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14화 (15/81)

<14. 영지전>

티안에서 영지전의 개념은 간단하다.

<타협할 때까지 싸운다. 강한 자가 모든 주도권을 가진다. 단, 너무 사태가 심화되면 국가가 개입한다.>

여기서 사태가 너무 심화된다는 것은 감정적으로 상대 일가를 몰살시키려고 하거나 점령 후 민간인들을 폭압한다거나 하여 지나치게 국력을 저하시킬 수 있는 경우이다.

왕권의 이양도 그랬지만 티안은 영지전을 말리는 국가가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티안의 법이 말해주는 바는 단 하나이다.

<티안의 모든 귀족들은 죽을힘을 위해 달려라, 잡아먹히고 싶지 않으면. 그리고 나라를 이끌어라.>

귀족은 많은 것을 누리는 만큼 티안을 부강하게 만들 책임이 있다. 그렇기에 각 귀족령의 주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은 영지의 주인들은 결국 나라를 강하게 만들 것이다.

이것이 초대 티안의 국왕으로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티안의 정신이다. 여기에는 왕가도 예외가 없다.

로가디스 지방이 티안에서는 특이한 케이스인 것이다.

로가디스의 귀족이라고 왜 욕심이 없겠는가? 서로가 고만고만하고 빼앗아 먹을 것이 별로 없을 것이 뻔하니 소모적인 경쟁을 할 이유가 없어 참은 것뿐이다. 이것이 로가디스 지방의 13귀족령들이 생각하는 평화였다.

이제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피할 수 없다. 뻗어나가려는 쿨란 남작과 자기 것을 지키려는 로가디스 연합들은 언젠가 충돌할 운명이었다. 테른 자작의 소집은 단지 거기에 불을 붙인 것뿐이다.

“엄청나게 바쁘군요.”

영지전은 처음 보는 시안이 신기하다는 듯이 구경하며 말했다. 그들의 여관은 영주성 근처에 위치해 있었기에 지대가 높아 영지 전체가 보였다.

영지 전체가 들썩이고 있었다.

여성들은 병참과 군용 천을 수선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고 아이들은 비상시 대피할 도주로를 따라 비상대피 훈련을 하고 있었다.

남성들은 모두 외성의 훈련장에 모여 훈련을 받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징집이 아니라 자원을 한 남성들이 대부분이었다.

파레온이 영주가 되기 전 후를 모두 겪어본 이들이기에 이번에 지면 어떻게 될지를 명확하게 깨닫고 있는 것이다.

“뭐… 변방에서 흔한 광경이 아니긴 하지만 변방의 요충지나 어느 정도 이상의 세력을 가진 귀족령들은 다 이 정도는 한다네. 그래도 이 정도면 상당하구먼.”

카리만 역시 여관 위층에서 바깥을 보며 말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시안이 역시 뭔가 있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태평해도 너무 태평했다.

자신이 머물고 있는 영지가 전쟁에 휘말렸다고 하는데 뭐가 그리 신기한지 사방을 살펴보고 있었다.

나이가 시안의 두 배가 넘는 자신도 불안한데 말이다(정확히 말하면 이곳 쿨란 영지가 로가디스 지방 전체와 한판 붙는다는 소리를 들은 다음부터 불안해졌다).

만약 쿨란 영지가 패배하게 되면 이곳 영지는 전쟁에 휩쓸리게 되고 그러면 자신들에게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이성이 있다면 가란-티아인 자신들까지 공격하진 않겠지만 전쟁 중에 그럴 리가 없다.

“시안, 불안하진 않은가? 혹시라도 지게 되면 이곳 영지가 휩쓸릴 수도 있잖은가.”

카리만의 말을 들은 시안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여기가 질 리가 있겠어요? 선배,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냥 철이 없는 건가…….’

이길 줄 알고 하는 전쟁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양쪽이 모두 승패를 알고 있으면 전쟁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다. 알아서 기겠지.

양쪽 다 해볼 만하다고 판단했으니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생각보다 객관적이다.

카리만은 시안이 안심하고 있는 이유가 너무 안일하다고 생각하였지만 시안은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하나 숲이나 호수나… 그냥 뭐 꺼내오기만 하면 이길 거 같은데… 질 리가 있겠어?’

그때 파레온 남작의 몸에 걸려 있던 것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영주성에 머물며 파장을 관찰해보니 각각의 물건들이 비밀 공간에서 나오는 파장과 유사했다. 그곳에서 꺼내온 것이리라.

그중 몇 가지는 파장이 상당했다.

무슨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공격용이라고 한다면 수련장에 있던 리안나 경이라는 아가씨 손에 쥐어주면 조그만 영지의 기사단 하나 정도는 혼자서 절단을 내놓을 것이다.

무구의 특성상 쓰는 사람의 실력이 중요하다지만 그 정도 되면 어린아이가 잡아도 집 한 채 토막 내는 건 여반장이다.

즉, 지기가 힘든 것이다. 변수만 없다면 영지전은 일방적으로 끝날 것이다.

지하공간에 숨겨놓은 것을 보니 패를 다 꺼내진 않을 듯하지만 설마 자신들이 질 것 같은 데도 안 꺼내겠는가? 하나씩 하나씩 꺼내겠지.

그러다 보면 결국 로가디스 연합은 이기고 있다가도 어? 어? 이러다가 탈탈 털리고 울면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자신들은 그냥 여기서 푹 쉬다가 전쟁이 끝나면 수도로 돌아가면 된다.

그때를 생각하며 시안은 여행 온 이 기분을 더 즐기기로 했다. 영주성에서 소개해 준 식당의 맛도 매우 훌륭했고, 이미 가족들에게 줄 선물도 사놓은 상태였다.

☆ ☆ ☆

“후…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는가, 리안나 경?”

파레온이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눈앞의 가신들에게 물었다.

아무리 손목의 단말 접속기 <크랑가>가 도와준다고 하여도 전쟁 준비는 피곤하였다. 게다가 처음 접하는 전쟁인지라 자신감이 있다고 하여도 긴장되었다.

“네, 남작님. 건방진 로가디스 연합 놈들을 혼내줄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그때를 위해 저희 쿨란 기사단이 준비해 온 것이니까요.”

리안나는 자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파레온 남작님은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로가디스 지역 전체를 돌며 반데르에 재능이 있는 청년들을 찾아왔다.

그리고 쿨란 남작가의 비전 반데르-로아였던 ‘흉폭한 개’를 변형시킨(더 멋진 이름을 쓰면 주변 영지에서 주제를 알라고 시비를 걸고는 했기에) ‘늑대의 길’을 자신들에게 내려 수련을 시켰다.

보통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나이가 먹어 수련을 시작하면 빠른 시간 내에 성취를 얻기 힘들다. 하지만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정체불명의 약을 먹고는 쭉쭉 실력이 늘어 지금 영지의 기사단은 전원이 익스퍼트 하급의 성취를, 리안나 자신은 중급의 성취를 얻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이지만 파레온은 리안나에게는 조금 색이 다른 약을 주었다.

그들 모두는 희망이 없던 자신들에게 길을 열어준, 파레온 남작에게 충성하고 있었다.

“그래, 로이나 경.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고요?”

“네. 평소부터 군수물자를 모아왔던 터라 추가적인 공급이 없어도 3개월은 족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오, 이런!”

갑자기 신음을 내뱉는 파레온을 보고 로이나가 불안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왜 그러십니까, 남작님?”

“너무 많이 모은 거 아닌가요? 하하! 3개월이라니. 그건 낭비예요. 병사들에게 하루 일곱 끼씩 지급해도 되겠어요.”

파레온이 웃으며 말하자 그제야 긴장이 풀린 로이나와 다른 사람들은 크게 웃었다.

아무리 자신 있다고 하지만, 다들 처음 겪는 영지전인지라 모두 긴장하고 있었기에 파레온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한마디 던진 것이다.

한 사람, 아니 한 종족을 제외하고는.

“애송아, 너 근데 저번에 그 오징어 비슷한 녀석이랑… 그 누구냐… 그 옆에 있던 거 내보냈냐? 성에서 안 보이던 거 같은데.”

“라카-둠 아저씨! 파레온 영주님한테 막말하지 마세요!”

“아, 그래그래. 진정해. 알았어, 애송이 영주님.”

회의실 구석에 조용히 있던 라카-둠은 카리만과 시안의 행방에 대하여 질문했다.

“그들은 영주성이 아닌 외성 안쪽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전쟁이 끝나면 떠나겠다는군요.”

라카-둠의 질문에 로이나가 대신 대답하였다.

“음… 그래? 음…….”

라카-둠이 불안해하는 것을 처음 본 파레온은 너무 걱정하지 말란 듯이 대답했다.

“라카-둠 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곳은 외성인데, 적들은 아마 외성벽의 문도 때려보지 못할 것입니다. 라카-둠 님께는 아쉽겠군요. 직접 성문을 설계했는데 써보지도 못하시면.”

“…넌 속이 편해서 좋겠다. 나처럼 보여 봐라, 그렇게 편하게 말이 나오나.”

의미를 알 수 없는 라카-둠의 말에 사람들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지만 라카-둠은 피곤한 표정으로 말하기를 멈추었고 파레온은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보고를 들으며 회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 ☆ ☆

회의가 끝나자마자 무섭게 발발한 쿨란 영지와 로가디스 연합의 영지전은 꽤나 팽팽하게 흘러갔다.

반더들의 힘은 평형을 이루었다. 쿨란 기사단 덕이 아니었다.

쿨란 기사단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실전을 겪어 본 적이 없는 애송이들이었다. 물론 로가디스 연합 쪽 반더들도 실전경험이 부족했지만 살아온 세월과 수련한 기간이 달랐기 때문에 경지는 비슷했어도 전투력이 달랐다.

반더 대 반더라면 쿨란기사단은 밀릴 수밖에 없었다. 리안나 경만 없었다면 말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리안나 경이 들고 있는 무기만 없었다면 말이다.

무기 자체는 신기한 게 없었다. 그냥 평범한 외양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날렵한 칼.

하지만 그 칼을 휘두른 결과가 평범하지 않다는 게 문제였다.

걸리면 뭐든지 썽둥썽둥 잘려나갔다. 리안나 경의 솜씨는 결코 아니었다. 칼의 성능에 비하면 리안나 경의 움직임은 어린아이가 칼을 휘두르는 것과 같았으니까.

하지만 방패도, 반데르를 머금은 검도, 갑옷도, 심지어 성문도 그 칼을 견디지를 못했다. 휘두르면 휘두르는 궤적 안에 있는 것들은 모조리 잘려나갔다.

로가디스 지방에서 로트펠 지방을 제외하고는 가장 강성한 편인 랏슈 영지의 기사단장인 칼라일도 한 칼에 자신의 애병이 두 동강 나고는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 도망갔다.

이제까지 리안나 경이 무기를 들고 앞에 나서지 않은 것은 자신을 뒷받침해줄 기사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무구가 강력하다고 해도 리안나 경의 실력으로는 포위당하면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일반 병사들의 질은 쿨란 영지가 우세했다.

반데르-로아를 수련한 쿨란 영지의 병사들은(이건 적어도 로가디스 지방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다) 혼자서도 능히 둘을 상대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게다가 훈련의 양과 질도 달랐다. 짧은 기간이지만 지독한 훈련을 거쳐 온 쿨란 영지의 정규병들은 평화에 찌들었던 로가디스 연합의 병사와는 차원이 다른 힘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문제는 수였다.

열한개의 영지가 연합하여 쳐들어 왔기에 그 수가 쿨란 영지의 몇 배가 넘었다.

리안나 경이 앞에서 고군분투하였지만 상대편도 전략을 바꾸어 리안나 경이 나타나면 반더들이 투척무기를 사용하였다. 수십 개가 넘는 단검과 투척용 무구가 날아오니 무구에 비해 실력이 모자란 리안나 경은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숫자가 부족한 문제를 알았기에, 주변의 영지들은 쿨란 영지를 포위하고 차륜전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이렇게 영지전은 장기적인 국면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 ☆ ☆

테른 자작령의 영주성.

테른 자작령은 쿨란 영지와 접해있었기 때문에 거리가 멀지 않아 굳이 전장까지 나가지 않아도 이곳에서 지시를 내릴 수 있었기에 테른 자작은 집무실에 머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집무실 안에는 테른 자작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파레온 남작의 저력이 대단하군요. 저희 쪽이 조금씩 밀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한 달이 가기 전에 로가디스 연합은 해체되고 흡수되겠군요.”

눈앞의 인물에게 로가디스 연합이 패배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테른 자작의 표정은 놀랍게도 평온해 보였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생각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양 미소를 띠고 있었다.

“후후… 그런 걸 가지고도 지는 것이 이상하지. 아직 숨겨놓은 것들이 더 많을 텐데 작동시키지는 못하는가 보군. 계집애한테 저런 장난감 칼만 들려 보낸 것을 보니.”

테른 자작의 눈앞에 있는 자는 리안나 경이 들고 있는 아티팩트를 장난감 칼이라 폄하하며 비웃었다.

정체를 숨기고 싶은 듯 목에 찬 아티팩트가 기묘한 소리를 내며 얼굴 주변을 흐리고 있었기에 인상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 장대한 체격과 강렬한 기세는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유산’들이 그곳에 있는 것은 확실합니까?”

“하하. 당연한 것을. 이미 다 확인한 지 오래다. 그나저나 정말 의외야. <아란칼의 병기창>이 이런 후미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리란 것을 누가 알았을까.”

우샤란의 숨겨진 그랑-반더, 쿠란다스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 ☆

<아란칼의 병기창>

전쟁신이 키우던 늑대, 아란칼의 이름을 딴 이 병기창은 고대 제국시절에 세워진 곳이다.

엑사르를 사역하고 과학을 접목하여 라-시안 대륙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던 제국은 7왕국을 자신의 발아래 놓고 있었지만 항상 감시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때 라-시안 대륙 몇 군데에 설치된 것이 ‘아란칼의 병기창’이다.

제국에 반하는 행동을 통제하고 제압하기 위해 세워진 이 병기창에는 제국 법도 마학의 정수가 결집된 전쟁병기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칼-굴족과의 전쟁 중에도 7왕국에게 뒤통수를 맞으면 안 되기에 제국 측은 밀리는 상황에서도 ‘아란칼의 병기창’을 회수하지 않고 운용하였고, 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작동을 멈춘 채로 그대로 라-시안 대륙에 남게 되었다.

우샤란 왕국은 꽁꽁 숨겨져 있던 그 병기창을 우연히 발견한 후 이를 철저히 기밀에 붙이고 그랑-반더까지 배치하며 관리하였다.

작은 병기창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전율할 만한 힘과 기술은 우샤란 왕국이 척박하고 더운 환경을 극복하고 콘 왕국을 압박할 정도로 강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동시에 우샤란 왕국은 고민이 생겼다. 도대체 다른 병기창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느냐, 이것이다.

자신들에게 강대한 힘을 주었다면, 다른 나라에도 강대한 힘을 줄 것이 뻔하다.

기록에 따르면 자신 말고 한 군데에 더 위치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도무지 그 위치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나라에 가서 헤집으며 다닌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는 포기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우샤란 왕국의 암시장에 ‘아란칼의 병기창’에서만 존재하는 물품 몇 가지가 나온 것이다.

이를 발견한 우샤란 왕국 정보부는 즉각 역추적에 들어가고 모든 물건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총 네 개가 암시장에 나왔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는데 그중 세 개는 모두 회수하였고, 하나는 어떤 드콘족이 사서 우샤란 왕국을 떠났기에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회수한 물건을 조사한 정보부는 두 가지 결론을 내어 놓았다.

1. 일련번호와 양식을 볼 때 이는 ‘아란칼의 병기창’에서 나온 물건이 확실하다.

2. 우리 나라에 존재하던 물건이 암시장에 풀린 것이 아니다. 즉, 새로운 ‘아란칼의 병기창’에서 나온 물건이다.

이를 알게 된 우샤란 왕국은 흥분하여 극도로 비밀리에 이 물건의 출처를 탐색하였고, 그 결과 티안 왕국의 로가디스 지방이라는 낙후된 지역의 영주인 파레온이라는 자가 우샤란의 암시장에 와서 물건을 팔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제 딴에는 티안 왕국에 팔면 꼬리를 들킬까 봐 우샤란 왕국에 판 것인데 우샤란 왕국 입장에서는 굉장한 호재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쿨란 왕국과 로가디스 지역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다.

영지가 급격하게 확장을 하는 시기였기에 외부인물이 들어와도 의심하지 않았고, 우샤란 왕국의 첩보부원들은 상인으로, 건설가로, 하녀로 위장하여 남작령을 속속들이 헤집었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할 수 있었다.

쿨란 남작령의 절벽 뒤편에 ‘아란칼의 병기창’이 존재한다!

우샤란 왕국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좋은 상황이었다.

군사적 요충지나 수도 근방, 혹은 대귀족들의 영지에 존재했더라면 얼씬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자신들이 조사한 바로 이 로가디스 지방이라는 곳은 정말 변방 중의 변방이었다. 자신들의 근위기사단 중 하나만 보내도 한 달도 안 되어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거기다 시기도 좋았다. 그 유명한 티안 왕국의 왕권 이양전이 시작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절대왕정인 우샤란 왕국 입장에선 이해가 잘 안 가지만 실제로 티안 왕국은 강성해지고 있으니 뭐라고 할 수도 없다).

아무래도 치안이 잘 서 있는 시기면 힘들 텐데 이렇게 나라가 들썩거릴 때면 웬만한 사건으로는 변방을 신경 쓰지 않는다.

여기까지 알아본 우샤란 왕국은 즉시 행동에 들어가기로 했다. ‘아란칼의 병기창’ 안의 것을 모조리 쓸어 오기로. 그 안의 것은 변방의 남작령 따위가 가지기에는 너무나 귀한 것이다.

아무리 변방이라고 해도 타국이 와서 자신의 나라 영지를 쓸어버리고 도둑질을 해갔다는 것을 알면 전쟁이다.

고로 우샤란 왕국은 절대로 자신의 행동임을 들키지 않도록 계획을 짰다. 그리고 착실하게 실행에 옮겼다.

그 결과 현재 테른 자작의 앞에 우샤란 왕국의 병기창을 지키던 그랑-반더인 쿠란다스가 서있는 것이다.

이번 일은 그랑-반더가 나설 가치가 충분히 있는 일이기에.

첩자들을 보내 조사한 결과 쿨란 남작은 병기창 안에 있던 군수물자와 기본 장비 몇 가지를 꺼내어 영지에 숨겨놓고 영지를 발전시키는 데 쓰고 있는 듯 보였다. 상당히 잘 숨겨놓아 자신들도 작정하고 조사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파레온이라는 자가 병기창의 2단계를 해제하였다면 로가디스 연합은 순식간에 쓸려나갔을 것인데 이제껏 전투나 영지발전에 1단계만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니 1단계까지만 해제한 듯하다.

물론 1단계만 해도 대단하다. 하지만 그런 것들에는 관심 없다. ‘아란칼의 병기창’의 진정한 힘은 아직 봉인이 해제되지 않아 절벽 안에 남아 있는 2단계부터이다.

그곳을 털어가는 것이 목표였다.

자신이 병기창을 털어가는 것을 안 들킬 수는 없다. 자신들과 구조가 비슷하다면 그곳의 보안수준 역시 상당할 테니까. 무턱대고 들어가면 상당히 시끄러워질 것이다.

그 소리를 듣고 지키러 온 녀석들을 다 썰어버린다면 아무리 변방이라고 해도 중앙에서 조사가 나올 것이다.

중앙에서 조사가 나오면 아무리 흔적을 잘 감추어도 들킬 확률이 높아진다. 엑서나 법도사들은 만만한 존재가 아니니까.

그렇기에 티안 왕국 중앙에서 조사가 나오지 않도록, 이번 사건을 그저 지방의 해프닝으로 여기도록 하여야 한다.

<사건 자체야 들켜도 상관없지만 우샤란 왕국의 소행이라는 사실은 절대 들키면 안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 테른 자작이라는 자를 섭외했다. 자신의 사건을 덮을만한 커다란 해프닝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로가디스라는 척박한 지방은 테른 자작이라는 자의 욕심을 채워주지 못했다.

그렇기에 유혹했다. 우샤란 왕국으로 넘어오라고. 이번 일을 도와주면 그곳의 좋은 위치에 영지를 내리겠다고.

테른 자작은 미심쩍어했지만 자신이 법도서로 계약하는 것을 보고 이번 일에 협조하기로 했다.

물론 지킬 생각은 없다. 그랑-반더 정도 되면 그런 법도서의 계약 이적 정도는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을 테른 자작은 모르는 모양이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지원받은 정보와 자금을 바탕으로 주변 로가디스 지방 귀족령들을 통합하고 영지전을 걸었다. 시선을 끌고 자신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져도 상관없다. 어차피 테른 자작은 이곳에서 사라질 것이고 쿠란다스 자신은 병기창 안의 물건만 쓸어가면 이런 촌구석에 볼일은 없다.

‘여기까지는 굉장히 잘 풀렸다.’

쿠란다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테른 자작을 지원하여 로가디스 지방을 통합하도록 시킨 것도 잘 풀렸다.

영지전을 걸어 시간도 잘 끌고 있다. 게다가 간당간당하긴 하지만 영지를 완전 포위하였기 때문에 버티는 동안에는 절벽 쪽으로 병력을 이끌고 오지 못 할 것이다. 설령 녀석들이 도착한다고 하여도 이미 병기창은 텅텅 비었을 것이고, 자신은 마찰 없이 무사히 이곳을 빠져나가고 있을 터이다.

그랑-반더인 자신도 여기까지 무사히 넘어오는 데 성공했다. 비록 들키지 않기 위해 험난한 콘-티안 산맥을 넘어오느라 부하들은 오지 못하고 자신만 올 수 있었지만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자신 정도면 충분하다. 들고 가는 거야 <니츠마탄의 아공간>을 들고 왔으니 부담도 없다.

이제 쓸어 가기만 하면 된다. 조사를 해 본 결과, 파레온이라는 자도 자신이 독식하려고 숨기고 있었다. 차라리 티안 왕국에 바쳤다면 자신들이 손댈 수 없었겠지만 겨우 남작령 하나가 지키고 있다면 쓸어가는 것은 여반장이다. 털리고 나서도 왕국에 하소연도 못할 것이다. 자신들도 몰래 숨기고 있었으니까.

이제 마지막 단계만 남았다. 절벽 뒤의 병기창을 쓸어버리고 가져가면 된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하여 아는 테른 자작과 파레온 남작도.

“그럼 움직이도록 하지. 마무리까지 잘 끝내도록, 테른 자작.”

“알겠소이다.”

테른 자작은 지시를 내리기 위해 아래로 향했다. 절벽 쪽으로 자신의 병력을 움직여 포위망을 더 두껍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다른 곳이야 조금 헐거워져 더 고생하게 되겠지만 그건 자신이 알 바 아니다.

그 뒷모습을 보고 쿠란다스도 창 바깥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 ☆ ☆

파레온은 갑자기 자신을 부른 라카-둠과의 대화를 끝내고 와서는 상념에 빠져 있었다. 라카-둠이 자신에게 의미를 모를 말을 던졌기 때문이다.

‘드콘족은 인간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그중에는 미래도 있다.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비록 아주 가깝고, 불투명한 미래뿐이 못 보지만……. 그래도 도와주마. 도무지 방법을 모르겠을 때는 이렇게 해라…….’

그러고는 이해하지 못할 말을 일러주었다.

‘무슨 뜻이지… 그게…….’

고민하던 파레온은 일단 뒤로 접어두고 영지전의 상황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런데 ‘크랑가’가 전해주는 전장의 상황을 듣다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갑자기 전장에서 테른 자작령의 병력 일부가 빠져 절벽 쪽의 포위망을 두껍게 만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뭐지?’

절벽 쪽은 자신이 찾은 제국의 ‘유산’이 머물러 있는 곳이다. 물론 그곳은 꽁꽁 숨겨져 있어 위치는 자신만 알고 있는 데다(자신도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다면 찾지 못하였을 것이다) 보안 자체도 삼엄하기 그지없기 때문에 전쟁 중에도 그다지 걱정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병력으로는 병기창보다 더 강한 수준의 방어를 할 수 없다.

설마 유산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아닐 것이기에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크랑가’가 자신의 머릿속으로 날카로운 울림을 보냈다.

<경고! 경고! 병기창에 누군가 침입하고 있습니다. 1단계 보안구역 방어 작동!>

“뭣!”

파레온은 갑작스럽게 울리는 경고에 놀라 자리를 박차며 일어섰다.

☆ ☆ ☆

“후… 이런 곳에 있었구먼. ‘아란칼의 병기창’, 이런 촌구석에 있으니 찾지를 못하지.”

쿠란다스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강철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절벽 아래 구석 깊숙이 위치해 있는 이 강철 문은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마치 새것처럼 자신의 건재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강철 문 올올히 탈릭 스톤의 가루가 새겨져 견고한 방어법진을 형성하고 있었다.

<…사용자 인식 중. 등록되어 있는 사용자가 아닙니다.>

강철 문 위쪽에서 빛을 쏘이더니 쿠란다스를 쭉 훑고 지나갔고, 이윽고 등록된 사용자가 아니라고 거부의 음성을 내보냈다.

그 음성을 들은 쿠란다스는 히쭉 웃으며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런 건 나도 알고 있다고.”

칼에 반데르를 잔뜩 집어넣자 그랑-반더의 상징이라는 파괴의 빛이 검에 올올히 맺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쿠란다스는 눈앞의 문을 향해 가볍게 칼을 휘둘렀다.

후웅! 쯔카칵!

병사들이 돌격충차를 가져와도 부술 수 없는 견고한 문이었지만 쿠란다스의 가벼운 칼질 한 번에 모든 방어법진이 파괴되고 문은 대각선으로 조각나고 말았다.

이윽고 문이 떨어져나가고 아직 어둠으로 쌓여 있는 병기창의 안쪽에서 붉은색의 안광 여러 개가 쿠란다스를 향했다.

“자자, 기다릴 것 없어. 내가 들어갈 테니.”

그러면서 쿠란다스는 성큼 안으로 뛰어들며 사방으로 검을 휘둘렀다.

☆ ☆ ☆

시안은 미묘하게 전해져 오는 파동에 잠에서 깨었다.

그리고 창 바깥, 정확히 말하면 절벽 쪽을 보곤 잠시 고민을 하더니 결론을 내리고는 히죽 웃었다.

“오우.”

그러고는 어느새 방 안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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