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27화 (28/81)

<27. 라그랑의 지배자>

<나라샤… 그 인간 참… 영리하군요…….>

별로 힘도 쓰지 않고 라그랑까지 가는 길이 뚫린 그들은 현재 빠르게 라그랑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전쟁은 길어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속전속결로 끝내야 했다.

<협력자를… 잘 얻은 것 같다… 그때 한 번의 실수를 제외하면…….>

<그것은… 어쩔 수 없지요……. 파-하리쟌인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때 사건으로 지금의 자리에 앉은 5장로가 단조로이, 하지만 어딘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후… 키라트… 그 아이는… 잘 숨어있는가?>

자신들은 윤회의 여파인지 끊임없이 기운이 유동적으로 바뀌기에 기운을 가지고 추적하는 것은 파-하리쟌이라고 할지라도 힘들 것이다.

하지만 키라트 그 아이는 다르다.

이미 얼굴을 들켰다.

파-하리쟌쯤 되면 그런 은원에 얽매이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예측할 수 없기에 키라트는 그 사건 이후로 숨어 지내고 있다. 혹시 걸리게 되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네… 그 아이는… 자청해서… 다른 왕국으로… 가 있는 상태입니다…….>

<안타깝구나……. 우리의 숙원이 끝나면… 부르도록 하게…….>

5장로는 떠날 때 키라트의 다부진 표정이 떠올라 왠지 보기 힘들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일단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가장 중요하고도,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

<그랑-라트라가 보이는군……. 대장로와 2장로께서는… 준비가 모두 되었다고 하시는가?>

<네,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그 말을 마치고 3장로와 5장로는 저 멀리 보이는 라그랑 지방을 보며 감격 어린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400년 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자신들의 신지 라그랑, 아니 자신들의 언어로 <그랑-라트라>에 도착한 것이다.

이로써 자신들, 그라나인은 잃어버렸던 신성을 회복하고 영지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라나인>

400년도 더 전 그들의 종족은 하늘산맥 아래, 지금의 라그랑 지방에 자리를 틀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이 그곳에 사는 것은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신지, ‘그랑-라트라’가 그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근원이 되는 영혼의 샘 <라브네>, 그곳을 중심으로 그랑-라트라가 존재했고 자신들은 그곳을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다.

자신들의 종족은 영혼의 샘을 통해 소통하고 죽으면 영혼의 샘으로 돌아갔다.

즉, 인간들이 저승이란 곳을 통해 윤회한다고 믿는 것과 달리 자신들은 실제로 ‘라브네’를 통해 윤회하며 끊임없는 삶을 살고 지혜를 추구해 왔다.

다른 종족은 샘을 통한 윤회전생이 불가능하였다. 오직 자신들, 그랑나인만이 가능했고 그랬기에 자신들이 선택 받았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의 세력 또한 막강하였기에 제국과도 어느 정도 공존하였다.

하지만 칼-굴족과의 전쟁이 벌어지고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칼-굴족의 대주술에는 자신들, 그라나인만이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들은 제국과 협력하기로 했다. 제국이 무너지면 칼-굴족에 대항할 수 있는 존재들은 몇 남지 않았기에.

하지만 돌아오는 데… 400년이나 걸릴 줄은 몰랐다.

영혼의 샘과 연결이 끊어진 탓에 자신들, 그라나인은 윤회의 고리까지 끊기고 말았다.

그 허무감과 상실감은 너무나 컸다. 실제로 오랜 기간 윤회와 전생을 해온 자들은 그 허탈감과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경우까지 생겨났다.

하지만 아직 몇 번 윤회를 하지 못한 비교적 젊은 종족의 구성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필사적으로 영혼의 샘 쪽으로 내려왔다. 다시 영혼의 샘을 차지하고 종족의 근원을 찾기 위하여…….

멀리 있어 윤회는 불가능하였지만 그 존재는 아직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사백 년을 버텨올 수 있었다. 그것만 보고 종족을 이끌어 왔다.

싸우고 싸우며 내려오다 보니 모두가 강해졌다. 아니, 약한 자는 모두 죽고 강한 자만 살아남았다는 것이 옳으리라.

심지어 그 와중에 파-하리쟌의 경지에 이른 대장로와 2장로도… 인세를 초탈하게 된다는 그들도 자신들 종족의 염원을 저버리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지옥 같은 대수림을 뚫고 나오니 문제가 있었다.

자신들의 영지에 인간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영혼의 샘으로 인해 비옥하기 그지없는 축복의 땅인 그랑-라트라는 인간들에게 탐스럽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타란 왕국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장로와 2장로가 나선다면 홍수에 쓸려나가는 개미들처럼 쓸려나갈 자들이니.

문제는 그 위, 성지 라브네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인간이다.

아니, 이제는 인간이 아니지, 인간들 말로 라-반더, 초인이니까.

<스탄탈 1세>

타란이 성지, 라그랑을 먹어치운 후 그곳에서 수련하여 라-반더에 오르고 근 200년간 성지에 머무르며 떠나지 않고 있다는 인간.

그자를 치워버려야 한다.

하지만 대장로와 2장로는 멀리서 그자를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박빙. 둘이 힘을 합쳐도 비등하다.

그렇기에 잔챙이들에게 섣불리 힘을 쓸 수 없다.

상대에게 보여주고 연구할 시간을 주는 꼴밖에 되지 않으니.

인간들이 스탄탈이라는 자료에 대해 가져다줬지만… 인간의 눈으로 초인을 살핀 자료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대장로는 그걸 보자마자 버리라고 했다.

그 앞까지 대장로와 2장로를 모셔야 한다. 온전한 전력으로 저 스탄탈이라는 자를 칠 수 있도록.

그렇기에 자신들, 그라나인을 도와줄 자가 필요했다.

두 장로가 없는 자신들만의 힘으로는 라그랑까지 갈 수 없으니까.

그렇기에 나라샤라는 인간과 손을 잡았다. 그리고 거래를 했다.

자신들은 라브네를 되찾고, 그들은 신지 그랑-라트라, 그들의 말로 라그랑 지방에서 나오는 풍족한 자원을 가지기로.

그리고 서로를 도우며 보호하기로.

나라샤라는 자는 기대 이상으로 잘해주었다.

드디어 자신들의 눈앞에 그랑-라트라가 보인다.

이제 대장로와 2장로가 잘해주면 된다.

자신들이 잘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저 저 스탄탈이라는 자가 이기면, 영혼의 샘은 저들의 것으로 남을 것이고, 장로들이 이기면 자신들은 400년의 숙원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뿐이다.

아마 상대도 비슷한 생각을 마쳤을 것이다. 그러니 길을 열었겠지.

다가올 초인들의 전쟁에 의해 결정될 자신들의 운명을 생각하며 3장로는 복잡한 감정이 서린 눈길로 저 멀리 보이는 그랑-라트라, 그리고 그 위의 라브네를 바라보았다.

☆ ☆ ☆

“와… 저런 게 있었네.”

시안은 저 멀리 라그랑을 바라보며 그제야 이제까지의 모든 느낌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었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라그랑 지방 위, 도심지에서 나와 하늘산맥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면 조그마한 샘이 하나 나온다.

라그랑 지방으로 흘러 들어가는 개천의 옆에 위치한 작은 샘이기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 예전 고대인들이 살았다는 터가 남아있기에 가끔 관광객들이나 학자들이 근처에 있는 유적들을 답사 오기는 했지만 그들도 조금 떨어진 지역에 있는 이런 평범해 보이는 샘까지는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그런 샘 옆에, 자그마한 집이 하나 있었다.

나무꾼이나 살 법한 작은 집은 지어진 후 개조와 보수를 여러 번 하였는지 이곳저곳에 덧댄 흔적이 역력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집 뒤에 한 여성이 쪼그려 앉아 샘을 쳐다보고 있었다.

대충 차려 입은 옷 위로도 보이는 터질 듯한 몸매에 얼핏 보면 사나운 인상을 가진 미모의 여성은 훤칠한 키와 골격을 가져 한껏 야성미를 풍기고 있었다.

사람이 아닌, 마치 한 마리의 암사자를 보는 느낌.

조그마한 샘을 쳐다보는 여성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끊임없이 안을 쳐다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니, 샘의 안을 쳐다보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안을 쳐다보려고 하는 자는 눈을 감고 있지 않을 테니.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여자는 그 자리에서 벌러덩 뒤로 누워버렸다.

고작 쪼그려 앉아 있었을 뿐인데 무엇이 그리 힘들었는지 얼굴에는 피곤한 표정이 가득했다.

한동안 큰 대자로 누워있던 여성은 갑자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후… 이 녀석도 꺾었군. 이제 샘 안에는 셋 남았나…….”

피곤하지만 후련한 표정을 짓던 여성은 벌떡 일어나 다시 샘 앞에 쪼그려 앉았다.

“백칠십 년 동안 일곱… 이제 남은 것은 셋… 그래도 한 백 년은 더 즐길 수 있겠군……. 그때까지 내가 살아있어야 할 텐데…….”

입에서 말도 안 되는 숫자를 내뱉은 여성은 쉴 틈이 없다는 듯이 다시 눈을 감고 샘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샘을 노려본다는 표현은 말도 안 되지만 현실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었다.

한데 갑자기 여성이 눈을 번쩍 하고 떴다.

그리고 고개를 휙 하고 돌리더니 산의 아래쪽을 쳐다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산의 아래, 라그랑을 둘러싸고 있는 방벽, 그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부터 무언가 강렬한 것이 걸어오고 있었다.

“우후후후… 뭐야, 아직도 그로인 말고도 재미있는 녀석들이 남아 있었잖아.”

그로인 그 녀석은 북쪽에서 똥강아지 녀석들을 상대해 주어야 한다고 놀아주지 않으니 할 수 없이 샘물 안의 녀석들과 노는 수밖에 없다.

인세에는 그로인 말고 더는 자신의 적수가 없었으니까.

물론 샘 안의 녀석들을 상대하는 것도 재미가 쏠쏠했다.

하지만 어찌 살아있는 녀석들과 치고받고… 목을 꺾어버리는 재미에 비하랴!

근 백 년간은 나오지 않을 줄 알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자신을 찾아오다니!

더 즐거운 것은… 저 두 녀석은 자신들과 박빙이라는 것이다.

한 번이라도 타란의 영토에서 힘을 썼으면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텐데 어떻게 한 번도 힘을 안 쓰고 여기까지 왔는지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흐하… 아무리 신경 안 썼다지만 너무 군기가 빠진 것 아닌가… 이 녀석들…….”

저 녀석들이 한 번도 힘을 쓰지 않고 이곳까지 왔다는 것은 기 싸움에서 밀렸다는 뜻이다.

애초에 자신이 처리해 줄 것이라고 믿고 저렇게 라그랑 저 멀리 한구석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이겠지.

“귀여운 녀석들… 원래대로라면 목을 꺾어놔야겠지만… 저런 녀석들을 만전의 상태로 내 눈앞까지 데려왔으니… 봐주기로 할까.”

예전 성격 같았으면 줄줄이 목을 꺾어 놨겠지만 저런 귀중한 녀석들을 데리고 왔으니 봐줄 수도 있는 법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여성, 스탄탈 1세는 오두막에 들어가 몸 상태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자신은 샘 안의 녀석과 드잡이질 하느라 정신적으로 살짝 피곤한 상태이니.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아쉬운 녀석들은 저 녀석들이니 이곳까지 올라올 것이고, 그 전까지는 충분히 쉴 수 있으리라.

자신은 강한 녀석을 짓밟는 것을 좋아하지 강한 녀석에게 짓밟히는 것은 절대 사양이다.

이겨야 한다, 무조건.

그리고 이길 것이다.

이제까지 그래왔듯이.

☆ ☆ ☆

<이 라-반더 녀석들은 다 좋은데 남의 말 들으면서 살아온 적이 없어서 도무지 좋은 말로 하려 해도 안 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OOO년 전의 OOO가 남긴 한탄 중에서

☆ ☆ ☆

샘의 밑에 위치한 라그랑 지방의 도시는 텅텅 빈 상태였다.

굉장히 넓은 면적을 자랑하는 대도시였지만 이미 모든 주민들은 대피한 상태였다.

타란의 대무장들이 이곳으로 병력을 물리면서 주민들을 모조리 대피시킨 것이다.

그들은 이곳 위에 거주하고 있는 인물, 스탄탈 1세가 어떤 성격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나라샤 국왕이 준비한 해결책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비슷한 수준의 강자를 데리고 왔다면 발밑의 개미들을 신경 써가며 싸울 사람이 전혀 아니다.

싸움에 휘말려 모조리 죽을 것이다.

건물은 부서져도 된다, 다시 지으면 되니.

하지만 인재만큼은 결코 잃어서는 안 되기에 대무장들은 짧은 시간 동안 모든 시민과 귀족들을 근방 소도시로 이주시킨 상태였다.

어차피 여기서 사람이 살기는 힘들 것이고, 당분간 건축업자들만 신명이 나리라.

물론 어느 나라 건축업자가 신 날지는 두고 보아야 알 일이다.

타란이 신이 날지, 아니면 티안이 신이 날지.

어느 한쪽이 이기건, 휩쓸릴까 봐 라그랑의 샘에서 십수 킬로미터는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타란과 티안의 군대는 그 순간 격돌할 것이다.

혹시라도 지칠 대로 지친 초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리고 상대를 쓸어버리고 다시 라그랑 지방을 확보하기 위하여.

주연은 아니지만, 결국은 충돌할 운명이기에 양측의 군대는 서로 긴장감을 높이며 주연배우들의 극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연 배우에 해당하는 대장로와 2장로는 텅텅 빈 라그랑 지역의 대도시, ‘스틸’을 가로질러 라브레로 향하고 있었다.

경지에 오른 후 많은 것에 초탈해진 그들이었지만 근 400년 만에 고향에 도달하니 그 감회가 남달랐다.

그리운 그들의 고향. 많은 것이 변했지만 그 향기만은 사백 년 전의 그날과 같았다.

그리고… 가까이 오니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우리의 라브네가.

<많이… 변했구나…….>

<그렇습니다. 없는 동안… 무슨 짓을 해 놓은 건지……. 싹 갈아엎고… 새로 지어야겠군요…….>

<후후… 좋은 생각이군……. 6장로 그 아이에게 맡기면 되겠지…….>

<크흐흐… 거의… 도착했군요…….>

시답잖은 대화를 하며 걸어가던 그들의 눈앞에 어느새 작은 샘이 나타났고, 대장로와 2장로는 자신들을 맞이하는 인간 여성을 볼 수 있었다.

“흐흐… 왔니.”

<스탄탈… 이라고 했던가……. 후후… 이곳에서… 싸울 것인가…….>

“흐히히… 물론 아니지. 너희들의 목을 꺾어버리고 다시 저 샘을 가지고 놀아야 하거든. 박살 나면 안 돼. 어차피 너희들도 죽으면 저 안에 들어가려나?”

<흐흐… 맘에 안 드는 계집이지만… 공통점이 있군… 내려가지…….>

“이런… 이럴 거면 내가 내려갈 걸 그랬나. 흐흐… 난 또 너희들은 샘을 신경 안 쓸 줄 알았지.”

양측 모두 샘을 부수긴 싫었던 터라 그들은 싸우기 쉬운 라그랑 지방의 대도시, 스틸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적당히 샘이 부서지지 않을 거리… 적당히 15킬로미터 정도 떨어지는 순간 격돌이 시작되리라

뭐, 도시랑 아래 개미들이 좀 휩쓸리긴 하겠지만… 그런 건 그들에게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눈앞의 녀석만 꺾을 수 있다면.

☆ ☆ ☆

시안은 실눈을 뜨고 라그랑 쪽을 바라보다가 기함을 토했다.

“저… 저, 저, 저… 미친놈들 봐라… 어디까지 기어 내려와서 싸우는 거야. 그냥 저기서 싸울 것이지.”

빠른 속도로 15킬로미터 정도를 내리 달려온 세 남녀는 라그랑의 도시 한가운데 멈춰 섰다.

문제는 저 지역은 군대가 머무르는 곳에서 단 5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란 점이었다.

이대로라면 아버지가 휩쓸린다. 거의 100퍼센트 확률로.

5킬로미터는 라-반더들 간의 싸움에서는 의미가 없다.

여기까지 생각한 시안은 이제까지 자신을 자극한 느낌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하… 세상은 넓고 맞을 놈이 너무 많구나…….”

차이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정말 귀찮을 것 같다는 점.

정말 말로 해결하고 싶었지만… 강렬하게 자신의 느낌이 말하고 있었다. 그게 힘들 것이라는 것을.

여기까지 생각한 시안은 곧바로 라그랑의 한가운데를 향해 뛰어들었다.

심장 속의 힘을 모조리 풀어 헤치면서.

☆ ☆ ☆

“흐하하하… 이제 시작해 볼……!”

히죽히죽 웃으며 몸을 풀던 스탄탈은 화들짝 놀라며 라그랑을 둘러싼 방벽 쪽을 바라보았다.

일격을 먹어도 할 말이 없는 행위였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는 않았다.

대장로와 2장로 역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스탄탈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하늘을 찢어 버릴 것 같은 흉폭한 기세.

그 기세가 자신들을 향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반갑다는 뜻은 아니었다.

“…너네 무슨 흉악한 걸 달고 온 거야! 저런 거랑 원한 지고 다녀?”

200년간 여기에 박혀 있던 자신과 원한 살 일은 없으니 분명 저 녀석들이 달고 온 것이라고 여긴 스탄탈이 물었다.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눈앞의 녀석들도 분명 강하긴 하지만 저기서 오고 있는 저 녀석과 원한을 졌다면 이미 찢겨 죽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저 정도였는가…….>

<…미치겠군요…….>

키라트라는 아이에게 특이한 파-하리쟌이 있다는 소리를 듣기는 하였다.

그리고 자신보다 강할 것이라고 하는 소리도.

하지만 대장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인간이 초인을 판단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기에 공포에 질려 내뱉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열일곱 살이라는 녀석이 사백 년을 넘게 살아온 자신보다 강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눈앞의 녀석은 그래도 230살은 되지 않는가.

그리고 대장로는 지금 깨달았다.

그 아이가 잘못 판단하였다는 것을.

그 아이의 예상보다 훨씬 더 강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셋은 서로를 돌아보다가 마음을 굳혔는지 셋 모두 한 방향을 바라보았다.

저런 게 있으면 자신은 최고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죽여야 했다.

게다가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기 오는 저것은 별로 자신들에게 좋은 감정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자기들끼리 힘 뺄 때가 아니다.

우리끼리 싸워 이기면 뭐 하는가. 저자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이상 그럴 때가 아니다.

스탄탈은 힘을 합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였는지 자신의 손목에 걸려있던 작은 팔찌의 보석을 눌렀다.

이윽고 팔찌는 기괴한 소리를 내더니 가루가 되어 흩날렸고 흩날린 무지갯빛의 가루는 스탄탈의 몸을 둘둘 휘감았다.

<…일곱 행성의 대갑주…….>

대장로가 놀란 음성을 내뱉었다.

스탄탈의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분명 안개와 같은 가루였지만 대장로는 그것을 보며 대갑주라고 불렀다.

파-하리쟌이 쓸 만한, 완성된 초인들을 강하게 만들어 줄 만한 무구는 정말 많지 않다.

파-하리쟌의 숫자보다도 더욱 희귀하다.

저 대보구, <일곱 행성의 대갑주>는 그중 하나이다.

오죽하면 자신도 알고 있겠는가.

“흐흐, 나만 뭐 숨기고 있는 것처럼 말하네. 너희도 어서 꺼내. 써보기도 전에 죽기 싫으면.”

<…….>

그 말을 들은 대장로와 2장로 역시 허공에 손을 쑥 집어넣더니 무언가 물건을 꺼냈다.

대장로가 꺼내든 것은 하나의 작은 반지였고, 2장로가 꺼내든 것은 조그마한 팔찌였다.

하지만 그걸 본 스탄탈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토록 자신이 찾아 헤매던 물건. 하지만 결코 찾을 수 없었던 물건이다.

“대단한 걸 숨기고 있었네. 흐흐… <그랑-라의 손>과 <전쟁신의 창>… 어째 이백 년 동안 수소문해도 찾을 수 없나 했더니 너희들이 가지고 숨어 있었구나. 좋아… 이 정도면 해볼 만하겠군.”

<…….>

대장로와 2장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각자 자신의 손가락과 팔목에 반지와 팔찌를 착용했다.

순간 2장로의 손목이 울렁이며 팔찌가 기묘한 황금빛을 뿜어냈고, 대장로의 손에 끼인 반지에서는 기괴한 검은 파동이 울려 나왔다.

모든 준비를 마친 셋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들이 바라보는 방향에서 한 명의 청년이 걸어왔다.

천천히 다가온 청년은 셋을 쭉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야.”

“……?”

<……?>

<음…….>

예상치 못한 청년의 한마디에 셋은 무슨 말을 할지 귀를 기울였다.

“절로 가서 싸워, 절로.”

청년은 손가락을 쭉 내밀며 세 명에게 툭 하고 내뱉었다.

시안은 처음에는 저 녀석들을 그냥 쫓아 버리려고만 하였다.

아버지가 영향을 받지 않을 만한 산맥, 저 한구석으로.

하지만 힘을 풀고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다른 생각이 아래에서 올라왔다.

<재미있을 것 같다. 저기 저 녀석들과 치고받으면.>

<증명하라, 내가 최강인 것을.>

간신히 남아있는 이성으로 억눌렀다.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은 것인지 간신히 자아를 유지할 수는 있었다.

여기서 치고받으면 아버지는 반드시 죽는다.

여기 뛰어들기 전에 아버지에게 나랑겔의 문을 주고 오기는 했지만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니… 아버지의 성격상 도망가려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천천히 이성으로 억누르며 다가갔지만 이미 저쪽의 셋은 만전태세였다.

자신의 검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녀석들이 끼고 있는 것들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어디서 저런 걸 구한 거야…….’

간신히 도착한 시안은 사람들이 없는 산맥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성이 간당간당한 데다 이쁠 게 없는 녀석들인지라 말도 거칠게 나갔다.

“야… 절로 가서 싸워, 절로.”

그러자 무지갯빛 안개에 휩싸인 여성이 순간 욱하며 내뱉었다.

“웃기는 놈이로구나. 싫다면?”

그 순간, 간신히 유지하던 시안의 이성이 뚝 하고 끊어졌다.

그리고 내면에서 강렬하게 외치는 무의식에 몸을 맡겼다.

<짓밟아라.>

쿠아아앙!

그리고 자신의 목걸이에서 쭉 하고 ‘크로나-폰’을 뽑아 든 다음, 그대로 휘둘러 이죽거리는 여성을 후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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