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25화 (26/81)

<25. 침공>

<인간의 힘에 의해 이루어지는 티안을 만들 것이다, 초인이 아닌.>

-나라샤 1세와 탈린 자작과의 담소 중에서

☆ ☆ ☆

타란 왕국의 동북쪽에 위치하는 라그랑 지방.

티안 왕국의 국경과 타란 왕국의 수도, 스탄탈의 가운데쯤 하늘산맥의 아래 위치하는 이 지역은 예전부터 <태양신이 머무는 곳>이라는 이명으로 더 유명했다.

그 정도로 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땅이었다.

곡물은 심으면 다른 지역의 서너 배가 자라났다. 라그랑 지방에서 나는 곡물은 타란 전역을 먹여 살리고도 남아 티안에 수출이 될 정도였다.

하늘산맥에 인접한 산맥은 파내도, 파내도 금과 은, 철광석과 희귀금속이 마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항상 건강했고 재지가 넘쳐났다.

심지어 이곳에서 태어나는 인물들은 평균적으로 반데르 수치가 5 정도 높다는 엑자일 대법도회의 연구결과도 있었다.

타란 왕국은 원래 강국이 아니었다.

타란 왕국이 강국이 된 것은 200년 전, 반역으로 타란의 왕가를 몰살시키고 새로이 왕위에 오른 스탄탈 1세가 라그랑 지방을 먹어치운 후이다.

너무나 풍족하였기에 평화에 찌들어있던 라그랑 지방을 스탄탈은 전력을 다해 몰아붙여 점령하였고, 그 이후 타란 왕국은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타란의 식량과 인재, 재산이 모두 이곳에서 나왔다.

이곳을 빼앗기면 타란 왕국의 전력은 즉시 절반 수준으로 급감한다. 아니, 장기적으로 가면 더 아래로 내려갈 것이다.

반대로 상대의 전력은 그만큼 증강할 것이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타란 왕국은 항상 이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심지어 수도보다도.

그리고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라그랑 지방은 뚫린 적이 없었다.

아니, 라그랑은커녕 그 바깥의 국경지역이 뚫린 적도 없었다.

자신들은 군사강국 타란이니까.

그렇기에 충격이 더 컸다.

“나라샤, 이 미친 자식이…….”

왕을 대신하여 타란을 통치하고 있는 스탄탈 4세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우샤란이 전쟁을 일으키길래 빈틈을 보이면 바로 먹어치우려고 병력을 이동시키고 있었는데 티안에게 뒤통수를 맞을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다.

애초에 그랑-반더 하나 통제 못하고 바깥으로 내돌렸다길래 머리만 좋지 팔푼이 녀석으로 보고 있었는데 이딴 짓을 벌이다니!

방심을 했다지만 결코 국경지역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티안이 왕권 이양전으로 어수선했다면 바로 쳐들어가려고 평소보다 국경의 군기를 엄하게 잡고 있었다.

하지만 나라샤의 준비가 더 치밀했다.

로만 백과 키라인 검공이라는 녀석은 방어를 하려고 무장단체를 모으는 척 하다 한순간에 치고 들어왔다.

덕분에 국경은 자신들의 대무장이 달려가기도 전에 뚫리고 말았고, 녀석들은 현재 맹렬하게 라그랑 지방으로 달려가는 중이다.

‘나라샤… 애송이가 준비를 많이 했구나.’

구십 세가 되도록 강국, 타란을 지배해 온 스탄탈 4세에게 나라샤는 갓 왕위에 오른 애송이에 불과했다. 그런 녀석에게 라그랑 지방으로 통하는 국경이 뚫리게 될 줄은 예상도 하지 못하였다.

이제는 더 이상 무시할 수도 없다. 녀석은 엄연히 결과로 보여주고 있으니까.

녀석은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자신을 대적할 만큼 치고 올라왔다.

그렇기에 이제는 전력을 다해 밟아줄 때가 되었다.

‘애송아… 근질근질했는데 잘 되었다. 이번 기회에 수도까지 몽땅 털어주마.’

차라리 잘 되었다. 우샤란 놈들도 전쟁으로 정신이 없는 이때에 직접 밟아 주리라. 라그랑 지방까지는 가지도 못하게 할 것이다.

“여봐라! 크라논을 제외한 넷의 대무장들을 모두 불러들여라!”

우샤란과의 접경을 지키는 크라논을 제외한 타란 왕국을 지탱하는 네 명의 그랑-반더.

네 명의 그랑-반더라면 저 애송이 녀석을 완벽하게 짓밟아 주기 충분하리라.

라그랑 지방으로 가기 전, 탈로스에서 밟아줄 것이다.

☆ ☆ ☆

“…그래서 이번에 드라고나가 또 그쪽으로 불려간다고요?”

“그렇단다, 시안.”

“아버지는 이미 그쪽으로 가 계신 상태이시고요?”

“…그렇단다.”

빠드득.

형의 말을 들은 시안은 뭔가 속에서 배배 꼬이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과 동떨어져 살기에 자신의 가문은 너무나도 세상과 엮여 있었다.

자신들의 가족이 약자는 아니지만 전쟁터에 아버지와 형보다 강한 자는 분명 존재한다.

여기까지 생각한 시안은 결론을 내렸다.

나라샤 국왕이 계속해서 전쟁을 벌인다면, 그리고 그 선봉에 로만가를 세운다면, 자신은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담판을 지어야 했다.

여기까지 생각한 시안은 왕궁으로 향했다.

여차하면… 자신도 최후의 수단을 쓸 생각이다.

“걱정 말게. 전쟁은 라그랑 지방이 마지막일세.”

“흠…….”

뭔가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안을 여유롭게 보고 있었지만 나라샤 국왕은 속으로 조마조마한 상태였다.

시안이라는 아이의 표정을 보니 이제 슬슬 참는 데 한계가 온 것 같았다.

실제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것이 여차하면 손을 쓰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표현하고 있어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후… 그래… 이 정도면 많이 참은 거지…….’

절대의 힘을 지닌 자가 이 정도면 많이 참아준 것이다.

자신이 지금 가장 걱정하고 있는 것은 스탄탈이라는 늙은이도, 타란 왕국의 대무장들도 아니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로만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문제는 눈앞의 시안이 언제까지 그걸 참아주느냐 이다.

시안이 나라샤 자신의 목을 날려버리는 것이 로만가가 더 이상 전쟁에 엮이지 않는 가장 쉬운 선택이라고 판단하는 순간, 나라샤 왕가는 일 년 만에 종치는 것이다.

그러면서 속으로 나라샤는 한숨을 쉬었다.

자신은 눈앞의 시안이라는 어린아이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

권력, 재력,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을 다루는 용인술이나 인맥, 판단력, 지혜, 처세, 왕으로서의 위엄, 카리스마, 사람을 이끄는 매력…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단 한 가지가 눈앞의 어린아이보다 못하기에 항상 눈치를 보아야 한다.

“어차피 정복전쟁을 오래 지속할 수는 없네.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한계는 라그랑까지야.”

“…….”

이해를 못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시안을 보고 나라샤는 추가설명이 필요함을 느꼈다.

‘하아… 왕인 내가 교사 노릇까지 해야 한다니…….’

“우선 전제조건을 말해주겠네. 나는 로만 백작이나 리안 경 같은 인재가 나라에 넘쳐나길 원하지만 결코 자네와 같은 힘을 지닌 자가 티안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네.”

“음… 왜 그렇지요?”

시안은 궁금해져 물었다. 나라에 강한 무장이 많으면 좋은 것 아닌가?

“왜냐하면… 로만 백이나 리안 경 같은 인재는 만들 수도 있고 구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자네와 같은 자는 만들 수도 없고 앞으로도, 뒤로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지.”

그 말에 시안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랑-반더와 마스터는 흔하지는 않지만 항상 존재해 왔고 사회에 섞여 살아왔다.

하지만 자신 같은 강함을 가진 존재는 티안에 또 나타날 수 있지만 결코 티안을 위해 일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한 사람의 특출 난 자의 힘을 빌려서가 아닌, 나라 자체가 끊임없이 강한 무장과 세력을 생산해내고 올바른 시스템을 통해 커나가는… 그런 왕국, 아니 제국을 원한다네.”

훌륭한 조직이란 한 사람의 능력에 의존하면 안 된다.

인간이란 불완전한 존재이고 그렇기에 한 사람의 인간에 의존한다면 크게 무너지게 된다.

끊임없이 훌륭한 인재를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그 인재들이 조직을 키워나가는 선순환을 반복해야만 커 나갈 수 있다.

그게 자신이 꿈꾸는 천년 제국의 첫 번째 조건이다.

“이번 사건은요?”

“이번 일은… 미안하게 되었네. 하지만 칼라굴이라는 자를 통제하려면 자네의 힘이 필요했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걸세.”

“흐음…….”

시원하게 인정하는 말에 시안이 그럭저럭 납득한 표정을 짓자 나라샤 국왕은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자네의 힘을 빌리지 않고 티안을 강하게 만들고 싶네. 그렇게 생각한다면 라그랑이 꼭 필요하고, 그렇기에 전쟁은 라그랑 지방까지가 한계지.”

“흐음… 왜 그렇지요? 카란이나 타란을 모조리 병합한다면 더 좋지 않습니까?”

“그다음 단계를 진행하려면 로만 백작의 힘이 필요한 것이 아닌, 자네의 힘이 필요하니까. 거듭 말하지만 나는 사실 자네의 힘을 빌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네.”

‘제어할 수 없어 두렵기 때문이지…….’

굳이 약세를 드러낼 필요가 없기에 이 말은 속으로 삼켰다.

시안이라는 아이의 활동을 볼 때마다 그 반동이 돌아올까 봐 신경을 써야 했다.

그리고 그 반동이 한 번이라도 돌아온다면 그동안 얻은 것은 다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음… 알겠습니다. 제가 힘쓸 일은 따로 없다는 뜻이지요?”

“사실 계획대로만 된다면 굳이 자네의 힘이 필요하지 않네. 티안의 힘만으로도 충분하겠지. 자네는 단지 로만 백작과 리안 경이 걱정되어 힘을 쓰는 것 아닌가.”

나라샤는 구태여 티안과 시안을 구분 지어 말했다.

“음… 그것도 그렇군요. 그러면… 이번이 마지막이겠지요, 전쟁은?”

“그렇다네. 라그랑 지방만 먹는다면… 티안은 지금보다 족히 두 배 이상 강해질 것이고… 그러면 아무도 시비를 걸지 못하겠지. 이미 다 그 뒤의 계획을 세워놓았으니 걱정하지 말게.”

‘흐음… 이쯤에서 타협할까…….’

이번 한 번 정도라면 어느 정도 참아줄 만했다. 전쟁만 아니라면 자신의 형이나 아버지를 위협할 자는 없으니 마음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을 것이다.

“좋습니다. 이번 한 번만입니다.”

“이해해주니 고맙군.”

“아, 그리고!”

나라샤 국왕은 시안의 뒤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정신을 집중했다.

“그 드라고나 라는 거에서 저랑 형 좀 빼줘요. 아! 그리고 셀린 경이랑.”

“…….”

“아버지 따라다닐 거예요. 그쪽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어요. 거… 그 뭐냐… 그 전에 하던 거… 3기사단, 거기 넣어줘요. 안전하고 딱 좋구먼.”

“…알겠네. 그러도록 하지. 계획대로라면 자네 아버지가 위험할 일은 전혀 없지만… 정 걱정된다면 그리하게나.”

“그 계획 어긋나는 게 걱정돼서 그래요. 후… 아, 그리고 제가 이런 부탁 했다는 것도 비밀입니다.”

“…걱정 말게나.”

나라샤 국왕은 시안이 나간 후 숨을 돌렸다.

이제 가장 걱정하던 문제도 해결되었다.

이제는 라그랑 지방만 해결하면 된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라그랑만 손에 넣는다면… 티안은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강대한 제국으로 첫 보를 내디딜 수 있을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며 나라샤 국왕은 미소를 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