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20화 (21/81)

<20. 계승>

<세상에는 맞아야 할 놈이 너무 많다.>

-시안 폰 로만 경 어록,

가장 즐겨 쓴 대사 15선

☆ ☆ ☆

쿤타리안은 몰락 귀족가에서 태어났다.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귀족이라고 할 수도 없었던 그는, 열다섯이 되던 해 귀족가가 완전히 망한 후 강제로 용병으로 떠돌 수밖에 없었다.

원래부터 좋지 않던 성격은 용병생활을 하며 더욱 안 좋아졌고, 실력 또한 그에 걸맞은 수준이었기에 용병생활 1년 만에 죽음을 맞이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용병들의 수발을 들며 하늘산맥 아래쪽의 수상한 연구실의 탐사를 돕던 그는 함정이 발동하자마자 가장 먼저 버려졌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연구실에 버려져 갇힌 상태로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었다.

필사적으로 연구소를 뒤지며 먹을 것을 찾던 와중, 연구소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던 수상한 심장을 발견했다.

수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연구소가 지어진 지 수백 년이 넘었다고 조사되었는데 심장은 몸에서 갓 뽑아낸 듯 아직도 살아있는 듯 생생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쿤타리안은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아니었다. 배고픔에 이성을 잃은 그는 곧바로 그 기묘한 심장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웠고, 모두 먹어치우자 마자 극심한 통증과 함께 정신을 잃으며 쓰러졌다.

정신을 차린 그는 머릿속에 떠다니는 기묘한 지식과 몸을 휘감는 강대한 힘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먹은 것이 고대 제국과의 전쟁에서 공멸한 <칼-굴>의 심장이라는 것. 그리고 자신은 그 심장을 먹음으로써 그 힘을 고스란히 먹어치웠다는 것.

아마도 제국이 칼-굴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이곳에서 연구하던 걸 자신이 먹어치운 모양이었다.

물론 모든 힘과 기억을 소화하지 못하였다. 결정적으로 한 가지가 부족했다.

칼-굴의 전사였던 이자가 사용하던 무기.

칼-굴의 힘은 심장과 무기에 담겨 계승되기 때문에 그 무기를 찾아야만 심장에 담긴 힘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었다.

처음 힘을 얻은 쿤타리안은 애초에 그 칼을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 심장의 주인이 칼-굴족이라면 그 칼은 아마 고대 제국영토에 있을 텐데 그 칼을 어떻게 찾는다는 말인가.

게다가 싸우면서 칼을 찾지 않겠다는 생각은 더욱 명확해졌다.

자신의 힘이 칼을 찾지 않아도 충분히 강대하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굳이 모든 힘을 소화하지 않아도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는 자가 없었다.

자신을 버린 용병을 찾아 찢어 죽이고 귀족가에 고용되어 자신의 힘을 만끽하던 중 수도로 들어왔고, 수도로 들어온 순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칼이 수도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그랑-반더라는 강대한 존재를 처음 알게 되면서 칼에 대한 갈망은 더욱 강해졌다.

이토록 강한 자신이 누군가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장이 거칠게 자신을 재촉하고 있었다. 저 칼을 얻는 순간, 너는 이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위대한 종족인 칼-굴의 힘을 계승하게 될 테니까.

여차하면 칼을 훔칠까 하는 생각도 하고 있었는데 칼로안의 우승상품에 그 칼이 껴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하늘이 나를 돌보는 게 틀림없다! 하하하!”

크게 웃은 쿤타리안은 바로 대회에 참가했다. 이미 계승전에서 수많은 마스터를 패퇴시킨 그는 이미 티안에 그랑-반더 빼고는 자신의 적수가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은 순조롭게 풀려 자신의 눈앞에는 자신의 심장의 주인이 사용했던 칼이 놓여있었다.

“후후후후… 후하하하하하하!”

크게 웃은 쿤타리안은 자신의 눈앞에 들려있는 칼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떨리는지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천천히, 칼을 자신의 심장 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심장을 얻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전신을 자극하는 극심한 통증에 정신을 잃으며 쓰러졌다.

“으음…….”

정신을 차린 쿤타리안은 사태 파악을 위해 주위를 살펴보다가 이윽고 자신의 몸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알아야 함을 깨닫고 몸의 내부를 살폈다.

그러고는 안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는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하! 하하하! 그래, 키라인 그 늙은이의 암습을 알아챌 수 없던 것도 이해가 간다. 흐흐흐흐… 이런 힘이라니!”

자신의 내부에 휘몰아치는 강대한 힘에 쿤타리안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자신이 생각한 상상 이상으로 그랑-반더라는 경지는 대단했다.

거기다 머릿속에는 예전 심장을 얻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지식과 경험이 자리 잡고 있었다.

칼-굴이라는 전사가 싸우며 얻은 모든 전투경험과 기억이 자신의 머릿속에 고스란히 옮겨왔다.

엑사르와 반데르를 동시에 사역했던 강대한 종족, 칼-굴의 전사의 힘이 시공을 넘어 자신에게 재현한 것이다!

새로이 얻은 이 힘을 가지고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쿤타리안은 우선 자신에게 건방지게 암습을 가한 키라인 늙은이를 짓밟아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셀린 그 건방진 여자를 망가트려 주리라.

지금 상태라면 수도에 있는 그랑-반더 녀석들 셋이 덤벼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걱정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후후후후후… 기다려라, 늙은이들. 하하하하하하!”

“다 웃었냐?”

“…무슨!”

쿤타리안은 바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칼로 힘을 깨운 후 자신의 감각은 놀랍도록 증강되어 수십 미터 안의 개미 새끼 한 마리의 기척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아무리 자신이 새로 얻은 힘에 취해 있었더라도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온 자를 알아채지 못하다니!

놀라 뒤를 돌아보니 어디선가 보았던 얼굴이 까드득 이를 갈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새끼. 기절한 동안 패면 덜 아플까 봐 일부러 여기서 한 시간 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이해가 못할 말을 해대는 녀석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니 이제야 어디서 보았던 녀석인지 생각났다.

저번에 셀린 그년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녀석이었다.

키라인 늙은이의 습격 때문에 미처 혼내주지 못했었는데 이렇게 자신의 눈앞에 찾아오다니!

쿤타리안은 놀람도 잊고 즐거움에 가득 차 눈앞의 애송이를 바라보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후후후. 마침 잘 되었구나. 새로 얻은 이 힘이 익숙해질 때까지 시험해 볼 대상이 필요했는데. 허공에 실험하면 재미없는데 딱 좋은 타이밍에 나타났…….”

뻐어억!

“…커억!”

쿤타리안은 묵직한 격타음과 함께 배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하던 말을 잇지 못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커억… 큭… 이 무슨……!”

쿤타리안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 못하고 고통에 몸부림쳤다.

“긴장해라, 이 새끼야. 이제 시작이다, 나 그동안 모아놓은 연차 15일 치 다 달아놓고 나왔으니까. 빠드득!”

“……!”

힘을 풀지도 않았지만 워낙 열 받아 있었기에 반말이 절로 나왔다.

자신의 날아간 휴가를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이를 빠드득 간 시안은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되고 있는 쿤타리안을 향해 맹렬하게 칼집을 휘둘러갔다.

☆ ☆ ☆

“아… 시안 이 녀석이 없으니까 영 심심하네…….”

셀린은 휴가를 쓰고 사라진 시안이 없어지자 왠지 모를 심심함에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어디 여행이라도 갔나… 치사한 녀석. 나도 좀 데리고 가지… 혼자만 좋은 거 하나…….”

말하던 셀린은 흠칫 놀랐다. 시안 녀석과 여행이라니.

심심해서 말이 잘못 튀어나왔다고 생각한 셀린은 잡생각을 지우기 위해 서둘러 근위기사단 연무장으로 달려갔다.

칼이라도 휘둘러야 이런 쓸데없는 잡념이 가실 것 같았기에.

셀린이 열심히 칼을 휘두르는 와중에 셀린이 궁금해하는 시안은 셀린의 예상과는 달리 열심히 노동작업을 반복하고 있었다.

☆ ☆ ☆

“커억… 크으윽… 커억…….”

빠악! 뻐억! 따아악!

쿤타리안은 근 2주간 진행 중인 폭행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2주 넘도록 저 악마 같은 자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도 내지 않았다.

그저 때리고, 때리고, 또 때리고… 2주간 잠시도 쉬지 않고 그 행위를 무한반복하고 있었다.

자신이 강대한 힘을 가진 것이 저주스럽기는 처음이었다.

칼-굴족의 힘은 자신에게 엄청난 재생력과 정신력을 선사하였다.

덕분에 죽지도 못하고 기절하지도 못하고 두들겨 맞으며 극심한 격통을 겪고 있었다.

단 한 대 맞았을 때도 자신이 예전 칼침 맞고 등짝에 금이 갔을 때보다 더욱 고통스러웠다.

그런 것을 현재 15일간 맞기 시작한 이래로 단 1초도 쉬지 않고 두들겨 맞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살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이 자식이 나한테 왜 이러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은 지 오래였다.

쿤타리안은 단 한 가지만 생각하며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끄윽… 휴가는 15일… 15일… 15일…….’

오늘이 그 15일째이다. 휴가를 쓰고 나왔다고 하니 오늘이면 지긋지긋한 폭행이 끝난다는 것이다.

쿤타리안은 정신줄을 놓을 것 같은 상황에서 그것 하나만 생각하며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쿤타리안의 얼굴에 희망이 돌았다.

그 미묘한 표정 변화를 알아챘는지 시안이 한 번도 열지 않던 입을 열었다.

“뭐야, 너. 왜 그런 희망에 찬 표정을 짓는 거야.”

시안은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그러더니 오른손으로는 계속 구타를 하면서 왼손으로 하나둘 숫자를 세어보고 깨달았는지 웃었다.

“야, 너 설마 오늘이 15일째라고 좋아하는 거야? 휴가 끝났다고?”

흠칫!

쿤타리안은 두들겨 맞으면서도 자신의 속내를 들키자 몸을 움찔 하고 떨었다.

그걸 본 시안이 비웃으며 말했다.

“야, 내가 언제 휴가가 15일이라고 했냐. 연차 15일 냈다고 했지. 원래 휴일까지 합하면 아직 6일 더 남았어. 주말은 원래 쉬니까.”

“허… 허윽!”

그 말을 듣는 순간 쿤타리안은 숨이 넘어가며 이제까지 자신을 지탱해 오던 모든 희망이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칼-굴의 힘을 바탕으로 한 강대한 정신력으로 간신히 15일을 버텨왔는데… 6일이 더 남았다고 하니 정신이 통째로 붕괴된 것이다.

맞던 와중 고개가 꺾인 쿤타리안을 보고 시안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야… 아직 기절할 리가 없는데… 조절하며 때리고 있는데……?”

근데 분위기를 보니 수작질이 아니었다. 진짜로 정신이 나간 것이었다.

시안이 이 돌발상황에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하다니!

그러던 와중 갑자기 쿤타리안이 다시 눈을 번쩍 떴다.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이다.

하지만 시안은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상을 팍 쓰며 쿤타리안을 째려보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누구십니까. 아까 그 반푼이 어디 갔어요?”

시안의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은 쿤타리안은 당황하지 않고 시안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아까의 탁한 기운이 휘몰아치고 있는 눈동자가 아닌, 지극히 정련된 기운이 쿤타리안의 눈동자 속에서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칼-굴의 전사.

그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이름이란 서로를 인지하지 못하는 개체들이 서로를 구별하기 위해 임의로 붙인 것.

태어나면서 종족 전체가 링크되어 있고 서로를 느끼고 구별할 수 있는 그들에게 이름이란 하등의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인간과의 전쟁 중 포위당해 죽어갔던 경험을 마지막으로 그 뒤의 기억이 없던 그는 자신이 깨어나는 것을 느끼며 순식간에 전신의 감각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주위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상황을 보니 <계승의 의식>의 부작용이 나타난 것 같은데…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부작용인 <전혼>은 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계승의 의식’ 자체는 매우 간단했다.

의식의 대상자가 피대상자의 힘의 근원인 심장을 먹고 혼의 근원인 애병을 심장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렇게 되면 대상자는 피대상자의 힘과 경험을 모두 얻을 수 있게 된다. 자신들은 이러한 방법을 통해 끊임없이 힘을 계승해왔다.

하지만 ‘계승의 의식’중 가끔, 아주 가끔 일어나는 부작용이 있다.

만약 의식의 대상자가 ‘영혼을 뒤흔들 만한 강렬한 충격’을 받게 되면 그 안에 있던, 피대상자의 의식과 혼이 대상자의 의식과 혼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러면 기존의 피대상자는 의식의 대상자의 몸을 빌려 다시 되살아나게 된다.

이 부작용을 <전혼>이라고 한다.

대상자 입장에서는 굉장히 꺼려지는 부작용이지만 이제까지 <전혼>이 나타난 경우는 종족 내에서도 거의 없었다.

칼-굴족의 특성상 전사 계급도 그 영혼의 견고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계승의 의식만 마쳐도 대상자는 이루 비할 데 없는 강대한 힘과 정신력을 가진다.

이런 영혼을 뒤흔들려면 정말 강렬하면서도 지속적인 충격이 강해져야 한다. 영혼을 흔들 정도의 충격을 받으려면 보통 육체가 먼저 박살 나기 마련이라 <전혼>이 나타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이다.

“…누구십니까. 아까 그 반푼이 어디 갔어요?”

자신에게 말을 거는 눈앞의 남자가 의식을 성공시킨 자이리라.

의식의 대상자의 기억을 모두 흡수한 터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대상자의 기억을 가지고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그는 입을 열었다.

“그… 그… 자는 이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자의 의식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처음에는 부자연스러웠지만 점차 발음이 자연스러워지더니 어느새 그는 티안 왕국어를 유창하게 발음하였다.

시안은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깨달았다.

생긴 것과 에너지, 기세는 방금 전의 쿤타리안과 다를 것이 없었지만 <존재> 자체가 달랐다.

아까의 반푼이는 사라지고 지극히 정련된 <무엇>인가가 저 안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자신이 화풀이할 대상은 쿤타리안이라는 녀석이지, 이런 <존재>가 아니었다.

“아… 이런… 으하… 흐으…….”

남은 육 일간 더 패주었어야 하는데 녀석을 놓쳐버린 시안은 안타까운 마음에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리고 수도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신은 반푼이와 볼일이 있었던 것이지 저런 존재와 볼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 모습을 쿤타리안 안의 그는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 아니 이제 새로이 쿤타리안으로 태어난 자는 힘없이 걸어가는 시안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시안은 쫓아오는 뉴버전 쿤타리안이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느꼈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 ☆ ☆

셀린은 돌아온 시안을 보며 애써 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걸었다.

“오! 시안! 돌아왔네. 하하, 그동안 무슨 일……! 야, 너 저거 뭐야?”

시안을 보고 말을 하다 뒤에 따라오는 쿤타리안을 본 셀린은 일그러진 얼굴로 되물었다.

“음… 얘기하자면 좀 복잡한데… 이 사람은 쿤타리안 아니에요, 이제.”

“엉? 뭔 소리야, 도대체?”

저렇게 잘생긴 얼굴이 흔할 리도 없고, 무엇보다 자신을 한 달간 쫓아다니던 녀석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셀린은 도대체 시안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흠… 그게 그러니까…….”

시안도 답답했다. 억 하더니 쿤타리안이라는 녀석은 사라지고 탁 하고 다른 존재가 나타났는데 어쩌란 말인가.

“내가 설명하도록 하지.”

시안이 버벅거리자 시안의 뒤에 있던 쿤타리안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셀린은 쿤타리안이 다가오자 얼굴을 찡그렸지만 곧 무언가 다르다는 것을 눈치챘다.

기세는 비슷했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무언가 있기는 있다고 생각한 셀린은 쿤타리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음… 그러니까… 쿤타리안이라는 녀석이 이번에 우승해서 가져간 칼 속에 갇혀 있다가 나오셨다고요? 쿤타리안이라는 녀석은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그렇다.”

“허…….”

믿기도 어렵지만 안 믿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분위기나 느낌 자체가 달랐다.

건방진 애송이 느낌은 완전히 사라지고 중후한 느낌의 전사를 대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럼… 뭐라고 부르면 되나요?”

“음… 그냥 ‘칼라굴’이라 불러라.”

쿤타리안 안의 ‘그’는 모든 것을 시시콜콜 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거짓말을 섞어 각색하여 말해주었다.

이름은 적당히 자신의 종족의 이름을 이곳 제국어로 바꾸어 만들어내었다.

“…근데 왜 반말이세요, 자꾸?”

느낌이 달라졌다지만 재수 없는 녀석이던 쿤타리안의 얼굴로 반말을 하니 심기가 상한 셀린이 툭 하고 내뱉었다.

“음? 반말이 무엇인가? 이자의 기억 속에는 이러한 말투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

쿤타리안은 아무래도 자신의 상상 이상의 놈이었던 것 같다.

존대라는 개념 자체가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다니!

똑같이 반말하자니 좀 불편하고 존댓말을 처음부터 가르칠 자신도 없는 셀린은 그냥 이 상태를 유지하기로 했다.

“뭐… 좋아요.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음… 나도 그걸 몰라서 왔다. 무엇을 하여야 할지 아직 모르겠군.”

이제까지의 말이 각색된 것이었다면 방금의 대사는 진심이었다.

이제는 칼라굴이 된 그는 앞으로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를 판단하지 못한 상태였다.

시안을 따라온 이유도 그것이었다.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기에 그저 육감이 시키는 대로 한 것이다.

예전 종족의 일부로서 살았을 때에는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집단지성이 자신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려주었으니까. 자신은 그 일부로서 행동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몸을 바탕으로 <전혼>하여 그런지, 남아있는 종족이 없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정신적인 연결이 끊어졌기에 지금 그는 갈 길을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딱히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이들은 제국이 아니거니와, 자신의 종족도 그저 도태되었을 뿐이니까.

셀린은 그런 칼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말을 걸었다.

“우선은 국왕폐하를 만나 보시죠. 저희 선에서 처리할 문제가 아닌 것 같네요.”

시안은 셀린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셀린은 쿤타리안이 훨씬 더 강해진 것까지는 느끼지 못하고 있겠지만, <올드 버전> 쿤타리안도 셀린 선에서 컨트롤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국왕폐하에게 데려가 말씀드리는 것이 나으리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음… 그게 낫겠군. 잘 부탁한다.”

말을 마친 후 칼라굴과 셀린은 왕궁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안은 따라갈까 말까 하다가 혹시나 저 녀석이 사고 치면 왕궁이 모조리 박살 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왕궁 안의 형이 다칠 수도 있기에 따라가서 감시하기로 마음먹었다.

☆ ☆ ☆

“음… 그렇단 말이지…….”

셀린이 쿤타리안, 아니 칼라굴을 데리고 왔을 때 대전에는 로만 백작과 나라샤 국왕, 키라인 검공까지 모조리 모여 있는 상태였다.

셀린에게 사정을 들은 나라샤 국왕은 고민에 빠졌다.

‘어? 한 번에 믿으시는 건가?’

셀린은 국왕폐하와 백작님, 할아버지까지 모두 자신의 말을 믿고 고민을 하고 있자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솔직히 셀린은 아직도 반신반의하고 있는 상태였다. 칼에 갇혀있는 영혼이 주인을 밀어내고 튀어나온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나라샤 국왕을 비롯한 두 그랑-반더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강대한 기운이 천천히 왕궁 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느끼고 셋 모두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기운의 정체를 확인하였을 때 두 눈을 의심하였다.

반푼이에 불과하던 녀석이 몇 주 만에 자신들보다 강대한 그랑-반더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게다가 그들도 쿤타리안의 안에서 느껴지는 무언가가 완전히 바뀐 것을 느끼고 있었다.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 안에 쿤타리안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다고.

나라샤 국왕은 곰곰이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우선 자네를 무엇이라 부르면 되는가.”

“그냥 칼라굴이라고 부르도록.”

“알겠다, 칼라굴. 갈 곳이 없다고 하였는가?”

“그렇다.”

칼라굴이 반말을 하였지만 나라샤 국왕은 개의치 않았다. 저 정도의 자격은 충분히 되는 존재였으니까.

“그렇다면 티안을 위해 일해 보며 할 일을 찾아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자네가 떠나기로 한다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도록 해 주겠네. 그리고 각종 지원을 약속하지.”

“흠…….”

칼라굴은 고민에 빠졌다. 현재로서는 나쁘지 않은 선택 같았다.

딱히 할 일도 없고, 무엇보다 지금 자신의 흥미를 끄는 존재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시안이라고 밝힌 자. 자신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한 자.

이 존재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고 싶었기에 칼라굴은 그 제안을 수락하기로 했다.

“알겠다. 수락하도록 하지.”

“좋아. 자네에게 내려질 직책은… 그동안 공석으로 놓아두었던 <드라고나>의 단장을 맡아주게. 단장이라고 하지만 떠나겠다면 붙잡지 않을 테니 부담 가지지 말게.”

“흠… 조건은?”

“자세한 사항이야 정해야겠지만… 자네가 원하는 것을 최선을 다해 지원하도록 하지.”

어차피 할 일도 없고 무리한 요구를 하면 떠나버리면 그만이니 잠시 고민하던 칼라굴은 가볍게 수락하였다.

어차피 적응하려면 도움이 필요하다.

나라샤 국왕은 우선 칼라굴이 수락하자 미소를 지었다.

그 예전, 전설로만 내려오는 일곱 뿔의 하리쟌의 이름을 딴 무장단체, <드라고나>는 유사시에 국가 외부의 문제 및 국지전의 해결을 위해 투입되는 무장단체이다.

근위기사단 및 무장단체들이 티안을 지탱하고 수호하는 방패의 역할을 한다면, 드라고나는 티안에 발생하는 돌발적이면서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는 창의 역할을 한다.

예전 7왕국들이 피 터지게 싸울 때는 활성화가 되어있었지만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면서 그 필요성이 적어져 어느 순간 이름만 남고 사라져 버린 무장단체이다.

나라샤 국왕이 드라고나를 부활시키기로 결정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 아니다.

이미 며칠 전부터 들어온 소식을 듣고 나라샤 국왕은 드라고나를 부활시키기 위해 고민하고 있었다.

우샤란 왕국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티안 정보부 소속에 의하면 우샤란 내부에서 무언가 굉장히 은밀하면서도 위험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고 한다.

우샤란을 기점으로 무언가 큰 변화가 일어날 조짐이 정보부에서 속속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기존의 무장단체나 기사단들은 다 제 역할과 임무가 있으니 유사시에 투입될 새로운 무장단체가 필요했는데, 거기에 적합한 것이 드라고나이다.

국지전이나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는 드라고나의 특성상 높은 수준의 무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단장으로 누구를 넣을지 마땅한 사람이 없어 고민하고 있었다.

자신과 로만 백작, 키라인 검공은 타란과 카란의 국경, 수도를 골고루 지켜야 한다. 남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때에 저런 강대한 존재가 굴러들어오다니!

나라샤 국왕은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하늘이 드라고나를 만들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랑-반더가 드라고나의 단장을 맡는다면 외부의 드라고나에 대한 신뢰도는 크게 올라갈 것이고 원활한 임무수행이 가능하리라.

그리고 새로 만들 드라고나에는 리안과 시안, 저 둘을 배치할 것이다.

시안을 더 이상 수도에 묶어두는 것은 인력낭비였다. 수도는 이제 안정화가 되기 때문에 저런 강대한 존재가 남아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

로만 백작에게 듣자 하니 형이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 않을까 걱정이 많다고 하였다.

그 때문에 리안을 드라고나에 넣을 것이다. 시안을 묶어두기 위하여.

형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임무 수행을 해야 하리라.

3근위기사단의 단장 자리 정도를 채울 마스터는 차고 넘치니 굳이 리안이 맡을 필요는 없다.

게다가 자신은 쿤타리안 안의 <저 존재>, 칼라굴을 완전히 믿지는 않는다. 칼에서 툭 하고 튀어나왔다고 주장하는 놈을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그렇기에 시안은 더더욱 드라고나에 들어가야 한다. 유사시 저 존재를 제압하기 위해서라도…….

제깟 놈이 사고 치려고 해 봤자 옆에 시안 저 아이가 있으면 두들겨 맞고 끝나게 될 것이다.

나라샤 국왕은 칼라굴이 자신의 계획을 수락한 것을 보고 첫 단추가 잘 끼워졌음에 만족하며 모두가 돌아간 후 이것저것 세부사항을 지시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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