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탈로스>
탈로스 요새.
라그랑 지방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자 탈란 최강의 요새.
방어법진이 성벽마다 덕지덕지 발라져 있었고 첨탑 곳곳에 최신식 대포가 설치되어 있었다.
특히 타란 기술의 정화인, <캘라반>은 라그랑 지방에서 나오는 희귀 금속을 이용하고 드콘족이 제작한 명품 중의 명품이었다.
자동조준으로 반더까지 맞출 수 있도록 설계된 이 거치형 포탑은 성벽 뒤쪽 첨탑에서 자신의 포신을 뽐내며 성벽 너머를 겨냥하고 있었다.
이곳은 근 이백 년간 침략을 당한 적이 없었는데도 이 정도 최신식의 설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타란이 라그랑 지방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런 탈로스 요새 앞에 우리가 서 있구먼…….”
키라인 검공이 저 멀리 보이는 탈로스 요새를 보며 뇌까렸다.
키라인 검공의 뒤로는 티안이 자랑하는 무장 병력들이 쭉 열을 지어 서 있었고, 그 너머로 온갖 무구들로 무장한 병사들이 탈로스 요새를 노려보고 있었다.
다들 타란 지방의 국경을 박살 냈다는 흥분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지 얼굴에 열기를 가득 띠고 당장이라도 앞으로 뛰어나가고 싶은 모양새를 취하고 있었다.
“후후… 검공, 전 벌써부터 몸이 근질근질합니다.”
로만 백은 벌써부터 전투를 할 생각에 흥분되는지 몸을 들썩거렸다.
로만 백의 젊은 시절 별명은 ‘미친 불곰’이었다.
결혼을 하고 자식을 가지고 나이를 먹으며 많이 근엄해졌지만 원래의 그 성격이 어디 가는 것이 아니었다.
로만 백은 전투를 사랑했기에 그 로만 백의 아버지는 항상 이 아이가 어디서 싸우다 후손도 못 만들고 죽어버리지 않을까 항상 걱정을 하였다.
하지만 이제 로만 백에게 그런 부담은 없는 것이다. 자신은 이미 둘이나 후손을 보았으니까.
‘거기다 모두 훌륭하게 자랐고 말이야… 후후.’
리안 그 아이가 좀 불안했는데 자신의 마음을 어찌 아셨는지 국왕폐하께서는 그 아이를 수도에 배치하였다.
이로써 자신은 마음 놓고 전투에 매진할 수 있다.
물론 죽을 생각은 없다. 반드시 살아 돌아가 셀린느의 얼굴을 봐야 하니까.
‘레바단… 이번에야말로 박살을 내주마… 후후…….’
로만 백은 저 너머, 탈로스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호적수 레바단을 떠올리며 거친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국왕폐하는 어디서 저런 자들을 데리고 오신 거지……?’
로만 백은 근위기사단 뒤에 서있는 정체불명의 단체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신들은 <그라나인>이라고 소개한 이들은 놀랍게도 인간이 아닌 듯싶었다.
외형은 비슷했지만 풍기는 기질이 달랐다.
게다가 강하기는 어찌나 강한지. 국경을 뚫을 때 저들의 전투를 보고 절로 호승심이 들 정도였다.
특히 아직까지 한 번도 나서지 않은 네 명의 장로라고 하는 자들 중 자신보다 약한 자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정말로 한번 해볼 만하겠습니다, 검공.”
“음… 확실히… 저 정도라면…….”
키라인 검공 역시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로만 백의 말에 동감의 뜻을 표했다.
이제까지 타란은 넘지 못할 벽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전력이라면 해볼 만 했다.
칼라굴이라는 자까지 왔으면 좋았겠지만 그자와 드라고나는 현재 카란과의 국경에 배치가 되었다고 한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카란은 요즘 잠잠하긴 했지만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녀석들이니.
칼라굴 정도라면 시간은 벌어줄 수 있을 것이다. 라그랑을 점령하기 전까지.
그리고 라그랑 지방만 점령하여 완벽하게 발아래에 놓는다면… 티안은 그 누구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강대국이 될 것이다.
이제까지는 카란과 타란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해왔지만 이후로는 카란과 타란이 자신들의 눈치를 봐야 하리라.
‘후후후…….’
하지만 국왕폐하의 말 중 이해가 안 가는 것이 한 가지가 있었다.
‘내 계획대로만 된다면… 굳이 로만 백까지 나설 필요는 없을 걸세… 후후.’
설마 수적 차이에 겁먹어서 도망간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수가 여섯이라고 해도 상대의 대무장 넷은 개개인의 수준이 자신들보다 상당히 높았다. 붙으면 박빙일 테니.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허튼소리 하는 분이 아닐 테니 무언가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로만 백은 언덕에 서서 상대방의 진형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 ☆ ☆
<드디어… 우리들의 고향에 돌아왔구나… 긴 시간이었다.>
3장로는 탈로스, 정확히 말하면 탈로스 너머에 있는 라그랑 방향을 보며 감동에 찬 표정으로 뇌까렸다.
오랜 시간이었다. 고향을 떠나, 제국의 전쟁에 참여한 후 400년의 시간 만에 돌아온 것이다.
오로지 고향으로 돌아오겠다는 일념 하나만을 가지고 그 죽음의 숲을 헤치고 나왔다.
그리고 이제 그 긴 여정의 끝이 보인다.
눈앞의 요새만 통과하면 바로 자신들의 신성한 영지가 나온다.
이제 자신들의 종족, 그라나인의 영토를 되찾을 때가 되었다.
<나라샤… 라는 자가 잘해주고 있군요. 저희들의 힘만으로는 뚫기 힘들었겠습니다.>
6장로였던, 이제는 5장로의 빈자리를 이어 새로이 5장로가 된 자가 웅대한 탈로스 요새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곳이야말로 그랑-반더라고 하는 자의 기세들이 성벽 너머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정확히 네 개의 기운이.
게다가 주위의 시설들을 살펴보니 여간 견고하지 않은 것이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희생이 컸을 것이다.
<대장로와 2장로만 나서주면 일도 아닐 텐데……. 후… 그분들은 뭐하고 계시는가?>
<…똑같지요. 여전히 ‘그때’를 대비하여 힘을 정련하고 계십니다.>
<조금만… 도와주시면 편할 텐데…….>
<아시지 않습니까… 그분들은 이제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지신 지 오래인 것을……. 그래도 ‘그때’ 도와주시는 것만 해도 다행이지요.>
<그래. 우리들의 임무를 잊지 말아라……. 우리들의 임무는 두 분을 우리의 영지까지 모시는 일이다……. 그 뒤의 일은… 그분들이 알아서 해주실 것이다.>
그 말에 5장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요새만 뚫으면 된다. 그러면 자신들의 임무는 끝이 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자신들은 400년 만에 자신들의 고향에 안착할 수 있을 것이다.
☆ ☆ ☆
시안은 수도를 떠나 아버지인 로만 백작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계속 무언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탈로스 요새라는 곳으로 가까워지는 동안, 무언가 계속 동류의 냄새가 났다.
시안은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계속 만지작거렸다.
이 녀석을 만들어놓고도 쓸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느낌이 온다.
무언가 거하게 한바탕 날뛰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그리고 안타깝게도 자신의 이런 예감은 틀린 적이 별로 없었다.
“후우… 그래, 이번이 마지막이다…….”
시안은 마음을 다잡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번만 끝나면… 자신은 자유로워질 것이다.
시안은 이번 일만 끝나면 여행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쟁을 마무리 짓고 가족들만 안전하다면, 자신을 얽매어 놓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 ☆ ☆
전쟁은 자신들을 ‘그라나인’이라고 밝힌 자 중 6장로가 기묘한 수인을 맺으며 시작되었다.
[LA-AKUM-SAOW-SHE…….]
기묘한 주문을 외우며 이리저리 엑사르의 흐름을 제어하는 6장로의 모습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티안의 왕실 대법도회 소속 1급 법도사 제라프는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저자… 특이하구나.”
“음? 스승님? 무엇이 말인가요?”
옆에 제라프의 제자인 4급 법도사 카트린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카트린이 귀여웠는지 제라프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인데도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주었다.
“저자… 엑서이면서 법도를 다루고 있다.”
“음… 그럴 수도 있나요?”
“희귀하지만… 없는 것은 아니지. 당장 브로샨 제국의 왕실 소속 대법도사만 해도 그 둘을 동시에 다룬다고 하니 말이다. 저자는 그 정도는 아닌 듯하지만… 그래도 대단하구나.”
17년 전 워낙 신기한 것을 목격한 뒤로 특별한 것에 대한 내성이 높아진 제라프는 저런 일도 있구나… 하며 살짝 놀란 정도였지만 아직 세상의 많은 것이 신기한 20살 카트린은 스승님의 말을 듣고 6장로를 더욱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황홀한 빛에 휩싸인 채로 시동어를 외우고 법진을 재배열하던 6장로는 이윽고 준비가 다 되었다는 듯 손에 들고 있던 남빛의 탈릭 스톤으로 힘을 집중시켰다.
[…ASCA… RAU… SHWO… <아그랑의 길>]
순간 짙은 남빛을 띠고 있던 탈릭 스톤이 더더욱 깊은 색을 띠는가 싶더니 그 안에서 찬연한 붉은빛의 광선이 쏟아져 나왔다.
2급 이적인 ‘아그랑의 길’에 다른 특별한 부가기능은 하나도 없었다.
단지 전쟁용 파괴마법의 기본에 충실한, 파괴 마법의 기본요소를 극대화시킨 마법이다.
강대한 파괴력과 긴 사정거리.
거기에 6장로는 자신의 엑서로서의 권능을 첨가하여 특수한 부가기능을 첨가하였다.
순식간에 쭉 뻗어나간 아그랑의 길은 탈로스 요새 안에 높이 치솟아 있던 망루 중 하나를 정확하게 가격하기 위해 뻗어나갔다. 저곳의 첨탑은 타란의 포탑이 배치되어 있었기에 원활한 접근을 위해서는 반드시 파괴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피잉!
그 순간, 첨탑을 마치 평지처럼 밟고 달려 올라온 한 인형이 칼을 뽑더니 첨탑을 박차고 뛰어올랐고, 이윽고 칼에서 아그랑의 길보다 더 찬연한 빛을 뿜어내며 첨탑을 향해 날아오던 빛줄기를 두 갈래로 갈라버렸다.
빛이 두 조각이 날 수는 없건만 날아오른 인물은 그런 상식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빛을 토막을 내버리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중력의 법칙에 따라 천천히 땅으로 가라앉았다.
타란의 대무장 중 하나인 <불패의 쟈그론>이었다.
하지만 미소 짓는 쟈그론을 보는 6장로 역시 씨익 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심장박동에 맞추어 강하게 자신의 능력을 발동시켰다.
이윽고 갈라진 두 갈래의 빛은 그대로 휘어지더니 그대로 쟈그론이 밟고 올라갔던 첨탑의 망루 부분으로 날아갔다.
……!
별다른 소리도 나지 않았다.
망루가 있었던 곳에는 아그랑의 길이 교차되며 지나간 흔적만이 녹아 붙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도 힘이 남아 두 갈래의 빛줄기는 6장로의 의지에 따라 주욱 하고 한 번 더 휘어지더니 땅바닥으로 꽂혀 들었고, 이윽고 폭발을 일으켰다.
쿠궁……!
폭발이 일어났던 자리에 먼지가 걷히자 한 명의 무장이 방패를 들고 이를 뿌드득 갈고 있었다.
로만 백작이 호적수라 여기는, 대무장 <학살자 레바단>이었다.
날아오는 빛줄기가 자식새끼들 같은 자신의 무장 병단을 노리자 참지 못하고 달려와 막은 것이다.
<후후… 인사 대신이라네.>
6장로는 막힐 것을 알고 있었는지 막히고도 여유롭게 웃었다. 어차피 이건 가벼운 수 교환이다.
아직 자신들이 나설 때가 아니다.
이윽고 6장로의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양측에서 무섭게 이적들이 현세를 비틀며 구현되었다.
콰캉! 쭈우웅! 콰작!
그리고 양쪽으로 흩날리는 포격과 이적들을 헤치며, 무장들은 온몸에 반데르를 두르고 상대편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 ☆ ☆
시안은 멀리서 쿵쾅거리고 있는 전쟁터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전쟁이 시작하기 전에 도착한 시안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산 위에 올라가 전쟁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그냥 빨리 끝내버리려고 하였다.
이번에 깨달은 것이 있는데 자신이 가족만 지키려고 해도 가족이 전쟁에 한 발 담그고 있으면 결국 자신도 같이 싸우는 것과 똑같다.
자신과 상관없는 전쟁에 끼어드는 것은 짜증 났지만 라그랑 지방까지만 먹으면 끝이라고 했으니까 차라리 아예 빨리 끝내는 게 나을 것 같아 오면서 고민을 했다.
그런데 뭔가… 찜찜했다. 나서기 애매한 그 느낌이.
분명 거하게 한바탕 해야 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여기가 아닌 모양이었다.
물론 자신이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이지만…….
이런 느낌이 처음이라 조금 참으며 지켜볼 생각이었다.
아버지가 위험해질 듯하면 주저 없이 뛰어들 것이지만 아직까지 아버지를 위협할 만한 적은 없어 보였다.
아버지를 위협할 만한 적은 저 건너편의 넷 정도… 그중 확실히 위험한 건 둘이다. 하지만 그들은 티안의 진영을 노려보기만 할 뿐 끼어들지 않고 있었다.
아마 경계하고 있는 것이리라.
가끔 날아다니는 포격 중 위협적인 위력을 가진 것은 있었지만 그랑-반더 정도 되면 저런 것에 맞아주기는 힘들었다.
엑사르의 흐름이 너무 강대하여 자다가도 깰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차피 지금은 전초전이다. 주역들은 나서지도 않았다.
‘그나저나 아버지… 거참… 나보고는 싸우지 않는 게 가장 좋은 거라고 하시더니…….’
로만 백은 전쟁터의 뒤편에 서 있는 채로 아직 뛰어들지 않은 상태였다. 상대의 대무장들이 가만있는 것을 보고 검공과 함께 견제를 하는 중이었다.
뛰어들고 싶어 안절부절못하는 그 모습을 보니 도저히 어머니와 함께 자신을 교육하던 분이라고는 생각이 안 들 정도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교육내용 자체는 공감이 갔기에 별로 불만은 없었다.
부모님이 없었다면 자신은 그 쿤타리안이라는 녀석과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그런 꼴불견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리저리 전쟁터를 살피던 시안은 이윽고 무언가 익숙한 사람들을 발견했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았다.
‘나라샤, 이 아저씨… 저 사람들 믿고 전쟁 일으킨 건가… 그러면 이해가 가네.’
전장을 휘저으며 맹렬하게 성벽으로 달려가는 정체불명의 집단.
수준이나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자신이 아버지 걱정을 하지 않는 이유 중에는 저 존재들도 있었다. 수준이 보통이 아니었다.
특히 전장에 참여하지 않은 채 지켜보고 있는 네 명은 정말 상당했다. 하나하나가 칼라굴 그 아저씨, 혹은 그 아래 정도는 될 듯하였다.
어디선가 익숙한 느낌이 살짝 들기는 했지만… 자신이 저런 존재들과 엮일 일이 전혀 없었기에 시안은 자신의 착각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인간이 아닌 존재들과 자신이 엮였던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저들은 인간과 비슷해 보이기는 하지만 인간이 아니었다.
자신이 당장 그 본질을 읽기 힘든 것만 해도 그렇다. 기세나 에너지가 순간순간 바뀌고 있어 오 초 전과 지금이 동일인물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조금 이상했다. 지극히 내면의 완성도가 높지만… 무언가 한구석이 비어 있는 듯한… 무언가 끊어져 있는 그런 느낌.
무엇인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저러고 살면 꽤나 불편할 것이라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러는 와중에 전장에 변화가 일어났다.
☆ ☆ ☆
“…도대체 저런 녀석들은 어디서 데리고 온 거지?”
타란의 대무장, 쟈그론은 믿기 힘들단 표정으로 저 너머 자신들을 응시하고 있는 상대편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언덕에 서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네 명과 로만 백, 키라인 검공을.
로만 백과 키라인 검공에 대한 보고는 받았다지만 저 뒤의 네 명에 대한 보고는 전혀 받지 못하였다.
저자들이 참전할 새도 없이 국경이 뚫려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래에서 전쟁터를 휘몰아치고 있는 녀석들도 움직임으로 보나 기세로 보나 어디 숨겨놓고 주구장창 밀실수련만 하다 튀어나온 놈들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전쟁터에서 구르고 구른 무장보다도 더 살벌한 기세를 풍기는 것이 죽음과 밀접하게 살아온 녀석들이었다.
저 정도로 크려면 어디서 소문이 나도 났어야 한다. 하나당 죽인 놈의 수가 수백, 수천은 될 것이니까.
그런데 저런 놈들을 숨겨왔다니…….
“흐흐… 쟈그론, 설마 겁먹은 건 아니겠지?”
“콜란, 이 자식아. 상황 파악 좀 해라. 진짜 만만치 않단 말이다.”
옆에서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같은 타란의 대무장 콜란이 이죽거리자 쟈그론이 한심하단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처음에 여기 올 때까지만 해도 굉장히 가벼운 마음으로 왔다.
티안과 타란이 적대관계라고 하여도 객관적으로는 상대도 되지 않는다.
자신들, 타란 왕국에는 스탄탈 4세를 포함하여 여섯의 그랑-반더가 있었다.
비록 전사를 우대하는 분위기 때문에 법도회나 신관의 힘이 무장 전력에 비해 조금 약한 편이긴 하지만 어디 가서 밀리지는 않는다.
우샤란 이 뱀 같은 녀석들이 동맹이라고 살랑거리면서 호시탐탐 자신들의 뒤통수를 노리고 있지만 않았어도 티안은 진작 자신들의 밥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균형관계는 우샤란과 티안이 동시에 자신들을 견제하는 한편 수비의 이점을 무시할 수 없기에 유지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녀석들이 건방지게 먼저 쳐들어오다니!
이 소식을 우샤란 접경지역에서 전해들은 쟈그론은 코웃음을 쳤다.
새로 왕이 된 나라샤라는 녀석이 너무 의욕이 넘쳐 한번 코가 깨져야 정신을 차릴 것인가 하는 생각에.
한편으로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샤란도 전쟁에 돌입한 김에 이번 기회에 저 녀석들을 모조리 쳐 죽이고 비옥한 셀라인 영지까지 치고 나가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한데 도착해서 뚜껑을 열어보니 사정은 전혀 달랐다.
도대체 저 정도 힘이 있는 녀석들이 어디 숨어 있다가 튀어나왔다는 말인가.
“후후… 쟈그론. 생각이 너무 많아, 너는.”
“…….”
“솔직히 이길 수도 있잖아, 저 녀석들은. 너 지금 저 녀석들 말고 나라샤 그 너구리가 다른 숨겨둔 패가 있을까 봐 그러는 거잖아.”
콜란의 그 말에 쟈그론은 정곡을 찔린 듯 움찔하였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그랑-반더는 흔히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그리고 마스터와 그랑-반더 사이에 너무나 심한 차이가 존재하기에 사람들은 그랑-반더 간의 실력 차가 크지 않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는 한다.
하지만 그건 큰 착각이다.
마스터 간의 실력 차가 심하듯, 그랑-반더 간의 실력 차는 더욱 심했다.
당장 그랑-반더 셋을 상대로도 우위를 점했다는 무장사냥꾼, 켈-두인만 보아도 그 답이 나온다.
그렇기에 두렵지 않다.
저쪽의 수상한 녀석들 하나하나도 그랑-반더를 맞상대할 만한 수준이기에 수적으로 보면 6 대 4로 밀린다고는 하지만 싸우면 절대 밀리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걸 나라샤라는 녀석도 명확히 알고 있을 것이란 거다.
맞붙으면 분명 공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을 것을 알고 있을 터인데 이렇게 침략을 하다니?
자신들이 이렇게 넷이나 모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콜란과 자신 둘만 있어도 로만 백과 키라인을 잡기에는 충분한데.
다 피해 없이 잡아 죽이기 위해 이렇게 모인 것이다.
한데 도착해보니 사정이 달랐다. 이대로 충돌하면 피해가 너무 크다.
자신들이 이런 식으로 공멸하면 우샤란은 그대로 타란과 티안을 집어삼키고 제국이 되는 것이다. 이곳에서 그랑-반더를 모조리 잃는다면 자신들은 우샤란이나 카란을 상대할 여력이 없어진다.
설령 라그랑을 지키면 뭐 하는가? 그대로 다른 왕국의 입에 떠서 바치는 꼴이 될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다음이다.
자신들을 뚫는다고 하여도 도대체 라그랑에 도착해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어차피 그다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거기에서 막히고 말텐데.
그곳에서 녀석들을 가로막을 문제에 비하면 자신들 같은 그랑-반더 넷은 정말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
즉, 무언가 자신들을 피해 없이 몰아내거나 제압할 방법과, 라그랑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쟈그랑은 그것이 못내 찝찝하여 이렇게 망설이는 것이다.
나라샤 이 애송이의 속마음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빠지려면 지금 빠져야 한다. 계속 이런 식으로 힘 갉아먹기를 한다면 결국 우샤란을 억누를 힘도 남지 않는다.
대무장들이 난장치기 전에 정리를 해야 한다.
그리고 주요전력들을 모아서 보존하고 그 뒤는 라그랑에 맡겨야 한다.
고민하던 쟈그론을 보며 콜란이 말했다.
“후후… 내가 오랜 전우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음?”
“몽땅 모아서 빠지자, 라그랑으로. 그리고 몽땅 떠넘기면 되지.”
“허… 너 지금 그게 무슨 소린지 알고 하는 소리지, 지금?”
“당연하지. 어차피 나라샤 그 애송이가 그걸 모를 리 없고, 그 얘기는 그에 걸맞은 해결책을 준비해왔다는 건데… 그러면 오히려 그분은 좋아하실걸.”
“……!”
“어차피 누가 이기건 상관없다고.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콜란이 평소와는 다르게 맥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제야 쟈그론은 정신이 번쩍 들며 자신의 마음속에서 외치던, 하지만 무시하고 있던 소리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자신과 상대편의 저 녀석들이 주연이 아니라는 것이.
오랜만에 죽을힘을 다할 호적수들을 만났다. 이런 일은 평생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여기서 죽을 정도로 싸우고 살아남은 자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그리고 모든 것을 쟁취하는 그런 그림을 바랐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것을 인정하자 쟈그론은 놀랍도록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고맙다, 콜란.”
“후후…….”
이 말을 끝으로 쟈그론을 비롯한 네 명의 대무장들은 본격적으로 전장에 뛰어들어 상대를 뒤로 밀어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잠시 소강상태에 빠진 틈을 타서 병력을 모조리 모아 라-샤르-로아를 통해 뒤로 빠지기 시작하였다.
티안의 병력들은 그 뒤를 쫓고 싶었지만 자신들도 너무 지친 상태에다 대무장들의 위엄을 보고 기가 질린 상태라 더 이상 쫓지 못하고 그대로 보내주었다.
국경전에 이은 2차전, 탈로스 공방전은 그렇게 대무장들의 전투는 벌이지도 않은 채 싱겁게 끝이 났고, 양측 다 큰 피해를 받지 않은 상태로 티안은 그대로 라그랑을 향해 진격해 들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