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아란칼의 병기창>
아란칼의 병기창은 크게 네 단계의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1단계 보안구역은 병사들이 사용할 무구나 병참, 보급 물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파레온이 발견하여 영지로 옮겨 사용하고 있는 리안나 경의 검이나 영약, 탈릭 스톤 같은 물품 및 각종 정보들은 모두 1단계 보안구역에서 나왔다.
제국의 법도 마학들이 모두 집결된 물품이라 1단계의 물품만 해도 대단한 가치를 가졌고, 실제로 4년 만에 망해가던 쿨란 남작령에 로가디스 지방 전체와 싸울 정도의 힘을 주었다.
하지만 1단계까지는 병기창이라기보다는 ‘창고’로서의 역할이 강하다. 진정한 ‘병기창’은 2단계부터 시작된다.
오랜 세월 우샤란의 병기창을 관리하였기에 이를 잘 알고 있는 쿠란다스는 열심히 자신의 주변으로 덤벼드는 견공 모양의 인공병기 <파블락>을 썰어버리며 2단계 보안구역으로 전진했다.
자신이 그랑-반더이기에 파블락 정도는 쉽게 썰어버리는 것이지, 전쟁 시 민간인 및 병사 제압용으로 만들어진 파블락은 상당히 강했다. 아마 파레온이라는 녀석은 이걸 가지고 가서 쓸지 말지 고민하다가 너무 눈에 띈다고 생각하고 이곳에 남겨 보안 유지에 사용하려고 했던 것 같다.
어느덧 2단계 보안구역의 앞에 도달한 쿠란다스는 자신의 기감에 묘한 느낌이 잡히는 것을 느꼈다.
‘왔구먼…….’
필시 이 병기창의 주인이 공간이동을 통하여 이곳에 온 것이리라.
제국시대의 법도학으로도 대이적법진, 라-샤르-로아의 소형화는 만만치 않은 일이었겠지만 병기창의 총관리자 하나 정도는 유사시에 공간이동으로 병기창 내부 아무 곳으로나 이동할 수 있었다.
병기창의 운영에 필요한 권한이 총 관리자의 명이 있어야만 실행 가능한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런 기능이 개발된 것이다.
‘근데 와서 뭐 하려고?’
쿠란다스는 히죽 웃으며 생각했다.
쿠란다스는 계획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자 기분이 좋아졌다.
예상대로 포위망에 막혀 귀찮은 꼬리를 달지 않고 저 혼자 온 것이다. 병력을 이끌고 왔으면 대학살을 벌여야 하니 티안 왕국 중앙의 관심을 끌겠지만 저렇게 혼자 오면 그냥 무시하고 볼일 보면 그만이다.
관리자가 이곳 병기창에 대해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 자신의 목숨은 위험했으리라. 아니, 여기서 확실히 뼈를 묻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애송이는 그런 권한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아직도 질질 끌고 있지, 2단계 구역만 열었어도 이 근방은 하루 만에 청소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주제에 자기 꼬리를 우샤란까지 남기다니. 몽땅 털려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쿠란다스는 자신의 문 앞에 있는 2단계 보안구역의 철문을 장작 패듯이 두들기기 시작했다.
꾸웅!쿵! 카카칵!
1단계보다 훨씬 튼튼한 문이긴 했지만 그랑-반더의 칼질을 견딜 정도는 아니다.
순식간에 토막 난 문을 보고 쿠란다스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역시 이곳은 아직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만약 파레온이라는 녀석이 이곳의 권한까지 획득했다면 이 안에 있는 <카누안>들이 즉시 작동하여 자신을 공격했어야 했다. 이곳은 병기창답게 보관되어 있는 병기들이 방어까지 같이 겸하는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쿠란다스는 어마어마하게 넓은 공간에 정렬되어 있는 엄청난 숫자의 반더-제압용 전쟁병기, 카누안을 보며 자신이 가져온 니츠마탄의 아공간을 발동시킬 준비를 했다.
국가 1년 탈릭 스톤 사용량의 5퍼센트에 달하는, 엄청난 양과 1급 법도사들 수십이 참가하여 제작한 이 엄청난 아티팩트는 이번 임무를 위해 자신에게 특별히 수여되었다.
수백 년 전 제국의 대법도사, 니츠마탄이 처음 제작하고 설계도를 남겼기에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이 아티팩트의 기능은 단 하나뿐이다.
<아공간 생성>
차원을 비틀어 이면의 공간을 만들고 무생물을 보관할 수 있는 기술. 국가 차원에서 관리할 만한 아티팩트는 분명히 아니지만 니츠마탄의 아공간은 다르다.
니츠마탄은 자신의 설계도에 압도적인 용량을 구현하고 여러 가지 특수한 기능을 첨가하여 아공간 활용도를 극대화함으로써 단순한 아공간 주머니를 전략병기 급 아티팩트로 탈바꿈시켰다. 사용해본 결과 10만 명의 병사가 1년간 사용할 수 있는 물자를 비축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이곳에서 그 성능을 발휘할 것이다.
니츠마탄의 아공간을 허공에 놓은 쿠란다스는 뒤로 물러서 혹시라도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주변을 경계하였다.
쿠란다스의 손에서 떨어진 조그마한 상자 모양의 아티팩트, 니츠마탄의 아공간은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 떠있더니 갑자기 휘리리릭 하고 돌며 찬연한 광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회전하는 니츠마탄에서 나온 푸른빛은 점점 더 범위를 넓혀가더니 이윽고 보안구역 전체에 가득 쌓여 있던 카누안들에게 가 닿았다.
그리고 그 빛에 닿은 카누안들은 녹아내리기라도 하듯이 스르륵 하고 사라져 버렸다. 아공간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언제 봐도 장관이야.’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푸른빛에 휘감겨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는 카누안을 보며 쿠란다스는 생각했다.
어느새 수천 기에 달하던 카누안은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그러면 이제는 3단계 보안구역으로 진행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던 쿠란다스는 문득 의아함을 느꼈다.
너무 조용했다.
아까 공간이동의 느낌을 받은 쿠란다스는 혹시 모를 녀석의 발악에 대비해 방어를 준비하고 있었다.
권한은 없어도 분명 이곳을 지켜보고는 있을 것이다. 병기창의 전체 감시권은 기본 권한 중 하나이니까.
‘뭐지… 설마 포기한 건가? 파레온이란 녀석?’
어쩌면 그 녀석은 2, 3단계 병기들의 가치를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이렇게 쉽게 포기하지.
‘생각보다 멍청한 녀석이었군, 나야 편하지만…….’
편하지만 재미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쿠란다스는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와중에 포기했다고 생각한 파레온은 그 가치를 모르는 것도, 전혀 포기한 상태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 가치를 잘 알기에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
☆ ☆ ☆
‘맙소사! 어디서 저런 자가…….’
‘크랑가’로 병기창 내부의 상태를 지켜보던 파레온은 탄식을 내뱉었다.
아직 쓸 때가 아니라고 판단되어 보관해 두었던 파블락이 모조리 썰려나갔고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열리지 않던 2단계 보안구역의 문이 종잇장처럼 찢겨나갔다.
소문으로만 듣던, 검에서 번뜩이는 휘황찬란한 광채는 저자가 분명 그랑-반더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포위망을 뚫을 수 없기에 자신만 공간이동으로 병기창 근처로 이동해 오기는 했지만 아래 부하들은 안 데리고 오기를 잘 한 것 같다.
데려와도 별 의미가 없었으리라. 모조리 죽었을 것이다.
저자를 막을 만한 권한을 자신은 아직 가지고 있지 않다. 1년만 더 있었다면… 2단계 봉인을 풀고… 어쩌면 3단계 봉인까지 해제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면 저자를 막을 수 있었으리라.
파레온은 탄식을 내뱉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어쩌다 저런 자가 찾아왔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주의하였는데… 거기다가 자신 말고도 아무도 모르는 병기창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오다니. 이건 알고 찾아온 습격이란 뜻이다.
<침입자. 2단계 보안구역 횡단 중, 현재 3단계 보안구역 접근 중>
파레온은 무력한 자신의 모습에 탄식을 내뱉었다.
물론 영지로 옮겨온 1단계의 물품만 해도 대단하다. 하지만 그 물건들이 자신을 강대한 귀족으로 만들어 줄 것들이라면, 저 안의 것들은 자신을 티안의 주인으로, 더 나아가 제왕으로 만들어줄 만한 물건들이다.
그런 물품들이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가져온 기기 속으로 모조리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때 갑자기 라카-둠의 말이 떠올랐다.
‘우선 네가 손 쓸 수 없는 상황이 생겼다면 a-13이란 곳으로 가라. 나는 이게 무슨 뜻인지,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너는 알겠지…….’
그때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았다.
“크랑가! 나를 a-13구역으로 옮겨다오!”
파레온은 손목에 대고 소리쳤다.
<…접수완료. a-13구역으로 이동합니다. 라-샤르-로아 발동>
파레온은 이윽고 찬연한 빛에 휩싸여 사라졌고 이윽고 병기창 내부의 a-13구역으로 이동했다.
“어? 어떻게 오셨죠?”
파레온이 눈을 떴을 때는 자신을 신기하단 듯이 쳐다보는 시안이 눈앞에 서 있었다.
“…무슨…….”
파레온은 눈앞에 보이는 시안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이자는 분명 라카-둠 님이 조심하라고 했던 가란-티아이다. 그런데 그자가 왜 여기 있단 말인가? 이런 한밤중에? 그것도 병기창에?
순간 이자도 한패가 아닌가 생각했지만 곧 그 생각을 접고 말았다.
이자가 한패여도 더 나빠질 것도 없거니와, 그랬다면 라카-둠 님이 이곳으로 가보라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라카-둠 님의 조언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으니.
“당신은 시안 아니오?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소?!”
그러자 시안이 굉장히 민망하단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 전 구경하러 왔지요.”
“…구경이라니?”
“실은 저번에도 여기 구경하러 왔는데 철문으로 막혀 있더라고요. 그런데 부수고 들어갈 수는 없잖아요. 주인이 있는 것 같던데 기물파손 하면 안 되니까. 그런데 앞에 있는 분이 때려 부수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하하! 엄청 궁금했는데 앞에서 열어 주길래 안쪽으로 구경하러 왔지요. 역시 예상대로 신기한 게 엄청 많네요. 아까 파란빛이 쭈웅 하고 몽땅 빨아들이는 게 진짜 장관이었는데…….”
파레온은 앞에서 주절주절 떠들고 있는 이 사내의 말에 도대체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 하나 헛갈릴 지경이었다.
이자는 분명 영지 안쪽에 머무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곳 절벽에서 문을 부수는 걸 느끼고 왔다니? 영지에서 이곳 절벽까지는 20킬로미터도 넘는다.
게다가 자신은 부서지는 걸 느끼자마자 공간이동으로 바로 왔는데 그 말은 20킬로미터도 훌쩍 넘는 거리를 일순간에 달려왔단 뜻이 아닌가? 포위망도 젖히면서.
심지어 남의 창고가 털리는 걸 구경하러 왔다니.
하지만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침입자는 엄청난 속도로 3단계 보안구역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곳의 방어가 시간을 끌어주긴 하겠지만 결국 뚫리고 말리라.
라카-둠 님이 이곳으로 가보라 한 건 눈앞의 시안이라는 자에게 해결책이 있어서이리라.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소! 가서 막아야 하오!”
“맞아요. 파레온 남작님은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으실 텐데… 가셔 막으셔야죠. 여기 파레온 남작님 소유 아니었나요? 여기서 뭐하고 계세요?”
“……!”
시안의 말에 파레온은 말문이 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맞다. 도대체 시안이 이걸 왜 막아야 한단 말인가?
“그… 그… 당신은 가란-티아 아니오?”
“…그렇죠?”
“그러면… 어떻게든 이런 침입자를 막아주어야 하는 것 아니오? 가란-티아는 치안이 임무이니까!”
파레온은 말하면서도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이었다. 억지였지만 그 정도로 자신은 다급했다.
“……? 저는 업무시간도 끝났고… 여긴 제 구역도 아니고… 이건 행정감찰업무도 아니고… 게다가 이건 남작님 거잖아요. 이거 나라에 귀속시키지 않으신 것 맞지요? 숨기고 계신 거 보니……. 사유재산까지 챙겨드려야 할 임무는 없는데요.”
역시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저렇게 줄줄이 반박하며 약점까지 파고들자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상황이 파악되자 오히려 열이 좀 가라앉은 파레온은 라카-둠 님이 말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네가 무슨 주장을 하던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다. 그럴 때는 이렇게 말해라……. 그리고 명심해라. 욕심을 버려야 한다.’
라카-둠 님의 말을 떠올리며 파레온은 고민했다.
이 방법이 먹힐지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있다가는 몽땅 다 저 정체불명의 침입자에게 빼앗기게 될 것이다. 그것보다는 이게 더 나으리라.
<침입자가 3단계 보안구역 보안시스템을 모두 통과하고 출입문이 파괴되었습니다.>
“어?! 안되겠다. 구경거리 놓치겠네. 남작님, 힘내세요. 전 보던 거 마저 보러 가겠습니다.”
‘크랑가’와 시안에게서 동시에 들려온 목소리에 파레온은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라카-둠 님이 말한 대로 외쳤다.
“이곳에 있는 모든 물품을 티안-왕국에 귀속시키겠소! 그리고 가란-티아 3조 7항의 항목에 대한 발동을 요청하오!”
이 말을 들은 시안은 멈칫하다가 매뉴얼에 적혀 있던 3조 7항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떠올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3조 7항이 생각난 시안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리고 일그러지는 시안의 표정을 본 파레온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가란-티아 3조 7항』
-모든 가란-티아는 국가에 귀속된 군사적 물품에 대한 침습의 방어 및 보관 책임을 가진다. 이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 ☆ ☆
3단계 보안구역에 도달한 쿠란다스는 이곳 병기창의 규모에 전율을 금할 수 없었다. 동시에 안도했다. 여기 있던 파레온이라는 녀석이 이걸 온전히 다 먹었다면… 티안 왕국, 더불어 주위 왕국은 이 녀석 발아래로 들어갔을 것이다.
자신들이 찾아낸 ‘아란칼의 병기창’은 이곳에 비하면 동네 노인 자경단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정도 되니 라시안 대륙의 한가운데 위치하며 제국에 대한 반란을 제압할 수 있었으리라.
자그마치 200기에 달하는 대-마스터 급 반더 제압 병기, <켈-루펀>이 푸른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며 쿠란다스는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한 기만으로도 마스터와 박빙으로 싸울 수 있는 켈-루펀이 200기라니.
저 녀석 서른 기면 자신도 목숨이 위험하다.
이것만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간다면… 자신들과 접하고 있는 콘 왕국 따위는 순식간에 밀어낼 수 있으리라. 그리고 지금은 웃고 있지만 뒤에서 서로 칼을 갈고 있는 타란 왕국 녀석들도 발아래 깔아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웃고 있는 쿠란다스의 눈에 하나의 격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에 쓰여 있는 고대 제국어를 읽고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출 수 없었다.
“…4단계! 아란칼의 병기창에 4단계 보안구역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 사실이었구나!”
쿠란다스는 놀람과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우샤란 왕국에서 발견된 ‘아란칼의 병기창’은 총 세 단계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1단계, 일반인과 민간인들을 제압하는 4족형-자율기동병기, 파블락의 보관소
2단계, 비기너와 익스퍼트 급 반더들을 제압하는 4족형-자율기동병기, 카누안의 보관소
3단계, 마스터 급 반더들을 제압하는 인간형-자율기동병기, 켈-루펀의 보관소
이것들만 해도 정말 엄청난 전력이다. 처음 자신들의 나라가 이 병기창을 발견했을 때는 고대 기술력에 전율을 금치 못했다. 인간이 조립한 기계주제에 마스터까지 제압할 수 있다니!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발생하였다. 이 정도로는 라시안 대륙의 7왕국 전체를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그랑-반더. 그 당시의 7왕국에도 그랑-반더는 많진 않지만 분명 존재하고 있었고, 아무리 켈-루펀의 수가 많다고 하여도 치고 빠지는 그랑-반더의 반란을 제압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온 가설이 있었다.
<이곳 병기창에는 없지만, 다른 병기창에는 그랑-반더도 제압할 수 있는 4단계의 자율기동병기가 보관되어 있는 병기창이 있을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무장들은 코웃음을 쳤다. 분명 마스터까지 제압할 수 있는 자율기동병기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랑-반더를 제압할 수 있는 자율기동병기라니!?
책상에만 앉아 있더니 그 위대함이 몸으로 제대로 와 닿지 않는 모양이라고 하며 그 가설을 무시했다. 실제로도 없었고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이 사실이었다니! 쿠란다스는 전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고는 흥분한 표정으로 4단계의 격벽을 때려 부수기 시작하였다. 4단계의 격벽은 상당히 단단하였지만 애초에 보호용으로 만든 격벽이 아닌지 생각보다 쉽게 부술 수 있었다.
쿠란다스는 침을 꿀꺽 삼키며 격벽의 틈을 지나 4단계 보안구역으로 들어갔다.
“오오… 오오오…….”
니츠마탄의 아공간을 챙겨 들고 안으로 들어간 그는 인간 형태를 한 열 개의 병기를 보고 전율하였다.
분명 저 녀석들은 기동도 하지 않고 있다.
그래도 느낄 수 있다. 저기 있는 녀석들 중 하나라도 불이 켜지는 순간, 자신은 그 녀석과 생사의 결투를 벌여야 하리라!
감격에 찬 그는 다가가서 새겨져 있는 이름을 읽었다.
<아란칼>
“‘아란칼의 병기창’이란 건… 여기서 유래된 이름이었는가.”
과연 이런 거대한 병기창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감회에 빠져 바라보던 그는 순간 흠칫하고 말았다.
여기 있는 녀석들은 앞의 녀석들과는 다르다. 앞의 녀석들이 에너지를 충전하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면, 이 녀석들은 시동어만 외치면 그 순간부터 기동이 가능한 녀석들이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자신은 그 시동어를 알고 있다. 아마도 자신들의 병기창 시동어와 같을 것이다.
오랜 기간 병기창에서 근무하며 이런 자율기동병기가 인정받은 관리자 없이 기동을 시작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는 쿠란다스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리고 조심스레 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니츠마탄의 아공간을 발동시킬 준비를 하였다.
그 순간,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고, 기척을 전혀 느끼고 있지 못했던 쿠란다스는 흠칫 놀라 바깥을 바라보았다.
“아저씨! 그거 거기다 내버려두고 가요. 그거 불법절도라고요. 아실 만한 분이… 아흐…….”
바깥을 보니 웬 어린놈 하나가 자신 쪽을 보며 귀찮은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쿠란다스는 표정을 굳히며 칼을 쥐고 눈앞의 녀석에게 다가갔다.
인상착의를 보니 자신이 확인한 파레온이라는 녀석은 아니다. 사실 누구라도 상관은 없다.
이미 깊숙이 개입한 이상, 한 녀석 정도는 죽여도 괜찮을 거라 판단한 쿠란다스는 그대로 칼을 휘둘렀다.
시안은 진심으로 꼬여버린 자신의 상황을 보며 한숨을 팍팍 쉬고 있었다.
아까 파레온 남작이 말한 부분을 믿을 수 없어 다시 한 번 항상 들고 다니던 매뉴얼-간략판을 펼쳐 살펴보았지만 도무지 피할 수가 없었다.
“어허… 사람이 참 똑똑하시네.”
시안은 한숨을 쉬며 앞에서 친절하게 문을 열어준 사람이 있는 쪽을 향해 내달렸다.
제압만 하면 되니 이번 일로 사람을 죽이진 않을 것 같고, 위험할 것 같지도 않아 받아들였지만 이런 식으로 얽히는 건 피곤하다.
도착하니 한 아저씨가 구석에서 웬 인간 형태의 기계를 쓰다듬으며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걸 본 시안은 소름이 돋았다.
‘…변태 아냐?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양반이…….’
어쨌건 저 물품들은 이제부터 국가에 귀속된 물품이니 할 일을 해야 한다.
“아저씨! 그거 거기다 내버려두고 가요. 그거 불법절도라고요. 아실 만한 분이… 아흐…….”
시안이 외치자 안에 있던 아저씨가 흠칫 놀라며 자신을 쳐다보았다.
시안은 그래도 저 사람이 부끄러운 줄은 아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놀라는 걸 보니.
그런데 다가온 남자가 다짜고짜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닌가?
시안도 이 남자가 ‘아이고… 예, 그러십니까.’ 하면서 잡혀 들어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아까 칼질하는 실력을 보니 어디서 좀 놀다 오신 분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잠금’을 풀어낼 정도는 아니기에 시안에게 여유는 있었다. 보아하니 황금칼 영감보다도 좀 약한 것 같고, 옆에 이상한 거무죽죽한 걸로 자신을 옭아매는 사람도 없고… 이 정도는 시간이 좀 걸려도 두들겨서 제압하면 된다.
“무단침입, 국가 귀속 물품 절도, 가란-티아 폭행 혐의로 제압합니다, 아저씨?”
그러고는 칼집을 뽑아 들어 사정없이 휘두르기 시작했다.
뻐억! 툭! 빠악!
“컥! 크악! 컥!”
쿠란다스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자신이 휘두른 검을 피해낸 어린 녀석이 이해가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더니 자신에게 맹렬하게 검집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눈앞의 녀석이 특이한 힘을 쓰는 게 아니었다. 칼집에는 빛이 흘러나오고 있지도 않았고 속도와 힘 역시 특출 나다고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툭툭 하고 휘둘러 대는 저 칼집을 도무지 피할 수가 없었다. 처음 몇 대를 피한 것 말고는 정신없이 두들겨 맞고 있었다.
분명 티안의 세 그랑-반더들 중 하나는 아니었다. 그랑-반더의 숫자는 많지 않기에 자신처럼 숨겨진 그랑-반더가 아니라면 그 인상착의와 특징은 모두 파악하고 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보다 훨씬 윗줄! 그리고 아직 제 힘을 다 꺼내지도 않았다.’
최대한 피하면서 상황을 분석하던 쿠란다스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정체도 모르는 녀석에게 이렇게 두들겨 맞다니! 더 최악인 점은 이렇게 가다가는 곧 잡히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미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었다.
오기 전에 테른 자작은 죽이고 왔다. 이 일이 끝나고는 파레온 남작도 죽일 예정이었다. 혹시라도 억울하다고 티안 왕국에 말해서 조사대가 쫓아오게 되면 귀찮아진다.
고작 변방의 귀족 둘 정도야 영지전 중의 암살이라고 둘러대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그 전에 자신이 잡히면 무슨 의미란 말인가?
결국 우샤란 왕국의 소행이라는 것이 모두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죽게 되겠지. 불법 침입하다가 잡힌 그랑-반더를 살려 보낼 만큼 왕국 간의 사이가 좋지는 않다.
지금 이 상황이 티안의 함정인지 우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차피 죽게 될 것이란 게 밝혀지자 판단이 섰다. 이왕 죽게 될 거, 자신의 마지막 임무를 완수하고 이곳, 로가디스에 지옥을 열어주리라.
쿠란다스는 판단이 서자마자 온몸의 반데르를 모아 사방으로 퍼트렸다. 이에 시안은 살짝 물러났다가 휘적휘적 반데르의 폭풍을 흩어내며 귀찮은 표정으로 다시 다가왔다.
하지만 쿠란다스에게는 그 잠깐의 시간만으로도 충분했다.
자율기동병기를 기동시키는 제국어를 외치기에는.
“AKO-RAK-TA-SHE, A-RANKAL!”
그러자 구석에 있던 아란칼의 눈이 번뜩이며 적색 광채를 뿌리기 시작했다.
☆ ☆ ☆
<경고! 4단계 기동병기, 아란칼이 작동하였습니다. 현재 등록이 완료된 인물 검색 중… 없습니다. 등록되지 않은 모든 개체 제압에 들어갑니다.>
“미친!”
구석에 박혀 시안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크랑가’를 통해 편하게 바라보던 파레온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설마 침입자가 시동어를 알고 있으리라고는!
시동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저들에게 관리자가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자신은 2단계 이상의 인정을 못 받았기에 없는 것으로 취급된다).
관리자가 통제하지 않는 상황에서 제국시절 입력된 자율기동병기의 행동원칙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등록되지 않은 모든 생명체를 제압한다.>
여기서 제압이란, 죽인다는 뜻이다.
제국은 이런 식으로 7왕국의 모든 반더와 민간인들을 강제로 제국의 관리 시스템에 등록시키고 통제했다.
사실 등록하지 않아도 제국은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등록되지 않은 생명체는 ‘아란칼의 병기창’ 시스템을 발동시켰을 때 기동병기들의 추적을 받아 무조건 죽게 되었다.
죽는 게 두려우니 반군이 아닌 다음에야 모든 일반인들과 반더들은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 등록되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제국이 망한 후 모든 등록 데이터가 말소되었거니와 그 당시에 등록된 사람이 살아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그 말은 이제부터 저 4단계 기동병기가 맹목적인 살육을 위해 날뛰게 된다는 것이고…
자신이 알기로 아란칼은 그랑-반더 제압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궁극의 기동병기였다.
‘크랑가’가 말하길, 이 녀석이 만들어진 다음에야 라-시안 대륙은 굳이 제국 무장단체를 파견하지 않아도 완전히 제국의 통제 아래로 들어왔다고 한다.
칼-굴족과의 전쟁에서 도움이 되지 않아 안 가져간 것이지, 도움이 되었다면 이런 곳에 있을 녀석들이 아니었다.
그 말은 이제부터 그랑-반더 열 명이 생명체는 보이는 족족 죽여버리기 위해 난동을 부릴 거라는 뜻이었다.
여기까지 판단이 선 파레온은 ‘크랑가’에게 부탁해 영주성으로의 공간이동을 사용했다.
시안이라는 자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어서 자신들의 식솔들을 대피시켜야 한다. 최대한 여기서 멀리…….
☆ ☆ ☆
황급하게 돌아온 파레온은 서둘러 식솔들부터 대피시키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라카-둠 님! 서두르십시오! 이제 이곳은 지옥이 될 겁니다. 도망가야 해요!”
하지만 라카-둠의 표정은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그리고 자신을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라카-둠 님?”
“애송아, 넌 다 괜찮은데 애송이라서 문제야. 마무리를 잘해야지. 내가 한마디 더 해줬었잖아.”
그제야 파레온은 급한 와중이라 미처 기억해내지 못했던, 라카-둠이 자신에게 했던 세 마디 중 마지막 한 마디가 떠올랐다.
‘그리고 절대로 혼자 도망오지 말아라. 거기 있어. 나중에 니 애인들 앞에서 두들겨 맞기 싫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