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대무투회>
티안의 수도, 로아-티안은 축제분위기로 들썩이고 있었다.
왕권 이양의 끝을 기념하는 대축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그 축제의 꽃은 누가 뭐라고 해도 티안-대무투회이다.
평소에도 작은 무투대회가 일어나긴 하지만 이번에 일어나는 무투회는 그 격이 다르다.
티안의 내로라하는 무장들이 모두 참가하기 때문에 그 틈을 타 누군가 침입하는 것을 방지하게 위해 핵심 무장들은 조를 짜고 각 지역에서 예선을 치른 후 올라와야 할 정도이다.
그만큼 걸리는 상금과 상품도 어마어마하다.
그 상금과 상품을 왕실이 공급하지는 않는다.
단지 왕실은 상금과 상품을 많이 대는 상단에게 축제 물품의 공급우선권을 발급할 뿐이다.
그러니 전국의 상단들은 미친 듯이 상금과 상품을 건다.
축제에서 나오는 이권이 실로 막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키리온 상단의 경우 크라단 왕가의 이양 승리 무투대회 상품으로 상단이 휘청거릴 정도의 상금과 상품을 제공하였지만, 그 몇 배에 달하는 수익을 한순간에 벌어들임으로써 세력을 순식간에 확장할 수 있었다.
대무투회는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칼로안> 무투회와 <하론> 무투회.
시험을 쳐서 가르는 것이 아니다. 기준도 없다.
단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자신 있으면 ‘칼로안’을, 자신이 없으면 ‘하론’을 신청한다.
하론을 선택한다고 하여도 부끄러운 것은 전혀 없다.
칼로안을 선택하는 자들은 정말 실력에 자신 있는 자들뿐이다.
티안을 지탱하는 핵심 무장세력, 마스터들과 상급 엑서들의 축제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하론 무투회는 자라나는 신성들과 동량들의 장이 되고, 칼로안 무투회는 이미 자신들을 입증한, 나이 지긋한 대무장들의 결투가 벌어진다.
3급 행정관 기르딘은 축제의 행정으로 인해 몰려드는 문서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정신없이 문서를 확인하고 결재를 맡는 도중 눈에 띄는 문서가 하나 있었다.
[대무투회-칼로안 무투회 참가자 명단]
기르딘은 바쁜 와중이었지만 그 문서를 넘어갈 수 없었다.
그는 매달 발간되는 <이 달의 무장들>(정가: 3탈란트)를 정기구독할 만큼 무장들에 대한 관심이 각별했기 때문이다.
특히 카란과의 접경을 지키는 무장, <코라칸>과 쿠라단 협곡을 지키는 <마운티브>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무장들이었다.
그들 역시 이번에 신청하였을 것이기에 목록을 훑으며 어디에 배정이 되었는지를 찾아보던 기라인은 이윽고 문서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뭐지? 참가 나이… 24살… 17살…….”
기라인은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하였다.
하론 급에 신청하여야 하는 것을 잘못 신청한 팔푼이거나,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병실로 실려 갈 예비환자이거나.
예전에 객기를 부리며 칼로안을 신청한 자신감 넘치는 기재들은 보통 모조리 연무장 옆의 긴급의무실로 실려 가고는 하였다.
하지만 기라인은 자신의 두 가지 예측이 모두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나이에 눈이 팔려 미처 보지 못한 그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리안 폰 로만. 왕국 제3근위기사단장. 24세>
<쿤타리안. 단승귀족-남작. 17세>
마스터에 올라, 요즘 무서운 기세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두 신성들이었다. 어리다지만 아무도 이 둘을 무시하지 않았다.
이들이라면 충분히 칼로안에 발을 들일 자격이 있다.
리안과 쿤타리안은 어린 나이에 마스터라는 높은 경지를 성취하고, 절세의 외모를 가진 미남자라는 점 때문에 자주 비교가 되고는 하였다.
하지만 그 둘의 결정적인 차이를 떠올리고 기라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바로 성격.
쿤타리안의 악명은 리안과 비교가 되어 더욱 저평가되어 수도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작은 하리쟌>이라는 별칭까지 생길 정도였다.
기라인은 내심 리안의 승리를 기원했지만… 객관적으로 힘들 것이라는 것이 <이 달의 무장들> 전문가들의 평가였다.
‘무슨 큰 사고라도 터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괜스레 불안감이 드는 기라인이었지만 이윽고 자신의 눈앞에 쌓여있는 서류를 보고 빠르게 잡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자신의 업무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 ☆ ☆
“젠장.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눈 깜짝할 사이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쿤타리안은 일어나자마자 난동을 부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허겁지겁 의료실을 빠져나와 자신이 머무는 숙소로 향했다.
‘…제기랄! 키라인 그 늙은이의 짓인가.’
정황상 분명했다. 그 빌어먹을 년이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일러바친 것이리라.
위험한 늙은이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게다가 그랑-반더라는 자가 채신머리없게 암습까지 하다니.
셀린 그년에게 정신을 팔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갑옷의 보호법진까지 깨지며 순식간에 당하고 말았다. 마스터 정도의 실력으로는 어림 반 푼어치 없는 일이다.
이래서 계집년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쿤타리안은 당분간은 셀린에게 관심을 접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선을 넘지 않는다고 했지만 키라인 검공이 손녀를 지극정성으로 아낀다는 말은 듣지 못해 과감하게 접근하였는데, 소문이 잘못되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보호하러 직접 그 늙은 몸뚱이를 움직이러 오다니.
쿤타리안은 이번 우승상품을 꼭 얻어야겠다는 의지를 더욱더 불태웠다.
칼로안 대무투회, 거기에 걸려있는 우승상품이 꼭 필요했다.
다른 녀석들은 그 가치를 단순한 좋은 칼로 알고 있겠지만 자신은 거기에 숨겨져 있는 비밀을 알고 있다.
그것만 있다면 남은 자신의 힘을 상당부분 깨울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더 이상 저런 늙은이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날이 오면 키라인 그 늙은이는 자신의 발아래 깔리게 되고 셀린 그년은 자신의 배 아래 깔리게 될 것이다.
‘후후…….’
그때의 생각을 하니 다시 기분이 좋아진 쿤타리안은 코앞으로 다가온 대무투회에 대비하기 위하여 오랜만에 수련이라는 것을 해보기로 했다.
대천재인 자신은 굳이 수련 같은 것을 하지 않아도 강했지만 압도적으로 상대를 가지고 놀기 위해서는 조금 힘쓰는 법을 익혀두는 것도 좋으리라.
‘음… 그 전에 몸부터 좀 풀어볼까.’
본격적인 수련을 하기 위해서는 몸을 푸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수도 외곽의 트라안 거리를 찾기 위해 몸을 옮겼다.
그곳의 사창가는 자신이 다녀본 그 어느 곳보다도 최고였으니까.
☆ ☆ ☆
시안은 기분 좋아 보이는 셀린을 보며 말했다.
“요즘은 그 반푼이가 오지 않나 봅니다?”
“반푼이? 반푼이가 누구지?”
“쿤타… 뭐시기… 그 녀석 말입니다.”
“아… 쿤타리안. 어쩐지 그 이후로 조용하네. 하하.”
쿤타리안은 성격은 개차반이긴 하지만 무력 하나는 막강하였다.
그렇기에 반푼이라는 소리를 듣고 얼른 떠올리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 녀석이나 가능한 발언이지……. 그나저나… 이렇게 물러날 녀석이 아닌데…….’
그 집요함을 알고 있는 셀린은 그 녀석이 순순히 물러난 것을 보고 의아해하였지만 지금으로써는 이유를 알 수 없었기에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요즘 가장 핫한 이슈인 대무투회이다.
“음… 그나저나 너는 이번에 대회 참여 안 하니? 걸린 상품이나 상금이 엄청나던데. 너 정도면 그냥 나가서 우승할 수 있잖아.”
“하하! 양처럼 순한 저 같은 사람은 폭력을 싫어하기에 그런 야만적인 대회는 참가하지 않지요.”
“…….”
며칠 전에 쿤타리안에게 칼집을 휘두르는 시안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셀린이 어처구니없다는 눈길로 쳐다보자 시안은 눈길을 피했다.
“죄송합니다. 그냥 귀찮아서 그랬습니다. 관심도 없고요. 셀린 양은 참가하셨습니까?”
“하하! 어찌 보면 너답구나. 나야 칼로안에 등록했지. 우승은 무리겠지만 이번 기회에 내 위치를 확인해 볼 수 있을 테니. 솔직히 이렇게 다양한 마스터나 엑서들과 대련할 기회는 흔치 않잖아.”
생각해보니 그 흔치 않은 마스터들 중 삼분지 일은 이미 시안의 손에 두들겨 맞은 자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시안이 이 대회에 관심이 없는 것도 어쩌면 당연해 보였다.
그랑-반더인 시안이 이런 곳에 끼어들면 그것이야말로 반칙이리라.
연무장에서 뒤통수에 칼집을 맞고 나뒹굴 티안의 무장들을 생각하니 셀린은 절로 실소가 나왔다.
“그래, 너답다. 하하. 그러면 나랑 리안 경이나 잘 응원해달라고.”
“하하. 알아서들 잘하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시안은 셀린 경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위험하면 적당히 빠질 줄 아는 여성이었으니.
걱정되는 것은 자신의 형인 리안이었다.
어릴 때 무슨 소설책을 머릿속에 주입한 듯 마냥 주인공처럼 사는 형은 항상 너무 열혈이라 문제였다.
그래서 좋아하기는 했지만 가끔씩은 자신보다도 더 부모님 속앓이를 시키는 경우가 있었다. 예전에 대북벽에 지원하겠다고 했을 때도 그렇고.
무투회에서 크게 다치는 경우나 죽는 경우가 이제까지는 없었다지만 자신의 형은 필요 이상으로 열심히 하기 때문에 죽자고 자신보다 더 강한 상대에게 달려들까 걱정이었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이 그걸 말리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형을 돕는다면 형은 자살을 할 인물이었다.
‘하… 어째 나보다 더 골치야…….’
가끔은 형이 좀 주인공이 아닌 일반인처럼 살아줬으면 좋겠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시안은 가란-티아 순찰업무를 보러 바깥으로 향했다.
☆ ☆ ☆
칼로안 급 대무투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된다.
별로 할 일이 없는 하론 급의 인물들과는 다르게 칼로안 급의 참여자들은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울 수 없는 핵심 무장들이기에 어영부영 대회에 세월을 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기에.
그렇기에 거의 대부분의 무장들과 상급의 엑서들이 참여하여 근 120명에 육박하는 고급전투세력들이 동시에 참여할 수는 없다. 대부분이 자리를 지키며 각 지역에서 서로 예선을 치르고 올라온다.
대무투회는 티안 전체의 행사이기에 전 국민들이 관람하기에도 이 방법이 좋다.
수도인 로아-티안에서도 수도 소속의 무장들은 따로 예선전을 치른다.
왕권 이양전이 끝난 터라 각 귀족파의 마스터들이나 엑서들은 가문으로 돌아갔기에 약 30명에 해당하는 마스터들이 수도에서 예선을 치르게 된다.
이런 대회에서 항상 이슈가 되는 인물들은 신진세력이다.
즉, 마스터에 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
귀환자들과 리안 경, 그리고 쿤타리안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중에서도 리안 경과 쿤타리안에 대한 관심은 극도로 높아져 있었다.
성격을 떠나 둘 다 어린 나이에 무장들 사이에서 이름을 드높이고 있었기에 그들이 티안의 이름 높은 기존의 무장들을 상대로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기대하는 심리가 높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런 쿤타리안과 리안 경이 각자 자신의 기량을 뽐내는 예선전의 마지막 날이다.
이미 예선 첫날에서 상대를 꺾고 올라온 열여섯 중 오늘 이긴 여덟 명은 본선에 참가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본선에 참가할 서른두 명의 인원이 모두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의 대회장은 그 어느 때보다 붐비었다.
앞으로 티안을 이끌어 갈 인재와, 티안을 지탱하는 인재가 누구인지 증명하는 자리가 오늘 연무장에 펼쳐질 것이기에.
“우와… 엄청난 인파네.”
“그러게요. B석 티켓 한 장에 25탈란트가 넘는 가격이던데. 수도 사람들이라 그런지 다들 돈이 많나 봐요.”
관중석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자들은 셀린과 시안이었다. 셀린은 참석자였기에, 시안은 아버지인 로만 백작의 힘으로 둘 모두 경기장이 가장 잘 보이는 S급의 객석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 위의 R급 좌석은 나라샤 국왕과 로만 백작, 키라인 검공을 비롯한 최고위 귀족들만이 참석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경기를 관람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위치이다.
“그나저나 셀린 양, 정말 광속도로 떨어지시던데요. 하하.”
“…리안 경이 그렇게 실력이 올랐을 줄 몰랐다고. 하…….”
셀린은 자신이 말하면서도 정말 구차한 핑계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리안 경의 실력은 어느새 몰라볼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시안이 가란-티아에 들어온 몇 달 전만 해도 그는 분명 자신보다는 조금 강한 수준이었고 귀환자인 쟈크보다는 약하였다.
하지만 예선전 첫날 뚜껑을 열어보니 리안 경의 실력은 그때와는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으로 상승하여 있었다.
예선 첫날부터 리안 경을 만난 셀린은 달려드는 리안 경을 상대로 연신 수세에 몰리다가 순식간에 제압당하고 말았다. 봐주지도 않았다.
리안 경은 평소에는 배려심이 넘치고 상냥하였고 검술에도 그러한 기세가 묻어 나왔는데, 근 석 달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리안 경은 마치 맹수와 같은 느낌을 풍기며 상대를 몰아쳤다.
“하하! 이번에 아버지랑 특수훈련을 받더라고요. 무슨 사자의 길… 어쩌구였는데… 형도 이제 그걸 전수받을 때가 되었다면서 몰아치시더라구요.”
“…너희 가전 수련법인데 모른단 말이야?”
“뭐… 수련을 해 본 적이 없으니 어찌 알겠어요.”
“…….”
가끔 보면 이 녀석은 정말 재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셀린은 속으로 툴툴거렸다.
“아! 시작하네요!”
둘이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리안 경의 경기가 시작되었다.
상대는 귀환자인 나탈란 검가의 여식인 록샨느였다.
“사랑해요! 리안 경!”
“결혼해 줘요!”
사방에서 환호성을 받으며 들어오는 리안을 록샨느(36)는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정말 엄청난 인기군…….’
자신도 여자였기에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인 로만 백작이 아닌, 어머니를 닮아 선이 가는 조각 같은 외모와 그에 어울리지 않는 짐승 같은 육체.
성실한 태도와 상대를 배려하는 매너, 정의감, 열정으로 무장한 리안 경은 어떤 여자가 보아도 반하지 않기 힘든, 정말 소설책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존재였다.
그뿐인가. 스물네 살에 마스터에 올라 스스로 능력을 증명하였고 게다가 집안은 그 ‘로만가’이다.
이 정도면 정말 완전체라고밖에 할 수 없다.
하지만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이다. 어차피 쓰러트려야 할 상대에 불과하기에.
“리안 폰 로만이라고 합니다.”
“록샨느 드 나탈란이다. 잘 부탁한다.”
서로 격식 있는 인사를 나눈 후 둘은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바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먼저 달려든 건 호전적이라고 소문난 록샨느가 아닌 리안이었다.
리안은 몇 달 전과는 전혀 다른 기세를 풍기며 사방에서 록샨느를 압박해 들어갔다. 마치 맹수와 같은 움직임으로.
거칠어 보이지만 저 움직임들이 모두 철저하게 계산되어 휘둘러지기에 위대한 전투술.
저것이 로만 백작을 유명하게 만든, 그리고 미친 불곰이라고 불리게 하였던, 로만 백작가 비전의 검투술 ‘사자의 길’이다.
로만가는 일정 수준이 되기 전까지는 기본적인 검술만을 수련시키고 가문 비전의 검술을 수련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미 경기를 지켜보았던 록샨느는 어느 정도 예상하였기에 그에 맞추어 대처를 하였지만 점점 무언가가 잘못되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길이 점점 막힌다.’
정확히 말하면 기세에서 밀리고 있었다.
분명 자신이 휘두를 수 있는 곳인데도 광포한 기세에 밀려 휘두르지 못하다 보니 점점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줄어들고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결국 록샨느는 실력이 비슷했음에도 불구하고 리안 경에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수고하셨습니다. 록샨느 양. 괜찮으십니까?”
“…….”
자신을 제압한 후 일으켜 세워주는 리안 경의 손을 잡고 일어난 록샨느는 무표정한 얼굴로 리안 경을 바라보다가 몸을 팩 하고 돌리며 경기장 바깥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이런… 어지간히 분하셨나 보군.’
리안 경은 속으로 고소를 머금으며 자신을 환호해주는 소리를 들으며 록샨느 경 반대쪽, 경기장 바깥으로 향하였다.
☆ ☆ ☆
“아이고. 이런… 한 명 더 넘어갔군.”
“엉? 록샨느 양 말이야?”
“흐으… 그렇죠. 한두 명이 아니에요, 한 두 명이.”
“…아니, 왜? 무슨 이유로?”
셀린은 록샨느 양이 리안 경에게 호감을 품게 되었다는 시안의 말이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니, 호감을 품을 요소가 방금 경기에 전혀 없는데 도대체 왜 그 짧은 시간에 호감을 가지게 된다는 말인가?
어리둥절해하는 셀린을 보며 시안은 셀린 경에게 세상의 진리를 가르쳐 주었다.
“얼깡.”
“…그건 또 무슨 뜻이야.”
“얼굴이 깡패다. 이 뜻입니다.”
“…….”
“그렇게 보면 셀린 경이 참 신기합니다. 저희 형님이랑 붙어있으면서 형님을 안 좋아하는 여자는 거의 본 적이 없는데.”
시안의 말을 들은 셀린이 곰곰이 생각해보니 리안 경 주위의 여자들은 모두 리안 경을 좋아하고 사모했던 것 같기는 하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주관적으로 보아도 리안 경은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춘 남자이다.
하지만 자신은 그냥 동료라는 의식이 강해서인지 딱히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음… 나는 딱히.”
“하하. 별 의미 없이 한 말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오! 다음 경기가 시작하네요.”
“어… 음… 그래. 이번 경기는 누구지.”
“셀린 경의 남자이지요. 하하하!”
“…….”
그 말은 들은 셀린은 다음 순서가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다음 경기는 쿤타리안, 그 개망나니의 경기였다.
‘음… 리안이라는 저 자식… 정말 재수 없는 자식이군.’
쿤타리안은 자신을 향해 들려오는 환호성을 아까 리안이 입장할 때 들려오던 환호성과 비교해보고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곱상하게 생긴 게 트라안 거리의 남창같이 생긴 리안이라는 녀석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어려서부터 몰락귀족으로 어쩔 수 없이 용병의 길을 걸었던 자신과 달리 로만가라는 명문가에 태어나 탄탄대로를 걸어온 녀석.
자신처럼 험난한 고생과 수련(?) 끝에 강함을 손에 넣은 것이 아닌,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저택에서 곱상하게 수련 받아 마스터에 오른 리안이라는 녀석을 쿤타리안은 예뻐할래도 예뻐할 수 없었다.
저런 놈들을 자신보다 더 좋아하는 계집들도 이해할 수 없었다.
‘후후… 하지만 어차피 잠깐뿐일 테니 그동안 즐기도록 하라고.’
자신이 여기서 이겨 본선으로 올라가면 리안이라는 녀석과 언젠가는 부딪치게 될 것이다.
로만이라는 영감탱이의 아들이라 그동안은 건드리지 않았지만 경기 중에 만나면 잘근잘근 밟아주고 사정없이 모욕을 줄 것이다.
로만가의 녀석들에 대한 소문을 들어보니 명예니 어쩌니 하는 것들을 엄청나게 열심히 챙긴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랑-반더라는 늙은이도 경기 중에 벌어진 일은 책임을 묻지 못 하리라. 속앓이만 하겠지.
게다가 자신이 우승하면 얻게 될 상품만 얻는다면 더 이상 그랑-반더라고 텃세 부리는 아니꼬운 영감들한테 더 이상 쫄 일이 없다.
여기까지 상념을 마친 쿤타리안은 눈앞의 쟈크라는 녀석을 쳐다보았다.
리안이라는 녀석 때문에 더러워진 기분을 우선 눈앞의 녀석에게라도 풀기로 한 쿤타리안은 자신의 몸에 엑사르를 사용하여 이적을 걸고 쟈크라는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일방적이네.”
셀린은 쿤타리안이라는 녀석이 재수는 없지만 그 실력 하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다시 한 번 느꼈다.
경기장에서는 마스터 중에서도 상당히 강한 귀환자, 쟈크 경이 신나게 두드려 맞고 있었다.
자신이 쟈크 경과 친하지는 않지만 불쌍해질 정도로.
같은 마스터이지만 격이 달랐다.
게다가 쿤타리안이라는 녀석은 엑사르까지 사용할 수 있는, 정말 몇 안 되는 <이종 이능 사용자>였다.
엑사르의 사용이 허접한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몸에는 <가속>과 <강화>를 걸고, 쟈크 경에게는 <둔화>를 비롯한 각종 약화 이적을 걸고 싸우는 쿤타리안의 모습은 전투법사라고 하기에도 충분해 보였다.
여기까지가 셀린 경을 비롯한 일반적인 마스터들의 생각이라면, 시안을 비롯한 그랑-반더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음… 저 아이, 뭐하다 온 아이라고 하였소, 로만 백?”
“용병이라고 들었습니다, 검공.”
“…완전히 따로 노는구먼.”
“어디서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힘쓰는 법이 굉장히 어설프군요.”
“…반푼이구먼.”
“그렇군요.”
나라샤 국왕을 비롯한 키라인 검공과 로만 백작은 R석의 관람석에 앉아 함께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그 셋은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서로 대립각을 세우던 사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상당히 친해진 모양새였다.
그들의 공통적인 의견은 하나였다.
<반푼이>
저 쿤타리안이라는 녀석,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이렇게 위에서 힘쓰는 모습을 보니 확실해 보였다.
저 녀석, 어디서 무언가를 주은 것이 틀림없다. 그것도 굉장한 수준의.
한순간에 강대한 힘을 얻은 자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아마 그것을 얻기 전에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수준이었으리라.
마스터 수준이라면 잘 보이지 않겠지만 그랑-반더들의 눈에는 그 힘의 운용이 모두 보였다.
기운의 양과 질이 압도적이고 육체적 능력이 굉장히 뛰어난 편이라 잘 눈치채지 못할 수 있지만, 기술의 발동이나 타이밍, 써야 되는 에너지의 양이나 공격의 강도가 모두 따로 놀고 있었다.
강해야 할 때 모자라고, 적당해야 할 때 과하고.
천천히 몰아쳐야 할 때 급하고, 빠르게 치고 들어가야 할 때는 여유를 부리고.
힘을 쓰는 법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마 같은 수준의 강자를 만나면 순식간에 살해되고 말 것이다.
나라샤 국왕을 비롯한 그랑-반더들은 그것이 안타까웠다.
“후… 저런 반푼이를 이길 인재가… 없다는 말이지, 지금 칼로안에는.”
얻은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한 수준의 것이 분명했다.
저 녀석은 분명 그랑-반더를 제외하면 당할 자가 없을 정도로 강했으니까.
반푼이라고는 하지만 기본적인 스펙 자체가 워낙 차이가 심해 다른 자들이 당해내기는 힘들 것처럼 보였다.
“리안이라는 아이에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구려.”
그랑-반더들이 보기에 리안이라는 아이는 정말 보석 같은 인재였다. 몇 년 정도만 더 갈고닦았다면 저런 반푼이 정도는 가볍게 꺾을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무리였다. 힘의 차이가 너무 심하였다.
“이번 칼로안은 영 흥미가 떨어지는군요. 전 돌아가 보겠습니다, 폐하.”
이미 정신을 잃을 정도로 얻어맞은 쟈크에게 화풀이하는 쿤타리안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던 키라인 검공은 더 이상 못 봐 주겠는지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나가버렸다. 아마 다시는 경기를 보러 오지 않을 것이다.
나라샤 국왕과 로만 백은 자리를 지켜야 하는 입장이기에 묵묵히 앉아 경기를 다 보고 나왔다.
내일부터는 본선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이번 칼로안은 영 흥미가 떨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나라샤 국왕과 로만 백은 쓴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