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23화 (24/81)

<23. 폭축>

<제발 니들 편 가르는 데 나 좀 끼어 넣지 말아라, 둘 다 맞기 싫으면.>

-대검공, 시안 폰 로만 경이 식사 중 던진 한마디

☆ ☆ ☆

크라나샤는 눈앞의 그란달 장군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흠… 결국 그 방법을 써야 한다는 말입니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칼라굴 경은 타국의 그랑-반더. 이곳에서 우리와 뼈를 묻어줄 리 없네. 실제로 아까 와서 국왕의 명으로 빠진다는 이야기를 전달하였고… 근방의 라-샤르-로아를 타고 본국으로 이동한다고 하더군.”

그 말을 들은 크라나샤는 근심에 찬 표정을 지었다.

칼라굴 경이 힘을 합쳐 싸우지 않는다면 절대 이길 수 없다. 자신도 성벽 바깥의 진영에 도열해 있는 켈-루펀을 보았으니까.

리안을 도와준 숨겨진 강자를 찾으려고 해보았지만 찾을 수도 없을뿐더러 도와주지도 않을 것 같았기에 포기했다.

그 정도 무력을 가지고 콘 왕국의 편을 들기로 했다면 수비는 이미 훨씬 더 수월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곳을 버리고 뒤로 빠질 수도 없다.

이곳을 지나면 수도까지 주요 군사 요충지는 한 군데도 없다. 바로 수도에서 적을 맞이해야 하는 것이다.

죽더라도 이곳에서 죽어야 한다.

그렇기에 방법은 하나뿐이다.

“…알겠습니다. 준비하도록 하지요. 후… 들었을 때는 쓸 줄 몰랐는데… 이렇게 되는군요.”

“…크라나샤 경.”

“네?”

“그동안 고마웠네.”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겠지요.”

한숨을 쉰 크라나샤는 서둘러 바깥으로 향했다.

시간이 없다.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 ☆ ☆

“티안 왕국의 드라고나가 떠나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칼라굴이 있는 것은 확인하였는가?”

“예. 대형의 선두에 서 있었습니다.”

“후후… 2왕자께서 말씀하신 대로군…….”

나즈갈이 나지막하게 웃으며 말했다.

켈-루펀이 지원 나왔지만 바로 투입하지 않았다.

켈-루펀은 다시 충원되지 않는 귀중한 자원이다. 따라서 최대한 아껴 써야 하고 충돌이 있을 것 같으면 피하는 것이 좋았다.

굳이 적진 속에 숨어있는 타국의 그랑-반더와 충돌하여 켈-루펀의 수를 줄일 필요는 없었다.

때문에 그랑-반더를 쫓아내기 위한 목적으로 시위를 벌였고, 왕자님의 예상대로 티안 왕국의 그랑-반더는 침몰하는 배를 떠나버렸다.

“그 외에 특이한 점은 없었나?”

“음… 특이한 점이라면 성안의 민간인들을 모두 이끌고 가고 있습니다.”

“그래? 모조리 도망가는 것은 아니겠지?”

녀석들이 도망간다면 추적해서 잡아야 한다.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검은 별’ 녀석들은 이 기회에 죽여 놓아야 했다. 다른 곳에 합류하여 같이 싸우게 되면 귀찮아진다.

“아닙니다. 민간인을 제외한 전투병력들은 모조리 붙어있습니다. 민간인에게는 소수의 호위병력만 붙어있습니다.”

“후후… 크라나샤… 계집 주제에 제법 대장부 기질이 있군. 이곳에서 뼈를 묻겠다, 이건가.”

‘검은 별’을 비롯한 무장세력이 민간인들과 같이 간다면 자신들이 따라 붙을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좋다. 그 뜻을 존중하도록 하지. 시간 끌 것 없지. 준비가 끝나면 바로 공략에 들어가라. 오늘… 콩티앙을 끝장낸다.”

“네! 알겠습니다. 코르단 장군님께도 연락을 하겠습니다.”

☆ ☆ ☆

칼라굴은 드라고나와 콩티앙 지방의 민간인들을 이끌고 라-샤르-로아가 있는 근처 도시, 크루툰으로 향했다.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요충지에 있던 민간인들의 대부분은 대피한 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남아있던 민간인들을 모으자 그 수가 제법 되었다.

그란달 장군은 자신들이 라-샤르-로아로 가는 김에 민간인들을 이끌어주길 바랐고 칼라굴은 그 제안을 수락하였다.

“흐음…….”

옆의 리안은 마음이 불편한지 계속 힐끔힐끔 자신들의 뒤에 있는 성을 쳐다보았다.

국왕폐하의 명이라지만 이렇게 동맹군을 놓아두고 떠나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다.

자신들이 떠나오는 걸 확인하고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우샤란은 성의 침략을 시작했다.

쿨라렌의 포격소리가 이곳까지 들릴 정도로 맹렬하게 반격하고 있지만… 얼마 버티지는 못할 것이다.

실제로 이미 외성벽은 점령당했고 켈-루펀과 카누안들은 맹렬한 기세로 성벽을 타넘고 안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리안 경.”

“네. 말씀하시지요, 칼라굴 경.”

“어쩔 수 없는 일일세. 저들이 우리에게라도 살길을 열어놓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네.”

“하지만…….”

“저 정도의 전력 차라면 우리 모두 개죽음일세. 자네는 혼자의 몸이 아니지 않은가. 드라고나에 있는 동료들을 생각하게. 그리고 여기 있는 민간인들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그 말에 리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크라나샤는 자신들을 떠나보내며 한 가지를 부탁했다.

자신들은 여기서 도망갈 수 없으니 민간인들을 이끌고 라-샤르-로아가 있는 곳까지 가달라는 것.

아마 자신들이 같이 가면 켈-루펀들이 쫓아올 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서글프면서도 무언가 다짐을 한 그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시안이 나선다면 모두 해결될 것이지만 도저히 시안에게 그런 부탁까지 할 수 없었다.

사람 죽이는 걸 즐기는 아이가 아니다. 아마 이번에도 상대측의 기계병기만 부수고 사람은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편가르기는 더더욱 싫어한다.

자신과 동료들을 지켜주기 위해 전쟁터에 몸을 던진 것도 안타까운데 그런 부탁까지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이 정도 선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다행이리라. 실제로 시안은 그 전쟁터를 벗어난 이후로 눈에 띄게 표정이 좋아졌다.

리안은 자신의 위치와 임무를 재차 확인하고 귀환하는 것만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콩티앙의 성을 눈에 담기 위하여 한번 돌아보았다.

‘…음?’

땅이 흔들리고 있었다.

콩티앙 성, 정확히 말하면 콩티앙 성의 지하를 중심으로부터 땅과 대기가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진동은 이미 십수 킬로가 떨어져 있는 자신들 일행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이윽고 콩티앙의 성을 중심으로 거칠면서도 음습한 기운이 폭발했다.

☆ ☆ ☆

콩티앙 지방은 대대로 7왕국 중 하나인 콘 지역의 요충지였다.

콩티앙 지방이 뚫리게 되면 수도로 가는 길에 수비의 이점을 살릴 만한 지형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즉, 콩티앙 지방은 대대로 콘 왕국의 수도. 코린델을 지키는 방벽의 역할을 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100년 전 콘 왕실 법도회 회장, 대법도사 아란티나는 친구였던 대장군, 무라카와 이야기하던 중 한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만약 대적할 수 없는 강대한 군세가 콩티앙 지방을 뚫고 코린델을 향해 진격하려고 한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강대한 군세가, 갑작스럽게 콩티앙을 뚫고 진격하려고 한다면, 그리고 자신들은 도저히 그런 군세를 막을 만한 여유나 군대, 자금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속수무책으로 당해주어야 하는가?

이러한 무라카 대장군의 의문에 아란티나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한 가지 해답을 내놓았다.

<어차피 우리의 병력으로 막을 수 없는 강대한 군세라면, 그리고 그로 인하여 나라가 위태로울 지경이라면 그 자리에서 살을 주고 뼈를 친다.>

이 생각을 한 아란티나는 즉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고 1년 후, 콩티앙 지방에 1급 이적 중에서도 파괴력만 놓고 본다면 수위를 다투는 대이적법진, <폭축>이 지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오로지 대대로 요충지를 지키는 대장군과 몇몇 무장단체의 수장들만이 알고 있었다.

비수는 알려지면 더 이상 비수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콩티앙 지방의 숨겨진 비수, 폭축은 근 백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콩티앙 지하 깊숙이 숨겨져 있었다.

“그런 걸 내 대에 쓰게 될 줄은 몰랐군… 허허허…….”

바깥에서 쉴 새 없이 들려오는 포격소리와 비명음을 들으며 그란달은 복잡한 표정으로 창 바깥을 바라보았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민간인들은 모두 대피시켰다.

크라나샤와 ‘검은 별’ 및 다른 무장들도 모두 계획을 듣고 그 계획에 찬성하였다.

그리고 상대를 보다 더 깊숙이, 도망칠 수 없는 범위까지 끌어들이기 위해 바깥에서 쉴 새 없이 싸우고 있었다.

아직 앞날이 창창한 어린 신병들은 민간인의 보호라는 핑계로 드라고나에 섞어 보내버렸다.

‘그래… 이것으로 된 것이다…….’

어차피 자신들의 병력 수준으로는 카누안은 몰라도 켈-루펀 열기도 해치우기 힘들다.

저 녀석들은 단순히 마스터 칠십이 아니니까. 모이면 모일수록 괴물 같은 힘을 발휘한다.

실제로 켈-루펀들은 진형을 짜고 압도적인 병력을 바탕으로 쉴 새 없이 바깥에서 아군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저런 놈들이 수도로 가게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여기서 없애야 한다.

저 녀석들만 없어진다면 우샤란은 더 이상 침략행위를 해나가지 못할 것이고, 콘 왕국은 시간을 벌게 될 것이다.

그란달은 어느새 내성 안쪽까지 깊숙이 침입한 적군의 무장들과 켈-루펀을 보며 마음을 굳혔다.

이 정도면 아무도 도망가지 못 할 것이다. 도망가려고 해도 크라나샤 경이 시간을 끌어줄 것이다.

‘크라나샤 경, 저승에서 봅시다.’

그리고 집무실 안쪽, 지하의 폭축과 연결된 소형 법진에 자신이 콩티앙 지방의 대장군임을 인증하기 위해 정해진 순서에 맞게 반데르를 흘려보냈다.

이윽고 지하에서 요란한 소리의 굉음과 함께 폭축의 대이적법진이 발동을 시작했다.

<폭축>

1급 이적에 적을 두고 있는 이 대이적은 두 가지 단점과 한 가지 장점을 지닌다.

첫 번째 단점은, 엑사르의 유동이 너무나 거칠고 격렬하기 때문에 발동하는 순간부터 상대방이 모조리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두 번째 단점은, 법진이 발동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이적이 발동하는 순간까지 그 텀이 굉장히 길다는 것이다.

대략 일 분 정도… 특히 대법도사 없이 탈릭 스톤과 법진으로만 발동시킬 경우는 그 시간이 삼 분 가까이 걸리게 된다.

이 첫 번째 단점과 두 번째 단점이 합쳐지면, 법진이 발동하는 순간 적들이 이적의 범위 바깥으로 모조리 도망가 버린다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대법도사인 아란티나가 이걸 몰랐을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콩티앙에 폭축을 설치한 이유는 한 가지의 장점 때문이다.

장점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동시키면, 그리고 자신들의 병력을 희생시키며 범위 깊숙이 끌어들이기만 한다면 콩티앙을 침략한 강대한 군세를 모조리 갈아버릴 수 있을 정도의 강대한 파괴력과, 알아도 도망칠 수도 없을 정도의 넓은 파괴를 현세에 구현한다는 것.

그러한 폭축이 아란티나의 의도대로, 100년의 시공을 건너뛰어 현실을 뒤틀었다.

☆ ☆ ☆

<내가 답답하다고? 아마 내가 답답한 채로 가만있는 게 너희들한테는 더 좋을 것이다. 200배쯤 말이다.>

-150년 전의 라-반더,

검은 달, 카라칼과의 대화에서 발췌

☆ ☆ ☆

시안은 전쟁터에서 벗어나게 되자 마음이 편해졌지만 동시에 찝찝한 느낌이 남았다.

더 이상 전쟁터에 관여하지 않게 된 것은 좋았지만, 뒤에 남겨두고 온 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안타깝다는 이유로 간섭할 수는 없다.

자신 같은 자가 단순히 감정만으로 세상에 끼어들면, 너무나 많은 자의 길이 자신 앞에 짓눌려 으스러진다.

자신이 가진 힘은 그 정도인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목표와 꿈이 자신의 방향과 부딪치게 된다면 단 한 순간에 그들의 인생을 짓밟아 버릴 수 있는…….

그렇기에 시안은 일부러 자신의 세상을 좁히고 충돌을 피했다. 자신이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자신과 가족 중심으로.

우샤란 왕국이 자신과, 가족들과 부딪치지 않는다면 일부러 충돌을 할 필요는 없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도중 시안은 대지가 뒤흔들리는 느낌에 콩티앙 지방을 바라보았다.

‘결국 그걸 발동시켰구나…….’

꽁꽁 감춰두었지만 시안은 콩티앙 지방에 있는 내내 지하에서 느껴지는 흉폭한 엑사르의 흐름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전쟁터를 빨리 떠나고 싶었던 이유도 저게 발동하면 형과 셀린 말고 다른 사람은 지켜주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이적이 발동된 순간, 시안이 바라보는 성을 중심으로 칠흑같이 검은 구체가 콩티방 지방을 덮어버렸다.

성도, 지방도, 무장들도, 켈-루펀과 카누안들도, 모든 것을 감싸 안은 직경 5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대한 암흑의 구는 이윽고…

순식간에 수축해버렸다. 사람 머리만 한 크기로.

검은 구가 둘러싸고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땅도… 성도… 성 뒤에 걸쳐있던 산맥의 일부분도.

마치 태곳적에 하늘산맥을 떠받치고 있었다는 거대한 하리쟌, 크로나가 한입 베어 문 것처럼…….

이윽고 사람 머리 모양 크기로 수축한 검은 구는 중력의 법칙에 따라 사라진 땅 아래로 급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하였고, 공기마저 베어 물려 사라진 자리로 맹렬하게 대기가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굉음이 퍼지고 몰려 들어갔던 대기와 거칠게 충돌하며 짙은 흙먼지가 드라고나가 있는 곳까지 퍼져 나왔다.

이 모든 과정을 바라보던 시안은 이윽고 흙먼지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허허허허…….’

시안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눈을 치켜뜨며 웃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말도 안 되는 광경에 멍하니 아주 작게 보이는 검은 구체를 바라보던 셀린은 빨려 들어가는 바람 때문에 갑작스럽게 발생한 흙먼지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윽고 엄청난 굉음이 저 멀리, 푹 파인 구덩이 한가운데서 일어났다. 공중에 떠있던 검은 구체가 땅에 추락하면서 낸 소리이리라.

그로 인해 발생한 이차 흙먼지로 인해 눈을 가늘게 뜨고 콩티앙, 정확히 말하면 콩티앙 지방이었던 쪽을 바라보던 셀린 경의 시야에 어떤 인형들이 어른거리며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엇?”

셀린 자신만 본 것이 아닌지 옆에 있던 드라고나 중 한 명도 경호성을 질렀다.

‘설마… 크라나샤 경과 무장들이 살아 돌아온 것인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들만 놓고 와서 못내 찝찝한 마음이 있던 드라고나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저 정도의 파괴행위를 준비해놓았다면 미리 특수한 탈출방법을 마련해 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드라고나들은 절망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뿌연 흙먼지를 뚫으며 나타난 것들은…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수십 기의 켈-루펀들이었다.

☆ ☆ ☆

“헉… 헉… 크라나샤… 그란달… 이 미친 녀석들……. 정말 죽을 뻔했군…….”

나즈갈은 흙먼지를 헤치고 나오며 투덜거렸다.

코르단 장군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리라.

자신들의 뒤에 벌어진 현상을 보니 그러한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범위 내의 모든 것을 압축하여 자그마한 점으로 만들어 버리는 폭축.

직경 5킬로미터를 사람 머리만 한 크기로 구기고 우겨 넣는데 저 안에서 살아있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리라.

그랑-반더가 아니라 그랑-반더 할아버지라고 해도 저 안에서는 살아 돌아올 수 없다.

지하 깊숙한 곳에서 강대하면서도 흉악하기 이를 데 없는 엑사르의 흐름이 느껴지는 순간, 자신을 붙잡는 ‘검은 별’ 녀석들을 베어버리고 코르단 장군을 중심으로 자신들 주변에 있는 반더들과 켈-루펀들을 모았다.

이미 달려서 도망가기에는 늦었다. 그렇기에 코르단 장군에게 기대를 걸어야 했다.

정확히 말하면 코르단 장군이 가지고 있는 1급 아티팩트, <나랑겔의 문>에 기대를 걸었다.

그 예전 신화시대에 공간을 다루며 놀았다는 전설적인 악마, 나랑겔의 이름을 딴 이 아티팩트 ‘나랑겔의 문’은 하루에 단 한 번, 반경 20킬로미터 내로 자신을 포함한 동료 66명까지 이동시킬 수 있었다.

수많은 병력들이 죽어버렸지만 자신과 무장들을 비롯한 켈-루펀 60기는 살려올 수 있었다.

이윽고 나즈갈은 저 멀리, 흙먼지 사이로 눈앞에 보이는 드라고나들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라쿤 2왕자의 또 다른 명령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힘들겠지만… 만약 콩티앙을 빠른 시간 내에 제압할 수 있고 드라고나들을 따라잡을 수 있다면 쫓아가서 그 칼라굴이라는 그랑-반더의 목도 따오도록 하시오. 그랑-반더가 따로 돌아다니는 기회는 흔치 않으니…….’

그랑-반더가 콩티앙 안에서 ‘검은 별’ 녀석들과 같이 싸운다면 힘들겠지만 옆의 드라고나 애송이들과 민간인들을 끼고 싸우면 켈-루펀들의 합공으로 피해를 최소화하며 끝장낼 수 있다.

그렇기에 떠나도록 내버려둔 것이다.

애초에 자신이 민간인들과 함께 가는 드라고나를 습격할 수도 있었지만 방치했던 이유도 그것이다.

짐들을 주렁주렁 달고 가면 멀리 도망가기 힘들 테니.

콩티앙 지방을 끝장내고 켈-루펀과 소수 무장들만 이끌고 쫓아가려고 했던 것이다.

애초에 코르단 장군이 온 이유도 생각보다 드라고나 녀석들이 멀리 떠났을 경우 나랑겔의 문을 통한 급습을 위한 것이었다.

“후후… 코르단 장군… 급한 와중에도 잊지 않았구려…….”

“후우… 정말 죽을 뻔했소이다. 어서 녀석들을 끝장내고 가서 좀 쉽시다.”

코르단 장군은 땅 위의 물고기를 줍는 듯 말하였다.

나즈갈 역시 동의했다. 켈-루펀 육십 기라면 동떨어진, 게다가 지킬 것이 많은 그랑-반더 정도야 무리 없이 해치울 수 있다.

이윽고 나즈갈은 켈-루펀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켈-루펀들은 흙먼지를 가르며 드라고나 맨 앞에 있는 칼라굴을 향하여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 ☆ ☆

‘…허허허허허…….’

이제까지는 끼어들기 싫어서 가만히 있었다.

자신에게는 우샤란이나 콘이나 모두 똑같았다. 서로 다른 사상과 이득을 위해 충돌한 집단일 뿐.

티안이어도 신경을 안 썼을 텐데 타국이야 말할 것도 없다.

단지 형이 콘 왕국 쪽에 서있으니 형이 위험하지 않은 정도로만 도운 것뿐이지, 한쪽을 편드는 것 같아서 적극적으로 돕지도 않았다.

형을 죽이려 한 것을 넘어간 이유도 그것이다.

저쪽도 자신들에게 달려든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들이 성을 지키니 달려든 것뿐이고, 그 정도까지는 피해도 받지 않았으니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쫓아와서 두들겨 맞겠다고 달려드는데 사양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듯싶다.

자신들이 전쟁에 빠지겠다는 의사를 보여주었는데도 이렇게 나온다니.

자신이 없었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 칼라굴과 형은 물론이고 심지어 민간인들도.

빠드득.

여기까지 생각한 시안은 이를 갈며 이제껏 단 한 번도 뽑은 적이 없는 검을 뽑아 들었다.

장난감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얼른 부숴놓고 굳이 여기까지 두들겨 맞으러 온 저 뒤에 빤질거리는 녀석들을 다져 주리라.

☆ ☆ ☆

‘망할 녀석들…….’

멀쩡히 집에 돌아가려는 자신들을 왜 건드린다는 말인가.

칼라굴은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했지만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뒤로 물러나며 진형을 지시했다.

리안과 셀린이 빠르게 진형을 재정비하였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육십 기 모두 달려들면… 자신은 고작 열 기 정도 파괴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저 뒤에 있는 녀석들과 함께 싸우면 열네 기 정도… 그게 한계이다.

그 정도로 녀석들의 합동공격은 무서웠으니. 단순한 마스터 육십이 아니었다.

각오를 다지며 몸 안의 엑사르와 반데르를 끌어올렸다.

그 순간,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켈-루펀들의 상이 일렁이는 느낌을 받았다.

‘음? 뭐지?’

무슨 수작을 부렸나 싶어 상대를 살피니 모든 켈-루펀들의 상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흔들리는 켈-루펀들의 위로 다른 켈-루펀들의 상이 겹치고 있었다.

오른쪽에서 오는 켈-루펀이 저 멀리 있는 켈-루펀의 상과 겹쳤다.

위에서 뛰어내리는 켈-루펀의 상은 지면을 휩쓸며 달려오는 켈-루펀의 상과 겹쳤다.

자신의 체감시간으로는 길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하나의 켈-루펀에 다른 모든 켈-루펀의 상이 겹쳤다. 하나이며 육십이고 육십이며 하나로…….

크라나샤가 살아서 이 광경을 보았으면 기함을 토했으리라. 전쟁터에서 켈-루펀 네 기의 코어를 박살 낸 그 수법이 재현되고 있었다.

단지 이번엔 육십 기라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한 자루의 검이 코어를 삐죽이 뚫고 튀어나왔다.

마치 겹쳐놓은 종이 수십 장을 한 장의 송곳이 뚫고 나오는 것처럼.

한 자루의 검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켈-루펀의 코어를 뚫고 나왔다.

코어들을 꿰뚫은 한 자루의 검 끝은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는 듯 자신이 뚫고 나온 구멍을 통해 다시 빠져나갔지만, 무리를 한 듯 빠져나가며 검의 끝자락이 깨져나갔고, 바닥에 그 조각을 흘렸다.

우연찮게도 꿰뚫린 수십 개의 코어 중 가장 자신의 앞에 있던 켈-루펀의 코어에 걸려 깨져나간 그 검 조각을 집어든 칼라굴은 곧이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칼집에서 한 번도 뽑지 않은 듯한, 깨끗한 조각의 상태.

비록 강대한 힘에 뒤틀려서 그런지 깨어져 나갔지만 조각 자체는 너무나도 깔끔한 상태를 보존하고 있었다.

이렇게 칼을 한 번도 쓰지 않은 존재는 드라고나에는 딱 하나뿐이다.

‘…시안?’

바닥에 모조리 나동그라진 켈-루펀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칼라굴이 주위를 살폈지만 주변 어디에도 시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한데 그 순간, 저 멀리 흙먼지 속에서 뭔가 아련하게 비명이 들려왔다.

빡! 퍼억! 빡!

억! 크윽! 컥!

이윽고 흙먼지가 걷히자 드라고나를 포함한 모두가 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널브러져 있는 켈-루펀들 너머로 여섯 명이 신나게 두드려 맞고 있었다.

“아저씨들! 내가! 엉! 그냥! 간다는데! 여기까지! 왜 ! 쫓아와서! 아오!”

“크억! 컥!”

“얌전히 가려는데! 굳이! 여기까지! 으으!”

그중 네 명은 이미 기절했고 두 명은 깨져있는 검의 옆면으로 시안에게 신나게 얻어맞고 있었다.

‘…나즈갈이란 자인가. 나머지는 누구인지 모르겠군.’

칼라굴은 신경을 끄기로 했다.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방금 시안이 벌인 일을 생각하면 겨우 마스터 두 놈이 두들겨 맞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안이 적당히 다져놓으면 그때 가서 주워 와서 심문하면 된다.

‘끝나면 나도 좀 두들겨줘야겠군… 나도 좀 마음에 들지 않으니…….’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안을 바라보고 있는 드라고나를 통솔하고 쓰러진 켈-루펀의 잔해를 회수하기 시작했다.

코어가 망가져 더 이상 쓰지는 못하더라도 국왕에게 가져다주면 좋아할 것이다. 연구가치가 있을 테니.

오래 걸릴 수도 있기에 칼라굴은 그 전에 인원들을 통솔하고 놀란 사람들을 진정시키며 할 일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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