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대검공>
검이 날아가는 순간, 스탄탈의 몸을 감싸던 가루가 순식간에 검이 날아오는 부분으로 모여들더니 얇은, 찬연한 무지갯빛을 뿜어내는 아주 얇은 모양의 강판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위로 시안의 일격이 적중했다.
쿠아아앙!
“……!”
분명 검과 몸뚱이가 충돌했는데 수천 개의 종이 치는 소리가 울렸다.
시안에게 맞은 스탄탈은 굉음을 남긴 채로 자리에서 사라졌고 순식간에 시안이 가리킨 방향으로 빛살처럼 날아가더니.
영혼의 샘을 지나, 더 멀리 있는 산맥을 박살 내며 처박혔다.
쿠과과광!
분명 사람이 날아갔는데 무슨 운석이 날아간 것처럼 스탄탈이 충돌한 산맥의 한구석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으득… 거기 딱 그대로 있어라.”
그리고 시안은 스탄탈이 날아간 방향으로 빛살처럼 몸을 날렸다.
지켜보던 대장로와 2장로는 시선을 교환했다.
<…….>
저걸 그대로 내버려두면 각개격파 당할 수도 있다. 합류해야 한다.
<…<접공>…….>
2장로가 조그맣게 중얼거리자 순간적으로 대장로와 2장로의 공간이 이리저리 접히기 시작했다. 종이가 접히는 것처럼.
이윽고 대장로와 2장로가 있던 공간까지 접어가기 시작했고 차곡차곡 접혀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라진 대장로와 2장로는 운석을 맞은 것처럼 패어있는 산 중턱에 나타났다.
그 안에는 스탄탈이 비틀거리며 푹 파인 산맥 일부를 헤치고 일어나고 있었다.
“퉷! 미친… 저 시커먼 칼 저거 뭐야.”
스탄탈이 피를 뱉으며 멀리서 자신에게로 달려오고 있는 시안을 바라보았다.
일곱 행성의 대갑주는 착용자에게 들어오는 모든 공격을 일곱 차원으로 분산시키고 반대로 자신이 공격할 때는 일곱 차원을 공격 위에 겹쳐서 상대를 짓누르는, 대보구 중의 대보구였다.
그렇기에 시커먼 칼이 날아올 때도 마음 편하게 보고 있었다. 가볍게 날린 일격이었으니.
하지만 그 결과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근 일만 톤에 가까운 무게가 시안의 속도와 반데르를 품고 날아오며 대갑주를 후려쳤고, 스탄탈은 대갑주가 거의 모든 충격을 분산시켜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운석에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고 날아갔다.
예전에 아르타곤의 포격을 맞았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으득… 니가 아무리 미친놈이라고 해도 쉽지 않을 거다.”
스탄탈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온몸에 힘을 폭발시키며 달려 나갔다.
그걸 본 대장로도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활성화시켰다.
대보구, <전쟁신의 창>
작동하는 순간 대장로의 손을 시꺼먼 무언가가 뒤덮었다.
손을 중심으로 무언가가 끊임없이 일렁거리며 물결 저 너머로 칠흑처럼 어두운 무언가가 보였다.
암흑의 기운 같은 저급한 기운이 아니다.
부딪치는 순간 모든 것을 소멸시키고 빨아들인다. 공격 한방 한방이 작은 폭축에 해당하는 위력을 발휘하게 해주는, 가공할 공격용 대보구.
그 일격을 맞은 자리가 마치 전쟁신의 창을 맞은 것처럼 흔적도 남지 않는다고 하여 ‘전쟁신의 창’이라는 이름이 붙은 반지를 활성화시킨 대장로는 곧바로 스탄탈을 따라 시안과 마주쳐갔다.
꾸앙! 쿵! 우드드득!
그리고 순식간에 산맥 중턱은 난장판이 되기 시작했다.
무지갯빛 광채가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사방으로 난무했고, 검은 일렁거림이 그 빛을 먹어치울 기세로 뒤를 따르며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거리가 떨어져 있던 2장로는 확실히 볼 수 있었다.
그런 모든 광채를 박살 내고 어그러트리며 날아다니는 한 자루의 칠흑빛 검을!
자신도 놀 시간이 없었기에 2장로 또한 서둘러 자신의 팔찌를 발동시켰다.
그 옛날, 창을 든 전쟁신과 적수공권으로 치고받았다는 신화시대의 전설이 있는 태양신, 그랑-라.
그러한 태양신의 손이 지상에 강림한다면 이러한 위력을 보일 것이라고 하여 붙은 이름 ‘그랑-라의 손’
2장로는 팔찌로 엑사르를 불어넣으며 이적을 작동시키기 시작했다.
팔찌에서 눈이 멀 듯한 찬연한 황금색 광채가 나오더니 이윽고 타오르듯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리고 2장로는 가장 자신 있는 대인용 이적을 시전하였다.
<…라소드-라.>
작은 태양 이라는 뜻을 가진 고대의 마법.
별다른 특징은 없다.
이적을 시행하면 주먹만 한 투명한 색의 구가 생겨난다.
이 구체는 폭발하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빨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단지 그 작은 구 안에 담겨진 어마어마한 에너지로 구 안의 상대를 확실하게 태워버린다!
공간을 격하고 생성되기에 결코 피할 수 없고 그 위력은 세상의 법칙을 벗어났다는 파-하리쟌에게까지 미칠 정도이다.
순식간에 시안의 옆에 생성된 조그마한 황금빛 구는 자신이 존재하는 범위의 모든 것을 지워버리겠다는 느낌으로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원래는 투명한 구체가 생겨나야 하지만, 그랑-라의 손의 힘을 빌려 더욱 막강하게 증폭되며 황금빛을 띠게 된 것이다.
실제로 시안도 구체가 신경 쓰이는지 피해서 검을 휘두르려고 했다.
하지만 ‘라소드-라’는 원래 한 번만 발동시켜 사용하는 이적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황금빛 구가 시안의 주변에, 하지만 스탄탈과 대장로를 방해하지 않는 곳에 나타나 시안을 태워버리기 위해 달려들었다.
이윽고 격전지는 황금빛과 칠흑빛, 무지갯빛이 황홀하게 어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빛은 굉음과 어울려 주변의 산맥을 모조리 지워버리기 시작했다.
☆ ☆ ☆
멀리 떨어진 곳에서 머물러 있던 군대는 산 중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산 중턱이었던 곳을.
그들이 바라보고 있던 곳은 원래 험준한 산맥이 있던 자리였지만 어느새 그 한 자락은 모조리 부서지고 반쯤 지워져 평지가 되어 가고 있었다.
“…….”
“…….”
쟈그론과 콜란을 비롯한 네 명의 대무장들은 모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라-반더, 라-반더 하지만 그 실체를 접할 일은 일반인이 운석에 맞을 확률보다 희귀하다.
그들은 너무나 희귀해서 백 년에 한 명 정도만 생기는 데다 일단 그 경지에 오르면 속세에 관심이 없어져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라-반더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이 대북벽의 수호자, 그로인이 있는 대북벽이지만 그곳에서도 그로인을 보기는 쉽지 않다. 항상 여섯 뿔의 하리쟌을 찾으러 대수림을 헤집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런 라-반더의 실체가 수만 명의 군대가 보고 있는 가운데 드러나고 있었다.
“허허…….”
쟈그론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 즉 자신의 나이 50이 될 때에 그랑-반더에 올랐다.
놀라운 재능이었다. 50에 그랑-반더에 오르다니.
쟈그론은 세상 높은 줄 모르고 뻐겼으며, 실제로 그는 그럴 만한 오만한 자격이 있다고 모두가 여겼다.
그 당시 쟈그론은 자신의 위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
몇몇 그랑-반더는 자신보다 강하지만 자신이 나이를 먹으면 그들 모두를 젖힐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자신이 그랑-반더에 오르자 스탄탈 4세는 뵈러 갈 분이 있다고 하였다.
그렇게 해서 쟈그론은 스탄탈 4세를 따라 라그랑 지방의 산 중턱에 있는 자그마한 집을 찾아갔다.
<흐흐… 귀여운 아이구나.>
그리고 그곳에서 그분, 스탄탈 1세를 뵈었다.
충격이었다.
그랑-반더가 되고 마스터들이 얼마나 가소로웠는가.
볼 수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못하는 버러지들.
자신이 한때 저런 수준이었다는 것이 한심하고 서글퍼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존재를 보는 순간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지워지고 새하얗게 변하는 기분이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눈동자를 보는 순간, 아니 그 안에 담겨 있는 감정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가소로움. 무관심. 하찮음.
자신은 그, 아니 그녀에 비하면 벌레에 불과했다.
자신이 무시하던 마스터와 자신의 차이보다, 눈앞의 존재와 자신의 차이는 더욱 멀었다.
자신이 아무리 평생 노력한다고 하여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쥐를 무시하던 고양이가 한 마리의 집채만 한 호랑이를 본 느낌이었다.
그 뒤로 쟈그론은 더더욱 겸손해졌고 누구도 깔보지 않았다.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한순간에 깨달았고 오만하고 있을 시간이 없음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착실하게 자신의 실력을 쌓고 방심하지 않아 <불패>라는 이명까지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스탄탈이 손을 쓰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녀에게 손을 쓰게 할 상대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스탄탈이… 한 남자에게 사정없이 밀리고 있었다.
그것도 그녀와 비슷한 수준 둘과 함께 합공을 하고 있는데도!
아마 저 둘은 나라샤가 준비한 패였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셋이 합공을 하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기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하아…….”
쟈그론은 박살 나고 있는 산자락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고 옆의 대무장들 역시 맥이 빠진 느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싸우면서 하늘산맥에서 이어진 산자락 두 개를 부숴버린 넷은 갑자기 시안이 검을 멈추며 뒤로 살짝 물러서자 소강상태에 빠졌다.
다들 꼴이 말도 아니었다.
스탄탈의 몸을 감싸고 있던 무지갯빛 가루는 절반 정도는 회색으로 변해 있었고, 스탄탈도 몸 구석구석을 두들겨 맞아 정상이 아니었다. 일곱 행성의 대갑주는 시간이 지나면 복구될 테지만 지금은 그 회복속도가 파괴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대장로의 상황은 더 심했다.
다른 곳은 그렇다 쳐도 전쟁신의 창을 끼고 있는 오른손은 어디 한 군데가 부러졌는지 반데르로 고정시켜 놓은 상태였다.
2장로의 상황은 겉으로 볼 때는 그나마 괜찮았다. 외상은 없었으니.
하지만 너무나도 과도한 엑사르를 사용한 나머지 내상을 입어 입에서 피를 토하고 있었다.
시안은 그런 그들의 앞에 서서 볼이 얼얼한지 왼손으로 뺨을 어루만졌다.
아까 스탄탈에게 거하게 한대 얻어맞은 것이다.
뺨을 어루만지던 시안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흠… 내가 말이야.”
“……?”
“이번에는 어쩌면 죽음의 위기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겠다고 생각했거든?”
그 말에 눈앞에 있던 셋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생사를 오가는 격전을 벌인 것 아니었는가?
비록 자신들이 밀리고 있지만 내심 분명 저 녀석도 조마조마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너희 셋으로는 안 되나 보다. 조금 위험하긴 했는데… 도대체 언제쯤 이 벽을 부술 수 있을지를 모르겠네. 한번 봐주고 싸우면 될 줄 알았는데 역시 그걸로는 안 되네… 그만해야겠다.”
그러면서 시안은 <길>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제까지 아무런 기운도 맺혀 있지 않은 칠흑빛 검에 광채가 맺히기 시작했다.
검뿐이 아니었다. 시안의 몸 전체에서도 광채가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었다.
광채긴 한데 색이 없었다.
누가 봤으면 분명 그렇게 말했으리라.
시안의 몸 전체에서 투명한, 하지만 누가 보아도 광채인 것 같은 무언가가 맺히기 시작했다.
“그래도 도와줘서 고맙다. 악감정은 없고… 이제 끝내자. 집에 가야지.”
말이 끝나자마자 무섭게, 아까와는 전혀 다른 위력으로 날아드는 칼을 보며 셋의 표정이 핼쑥해지기 시작했다.
☆ ☆ ☆
산자락을 모조리 부숴버리던 전투가 멈추었다.
더 이상 하늘산맥에서는 광채가 폭발하지 않았고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모두가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해할 때 저 멀리서 한 인형이 터벅터벅 걸어왔다. 세 명을 어깨에 걸치고.
그 인형이 먼저 향한 곳은 타란의 진형이었다.
직감적으로 걸어오고 있는 인형이 대파괴의 주연이라는 것을 깨달은 모두는 그 남자가 자신들 사이를 걸어가는데도 숨도 쉬지 못하였다.
이윽고 대무장들의 앞에 도착한 남자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셋 중 여자를 툭 하고 쟈그론과 콜란 사이에 떨궜다.
“…스탄탈 님…….”
쟈그론은 신음하듯 내뱉었다.
재빨리 다가가 살펴보니 기절한 듯 보였지만 다행히 목숨에 큰 지장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난 갑니다.”
스탄탈을 툭 하고 떨군 남자는 어깨에 두 사람을 나눠지고는 다시 터벅터벅 티안의 진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누구십니까.”
스탄탈을 살핀 쟈그론이 떠나는 남자를 보며 황급히 물었다.
그 말에 주변사람들 모두 숨을 멈췄다. 괜히 성질 건드리지는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쟈그론은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시안인데요. 아, 그리고 이제 라그랑 지방은 티안 겁니다. 건드리지 마요. 저 여자 보고도 들어오지 말라고 하고. 이제 집주인 바뀌었습니다.”
성의 없는 대답 그 자체였지만 엄청 귀찮아하는 표정으로 내뱉은 얼굴에 더 이상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 한마디를 남기고 자신을 시안이라고 밝힌 남자는 티안의 진영 쪽으로 사라져버렸다.
타란의 진영에 있는 모두는 한동안 그쪽 방향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 ☆ ☆
툭. 툭.
“데려가요.”
<…대장로님… 2장로님…….>
3장로가 신음처럼 내뱉으며 말했다.
급하게 다가가 살피니 대장로와 2장로는 내외상을 입은 듯했지만 다행히 생명에 큰 지장은 없어 보였다.
<…손속에… 사정을… 두었구려… 고맙소… .>
객관적으로 볼 때 고맙다고 할 상황은 전혀 아니었지만 3장로는 정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누구라도 산맥을 으깨버린 그 전투를 보았다면, 그리고 그 전투의 장본인이 눈앞의 남자라면 그런 생각을 했으리라.
“아이구… 고맙기는. 뒤처리는 나라샤 그 아저씨랑 해요.”
시안은 바닥의 둘을 챙기는 그라나인을 뒤로하고 어깨를 으쓱하며 아버지 쪽으로 돌아갔다.
“아버지, 이제 끝났어요. 돌아가죠.”
“어… 음… 그래, 시안.”
“저쪽보고 이제 쳐들어오지 말라고 해놓았으니 안 올 거예요. 나라샤 아저… 폐하 말대로 잘 되려나 모르겠네.”
<…아버지?>
그 말에 주위 모든 사람들이 기겁을 하며 놀랐다.
그럼 저기서 투덜거리고 있는 저 남자가 로만 백작의 아들이라는 말인가?
천 년쯤 묵은 라-반더인 줄 알았는데 겨우 로만 백작의 아들이라니……. 도대체 몇 살이라는 말인가?
모든 사람들이 놀랄 때 로만 백작도 혼란스럽기 그지없었지만 이윽고 아들에게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들키기 싫었는지 생각을 정리하고 옆에서 걸어가는 시안과 대화할 거리를 찾았다.
다친 곳이 있나 살펴보았지만 뺨이 좀 부은 것 말고는 없었다.
차분히 살피던 로만 백은 이윽고 특이한 점 한 가지를 찾을 수 있었다.
“어… 시안, 못 보던 팔찌랑 반지구나? 요즘 액세서리 모으는 게 취미니? 아까 나한테도 나랑겔인가… 그런 거 하나 주고 가더니…….”
“…하하하하…….”
시안은 아무것도 아닌 양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 ☆ ☆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화려하게 사고 친 때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그냥 시작이었다.
돌아다녀보니 세상은 넓더라. 미친놈도 많고. 그리고… 강한 놈도 많았다. 아! 그중에도 맞을 놈은 또 많더라.>
-시안 폰 로만 경이 OOO에게 이야기해준 모험담 중 발췌
☆ ☆ ☆
티안은 축제 분위기였다.
새로 왕위에 오른 나라샤 국왕이 채 반년도 되지 않아 세운 위대한 업적 때문이었다.
라그랑 지방의 완전 정복!
타란은 라그랑 지방에 대한 소유권을 티안에 완전히 양도하고 국경부터 라그랑 지방까지의 영토를 양보했다.
나라샤 국왕은 이를 받아들이고 새로 국경을 긋고 라그랑 지방의 재정비와 완전한 합병에 들어갔다.
완전히 합병되면 라그랑 지방은 티안에 날개를 달아 줄 것이다.
그러면 나라샤 국왕의 지휘 아래 티안은 제국으로서의 첫 보를 디디리라.
모두가 흥분에 빠진 가운데 국민들 사이에서 도는, 도저히 믿지 못할 소문이 축제 분위기 속의 사람들 뒤에서 돌고 있었다.
전쟁에서 돌아온 자들이 퍼트린 소문이었다.
로만가에 대검공이 탄생했다고.
혹자는 말한다. 로만의 카인 폰 로만 백작을 말하는 것이냐고.
하지만 아니었다.
또 다른 사람은 말했다. 리안 폰 로만을 말하는 것이냐고.
이 의문은 금방 사그라졌다.
대검공은 키라인 검공도 가지지 못한 칭호이다. 여물어가고 있는 마스터에게는 과분한 호칭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하나이다.
2공자, 시안 폰 로만.
그렇기에 이런 소문은 괴담으로 치부되며 축제 분위기 속에 금세 사그라지고 말았다.
눈으로 확인한 자들도 로만가의 2공자에 대한 소식을 듣고 자신이 잘못 보았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버렸다.
2공자는 겨우 열일곱이니까.
그렇기에, 그 광경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실력과 안력을 가지고 있던 그랑-반더 몇몇만이 세상을 뒤흔들 놀라운 대검공의 탄생을 확인한 채로, 그 소문은 그대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나라샤 국왕은 정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효율적으로 시스템을 구축했기에 정말 필요한 일만 자신에게로 결제가 올라오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일은 많았다.
나라에 라그랑이라는 큰 변수가 생겼으니 그에 맞게 모든 법규와 시스템, 행정을 재정비해야 하는 것이다.
그라나인과 계약한 대로 라그랑 지방은 그들의 영토로 인정하고 자치권을 인정했다.
그리고 동맹관계를 맺었다. 서로가 서로를 돕는 조건으로.
어차피 나라샤에게 중요한 것은 그 지역에서 나오는 풍부한 물자와 인재였기에 마음 편하게 영혼의 샘과 성지라는 지역을 넘길 수 있었다. 그 지역은 라그랑 지방의 일부에 불과했으니까.
그리고 새로이 국경을 설치하고 새로 넓어진 국경 지역에 무장단체들과 키라인 검공, 칼라굴을 배치하여 경계를 강화했다.
어차피 그라나인들과 검공이 있는 한 함부로 들어올 수도 없겠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니 방심할 수 없다.
어수선한 때이니만큼 확실하게 통제해야 한다.
앞으로 7왕국 중 제일의 강국이라는 호칭은 타란에서 티안으로 넘어오게 될 것이다.
우샤란은 생각보다 거센 콘 왕국의 저항에 상당히 애를 먹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압살해야 했지만 콩티앙 지방에서 ‘검은 별’의 희생으로 막대한 전력을 잃었기에 진군에 애를 먹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늦어도 2년. 더 빠를 수도 있고.
그때쯤이면 티안도 나라 내부를 모두 재정비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라시안 대륙은 두 개의 강국과 다른 네 개의 왕국으로 구분 지어지게 될 것이다.
더 이상은 시안 그 아이의 힘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솔직히 라-반더, 라-반더 하지만 와 닿지 않았는데 이번 사태를 보니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고 있었는지 확실히 깨달았다.
더는 그 아이의 힘을 빌리지 않으리라.
☆ ☆ ☆
“흠… 그래서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네. 뭔가 이때가 아니면 못할 것 같기도 하고요.”
“음… 좋은 생각이구나…….”
시안은 수도 외곽의 저택에서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즉흥적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계속 생각하고 있던 문제였다.
수도에 있으면 편하긴 한데 뭔가 재미가 떨어졌다.
그동안은 열일곱까지 너무나 열심히 수련하느라 못 쉰 것을(?) 몰아서 다 쉰다는 느낌으로 쉬긴 했지만 이제 그것도 슬슬 질리고 있었다.
그래서 떠올린 게 여행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어릴 적 재미있게 즐겨 읽던 소설책이 떠올랐다.
항상 가고는 싶었는데 귀찮음과 평화로움에 그동안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 사건이 터지며 자신의 발목을 잡은 것도 있었고.
마침 모아놓은 돈도 있고 전쟁도 끝났으니 형이나 아버지가 위험할 일도 없다.
이번에 주운 갑옷을 주고 싶었지만 이건 라-반더 이하가 쓰면 즉시 짜부라져 죽기 때문에 줄 수가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나랑겔은 형에게 주었으니 괜찮으리라.
여행을 떠나기에 최적의 시기이다.
혹시나 자신의 게으름이 더 심화되면 여행을 떠나지도 못할 것 같기에 이번 기회에 한번 쭉 세상을 돌아보고 오고 싶었다.
로만 백작은 시안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 편하게 허락하기로 했다.
자신과 셀린느는 할 만큼 했다. 이제는 다른 것에서 배워야 한다.
세상에 적응하기를 바랐던 자신의 둘째 아들은 너무나도 훌륭하게 자라 있었다.
자신의 둘째 아들이 그 정도의 강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자신도 처음 알았다.
그런 강대한 힘을 가지고도 이제까지 소문이 크게 퍼지지 않았다는 것 하나만 해도 충분히 증명되었다.
쿤타리안 같은 녀석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쯤 대륙은 통일되어 있을 것이다.
제국 이름도 지어져 있겠지. ‘쿤타리안’ 혹은 ‘쿤타리안의 하렘왕국’ 이런 식으로.
힘을 가지고 있다고, 그리고 그 방법이 가장 쉽다고 힘으로 타인을 짓밟으려고 하지 않는 것만 해도 너무나 대견하였다.
‘그래, 이 아이도 바깥으로 돌며 더 넓은 세상을 보면 많은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로만 백작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지원해 주마. 뭐 필요한 것 있느냐?”
“음… 딱히 없습니다. 그냥 떠나면 될 것 같네요. 지도랑… 어디가 돌아다니기 좋은지… 그런 것이 궁금하네요.”
“그래? 음… 여행의 목적이 있느냐?”
“뭐…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 것도 보고… 그러고 싶습니다. 아, 그리고!”
“음?”
“라-반더들이 활동했던 곳을 한번 돌아보고 싶네요.”
목적 없는 여행은 공허하기에 시안이 세운 목적은 다른 라-반더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 발자취를 한번 따라가 보는 것이었다.
이번에 다른 라-반더들과 치고받으면서 과연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었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나 강했는지가 문득 궁금해졌던 것이다.
운이 좋으면 그들이 어떤 ‘길’을 가졌었는지… 그것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 갈 생각은 없었다. 그저 여행하기 좋은 곳에 그 흔적이 있다면 그러한 곳을 위주로 가 볼 생각이었다.
“음… 그렇다면 남쪽의 브로샨으로 방향을 잡아보는 것은 어떻겠느냐? 키아란도 좋기는 한데 요즘 그쪽은 분위기가 뒤숭숭하다고 하더구나. 무언가 일이 생겼는지, 원… 여행하기 좋을 시기는 아닌 것 같았다.”
“브로샨이요?”
“그래. 제국 이전, 처음으로 인간을 통일하고 하리쟌으로부터 지켜낸 대제-브록시안의 나라가 있었다고 하는 위치에 있는 일곱 왕국 중 하나이지. 아름답기로 소문이 났고, 그곳의 문물과 음식들이 독특하여 귀족들의 여행지로도 인기가 많은 곳이란다. 그리고 그 유명한 태양검 리비아스의 고국이기도 하지.”
시안은 그 이야기를 듣고 흥미를 가졌다.
생각해보니 소설 속의 주인공들 로맨스는 대부분 브로샨이라는 곳에서 이루어졌던 것이 떠올랐다.
“좋습니다. 그쪽으로 향해야겠군요.”
“아 그리고… 시안.”
“네, 아버지.”
로만 백작은 부끄러운 듯 말을 끊더니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는 너무나 잘 해주었다. 네가 힘에 휘둘리지 않고 잘 커서 나는 너무 자랑스럽구나.”
“하하… 아버지… 쑥스럽게…….”
부끄러워하는 시안을 보며 로만 백작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희생적으로 살 필요까지는 없단다. 나는 너의 행복을 바라니까. 하지만 너에게 손해가 안 가면, 그리고 너의 행위가 다른 제3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조금 도와주는 법을 배워도 즐거울 거란다. 이번 여행에서 그 즐거움을 배웠으면 좋겠구나.”
“음… 알겠습니다, 아버지.”
시안은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타인, 제3자 모두에게 손해가 가지 않는다면 도와주어 나쁠 것은 없으리라.
☆ ☆ ☆
타란 왕국의 수도, 스탄탈.
스탄탈에 위치한 거대한 왕궁은 타란 왕국의 위세를 고스란히 표현해내고 있었다.
이곳은 왕궁이지만 왕은 없었다.
그들의 왕은 여기를 지은 후 라그랑으로 떠나 은거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왕의 후손들이 섭정의 역할을 하며 대대로 타란을 통치해 왔다.
그런 타란의 왕궁에, 왕이 돌아왔다.
근 200년 만에.
스탄탈 4세는 자신의 눈앞, 자신이 쓰던 침상에 누워 있는 스탄탈 1세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입니다, 왕이시여.”
“흐흐… 그래… 이번에 아주 된통 당했다. 대갑주도 빼앗기고… 날강도 같은 녀석 같으니…….”
입으로는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지만 스탄탈 1세의 기분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
스탄탈 4세는 아직까지도 믿을 수가 없었다.
30세에 그랑-반더에 올라 타란의 왕조를 반역으로 갈아치우고 그길로 수련을 떠나 나이 60에 라-반더에 올라 지금까지 근 230년을 살아온 괴물중의 괴물.
그것이 자신이 알고 있는 스탄탈 1세였다.
적도 없다. 앞길을 막을 수도 없다.
자신에게 스탄탈 1세는 신이나 다름없었다. 타란을 지켜주는 수호신.
그런 신이 패배하다니.
자신을 바라보는 스탄탈 4세를 바라보던 스탄탈은 피식 하고 웃었다.
저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평소 같았으면 불경하다고 목을 뽑았겠지만 스탄탈은 넘어가기로 했다.
자신을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팬 애송이의 마지막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힘 있다고 난장 부리지 말고 얌전하게 삽시다. 예?’
전투가 끝난 뒤의 녀석은 전투 중의 그 흉신악살 같은 녀석과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무시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왠지 모르게 그 말이 생각났기에 스탄탈은 한번 넘어가주기로 했다.
자신이 죽을 뻔한 위기에서 살아 돌아온 것도 모르고 스탄탈 4세는 스탄탈 1세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야.”
“네, 말씀하십시오.”
“너 그 녀석이 어떤 녀석인지는 알아봤어?”
“네. 명하신 대로 조사 완료하였습니다.”
그리고 스탄탈 4세는 타란 왕국 첩보부가 조사한 결과를 스탄탈 1세에게 공손히 내밀었다.
천천히 그걸 읽어보던 스탄탈 1세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나 참. 그 녀석 열일곱이라고? 하하하하! 미치겠구먼, 이거.”
믿을 수 없었다. 그런 힘을 가지고 그렇게 조용하게 살아간다니.
몇 군데 힘을 드러냈던 흔적이 보였지만 그 힘에 비하면 저런 사고는 없는 거나 다름없다.
태풍이 휘몰아치는 배의 갑판에 물 한 컵 떨어진 정도.
그제야 스탄탈은 마지막에 시안이라는 녀석이 한 대사가 이해되었다.
그저 자신을 협박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녀석의 생활 태도였던 것이다.
“그래. 이 녀석 앞으로 뭘 한다지? 이제 티안의 대장군 놀이라도 한다고 하나?”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고 합니다.”
“허… 여행?”
“네. 조사에 따르면… 젊은 시절에 좀 돌아다녀야겠다고…….”
“크하하하하하! 흐하하하!”
도대체 이렇게 유쾌하게 웃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눈앞의 녀석은 자신이 왜 이렇게 반가워하고 좋아하는지 모르리라.
그럴 수밖에.
자신의 심정은 현재 원숭이들과 무인도에서 살다가 사람을 만난 조난자의 심정과 같았다.
거기보다 자신보다 강한 녀석이 이렇게 순진하게 살려고 하다니.
흔히들 라-반더에 대해 착각하는 것들이 있다.
심지어 다른 라-반더를 만나보지 못했다면 라-반더들 스스로도 모르는 경우도 있다.
경지에 오르며 인간의 감정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단지 초인이 되면서 주위에 인간대우를 할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얼굴도 보기 힘든 그로인 이후로 실로 오랜만에 만난 동류.
저 녀석은 동류를 만난 자신의 감정을 꿈에도 알 수 없으리라.
그리고 이윽고 스탄탈은 결정했다.
“야, 너. 이 녀석이 어디로 갈지 경로를 조사해 와라.”
“예?”
순간 스탄탈 4세는 자신도 모르게 입 바깥으로 소리를 내뱉었다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자칫하다가 목이 뽑힐 수도 있다.
“흐흐… 괜찮아. 지금은 기분이 좋으니까.”
스탄탈 1세가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스탄탈 4세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라그랑 지방으로 돌아가시지 않으실 건지요?”
스탄탈 1세가 네 생각이 뭔지 다 알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못 가.”
“…….”
“나랑 같이 싸우던 그 녀석들, 거기에 이제 똬리를 틀었잖아. 걔들이 거기서 대기 타고 있으면 뚫기 힘들어.”
“그런…….”
“이 녀석아, 거긴 포기해. 못 건드려. 걔들 정말 만만치 않다고. 차라리 저 아래 우샤란 저 녀석들을 두들겨라.”
“우샤란 말씀입니까?”
“그래. 그리고 너 티안에 그 녀석 있는 거 알 거 아냐. 그 녀석은 우리랑 달라. 세상사에 아예 신경 안 쓰는 게 아닌 것 같다고. 노력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쳐들어갔다가 잘못 건드리면 어쩌려고?”
그 말에 스탄탈 4세는 깔끔하게 마음을 접었다.
자신도 녹화되어 온 영상을 보았다. 도저히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현장을 눈으로 확인한 대무장들 역시 라그랑 지역에 대해 침범을 꺼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탄탈 1세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래그래, 착하다. 난 여기서 일주일 정도 더 쉬다 완치되고 움직일 거니까 그때까지 경로 다 조사해 오라고.”
“…네, 알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스탄탈 4세는 방을 빠져나갔고 스탄탈 1세는 시안을 생각하며 히죽히죽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