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셀린 경의 고민>
쿨란 남작령의 모든 인원들은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예의 그 산자락이 무너진 사건 이후 로가디스 연합은 제풀에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로가디스 연합 영주들의 구심점을 하였던 테른 자작이 시체로 발견된 후, 이것이 파레온의 소행이라고 오해한 로가디스 연합의 영주들은 안 그래도 밀리던 상황에 두려움으로 가득 차서 항복을 하였고, 파레온은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재산을 챙겨주고 쫓아낸 후 그 자리를 자신이 믿을 만한 인재로 채워 넣었다
그 결과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로가디스 지방은 파레온의 지휘 아래 빠른 속도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단, 파레온 남작의 상태만 제외하고.
“…괜찮냐? 붓기는 좀 빠졌고?”
“…괜찮습니다. 딱히 저도 할 말이 없으니까요. 차라리 이렇게라도 분이 풀려서 다행이군요.”
라카-둠이 얼굴을 포함해 전신이 퉁퉁 부은 파레온을 보며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붓기는 오래가 봤자 일주일이 지나면 없어지기 마련인데 그날 얻어맞은 붓기는 어찌 된 일인지 2주가 지난 지금에도 쉽사리 빠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분이 풀려 다행이라는 파레온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날 자신이 챙겨야 할 자들이 떠올라 갑작스럽게 영주성으로 돌아왔지만 자신이 한 짓은 맞아죽어도 할 말이 없는 일이다.
오히려 자신만 두들겨 패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자신이 두들겨 맞는 동안 리안나 경이나 로이나가 덤벼들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다행히도 라카-둠 님이 자신 혼자 두들겨 맞을 수 있도록(?) 주위사람들을 잘 말려주셨다.
다 두들겨 맞은 후 시안은 자신에게 절벽에서의 상황설명을 해주었다.
시안이 말하길, 싸우던 와중 절벽이 무너져 탈출하기 급급하여 절도범이 훔쳐간 물건은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도 아란칼이란 녀석들까지 모두 묻혀버렸으니 그 녀석들까지는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하였다.
파레온은 비록 그 안에 들어있는 물품이 아쉽기는 하지만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안의 물건은 자신이 지키기에는 너무 과분한 것들이었다.
실제로 그랑-반더라는 강대한 존재가 그 물건을 노리고 침입하지 않았는가?
들키지 않고 숨길 수 있으리란 자신의 생각은 오만한 판단이었다.
추측하건대 만약 시안이 해결해주지 않았다면 모조리 빼앗긴 후 자신의 목숨조차 위험했을 것이다.
정체불명의 그랑-반더는 그 물건에 대해 아는 사람이 더 있는 것을 반기지 않았을 테니까.
아직도 안타깝기는 하였지만 그것들이 남의 손에 들어가지 않고, 1구역에 있던 물품들이라도 미리 영지에 옮겨 놓은 것을 위안 삼기로 하였다.
“지금쯤 수도로 가고 있겠구나, 그 녀석은.”
“네. 정말 세상이 넓더군요. 그런 자가 있으리라고는…….”
파레온은 지금쯤 수도로 올라가고 있을 시안을 떠올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아란칼의 봉인만 풀면 모두 자신의 발아래 들어오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은 자신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강대한 자들도 너무나 많았다.
자신이 믿던 것들은 단 한 명의 손에 모조리 산 아래로 매장되고 말았다.
지방의 조그마한 영지에서 발버둥 치다 보물을 손에 넣으니 꿈을 꾸었던 것일까?
세상은 이미 준비된 자들이 너무나도 많았고, 그러한 자들조차 앞으로 달려 나가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애송이, 너 지금 쫄았냐?”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파레온을 보고 라카-둠이 비웃었다.
그러자 파레온은 표정을 바꾸며 씨익 웃었다.
“아닙니다. 물론 이번 일로 충격을 받긴 했습니다만…….”
“했다만?”
“좋은 자극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저에겐 저를 도와줄 동료와 연인들도 있고 라카-둠 님도 계시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습니다. 이제야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겠지요.”
그 말을 들은 라카-둠도 웃으며 대답했다.
“좋구먼, 애송이 영주. 그래, 지금부터 잘하면 되는 거야. 지금 가진 것만 해도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니까.”
“네. 앞으로 바빠지겠군요. 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라카-둠과 파레온이 웃으며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도중 로이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영주님, 수도에서 사신이 왔습니다.”
“음? 무슨 일로?”
“왕권 이양전이 끝났습니다. 이제는 나라샤 쿤 티안 1세가 되겠군요.”
“……!”
☆ ☆ ☆
시안이 수도에 도착하였을 때는 축제분위기였다.
크라단 왕가가 저물고 나라샤 왕가가 새로이 왕권을 이어받았다.
백성들은 즐거움에 가득 차 있었다.
새로이 바뀐 그들의 왕은 이번 왕권 이양전에서 그 능력을 여실히 입증하였다. 이제 그 능력으로 티안을 이끌어 주리라.
길을 지나오며 왕가 이양전이 끝났음을 들은 시안은 케르벨 백작이 충격 받지 않았을까 걱정하며 저택으로 돌아왔지만 케르벨 백작은 생각보다 큰 충격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괜찮단다. 나는 현재의 왕가가 저무는 것을 걱정한 것이 아니란다. 나도 티안의 사람이니까. 강한 왕가는 언제나 환영이지. 단지 나는 나라샤 후작의 과격함을 걱정하여 많은 피가 흐를 것을 걱정했을 뿐이란다.”
오히려 케르벨 백작은 자신을 걱정해주는 시안을 안심시키며 말하였다.
실제로 케르벨 백작의 걱정과는 달리 많은 피가 흐르지는 않았다.
나르샤 후작 측이 상당히 조심스럽게 행동한 데다 이상할 정도로 리안 경과 3근위기사단의 통제를 귀족파 측이 잘 따라 주었기 때문에 정도를 넘는 사건은 크게 발생하지 않았다.
과격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세력 차와 기가 막힌 묘수를 사용하는 나라샤 후작에게 서서히 압도당하던 왕당파 측은 더 비참해지기 전에 왕권을 양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양도 무난하게 이루어졌다.
대세의 흐름이 자신들을 비켜간 것을 깨달은 왕당파는 이번 세대는 나라샤 후작과 귀족파에게 양도하고 웅크리기로 결정했다.
왕당파와 귀족파의 경쟁은 끝났다. 어차피 새로이 왕당파가 된 나라샤 후작 일파도 기존의 왕당파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이제는 서로를 인정하며 급변하는 흐름 속에 자신들의 실리를 챙길 때이다.
그리고 시안은… 당연하게도 왕권의 이양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시안의 관심은 자신이 없던 두 달 동안 생긴 다른 재미있는 사건으로 향했다.
“셀린 경, 무슨 일 있었습니까?”
수도로 돌아온 후 오랜만에 셀린 양을 만난 시안은 셀린의 초췌한 얼굴을 보고 질문을 던졌다.
시안은 외부에 대한 인간 감정 인지기능, 즉 ‘눈치’가 굉장히 떨어지는 편이지만 그런 자신이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셀린은 고민에 가득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후… 왔니……. 요즘 아주 미치겠다.”
셀린은 오랜만에 복귀한 시안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시안이 없는 동안 자신에게 생긴 일을 주저리주저리 말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들은 시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셀린 경을 죽자고 쫓아다니는 남자가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후… 그렇다니까.”
‘…도발인가, 지금?’
시안은 셀린 경이 염장을 지르는 것인지 헷갈렸지만 진심 어린 표정을 보고 조금 더 대화를 진행하기로 했다.
객관적으로 셀린 경은 미인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고, 집안에, 스스로의 능력까지 갖추었기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요? 음… 너무 못생겼나요?”
“아니… 생기긴 엄청 잘생겼지. 거의 리안 경 급이야.”
정말 엄청나게 잘생겼다는 뜻이었다. 일단 외모는 패스.
“음… 그러면… 엄청 약하다든가……. 셀린 경 입버릇이 자기보다 강한 남자랑 사귀겠다는 거였잖아요.”
“…그랬으면 너한테 이 고민을 하러 왔을 거라고 생각하니?”
시안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셀린 경의 성격상 자신보다 약한 녀석이 귀찮게 쫓아다닌다면 지금까지 사지 멀쩡하게 걸어 다니고 있을 리가 없다. 셀린 경보다 강하니까 아직까지 그 스토킹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것저것 질문을 해보던 시안은 지금 셀린의 고민상담이 염장이라고 판단을 내렸다.
“음… 정리해보면 잘생기고 키도 크고 능력도 좋고 무력도 강하고 돈도 많고… 그런 뜻이군요? 몰락귀족에 용병이긴 하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으실 테니.”
시안이 심사가 불편한 듯이 말하자 셀린은 한숨을 쉬었다.
“야, 너 왜 제일 중요한 거 안 물어보는 거니. 성격을 안 물어봤잖아, 성격.”
“……?”
그제야 시안은 자신이 그 남자의 성격을 물어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아… 음… 그렇다면 설마…….”
“그래, 정말 어마어마한 녀석이지. 후… 살다 살다 그런 놈은 본 적이 없어.”
성격 나쁜 미친개가 자신을 죽자고 쫓아다닌다는 것, 그것이 셀린 경의 진정한 고민이었다.
셀린 경은 그간 일어난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라샤 후작은 시안이 수도를 떠나는 즉시 전국적으로 왕당파에 대한 압박을 개시하였다.
단기간에 빠르게 몰아쳐야 했기에 나라샤 후작 진영은 넘치는 재력을 바탕으로 전국 각지에서 용병을 고용하였고, 그중 특출 나게 뛰어나다 싶은 용병은 수도 쪽으로 불러들여 왕당파 진영을 압박하였다.
셀린 경을 쫓아다니는 그 녀석, 쿤타리안은 그때 로아-티안으로 입성하였다.
이상하게 쿤타리안이라는 자의 행적은 잘 밝혀져 있지 않았고, 그의 이름이 퍼지기 시작한 것은 반년도 채 되지 않았다.
로가디스의 위쪽 지역에 위치한 왕당파의 네벨 자작과 귀족파의 쿠논 자작의 국지전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그는 세력적으로 명백하게 우세하던 네벨 자작의 진영을 홀로 분쇄하며 쿠논 자작을 단신으로 승리로 이끌었다.
그 후 쿤타리안은 귀족파 진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전국 각 지역의 귀족파 진영을 승승장구로 이끌었다.
딱히 그가 귀족파 진영에 연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귀족파 진영이 재력적으로 우세했기에 쿤타리안에게 더 큰돈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쿤타리안은 수도로 올라오기 바로 직전, 티안 왕국의 마스터 중에서도 상위권에 위치하는 크라상 자작을 열 합도 되지 않아 패퇴시킴으로써 순식간에 유명해졌다.
그가 유명해지기 시작하면서 뒷조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이윽고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그의 나이가 겨우 17살에 불과하다는 것! 게다가 엑사르와 반데르를 동시에 다룬다는 것!
지원도 뒷배도 없는 용병생활을 하면서 겨우 열일곱 나이에 크라상 자작을 꺾을 정도의 강함을 이루어내다니!
그의 나이를 들은 사람들은 쿤타리안이 티안의 네 번째 그랑-반더가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아 칭송했다.
이에 나라샤 후작은 발 빠르게 거금을 주고 쿤타리안을 고용하여 수도로 불러들였고 그렇게 수도로 올라온 쿤타리안은 제 한몫을 톡톡히 해내었다.
아니, 너무 잘 해내서 문제였다.
시비를 걸고 박살을 내라는 나라샤 후작의 요구를 그는 너무나도 잘 수행하였다. 박살을 내고, 뼈를 부러트리고.
거기다 시비는 어찌나 잘 거는지. 바위 같다는 귀환자 칼-티안이 그의 도발에 넘어가 두들겨 맞았을 정도이다.
키라인 검공을 나라샤 후작이 견제하고 있었기에 아무도 쿤타리안을 막을 수 없었다.
엘루아 거리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난동을 부리던 쿤타리안을 셀린 경이 마주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엘루아 거리 한 구역이 박살 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출동한 셀린을 보자마자 쿤타리안은 네가 마음에 들었다며 내 여자가 되라고 셀린을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셀린은 도저히 이 쿤타리안이라는 어린놈에게 정을 붙일 수 없었다. 잘생기고 능력 있으면 뭐하나. 성격이 개차반인데.
셀린 자신도 성격이 그렇게 좋지 않은 것을 자각하고 있었기에 남자를 볼 때 성격보다는 강함을 보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 녀석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폭행에 절도는 기본이었다.
툭하면 술 먹고 사고 치고, 여자 희롱하고, 귀족에겐 시비 걸고 평민은 무시하고…….
어린놈이 나쁜 것은 어디서 이렇게 다 배워왔는지 더러운 짓은 혼자 다 하고 있었다.
교묘하게도 그랑-반더들이 나설 수준의 사고는 치지 않았지만 그 외에 자신을 말릴 만한 자가 없다는 것을 깨닫자 그 행위는 점점 도를 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열일곱 먹은 놈이 오만하기는 어찌나 또 오만한지. 그 나이에 그 정도 강함이라면 오만할 수 있지만 셀린이 보기에 쿤타리안은 그 선을 넘었다.
이 녀석은 자신이 키라인 검공의 손녀라는 것을 안 순간부터 교묘하게 검공이 나설 만한 선을 넘지 않으며 자신을 쫓아다니고 있었다.
거기다 이 미친놈이 주변인물들까지 몰래 습격하는 바람에 고민상담을 할 상대도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마침 시안이 돌아와 질문을 던진 것이다.
이야기를 다 들은 시안은 정말 엄청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대단한 분이군요. 어릴 적에 매가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후… 너도 한번 보면 알 거야.”
셀린은 쿤타리안이라는 녀석을 보면서 시안을 재평가하게 되었다.
셀린은 예전 시안을 볼 때마다 답답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자신이 뭐라 할 일이 아니기에 가만있었지만 셀린 자신이 그 정도의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면 좀 더 유익한 일을 위해 쓰겠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큰 오산이었다. 시안 정도의 강자는 차라리 게으른 것이 나았다.
쿤타리안이라는 녀석이 설치는 것을 보니 제어가 되지 않는 강자가 개망나니가 되면 어느 정도의 나쁜 결과가 나오는지를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음… 근데 셀린 경은 3근위기사단 부단장 아닙니까? 가란-티아 통솔 업무도 끝났을 텐데 그냥 왕궁 안으로 들어가 버리면 안 되는지요? 거기까지 쫓아오지 못할 것은 아닙니까, 용병이라면.”
“…쫓아오더라고, 이번에 단승 귀족으로 승급해서……. 거기다 언제까지 그렇게 피해 다니겠어.”
시안은 셀린 경을 보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도와주고 싶어도 좋아서 쫓아다닌다는 녀석을 떼어내기 위해 끼어들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격은 더럽다지만 영리한지, 녀석은 선을 넘고 있지는 않아 딱히 제지하기도 어려웠다.
맘에 안 든다고 아무 연관도 없는 자를 가서 뚜드려 팬다면 녀석과 다른 점이 무엇이겠는가.
“…힘내십시오. 어떤 작자인지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군요.”
“…걱정하지 마. 이제 찾아올 때가 됐으니까.”
셀린 경의 말이 끝나자마자 입구 쪽에서 화통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셀린, 어딨지? 오늘은 피해갈 수 없을걸.”
“…하아…….”
셀린은 자신을 반말로 부르는 그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머리를 부여잡았고 시안은 목소리가 나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굴에서 빛이 나는 듯한 미남자가 휘황찬란한 검과 갑옷을 차고 이쪽으로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 ☆ ☆
쿤타리안은 자신의 생활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처음 경험하는, 강자로서의 생활은 너무나도 달콤했다.
용병생활을 하며 떠돌다가 힘을 얻은 이후,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몰라 조심스럽게 행동했던 과거가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얻은 힘의 10퍼센트만 소화했을 뿐인데도 자신의 앞길을 막을 녀석이 없었다.
심지어 수도로 와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랑-반더라는 괴물 같은 늙은이들을 본 후 어느 정도 몸을 사리기는 했지만.
모두 소화하게 되면 그랑-반더라는 늙은이들의 눈치도 더 이상 안 보아도 되리라. 그때가 되면 자신의 세상이다.
‘후후. 한 일 년 정도 수련하면 되려나? 내친김에 왕이나 한번 해봐?’
감히 자신을 향해 명령하던 나라샤라는 늙은이를 발밑에 깔고 티안을 좌지우지하는 상상을 하던 쿤타리안은 이윽고 요즘 자신을 거절하는 앙칼진 고양이가 생각났다.
‘키라인이라는 늙은이의 손녀만 아니었어도…….’
힘을 얻은 이후로 자신을 거절하는 여자가 없었다.
몸이 재구성된 후 얻은 외모만으로도 웬만한 여자는 알아서 침실로 기어 들어왔다.
자신의 무력을 보고 딸까지 주며 자신을 잡으려 한 귀족도 있었다. 물론 자신은 얽매이는 영혼이 아니기에 딸만 취하고는 영주성에서 나와버렸다.
그래도 안 되는 여자는 그냥 힘으로 취하면 그만이었다. 자신을 고용한 귀족들이 일을 무마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그래도 덤비는 녀석들은 사지를 부러트려 주었다.
하지만 셀린이라는 여자는 쉽지가 않았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외모와 몸매를 가져 애인으로 삼아주는 영광을 주려 했는데 건방지게 자신을 거절하고 있는 여자.
이제까지 자신에게 안 넘어온 여자가 없었는데 한 달간 겨우 한 명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자 쿤타리안은 슬슬 짜증이 나고 있었다.
무력으로 어떻게 취할 수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아직은 키라인 그 늙은이의 심기를 건드릴 때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이제까지 자신의 외모, 힘, 돈으로 안 되는 여자가 없었다. 셀린도 조금 오래 버티는 것뿐이다.
예로부터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도 셀린을 찾아왔는데 웬 놈팡이가 자신의 셀린과 다정하게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직도 저런 용감한 녀석이 남아있었나?’
감히 자신이 침 발라 둔 것에 집적거리다니.
이제까지 셀린과 이야기하는 놈팡이들을 몰래 습격해서 모조리 두들겨 쫓아 버린 이후로는 저런 녀석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래서 자신이 방심할 수 없는 것이다. 조금만 틈을 보이면 자신의 것을 탐내는 녀석들이 생기니까.
쿤타리안은 우선 셀린에게 집중하고 저 녀석은 나중에 천천히 두들겨주기로 했다.
“하하! 셀린, 오늘도 아름다운데.”
“…제발 좀 꺼져줄래? 망나니 자식아.”
“셀린, 이제 그만 튕길 때도 되지 않았나? 후후.”
시안은 노골적으로 자신을 무시하며 셀린과의 대화에 집중하는 쿤타리안 이라는 자를 쭉 훑어보았다.
‘이 사람이 쿤타리안… 음…….’
가진바 힘 자체는 상당했다. 딱 보아도 상당한 수준의 에너지와 기운이 몸속에서 휘몰아치고 있었으니까. 웬만한 마스터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얻은 지가 얼마 안 되었는지 다 소화를 시키지 못한 상태로 보였다. 몸과 파장이 잘 맞지 않는 것을 보니.
게다가 그 흐름이 투박하고 아직 힘을 쓰는 데 익숙하지 않은 것을 보니…
‘반푼이구먼.’
반푼이. 무장에게는 최악의 모욕.
가진 것을 모두 끌어내지 못하는 무장을 비하하여 지칭하는 표현이다.
저 사람이 안의 것을 어떤 경로로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지간히 재능 없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저 사람 안에 휘몰아치는 힘은 만약 자신의 형이 얻었다면 바로 그랑-반더의 경지에 오를 정도의 강대한 힘이었다.
그런 강대한 힘을 저렇게 허접하게 사용하다니. 누가 남긴 것인지는 몰라도 혀를 찰 것이다.
한번 쭉 훑어보고 시안은 쿤타리안에게 관심을 잃었다.
실력은 좀 있는 편이지만 저 정도 무력으로 성격이 그렇게 더럽다면 조만간 도태될 것이다. 셀린 경도 그때까지만 버티면 될 것이다.
흥을 잃은 시안이 바깥으로 나가려는 순간, 쿤타리안은 시안을 향해 소리쳤다.
“이봐, 거기 어린놈! 여기 셀린과 술 한잔 하려고 하는데 여기 셀린 대신 근무 좀 서 줘봐.”
‘…허?’
조용히 사라지려는 자신에게 시비조로 말을 걸어오는 쿤타리안을 보고 시안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래, 나는 문명인이니까. 후우… 하아…….’
시안은 순간적으로 칼집이 날아갈 뻔했지만 자신은 저런 야만인과 다른 교양 있는 문명인이었기에 숨을 한번 고르고 참아내었다.
어머니인 셀린느 양의 교육의 힘이었다.
‘나는 문명인이다. 나는 참을 수 있다. 나는 이성이 존재한다. 나는…….’
시비 한번 건다고 두들겨 패면 어찌 사회생활이 가능하겠는가. 자신의 어머니는 자신을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
힘이 있다고, 힘을 쓰는 방법이 가장 손쉽다고 그 방법을 택하는 것은 야만인이나 다름없다고 항상 교육받지 않았던가?
눈앞의 놈과 똑같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시안은 주문을 외우며 무시하고 그대로 나가려고 하였다.
하지만 시안의 무의식은 시안의 이성과는 조금 다른 판단을 내린 지 오래였다.
뻐억! 빠바바박!
“컥!”
순간적으로 날아간 칼집은 그대로 쿤타리안의 뒤통수를 강타했고 셀린에게 고개를 돌리고 있느라 무엇이 날아오는지 제대로 보지 못한 쿤타리안은 방심한 상태로 칼집에 시원하게 두들겨 맞고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그걸로 끝나지 않고 공중에 잠깐 뜬 사이 전신으로 날아든 칼집을 맞은 쿤타리안은 뒤로 날아가 벽에 처박히고 말았다.
“으잉?”
자신도 모르게 날아간 칼집에 시안은 당황해하며 소리를 내뱉었다.
셀린은 이 의외의 사태에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곧이어 매우 후련한 미소를 지으며 시안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와우! 시안, 역시 너도 한 성깔 하는구나! 하하하하! 난 처음 널 봤을 때부터 동질감을 느꼈다니까!”
“…어… 음… 전 분명 참으려고 했는데요.”
“하하! 그래그래. 이 정도면 많이 참은 거지. 이 자식은 좀 더 두들겨 맞아야 하는데. 고마워, 시안. 하하하하!”
“…….”
셀린은 처박힌 쿤타리안을 고소하다는 눈길로 지켜보며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아주 기분 좋은 예감에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오늘을 시작으로 쿤타리안이라는 녀석이 시안에게 많이, 자주 두들겨 맞게 될 것 같다는 즐거운 예감 말이다.
시안은 자기 자신이 교양 있고 인내심이 많다고 생각(착각)하겠지만 셀린이 볼 때 이런 녀석이 눈앞에 까불어대는 것을 놓아둘 성격은 결코 아니었다.
오랜만에 진드기가 없는 하루를 보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지는 셀린이었다.
☆ ☆ ☆
“그래, 대회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는가?”
나라샤 후작, 아니 이제 왕이 된 나라샤 쿤 티안 1세는 자신의 오른팔인 탈린 자작에게 말을 걸었다.
“네, 순조로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왕위에 오른 것을 기념하기에 적합한 성대한 축제가 될 것입니다.”
“후후… 폐하라니. 아직 간지러운 단어구먼.”
“하하, 익숙해지실 겁니다.”
역대로 왕위계승전 이래로는 사람들의 통합을 위한 거대한 무투대회가 열렸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왕실 주최의 무투대회는 티안의 각 무장들이 자신의 실력을 테스트하는 장인 동시에 혼란스러웠던 민심을 가라앉히는 축제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음… 이번 대회 우승은… 쿤타리안 그 녀석이 차지하겠지?”
“별 이변이 없다면… 그러지 않을까요? 실력 하나만은 최고인 녀석이니… 욕심도 많으니 이런 기회를 그냥 지나칠 녀석도 아닙니다.”
“하아… 성격만 좀 더 좋았더라면……. 어디서 그런 개망나니 같은 녀석이…….”
그랑-반더는 당연히 무투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아이들 노는 데 어른은 끼지 않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랑-반더가 아닌 무장들 간에도 실력 차는 엄연히 존재하였다.
이번 무투대회에서 단연 주목 받을 만한 인재는 쿤타리안이었다.
나라샤 국왕 자신도 만약 시안을 보지 못 했었다면 놀랐을 것이다.
어떤 마스터도 당해낼 수 없는 그 놀라운 강함에 열일곱이라는 어린 나이.
이런 녀석이 어디 숨어 있다가 나타난 것인지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버리기 아까운 패인데… 그나마 큰 사고를 치지 않는 것이 다행이군.”
티안 왕국을 강성하게 만들어야 하는 나라샤 국왕의 입장에서 버리기 아까운 패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걱정이 되었다. 성격이 개차반이었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이미 쿤타리안을 <작은 하리쟌>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좀 더 지켜보도록 하지. 정 안 되면… 아까워도 어쩔 수 없지…….”
“예,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시안 그 아이는 별문제를 일으키고 있지 않은가?”
둘만 있는 방이었기에 나라샤 국왕은 시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아직까지 다른 사람들이 들어 좋을 내용은 아니기 때문에.
“예. 카리만 경이 기대 이상으로 잘 해주었습니다. 수도로 돌아와서도 현재 자신의 생활에 안주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다행이군… 후…….”
이번 왕권 이양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니 신경을 안 쓸 수 없었다.
다행히도 자신들의 예측이 맞아떨어져 시안은 국왕의 자리가 바뀌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조금 씁쓸하군… 내가 그토록 가지고 싶어 한 자리를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다니…….’
미묘한 감정을 느끼며 나라샤 국왕은 다음 보고를 받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이 시안의 두 달간 행적에 관한 사항이었다.
시안이야 모르겠지만 시안이 지나간 행적은 카리만 경과 기타 채널을 통해 모조리 실시간으로 나라샤 국왕에게 보고가 되었다. 감시는 힘들지만 행적의 보고 정도는 가능하다.
그 와중에 눈에 들어온 것은 로가디스 지방의 영지전과 쿨란 남작령의 급속한 발전… 그리고 남작령 뒤쪽에 있던 산자락의 붕괴이다.
“그 영지전이 수상하다고?”
“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테른 자작 쪽 일도 그렇고, 무언가 개입한 듯한 냄새가 나서 조사하고 있습니다. 쿨란 남작도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는 듯하고요. 그리고 산자락이 무너진 것은… 완전히 붕괴되어서 조사에 난항을 겪고 있는 상태인데…….”
“…그건 그냥 내버려두게나.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한 짓인지는 알 것 같군…….”
쿠란다스와 파레온은 자신들의 일을 숨기려 그토록 노력하였지만 시안이 이미 그쪽으로 향하고 있던 순간부터 그 부근의 일은 모조리 조사를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음… 설마… 그 녀석도 대회에 나오지는 않겠지?”
“귀찮은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니… 아마 안 나오지 않겠습니까?”
“뭐… 나야 오히려 나와 주었으면 좋겠지만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고… 나올 가치를 느끼지 못하겠지…….”
산자락을 무너트릴 정도인데 무투대회는 어린아이들 장난 같아 보일 것이다.
“정말 아쉽습니다. 그런 인재가 도와준다면 일이 훨씬 편해질 텐데.”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난 최근에 쿤타리안을 보면서 느낀 것이 있다네. 탈린 자작.”
“네, 폐하. 말씀하십시오.”
“그 아이가 가만히 있는 것만 해도 굉장히 고맙다… 라는 생각이 들었네. 쿤타리안이라는 애송이 녀석도 저 정도인데 시안이 저런 성격을 가졌었다면… 그건 대재앙이나 다름없었겠지.”
뇌까리는 나라샤 국왕을 바라보며 탈린 자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제어가 안 되는 힘이 자신을 도와준다고 해도 좋아할 필요 없다.
순전히 자신의 기분으로 도와준 것이니. 오히려 그자가 언제 기분이 나빠질지 몰라 주의하며 전전긍긍해야 한다.
칼은 휘둘러야 하는 것이지 칼에 휘둘리면 아무 의미 없다.
차라리 시안처럼 속세의 일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호랑이가 우리 집을 침입한 도적을 물어 죽였다고 호랑이를 좋아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잡담이 길어졌군. 회의실로 가도록 하지.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
“예, 폐하…….”
이윽고 나라샤 국왕과 탈린 자작은 참모들과 귀족들이 모여 있는 대회의실로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티안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결정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