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기묘한 영지>
“안녕하십니까. 제가 쿨란 남작령의 영주를 맡고 있는 파레온입니다.”
“반갑습니다. 이번에 행정감찰을 나온 가란-티아의 카리만입니다.”
“시안이라 합니다. 반갑습니다.”
내성의 집무실에 도달하니 젊은 남자가 집무를 보다가 인사를 하러 나왔다.
카리만은 이 젊은 영주를 처음 보고 굉장히 인상적인 느낌을 받았다.
눈에서는 정광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자신감이 넘쳤다. 아직 어린 티가 좀 남아있긴 하지만 앞의 두 요소와 합쳐지니 오히려 열정이 넘치는 나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들었다.
시안도 눈앞의 영주를 신기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뭐야… 신기한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네.’
저번에 5장로에게서 카르마타를 본 이후로 시안은 그 카르마타에 적용된 법진 특유의 흐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느낌으로. 머리로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정말 엄청나게 복잡했기에.
저 남자 몸 구석구석에서 그 특유의 흐름을 가진 물건들이 느껴졌다.
힘을 푼 여파인지 모르겠지만 부쩍 재미있어 보이는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진 시안은 파레온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는데 파레온이 입을 열었다.
“음… 제가 집무가 많아서 직접 안내해드리긴 힘들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담당자들에게는 모두 말해두었으니 협조해 주실 겁니다. 그리고 아까 만나셨던 로이나 양이 안내를 해드릴 겁니다.”
웃으며 대답하는 파레온을 뒤로하고 카리만과 시안은 로이나의 뒤를 따라 업무를 보기 위해 나섰다.
행정감찰업무는 영지의 모든 것을 돌아보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오늘은 간단히 돌아볼 것이니 일이 적을 것이지만 내일부터는 상당히 바빠질 것이기에 오늘 기본적인 것을 모두 숙지해 놓아야 한다.
우선적으로 재정 담당부와 도시행정부를 들렀던 카리만은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재정과 행정이 생각보다 탄탄한 점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다년간의 가란-티아 감찰 업무를 맡으면서 수많은 귀족령을 방문하였다. 그중에 쿨란 남작령보다 덩치가 더 큰 곳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카리만이 놀란 것은 단시간 내에 폭발하듯이 자라난 성장세이다.
8년간의 재무기록을 대충 훑어보았는데 4년 전부터 눈대중으로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겨우 4년 만에 이렇게 성장한 영지를 카리만은 본 적이 없었다(시안은 지루해 죽겠는지 하품을 참으며 보고 있었지만 카리만 자신은 굉장히 흥미롭게 기록을 살폈다).
행정도 튼튼하였다. 이런 영지에 쓸 만한 인재를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을 텐데 어떻게 구했는지 상당히 유능한 인재들이 구석구석 배치되어 자신의 맡은 바를 다 하고 있었다(이상하게도 그런 인재들 대부분이 미인이었다).
“이곳은 수련장입니다. 이곳의 담당은 리안나 경입니다. 리안나 경, 이번에 가란-티아에서 행정업무를 나오신 카리만 경과 시안 경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리안나라고 합니다. 궁금한 것 있으면 물어보시면 됩니다.”
‘여기도 미인…….’
참 특이한 영지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영주가 여자를 밝혀 능력을 무시하고 미인들 위주로 배치한 것 같지는 않았다.
실제로 눈앞의 리안나 경도 수련장 안에서 가장 강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고, 다른 파트의 인재들도 모두 제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병사들을 훑어보니 열심히 하자는 열정에 가득 차 있었다. 적은 양이긴 해도 반데르를 몸에 두르고 진형을 짜며 전술훈련 중인 것을 보니 파레온 영주가 능력 있음이 느껴졌다.
‘…잠깐… 반데르?’
수도 근처에서나 워낙 익숙한 광경이니 넘어갈 뻔했지만 변방에서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없다.
보통 이런 변방의 귀족들은 아래 병사들에게 절대 반데르-로아를 전하지 않는다.
평소에 워낙 잘못한 것이 많으니 힘을 주면 그 힘으로 자신의 목을 칠까 봐 두려운 것이다.
수도 근방이나 핵심지역에서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가는 당장 주변 영주에게 잡아먹힐 것이지만 어차피 이런 낙후지역은 주변 영주들도 반데르 수련법을 전하지는 않으니 반데르를 수련시키지 않는다고 더 위험해지거나 그럴 일은 없다.
“…병사들이 반데르-로아를 수련하고 있군요? 기세가 훌륭합니다.”
“그렇지요. 3년 전부터 영주님이 가문 비전의 반데르-로아를 개조하고 저희에게 하사하셨지요. 덕분에 우리 영지는 나날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리안나 경이 자부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영지가 성장하고 있는 이유가 있었군. 도대체 4년 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예전에 봤을 때와 너무 다르군…….’
카리만은 이 부분에 대해 조금 더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로이나 양의 안내를 따라 다음 장소로 향했다.
리안나 경을 소개받은 후 영지 안쪽으로 좀 더 들어가니 병기창이 있었다.
보통 병기창은 내성 가장 깊숙한 곳, 수련장 근처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다. 유사시 무기를 보급받기도 편하고 훈련 받고 있는 병사들이 가까이 있어야 비상시 병기창을 지키러 빠른 시간에 달려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안쪽으로 들어간 카리만은 깜짝 놀랐다.
‘…드콘족?’
이제까지야 ‘오! 꽤 하는데?’ 수준이었지만 드콘족을 본 카리만은 진심으로 놀랐다. 드콘족은 정말 쉽게 볼 수 있는 장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사인종들은 인간보다는 뛰어난 능력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능력이 없는 유사인종은 대제가 대륙을 통일한 이후 천 년이 흐르는 동안 인간들과 섞여들지 못하고 모조리 도태되었다.
지금까지 인간들과 공존하고 있는 유사인종들은 자신의 가치를 인간들에게 증명하였기에 인간과 동등한, 혹은 더 우월한 대접을 받는다.
드콘족도 그중 하나이다. 놀라운 장인인 그들은 이 세상 너머의 것을 보는 능력이 있어 법도학이 연관된 물품을 제작하는 데 굉장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국가 간에 전쟁이나 대북벽 트라즈 지역에서나 사용하는 법도 마학의 정수, 최종병기 아르타곤도 그들의 손에서 제작되었다.
수도의 공방이나 대법도회, 후작가 이상에서나 간간이 볼 수 있는 존재들인데… 이런 후미진 지역 남작령에서 드콘족을 보게 되다니!
“클클… 어째 나를 보는 사람들이 다들 놀라는군. 이곳 병기창 책임자인 열세 번째 부족의 아들, 라-카둠이다.”
“놀랍군요. 드콘의 아들을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반갑습니다.”
“뭐… 여기 영주한테 볼일이 좀 있어서. 어쨌건 나도 반갑다.”
시안도 소설 속에서나 보던 드콘족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옆의 애송이는 인사 안 하고… 아, 마침 바쁜 일이 있었지. 설명은 저기 있는 저 녀석한테 들으라구, 난 무기만 만들지 다른 행정은 저 녀석이 보고 있으니까. 아, 그리고 로이나, 너도 이쪽으로 좀 와 봐.”
“…라카-둠 씨? 왜 저러시지… 카리만 경, 이쪽 분은 병기창의 행정담당자 크론 씨입니다. 크론 씨, 병기창을 잠시 안내해 주시겠어요? 죄송하지만 잠시만 다녀오겠습니다.”
“크론입니다. 이쪽으로 오시면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라-카둠은 멀뚱히 서있는 시안을 타박하려고 얼굴을 쳐다보았다가 갑자기 바쁜 일이 있다며 병기창 뒤쪽으로 서둘러 사라졌고, 그걸 바라본 로이나는 카리만과 시안을 잠시 크론에게 인수인계하고 이상하다는 듯 라카-둠을 따라갔다.
☆ ☆ ☆
“너네 뭐야. 어디서 저런 흉악한 걸 끌고 온 거야?”
“…무슨 말이에요, 라카-둠 아저씨. 카리만 경 말씀하시는 건가요?”
병기창 뒤로 로이나를 끌고 온 라카-둠은 따지듯이 물었고 이해를 못한 로이나는 아무도 없었기에 평소처럼 편하게 라카-둠에게 물었다.
“아니, 그 오징어같이 생긴 녀석 말고. 그 뒤에 어리게 생긴 녀석 있잖아.”
“아… 시안 경 말씀하시는 거군요. 글쎄요. 그냥 가란-티아에서 나온 분이라고만 들었어요. 그분이 왜요?”
딱히 자세한 사항을 밝히지 않았기에 그냥 둘을 가란-티아에서 나온 행정감찰관이라고만 알고 있던 로이나는 라카-둠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어후… 됐다. 이래서 인간들이란……. 아예 장님이구먼. 어쨌건 영지에 해를 끼치러 오거나 그런 건 아니지?”
“당연하죠. 그분들은 행정감찰만 끝내고 금방 다시 돌아가신다고요.”
“그럼 됐어. 더 말해봤자 입만 아프고. 하나만 조심해. 옆에 그 시안이란 녀석, 절대 건드리지 마, 여기 있는 동안. 그리고 해달라는 거 다 들어주고 최대한 빨리 내보내.”
그제야 로이나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라-카둠은 드콘족, 인간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분명 시안이라는 사람에게 무언가 특이한 것을 본 것이다.
“…그 사람에게 뭔가 있는 건가요?”
“아, 됐고. 말해봤자 입만 아파. 설명하기도 귀찮고. 믿지도 않을 거고. 그냥 내가 말한 거 하나만 명심해. 그 애송이 영주 녀석한테도 조심하라고 하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을 닫고 사라진 라-카둠을 보며 로이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고민하던 로이나는 우선 안내를 마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병기창의 카리만과 시안 경에게로 다시 돌아갔다.
☆ ☆ ☆
“선배님, 이 영지는 정말 신기하네요.”
“그렇구먼. 짧은 시간 내에 이렇게 발전…….”
“이렇게 능력 좋은 미인들이 많다니. 하하! 천국인 줄 알았어요. 일할 맛 나겠는 걸요.”
“…….”
영지를 돌아보며 하루를 끝마치고 온 카리만과 시안은 로이나가 안내해준 숙소에서 휴식을 취하며 오늘 하루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카리만은 시안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자신이 하루 종일 행정감찰업무를 하는 동안 뒤에서 이리저리 사방을 살피기만 했다).
차라리 비범해 보였으면 수도에서 떼어놓으라는 탈린 자작의 지시를 이해했을 텐데 약간 나사 빠진 모습을 보이니 더 경각심이 살아나는 것이다. 분명 무언가 있다고 자신의 촉이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었다.
‘설마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겠지……? 날 방심시키고 무언가를 하려고…….’
자세히 살펴보아도 행동 하나하나에 진심이 듬뿍 묻어 나오는 걸 보니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지만 탈린 자작이 아무 이유 없이 자신에게 그런 것을 명했을 리 없으니 카리만은 당분간 좀 더 주의를 기울이기로 했다.
카리만이 이렇게 시안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시안은 오늘 본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음… 보물창고 같은 곳이네.’
로이나는 구석구석 모조리 안내해 주는 척은 했지만 딱 보여줄 것만 보여 주었다. 행정관들이 보면 좋아하고 만족할 만한 것들만.
카리만 경이 그러한 것을 뒤지느라 정신이 없는 동안 시안 자신은 사방에 숨겨놓은 것들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미인들이 신기하기는 했지만 그것보다도 지하에, 숲 속에, 호수 밑에… 숨겨져 있는 공간이 없는 곳이 없었다. 시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곳에 위치해 있었지만 시안은 눈 말고 다른 감각으로 세상을 느끼기 시작한 지가 오래였기에 지나가면서 그 공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숨겨진 공간에서는 무언가 열심히 나르며 만들고 연구하던 것 같은데… 사실 까막눈이라, 뭔가 엑사르가 여기저기 흘러 다니는 것 정도는 보았지 무얼 하는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지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본 시안은 고민하였다.
1. 감찰하자고 하고 비밀공간을 카리만 경에게 말하고 영지를 뒤엎는다.
2. 그냥 좋게 좋게 간다. 마침 카리만 경은 아무것도 눈치 못 챈 것 같았다.
자신의 업무에 충실해야 한다면 1이 맞다. 하지만 저들이 저렇게 숨긴 것에는 이유가 있을 터.
괜히 이걸 말했다가 비밀을 유지하고자 자신들을 죽이겠다고 덤비면 엄청 골치 아파진다.
숲이나 호수 밑에 숨겨져 있는 것들은 별문제가 될 것 같지 않다.
남작령 저 멀리 떨어진 절벽 쪽에 있는 무언가가 문제이다.
☆ ☆ ☆
<있으면 좋은 열정과 재능. 그리고 없으면 안 되는 운과 돈.>
-전설의 거상이 말한 성공의 요소
☆ ☆ ☆
시안은 저 너머. 절벽 쪽으로부터 자꾸 무언가 신경이 거슬리는 것이 느껴졌다.
거기는 멀기도 하고 뭔가 자신의 감각을 방해하는 것이 있어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렴풋이 느껴지는 게 저기 있는 녀석들을 상대하려면 자신도 힘을 풀어야 할 듯하다.
만약 파레온 남작이라는 자가 비밀을 유지하겠다고 남작령에 있는 자신을 습격한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힘을 푼다?
그러면 남작령 하나는 또 날아가는 것이다.
파레온 남작이라는 자가 이걸 가지고 무엇을 할지 고민해보던 시안은 중요한 결론에 도달했다.
<걍 냅두자.>
파레온 남작이 자신의 것을 가지고 뭘 하겠다는데 시안 자신이 거기에 왜 끼어든단 말인가.
보아하니 훔친 것도 아닌 것 같고(저런 걸 가지고 있다고 하는 귀족령은 본 적이 없다), 숨기는 거야 자기 맘이고, 자신은 행정감찰 하러 온 것이고, 며칠 안 되어 떠날 것이다.
괜히 들쑤셔서 몰살 쇼를 펼치기는 싫었다.
여기에 도달한 시안은 마음이 편안해졌고 곧이어 편안한 잠자리에 들었다.
☆ ☆ ☆
“여기 온 손님들은 잘 안내해드렸습니까, 로이나?”
“네, 파레온 님. 숙소에서 쉬고 계십니다. 저… 그런데…….”
말꼬리를 흐리는 로이나를 본 파레온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문제라도 있습니까?”
“라카-둠 아저씨가 시안이라는 그 어린 친구를 절대 건드리지 말고 빠른 시간 내에 영지에서 내보내라고 하셨습니다.”
“라카-둠 님이? 흠…….”
파레온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라카-둠이 속한 드콘족은 인간들이 보지 못하는 그 무언가를 본다. 그게 무엇인지는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하기 힘들지만… 그나마 비슷한 표현이라면 본질? 그 존재 내면의 무언가? 정도이다.
자신이 영지에 사용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암시장에 팔았던 ‘유산’ 중 하나를 보고 그 안의 놀라운 힘을 알아본 라카-둠은 자신을 찾아왔고, 그 놀라운 능력으로 영지를 발전시키고 유산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라카-둠 역시 ‘유산’에 대하여 큰 흥미를 가지고 있었으니 좋은 협력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실제로 라카-둠은 항상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해주었고, 이번에도 무언가를 보았기 때문에 경고를 하였을 것이다.
‘그래… 어차피 감찰은 오래가지 않으니까… 보여줄 것만 보여주고 어서 내보내야겠다.’
어차피 오래 머물게 할 생각도 없었다. 오래 머물다가 숨기고 있는 것이 행여나 들키게 되면 입막음하기 골치 아파진다.
자신이 이곳 영지에 숨겨놓은 그것들은 아직 바깥으로 드러낼 때가 아니었다.
자신의 영지는 아직 ‘유산’을 제대로 보호할 능력이 없다. 유산의 일부만을 가져다 썼을 뿐인데도 이렇게 영지는 빠르게 발전했다. 뒤에 아직 봉인을 풀지 못한 것까지 풀어내면 어떤 위력을 발휘할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시간을 벌어야 한다. 뒤의 봉인을 풀고 자신의 영지가 더 강성해질 때까지. 자신의 것을 지킬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그때가 되면… 지금은 숨겨야만 하는 것들이 자신에게 날개를 달아줄 것이다.
다행히도 자신이 찾아낸 것들은 영지를 성장시키는 데 엄청난 도움이 되고 있다.
이곳 로가디스 지방은 단점들이 수두룩하지만 장점은 중앙의 감시와 힘이 거의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목을 끌기 전에 어느 정도 힘을 갖추어야 하는 파레온 남작 자신에게는 아주 다행이다.
시기도 좋다. 귀족파와 왕당파는 격화되는 내전으로 중립지역에는 많은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경쟁자들이 서로를 물고 뜯을 때 어서 커야 한다. 보아하니 내전은 이상하게 잠시 주춤한 것처럼 보였지만 점차 귀족파가 우세를 보이며 기울어지고 있다고 한다.
1년. 자신의 계획에 따르면 늦어도 1년이면 주변의 영지들을 모두 통합하고 ‘유산’의 다음단계 봉인도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자신이 날아오르는 때가 될 것이다.
☆ ☆ ☆
“테른 자작, 우리를 불러 모은 건 어쩐 일이오?”
로가디스 지방의 열세 개 귀족령 중 하나를 맡고 있는 라이단 자작이 테른 자작에게 질문하였다.
“쿨란 남작령의 일로 여러분을 불렀소이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요즘 녀석의 횡포가 도를 넘었소. 이제까지 다들 섞여서 잘 살고 있었는데 녀석이 독주하고 우리를 압박하고 있소이다. 여러분들의 영지도 최근에 꽤나 힘들어 졌다고 알고 있소.”
“크험… 험.”
“으흠…….”
아픈 곳을 찌르는 테른 자작의 말에 모두들 헛기침을 터트렸다.
로가디스, 이 낙후된 변방의 지역에서 살아남으려면 과소비를 줄이고 경쟁은 삼가야 한다. 경쟁이란 상대에게 빼앗아 먹을 것이 있을 때 하는 것이지 이런 동네에서 싸우다 진이 빠져버리면 둘 다 망한다.
따라서 열세 군데의 귀족령들은 모두 상대를 심하게 자극하지도 않고 가끔 자신보다 약한 귀족령을 압박하는 정도로만 균형을 유지해왔다.
이런 로가디스 지방에 이변이 일어난 것은 4년 전부터이다. 쿨란 남작령의 어린놈이 갑자기 실종되더니 몽둥이로 머리라도 두들겨 맞은 것인지 설치기 시작한 것이다.
제풀에 지쳐 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세력이 급속도로 성장하여 주변의 영지들은 궁지에 몰린 상태였다. 이러다가 경쟁에 밀려 몰락하게 생긴 귀족들은 전면전은 못 걸고(전면전을 걸어서 상대를 몰락시켜도 자신이 몰락하면 무슨 의미란 말인가!) 국지적으로 쿨란 영지를 공격하는 중이었지만 이도 슬슬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무슨 좋은 수라도 있소이까, 테른 자작? 우리를 모두 불러 모은 것을 보니 할 말이 있는 듯한데요.”
“좋은 방법이랄 것까지야 없고…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 이 뜻입니다.”
“……?”
테른 자작은 최근에 나르안 경이 잡아온 크레인이라는 놈을 심문한 결과 얻을 수 있었던 쿨란 남작령의 정보를 주위 사람들에게 말해주었다.
“흐음… 그 정도까지 벌써 세력이 확장되었단 말이오?”
“그렇소. 근 1년 사이에 더욱 무섭게 성장했다고 하오. 게다가 꾸준히 병력을 무장시키고 있소.”
이제까지 전면전을 붙지 않은 이유는 한 가지이다.
피해가 너무 크니까.
약할 때 밟았어야 하는데 방심하는 사이에 엇 하고 너무 크게 치고 올라왔다.
뒤늦게 후회한 주변 귀족들이 압박을 가했지만 대응이 만만찮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미 혼자 상대하기에는 너무 커졌다.
그나마 이제까지는 무장의 수준이 차이가 나서 버티고 있었지만(반더는 단기간에 키울 수 있는 병력이 아니니까) 그것도 쿨란 영지가 용병을 고용하며 메꾸고 있었고, 일반병사 수준이 차이가 워낙 심하다 보니 점점 따라잡히고 있었다.
게다가 적당히 균형을 맞출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이 말은 로가디스의 균형을 깨트리고 자신들을 모조리 먹어치우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자신들도 가만있을 수 없다.
<더 커지기 전에 힘을 모아 밟는다.>
이제까지는 자존심이 상해 힘을 합치지는 못했지만 더 이상 가릴 때가 아니다.
아무리 영지전이 도박이라고 하지만 열이 넘는 영지가 힘을 모아 친다면 리스크는 작고 얻을 것은 큰, 매우 행복한 도박이 되리라.
테른 자작이 그동안 조사해 왔던 정보들을 보니 충분히 승산이 있다.
어차피 이곳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변방. 남작령 하나가 망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 하나 없다.
나라가 왕권 이양으로 어수선한 이때가 기회라고 생각한 자작, 남작들은 머리를 맞대고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했다.
이 일이 끝나면 다시 균형이 잡힌 로가디스 지방에는 전처럼 평화가 찾아오리라.
‘후후… 우선 1단계는 성공이구나.’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테른 자작은 속으로 작게 웃었다.
☆ ☆ ☆
“호송대가 습격 당했다고? 생존자는? 크레인 대장은 어떻게 됐지?”
“예… 시간이 흘러도 돌아오지 않아… 조사대를 보냈는데… 생존자는 없었습니다.”
“…범인이 누군지는 모르고?”
“심증이야 넘치지만… 물증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리안나 경의 보고를 들은 파레온은 이를 갈았다. 집중해야 할 시기인데 이런 식으로 자신을 자꾸 방해하면 곤란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파레온의 집무실에 갑자기 로이나가 뛰어 들어왔다.
“영주님! 큰일 났습니다!”
“……? 또 무슨 일인가?”
“상대편이 영지전을 걸어왔습니다.”
울고 싶은데 뺨 때려 주는 상대편이었다. 긴가민가하고 있던 찰나에 이런 사건이 벌어지다니.
“그렇군. 어디에서 도발한 것인가?”
“그것이… 로가디스 지방에서 수도와 가까운 로트펠 영지를 제외한 11개 귀족령입니다.”
예상외의 상황에 파레온이 멈칫 했다.
언젠가는 연합해서 덤빌 것이라 생각했지만 너무 이르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늙은이들은 적어도 몇 개월은 더 있어야 움직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무슨 요소가 저들을 자극한 것이지…….
곰곰이 생각하던 파레온은 당장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우선은 전쟁이다.
그리고 파레온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당분간 성장에 집중하고 내실을 다지고 싶어 소모적인 영지전은 피하고 있었지만 상대편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면 참을 이유가 없다.
아니, 오히려 이번 기회를 발판으로 세력을 순식간에 확대하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전쟁으로 세력 소모는 조금 있겠지만 로가디스 지방을 통합하고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여 세력을 키운다면 빠르게 복구하고 당당한 중심 세력의 하나로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
☆ ☆ ☆
“음? 영지전이라고요?”
“네. 주변 영지에서 영지전을 걸어왔습니다. 저희 영지에 계시는 동안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군요. 본격적으로 전투가 벌어지기 전 최대한 빨리 떠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파레온의 명을 받고 온 로이나는 카리만에게 말했다. 로이나는 라카-둠의 언급도 있었고 전쟁이 나서 우리 전력을 가란-티아에게 보여주어 좋을 것이 없기에 조심스레 떠날 것을 권했다.
카리만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했다.
위험한 것도 문제지만 이렇게 되면 탈린 자작님이 내린 임무를 지키지 못한다.
주변 영지들이 전쟁에 다 같이 돌입했다면 행정감찰업무를 볼 수가 없다.
당연히 자신들이 돌아보기로 했던 영지 순방을 중단하고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되면 탈린 자작이 요구한 두 달은커녕 채 한 달도 채우지 못한다.
여기까지 생각한 카리만은 이곳에 남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이 이번 행정감찰을 하며 느낀 바에 의하면 주변 영지 한두 개는 적수가 안 된다(카리만은 로가디스 연합 전체와 싸우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까지 위험할 일은 없을 것이다.
영지전이 끝나고 돌아가면 두 달은 훌쩍 지나가 있을 터이니 일석이조이다.
순식간에 계산을 끝낸 카리만은 입을 열어 말했다.
“아닙니다. 어차피 영지전 중에 이동하면 더 위험할 것 같군요. 행정업무는 끝났으니 여관으로 가서 숙박하도록 하지요. 전쟁 중에 폐를 끼칠 수 없으니까요. 시안, 괜찮은가?”
“아, 저야 괜찮습니다. 이 도시는 재미있는 게 많아서 좋군요.”
맨날 행정업무만 돕고 있는데 재미있는 게 있다니?
카리만은 잠시 의아해했지만 업무가 적성에 맞는가 보다 생각하기로 했다.
카리만과 시안의 대화를 들은 로이나는 속으로 인상을 썼지만 거부할 명분이 없었기에 알았다고 하고 파레온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러 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