 갑자기 와서 제 앞에 픽 하고 쓰러졌다고요.
목숨이 위험할지 모르는 비! 상! 사! 태! 라서 어쩔 수 없이 신성한 근무시간임에도 이렇게 본부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농담이야, 농담. 그나저나 이 아이 신원조회가 안 되는데… 신원을 증명할 만한 물건도 없고……. 일어나면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어.”
주변이 시끄러운 것을 느끼며 키라트는 힘겹게 눈을 떴다. 아직 상황이 어떤지 제대로 파악이 안 되고 있었다. 보아하니 침대인 것 같은데.
‘내가 여기 왜 있는 거지…….’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자신을 보며 당황하는 표정을 짓는 남자의 얼굴뿐이었다.
이윽고 자신이 기절했던 상황이 떠오른 키라트는 황급히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 일어났네요. 안녕?”
자신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기억 속의 남자가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것을 본 키라트는 경계의 눈초리를 쏘아 보내며 긴장했다.
“무슨 짓을 한 건 아니겠지? 이 아이가 왜 이렇게 널 보고 긴장하는 거야?”
“어허! 무슨 소리십니까, 셀린 양. 그런 천벌 받을 소리를.”
자신을 놓아두고 눈앞의 여자와 투닥거리는 남자를 본 키라트는 입을 열어 질문하였다.
“…여기가 어디죠?”
“음? 억양이 특이하네. 이쪽 지역 사람이 아닌가 보구나. 여긴 수도의 가란-티아 본부란다. 쓰러진 널 치료하기 위해 이쪽으로 데려왔지. 다행히도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다거나 그런 건 없니?”
자신을 보며 친절하게 대답해주는 여자를 보며 우선 키라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여성의 걱정 섞인 목소리를 들으니 다행히 자신에 대해 들킨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아요. 전 키랏이라고 해요… 혹시 다른 문제가 없다면 가보아도 될까요? 부모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키라트는 우선 이곳을 벗어나서 동료들에게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후작가에서 교육받은 대로 비상시에 대답할 대사를 읊었다.
다행히도 이런 때에 자신의 외모는 큰 도움이 된다. 10살은 어려 보이는, 15살 정도로밖에 안 보이니 말이다.
“그러려무나. 혹시 나중에라도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조심하도록 하고. 시안, 가서 이 아이 좀 데려다주고 와.”
“…저요?”
“그래.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게다가 여자아이잖아. 너 말고 다른 사람들은 지금 모두 근! 무! 중이라고.”
“윽… 알겠습니다.”
‘이런…….’
혹을 달고 가게 된 키라트는 당황했지만 좀 더 생각해보고 별문제 될 것은 없음을 알았다.
저 남자는 아직 자신을 별로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대충 엑서라고 얼버무리고 장난치고 싶었다고 하면 될 것 같았다. 오히려 가는 도중 이야기해보면 다른 정보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마침 허공에도 비슷한 상태창이 떠올랐다.
[퀘스트: 정체가 밝혀진 인물에 대한 자세한 사항을 조사하라.]
-나라샤 후작가의 인물을 때려눕힌 정체불명의 인물은 시안 폰 로만으로 밝혀졌다.
-상대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장로 이상이니 조심하며 정체를 밝히시오
[보상: 시안 폰 로만에 대한 정보, 화술 스킬 향상, 경험치 800]
허공의 상태창을 본 키라트는 웃으며 대답하고는 시안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네.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가란-티아 본관을 나서 나라샤 후작이 머물라고 임시로 마련해준 외곽지의 저택을 향해 안내하며 걷기 시작하였다.
[상태창: 칼-키라트]
-특성: 북대수림의 생존자, 칼-의 후예, 악-사라이의 접속자
-레벨: 37
-반데르: 0
-엑사르: 82,000/145,000
-보유스킬: 아랑가르드의 눈, 쟈르반의 후각…
……
걸어가며 자신의 상태창을 쭉 훑어본 키라트는 아까 스킬 사용의 실패로 인해 몸의 흐름이 흐트러진 것을 빼고는 자신의 몸에 별 이상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고는 다시 한 번 옆에서 매우 매우 귀찮은 표정을 지으며 걸어가고 있는 시안을 바라보았다.
[상태창: 시안 폰 로만]
-특성: 로만가의 2공자, 가란-티아 소속 치안순찰대, ?
-레벨: ?
-반데르: ?
-엑사르: ?
-보유스킬: ?
……
도무지 아무것도 나타나는 것이 없었다.
아랑가르드의 눈으로 알아낸 것은 이름과 직업뿐… 물론 이것만 해도 후작에게는 큰 도움이 되겠지만 이제까지 이런 경험이 없었던 키라트에게는 처음 겪는 이 사태가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물론 격이 다른 대장로와 2장로에게는 무서워서 시도도 해본 적이 없지만, 적어도 시도해 보았던 5장로와 7장로에게도 들킨 적은 없었다.
키라트는 몇 번 대화를 시도해보았지만 대화를 싫어하는 티가 팍팍 나는 시안에게서 많은 것을 들을 수는 없었다.
외곽지에 위치한 저택은 수도와는 조금 떨어진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기존의 주택가와 약간 떨어진 위치의 저택은 약간 적막한 느낌을 풍기며 초원의 한가운데 서있었다.
어느새 후작가에서 마련해준 저택에 도착했기에 키라트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저택 안으로 들어오는 수밖에 없었다.
[퀘스트 실패!]
-시안 폰 로만에 대한 자세한 조사에 실패하였습니다.
-실패 페널티는 없습니다.
-앞으로의 미션을 위해 좀 더 자세한 사항을 알아두기를 권장합니다.
-재도전이 가능합니다. 재도전하시겠습니까? YES/NO
허공에 뜨는 창을 무시하며 키라트는 동료들과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 인물에 대한 흔적은 찾았소이까?”
<…그래, 이번에 우리 아이 중 하나가 찾아내는 데 성공했지.>
“대단하시군. 일을 맡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놀랍소. 그래, 추가적인 정보가 필요하진 않소?”
<물론 필요하지… 시안 폰 로만이라는 자에 대한 정보를 조사해주게.>
나라샤 후작은 갑자기 거론된 로만 백작의 2공자에 대한 이야기에 이해하기 힘들단 표정으로 되물었다.
“로만가의 2공자라고? 혹시 그 아이가 이번 일에 연관이 있소?”
<있고말고… 그자가 당신이 찾던 정체불명의 인물이니까. 수도에서 소란이 벌어지는 것을 원치 않을 테니 정보를 주게나……. 그러면 우리 쪽에서 알아서 해결하도록 하겠다.>
예측하지 못한 그 대답에 나라샤 후작은 순간 정신이 멍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 아이가 정체불명의 인물이라고? 확실하오?”
<…그렇다. 우리 쪽의 아이는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으니… 이번에도 분명하겠지… 우리를 의심하는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아이는 고작 열일곱이란 말이오.”
<……!>
예상치 못한 대답에 5장로조차 멍해지고 말았다. 열일곱이라니? 그렇다면 열일곱의 나이에 그랑-반더의 경지에 올랐단 말인가?
그랑-반더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자들이라면 ‘세상에!’라고 놀라며 끝날 수도 있겠지만 5장로와 나라샤 후작은 그렇게 넘어갈 수 없었다.
자신들이 그 경지에 올라 있으니까. 그렇기에 믿지 않는다.
그랑-반더인 자는 그랑-반더가 아닌 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소문으로 아는 그랑-반더는 실제의 그랑-반더를 1할도 담아내지 못한다.
자신이 항상 모든 계획을 검토하는 것도 참모들이 혹여나 실수로 키라인 검공이나 로만 백작을 자극하는 계획을 세울까 봐 그러는 것이다.
왕권을 갈아치울 정도의 존재, 그랑-반더.
세기의 천재라고 불렸던 자신과 키라인 검공조차 60을 넘어서야 겨우 밟을 수 있었던 경지이다. 로만 백작이 50대에 그 경지에 들었다는 소리를 듣고 속으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런데 겨우 열일곱 살에 불과한 시안이 정체불명의 인물이라니?
그제야 5장로도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확인해보겠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그에 대한 자료를 준비해 주도록……. 그랑-반더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쪽 인물을 제압한 자들이 시안이라는 자인 것은 확실하니…….>
“알겠소. 다시 한 번 알아봐주길 바라오.”
5장로는 예의 일렁거림을 보이며 사라졌고 혼자 남은 나라샤 후작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에 빠졌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기에 부정했지만 만약 시안이 그 인물이라면 이제까지 이해가 안 되는 상황들의 앞뒤가 착착 들어맞는다.
‘그래… 속단하지 말자.’
나라샤 후작은 5장로를 기다려 보기로 하는 동시에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계획을 수정하기로 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없으나 미리 계획을 짜두어 나쁠 것은 없다.
☆ ☆ ☆
“안녕하세요?”
눈앞에 서서 살짝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를 보며 시안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며칠 전 저택으로 데려다주었던, 자신을 키랏이라고 소개한 아이였다.
거기다 오늘은 옆에 수상한 인물 하나를 추가로 대동하였다.
“어… 그래… 반갑구나. 오늘은 또 무슨 일이니?”
“그냥 그때 챙겨주신 것에 대해 저희 언니가 보답을 하고 싶다고 해서요.”
“안녕하세요. 랏이라고 합니다. 저희 동생이 저번에 폐를 끼쳤다고 들어서… 이번에 식사라도 한번 대접해 드리려고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대단한 미인이군…….’
자신을 랏이라고 소개한 여성을 바라보며 시안은 생각했다. 자세히 보니 옆의 키랏이라는 아이도 아직은 다 자라지 않아서 그렇지, 크면 언니를 닮아 훌륭한 미인이 될 듯하였다.
“퇴근시간이 끝나시면… 같이 식사라도 하시면 어떨까 해서요. 저희 아이가 몸이 약하여 항상 걱정이었는데 이렇게 보살펴준 분을 그냥 보낼 수는 없어서요. 저희가 <라그론의 숲>이라는 곳을 예약해 두었습니다.”
딱히 할 일이 없기는 하지만 뭔가 수상한 냄새를 풍기는 두 자매의 요청을 받아들일지 말지 고민하는 시안을 바라보며 키라트와 라샤는 그를 열심히 설득하였다.
5장로님이 이자에 대하여 행동에 들어가기 전에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추가적으로 무엇이라도 알아보아야 한다.
시안에 대한 보고서를 살펴보니 요즘 먹는 것을 굉장히 즐긴다고 한다. 실제로 키리온 자작가의 일론이라는 여자의 초청은 받아들였다고 했으니…
이자가 제정신이라면 수상한 자의 초대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에 부담 가지지 말라고 일부러 수도 안의 유명한 식당도 예약해 놓았다.
실제로 자신들의 설득에 귀가 솔깃한 시안은 제안을 냉큼 받아들였다.
“험험… 그렇게까지 말하신다면야……. 그럼 끝나고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럼 퇴근시간에 저희와 같이 가시지요.”
“그때까지 계실 데가 있으신가요?”
“아, 근처에 굉장히 맛있는 디저트 집이 있다고 하여서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려고요. 부담 갖지 마시지요. 그럼 조금 이따 뵙겠습니다.”
그 말을 마친 자매는 뒤돌아섰고 시안은 역시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저번에 있었던 일론 양과의 식사를 떠올리며 이번에도 그러길 바라고 행복한 상상에 젖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