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크로나-폰>
민간인들은 너무 놀라 이동이 불가능하였기에 일행들은 격전지에서 조금 더 가서 나오는 공터에 천막을 쳤다.
식사를 하고 하루 쉰 후 다음 날 이동하게 될 것이다.
“역시… 로만의 2공자…….”
“그 정도… 힘이 있는데… 그러면 왜 첨탑에만…….”
주변의 드라고나들이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안을 바라보며 속닥이고 있을 때 시안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여섯 놈을 두들기면서 전리품으로 빼앗은 ‘나랑겔’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이상한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시안은 생각했다.
‘아… 역시 칼이 한 자루 필요하겠지……?’
역시 보통 칼로는 자신의 힘을 모조리 담아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칼을 보호하는 데만도 상당한 힘을 소비하고 있었다.
칼집에서 검을 뽑은 건 단 한 번뿐인데 이렇게 단번에 깨지지 않았는가.
저번의 황금칼은 꽤나 튼튼했지만 너무 잡스러운 데다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거기까지 생각한 시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직히 칼이 필요할 일이 앞으로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미리 준비해두어 나쁠 것은 없다.
마침 재료도 저 너머에 있으니 지금이 기회다.
그렇게 생각한 시안은 모두가 식사준비를 하는 동안 훌쩍 몸을 날렸다.
시안이 달려 도착한 곳은 콩티앙 지방이었던, 깊고 깊은 구덩이였다.
대이적으로 인해 모조리 검은 구 안으로 빨려 들어간 콩티앙 지방은 수 킬로미터에 해당하는 깊은 흔적만을 남기고 있었다.
시안은 지체 없이 그 안으로 뛰어들었고, 움푹 파인 곳의 한가운데를 향해 달려갔다.
시안이 도착한, 파괴 현장의 한가운데는 주변보다 더욱 깊숙한 흔적이 나 있었다.
조그맣게 압축된 검은 구가 떨어지면서 남긴 두 번째 파괴의 흔적이다.
그 아래로 들어간 시안은 이윽고 아직 가열된, 상태가 식지 않아 붉은 상태로 주변을 녹이고 있는 검붉은 구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적이 실행된 지 한 시간 가까이 되었는데도 아직 그 열기가 식지 않고 땅을 녹이며 파고들고 있었다.
‘…이거다.’
도시 하나를 통째로 압축해 넣은, 검은 구체.
원래대로라면 수만 톤, 수십만 톤도 넘는 무게겠지만 그 파괴의 흐름을 견디지 못한 물질들은 압축과정에서 모조리 기화되어 허공으로 흙먼지와 섞여 날아가고, 그 정수만이 남은 상태.
여러 가지가 섞여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거대한 엑사르의 흐름으로 인해 구체 안에 남은 물질들은 압축되고 압축되어 압력과 고열, 막대한 양의 엑사르로 인하여 분해되고 재조립되어 전혀 새로운 하나의 물체로 탈바꿈하였다.
무엇보다도 단단하고, 무거운 물질.
이 상태로도 족히 수천 톤은 넘는 무게였지만 시안에게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자신의 손에 들리면 중력의 법칙은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시간이 없었다. 식기 전에 작업을 끝내야 편하다. 이대로 굳어지면 자신도 꽤나 고생해야 한다.
이윽고 시안은 머리 크기 정도의 구체를 들어 올리더니 신중하게 양손에 힘을 집중하고 빚어내기 시작하였다.
구체를 손으로 누르고 당기고 뽑아내니 어느 순간 구체는 1.5미터를 간신히 넘기는 막대기 모양으로 변해 있었다.
시안은 그 상태에서 손으로 조금 더 형태를 빚어내고 손잡이 부분에 쥐기 편하게 홈을 새긴 후 마지막에 자신의 손가락에 전력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 손가락으로 칼의 날이 될 부분을 잡고 양쪽에 날카롭게 그날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무런 장식도 없고, 상대의 칼날이 미끄러져 와 자신의 손을 베는 것을 막아주는 도파도 없는 기묘한 형태의 칠흑색 검이 완성되었다.
어찌 보면 수련용으로 많이 쓰는 목검과도 비슷한 모습.
다른 점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균형 잡혀 있고 그 선이 마치 신이 그려낸 것처럼 일그러짐이 없다는 것.
하지만 그런 검을 시안은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오로지 검의 본래 기능인 날카로움과 단단함, 파괴력에만 그 역량을 집중한 녀석.
황금칼처럼 잡스러운 기능(?)은 하나도 없다. 그렇기에 더욱 훌륭하다.
이 검이라면 자신의 힘을 모두 소화해낼 수 있을 것이다.
시안은 이 녀석을 어떻게 들고 다닐까 하다가 자신의 목에 걸려있는 작은 목걸이가 생각났다.
그리고 이윽고 푸른빛이 번뜩이더니 칼이 안쪽으로 쭈욱 빨려 들어갔다.
순간 목걸이 쪽에서 자그마하게 푸른빛이 번뜩였다.
니츠마탄의 공간이 거의 가득 찼다는 뜻이다. 기화되고 압축되었다고 하여도 근 일만 톤에 가까운 물질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자신의 개인용 보관함에 다른 물건을 많이 담을 일은 없을 터이니.
즉흥적으로 칼을 만들기로 결정했지만 만들어 놓으니 마음에 쏙 들었다.
시안은 곰곰이 이 칼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다가 결정했다.
<크로나-폰>
산맥을 베어 물었다는, 전설에나 나오는 거대한 하리쟌, 크로나의 앞발이라는 뜻이다.
이 녀석이라면 충분히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위력을 보여줄 것이다.
쓸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왠지 그러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요즘 들어 자신을 이끄는 기묘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무의식이 속삭이는… 그런 소리.
칼이 완성되자 시안은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잠시 서글픈 듯 콩티앙이었던, 이제는 구덩이가 되어버린 파괴의 흔적을 둘러보더니 서둘러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본의는 아니지만… 복수는 해 줬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 ☆ ☆
“…몽땅 전멸했다고?”
2왕자 라쿤은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나즈갈 장군은 자신이 신임하는 장군 중 하나이다.
단순히 무력뿐 아니라 치고 들어가야 할 때를 정확히 아는 그 짐승 같은 육감은 우샤란 왕국에서 벌어진 여러 차례의 국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한데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나즈갈 장군이 들어가자마자 콩티앙 성을 중심으로 폭축 이적이 발동하였습니다.”
“이런… 그런 걸 숨겨놨었나……. 설마 거기에 휩쓸려 들어간 건가? 나랑겔의 문이 있지 않은가?”
이해가 가지 않는단 표정으로 라쿤 2왕자가 되물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정황상 그럴 가능성이 굉장히 높습니다.”
“허… 이것 참…….”
라쿤 2왕자는 머리 아프단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되면 계획을 전면 수정하여야 한다.
남은 켈-루펀과 카누안을 활용하면 콘 왕국까지 지배하는 것은 무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단번에 켈-루펀 70기를 잃어버린 바람에 그 이상을 노릴 수 없게 되었다.
애초에 이번 기회에 타란까지 압박할 생각이었던 자신의 생각과 달리 국경을 유지하는 데만 힘써야 할 것이다.
아니, 앞으로 콘을 잡아먹는 데도 상당히 오래 걸리게 될 것이다.
자신의 계획대로라면 콩티앙을 점령하고 50기 이상 남은 켈-루펀들과 나즈갈 장군의 병력들이 수도를 압박해주어야 했는데 모두 무산된 것이다.
라쿤 2왕자가 머리를 부여잡고 있을 때 바깥에서 보좌관이 상기된 표정으로 들어와 외쳤다.
“왕자님! 급보입니다!”
“음? 뭐지? 설마 나즈갈 장군이 발견되었나?”
반색하며 되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티안 왕국이 타란 왕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전면전에 들어갔습니다! 목표는… 타란의 라그랑 지역입니다!”
“뭣?!”
라쿤은 예상치 못한 소식에 잠시 놀랐지만 이윽고 사태를 파악하고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나라샤, 이 너구리같은 자가…….”
라쿤은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된다는 듯 나라샤를 향해 이를 갈았다.
☆ ☆ ☆
라-샤르-로아를 통해 돌아온 시안은 수도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른 것을 느꼈다.
“무슨 일 있습니까?”
급한 호출을 받고 왕궁에 다녀온 셀린에게 시안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전쟁이야.”
“그건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 아니었습니까?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만… 방금 다녀왔는데요.”
심드렁한 시안의 표정에 피식 하고 웃은 셀린이 말을 이었다.
“조금 다를걸. 이번에는 우리 나라가 타란을 침공한 거니까.”
“음?”
시안은 방금 무언가를 잘못 들었는가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나라샤 국왕의 지휘 아래, 티안은 국경을 넘어 타란 왕국을 향해 맹공세를 펼치고 있었다.
☆ ☆ ☆
‘나라샤… 이 인간 정말 대단하군…….’
칼라굴에게 든 생각이었다.
애당초 나라샤 국왕은 동맹의 정 같은 얄팍한 것으로 자신을 콘 왕국에 지원 보낸 것이 아니었다.
모두 우샤란 왕국과 콘 왕국의 전쟁에 시선을 집중시켜 놓기 위한 속임수였다.
칼라굴 자신을 콘 왕국에 보내 전력을 바깥으로 돌린 것처럼 하여 티안 왕국의 전력을 쪼갰다고 생각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들은 혹시 모를 타란 왕국과의 도발에 대비하는 것처럼 차근차근 병력을 타란 왕국 쪽으로 재배치하였다.
이게 모두 타란을 방심시키기 위한 수작이었다. 자신들은 콘 왕국에 신경 쓰고 이 격렬한 사태에 휩쓸릴까 봐 겁에 질려 있다는…….
애초에 나라샤 국왕의 목적은 타란 왕국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타란 왕국의 가장 비옥한 토지이자 핵심인 라그랑 지방이 목적이었다.
나라샤 국왕은 콘 왕국과 우샤란 왕국이 전쟁에 들어가면 자신들에게 신경을 쓸 여력이 없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평소라면 타란을 치면 동맹이고 나발이고 이 두 왕국을 경계해야겠지만 이미 전면전에 들어간 두 왕국은 그럴 여력이 없을 것이니.
그 틈을 타 시선을 양 국의 전쟁으로 돌린 후 방어라는 명목하에 기습을 준비한 것이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마자 나라샤 국왕은 로만 백작과 키라인 검공, 두 명의 그랑-반더를 앞세워 타란 왕국을 기습하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저 둘이 핵심세력이 아니었다. 정체불명의 강대한 세력이 나라샤 국왕을 돕고 있었다.
그리고… 티안 왕국은 그들의 힘으로 가볍게 타란의 국경 지역을 박살내고 파죽지세로 라그랑 지방으로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