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아란칼>
<그랑-반더가 체스의 고수라면 나는 체스의 룰을 만든다.>
-500년 전의 파-하리쟌,
여섯 뿔의 수집자, 킬라데팔
☆ ☆ ☆
원래 자율기동병기들은 죽이기 전에는 말 한마디라도 해주었다.
미등록 생명체 발견, 말살. 이런 식으로 딱딱한 기계음이라도.
하지만 눈앞의 이 녀석들은 그런 것도 없었다.
시안을 보자마자 눈에서 붉은빚을 뿜으며 한번 검색을 끝낸 녀석들은 시안이 등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판명되자마자 눈으로는 끊임없이 시안에 대한 전투관련 정보를 수집하며 코어에서 맹렬한 에너지를 뿜어내곤 달려들었다.
최상급의 탈릭 스톤만을 모아 만들어낸 코어에서는 무한대에 가까운 에너지가 공급되고, 에너지는 곧바로 반데르와 엑사르로 변형되어 제국의 초고위급 기술들의 결집체인 법진에 공급되어, 가동 전에 기계에 불과하였던 아란칼은 훌륭한 살육병기로 탈바꿈되어 시안을 찢으려고 들었다.
저번에 봤던 ‘카르마타’는 눈앞의 병기에 비하면 정말 아이들 장난감에 불과했다.
저것들은 카르마타보다 훨씬 윗줄의 기술과 이적, 탈릭 스톤의 결정체이다. 기계주제에 저번에 봤던 황금칼 영감 하나하나랑 맞먹고 있었다.
이 녀석들이 자신이 쿨란 남작령에 도착했을 때, 절벽 안에서 느껴졌던 그 녀석들이리라.
달려오는 아란칼들을 바라보는 시안은 고작 끌려가기 싫다고 이런 기묘한 것을 발동시킨 이상한 아저씨도, 저것들이 기동하자마자 잽싸게 도망간 파레온 남작도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차라리 다행이다.
눈앞의 아저씨는 시동어를 외친 후 굴욕적인 죽음을 택할 수 없다고 반데르를 역행시키며 피를 뿜으며 죽었고, 파레온 남작은 잽싸게 도망갔기에 지금 반경 10킬로미터 내에 생명체라고는 하나 없다.
‘그래도 이번에는 살인은 안 해도 되겠구먼.’
여기까지 생각한 시안은 요즘 너무 힘쓸 일이 많아졌다고 투덜거리며 심장 쪽에 웅크려 있던 기운을 몸 전체로 뿜어내었다.
내면의 무언가가 바뀌며 귀찮아하던 시안의 입꼬리가 즐겁다는 듯 위로 끌려 올라갔다.
파가가각!
시안이 피한 자리로 불타오르는 듯 보이는 아란칼의 오른손이 직격하였고, 단단하기 그지없는 격벽은 마치 두부처럼 파여 나갔다.
‘이야… 이 장난감들 정말 꽤 하잖아.’
시안은 이리저리 피하며 즐겁다는 듯 쳐다보았다.
사실 아까 그 절도범이 주머니에 담아가는 것들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정말 장난감 수준이었기에.
하지만 이 녀석들은 꽤나 강했다.
가져갈까 고민도 해보았지만 자신은 이걸 멈추는 방법도 몰랐고, 관리할 자신도 없었기에 오늘 마음껏 구경하다가 폐기처분하기로 했다.
시안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순간 아란칼의 코어가 맹렬하게 가동하더니 엑사르로 변환되어 오른쪽 눈을 향해 치고 올라갔다.
이윽고 오른쪽 눈으로 엑사르가 터질 듯이 공급되었고, 이윽고 아란칼의 오른 눈에서 적광이 아닌, 시린 듯이 푸르른 광채가 일직선으로 시안을 향해 쏟아져 나왔다.
“이야… 이건 또 뭐야. 하하!”
궁금해서 한 대 맞아본 시안은 즐겁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색만 시린 것이 아니라 정말로 시린 색이었다. 상대의 움직임을 묶어두기 위한 빙결 이적이었던 것이다.
그랑-반더 전용이기에 움직임을 묶어두는 정도로만 사용하는 것이지, 일반 마스터가 맞았다면 맞은 부위부터 얼면서 터져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시안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고 아란칼은 이에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안구로 시안을 살피며 다음 공격을 준비해 나갔다.
이윽고 아란칼의 보조 코어 중 세 번째 척추에 위치해 있던 코어가 빛나면서 아란칼의 움직임이 급속도로 빨라졌다.
<가속> 이적이었다. 전투 중에 상대하기는 꽤나 까다로운 이적이라고 들었는데 이 녀석들은 숨 쉬듯이 발현해내었다.
이적은 하나만 발동된 것이 아니었다.
척추 부위에 올올히 박혀있던 일곱 개의 보조코어가 모조리 빛을 발하며 각기 다른 보조 이적을 자신의 몸에 걸어갔다.
<강화>, <압축>, <용해>, <증강>…….
그러고는 열 기 모두가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전투력을 지니고 달려들었다.
달려드는 열 기의 아란칼을 보며 시안은 너무나 즐겁다는 듯 웃었다.
아란칼의 주요 기능 중 하나는 상대에 대한 정확한 정보수집 및 분석이다.
분석된 정보를 모든 자율기동병기들이 공유함으로써 상황에 맞는 최적화된 대응을 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엑자일-대법도회가 엄청난 탈란트를 들여 가동할 수 있는 반데르 측정 법진을 비롯한 각종 센서들을 아란칼들은 숨 쉬듯이 발동시키며 끊임없이 사방에서 시안의 육체를 살피며 정보를 수집하였다.
[…반데르 측정수치…]
[…이동속도…]
[…순간 충격량…]
[…가속속도…]
[…반데르 회전계수…]
재미있다는 듯 자신들의 공격을 살피며 피하는 시안을 사방에서 입체적으로 살피던 아란칼들은 곧 분석 결과를 내어놓았다.
[분석불가]
[정보 부족: 물리 상수 불규칙 상태. 반데르 계수 불규칙 상태. 파악 불가]
물리적으로 변하지 않기에, 상수라 불리는 수치들이 끊임없이 몸속에서 변동하고 있는 상태.
그렇기에 아란칼들은 상대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아란칼들은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상수 불규칙 상태로 미루어 <파-하리쟌>등급 개체로 추정]
[등록되어 있지 않은 위험등급 ‘F’ 급 개체, 즉시 제압 필요]
[현재 전력으로 제압 불가. PLAN-Z로 이행]
[<공허> 가동 준비]
☆ ☆ ☆
라-반더가 희귀한 존재이긴 하지만, 제국이 대륙을 지배하던 시기가 어언 300년. 당연히 그 시절에도 라-반더는 파-하리쟌이라 불리며 존재하고 있었다.
태양 사냥꾼, 기레인
여섯 뿔의 수집자, 킬라데팔
별 파괴자, 로바노튼
신의 아들, 콘-라드
무장이 푸대접받고 법도사가 우대받던 그 시절. 아직 반데르에 대한 존재가 증명되지 않던 그 시절.
십오인의 대법도사들이 제국을 이끄는 그 시절에도 300년간 단 넷만이 존재하던 파-하리쟌들은 자신 위에 아무것도 없음을 증명하며 당당하게 세상을 활보하였다.
당연히 제국은 그들을 연구하려 했고 그중 한 명은 제국을 습격하는 하리쟌을 사냥하는 수호 무장, 여섯 뿔의 수집자, 킬라데팔의 도움을 받아 파-하리쟌에 대한 연구에 들어간다.
그 비밀을 밝힌다면, 강대한 힘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연구는 생각보다 더디게 진행되었다. 킬라데팔이 연구에 싫증을 느낄 만하면 뛰어나가 하리쟌 사냥을 하고 다녔기 때문이기도 하고, 기존의 법칙이나 연구방식으로는 입증되지 않는 요소들도 너무나 많았다.
애초에 법도사들이 발휘하는 힘이 너무나 강대하여 반더에 대하여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기존의 연구자료들이 그 당시에 모자랐던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파-하리쟌에 대하여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제국은 끝없는 연구를 통하여 몇 가지 사실을 알아내고 논문으로 정립하였다.
그중 가장 논문의 요약은 다음과 같다.
<파-하리쟌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육체 내부의 물리규칙과 상수, 계수가 모조리 재정립되고, 이를 바탕으로 외부에 영향을 미친다.>
-재정립되기는 하지만 파-하리쟌의 마음대로 결정되지 않으며 재정립도는 파-하리쟌의 경지와 성향, 특성에 따라 다르다.
-법칙에서 벗어난 육체는 외부의 법칙에도 영향을 미친다.
파-하리쟌의 육체는 더 이상 만인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그들의 몸은 외부와 격리된,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는 또 다른 세계가 된다.
무장들은 두꺼운 근육과 많은 양의 반데르, 날카롭게 벼린 감각기관을 얻기 위해 끝없이 노력한다. 그런 것들이 있어야 남보다 더 강한 힘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파-하리쟌은 그렇지 않다.
가냘픈 팔다리에도 산을 부술 만한 근력이 존재했고, 한 푼의 반데르로도 성을 박살 낼 수 있는 위력을 만들 수 있다. 작은 산만 한 하리쟌들이 밀고 들어와도 그 자리에서 밀리지 않고 맨몸으로 버티는 말도 안 되는 이적을 보인다.
모두 그들의 몸이 이미 이 세상 규칙에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세상에서 한 발짝 벗어난 존재들이 파-하리쟌이다.
이 놀라운 결과를 발견한 대법도사들은 유사시 이 말도 안 되는 초인을 제압할 방법을 찾기를 원했다.
내버려 두면 세상에 연연하지 않는 그들과 엮일 일은 없지만 항상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하는 것이 법도사들의 철칙이니까.
대부분의 방법이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어 사장되었고, 또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 방법 또한 법도사들이 우려한 만에 하나의 사태가 벌어진 적이 없기에 이제까지 사용된 적은 없다.
그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된, 하지만 사용할 기회가 없어 아란칼 속에 내장되어만 있던 방법 중 하나가 PLAN-Z이다.
☆ ☆ ☆
‘이건 뭐지?’
시안은 공격하던 녀석들의 몸에서 갑자기 이상한 엑사르의 흐름이 느껴지자 유심히 살폈다.
이제까지 저 기계의 전신에 엄청난 에너지를 공급하던 코어의 흐름이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전신으로 뿜어지던 막대한 양의 엑사르가 코어 내부에 있던 법진으로 엄청난 속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란칼들이 끊임없는 공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란칼의 척추 부위에 박혀 있던 일곱 개의 보조 코어가 과부하가 걸릴 정도로 작동하며 전신에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할 듯하였다.
엄청난 기술력과 탈릭 스톤을 사용하여 만들어진 보조코어였지만 그랑-반더에 해당하는 전투력을 내기 위해 막대한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는 아란칼의 움직임을 핵심 코어 없이 따라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 증거로 빠르게 시안을 포위하며 공격하던 아란칼들의 움직임은 조금씩 느려지고 과부하로 인해 법진의 효율성 역시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란칼들은 그런 것을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시안이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모든 관절과 법진에 과부하가 걸릴 정도로 더욱 맹렬하게 가동하며 공격을 이어갔다.
어차피 PLAN-Z는 기본적으로 이를 실행하는 모든 기체의 폐기를 전제로 실행되니까.
아란칼의 본체들은 코어를 중심으로 대법진이 작동을 준비하는 동안 파-하리쟌을 잡아두기만 하면 자신의 임무를 끝낸 것이다.
설령 기체가 모두 박살 나도 대-이적만 발동된다면 상관없고, 코어 역시 대법진이 가동된 후 과부하로 인해 폐기될 것이다.
[대이적법진 활성화 준비 완료]
[1급 대이적, <공허> 발동]
아란칼들의 센서에 법진의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정보가 입력됨과 동시에 시안을 둘러싸고 있던 열개의 코어가 폭발하듯이 터져 나갔다.
제국 시절 법도사들의 계산에 따르면 ‘킬라데팔’을 제거하는 데 최소한 일곱 개 이상의 코어를 중심으로 이적마법이 발동하여야 한다고 예측하였다.
열 개 모두 발동하였으니 아란칼들은 자신의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한 것이다.
코어가 터진 자리에는 맹렬하게 회전하고 있는 대법진이 찬연하게 빛을 뿜어내었고 대법진이 발동하고자 하는 대이적, <공허>가 세상의 법칙을 비틀며 시안을 중심으로 발동되었다.
☆ ☆ ☆
<공허>의 원리는 아주 간단하였다.
<공간을 비틀어 대상 주변의 공간을 현 차원에서 분리하여 다른 차원으로 던져버린다.>
원래 1급 이적은 대인 공격용이 아니다. 보통 덩치가 작은 산만 한 여섯 뿔 이상의 하리쟌을 제압하거나 지형을 바꾸거나 적국의 도시를 한 번에 지워버리기 위해 사용하는 이적.
법도마학이 극도로 발달한 제국에서도 1급에 해당하는 대이적은 쉽사리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또 실제로 필요한 상황이 많지도 않았다.
하지만 파-하리쟌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며 그 실체에 놀란 법도사들은 파-하리쟌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1급 이적의 사용이 필요하겠다고 판단하였고, 그중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강구해내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대-이적이 <공허>이다.
<공허>는 세상과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기에 물리력이나 원소력, 반데르나 엑사르에 대한 저항력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파-하리쟌들을 상대하기 위해 대법도사들이 제작한 마법이다.
<파-하리쟌에게 영향을 미치기 힘들다면, 파-하리쟌이 속한 공간 자체를 일그러트려 다른 차원으로 던져버린다.>
어느 차원으로 갈 것인지는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자신들의 앞에서 치워버리기만 하면 되니까.
사실 한 번 정도 공간을 비틀고 찢는 것은 1급 대이적이라고 하기엔 다소 부족한 감이 있다. 그리고 그 정도로는 파-하리쟌을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대법도사들은 면밀한 계산 후 공간을 적어도 일곱 번은 접고 일그러트리고 재배치하여야 킬라데팔을 쫓아낼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렇게 일곱 번 공간을 으스러트리고 비틀어 상대를 현 차원에서 배제시켜버리는 새로운 1급 대이적 <공허>가 만들어졌다.
☆ ☆ ☆
코어 하나당 한 번씩. 일곱 개면 일곱 번의 공간 재배치가 이루어진다.
아란칼에 탑재되어 있던 코어의 수는 열 개.
순식간에 시안을 중심으로 열 번의 공간 재배치가 이루어졌다.
단순히 세 번 더 접은 것이 아니다. 한 번 공간을 접을 때마다 그 위력은 두 배씩 강해진다.
즉, 대법도사들이 고안한 기존의 <공허>보다 여덟 배 더 강한 이적이 시안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일어난 변화는 크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 조용하게 진행되어 아란칼들이 하나둘 작동을 멈추고 쓰러지는 소리가 더 요란하게 들렸을 정도이다.
시안을 중심으로 주변 공간이 살짝 물결처럼 일렁이고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그 물결이 파도처럼 시안을 덮어갔다.
한 번… 두 번… 세 번…
눈 깜빡할 사이, 정말 순식간에 공간이 짜르르 하고 흔들리더니 열 번의 물결이 중첩되었고 시안의 모습이 그 물결에 가려 천천히 흐려졌다.
이윽고 흐릿해지던 시안의 모습은 완전하게 사라졌고, 시안이 사라지자 그 주변을 덮었던 일렁임도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코어가 폭발하며 이적이 발동된 지 단 1초도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지막 아란칼은 꺼져가면서도 마지막 기계음을 내뱉었다.
[미등록… 위험등급 ‘F’ 개체, 배제… 완료…….]
만약 사람이었다면 굉장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쓰러졌을 모양새를 취하며 아란칼은 앞으로 스러졌다.
그 순간.
빠지직!
허공에서부터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빠작. 와그득. 우그적.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지더니 이윽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푸욱 하고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한 자루의 칼끝이었다.
손가락 한마디 정도 튀어나온 칼끝은 이리저리 틈을 비집으려는 듯 사방으로 움직였고 그에 맞추어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윽고 찢어지는 소리까지 나기 시작했다.
찌이익, 쯔어걱, 쫘악.
어느새 사람 팔뚝만큼 튀어나온 칼은 이리저리 사방을 휘저으며 허공의 어두운 틈새를 넓혀 나갔고, 이윽고 사람이 지나다닐 만큼 커지자 그 틈을 통해 불쑥 사람이 튀어나왔다.
“와우! 색다른 경험이네.”
탄성을 지으며 시안이 빠져나왔고 찢어졌던 공간은 빠른 속도로 그 벌어진 틈새를 메꾸기 시작해 곧 허공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게 되었다.
허공이 완전히 메꿔진 것을 본 시안은 주변을 둘러보았고 아란칼들이 모두 쓰러진 것을 보고 힘을 다시 심장에 밀어 넣고는 주변정리를 위해 움직였다.
☆ ☆ ☆
“음… 여기 있던 것 같았는데…….”
시안은 이상한 아저씨가 가져왔던 상자를 찾기 위해 주변을 뒤적거렸다.
그 안의 물품들은 국가에 귀속된다고 하여 자신에게 권리가 없다. 도둑질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기묘한 빛을 내뿜으며 주변의 물체들을 흡수하는 그 조그마한 상자는 자신이 가져도 될 것 같았다.
이윽고 격벽 안쪽에서 상자를 찾은 시안은 아까 절도미수범이 어떻게 상자를 다루었는지를 떠올렸다. 이 상자를 가지려면 안에 있는 것들을 모두 비워야 꼬리가 남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까 상자가 먹어치우던 기묘한 병기들은 파레온이 국가에 귀속한다고 한 물건. 그것들까지 삼키게 되면 탈이 난다.
그렇게 되면 상자까지 가지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기에 병기들을 고스란히 돌려놓고 상자만 꿀꺽하기로 했다. 사람이 과욕을 부리면 안 되는 법이다. 그리고 시안은 그런 쓸모없는 장난감에는 사실 관심 없었다.
아까 그 아저씨가 하던 대로 상자를 작동시키니 안쪽에서 붉은빛이 마구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여기 들어오기 전 절벽 앞에서 아저씨가 칼을 꺼낼 때도 붉은빛이 사방으로 뻗어 나왔다.
이제 곧 사방으로 기묘한 병기들이 가득 차게 되리…….
‘응?’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분명 뒤에서 지켜본 대로 똑같이 했는데.
이리저리 상자를 만지고 반데르를 운영해보아도 붉은빛만이 뻗어 나올 뿐 안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이러면 곤란하다. 자신에게 절도 혐의가 몰릴 것이다. 이곳에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 것은 자신뿐이 없었기 때문이다.
졸지에 절도범이 되게 생긴 시안은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고민에 들어갔고, 이윽고 현재 상황에서 가장 최선의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 ☆ ☆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공간이동으로 영주성으로 돌아온 후 라카-둠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도저히 안심할 수 없었기에 파레온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식솔들에게 대피할 준비를 시키고 있었다.
‘크랑가’를 통해 그쪽의 사정을 살필 수 있다면 좋겠지만 하루에 세 번의 공간이동을 사용하여 충전되어 있던 엑사르를 모두 사용했기에 더 이상 ‘크랑가’는 작동하고 있지 않는 상태였다.
재충전이 완료되려면 꼬박 하루는 더 있어야 했기에 파레온은 눈과 귀가 틀어막힌 느낌이었다.
불안한 느낌이 들어 대피하면서도 힐끔힐끔 절벽 쪽을 바라보던 파레온의 눈에 이상한 광경이 잡혔다.
“어… 어어어?”
“저게 뭐야?”
자신만 본 것이 아닌지 주변에 있던 모든 가솔들이 눈을 비비며 저 멀리 있는 절벽 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어떤 사람이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보고 외쳤다.
“절벽이… 절벽이 무너진다!”
정확히 말하면, 절벽이 포함되어 있는 산자락이 통째로 무너지고 있었다.
☆ ☆ ☆
“후후, 이러면 들킬 일이 없겠지.”
어설프게 무너트리면 파고들겠다고 덤빌 우려가 있기 때문에 힘을 한번 풀고 아예 산째로 폭삭 무너트려 버렸다. 어차피 병기창 안에 남은 것도 없었기에 거리낄 게 없었다.
시안의 목에는 이상한 아저씨에게 얻은 상자가 줄에 꿰여 목걸이 형태로 걸려 시안의 옷 속으로 늘어져 있었다. 워낙 작은 상자였기에 목걸이 형태로도 들고 다닐 수 있었다.
“니… 츠마탄… 니츠마탄이라. 후후. 후후후후. 후하하하하하!”
상자에 쓰인 글자를 읽고 그 이름이 <니츠마탄>이라는 것을 알아낸 시안은 이 녀석이 가진 놀라운 기능을 생각하며 절로 기분이 좋아져서 크게 웃었다. 이런 녀석을 얻게 될 줄이야!
아까 그런 장난감 병정이야 관심 없었지만 이 녀석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하리라. 자신의 삶의 질 향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모든 일이 정리되고 나니 시안은 파레온 남작이 생각났다. 그러자 좋아졌던 기분이 다시 아래로 직하강하기 시작했다.
자신 정도는 되니까 별 탈 없이 살아온 것이지, 아까 그 녀석들은 내버려두었으면 티안의 절반 정도는 파괴하고도 남을 녀석들이었다.
아까 파레온 남작의 엄청나게 빠른 도주속도를 볼 때 자신을 습격한 녀석들이 얼마나 무서운 녀석들인지 알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자신과 같이 죽음을 불사하는 것이야 바라진 않았지만 그 녀석들이 위험한 것을 알았다면 자신을 데리고 도망가려는 시늉이라도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 열 받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보고는 막아 달라고 하고서는 무슨 일이 터지니까 잽싸게 도망가다니!
시안은 어느 정도 두들겨 주는 것이 알맞을지 고민하며 갑작스런 오한에 몸을 떠는 파레온 남작이 있는 쿨란 남작령으로 몸을 날렸다.
☆ ☆ ☆
우샤란 왕국, 지방 소재 라-샤르-로아가 존재하는 크로마타 지역.
우샤란 왕국의 라-샤르-로아는 철저하게 드미트라 왕가에 의해 관리되며 민간인들의 출입은 철저하게 통제되어 있었다.
그런 라-샤르-로아를 관리하는 우샤란 왕국 소속 2급 법도사, 타르니안은 갑자기 작동하기 시작한 라-샤르-로아를 보며 눈썹을 치켜 올렸다.
분명 오늘은 라-샤르-로아의 운용 예정이 하나도 잡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류가 생겼는지 확인하기 위해 아래 법도사들과 기술직들을 불러 모으려던 중, 라-샤르-로아에서 광채가 폭발하며 엄청난 양의 군수물자와 무수한 숫자의 기계병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기계병기들은 타르니안에게도 익숙한 생김새였다. 타르니안은 예전에 ‘아란칼의 병기창’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엄청난 숫자의 켈-루펀과 카누안을 보며 타르니안은 쿠란다스 경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하였다.
그가 이번 임무로 들고 간 니츠마탄의 아공간에는 특수한 기능이 있다.
아공간의 주인으로 인식되어 있는 사용자의 심장이 멎게 되면, 그 순간 니츠마탄의 아공간 내부 공간은 미리 지정해놓은 라-샤르-로아와 연결된다. 그리고 그 안에 있던 모든 물품들이 지정된 라-샤르-로아를 통해 바깥으로 쏟아져 나오게 된다.
혹시라도 니츠마탄의 아공간 주인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거나 적군에게 잡혀 그 안에 들어 있는 엄청난 양의 군수물자가 강탈당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대법도사 니츠마탄이 고심하여 추가한 기능이다.
아공간을 잃을지라도 그 안에 있는 막대한 군수물자까지 몽땅 빼앗기는 것보다는 낫다.
이 기능이 발동하였다는 것은… 쿠란다스 경이 사망하였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타르니안은 동시에 쿠란다스 경이 훌륭하게 병기창 탈취 임무를 완수하였음도 깨달았다. 저런 엄청난 수의 켈-루펀과 카누안은 자신들의 병기창에는 존재하지 않는 숫자이니.
쿠란다스 경은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어 우샤란의 미래를 쟁취해낸 것이다.
타르니안은 즉시 아랫사람들을 불러 라-샤르-로아 근방 전체를 통제하도록 하였고, 드미트라 왕가에 연락을 넣었다.
그의 목숨을 헛되이할 수 없다.
저 병력들을 고스란히 운용하는 데 성공한다면… 더 이상 콘 왕국과 드잡이질 하고 있을 이유도, 역겨운 타란 왕국 놈들과 손잡고 있을 이유가 사라진다.
그것이 쿠란다스 경도 바라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