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참전>
<내 군대가 두려움을 모르고 하나처럼 움직이게 만들어준다면 나는 내 군대의 절반, 아니 3/4을 줄 수도 있다.>
-타란의 초대 정복왕이 무장들을 바라보며 한 말
☆ ☆ ☆
현재 우샤란 왕국과 콘 왕국의 국지전 양상은 점점 더 격화되고 있었다.
콘 왕국은 수비의 이점을 이용하여 성벽에 새겨진 방어법진, 화력무기를 사용하고 있는데도 천천히 밀리고 있었다.
반더나 병사, 화력무기 수준의 차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물자가 풍부한 콘 왕국의 특성상 병사와 반더들은 우샤란 왕국보다 무장상태가 우수한 편이었다.
전력의 차이는 이번에 국경에 새로 배치된 우샤란 제국의 자율기동병기들 때문이었다.
우샤란 왕국이 예전부터 운용하던 저 자율기동병기는 강력한 위력뿐 아니라 감정이 없기 때문에 그야말로 전쟁병기로 적합했다.
가장 무서운 점은 모두가 정보를 공유하고 일심동체로 움직인다는 것.
지휘관들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이 의사소통체계와 군기, 두려움의 억제라는 점을 생각하면 저러한 자율기동병기의 강점은 실로 공포스러웠다.
이제까지는 그 수가 많지 않아 반더들과 포격병기로 어찌어찌 상대할 수 있었는데 이변이 벌어졌다.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기동병기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증가한 것이다.
콘 왕국과의 접경지역에 골고루 배치된 기동병기들은 무서운 속도로 콘 왕국을 압박해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급기야는 더는 밀리면 안 되는 요충지, 콩티앙 지방까지 밀고 들어왔다.
“하… 머리 아프군, 우샤란 녀석들……. 현재 전황이 어떤가?”
콩티앙 지방을 맡고 있는 국경 수호무장 사령관 그란달은 골치 아프단 표정을 지으며 눈앞의 부관에게 물었다.
“많이 밀리고 있습니다. 쿨라렌의 포격으로 어찌어찌 버티고 있습니다만… 이 기동병기라는 녀석들을 맞히기가 워낙 힘든지라…….”
<쿨라렌>
엑사르와 과학을 융합하여 만든 이 거치형 방어식 포탑은 탈릭 스톤 사용량을 극대화시킨 예술품이다.
1급 법도사 쿨라렌의 설계를 기반으로 드콘족과의 협동작업을 통해 만들어진 이 포탑은, 그 안정성과 높은 효율성을 인정받아 국가 간의 접경지역에 널리 배치되어 있었다.
실제로 쿨라렌은 우샤란 왕국의 일반 보병 및 공성병들을 효율적으로 방어해내고 있었다.
문제는 저 자율기동병기. 저 녀석들은 하나하나가 반더에 해당된다.
애초에 포탑은 반더들을 제압하기 위한 용도로는 적합하지 않다.
익스퍼트 급의 반더만 되어도 포격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그 포격범위를 피해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며, 익스퍼트를 맞힐 정도의 고성능 포탑은 탈릭 스톤의 소모가 너무 심하다. 그 정도의 탈릭 스톤이면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반더는 반더가 상대하는 것이 가장 효율성이 좋다.
게다가 저 녀석들의 무서움은 전쟁에서 발휘된다.
각자의 개성이 강한 반더들과는 다르게 저 녀석들은 실시간으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가장 효율적인 진형을 구사하니까.
콘 왕국이 자랑하는 무장단체, <검은 별>이 콩티앙에 머무르고 있지 않았다면 진작에 밀리고 말았으리라.
“후아… 크라나샤 경이 분투하고 있는데도 이렇다니… 무장이 그렇게 우스운 존재인가? 저런 기계쪼가리가 무장들과 맞상대를 하고 있다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란달은 저 녀석들의 위력에 전율하고 있었다.
전쟁을 위해 키워졌지만 사람으로 태어난 존재인 반더와는 다르다.
저 기계병기들은 아예 전쟁을 위해 태어나 전쟁 중에 사라진 목적으로 존재하니까.
“그래도 오늘 중에 티안 왕국으로부터 지원군이 도착합니다. 그렇게 되면 숨통이 트이겠지요.”
“그나마 참 다행이군. 더 늦었으면 위험했겠어. 그나저나 티안 왕국도 대단하군… 그랑-반더를 보내준다니.”
“아무리 잇몸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지만… 이번 일로 티안 왕국에 빚을 지게 되었군요.”
이번에 파견될 ‘드라고나’라는 곳의 단장은 티안 왕국이 숨겨왔던 그랑-반더라고 한다.
다른 구성원은 몰라도 그라면 된 거다. 그리고 자신들의 왕국은 이번 위기를 넘기면 이 빚을 갚아야 할 것이다.
“슬슬 도착할 때가 되었을 겁니다.”
“그래. 내가 나가봐야겠군. 크라나샤 경도 부르도록 하게. 이제 등을 맞대고 싸울 상대인데 서로 소개를 해야지.”
그랑-반더 정도 되면 자신이 나가서 맞이해야 한다.
그는 부르는 김에 ‘검은 별’ 무장병단도 부르도록 했다.
상황이 급박하니 따로 인사할 시간이 없다.
“안녕하십니까, 잘 오셨습니다. 콩티앙 지방 담당 사령관, 그란달입니다…….”
“반갑습니다. 이번 드라고나의 책임자인 칼라굴이라고 합니다.”
도서관에서 헛된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닌지라 어느새 예법을 익힌 칼라굴이 능숙하게 이곳의 책임자인 그란달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쪽은 ‘검은 별’의 단장 크라나샤 경입니다.”
“크라나샤입니다. 이미 칼라굴 경에 대한 소식은 들었습니다.”
크라나샤는 칼라굴을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랑-반더는 어디서나 이런 눈빛을 받고, 또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칼라굴입니다. 과찬이십니다. 크라나샤 경의 무훈이야말로 저희 티안까지 퍼져있지요.”
칼라굴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검은 별’은 7왕국 중 하나인 콘 왕국이 자랑하는 다섯 개의 무장단체 중 하나로, 콘 왕국의 사대 무장가와 함께 콘 왕국을 지탱하는 기둥 중 하나였다.
그 ‘검은 별’을 이끌고 있는 크라나샤 경은 마스터 중에서도 당해낼 자가 없을 만큼 높은 경지를 이룩한 무인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오죽하면 현시대를 공부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칼라굴이 알고 있겠는가.
“쉴 곳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상황이 급박하여 오래 쉬지는 못하겠지만… 우선 짐을 풀고 오시지요.”
“상황이 급박한 건 바로 알 수 있군요. 리안 경과 셀린 경은 안내를 따라 단원들을 통솔하여 짐을 풀고 오도록.”
자율기동병기들은 휴식이 필요 없다는 강점을 이용하여 24시간 콩티앙을 공략 중이었고, 그 때문에 드라고나가 도착한 지금도 쿨라렌의 포격소리는 끊이지 않고 들리고 있었다.
칼라굴도 어차피 놀러 온 것이 아니었기에 단원들의 재정비가 마쳐지면 곧바로 콩티앙과 합류하여 움직이기로 했다.
단원들이 재정비를 끝마치고 모두 모이자 칼라굴은 그란달 밑의 부관 및 참모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부분을 맡아주면 되는가?”
“우선은… 카누안과 켈-루펀에 대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참모들은 드라고나에게 현재의 상황과 자신들의 전력, 적들의 전력, 병력배치, 계획 등을 이야기해주며 역할을 나누기 시작했다.
대충은 보고서를 통해 들었지만 자세한 사항을 듣는 것은 처음이기에 귀를 기울이던 신입들은 곧 기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무슨 신화 속에서 나오는, 전쟁신의 사냥개 같은 녀석들 아닌가?
지치지도 않고, 조직적으로, 집요하게 상대방을 노리는 전쟁병기들!
파놀란을 비롯한 신입들의 표정에 긴장감이 돌았다.
표정의 변화가 없는 건 칼라굴과 리안, 셀린뿐이었다.
리안은 시안이 미묘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의아해했다.
‘음? 왜 그러지? 저 아이가 이 정도로 당황할 아이가 아닌데…….’
자신의 동생은 적 때문에 당황한 적이 없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상당히 위협적이지만 칼라굴 경이나 시안을 위협할 정도는 아닐 터이다.
실제로 시안은 당황한 것이 아니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 그 상자 안에 들어가 있던 장난감들이 다 어디로 갔나 했더니…….’
상자 안에 땡전 한 푼도 남아있지 않길래 고장이 났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알 것 같다.
원리는 모르지만 상자 안에 있던 것들은 모조리 우샤란이란 곳으로 넘어갔나 보다. 그리고 우샤란이란 곳은 그걸 써서 콘 왕국을 압박 중이고.
그런 생각이 드니 그 절도범이 어느 출신인지도 예측할 수 있었다.
‘아… 이 절도범 아저씨… 어후…….’
마지막에 짓던 그 득의양양한 미소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는데 이제는 알 듯했다.
시안은 요즘 한숨 쉴 일이 너무 많아지는 것 같았다.
☆ ☆ ☆
그론은 눈앞으로 맹렬하게 달려드는 카누안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늑대 모양을 한 이 4족 보행병기는 병기 주제에 반데르를 온몸에 칭칭 두르고 자신의 팔목을 물어뜯기 위해 사방을 돌며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크윽… 아까 진형이 깨지면 안 되었는데…….’
그 유명한 콩티앙의 ‘검은 별’들도 고전하는 녀석들이 자신의 검이 무서워 허둥대는 꼴을 보고 신이 나서 진형을 깨고 돌격한 것이 실수였다.
자신이 진형에서 분리되어 나오자마자 이 녀석은 언제 허둥댔냐는 양 전혀 다른 움직임을 구사했다.
애완견 같던 녀석이 순식간에 사나운 맹수로 변하여 자신의 목줄을 뜯어버리기 위해 달려들었다.
뒤를 돌아보았지만 진형을 구사하고 있는 다른 동료들도 이 녀석들에게 발이 묶여 도와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크윽… 기계주제에 유인이라니… 그런데 도대체 단장님은 왜…….’
그랑-반더인 칼라굴 경이 나선다면 이런 녀석들쯤이야 종잇장처럼 찢어발길 것이다. 하지만 칼라굴 경은 길목에 서서 다가오는 녀석들만 베어버리고 있을 뿐 돌격하고 있지는 않았다.
원망 섞인 생각을 하던 순간, 그론에게 빈틈이 생긴 것을 본 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몸을 웅크리더니 그 탄성을 한순간에 폭발시켜 자신에게로 날아오르는 카누안을 보며 그론은 자신도 모르게 거친 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고 말았다.
“크아!… 아… 악? 어?”
자신에게 다가올 격통을 예상하며 몸을 움츠렸지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자 그론은 눈을 뜨고 전방을 살폈다.
눈앞에 있던 카누안은 사지를 퍼드득거리며 기괴한 기계음을 내뱉고 있었다.
[ADQDA… DAS1AS… KSDF…….]
이윽고 작동이 멈추었는지 눈에서 나오던 붉은빛이 꺼지고 코어 부분에서 미약하게 새어 나오던 무지갯빛 또한 자취를 감추었다.
작동이 완전히 멈춘 것을 확인한 그론은 이곳이 급박한 전쟁터라는 것도 잊고 호기심에 다가가 카누안을 살펴보았다.
“……?”
카누안의 머리에는 아주 자그마한 쇠구슬 하나가 맹렬하게 회전한 흔적을 남긴 채 박혀 있었고, 쇠구슬은 카누안을 컨트롤하는, 대뇌에 해당하는 부위를 갈기갈기 찢어놓은 상태였다.
그걸 본 그론은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으로 칼라굴을 바라보았다.
칼라굴 경이 왕국을 지탱할 동량들인 자신을 죽게 내버려둘 리 없는 것이다. 손을 쓴 것이리라.
이에 자신감을 얻은 그론은 칼자루를 꼬나 쥐고 다시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 ☆ ☆
“와, 나… 암 걸리겠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용감해지지 또.”
성벽 안쪽, 전장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높은 첨탑에 참모들과 함께 자리를 잡고 있던 시안은 다시 미친 멧돼지처럼 달려드는 그론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단장 보좌라는 직책을 가졌던 터라 전쟁터로 가까이 불려나가지 않았기에 첨탑 위에 자리를 잡았다.
웬만하면 자신까지 끼어들지는 않고 싶었는데 보아하니 칼라굴이라는 양반은 저 친구들 목숨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가장 중요한 길목을 틀어막고 전투에 임하고는 있었지만 햇병아리들은 몇 명이 죽어나가든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눈앞에서 생목숨 죽어나가는 걸 보기에는 영 찜찜했던 터라 시안은 조용히 니츠마탄을 발동시켰다.
첨탑 안은 현재 시안을 제외하고는 전장을 통솔하느라 엄청나게 바빴기에 시안이 무얼 하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잠시 붉은빛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시안의 손에 조그마한 쇠구슬 여러 개가 나타났다.
여기 오기 전에 혹시나 해서 가져온, 공방에서 구매한 쇠구슬들이었다.
그리고 손끝에 구슬 하나를 조그맣게 말아 쥐고 딱 하고 튕겼다.
친구 딱밤 먹일 때나 쓰는 그런 동작이었지만 결과는 가볍지 않았다.
시안의 손가락 끝에 걸려있던 쇠구슬은 순간 사라지더니 실처럼 가는, 하지만 아주 선명한 선을 그리며 날아갔고 이윽고 파놀란의 목덜미를 덮쳐 가던 카누안의 머릿속에 원래 존재했던 양 나타났다.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는 쇠구슬은 순식간에 카루안의 머릿속을 갈아버렸고, 작동이 정지한 카누안을 이상한 눈으로 본 파놀란은 칼라굴 쪽을 한번 바라보더니 더 기운차게 전장으로 향해 나갔다.
“아, 쫌! 우리 형 말 좀 들어라… 으으…….”
사기가 충전된 것은 좋지만 진형은 지켜야 할 것 아닌가. 그 정도는 전쟁교범 한번 안 읽어본 자신도 알았다.
저기서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진형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형과 셀린 경이 안타까워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배운 사람들이라고 해서 많이 필요 없을 줄 알고 쇠구슬을 오백 개밖에 안 사왔거늘…….
정신 좀 차리라고 다치는 것으로 끝날 사람에게는 안 쓰고 죽을 만한 사람에게만 쓰고 있었는데 맹렬한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재수 없으면 며칠 안에 다 쓰게 될 것 같다는 불길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 ☆ ☆
“후우… 그래도 지원이 오니 훨씬 편하군. 티안에 큰 빚을 졌어.”
그란달은 보고서를 읽으며 오늘의 전투를 떠올렸다.
그랑-반더의 힘은 역시 대단했다.
그 상징인 강대한 빛의 칼은 자신들을 애먹이던 카누안을 무슨 두부 썰듯이 썰어버렸다. 오늘 그자가 썰어버린 카누안만 모아도 창고를 가득 채울 것이다.
게다가 경험도 많은 듯 전쟁의 맥을 정확히 짚어내고 가장 중요한 위치를 홀로 막아내었다.
덕분에 여력이 남은 자신들과 ‘검은 별’은 그 부분의 병력을 다른 곳에 집중시켜 훨씬 더 원활한 전투를 진행할 수 있었다.
부단장이라던 두 사람도 전장의 경험은 많지 않아 보였지만 눈이 좋았다. 흐름을 정확히 읽고 부대를 통솔하여 치고 빠지는 솜씨가 상당했다.
게다가 어려 보이는데 실력 자체도 상당했다. 특히 리안이라는 자는 ‘검은 별’의 부대장 급은 되어야 상대할 수 있을 듯했다.
“하긴… 로만과 키라인인데 당연한 건가……. 한데… 거기 딸려온 놈들은 도대체 뭐야…….”
위의 셋에 감탄을 했다면 나머지 놈들은 의문투성이였다.
무슨 자신이 돌격멧돼지인 줄 아는 놈.
자신이 전설의 영웅인 양 혼자 전장을 휘저으려는 놈.
옆의 동료와 몇 마리 물리치는지 내기하는 놈.
게다가 나중에 참모진의 보고를 들어보니 단장보좌라는 녀석은 첨탑에서 손가락만 딱딱 튀기면서 리듬만 타고 있었다고 한다.
실력이 나쁘다고 뭐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실력만 보면 꽤 괜찮았다.
문제는 태도.
실력은 익스퍼트인 놈들이 하는 짓은 무슨 전설의 라-반더였다.
게다가 진형을 지키려는 시늉만 하지 이성의 퓨즈를 몇 개 끊어놓은 것인지 카누안들이 유인작전만 펼치면 무슨 오리새끼들처럼 줄줄이 끌려 나가서 그걸 통솔하는 부단장 둘이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더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녀석들이 하나도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상자는 있을지언정.
‘음… 뭔가 내가 모르는 것이 있는 건가……. 뭐, 좀 더 지켜보면 알겠지…….’
몽땅은 아니더라도 하는 짓만 보면 삼분지 일 정도는 죽었어야 하는데 하나도 죽지 않다니.
어차피 불만은 없다. 단장과 부단장만 하더라도 충분히 지원군의 몫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한 그란달은 좀 더 살펴보고 판단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콩티앙 지방의 정벌을 담당하고 있는 우샤란 왕국의 2급 무장, 나즈갈은 갑자기 튀어나와 길목을 틀어막고 카누안들을 갈기갈기 썰어버리는 그랑-반더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미친… 올 것이 왔군. 그런데 다른 장군님들은 뭐 하시는 거지? 그랑-반더들은 모두 잡혀있는 것 아니었나?”
콘 왕국과의 국지전을 벌이는 지방 중 가장 중요한 지방이 네 곳 존재한다.
콩티앙 지방
아르샤란 지방
케르벨 지방
코도르바 지방
네 군데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기에 콘 왕국은 다른 곳은 내주더라도 이곳은 정말 미친 듯이 틀어막고 있었다.
어느 정도냐면 왕국에 셋만 존재하는 그랑-반더를 하나씩 배치해 놓을 정도.
콩티앙 지방을 제외한 나머지 세 군데는 각각 콘 왕국의 그랑-반더가 하나씩 배치되어 있었고, 그랑-반더를 효율적으로 견제하기 위해 그쪽 지방에도 자신들, 우샤란 왕국의 그랑-반더와 켈-루펀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확인 결과 다른 지역의 그랑-반더들은 여전히 머물러 있다고 합니다.”
“뭐? 그럼 저놈은 뭐야?”
휘황찬란한 빛줄기를 줄기줄기 뿌리며 사방으로 휘두르고 있는 녀석이 재현해내고 있는 파괴 행위는 마스터인 자신도 꿈도 못 꿀 이적이었다.
2급 전투장갑으로 몸을 두르고 있는 카누안들이 칼에 걸려 종잇장처럼 찢겨나가고 있었다.
대무장, 그랑-반더가 틀림없다.
“첩보부에서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이번 티안 왕국에서 보낸 지원병이라고 합니다.”
“뭐? 그랑-반더를 보냈다고? 지원병으로? 그걸 타란에서 눈뜨고 보고 있어?”
그랑-반더가 국경에서 빠진다면 늑대 같은 타란 놈들이 보고 있을 리가 없다.
실제로 자신들도 동맹인 타란 왕국이 무슨 수작질을 벌일지 몰라 그쪽 국경의 그랑-반더를 이쪽으로 재배치하지 못했다.
“타란 국경 지역은 로만 백작과 키라인 검공이 여전히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온 자는… 숨겨져 있던 그랑-반더입니다. 칼라굴이라고…….”
그러면서 보좌관은 가지고 있던 자료를 넘겨주었다. 나타난 지 한 달 좀 넘었지만 이미 칼라굴에 대한 정보는 세세하게 파악된 지 오래였다.
“허허허… 이번에 새로 왕이 된 나라샤라는 놈은 욕심도 없나. 저 그랑-반더를 돌리면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을 텐데… 저걸 다른 나라에 가져다 박아?”
나즈갈은 어처구니가 없어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애초에 티안에서 누구보다도 욕심이 많은 자가 될 수 있는 게 왕이니까.
티안의 왕이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욕심이 많다는 뜻과 같다. 저것도 무언가 생각이 있어 파견한 것이리라.
단지 눈앞에 자신의 길을 가로막은 그랑-반더 때문에 어처구니가 없어 나온 불평이었다.
하지만 그랑-반더는 그랑-반더고, 자신은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일단… 보고하고 지원요청을 날려라. 그랑-반더라고 칼 안 박히는 것도 아니고. 켈-루펀이 더 오면 그때 죽인다.”
“네!”
본국에서 실험을 실시한 결과 켈-루펀 스무 기만 붙어도 자국의 그랑-반더는 위태위태했다.
현재 켈-루펀의 숫자는 열다섯 기. 이걸로는 부족하지만 병기창에 남아있는 것들을 좀 더 지원받으면 확실히 죽일 수 있다.
“그 외에 추가적으로 보고할 사항은?”
“음… 이번에 지원온 부단장이 둘인데… 키라인가와 로만가의 인물들이라고 합니다.”
“허… 뭐라고? 그러면 그 리안이라는… 그 녀석이 온 거야?”
“네.”
“하하… 미치겠구먼. 이거 전쟁터에 로만가의 씨앗을 보내다니. 이거 남의 도박에 투자금이 너무 큰데. 아니면 우리를 그냥 핫바지로 보고 있거나.”
나즈갈은 기분이 나빠지는 것을 느꼈다.
리안이라는 녀석이 마스터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마스터야 흔하진 않지만 못 찾을 것도 없는 인재다.
문제는 이 녀석이 로만가의 자식이라는 것.
로만가의 인물은 이제까지 그랑-반더에 오르지 못한 자가 하나도 없었다.
즉, 이 아이도 몇십 년만 잘 키우면 반드시 그랑-반더에 올라 티안의 힘이 될 것이라는 것.
그런 자를 전쟁터에 보내다니. 믿는 구석이 있지 않고서야 우샤란을 무시하는 거라고밖에 볼 수 없다.
칼라굴이라는 자야 완성된 자지만 아직 애송이인 리안이라는 녀석은 켈-루펀 둘만 붙여도 죽일 수 있다.
“뭐, 땡잡았구먼. 어차피 콘 다음에 티안인데 이 기회에 죽여버려야겠다.”
사자 새끼는 새끼일 때 잡는 것이 가장 좋다.
“일단 조금 쉬려고 했는데 안 되겠군, 빠지면 도망갈 수도 있으니까. 그랑-반더는 카누안으로 시간을 벌고, 켈-루펀 몇 기를 리안이라는 녀석한테 붙여. 일단 지원이 오기 전에 리안이라는 그 녀석부터 반드시 죽인다.”
“네!
“내일부터 시작한다. 오늘은 일단 뒤로 카루안 물리고 포격만 실시해. 쉬게 해줄 수야 없지, 놈들을.”
나즈갈은 신호를 날리자마자 일반병사와 반더들을 호위하며 일사불란하게 빠지는 카루안들을 보며 다음 작전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 ☆ ☆
시안은 남은 쇠구슬의 개수를 세어보며 첨탑 위에서 여전히 일인포대 역할을 실행하고 있었다.
‘허… 고르고 골라서 쓰고 있는데도… 엄청난 속도로 줄어드네…….’
아무 때나 쇠구슬을 날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철저한 알고리즘에 의해 쇠구슬을 날리고 있었는데도 맹렬한 속도로 쇠구슬이 줄어들고 있었다.
0. 형과 셀린 경이 안전한가? YES라면 다음단계로.
1. 안 도와주면 죽을 것 같은가? YES라면 다음단계로.
2. 상대가 기계 병기인가? YES라면 다음단계로.
3. 상대가 한번 도와준 후에 멧돼지처럼 돌격하는 그 못된 버릇을 고쳤는가? YES라면 다음단계로.
4. 쏜다.
0이야 당연한 것이고, 1번의 경우야 찝찝해서 그런 것이고, 2번의 경우는 아무리 전쟁이라도 자신과 상관없는 전쟁에 사람을 죽이기에는 영 껄끄러워서 기계병기의 습격만 받을 때를 골라 막아주고 있었는데도 단 이틀 만에 쇠구슬은 절반도 남지 않았다.
게다가… 그론이랑 파놀란이라는 저자들은 도무지 3번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전생에 무슨 두더지였는지 상대 기계들이 구멍만 만들면 냅다 돌격을 하고는 했다.
보아하니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준다는 것을 깨달은 뒤로는 더 열심히 달려들고 있었다.
그걸 볼 때마다 시안은 이 쇠구슬을 저자들 뒤통수에 날려주어야 하나 하고 심각하게 고민하고는 했다.
오늘은 절대로 안 도와주겠다고 마음먹은 시안은 어김없이 달려가는 파놀란을 보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고 있으면 마음 약해질 수 있으니까 차라리 다른 곳을 보리라.
주욱 전장을 둘러보던 시안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카누안이라고 불리는 녀석들이 칼라굴이 다른 곳으로 못 가도록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것이 느껴졌다.
‘흐음? 안 저래도 될 텐데.’
칼라굴이라는 아저씨는 자신과 사상이 매우 유사했다.
굳이 위험을 몸소 겪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보다는 약했기에 국왕폐하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는 없어서 참전하기는 했지만 결코 위험한 곳으로 뛰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저렇게 다른 곳으로 시선 끌려고 안 해도 저 자리에서 결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저 위치는 가장 중요한 위치이기도 했지만 시야가 탁 트여있어 사방을 살피기 유리하고 도망치기도, 도움 받기도 가장 편한 곳이니까.
그나저나 저렇게까지 한다는 것은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시안은 전장의 다른 곳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곧 무엇이 문제인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자신의 알고리즘 0번에 위배되는, 배덕행위가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켈-루펀 몇 기가 카누안들의 뒤에 숨어서 형이 싸우고 있는 지역으로 슬금슬금 접근하고 있었다.
“흐휴… 따라오길 잘 했지.”
켈-루펀이라는 녀석들은 하나만 놓고 보면 형보다는 약했다. 하나하나가 셀린 경 정도.
형은 셀린 경 둘은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 켈-루펀이라는 녀석 둘을 상대로는 이기지 못할 것이다.
뭉칠수록 강해지는 녀석들이니까.
현재 접근하고 있는 켈-루펀의 개수는 넷.
옆에 셀린 경과 드라고나들이 같이 싸우고 있지만 싸움이 붙는 순간 모조리 썰려나갈 것이다.
‘흠… 저 녀석들은 구슬로는 조금 힘든데…….’
카누안들은 자신의 구슬이 날아가는 걸 보고 피할 능력이 없지만 켈-루펀들은 아마 인지하고 급소는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타격점이 흐트러져 녀석의 장갑을 뚫지 못할 수도 있다.
게다가 저 녀석들은 머리가 좋았다. 적어도 그론이나 파놀란이라는 작자들보다는 훨씬 더.
아마 한 기가 파괴되면 발사지점을 추적하고 저격 동선에 형이나 셀린 경을 놓고 싸울 것이다.
형을 지키는 데 그런 안일한 수법(?)을 쓸 수 없었다.
‘접근하기 전에 잡는다.’
여기까지 생각한 시안은 첨탑 바깥으로 손을 쭈욱 내밀었다.
☆ ☆ ☆
“후하하! 다섯!”
옆의 라시온이라는 녀석이 카누안을 베어 넘기며 외치는 소리를 듣고 ‘검은 별’의 단장, 크라나샤는 인상을 찌푸렸다.
‘…숟가락을 다섯 번 얹었다는 건가…….’
그래도 이 녀석은 진형이라도 지키니 다행이었다.
‘하… 그래도 제 몫들은 다들 하고 있으니 뭐라고 말도 못하겠고…….’
그랑-반더 하나만 해도 지원군의 역할은 톡톡히 하고 있었다.
게다가 저렇게 들이대는데도 신기하게 한 명도 죽지 않고 있었다. 아마 칼라굴이라는 그랑-반더가 뒤에서 암암리에 손을 쓰고 있는 것이리라.
크라나샤는 한숨을 쉬며 눈앞으로 다가오는 카누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순간 공간에 미약한 파동이 일면서 카누안의 앞발이 퉁 하고 튕겨나갔다.
균형을 잃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크라나샤는 자신의 애병을 휘둘러 카누안의 머리에 박아 넣었다.
크라나샤는 마스터인 동시에 공간과 관련된 이능을 사용하는 엑서인, 이종 이적 사용자였다.
유명한 무장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45라는 높은 반데르 수치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리고 열 살이 되던 해, 자신에게 엑서로서의 재능이 있음을 깨닫고 그 두 가지를 최대한 활용한 전투법을 익히기 위해 전력투구했고, 그 결과 마스터와 B-급 엑서라는 경지를 동시에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크라나샤는 이능과 반데르를 적절히 활용하며 최대한 효율적으로 카누안들을 차례차례 격살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간간이 리안이라는, 이번에 지원 온 부단장 녀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쟁터인데도 빛이 나는 외모를 가진 녀석은 여기서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눈에 띌 정도였다.
‘거… 고 녀석 참 탐스럽네. 하… 24살이라고 했나…….’
외모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재능 자체가 빛이 났다.
로만가의 녀석이라고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아직은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좀 투박한 맛이 있지만 몇 년만 갈고닦으면 자신도 상대하기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바꿔서 말하면… 지금은 충분히 죽일 만했다. 이런 남의 전쟁터에 보내기에는 그 성장가능성이 아까운 인재일 터인데.
죽을 위기에서 위기를 물리치고 실력이 향상된다는 말은 소설에서나 나오는 말이다.
죽을 위기라는 건 말 그대로 죽을 확률이 굉장히 높기 때문에 죽을 위기라는 것이고, 가만히 수련을 해도 그랑-반더가 될 인재를 보낼 만한 곳은 아니었다.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인가? 엇?!’
카누안 한 마리를 추가로 썰어버리며 리안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던 크라나샤는 갑자기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마스터이긴 하지만 동시에 엑서이기도 한 자신은 공간을 입체적으로 읽는 데 익숙했다.
따라서 저쪽으로 접근하고 있는 켈-루펀 네 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코어의 기동률을 최대한 줄이고 카누안의 뒤에 숨어서 접근하고 있었기에 발견이 늦었다.
진형을 살피니 목표가 누구인지 뻔히 보였다. 저 정도 숫자라면 자신도 반드시 죽을 숫자이다.
‘젠장! 나즈갈 개자식이… 작정했군.’
지금 켈-루펀 숫자 가지고는 그랑-반더한테 먹히지 않으니 우선 리안을 노리는 것이리라.
거리가 멀기에 달려가기에는 이미 늦었다. 이미 켈-루펀의 코어가 맹렬하게 에너지를 뿜으며 활성화에 들어가고 있었다.
우선 경고라도 해주어야겠다고 입을 열려 한 순간 크라나샤는 아찔한 기분을 느끼며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순간 균형을 잃고 카누안에게 물릴 뻔한 그녀는 금방 균형을 잡고 카누안을 튕겨내며 뒤로 물러나 자세를 다잡았다.
‘뭐야… 무슨 일이지?’
그녀의 차원공간인지 능력에 무언가 심한 뒤틀림이 잡혔다. 순간적으로 너무 변화가 심해져 들어오는 감각을 모두 소화하지 못하고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크라나샤는 다시 한 번 정신을 부여잡고 자신의 감각에 부조화를 일으킨 곳을 살폈다.
‘…뭐야, 저게?’
크라나샤는 이제까지 한 번도 자신을 속인 적이 없는 차원인지감각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켈-루펀, 정확히 말하면 네 기의 켈-루펀의 코어가 있는 곳의 공간이 한군데로 모여들고 있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공간의 이능을 사용하는 엑서가 아니었다면 결코 몰랐을 것이다.
같은 차원, 다른 공간에 위치하고 있던 네 개의 위상이 한군데로 모여들며 하나의 위상으로 겹쳐 들었다.
그리고 네 개의 코어 위상이 정확히 겹치는 순간, 위상 옆의 공간이 찢어지며 손 하나가 불쑥 하고 튀어나왔다.
‘……!’
쿠작.
놀란 크라나샤가 보는 앞에서, 새하얀 손은 그대로 코어를 붙잡아 으깨버렸다.
움켜쥔 손짓은 한 번이었지만 동시에 네 개의 코어가 으스러져 버렸다.
폭발하며 뛰어오를 준비를 하던 켈-루펀은 순간 작동을 멈추고 땅바닥에 가동을 멈추며 쓰러졌고, 이윽고 작동을 멈춘 기체들은 코어의 활성화를 감지한 쿨라렌의 포격을 맞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남들이 보면 쿨라렌의 포격에 맞아 켈-루펀이 박살 난 것으로 보이리라.
오직 크라나샤만이 자신이 본 광경을 떠올리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 ☆ ☆
‘음… 들켰나? 감이 좋은 사람이 있네…….’
허공에서 손을 쑥 하고 뽑은 시안은 전쟁터에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크라나샤를 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뭐 들켜도 상관없거니와 누가 했는지도 모를 것이다.
시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이 이곳 전쟁터에 와서 계속 고민하고 있던 문제.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자신이 이 전쟁터 한복판에서 벗어나질 못할 것이란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가면 끝이 없다.
전쟁에 최대한 간섭하기 싫은데 이렇게 살짝살짝 형과 여기 있는 사람들을 지켜주는 것만으로도 큰 간섭이다.
애초에 저런 신참들을 배치한다고 하길래 작은 국지전에 배치할 줄 알았고 금방 돌아갈 줄 알았는데 이런 전쟁의 한복판에다가 박아 넣다니.
적들은 이곳이 뚫릴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은 이곳으로 오는 놈들을 모두 때려잡아야 한다.
이 전쟁터를 빠져나가야 했다.
시안은 어떻게 하면 모두를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곰곰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우샤란 왕국의 이번 전쟁 책임자, 2왕자 라쿤 라 드미트라는 미소를 지으며 올라오는 보고를 듣고 있었다.
“라샤둠 지역, 점령 완료 하였습니다.”
“콜란 지역, 국지전 우세하게 진행 중입니다.”
“레이파놀 성, 현재 접전에 들어갔습니다. 쿨라렌 무력화 진행 중입니다.”
“키라논 지역, <황금 사자>와의 접전에서 승리, 몰아내고 키라논 지역 점령하였습니다.”
사방에서 전해 들어오는 승전보에 라쿤 2왕자는 다시 한 번 쿠란다스 경을 떠올리며 감사의 묵념을 했다.
‘쿠란다스 경, 고맙소. 콘 왕국이 우리 발아래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고 계시오. 이 승리를 경에게 주고 싶구려.’
잠시 상념에 빠진 라쿤 2왕자는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 급보를 듣고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콩티앙 지방. 배치되어 있던 카누안 약 600여 기, 켈-루펀 15기 중 절반에 가까운 손실이 발생하였습니다. 피해가 너무 커서 일단 물러나 대치를 유치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콩티앙 지방, 분명 기억에 따르면 ‘검은 별’이 지키고 있는 지역이다.
요충지이지만 그랑-반더도 없었고 상당히 많은 숫자의 카누안과 켈-루펀을 배치했기에 별로 걱정하지 않고 있는 지역이었는데 생각보다 큰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라쿤 2왕자는 의아해했다.
“무슨 일이지? 변수라도 나타났나?”
“예. 나즈갈 장군이 전한 소식에 따르면… 그랑-반더가 참전하였다고 합니다.”
“뭐라고?”
라쿤 2왕자는 그랑-반더의 참전 소식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 피해가 이해가 갔다.
그랑-반더가 합류하여 ‘검은 별’과 힘을 합쳤다면 저 정도의 피해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있었다.
“분명 콘 왕국의 그랑-반더 숫자는 모조리 파악하고 있는 상태 아니었나? 그들은 우리가 확실하게 붙잡아 두고 있을 터인데.”
콘 왕국 역시 세 명의 그랑-반더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은 현재 자신들이 보낸 그랑-반더와 켈-루펀에 의해 모조리 발이 묶여 있는 상태였다.
“그게… 티안 왕국에서 그랑-반더를 지원 보냈다고 합니다. 첩보부 티안 왕국지부에서 방금 들어온 보고입니다.”
“…이런 미친! 설마 숨겨놨었다던 그 그랑-반더 말인가?”
라쿤도 티안 왕국에 숨겨놓았던 그랑-반더가 나타난 것은 알고 있다. 자신들만 해도 쿠란다스 경을 숨겨놓고 있었으니.
하지만 설마 그랑-반더를 타국에 지원을 보낼 줄이야.
“녀석들이 도와줄 거면 아주 제대로 돕겠다 이건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그래도.”
그랑-반더가 있으면 정말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카란 왕국이야 미친놈들이니 못 건드린다고 쳐도… 당장 자신만 해도 그랑-반더로 타란 왕국 지역을 압박하여 어느 정도 얻어낼 것들이 머릿속으로 주욱 지나갔는데 나라샤 국왕이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런데 그랑-반더를 콘 왕국 쪽으로 지원을 보내다니?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모든 사정을 아는 것이 아니니까… 무언가 있기에 이쪽으로 보냈을 것이다.
“그랑-반더의 전투영상 녹화한 것 있으면 가지고 와라.”
“네!”
아마도 그랑-반더라면 나즈갈 장군이 엑사르로 녹화한 영상이 있을 것이다.
그걸 보고 판단해야겠다.
영상을 쭉 돌려본 라쿤 2왕자는 보고서의 자료를 보고 이것저것 조합하더니 알았다는 듯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 이거 알겠구먼. 나라샤 국왕이라는 자, 이 칼라굴이라는 그랑-반더를 완전하게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
전쟁터에서 싸우는 양상을 보니 대충 짐작이 갔다.
부탁 받은 것도 있고 그동안 받은 게 있으니 하긴 하겠지만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해 하지는 않겠다는 것이 딱 보였다.
실제로 가장 중요한 길목을 지키고는 있지만 저 자리는 무력에 자신만 있다면 가장 생존확률이 높은 자리였다.
국왕이 완전하게 통제하고 있다면 이런 반응이 나올 수 없다. 전력을 다해 적을 격살하겠지.
충성관계의 기사보다는 계약관계의 용병에 더 가깝다는 뜻이다.
믿을 수 없는 그랑-반더만큼 위험한 게 없다.
아마도 나라샤 국왕은 이 그랑-반더가 믿을 만하지 못하다고 생각되자 그를 통해 티안의 국력을 신장시키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곧바로 해외로 돌린 것이리라.
생색도 내고, 콘에 빚도 지울 수 있고, 그랑-반더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자리는 전장이니 일석삼조였을 것이다.
전력을 다하지 않아도 그랑-반더는 그랑-반더. 실제로 콩티앙 지방 자신의 병력들은 큰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충성관계가 아닌 계약관계의 그랑-반더라면 다 방법이 있다.
“병력을 집중한다. 후후… 타국의, 그것도 계약 관계의 그랑-반더가 과연 죽을 위기에서 얼마나 필사적으로 싸울지 궁금하군.”
자신들의 병기창에 여분으로 남아있는 병력의 양은 엄청나다.
하지만 그랑-반더는 그런 엄청난 병력들도 막아낼 수 있을 만한 힘이 있다.
하지만… 그랑-반더가 필사적으로 성을 지키려 들까?
라쿤 2왕자는 그럴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고 판단했다.
겁줘서 쫓아 보낼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이다.
“다른 병력을 뽑아낼 필요 없이 병기창에 여유로 남겨둔 켈-루펀을 집중해라. 아, 그리고 이번에 코르단을 보내도록.”
“코르단 장군을 말입니까?”
“그래, 필요할 테니 말이다.”
“예. 코르단 장군에게로 연락을 넣겠습니다.”
모든 지시를 마친 라쿤 2왕자는 의자 뒤로 몸을 파묻은 뒤 자신의 계획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후후… 칼라굴이여, 뭘 받기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마나 열심히 싸우는지 보자고.”
라쿤 2왕자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 ☆ ☆
<원숭이의 존경과 무시는 인간에게는 의미가 없다. 너희들도 나에게 그러하다.>
-600년 전 라-반더,
별파괴자, 로바노튼이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던진 말
☆ ☆ ☆
“흠… 갑자기 녀석들의 공세가 뜸해졌군.”
“피해가 너무 커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음… 수상한데…….”
그랑-반더가 버티고 있다지만 콩티앙은 저들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너트려야 하는 지역이었다.
저들이 인사하려고 침략한 게 아니라면, 콘 왕국을 통째로 삼키기 위해 일으킨 전쟁이라면, 이곳은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공격이 뜸해지다니.
다른 지역으로 병력을 돌린 것인가 하여 살펴보았지만 다른 지역의 공세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 대비를 더 철저히 하고 상대를 살펴라. 상대가 무언가 준비하는 모양이니.”
“알겠습니다.”
반백년을 넘게 콘 왕국을 지켜온 그란달의 육감은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저들은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자신들은 그에 대비해야 한다.
그란달은 티안 왕국의 그랑-반더에 의지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안타까웠지만, 다른 지역도 고전하고 있는 마당에 더 지원을 요청할 여력은 없었다.
단지 칼라굴과 드라고나가 잘 해 주길 바라는 수밖에…….
한동안 공세가 뜸해지자 드라고나는 수련에 들어갔다.
간간이 포격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에 대해 드라고나가 할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얻은 것이 있다면 드디어 신입들이 진형과 합동작전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깨달았다는 것.
운 좋게도 죽은 사람이야 없지만 대부분이 상처를 달고 있었고 사지 중 한두 개가 부러진 사람도 있었다.
특히 파놀란과 그론은 정말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장 용맹했던 파놀란과 그론은 반 시체가 되기 전 겨우 리안의 도움을 받고 살아났다.
부상을 입고 나서야 전쟁의 위험함을 성큼 느끼게 된 그들은 영웅이 되고 싶은 본능을 억제하고 조직의 일원으로 행동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안은… 공방에 다녀오고 있었다.
“시안, 너 손에 든 거 뭐야?”
합동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셀린이 시안이 무언가를 들고 오는 것을 보고 물었다.
“쇠구슬입니다.”
“응? 그걸 어디다 쓰려고?”
“흐흐… 생각보다 쓸 일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오백 개나 썼으니까… 라고 중얼거리는 시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곧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다.
“아! 그거였구나! 그거 네가 도와준 거 맞지?”
“음? 뭐 말입니까?”
“시치미 떼지 마. 싸우던 도중에 카누안들이 픽픽 쓰러졌다는데. 쇠구슬 맞고.”
“아… 보고 있자니 영 찝찝해서요.”
그 말을 들은 셀린은 이마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넌 뭐 억울하거나 그러지도 않니? 얘들은 그거 다 칼라굴 경이 한 줄 알고 엄청 존경하고 있다고. 정작 너는 팍팍 무시하면서.”
“뭐… 상관없는데요. 제가 언제부터 그렇게 평판에 신경을 썼다고. 일부러 숨긴 건 아니지만 굳이 떠들고 다닐 필요는 없지요.”
“그래도…….”
셀린은 시안이 무시당하자 공연히 자신이 열 받는 느낌이었다. 자신들이 살아있는 것이 누구 덕인지도 모르면서!
시안이 없었다면 오늘 저녁의 식비가 반으로 줄었을 것이다.
시안은 그런 모습이 왠지 귀엽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고 대답했다.
“셀린 경, 그런 거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하하. 저 사람들이 절 존경한다고 떡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무시한다고 해가 되는 것도 아니니까요.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과만 잘 지내면 족합니다. 굳이 존경 받거나 그러고 싶지 않아요.”
“무슨 성인군자인 줄 알겠네, 누가 들으면.”
셀린은 투덜거렸다. 본인이 이렇게 괜찮은데 자신이 화를 내는 것도 우스운 일이기에 셀린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시안은 정정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성인군자라 그런 것이 아니라고.
그저 의미가 없을 뿐이다.
“그나저나 저희는 언제 돌아가는 겁니까? 이곳에 언제까지 계속 있을 수도 없을 텐데.”
시안은 자신의 두뇌를 풀회전 했지만 별다른 생각이 나지 않아 결국에는 포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걸 잘하는 나라샤 국왕폐하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사실 우리도 다른 지역으로 옮겨서 지원을 가게 될 줄 알았는데… 그란달 경의 판단은 좀 다른 모양이야. 이곳의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시나봐.”
그 말을 들은 시안이 갑자기 눈을 감았다.
“……?”
셀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는데 이윽고 시안이 눈을 뜨며 말했다.
“오… 그란달이라는 분… 촉이 굉장히 좋네요.”
“어?”
“뭔가 거하게 오고 있는데요.”
셀린은 시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말의 의미를 다음 날 알 수 있었다.
☆ ☆ ☆
“여기를 짓밟아 버리려고 작정을 했나 보군…….”
엑사르를 사역하여 저 멀리 성 바깥의 평원에 위치한 적진을 관찰한 그란달은 신음을 흘리며 말했다.
카루안의 숫자는 별 차이가 없었다. 육백 기에 달하는 카누안은 절반이나 박살을 냈기에 삼백여 기 좀 넘는 수만 남아있었다.
문제는 켈-루펀의 수였다.
“허… 칠십 기… 칠십 기라… 저 정도를 추가로 운용할 여력이 있었나…….”
무언가 올 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 정도가 여력으로 남아있을 줄은 몰랐다.
알아도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말이 칠십 기이지. 군단처럼 하나의 몸으로 움직이는 마스터의 숫자가 칠십 기라는 뜻이었다.
저 숫자를 보는 순간 그란달은 상대가 무슨 생각으로 저런 병력을 대놓고 보여주고 있는지를 알아챘다.
효과를 보이려면 기습을 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저렇게 대놓고 세워놓을 필요는 없다.
저 뜻은 하나이다.
“그랑-반더 보고 빠지라… 이 뜻이군…….”
타국의 전쟁에 그랑-반더를 갈아 넣어줄 국가는 아무 곳도 없다. 아무리 동맹이라도.
칠십 기의 켈-루펀이면 그랑-반더라고 해도 위험하다. 아니, 켈-루펀의 특성상 모일수록 훨씬 위험해진다는 것을 감안하면 충돌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란달은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옆의 칼라굴 경을 바라보았다.
칼라굴 경은 성벽에 서서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곳과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멀긴 하지만 그랑-반더의 시야라면 놓칠 리 없다.
이 정도의 전력 차이라면 칼라굴 경은 결코 같이 싸워주지 않을 것이다.
그란달은 고민했다.
칼라굴 경 없이 결사항전을 하든가,
아니면 이곳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서서 걸맞은 병력을 모은 다음에 칼라굴 경을 끼고 싸우든가.
이미 방향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방법을 사용해도 미봉책일 뿐이다.
애당초 전력의 차가 너무 컸다.
저쪽이 어떻게 저런 병력을 키울 때까지 침략을 참을 수 있었나 할 정도로.
상대 기계병기의 절반 정도의 숫자만 확보했어도 자국을 침공하기에는 무리가 없는 숫자였다.
따라서 이곳에서 잡아야 했다. 저기 있는 저 녀석들을 모조리 잡지 못하면 콘 왕국의 미래는 없다.
‘세 번째… 방법을 써야 하겠군… 후…….’
그란달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흐음… 저건… 예전에 보았던 제국의 병기군…….’
이곳에 도착하여 카루안과 켈-루펀을 본 칼라굴은 그것이 예전 제국에서 쓰던 병기와 유사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칼-굴의 특성상 그런 기계병기는 먹히지 않는다. 대주술이 있었으니까.
혼이 없는 병기들은 결코 자신들의 적수가 될 수 없다.
제국도 그걸 깨달은 후 자신들과의 싸움에 저 기계병기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인간의 몸으로는 저런 것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대주술까지는 사용할 수 없다.
그렇기에 칼라굴은 조용히 저 병기들을 대주술 없이 상대했을 경우의 승률을 점쳐보았다.
‘…21기까지는 무리 없고… 33기면 죽을 수도 있겠다. 그 이상이면 필사다.’
이곳의 모든 전력과 힘을 합쳐 싸운다면 어찌어찌 이겨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칼라굴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공멸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흠… 빠져야겠군. 시안이라는 인간이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겠고…….’
시안이라는 자가 어느 정도의 전력을 가진지도 파악하지 못했다.
자신의 의식이 이 몸을 차지하기 전 쿤타리안이라는 자는 너무 약하여 저자의 전력을 이끌어 낼 수 없었다.
그랑-반더라는 경지에 진입했다고는 하지만 나라샤 국왕이라는 자 정도만 되어도 그 정도로 두들겨 패 줄 수는 있다.
열일곱이라면 한창 뽐내고 싶을 나이일 텐데 애초에 힘자랑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닌 듯 힘을 쓰는 것을 많이 보지 못했다.
자신보다 강하다고 하여도 저 정도 숫자가 집중된다면 그랑-반더 둘 가지고는 목숨이 위험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리스크를 짊어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우선 국왕이라는 자와 이야기를 해보아야겠다. 그자는 인간치고는 큰 그림을 그리는 것 같으니…….’
칼라굴은 통신을 이용하기 위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 ☆ ☆
“…해서 여기까지가 현재의 상황이다.”
<흠… 그렇다면 빠져야 할 것 같다는 말인가?>
“그렇다. 어떻게 하길 원하는가? 다른 지역이나 수도에서 합류하여 같이 싸우는 것을 원하는가?”
국왕이란 자에게 이 정도의 전력 차는 예상외의 상황일 것이다.
아마 자신만으로 막을 만하다고 생각했으니 이곳으로 보냈겠지.
그리고 이 정도가 되면 자신이 싸우지 않을 것도 예측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칼라굴은 나라샤 국왕이 자신이 다른 지역에서 합류하여 조금 더 시간을 끌어주길 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만으로도 콘 왕국에는 큰 도움이 될 터이니까.
<아닐세. 이틀 정도만 더 시간을 끌었으면 좋을 것 같았는데…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지. 더 이상 그 아이를 자극하기도 뭐하고……. 모두 이끌고 돌아오도록 하게. 근처 라-샤르-로아를 통해 돌아오면 되겠군.>
“……?”
예상치 못한 대답에 칼라굴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영상기기 너머를 바라보았다.
나라샤 국왕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무언가 다른 생각이 있나 보군…….’
항상 느끼는 거지만 눈앞의 인간을 보면 너구리가 생각나고는 했다. 굉장히 강한 전투너구리.
어쨌건 자신에게는 잘 된 일이다. 더 싸우지 않아도 된다니.
한 목숨 보전할 자신이야 있지만 전쟁터라는 곳이 워낙 의외의 상황이 많이 발생하니 오래 있어 좋을 곳은 아니었다.
‘뭐… 리안이나 셀린이라는 인간은 좀 씁쓸해하겠군…….’
칼라굴은 영상기기를 끈 후 그란달과 드라고나에게 이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