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감찰>
<사람들이 네가 모르는 데서 뭘 꾸민다고? 잘 하고 있다. 네가 아는 것조차 두렵다는 뜻이니. 모두가 너를 두려워하면, 그 순간 너는 신이 된다. 아, 물론 넌 안 되지, 나는 될 수도 있지만.>
-700년 전의 라-반더,
신의 아들, 콘-라드
☆ ☆ ☆
시안은 예전 사건의 우울함을 천천히 잊어버리며 일상생활에 충실하고 있었다.
자신이 저택에서 저지른 사건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묻혀버렸다.
일부러 자신이 떠들고 다닐 이유가 없었기에 입을 다물고 있긴 하였지만 사건의 내막은 전혀 모른 채 이렇게 끝나는가 싶어서 조금 찝찝하긴 하였다.
하지만 애초에 습격한 놈들도 떳떳한 녀석들이 아닐 것이 99퍼센트 확실하기에 일이 커지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푸른 폭죽 사건도 어느 정도 조용해진 터라(여전히 산발적으로 일어나고는 있었다) 평온한 나날을 보내던 시안의 앞으로 한 장의 문서가 날아왔다.
“음… 왕국 정기 감찰단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저번을 계기로 갑작스럽게 오는 문서에 친절한 의도가 담긴 경우가 별로 없음을 깨달은 시안은 극도로 꼼꼼히 문서를 읽어보며 눈앞의 행정직원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속으로 귀찮아 죽을 지경이었지만 눈앞의 이 남자가 리안 경의 동생이라는 것을 들었기에 친절하게 대해주기로 한(게다가 쪼잔하다고 셀린 경이 욕하는 것도 들었으니 괜히 눈 바깥에 날 필요가 없다) 직원은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가란-티아의 주요 임무 중 하나이지요.
2개월에 한 번씩, 2인 1조를 구성하여 지방의 귀족 및 행정기관들을 감찰하는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위치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1주에서 2주 정도 소요되며 그곳에 도착하여 순방하며 각종 행정업무가 잘 수행되고 있는지를 감찰하는 역할을 맡게 되지요.”
다행히도 자신에게만 내려온 특별임무는 아니었다.
임무 자체야 별로 특이할 것이 없었지만 자신에게는 한 가지 더 확인할 게 있었다.
“음… 그렇습니까? 혹시 누구랑 같이 가는지도 내정이 되어 있는지요?”
“아, 물론이지요. 이번에 같이 가는 분은 카리만 경입니다. 이분은 여러 번 감찰 업무를 자원하여 수행하신 베테랑이지요.”
‘오잉?’
예상외로 셀린 양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자신을 따라 붙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우선적으로 자신이 걱정한 두 가지 사항 모두에 해당이 없자 시안은 우선적으로 안심이 되었다. 들어보니 어차피 정규임무라 거절도 안 되는 것 같아 시안은 여행 다녀온다는 생각을 하고 다녀오기로 했다.
☆ ☆ ☆
“…누가 시안을 뽑은 거지?”
케르벨 백작은 집무실에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시안은 모르겠지만 시안에게 셀린을 붙인 것은 자신이다.
셀린의 임무는 시안의 무력이 눈에 띄지 않게 정보를 통제하는 것이었다.
엘-루아 거리를 제압하는 게 시안임을 들킨다면 당장 나라샤 후작이 시안을 다른 변경지역으로 배치해버릴 테니까.
자신에게는 나라샤 후작을 막을 정도의 힘이 없었기에 이 사실을 숨겨야 했다.
중립이었지만 나라샤 후작의 과격한 수단이 주변에 미치는 피해가 상당히 과함을 걱정한 셀린 역시 케르벨 후작의 의견에 동의했고 시안을 도와 엘-루아 거리 및 주변을 통제하는 데 동참하였다.
셀린은 그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며 일부러 2인 1조로 시안의 동선을 통제하고 주변 행인들을 몰아내어 제압하는 광경을 보는 목격자를 숨겨왔다.
물론 당사자들이야 뒤통수 한 대 맞고 기절하기 때문에 보지도 못했다.
언제까지야 감출 순 없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들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아직도 가란-티아 내부에서는 시안을 팔푼이 취급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왕가나 나라샤 후작 측이 시안을 눈여겨보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시안이 엘-루아 거리 전체를 통제하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터였다. 그 아이는 고작 열일곱 살이니까(실제로 키라트가 없었다면 들키지 않았을 것이다. 나라샤 후작에게는 운이 좋고, 키라트와 케르벨 백작에게는 운이 나쁘게도).
그런데 감찰업무에 뽑히다니? 정규임무로 2개월에 한 번씩 나간다고 쓰여 있지만 관례상 1년 이상의 경력을 쌓은 가란-티아들이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우연이면 좋겠지만 우연치고는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았다. 시안 덕분에 잠잠한 엘-루아 거리를 시안이 3주나 자리를 비우면 어떻게 될지 불 보듯 뻔했다.
3기사단의 전력만으로는 수호대의 망나니들을 막기 힘들었다(시안이 전치 12주쯤을 해놓았으면 좀 더 안심이 되었겠지만 아쉽게도 다들 4주만 입원하고 퇴원하였다).
난장판이 되리라.
이미 발령이 난 이상 당장은 손을 쓰기 힘들었다. 과하게 손을 쓰면 오히려 약점만 잡힐 것이다.
케르벨 백작은 시안이 하루빨리 돌아오길 빌며 그 전까지 수도를 안정시킬 방법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 ☆ ☆
시안이 카리만 경과 함께 감찰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나라샤 후작은 허탈함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이렇게 쉽게?’
자신들의 동맹 열한 명을 갈아버린 급박했던 문제가 너무나 쉽게 해결되어 버렸다.
계획 자체는 간단했다.
1. 시안을 수도에서 빼낸다.
2. 귀족가와 왕당파의 격전이 벌어지지 않을, 중립 귀족가 쪽으로 감찰을 보낸다.
3. 그 안에 모든 것을 끝낸다.
4. 로만 백작가는 건드리지 않는다.
변경으로 아예 발령을 보내버릴까 생각도 했었지만 가족을 소중히 생각한다고 하길래 멀리 떨어지는 것을 거부할까 봐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그렇기에 감찰을 보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는 가란-티아의 정규임무이기에 의심을 받을 가능성이 적고 한두 달 정도라면 거부감도 적을 테니까.
갔다가 혹시 귀족파나 왕당파 쪽의 사건에 휘말리게 될까 봐 일부러 중립가 지역 쪽으로 보냈다.
그리고 우선 출발한다면… 그리고 카리만이 한두 달 정도만 시간을 잘 끌어준다면… 상황은 이미 종료되어 있을 것이다.
지금 양측의 세력 차는 그 정도로 벌어져 있었다. 무난하게 왕권을 이양 받을 수 있으리라. 핵심구역인 엘-루아 거리가 시안 때문에 막혀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다녀오면 모든 것이 끝나 있을 것이고 정치에 별 관심이 없는 시안은 가란-티아의 업무 외에는 신경을 쓰지 않으리라.
자신은 오히려 저 괴수가 인간으로 남아있으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지원할 의지가 있다.
역대로 로만가는 중립이니 굳이 손댈 필요도 없지만 혹시나 하여 리안을 건드리지 말라고 아랫사람들에게 모두 일러두었다.
로만 백작이야… 누가 로만 백작을 건드리겠는가. 피떡이 되기 싫다면. 지금이야 근엄해졌지만 젊은 시절로만 백작의 별명이 미친 불곰이었다.
‘…….’
나라샤 후작의 안심하는 표정을 본 탈린 자작은 후작이 시안 폰 로만을 너무 많이 신경 쓴다고 여겼다.
위의 계획에서 시안에 대한 두려움이 명확히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자의 무력은 강대할 것이다.
하지만 시안에 대한 행동패턴은 이미 예측된 상태였다. 주의사항도 너무 단순하였다.
그런데도 후작은 한 발짝 무사히 움직인 것에 너무나도 안도하는 것이다.
“후… 이런…….”
자작의 표정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챈 후작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자신이 계획을 짤 때 최종적으로 꼼꼼히 확인을 하는 것이다.
머리로만 그 무서움을 알기에 참모들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무장에 대한 계획을 안일하게 세울 가능성이 있다.
사실 마스터까지는 저들의 생각도 틀리지 않다. 하지만 그랑-반더부터는 다르다. 심지어 라-반더라니.
라-반더는 제국시대까지 합쳐 천 년의 역사 동안 단 열두 명만이 존재한다고 알려져 왔다. 천년이 지나도 그 이름과 업적이 전해올 정도인데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다.
그만큼 공포의 대상이며 범접할 수 없는 예측불허의 존재라는 뜻이다. 자신들이 세운 계획은 그러한 존재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렇기에 후작 자신은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참모들은 이런 것이 몸으로 와 닿지 않으리라.
하지만 이번만큼은 저들의 의견이 맞기를 기도해야 한다.
우선 첫 단추는 잘 끼웠다. 실행만이 남았을 뿐이다.
“자작, 시작하도록 하지. 늦어도 두 달 안에… 모든 것을 끝낸다.”
“네, 알겠습니다.”
끝나면… 다른 세상이 열려있을 것이다.
☆ ☆ ☆
“오! 두 달 정도 걸린다는 건가요?”
“그렇다네. 하하.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로가디스 변경은 작은 마을의 숫자까지 합하면 상당하니까 말이야.”
수도를 떠나온 지 시간이 꽤 지나서 어느새 로가디스 변방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번 감찰지인 로가디스 지방으로 향하는 관도 위를 마차를 타고 가며 카리만 경과 시안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카리만 경은 어느새 꽤나 친해진 시안을 보며 출발 전 탈린 자작이 신신당부하던 말을 떠올렸다.
‘절대로, 수도로 돌아가고 싶다는 말이 나오게 하지 마십시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두 달간 수도를 떠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절대로 기분 나쁘게 하면 안 됩니다.’
그 외에 몇 가지 주의 받은 게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위의 두 가지였다.
자세한 사항은 못 들었지만 옆의 시안을 역병 취급하는 주의사항을 들을 때마다 카리만은 의문을 가졌다.
겨우 열일곱 살 가란-티아 하나를 이렇게 바깥으로 내돌릴 이유가 없다.
하지만 정보가 너무 부족하기에 고민해봤자 별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카리만은 시안에게 곧 있을 업무에 대한 주의사항을 인지시켰다.
“지방은 수도와는 분위기가 다르다네. 자네는 이제까지 수도에서만 살아왔다고 했지?”
“예, 그렇지요.”
“티안 왕국은 치안이 잘 잡혀있는 편이긴 하지만 일손은 항상 모자란다네.
그 말인즉, 지방 쪽으로 갈수록 치안이 불안해지고 도적들도 많은 편이지.”
“아하!”
“이번에 가는 로가디스 지방은 안전한 편이지만… 나도 오랜만에 가는 터라 어찌 될지 모르겠군.
같은 나라가 맞는지 의심이 갈 수도 있으니 기대하라고. 하하.”
웃으며 카리만은 겁을 주기는 했지만 속으로 걱정이 되었다.
자신은 감찰업무를 오래 행해온 만큼, 신입들을 데리고 다녀온 경우도 많았다.
그간 신입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었다. 그간 가장 피곤했던 타입을 뽑아보자면
1. 감찰업무를 한답시고 가서 접대를 거하게 받으려고 하는 경우
2. 가던 길에 산적이나 안타까운 마을의 사정을 해결해주겠다고 감찰업무를 때려치우고 뛰어드는 경우
3. 가서 부정부패가 있을 경우 뿌리부터 뽑아버리겠다고 난장을 피우는 경우
이렇게 세 가지 정도가 있었다.
자신들이 무슨 정의의 기사, 혹은 권력자가 된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었다.
감찰의 업무는 어디까지나 행정을 감시하고 윗선에 보고하기만 하면 된다. 해결은 윗선에서 따로 하는 것이다.
목표가 정의구현이 아니라 감찰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지한 상태로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너무 과할 필요도, 너무 엉성하게 할 필요도 없는데 신입들은 그 경계선을 몰라 항상 헤매고는 했다.
‘가던 중에 별일이 생기지 말아야 할 텐데…….’
이번에 탈린 자작으로부터 단단히 주의 받은 것도 있는지라 옆의 이 녀석이 가서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고 난동을 부리면 어떻게 제어해야 할지 고민이 되는 카리만이었다.
카리만이 아직 시안의 성격을 잘 몰라 생기는 오해였다.
그때였다.
챙! 챵챵! 까드득! 으악!
멀리서 희미한 칼 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 관도의 바깥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 ☆ ☆
<싸움에서 불쌍해 보이는 쪽을 돕는 자가 영웅이라니? 그러면 필사적으로 노력해서 이기고 있던 자는 뭐가 되는가?>
-어느 회고록에서 발췌
☆ ☆ ☆
‘젠장… 싸움인가?’
흔한 일이었다. 지방의 관도를 지나가는 상단이나 사람들은 도적들의 타깃이 되고는 했다(도적끼리의 싸움이 아닌 경우도 많았다).
도적질하다가 걸리면 모조리 사형이지만… 어차피 걸리면 사형인 놈들이 도적질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에 안 걸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일을 저지르고, 실제로도 그런 경우가 많았다.
원래 이런 싸움에 끼어드는 것은 감찰업무가 아니었다.
치안담당은 따로 있었으며 자신들이 치안담당까지 할 것이면 2인 1조로 다니지도 않았을 것이다.
구할 수 있다면 싸워야겠지만 피할 수 있다면 최대한 피하는 것이 맞다.
실제로도 굉장히 위험했기에 상부에서도 유사시의 도주에 대하여 문책하지 않는다.
가란-티아 자체의 무력이 약하지 않지만 보통 도적들 수준들도 만만치 않은 데다 걸리면 사형이니 굉장히 필사적으로 싸운다.
하지만 이제까지 자신이 본 신입 100명 중 과장 안 보태고 85명 정도는 칼을 꼬나 쥐고 달려가고는 했다(심지어 도적들도 가란-티아가 건드리기 껄끄러워 상단을 그냥 보내주려고 하는데도 칼침을 놓으려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카리만은 옆의 시안을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 녀석이 로만가의 공자라면 무력을 써보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할 것이기 때문에.
‘음?’
하지만 옆의 시안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왜 자신을 그렇게 빤히 쳐다보냐는 듯 눈을 뜨고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칼 소리를 못 들은 건가……?’
그럴 리는 없다. 칼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해서 이제는 일반인이라도 귀를 세우면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왜 그러시죠?”
카리만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음… 자네 혹시 저기 소리가 안 들리는 건 아니지?”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귀머거리도 아닌데. 하하!”
웃으며 말하는 시안을 보고 카리만은 더 아리송해졌다.
그 표정을 본 시안이 설마 하는 얼굴로 말했다.
“…설마 저기서 싸우는 걸 구원해주러 가는 것도 업무에 포함되어 있습니까?”
예상치 못한 시안의 대답에 카리만은 황당한 느낌이었다.
“음… 아니, 아니. 그런 뜻은 아닐세. 그냥 자네가 궁금해하지 않을까 해서 물어본 거야.”
“하하. 저는 또 업무에 그것이 포함되어 있나 해서 다시 한 번 여쭈어 보았습니다. 분명 감찰이니까 저런 싸움이 저희 업무는 아닐 것 아닙니까.”
너무나도 자신이 바라는 모범답안이 나왔지만 카리만은 순간 당황하였다. 혈기왕성한 시절에 나올 만한 대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음… 특이한 친구구먼.’
하지만 이런 케이스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기에 넘어가기로 했다.
자신의 로만가에 대한 선입견이 작용하여 당황했던 것뿐이지 원칙을 중시하는 이런 신입들도 있기는 있었다.
“정확히 알고 있어서 다행일세. 피하지 못할 사정이 아니고서야 저런 업무에 끼어드는 것이 아니지, 위험할 수도 있으니. 물론 도의상 가능할 경우 도울 수도 있지만 굳이 엮여들 필요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풀에서 정체불명의 인물이 뛰쳐나왔다. 그리고 다급하게 외쳤다.
“도망가십시오! 컥.”
“…….”
“선배, 이럴 때는 보통 어떻게 해결하는 겁니까?”
시안은 자신들을 향해 갑자기 뛰쳐나왔다가 다리에 단검을 맞고 나뒹구는 인물을 보고 선배에게 물었다.
이 상황을 본 카리만은 한숨을 쉬며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 ☆ ☆
로가디스 지방은 콘-티안 산맥으로 빙 둘러싸인, 왕국의 수도에서 서쪽으로 쭉 가다 보면 타란 왕국과의 접경지역이 나오기 조금 전에 위치하는 변방의 지역이다.
로가디스 지방은 상당히 넓은 면적을 자랑하지만 산맥으로 빙 둘러싸여 있기에 산에서 나는 약재나 차를 제외한 다른 특산물이 없고, 위치도 군사적으로 사용해 전혀 적합하지 않기에 군사적 요충지에서도 배제되어 3대 무장가나 7대 무장세력이 머물지도 않는다.
즉, 아무것도 없는 낙후되어 있는 지방이다. 이곳이 중립인 이유는 귀족파와 왕당파가 끼워주지 않기 때문이다.
중앙에서도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지역이기에 영주와 귀족들의 횡포가 선을 넘지는 않았지만 선 바로 아래서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그런 지역.
그렇기에 더 치안이 좋지 않고 사람들의 인심이 각박했다. 길가다가 도적을 만나는 일도 흔했고 여행객들이 잠자다가 강도를 당하는 일도 많았다.
당연히 이런 일이 이어지기에 외지인과 상인들의 발길은 점점 더 끊기고, 점점 더 고립되는 악순환이 발생하였다.
크레인 자신이 살고 있던 쿨란 남작령도 그런 전형적인 로가디스 지방의 귀족령이었다. 사 년 전까지는.
하지만 자신의 영지는 변하기 시작했다. 쿨란 남작령의 대공자, 파레온이 실종되었다 돌아온 뒤부터는.
오 일간 절벽에서 떨어져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파레온은 갑자기 엄청난 자신감을 가지고 영지를 개혁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파레온은 강력한 리더십과 처음 들어보는 지식들로 중무장하고 로가디스 지방에서도 세가 약한 편이었던(사실 거의 망하기 직전이었다) 쿨란 남작령의 세력을 빠른 속도로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인재를 양성하고 외부 상단을 끌어들여 유통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힘쓰고… 심지어 쿨란 남작 가문에 내려오던 반데르-로아를 개조(개조하지 않고는 쓰지 못할 정도로 참담한 수준의 반데르-로아였다.)하여 이를 재능이 있어 보이는 평민들에게 가르쳤다. 그리고 처음 보는 기술들을 영지 구석구석에 적용시켰다.
진실로 평민들을 배려하고 그들에게 살길을 열어준 파레온 대공자, 아니 이제는 영주님이 되신 파레온 영주님 덕에 쿨란 남작령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고, 이제는 쿨란 남작령 대부분의 영지민들이 파레온 대공자를 믿고 따르고 있다.
크레인 자신도 그중 한 명으로 파레온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남작령의 호송 치안대에 들어올 수 있었고, 곧 대장을 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쿨란 남작령이 급속도로 발전하자 이를 경계한 주위 영지에서 견제가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점점 더 마찰이 거세지기 시작하였다.
그나마 티안 전체가 안정되어 있을 때는 괜찮았지만 귀족파와 왕당파의 균형이 무너지며 티안 전체가 내전 쪽으로 관심이 쏠리자 로가디스같이 떨어진 변방 지역까지는 통제력이 떨어졌고, 그 이후 주변 귀족영지들의 공격은 더욱 거세어졌다.
수법도 엄청나게 비열했다. 상단을 습격하고, 국지적인 도발을 걸고, 야생맹수들을 몰아서 영지 쪽으로 보내고, 농지에 독극물을 부리고… 증거를 남기지 않아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야금야금 남작령의 힘을 깎아먹으려고 별짓을 다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남작령의 세력이 커져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오늘같이 아예 대놓고 상단에 습격을 행한 것이다.
자신들이 반데르-로아를 수련해 강해졌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일반인보다 조금 뛰어난 수준에, 수련한 지도 3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다. 변방이라고는 하지만 귀족가인 테른 자작령의 반더들이 작정하고 달려들자 순식간에 열세에 몰렸고, 도주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흩어져 도주하고 있는데 저 멀리 관도에 마차가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크레인은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다.
추적자들은 이번 일이 자신들의 소행임을 들키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다. 물론 심증이야 충분하겠지만 물증이 없다면야 어떻게든 얼버무릴 수 있으니까.
저 마차를 스쳐 지나가면 관심이 저들에게로 나누어지리라.
저들도 무장세력을 보면 도망갈 것이고, 증거인물을 남기면 안 되는 테른 자작령의 반더들은 추격 인원을 나눌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면 자신의 생환확률은 올라가게 된다.
저들에게는 미안하긴 하지만 자신은 무조건 대공자에게 살아 돌아가 습격 소식을 알려야 한다.
거기까지 생각한 크레인은 마차 쪽으로 방향을 틀어 달리기 시작하였다.
“이 자식, 도망가 봤자지. 하하!”
‘으… 제기랄…….’
전형적인 악당의 대사를 내뱉으며 수풀 속에서 뛰쳐나온 반더 녀석을 바라보며 단검에 맞아 쓰러진 크레인은 속으로 절망적인 탄식을 내뱉었다.
이렇게 되면 옆의 사람이 자신을 구해주기를 빌어야 한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저는 쿨란 남작령의 호위병입니다! 저자들이 우리를 습격했습니다!”
마차를 보며 울부짖는 크레인을 본 녀석들은 그제야 마차가 눈에 들어오는지 경계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정확히 마차 아래 쓰러진 도주자 녀석의 목을 따려면 저기 마차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을 지나가야 하기에 경계하는 것이다.
“안녕하신지요. 거기 아래 있는 녀석에게 볼일이 있어서 그런데 혹시 데려가도 될는지요?”
상당히 잘 만들어진 모양의 마차와 뭔지는 모르겠지만 문양을 새기고 있는 것을 보니 평범한 사람들은 아닌 것 같기에 테른 자작령의 기사인 나르안은 경계심을 가지고 물어보았다.
“우리는 가란-티아에서 파견 나온 감찰행정관이다. 귀족가 간의 문제라면 우리는 끼어들지 않겠다.”
비록 수도의 치안담당을 하고 있는 가란-티아이지만 애초에 수도의 치안 담당이 얄팍한 무력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익스퍼트 중급인 카리만은 낙후된 변방 자작령의 일개 반더에게 꿀릴 수준이 아니다.
하지만 힘이 있다고 아무 때나 쓰는 것은 원숭이나 다름없다.
딱 보아하니 저쪽 녀석은 귀족령 소속이 틀림없고 이쪽 녀석은 평민이면 명분이 서니 도와주려고 했는데 자신이 귀족령 소속이란다.
귀족가 간의 항쟁이면 굳이 자신들이 끼어들 명분도, 이유도 없다.
카리만의 이야기를 들은 나르안은 표정이 환해졌다.
역시 다짜고짜 공격하지 않길 잘했다. 가란-티아를 공격하면 뒷일도 복잡해지거니와 어차피 저놈만 데려가면 다 해결되는 일이다.
들켰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어느 영지인지만 모르면 되는 일이다. 자신이 아는 행정업무 담당자 놈들은 둘 중 하나였다.
<일을 열심히 안 하거나, 자신의 일만 열심히 하거나.>
자신들의 정체를 캐는 그런 귀찮은 짓까지는 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르안이 꾸벅 인사를 하며 저벅저벅 크레인을 향해 걸어왔다. 여기서 목을 따려 들면 저들도 눈뜨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데려가서 몰래 처리해야 한다.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본 크레인이 울부짖으며 외쳤다.
“말도 안 되는! 가란-티아면 수도를 지킨다는 근위병들이 아닌가! 거기다 공무를 보러 온 자들이 사람이 죽어 가는데 방치하다니! 당신들이 휘말릴까 봐 걱정한 내가 어리석었군!”
이걸 본 시안이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저분 참 재미있는 소리를 하네요. 일부러 이쪽으로 끌고 왔으면서.”
“…무슨 소리인가, 시안 경?”
“저 사람, 아까 마차를 보더니 이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달려오던데요. 우리가 누군지 알았을 리는 없는데 뒤에 반더를 주렁주렁 달고 오다니. 우리가 연약한 민간인이었으면 어쩌려고.”
그 말을 들은 카리만 경은 싸늘한 눈빛으로 눈앞의 크레인을 쳐다보았고 크레인은 당황하여 소리쳤다.
“거… 거짓말! 내가 방향을 틀어왔다니! 난 정신없이 도망쳐 왔을 뿐이오! 애초에 당신이 어떻게 그런 것을 안단 말인가!”
“뭐… 믿기 싫음 마세요. 어차피 저희는 귀족가 교전에는 참여 안 합니다. 저희 업무가 아니라고요.”
시안이 이런 쓸데없는 거짓말을 할 리 없다고 생각한 카리만은 그나마 있던 동정심까지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어서 이자를 데리고 가시오. 우리는 이 일에 관여하지 않겠소.”
“…알겠소.”
나르안이 질린 표정으로 시안과 카리만을 바라보았다. 저들은 이자가 끌려가면 어떻게 될지 대충 짐작하고 있을 터인데 저렇게 칼같이 잘라내다니.
‘어쨌건 나야 잘된 일이지.’
나르안은 칼집으로 크레인을 후려쳐 기절시킨 후 번쩍 둘러메고 숲 속의 동료들과 합류하기 위해 돌아갔다.
“문제도 해결된 것 같으니… 가던 길 가죠, 선배.”
“…그러도록 하지.”
묘한 표정으로 시안을 바라보던 카리만은 갈 길이 먼 것을 떠올리고 서둘러 마차에 올라탔다.
☆ ☆ ☆
“음… 선배, 혹시 여기 팔 년 전에 한 번 와보셨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래. 그때도 한 번 와보았지. 근데 그때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주변의 귀족령을 순찰하고 세 번째로 방문한 쿨란 남작령을 보고 두 사람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로가디스 지방의 귀족령은 황폐하기로 이름 높다. 특이한 상품이 없어 외부의 관심을 끌 수 없는 데다 치안도 형편없어 대부분의 영지가 가난하다.
근데 눈앞의 영지는 달랐다. 앞의 두 귀족령과는 달리 당장 성벽부터가 으리으리하게 지어져 있었다.
게다가 탈릭 스톤의 가루를 섞어 만든 소형 방어 법진이 성문 쪽에 그려져 있었다. 가루라고는 하지만 탈릭 스톤의 가격을 생각하였을 때 저 정도면 백작령에서나 가능한 수준이다.
사람들의 표정도 달랐다. 정문을 지키는 경비병들의 표정은 자부심에 가득 차있었고 성문을 통해 왕래하고 있는 주민들의 표정에는 생기가 돌았다. 이 정도면 수도 근처와 비슷한 수준이다.
다른 지역의 주민들이 다 죽어가는 동태눈을 하고 있는 것과는 천지차이였다.
“정지! 신분을 밝혀주십시오!”
“가란-티아 소속 행정감사관 카리만이라고 한다. 이쪽은 시안이다. 영주에게 안내해주겠나?”
신분패를 보여주며 눈앞의 경비병에게 말하자 경비병은 신분패를 살펴보더니 안쪽에 연락을 넣었다.
“곧 안내해 주실 분이 나오실 겁니다.”
“고맙구먼. 수고하시게나.”
곧이어 따라 나온 안내자는 놀랍게도 미모의 여성이었다.
“안녕하세요. 쿨란 남작령의 행정 및 접객 업무를 맡고 있는 로이나라고 합니다. 영주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성벽 쪽에서 내성으로 향하는 길을 가며 시안과 카리만은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활기에 차 뛰어노는 어린아이들도 있었고 왁자지껄한 시장통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성에 가까이 가니 수련장에서 열심히 수련을 하고 있는 무사들도 볼 수 있었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얼굴에 모두 열정이 가득하다는 것이었다.
팔 년 전 왔을 때의 모습과 너무 큰 차이에 카리만은 자신이 잘못 찾아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당시 쿨란 남작령의 모습은 오히려 방금 자신들이 지나쳐 온 두 군데보다 더 심한 몰골이었다. 영주와 대공자가 영지를 어떻게든 해보려고 발버둥치고 있었지만 워낙 힘이 약하고 뭐가 없어서 영지가 힘들어하고 있었는데… 불과 몇 년 사이에 이렇게 변하다니.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지…….’
아버지로부터 작위를 계승 받았다는 영주를 만나보아야 의문이 풀릴 것이다. 보통 이런 조그마한 영지는 영주가 대단하지 않고서야 이렇게 발전할 수가 없다.
거기까지 떠올린 카리만은 궁금증에 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