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19화 (20/81)

<19. 격돌>

본선은 총 서른두 명의 강자들이 토너먼트로 붙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각 지역에서 예선을 통과한 서른두 명의 강자들이 수도에서 모여 본선이 진행되는데 오늘은 그 대진표를 발표하는 날이다.

대진표는 순전히 운으로 결정되지만 본선에 진출한 강자 정도면 운 좋게 대진표가 설정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짓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대진표를 아예 확인도 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내가 강하면 내가 이기고, 상대가 강하면 상대가 이긴다.>

무장들의 머릿속에 박혀있는 생각은 지극히 단순했기에 상대가 누구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그저 대회 날 확인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건 참전하는 무장들의 생각이고 대진표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관심거리였기에 대진표가 나오자 수도 전체의 이목이 그 한 장의 종이쪼가리에 집중되었다.

“음… 쿠라칸 경도 올라왔고… 마운티브 경도 이번에 본선에 진출했구나.”

“이번에 리안 경과 붙는 자는 누구지?”

“쿤타리안 그 망나니 녀석이 우승하면 난 그냥 경기 안 볼 거야. 재수 없는 자식!”

대진표가 경기장 앞에 공표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이윽고 입 소문을 타고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갔다.

가란티아의 본관에도 대진표가 몇 장 발표되었기에 시안은 셀린 경과 함께 그 대진표를 쭉 훑어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누군지 관심도 없고, 또 알지도 못하지만 자신의 형이 어떻게 배정되었는지 궁금하였기 때문이다.

“음… 여기 이 사이온이라는 자는 누구입니까? 형과 일차전에서 붙는군요.”

“굉장히 유명한 엑서야. 보통 엑서는 개성이 다양하기 때문에 전투 말고 다른 쪽으로 유명한 경우가 많은데, 이 사람의 경우 염동력을 극한까지 발전시켜 전투에 활용하고 있거든.”

“오, 염력이라면 그 상자 움직이고 물컵 움직여 물 따르고… 그런 것 말입니까?”

“…그렇지. 그 대상이 상자가 아니라 집채만 한 바위나 폭포 정도는 된다는 점이 조금 다르겠네.”

시안의 귀여운 비유를 정정해준 셀린은 한마디를 더 붙였다.

“음… 아마 이 자라면 리안 경이 이길 것 같아. 엑서 같은 경우 기세에서 밀리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거든. 그러면 그다음 대전 상대는 누가 될까…….”

리안 경의 옆 팀을 본 셀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 시선을 따라간 시안의 표정이 팍 하고 찡그려졌다.

[마운티브 vs 쿤타리안]

이긴 자가 리안 경과 붙게 되는 구조였다. 그리고 아마 쿤타리안이 이길 가능성이 높았다.

“음… 후회되는군요.”

“…뭐가?”

“그때 그 반푼이의 사지를 좀 더 틀어 놓았어야 되는 건데.”

“…음…….”

“하하! 농담입니다. 그런 짓을 하면 형은 별로 고마워하지 않았을 거예요. 정정당당하지 않으니까.”

형이 싫어하지만 않았다면 당장에라도 달려가 녀석의 모가지를 비틀어놓고 싶다는 시안의 표정을 보며 셀린은 작은 웃음을 지었다.

세상만사에 무관심한 녀석이지만 형은 엄청 챙기는걸 보니 귀엽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하. 너 정말 리안 경을 엄청 챙기는구나. 리안 경이 어딜 가서 보살핌 받을 입장은 아닌데.”

“어휴,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옆에서 보면 항상 불안하다고요. 형이 약하진 않지만 항상 위험한 상황을 찾아다니는 게 얼마나 불안한데요.”

“하하. 리안 경이 좀 열혈이긴 하지. 시안 너도 인기가 많고 싶으면 좀 배우라고. 그런 점이 여자들에게 매력을 어필하는 요소이니까.”

“…그거 하나만은 아닐걸요.”

“음… 그건 그래.”

셀린은 순순히 인정하였다. 열혈은 리안 경의 인기 중 일부만을 해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위험한 곳을 찾아가야 인기가 많아지면 전 그냥 인기 안 많으렵니다. 하하.”

“…….”

시안의 철칙은 생존우선이기 때문에 고작 인기 때문에 위험한 곳에 뛰어들기는 싫었다.

게다가 자신이 위험해지려면 대북벽을 넘어가거나 하늘산맥 꼭대기로 향해야 할 텐데 그런 곳에서 열혈로 살아봤자 지켜봐 줄 여자도 없다. 하리쟌 암컷들이야 넘치겠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시안은 속으로 자신의 형이 조금 걱정이 되었다. 이 쿤타리안이라는 놈이 자신의 형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반푼이, 즉 자신이 가진 것을 제대로 써먹지 못하고 있는 놈이지만 가진 게 워낙 많아 현재의 형보다는 훨씬 강했다.

하지만 이 녀석은 그랑-반더의 눈 바깥에 날 짓을 안 한다고 하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두려워한다면 형에게 심한 짓은 못할 것이다.

시안은 속으로 이렇게 형을 챙겨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한숨이 나왔다.

‘이런 걱정을 안 하려면 빨리 형이 그랑-반더는 되어야 할 텐데…….’

아무리 자신의 형이 재능이 있다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기에 시안은 몇 년 더 마음 고생할 각오를 다졌다.

☆ ☆ ☆

무투회의 진행은 셀린 경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엑서인 사이온을 제압하고 올라온 리안 경은 16강전에서 마운티브 경을 제압하고 올라온 쿤타리안과 맞부딪치게 되었다.

관람석에서 양측이 몸을 푸는 것을 셀린은 불안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음… 저 쿤타리안이라는 녀석, 오늘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딱 보아도 얼굴에 비웃음을 빙글빙글 띠며 웃고 있는 것이 무언가 음흉한 속셈을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가서 저 자식 척추를…….’

시안은 문명인이고 나발이고 당장 달려가서 저 녀석을 칼집으로 골고루 다져주고 싶었지만 어제 형이 자신을 불러 따로 말한 것 때문에 꾹꾹 눌러 참고 있었다.

‘시안. 네가 나를 걱정해주는 것은 안다만 내가 지고 있다고 해서 절대 끼어들면 안 된다. 그건 무장으로서 수치이니까.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경기 전에 쿤타리안 경의 사지를 꺾어놓는다거나 하는 그런 짓도 절대! 절대! 안 된다. 비록 소문은 좋지 않지만 나는 쿤타리안 경을 강자로서 존중하고 있고 정정당당하게 대결을 펼치고 싶으니 도와다오.’

‘쳇… 형은 나를 너무 잘 알아서 탈이야…….’

경기에 뛰어들 생각은 없었다. 그 전에 반쯤 반죽으로 만들어놓으려고 했는데 형은 어찌 알았는지 그것까지 원천봉쇄 시켰다.

형이 자신을 따로 불러 저렇게 말할 정도이고, 자신은 형을 존중하기에 일단은 참아보기로 했다.

‘고집불통 형. 힘내.’

시안은 시작하는 경기를 보며 마음속으로 자신의 형을 응원했다.

“리안 폰 로만입니다.”

“후후, 쿤타리안 님이시다.”

시안이 들었으면 칼집이 날아갔을 대사를 내뱉은 쿤타리안은 리안을 가소로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번 경기를 지켜보았지만 자신이 질 만한 요소는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이 계집애같이 생긴 녀석을 어떻게 밟아주는지 방법을 결정하는 것만 남아있었다.

‘음… 우선 화려하게 <중독>으로 가볼까. <착란>을 걸어 똥오줌을 싸며 울고 불게 만드는 것도 괜찮겠군…….’

이것저것 음흉한 상상을 하던 쿤타리안은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리안과 거리를 벌렸다. 이 재미있어질 경기를 빠르게 끝낼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리안이라는 녀석은 자신을 살피는 움직임을 보이며 쉽사리 다가오지 못하였다.

‘그래, 우선 <중독>으로 가자. 저 얼굴을 보라색으로 물들여주는 것도 괜찮겠어.’

쿤타리안이 그렇게 생각하며 몸속에서 엑사르를 배열하려는 순간, 리안의 눈이 번뜩였다.

리안은 쿤타리안이 엑사르를 배열하려 하는 순간 몸의 반데르가 살짝 흐트러지는 것을 놓치지 않고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엇?”

이제까지 이적이 배열되는 동안 습격을 받은 적은 없던 쿤타리안은 이를 갈며 발동시키던 <중독>을 포기하고 칼을 휘둘렀다.

“…치사한 자식. 빈틈을 노리다니!”

상대 앞에서 대놓고 <중독> 같은 중급 이적을 발동시켜 빈틈을 만들어준 주제에 리안을 타박한 쿤타리안은 몸속의 엑사르와 반데르가 조금 흐트러진 상태로 리안의 공격을 막아 나갔다.

검에 실린 반데르의 양이 너무 차이가 나기 때문에 리안은 허초를 섞어 빈틈을 만들고 칼을 최대한 섞지 않는 방법으로 경기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 자식, 생긴 것처럼 야비하게 노는구나. 계집애같이!”

쿤타리안은 순간적으로 몸 안의 흐름이 흐트러진 데다 리안의 ‘사자의 길’에 말려들어 정신없이 방어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워낙 힘의 차이가 컸기 때문에 금세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후후. 그럼 이제 시작해 볼까.”

시작한 지 오래였지만 스스로는 지금부터라고 생각한 쿤타리안은 몸의 반데르를 끌어내어 몸 위에 휘두르는 동시에 엑사르를 갑옷으로 뿜어내었다.

그러자 안 그래도 빛이 나고 있던 쿤타리안의 갑옷에서 더 찬란한 휘광이 새어나오며 리안의 칼끝을 밀어내었다.

갑옷에 새겨진 3급 방어법진, <엘란의 휘광>이 발동된 것이다.

대단한 아티팩트였다. 제대로 발동되면 <쿨라렌>의 포격도 한 번 막을 수 있는 ‘엘란의 휘광’을 두르고 있는 갑옷이라니. 저 이적은 보통 성문에나 적용되는 종류였다.

“……!”

리안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순식간에 상대의 방어력이 너무 높아졌기 때문이다. 칼을 맞추어도 반동 때문에 손이 아플 지경이었다.

뒤로 물러서서 빈틈을 찾고 있는 리안을 바라보던 쿤타리안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진작 이렇게 할걸 그랬군.’

여유 있게 방어를 마친 쿤타리안은 어떤 종류의 이적으로 상대를 농락할지를 고민하다가 결정했다.

‘이게 좋겠군. 에루안의 속박.’

짧은 순간 4급 이적, <에루안의 속박>이 발동하였고 대기 중의 수분이 맹렬하게 얼어붙으며 리안의 몸뚱이를 얼려갔다.

☆ ☆ ☆

셀린은 생각보다 대등한 경기를 펼치고 있는 리안을 보며 의외의 표정을 지었다.

“음… 생각보다 할 만한가 봐?”

“…예상 못한 바이군요. 저 녀석의 겉멋력이 저 정도일 줄이야. 계속 상승하고 있군요.”

“…겉멋력?”

“하는 짓 좀 보세요. 온통 화려한 이적 위주로 사용하고 있잖아요.”

그제야 셀린은 쿤타리안의 화려한 이적 사용에 정신이 팔려 몰랐지만 쿤타리안이 반데르를 제대로 활용하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어디까지나 쿤타리안의 기본 무력은 <마스터>라는 경지에서 나오는데 쿤타리안은 이적과 갑옷에 걸린 방어만으로 리안을 상대하고 있었다.

“뭐… 아마도 보여줄 거 다 보여주고 마지막에 멋지게 제압해서 굴욕을 주겠다는 속셈인 것 같은데… 형한테 저런 짓 하면 별로 좋진 않을 텐데.”

“아, 맞다!”

그제야 셀린은 역대로 로만가의 가주들에게 붙어있는 또 다른 별명을 떠올렸다.

<이능 사냥꾼>

로만가의 비전 반데르-로아는 그 특유의 강대하면서도 견고한 흐름 때문에 엑사르에 대한 저항력을 크게 높여주어, 엑사르를 사역하는 법도사나 엑서들을 상대로 강한 모습을 보여주고는 하였다.

1차전에서 사이온을 리안이 제압할 수 있었던 이유도 로만가 비전의 반데르-로아 운용으로 인해 사이온의 염동력이 리안에게 제대로 먹히지 않아서였다. 객관적으로 사이온의 전력은 리안보다 높았다.

“음… 리안은 근데 이적에 저항을 잘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연기예요, 연기. 저거 보세요. 조금씩 다가붙고 있잖아요. 한 방 모으면서.”

셀린도 그 소리를 듣고 자세히 보니 이적에 당하고 있는 듯하면서도 어느새 리안 경과 쿤타리안의 거리는 상당히 가까워져 있었다. 피해도 생각보다는 크지 않은 듯했다. 한 방을 모으고 있는지는 도저히 알 수 없었지만.

하지만 곧 셀린도 알 수 있었다.

갑자기 리안 경의 몸에 걸려있던 온갖 이적이 한순간 확 하고 밀려나더니 쿤타리안에게로 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리안의 칼이 거칠게 휘둘러지며 쿤타리안의 빛나고 있던 갑옷과 거세게 충돌하였다.

쿤타리안은 갑작스럽게 자신이 사역하던 엑사르가 모조리 흩어지자 한순간 당황하였고 그 바람에 안 그래도 보이던 틈을 리안에게 더 크게 열어주었다.

당연히 리안은 그런 틈을 놓칠 실력은 지난 지 오래였다.

“커억!”

쿤타리안은 ‘엘란의 휘광’을 깨부수며 들어온 칼의 반데르가 자신의 몸을 강타하는 것을 느끼고 단말마의 비명을 내뱉었다.

이런 한 방을 준비하고 있었다니! 엑사르를 사역하는 데 집중하여 상대의 반데르 흐름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였다.

“으드득! 개자식이… 죽여버리겠다!”

크게 한 방을 얻어맞고 쿤타리안은 이를 뿌드득 갈았다. 멋진 모습만 보여주어도 모자란 자신에게 이런 치욕을 주다니! 그것도 저렇게 약한 녀석에게!

피해가 크진 않았지만 자신의 당황한 모습이 저 관중석에 까발려졌다는 것이 치욕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랑-반더고 로만 백작이고 머릿속에서 모두 지워진 쿤타리안은 눈앞의 리안을 으깨어 버리겠다는 생각만 머리에 남긴 채 몸속에 잠들어있던 막대한 양의 반데르를 전신에 휘돌리며 칼도 던져버리고 리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리안은 한 방 먹인 후에도 자만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침착하게 쿤타리안의 공격을 막아갔지만 워낙 반데르의 양과 육체적인 능력치 차이가 심하게 났기에 금방 방어가 뚫리고 말았다.

퍼억! 빠악! 꽈드득!

“…크윽…….”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광폭한 공격을 리안은 방어해보려고 했지만 결국에는 막지 못하고 정신없이 전신을 난타 당했다.

쿤타리안이 정신을 차리고 공격을 멈췄을 때에는 이미 리안의 전신이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기절은 하지 않았지만 심하게 맞은 상태라 리안은 당장이라도 신관의 치료가 필요한 상태였다.

‘이런… 큰일 났군.’

이성을 잃고 공격하긴 했지만 이 녀석이 이 정도까지 다쳤으면 로만 백작이 분노할 수도 있었다.

목숨이 위험하거나 불구가 되진 않겠지만 자신의 자식이 두들겨 맞는 데 좋아할 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황급히 나라샤 국왕과 로만 백작이 앉아있는 방향을 바라본 쿤타리안은 의외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로만 백작은 화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근심 어린 표정으로 객석의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건 나라샤 국왕도 마찬가지였다.

‘…뭐지?’

그들의 시선을 따라 객석의 한구석을 바라보려던 쿤타리안은 리안이 계속 무어라고 중얼거리자 시선을 좇는 것을 중지하고 그쪽에 귀를 기울였다.

‘참아라… 괜찮다… 말아라…….’

“뭐야, 이 자식.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쿤타리안은 호기심이 생겨 무릎 꿇고 있는 리안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참아라, 시안. 나는 괜찮다… 괜한 짓 하지 말아라…….’

“……?”

쿤타리안은 그가 중얼거리는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곧 패배한 놈의 넋두리라고 생각하며 신경을 껐다.

괜히 드는 오싹한 느낌은 로만 백작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어서 우승해서 그 칼을 얻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뭔가 계속 찝찝한 느낌이 드는 바람에 기분이 다운된 쿤타리안은 빨리 트라안 거리에 가서 이 기분을 풀어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경기장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그리고 로만 백작과 나라샤 국왕의 시선이 걸려있던 객석에 앉아있던 시안은 그 광경을 경기장 위에서 쭉 지켜보고 있었다.

“음… 저… 시안, 괜찮니?”

아까부터 묵묵히 경기장을 지켜보고 있는 시안의 표정을 보기 위해 셀린은 시안 쪽으로 몸을 가까이 다가갔다.

“…히익!”

그러고 시안의 표정을 확인한 셀린은 단말마의, 여성스런 비명을 내뱉으며 뒤로 물러섰다.

“야… 시안… 진정해, 진정. 괜찮을 거야. 저기 신관들도 신호 보내잖아.”

경기자의 부상으로 인한 불구나 사망을 막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던 신관들은 쿤타리안이 나간 후 덩그러니 남아있는 리안을 살피더니 노란 깃발을 올렸다.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악화되거나 위급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며칠 정양을 잘 하고 집중적인 신관들의 치료를 받는다면 금방 좋아질 것이다.

칼집 손잡이에 손을 얹고 칼을 뽑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시안을 본 셀린은 놀랍게도 쿤타리안 녀석이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으아… 명복을 빈다.’

아마 이번에는 뒤통수가 깨지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음… 죽이지는 않겠지……?’

셀린은 확신할 수 없었다.

시안은 지금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리안은 쓰러지기 전까지도 정당한 대결이었다며 끊임없이 괜찮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조그맣게 속삭이고 있었지만 자신이 다 듣고 있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몇백 미터 따위는 장애가 되지 못하니까.

‘…뭐가 정당한 경기라는 거야, 형.’

쿤타리안이라는 자식은 리안이 항거불능의 상태가 되었는데도 끊임없이 두들겨 팼다.

형은 가만히 있으라고는 했지만 저대로 맞으면 불구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에 형 몰래 기운을 보내 보호하였기에 망정이지, 만약 움직이지 않았다면 형은 아마 불구가 되거나 죽었을 수도 있다.

아마 형이 끼어들지 말란 말이 없었으면 아마 이 자리에서 저 자식 손목을 잘라버렸을 것이다.

형을 존중하여 몰래 도왔기에 다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더 도와주었다면 그의 형은 자신이 도운 것에 대해 알아차렸을 것이다.

형에 대한 존중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여기까지 했으니 형도 더 이상 자신을 말릴 수는 없을 것이다.

우선은 무투회가 끝날 때까지는 놓아둔다. 녀석에 대한 시선이 조금 사그라질 때까지.

괜히 지금 가서 행동하면 형이 당한 것에 대해 아버지인 로만 백작이 복수하였다는 말이 나올 수 있으니까.

저 녀석을 어떻게 할 수 있는 자는 수도에 그랑-반더밖에 없다. 아버지에 대한 혐의가 몰릴 것이고 이는 아버지의 명예에 누가 될 것이다.

‘기다려라, 반푼아…….’

기다리는 동안 이 감정이 사그라질 것 같지는 않다. 여기에 대한 이자를 차곡차곡 붙여줄 것이다.

그리고 그 채무는 저 녀석이 몽땅 몸으로 갚아야 할 것이다.

☆ ☆ ☆

쿤타리안은 리안을 꺾은 이후로도 순조롭게 승리를 이어갔다.

리안에게 데인 이후로 장난치지 않고 전력을 다해 덤볐기에 티안의 내로라하는 무장들도 쉽사리 녀석을 이기기 힘들었고 결국에는 우승을 거머쥐었다.

칼로안에서 우승한 자는 여러 가지 우승상품 중 한 가지를 고를 수 있었다.

쿤타리안이 고른 것은 <북벽의 수호>나 <카란달의 분노> 같은 명품 아티팩트가 아닌, 구석에 자리하고 있던 한 자루의 칼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의아해했다.

수많은 방어법진이 고루고루 걸려있어 사용자가 공격에만 반데르를 흘려보낼 수 있게 해주는 갑옷, ‘북벽의 수호’나 별다른 기능은 없지만 사용자의 반데르를 엄청나게 증폭시켜 주어 평소의 몇 배의 공격력을 가지게 해주는 ‘카란달의 분노’ 같은 무기에 비하면 쿤타리안이 고른 칼은 굉장히 보잘것없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 모를 칼.

쿤타리안이 선택한 칼은 예전에 대북벽에서 로만 백작이 귀환할 때 가져와 황실에 기증한 검이다.

대북벽을 지키던 중, 수림에 사는 이상한 부족의 습격을 받은 로만 백작은 그들을 모두 물리치고 그들의 족장으로 불리는 녀석이 휘두르던 이상한 칼을 입수하였다.

그리 강한 종족은 아니었지만, 족장이 들고 있는 칼이 위력이 상당했기에 로만 백작도 상당히 애를 먹었고, 이 때문에 호기심이 생겨 가져온 것이다.

녀석들이 만든 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기에는 거기에 사용된 기술이나 이능이 너무 고도의 수준이었다.

엑자일 대법도회에 가져와 분석을 의뢰하였지만 그들도 이 칼이 작동하는 원리를 밝히지는 못하였다.

단지 그 칼에 무언가 신비한 힘이 있고 사용자의 기력을 큰 폭으로 증강시켜준다는 것 이외에는.

애초에 법도에 의거하여 제작된 기술이 아니라는 대답도 들었다.

정체 모를 귀한 물건이었지만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엑사르와 반데르를 동시에 운용하는 사람들만이 이 칼을 제대로 휘두를 수 있다는 것.

봉인이 걸린 것인지, 칼이 변질된 것인지, 아니면 애초의 사용자가 엑사르와 반데르 두 가지를 동시에 다루는 자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만약 위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을 경우 칼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내부의 반데르 흐름에 간섭하였기 때문에 적합한 사용자를 찾지 못하고 왕실의 창고에 박혀 있다가 이번에 대무투회의 상품으로 나온 것이다.

로만 백작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쿤타리안의 선택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저 녀석이라면 칼의 성능을 어느 정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걸 어디 쓸지는 모르겠지만.

‘…근데 어떻게 알아본 것이지?’

그러한 특성은 써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는 것인데 단박에 칼을 고른 쿤타리안을 백작은 묘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사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저 녀석, 멀쩡히 돌아갈 수 있으려나.’

로만 백작은 자신의 아들 리안이 두들겨 맞기 시작할 때부터 리안보다는 시안 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리안이 맞을 때 아버지로서 가슴이 아프고 화가 나기는 했지만 무장으로서의 인생을 살면서 저 정도는 마땅히 감수해야 한다.

이제 맞는다고 울면서 아버지한테 이를 나이는 아니다.

리안 저 아이도 각오했을 것이고, 이런 일로 손을 벌릴 아이도 아니니 자신이 나설 일은 아니다.

그보다는 시안이 더 문제이다. 시안은 위의 사정을 봐주면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끊임없는 교육을 통해 항상 폭력을 조심하여 사용하라고 주입시켰지만 이번에는 그런 걸로 가로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시안 그 아이는 다른 욕구는 별로 없는 편인데 가족을 아낀다. 특히 형을.

형의 체면을 세워주려고 항상 조심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 않을까 걱정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일이 발생하였으니… 모르긴 몰라도 쿤타리안이라는 저 녀석은 죽지는 않을지 몰라도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아직까지 조용한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사실 자신은 시안이 뛰쳐나가면 말리려고 자신도 뛰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쿤타리안이라는 녀석이 시안 손에 적당히 두들겨 맞은 다음에.

‘시안, 죽이지만 말거라. 팔다리 하나 정도야, 뭐……. 그나저나 국왕폐하는 이미 시안에 대해 알고 계셨나 보군. 역시 능력 있으신 분이야.’

분명히 보았다. 객석에서 관람을 하던 국왕폐하가 자신과 똑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을.

시안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지 않다면 나올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걸 보고 안심이 되었다.

언젠가는 시안에 대하여 말을 했어야 하는데 너무 믿을 수 없는 사실이라 말하지 않고 있었는데 미리 알고 계시다면 이해시키기 수월할 것이다.

☆ ☆ ☆

칼로안이 끝난 지 일주일.

승리의 즐거움을 마음껏 즐긴 쿤타리안은 슬슬 결합의식에 들어갈 준비를 하였다.

방해를 받으면 안 되기에 수도의 외곽지에 있는 자그마한 저택을 빌린 쿤타리안은 흥분한 상태로 자신의 앞에 있는 칼을 바라보았다.

결합의식이 시작되면 자신은 새로이 태어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로만이나 키라인이라는 늙은이는 하나도 두렵지 않으리라.

자신의 심장을 대신하고 있는 칼-굴족 전사의 심장이 그러한 사실을 강렬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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