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11화 (12/81)

<11. 파-하리쟌>

5년 전, 자신을 거슬리게 하던 벽을 뚫고 새로운 단계에 올라섰을 때, 시안은 기묘한 느낌이 자신의 마음속 한구석을 가득 채우는 것을 느꼈다.

<세상만사가 의미 없어지고 하찮아지는 기분>

물론 그 기분이 싫은 건 아니었다. 어차피 자신은 칼 휘두르는 것 말고 다른 데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으니.

거기다 새로운 경지에 오르자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많아지고 볼 수 있는 것은 더욱 많아져 그것들을 해보고 살피느라 더욱 집중하였다.

아무것도 관심이 없었다. 더 높은 곳에 오르는 것 말고는 만사가 하찮아졌다.

왜 형이 나가 왕실 기사단에서 고군분투하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주변 사람들을 챙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어머니의 주장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문을 위해 발버둥치는 아버지도 안타까울 정도로 안쓰러워 보였다.

모두 인간이 만든 틀. 인간에게 맞춘 틀. 혼자 살 수 없는 인간들을 위한 형식…

모두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사항들, 따라서 자신이 거기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자신을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한없이 자유롭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 남아있던, 자신의 인성과 기억이 자신을 붙잡았다.

자신을 보며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자신을 붙잡았다.

무언가 아니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며 거부감이 드는 순간, 그 순간 시안은 자신을 이상하게 만드는 새로운 힘을 황급히 얽어매어 가슴 한복판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제정신으로 돌아온 후 새로 얻은 이 힘을 최대한 쓰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이 힘은 자신을 인간에게서 멀어지게 만든다.>

자신은 가족들이 살아있는 한은, 아직은 더 인간이고 싶었다.

그 이후 시안은 자신을 인간들 사이에 옭아매기 위해 더욱더 노력했다.

인간들이 만든 규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애썼으며 서로를 배려하기 위한 예법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남들이 보면 게으르다 하겠지만 그 정도가 자신의 최선이었다. 원칙에 얽어 매일수록 더 오래 인간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

새로운 경지의 힘을 쓰지 않아도 강해지는 데는 별문제가 없었다.

경지를 올리는 것과 경지에 올라 그 힘을 발현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였으니.

설령 힘을 발현한다고 더 빨리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힘을 얽매어 놓는다고 하여 경지가 올라가는 속도가 늦추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힘을 얽어매어 몸 한구석에 처박아놓은 순간부터는, 아버지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경지도 속일 수 있었다.

여러모로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상황이 맞추어졌기에 시안은 이 상태가 계속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 힘을 끄집어내지 않기를 바라며 최대한 귀찮은 일을 피해왔다.

“흐… 하.”

시안은 오랜만에 드는 상쾌한 기분에 온몸을 떨었다.

오 초 전의 자신은 적당히 혼내주고 이 상황만 해결되면 힘을 다시 걸어 잠그려고 한 모양이던데… 왜?

‘왜 그래야 하는가?’

너무 상쾌하다. 속속들이 사방의 모든 것이 느껴진다.

안 그래도 넓었던 감각은 훨씬 더 넓어졌고, 바다라도 갈라버릴 수 있는 힘이 손아귀에서 뭉쳤다가 풀어지기를 반복했다.

인간성? 그런 것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그런 것은 인간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이제까지 쓰잘데기 없는 예의나 격식, 원칙에 자신을 일부러 얽매어 온 것이 바보 같을 지경이다.

‘다른 라-반더들도 이런 기분일까?’

모르겠다. 그들은 내가 아니고 나는 그들이 아니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비슷할 것이다.

<모든 것이 가소로운 이 기분. 그렇기에 버리고 도전할 만한 것을 찾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사회를 등졌으리라. 그리고 자신이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찾는다.

대북벽을 지키며 여섯 뿔의 하리쟌과 싸우고 있는 라-반더나 산맥을 부순 쿠라단 모두 같은 심정일 것이다.

‘흠, 난 뭘 해보지?’

오랜만의 상쾌한 느낌에 뭘 쪼개볼까 하고 감상에 빠져있던 그는 곧 자신이 해결해야 할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요것들을 어떻게 처리하나.’

자신을 보며 얼어있는, 정확히 말하면 잠금을 풀며 발생한 기파를 느끼고 얼어있는 눈앞의 열한 명을 보며 시안은 히죽히죽 웃었다.

그리고 곧 결정을 내렸다.

‘죽이고 가자.’

딱히 이유가 있어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다.

<그냥 그게 제일 마음에 드니까.>

그리고 그게 십 초 전의 자신을 배려한 것이기도 했다. 십 초 전의 자신은 분명 지금의 자신이 이 곤란한 상황을 해결해주기를 원했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시안의 손을 중심으로 공간이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이 힘을 얻고 처음 써보는 거라 조금 힘의 낭비가 있긴 한데… 뭐 어떤가?

여유와 낭비야말로 강자의 상징이다. 약한 놈들이나 필사적인 법이다.

시간도 많기에 처음으로 힘쓰는 연습도 할 겸 천천히 가지고 놀아주기로 한 시안은 얼어있는 녀석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 ☆ ☆

<이런… 미친…….>

5장로는 눈앞의 얼간이에게서 퍼져 나온 흉악한 기운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사람 하나 죽여본 적이 없다는 놈에게서 저런 기운이 퍼져 나오다니!

다행히도 자신들은 이런 종류의 기운을 한번 겪어 본 적이 있기에 무사히 버텨낼 수 있었다.

<여섯 뿔의 하리쟌 한 쌍과의 충돌>

그때는 처음 보는 흉악한, 자신을 반드시 죽여서 찢어 먹겠다는 그 기세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대장로와 2장로, 키라트가 없었다면 모두 죽었을 것이다.

이번 느낌은 그때보다 더 안 좋다.

거기다가 웃으며 걸어오고 있지만 저 눈은 자신을 죽이기로 마음먹은 눈이다.

5장로는 다가오는 녀석을 보며 옆의 아이들에게 자신들 마을의 언어로 말하였다.

<…모두 여기서… 도망간다……. 내가 녀석의 발을 묶겠다……. 모두 흩어지고… 라샤는 키라트를 데리고… 대장로에게로 도망가라…….>

그 말을 들은 모두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은 키라트가 가진 가치에 비하면 모두 소모품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5장로마저도.

자신들의 무력은 마을 전체에 비하면 흔한 수준이지만 키라트가 가진, 자신들을 인도하고 앞길을 비춰주는 희귀한 엑서로서의 능력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

마을의 동료들을 위해서라면, 라샤가 키라트를 데리고 탈출하고 자신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시간을 끌어야 한다. 어차피 5장로와 같이 대들어봤자 자신들 수준으로는 일격에 몰살이다.

결정난 순간, 5장로는 자신이 품고 있던 애병을 꺼내 들었다. 저 녀석이 방심하고 있을 때 몰아쳐야 한다.

<…지금!>

마을의 언어로 외친 5장로는 시안을 가로막았고 나머지 열 명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5장로는 자신의 품속에서 2장로가 만들어 준 물건을 꺼냈다.

☆ ☆ ☆

그들의 마을은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수많은 하리쟌들과 싸워왔다.

당연히 그 부산물들은 모두 그들의 것이었다.

고기는 먹고, 피는 채취하여 영약을 만들고 그들을 강하게 만드는 데 사용하였으며, 탈릭 스톤은 무구를 만드는 데 사용하였다.

끊임없이 강해져야 살아남을 수 있다.

마을이 맞닥뜨리는 것은 보통은 네 개의 뿔을 가진 녀석들이었지만 다섯 개의 뿔을 가진 녀석들도 흔하게 나왔다.

2장로는 그런 녀석들의 탈릭 스톤을 모아서 오랜 시간 공을 들인 끝에 강대한 위력을 가진 아티팩트들을 만들어 냈다.

아무리 자신들이라도 거친 북대수림에서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탈릭 스톤을 소모해가며 싸워야 했기에 고등급의 탈릭 스톤은 많이 남아있지 않았고, 그렇기에 2장로가 만든 아티팩트의 수는 장로와 정예들 몇 명에게만 지급되었다.

하지만 그 위력만은 명불허전. 여섯 개의 뿔을 가진 하리쟌과 싸울 때도 그 녀석의 손목을 잘라내며 제 몫을 톡톡히 했던 녀석이다.

<카르마타>

2장로가 만들어준, 그의 애병의 이름.

다섯 뿔을 가진 하리잔 일곱 마리에서 나온 탈릭 스톤을 엮어 벼려낸 이 칼은 2장로가 고대 제국의 유산에서 발견하고 연구한 법도 마학의 정수가 담겨져 있다.

너무나 강대하여 평소에 사용하면 의존하게 될까 봐 북대수림에서 나온 이후로는 꺼내 쓰지도 않던, 그의 무기.

이 녀석을 가지게 된 이후로는 자신을 상대할 만한 자는 장로들 외에는 몇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세상이 넓어도 너무 넓구나……. 너희들이 믿는 전쟁신이란 자가… 미친 것이 틀림없다… 너 같은 녀석을 내보내다니…….>

5장로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눈앞의 녀석은 딱 보아도 대장로와 동급, 혹은 그 위의 경지이다.

믿을 수가 없었다. 열일곱에 그랑-반더인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거늘… 그것조차 뛰어넘다니!

“세상이 넓긴 넓지. 그러니까 평소에 아무한테나 시비 걸고 살면 안 되지. 다 뿌린 대로 거두게 되는 법이야.”

주변으로 도망가는 녀석들은 신경도 쓰이지 않는 건지 5장로 쪽을 바라보며 비죽비죽 웃으며 다가오는 녀석은 아예 사람이 바뀐 듯 더 이상 존댓말도 쓰지 않았다.

시안이 손을 쥐었다 폈다 할 때마다 주변의 공간이 일렁거리는 것을 보고 5장로는 자신의 애병, 카르마타에 반데르를 흘려 넣기 시작했다.

‘시간을 끌어야 한다…….’

반데르와 카르마타에 담겨 있던 엑사르가 카르마타에 새겨져 있는 소법진에서 거칠게 충돌하기 시작하면서 이윽고 카르마타에서 찬연한 황금빛이 새어 나왔다.

카르마타에 새겨져 있던 이적, <분해>가 발동된 것이다.

이 황금빛 힘은 아름다워 보이지만 이 힘에 닿는 순간 반데르건, 엑사르건, 심지어 하리쟌의 두꺼운 갑주건 모조리 가루상태로 분해되어 버린다.

“오? 신기하네.”

하지만 시안은 전혀 긴장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리고 5장로 역시 그런 걸 기대하지도 않았다

5장로는 오히려 시안이 지금 자신에게 호기심을 보이고 있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시간을 오래 끌수록 다른 아이들이 살아갈 가능성은 높아지게 되니까.

그런 5장로의 속마음을 눈치챘는지 시안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제 이 정도면 오래 기다려 준 거지? 이제 어서 들어와. 도망갈 시간은 충분히 준 것 같으…….”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5장로는 자신의 몸 구석구석에 은밀히 돌리고 축적해 놓고 있던 반데르를 일순간 폭발시키며 카르마타를 휘둘러갔다.

……!

공기가 갈라지며 발생하는 특유의 파공음도 나지 않았다. 카르마타의 궤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분해되고 있었으니까.

보이는 것은 오로지 5장로와 시안의 사이를 연결하는 황금색의 아름답지만 흉포한 궤적뿐이다.

파가가각!

‘…맞았는가……?’

귀에서 들리는 마찰음을 들으며 순간 5장로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휘두르긴 하였지만 맞을 것이라고는 기대도 안 해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손아귀 너머로 칼이 마치 산 아래라도 깔린 듯한 느낌을 받고는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는지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공격을 한 손으로 낚아챈 것이다.

시안이 웃으며 하던 말을 끝냈다.

“…니까. 이 영감은 끝까지 무례하네. 사람이 말하는 중인데.”

<…크아압!>

손아귀의 느낌을 통해 칼을 빼내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바로 깨달은 5장로는 곧바로 손을 놓고 전신의 반데르를 폭발시키며 카르마타의 손잡이를 후려쳤다. 카르마타를 못처럼 상대에게 박아 넣으려는 속셈이었다.

꾸아앙!

웅대한 종소리가 들리며 카르마타가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건 시안의 자세가 흔들려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단지 순간적으로 과도한 충격을 받은 카르마타의 칼날이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시안은 여전히 칼날을 잡은 채로 손아귀에 잡힌 카르마타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다.

“음… 내가 이런 거 보는 눈이 아예 없긴 한데 말이야… 꽤나 잘 만들었네.”

카르마타는 주인의 손아귀를 떠난 상태에서도 여전히 적 <소멸>을 발동하며 맹렬하게 발악하고 있었지만 카르마타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의 광채는 시안의 손아귀에 잡혀 뻗어나가지도 못한 채로 허무하게 사그라지고 있었다.

카르마타를 후려친 반동으로 뒤로 물러난 5장로는 충격을 해소하며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것도 잊고 그 장면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현 상황에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느끼고 무력함에 휘감겨 있는 5장로를 바라보며 시안이 한마디를 던졌다.

“아… 그리고, 그거 알아?”

칼날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모습을 5장로가 멍하니 바라보자 시안이 웃으며 대답했다.

“시간제한이 끝났어.”

그러고는 시안은 어느새 작동을 멈춘 카르마타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자신의 주변으로 가볍게 한 바퀴 빙 휘둘렀다.

장난같이 휘두른 모양새였지만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쯔아아압!

휘두른 궤적을 따라 수평면으로 허공이 갈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갈라진 것이 틀림없다. 허공에 그어진 선을 중심으로 위아래가 어긋나 있었으니까.

그리고 갈라진 수평면에는 반쯤 부서진 저택부터 시작해서 이미 수백 미터 바깥에서 도망가고 있던 열 명의 허리가 걸려있었다.

<…안 돼…….>

그 광경을 지켜보던 5장로는 다음 광경을 머릿속에 떠올리고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 ☆ ☆

칼-라샤는 동생을 향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하리쟌에게 쫓길 때도 이보다 절박하진 않았던 것 같다.

장로님이 얼마나 시간을 벌어주실지는 모르겠지만, 그 전에 동생을 데리고 이곳에서 탈출해야 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나라샤 후작의 부탁을 받아들였을 때도 전혀 심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목표를 살피면서 그 안일함에 웃음이 나왔다.

안일한 정도가 아니다. 수상한 사람이 초대를 하는데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먹을 것에 낚여 저택까지 따라오다니.

이건 백 번 죽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대수림에서는 먹이 사슬의 최하위 녀석들도 먹잇감에 낚이지는 않는다.

그 순간, 자신이 먹이가 될 터이니.

심지어 식사 도중 자신을 보고 헤죽거리는 것이 경계를 완전히 풀고 있었다.

그랑-반더라고 하여 조금 긴장했는데 하는 짓은 나이에 걸맞게 애송이였다.

습격했을 때는 조금 놀라긴 했다. 생각보다 잘 버텼으니까.

하지만 그뿐이다. 사람 하나 죽여본 적이 없는 놈이란 소리를 듣고는 자신의 불안감이 한심해질 정도였다.

게다가 자신에게 칼을 휘두른 자들을 죽이기 싫다고 하는 꼴이라니.

열일곱 살에 5장로와 같인 경지에 오른 것은 물론 대단하다. 하지만 그 자만감에 빠져 벌써부터 여유를 가지고 태만해지기에는 분명 이르다.

그랑-반더는 대단한 강자이긴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것을 눈 닫고 귀 닫고 무시해도 될 정도는 아니다. 세상은 그렇게 적응과 진화를 포기한 자에게 관대하지 않다.

그렇기에 안심하고 그렇기에 무시했다. 강하긴 했지만 태도가 글러먹었으니.

하지만 한순간, 모든 것이 뒤집혔다.

멍청해 보이는 양의 가죽을 한 꺼풀 벗겨냈을 뿐인데 ‘저딴 것’이 안에 숨어있다니!

동시에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보였던, 주변에 대한 안일한 대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리라. 어떤 상황이 와도 자신을 위협할 수 없다는 것을.

개미에게는 목숨을 위협하는 대재앙일지라도 인간에게는 가랑비에 불과하다.

문득 이곳의 라-반더라는 경지를 지칭하는 자기 마을의 언어가 떠올랐다.

<파-하리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찾아오는 재앙>

누가 지었는지 몰라도 라샤는 그 말이 가지는 의미가 사무치게 와 닿았다.

‘제발, 제발, 제발……!’

라샤는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저 멀리 자신을 마주 향해 달려오는 동생 쪽으로 달렸다.

생각보다 장로님이 굉장히 잘 버텨주셨다. 동생이 가까워진 것을 보고 여유를 느끼며 주변을 둘러보니 동료들도 모두 살아서 흩어지고 있었다.

동생을 보며 라샤는 크게 외쳤다.

“키라트! 어서 이능을……!”

자신들을 이곳까지 데려온 그 이능이라면 한순간에 본진까지 돌아갈 수 있으리라. 한 번 사용하는 데 상당한 탈릭 스톤이 소모되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아니다.

동료들이 걱정되긴 했지만 우선 키라트부터 살려야 했다.

자신이 가지 않고 동료들과 남으면 키라트 또한 가지 않을 것이다.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키라트를 바라보았는데 앞에서 달려오던 키라트의 반응이 이상했다.

키라트는 달리던 것을 멈춘 채로 절망에 가득 찬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쯔걱!

“…어?”

순간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올라왔다.

뒤짚힌 광경 속에 동료들이 모조리 허리가 잘려 나뒹구는 모습이 눈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아… 하늘이 뒤집힌 것이 아니었구나…….’

라샤는 자신을 향해 울부짖으며 달려오는 키라트를 바라보며 점점 시야가 좁아지고 있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 ☆ ☆

[퀘스트 실패: 친자매 칼-라샤와 동료들을 구출하라.]

-구출 대상이 모조리 사망하였습니다.

-실패 페널티로 경험치 2000이 감소합니다.

[사용자가 위험에 노출되었다고 판단하기에 기존 설정에 따라 자동 귀환이 실시됩니다.]

“안 돼!”

키라트는 허공에 뜬 정보창을 보며 절망에 찬 표정을 지었다. 이번만은 이 정보창이 틀리길 바랐다.

실제로 자신의 언니는 눈앞에서 멀쩡히 달리고 있었고 적은 아직도 5장로님과 대치 중이었다.

하지만 키라트는 잠시 후 정보창이 틀린 정보를 전해주지 않는다는 사실만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눈앞에서 두 동강난 자신의 언니와 마찬가지 신세가 된 동료들을 보며.

“아아… 아으아… 으…….”

절망에 찬 표정을 지으며 언니의 상체를 끌어안고 울던 키라트는 강제귀환이 시도되는 것을 느꼈다.

“안 돼… 안 돼!”

자신이 여기 있다고 하여 무엇을 할 수는 없지만 원수를 두고 그냥 돌아갈 수는 없다. 차라리 자신도 여기서 같이 죽는 것이 나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생각될 때 발동하게 설정해 놓은 자동귀환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발동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귀환이 이렇게 원망스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라면…….’

키라트는 복수심에 불타 저 멀리 보이는 시안의 모습을 노려보며 스킬을 발동시켰다.

[스킬 <아랑가르드의 눈> 발동]

-상대와의 레벨 격차가 심하기 때문에 반동에 타격을 입습니다.

그때야 여러 개의 스킬을 동시에 돌리던 상황이라 반동에 기절했지만 하나의 스킬만 운용한다면 기절까지는 하지 않는다.

속이 엉망이 되어가는 것을 참으며 시안을 관찰한 키라트는 곧이어 허공에 뜬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일부 분석 성공!]

[레벨 차이가 심하여 읽지 못한 부분이 많습니다.]

억지로 스킬을 운영한 보람이 있는지 저번보다는 더 많은 정보가 들어왔다.

이제 이걸 가지고 돌아간다. 우선은 살아남고 상대를 알아야 한다. 복수는 그다음이다.

‘기다려라…….’

푸른빛에 휘감겨 사라지면서도 키라트는 시안의 모습을 단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양 피눈물을 흘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 ☆ ☆

“정말 특이하지? 왜 너희들이 먼저 덤벼놓고는 저렇게 복수까지 하겠다고 이를 갈까?

나는 그냥 죽어줬어야 하는 건가? 나를 제외한 사람들이 행복해지게?”

저 멀리 떠나는 키라트를 지켜보던 시안은 고개를 돌려 눈앞에 시체가 되어있는 5장로를 바라보며 비꼬며 말하였다.

스킬이 발동되어 도망가는 것은 여기까지 느껴졌다. 자신을 노려보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바깥에서 달려오기에 죽일까 말까 고민하다가 직접 개입하진 않은 것 같아 봐주었는데 꼴을 보니 영 아니었다.

취소시킬 수 있을 것 같았지만 5장로가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바람에 아차 하는 순간에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잡을 수 없으리라.

‘음… 이건 너무 과했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던 시안은 곧이어 흠칫했다.

뭐가 과하다는 말인가? 자신을 죽이려던 놈을 죽여준 것뿐이다. 전혀 과하지 않다. 자신에게 아직 이런 인간적인 감상이 남아있을 리가…….

그런 생각을 하던 순간 배배 꼬인 채로 비틀린 미소를 짓고 있던 시안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시안은 이윽고 주변을 굉장히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게… 적당히 하자고 했잖아요…….”

죽어줄 생각은 없다. 그것도 자신을 죽이려는 놈들을 위해.

그렇다고 남을 죽이는 것이 즐거울 리가 있겠는가?

힘을 걸어 잠근 시안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수도 쪽으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 ☆ ☆

‘역시… 복수를 하지 않는 방향으로 결정되었구나…….’

후작령에 머무르고 있던 나머지 마을사람들에게로 돌아온 키라트는 어느 정도 예상하였다는 듯 대답하였다.

마을 사람들의 대처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마을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법칙.

<강한 자는 살아남고 약한 자는 도태된다. 무리를 도태시킬 자는 버리고 간다. 마을의 일원으로서 항상 필사적으로 발버둥 쳐라.>

이 원칙에 의하면 이번에 죽은 자들이 약했을 뿐이다. 도태되었을 뿐… 강한 자는 죄가 없다.

키라트의 이야기를 들은 대장로는 시안이라는 자가 어쩌면 자신보다 위일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 자에게 복수를 하겠다는 것은, 마을을 절단 내겠다는 뜻과 비슷하다. 이겨도 엄청난 피해를 볼 것이다.

그렇기에 복수는 생각하지 않고 나라샤 후작에게 보상을 받아내는 쪽으로 방향을 결정했다.

키라트 자신이라도 평소라면 그와 같은 판단을 내렸을 것이기에 이번 결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언니만 살아있었다면.>

이성적으로는 이해가 가지만 마음은 끊임없이 괴롭다고 울부짖고 있었다.

자신은 아직도 꿈속에서 토막 난 상태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언니가 생각난다.

이건 이성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먼저 습격했다고? 물론 그렇다.

하지만 뭐 어쩌란 말인가? 자신을 평생 보살펴 준 가족이 죽었는데.

단순한 언니의 죽음 때문만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끓고 있는 이 감정을 없애지 못하면 자신은 폐인이 될 것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복수할 것이다.

복수를 결심했지만 마지막에 <아랑가르드의 눈>으로 살핀 그의 정보는 자신에게 포기만을 강요할 뿐이었다.

‘하하… 하하하하하… 하…….’

많이도 확인할 수 없었다. 아랑가르드의 눈으로 인하여 추가된 정보는 단 한 줄에 불과했다.

레벨.

[상태창: 시안 폰 로만]

-특성: 로만가의 2공자, 가란-티아 소속 치안순찰대, ?

-레벨: 399

-반데르: ?

-엑사르: ?

-보유스킬: ?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 399라니…….

5장로의 레벨은 183, 케라탄이 97이었다. 자신들이 마주쳤던 여섯 개의 뿔을 가진 하리쟌은 217과 331였다. 하리쟌은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으면 저항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아랑가르드의 눈을 적용하기가 인간 무장들보다 훨씬 수월했다.

대장로와 2장로는 측정해보진 않았지만 수컷이었던 하리쟌을 상대로 둘이 합쳐 비슷했으니 320정도 아닐까… 하고 추측하고 있다.

암컷은 상대적으로 훨씬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장로와 2장로가 수컷 하나를 상대로 싸우는 동안 자신의 마을전력은 절반 가까이 날아갔다.

자신이 25년간 북대수림을 종횡무진하며 얻은 레벨이 겨우 37이다.

이제부터 모든 능력을 전투에 투자한다 해도 따라붙을 수 없다. 거기다가 자신만 강해지는가?

듣기로 열일곱 살이었다. 자신이 저 정도로 강해질 때쯤에는 그 녀석은 한칼 휘두르면 대륙을 쪼개놓을 것이다.

언니의 복수를 하고 싶은데 상대가 너무 강하다.

키라트는 절망감에 빠져 앞으로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그러고는 결정했다.

<나의 힘으로 안 된다면, 남의 힘이라도 빌린다. 대륙을 모조리 헤집어서라도 방법을 찾을 것이다. 자신이 언제나 그래왔듯이.>

대륙은 넓다. 반드시 저자에 상응하는 자가 있을 것이고 저자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이 있으리라.

그리고 자신에게는 누구에게도 없는 능력이 있다. 이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그렇게 생각한 키라트는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며 장고에 들어갔다.

외전. 초인의 자격

<초인의 자격이자 권리, 얽매이지 않는 것.>

-대북벽의 수호자, 그로인

☆ ☆ ☆

수도로 돌아온 시안은 우울한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노력하였다. 동시에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한번 깨어났던 힘은 자신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자신의 자아가 라-반더라는 경지의 힘이 가져다주는 변화와 충돌하고 있음을.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이제까지 자신이 필사적으로 사회의 룰과 예법을 억지로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이는 자신과 같은 힘을 가진 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인간의 룰은 인간들이나 지키면 된다.

평범한 인간들은 그런 것을 지키지 않으면 사회에서 튕겨나가 버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랑-반더도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 평범한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 전체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에…….

하지만 라-반더의 경지에 오른, 자신을 비롯한 초인들은 그렇지 않다. 자신을 옭아맬 수 있는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초인들은 사회를 떠나가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으리라. 외려 반겼을 것이다. 자신이 드디어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였음을.

그리고 새로운 목표를 찾기 위해 인간의 사회를 떠나갔다.

자신에게 간섭할 수 없는 기존의 인간사회는 그들에게 전혀 자극이 되지 않는다.

그들을 자극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들이 나설 만한, 도전할 가치가 있는 일이기에.

그리고 저렇게 떠나주는 것이 양쪽 모두에게 이득이다.

개미가 사는 곳에 인간이 섞여 살려고 하면 난리가 나듯, 초인인 자신이 인간세상에 같이 살아가 보겠다고 난리를 치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아직 가족을 버리고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보통 인간과 같지 않음을 명확히 인지하고 사회와 섞이는 법을 알아야 한다.

단순히 힘만 억누르고 있다고, 인격이 바뀌지 않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무언가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

초인과 인간 사이에서 중심을 잡을 새로운 방법이.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 또 힘을 풀어낼 일이 있을 때 이번과 똑같이 진행될 것이다.

☆ ☆ ☆

5장로와 그 동료들을 기다리고 있던 나라샤 후작은 저택으로 흘러들어온, 미세하지만 흉악한 기세를 느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기세가 흘러나오는 곳은 자신이 마련해 준 5장로의 저택과 정확히 일치했다.

자신도 그랑-반더가 아니었다면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대단한 기세였지만 워낙 거리가 멀었기에.

자신의 저택과 5장로의 은신처가 가깝다고는 하지만 족히 10킬로미터는 넘었다. 여기까지 불길한 기운이 흘러들어올 정도라니…….

불안한 마음으로 밤을 지새운 나라샤 후작은 날이 밝자마자 사람을 보내 확인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시체만이 남아있다는 소리를 듣고 즉시 시체와 떨어져 있는 무구들을 모두 수거해오라고 시켰다.

수거해 온 시체를 살핀 나라샤 후작은 고민에 빠졌다.

‘무슨 짓을 해놓은 건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시안이 멀쩡하게 출근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던지라 실패하였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헌데 직접 보니 상황이 생각보다 더 심각했다.

한 구의 시체를 중심으로 수백 미터 사방으로 시체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두 동강 난 채로…….

하지만 절단면을 살펴보니 이건 동시에 이루어진 검격이었다.

엑사르로 살피고 여러 방법으로 조사를 해 본 결과 허리는 모조리 동시에, 시간과 허공을 격하고 잘려나갔다.

아니, 사실 검격인지도 모르겠다. 이건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작용하여 만든 흔적이다.

더불어 저택과 근처에 있던 동산까지 동강이 나있었다. 너무나 깔끔하게 베였기에 무너지지 않았을 뿐… 아마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미끄러지면서 부서지고 말리라.

자신보다 조금 더 경지가 높다고 이런 짓을 할 수는 없다. 그랑-반더 간에도 엄연히 실력 차가 존재한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해 가능한 수준의 범위이다.

가장 강한 그랑-반더라고 불리는 무장 사냥꾼, 켈-두인도 이런 짓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짐작이 가지 않기에 그 경지를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이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자신보다 위에 존재하는 경지는 단 하나뿐이니까.

이것저것 따져보던 나라샤 후작은 믿을 수 없지만, 결론을 내렸다.

“후… 열일곱 살에… 라-반더라…….”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말도 안 되는 이유가 필요한 법이다. 이 경우가 딱 그랬다.

라-반더가 아니면 이런 짓을 할 수 없다. 인간재앙이라고 불리는 존재들만이 이런 짓을 할 수 있다.

이번 사태에 대하여 자신이 당장 해야 할 것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이번 일로 피해를 본 그들과 원만한 해결을 보는 것.

두 번째는 시안을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

첫 번째는 진행 중이다. 다행히 자신과 접선을 맡고 있는 3장로는 사정을 듣고 더 이상의 피해를 감수할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원만하게 합의를 볼 것 같다.

그들의 힘도 막강하지만 그런 충돌은 원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부탁으로 인하여 큰 피해를 입었기에 어느 정도 보상을 해주어야겠지만 라-반더에게 복수하겠다고 달려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그들은 다치면 안 된다. 티안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때’를 위해서는 그들이 반드시 필요했다.

두 번째는 시안을 좀 더 살펴보고 결정해야 한다.

왕권을 이양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수도를 흔들며 자신의 힘과 입지를 증명해야 한다.

시안이 계속 이런 식으로 아무것도 못하게 묶어두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왕당파와 귀족파가 골고루 쓰러지며 옴짝달싹도 못하는 것은 후작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 무력으로 어떻게 할 방법은 없다.

그랑-반더일 때야 그들의 힘을 빌려 쉽게 제거할 자신이 있었기에 급한 마음에 손을 썼지만 이제는 무조건 돌아가야 한다.

다행인 것은 아직 자신이 배후자인 것을 모른다는 것. 자신에게 적대감을 가지지 않은 이상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 것이다.

후작은 아랫사람을 시켜 시안에 대해 모든 것을 조사하고 더불어 역대 라-반더의 성향들에 대해 적혀 있는 기록들도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대처는 그다음이다.

나라샤 후작의 명을 받은 아래 참모진과 조사관들은 난리가 났다.

“어서 어서 조사를 완료해! 급하다!”

“파레인, 로바노튼, 카라칼…….”

“야, 이거 뭐야! 사라쿠인에 대한 정보는 이게 다야?”

“그게… 850년 전 인물인지라… 도서관에서 화석이 돼가는 것을 간신히 가져왔습니다.”

“자료 더 모아와! 이거 가지고 뭐 어쩌라고!”

“라-반더는 자료가 거의 없습니다! 이게 법도회와 왕립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모든 자료입니다!”

“제길… 이 양반들은 왜 이리 비싼 척이야… 알려진 게 왜 이리 없어…….”

조사는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라-반더들이라는 존재들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지만 너무나 알려진 것이 없었다.

너무도 강대하기에 모두가 그 존재를 안다. 심지어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하지만 너무나 강대하기에 모두가 모른다. 섞이지 않기에 볼 수가 없고 본다고 하여도 이해할 수 없기에.

그래도 나라샤 후작의 영향력은 실로 강대하였기에 며칠 안 되는 시간 동안 수도에 있던 자료란 자료는 모조리 끌어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라-반더의 기록은 없지만 그와 비슷한 경지에 오른 법도사들은 직업병인지 생각보다 자료가 정리가 잘 되어 있었기에 판단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역대 라-반더들뿐 아니라 대법도사 같은 초월자들의 기록을 읽어보고 시안에 대한 조사를 꼼꼼히 한 나라샤 후작의 참모진들은 곧 차이점을 곧 찾을 수 있었다.

<시안 폰 로만은 자신을 억지로 사회에 얽어매려 하고 있다.>

탈린 자작이 사학가들과 참모, 법도회의 도움을 받아 내린 결론이니 꽤나 신빙성이 있었다.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라-반더들의 수기에 의하면 그 경지에 오르는 순간 모든 것이 하찮게 느껴진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라-반더에 진입하는 나이들은 평균적으로 100살 전후였다.

그랑-반더들이 모든 것을 잊고 반백년을 침식하며 고련한 끝에 극도의 재능과 타고난 운을 가져야 얻을 수 있는 경지.

노력은 왜 제외하느냐?

노력은 모두 다 하니까. 의미가 없는 수식어이다. 오로지 결과만이 말해줄 뿐.

당연히 모든 인간관계가 끊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사회의 단맛 쓴맛을 다 본 상태.

그리고 그랑-반더 정도의 실력에 라-반더에 오를 재능이 있는 자라면 정말 천재 중의 천재. 주머니 속의 송곳 정도가 아니다.

아쉬운 소리 하며 살았을 위치가 아니다.

바꿔 말하면 애초에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 자만이 라-반더에 오르게 된다. 자신이나 로만 백작처럼 권력이나 혈연에 얽매인 채로 오를 수 있는 경지가 라-반더가 아니다.

질릴 정도로 살아왔고 다른 자에게 아쉬운 것이 없고 강함만을 좇는 인간들은 원래 다른 인간들을 개미처럼 보았을 것이다.

그러니 라-반더에 올라 자아가 변한다고 하더라도 큰 변화가 없다.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으니까.

반면 시안은 사회를 겪어 본 적도 없고, 자신을 사랑해 주는 가족도 멀쩡히 살아있는 상태.

게다가 무력 자체는 놀랍지만(정확히 말하면 말도 안 되는 수준이지만) 시안은 17세 소년에 불과하다.

아직 인간들과의 관계를 잊지 못하여 라-반더라는 경지가 주는 자아의 변화를 거부하기 위해 억지로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보고서야 후작은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괴물이 인간을 연기하고 싶어 한다면, 자신이 그것을 도와주리라.>

라-반더가 무서운 이유는 강대한 무력과 더불어 인간의 룰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도무지 예측이 불가능하다.

인간의 룰에 얽매인다면… 잠시 피해서 돌아갈 방법 정도는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저번에 본 두 동강 난 시체들의 흔적을 떠올린 후작은 혹여라도 잘못될 경우를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만약 틀어지게 되면… 인간을 연기하려는 괴물이 그 탈을 벗어던질 수 있으니까.

<2권에서 계속>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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