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라-바쉬>
<우리가 인간의 감정이 없다고? 누구보다도 감정표현이 풍부하다, 이성에 얽매이지 않으니. 착각하지 마라. 너희가 그 대상이 아닐 뿐이다.>
-자신들을 돌보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자들에게
카라칼이 내뱉은 한마디
☆ ☆ ☆
<레노르바>
카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브로샨의 국경 도시였다.
브로샨은 세 개의 라-샤르-로아를 지니고 있었는데, 레노르바는 그중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레노르바 지방은 두 가지 이유로 유명하였다.
하나는 카란과 브로샨을 연결하는 국경의 상업적 요충지 겸 관광지이기에.
또 다른 하나는 이곳이 브로샨이 배출한 위대한 무인, 태양검 리비아스의 가문, 롤랑 가문이 있던 곳이기에.
위의 두 가지 이유로 레노르바는 항상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물자를 교환하러 오는 상인부터 관광지를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들.
그리고 위대한 검호, 태양검 리비아스를 기리기 위하여 방문하는 무장들까지.
그런 레노르바 지방을 시안은 라-샤르-로아를 통과하여 도착하였다.
시안은 도착하자마자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후아! 좋구나!”
이제까지 온갖 엄한 일과 업무에 엮여 수도를 떠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마음 편하게 수도를 떠난 적은 처음이기에 너무나 기분이 상쾌했다.
시안의 복장은 여행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벼웠다.
가벼운 의복에 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단지 목에 걸려있는 목걸이가 인상적으로 반짝이고 있을 뿐이었다.
시안은 가문의 가보라도 만지듯 목의 니츠마탄을 소중히 쓰다듬었다.
잠시 후 붉은빛이 번뜩이더니 시안의 손에 작은 지도와 메모가 나타났다.
“흠흠… 우선 처음 가 볼 곳은… 롤랑가의 연무장인가?”
롤랑 가문은 현재 몰락한 상태였고 그 연무장은 공개되어 있었기에 마음 편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듣기로는 그곳에 아주 유명한, 태양검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하니 그걸 구경하러 가는 것이었다.
“거기요! 여보세요!”
그런데 어디에선가 옥구슬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안은 그 목소리를 들었지만 자신을 부르는 게 아닐 것이기에 무시하고 가던 길을 갔다.
여기에 자신을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없으니.
목소리가 너무 예뻐 한번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민망한 모양새를 연출할 것 같아 애써 참았다.
“거기요! 거기 도둑질한 팔찌 차고 무슨 뒷밭에 물 주러 나온 것처럼 입고 계신 분~”
‘으잉?’
이건 확실했다.
주위에 사람이 많았지만 저런 차림새를 한 자는 자신밖에 없다.
자신을 부르는 듯한 목소리에 기대 어린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 시안은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의 예상이 빗나간 건 아니었다. 목소리에 걸맞은 대단한 미인이었으니.
자신을 아는 사람인 것도 맞았다.
하지만 시안은 표정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윽!”
“어머! 표정이 왜 그러신가~ 한껏 기대한 것 같은 표정이던데!”
시안의 시선이 가 닿은 자리에는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여성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번에 라그랑 지방에서 자신이 뚜드려 준 그 암사자 같은 여자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목소리는 여전히 옥구슬 같았다.
‘엄청 언밸런스하구먼…….’
속으로 투덜거리며 시안은 자신을 부른 여자를 쳐다보았다.
“…뭡니까. 저 왜 부르세요?”
“어머, 왜 갑자기 존댓말이야… 우리 사이에. 우리는 살을 맞대었던 사이인데 너무 차가운 거 아니야? 그때는 호탕하게 반말도 잘하더니. 난 야성미 넘치는 남자가 좋더라~ 흐히히히.”
여성은 뭐가 그리도 기분이 좋은지 싱글싱글 웃으며 시안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흉내 내고 있던 가식적인 말투도 버리고 호탕하게 웃기 시작하였다. 저게 원래의 웃음이리라.
‘미친 여자인가…….’
시안은 누가 들을까 봐 겁나는지 표정을 잔뜩 찡그리며 덧붙였다.
“뭐, 살을 맞댄 사이긴 하죠. 그쪽 오른 주먹 살이 제 왼쪽 볼 살에 갖다 붙었다가 떨어지긴 했으니까요.”
“하하! 그게 인연이지, 인연. 그나저나 이제는 반말 안 하네~”
잔뜩 귀엽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요리조리 살피고 있는 눈앞의 여자를 보고 있자니 문득 자신이 한 마리의 먹잇감이 된 느낌이 들었다.
암사자 앞에 있는 임팔라.
‘이상하다… 분명 내가 훨씬 더 강한데…….’
자신이 너무 젠틀하여 여성에게 약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시안은 애써 찝찝한 느낌을 버리며 빠르게 이 여자를 떼어버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원래 반말 안 합니다. 특히 저보다 나이가 훨! 씬! 많은 분한테는요. 그 때는 워낙 열 받아서 그런 거니 봐주시죠.”
빠직!
순간 여성의 이마에서 혈관이 솟구쳤지만 라-반더의 놀라운 신체제어 능력을 이용하여 순식간에 혈압을 정상화시키고 다시 빙글빙글 웃기 시작했다.
“후… 후하하하… 그래, 그럼 내가 편하게 할게. 동! 생!”
‘동생? 지금 동생이라고 한 건가?’
시안은 예상치도 못한 호칭에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이 여자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저 경지에 올랐다면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런데 열일곱 자신을 동생이라고 부르다니.
‘설마 이 여자도 나와 같은 부류인가?’
자신도 있는데 그러지 말란 법이라고는 없다. 얼굴만 봐서는 갓 스물이 넘어 보이니 실제로도 그럴 수 있는 법이다.
그래서 시안은 아주 정중하게 나이를 물어보기로 했다.
“저… 실례지만 연세가… 어찌……?”
빠드득!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을 뻔하였는지 여성의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하… 하하하하. 별 차이 안 나, 별 차이. 내가 이렇게 보여도 아주 대단한 천재라서 말이야.”
“…뭐, 그렇다고 치지요. 호칭은 편한 대로 하시면 되니까. 그런데 저한테는 무슨 일로……?”
시안이 믿어주겠다는 눈길로 쳐다보자 살짝 기분이 나빠졌지만 여성, 스탄탈은 자신의 목적을 떠올리고 말을 걸었다.
“아… 별건 아니고. 나도 이번에 누구 덕에 살 집을 잃어버려서 여행을 떠났거든. 별일 없으면 같이 다니자고.”
“…윽.”
사실 그 점은 살짝 찔리는 것이 있었는지라 움찔했지만 이윽고 개연성이 없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니, 보상을 하면 했지 갑자기 웬……. 왜 제가 그쪽이랑 같이 다닙니까?”
“그쪽이라니, 동생. 스틸이라고 불러, 스틸.”
“흠… 스틸 양, 제가 왜 스틸 양이랑 같이 다닙니까?”
“같이 안 다닐 거야? 너랑 다니면 얌전히 다닐 건데?”
“음? 당연하죠. 저는 홀로 여행을 즐기기 위해 나왔다고요.”
그 소리를 듣자 스탄탈, 아니 이제는 스틸로 불리게 된 여성은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흐… 너랑 안 다니면 별로 안 얌전하게 다닐 건데도?”
“허…….”
이런 막무가내 여자는 처음 보았다.
자신을 상대로 협박을 하다니.
역시 초인이라고 해도 인간을 기반으로 한 것은 틀림없는 듯하다.
저렇게 얼마 전의 일도 기억 못하고 저러는 걸 보니 말이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지 않는가.
‘아무래도 매가 부족했나 보구나.’
저번의 전투 이후로 자아를 잃지 않고도 가슴속의 힘을 어느 정도 풀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시안은 니츠마탄에 손을 올렸다.
번쩍!
붉은빛이 휘몰아치며 손에 흑색의 검, 크로나-폰이 소환됐다.
그리고 시안은 팔을 풀더니 검을 붕붕 휘두르며 스틸 쪽으로 다가섰다.
그 모습을 본 스틸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야… 야야야! 동생, 진정하고 말 좀 들어봐. 왜 같이 안 다니려는 거야. 넌 외롭지 않아?”
“음? 외롭다니요?”
순간 살짝 엄한 상상을 했지만 그럴 리 없음을 깨달은 시안이 되물었다.
“…하… 나는 정말 너를 만나서 너무 반갑단 말이야. 도대체 얼마 만에 보는 사람인지 모르겠다고.”
“…그 무슨…….”
주위에 넘치는 것이 사람이거늘!
여기까지 생각한 시안은 이윽고 상대방의 말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그리고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났다.
자신은 그나마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굉장히 특이한 초인임을.
다른 초인들은 경지에 오르는 순간 무인도에 떨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아니, 무인도보다 더했다.
이 드넓은 라-시안 대륙은 무인도보다 훨씬 더 드넓으니까.
여기까지 생각한 시안은 살짝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하더니 스틸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정말 사고 안 치고 얌전히 다닐 거지요?”
“그럼, 그럼! 내가 얼마나 얌전한데!”
이백 년이나 얌전히 있었다는 말은 조용히 목구멍으로 삼켰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 녀석이 자신의 나이를 아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다.
“후… 알겠습니다. 같이 다니지요. 단, 한 가지만 명심하십시오. 절대로 사고 치지 마십시오! 그 순간 헤어지는 겁니다.”
“만나자마자 이별 예고라니… 매정한 남자네. 후후후.”
치고받기는 했지만 별 악감정은 없었기에 시안은 고민 끝에 스틸의 동행을 수락했고, 스틸은 목적을 달성했단 생각에 시안의 엄포에도 싱글벙글 웃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야, 동생?”
“롤랑가의 연무장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동생이란 말 좀 안 하시면 안 될까요? 닭살 돋습니다.”
“그러면 뭐라고 불러?”
“이름을 부르십시오, 그냥.”
“후후… 알겠어, 시안 동생.”
“…아휴…….”
시안은 마음을 비우기로 하고 롤랑가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잠깐. 그런데 내가 이름을 가르쳐 줬던가?’
시안의 사소한 의혹을 남기고.
☆ ☆ ☆
위대한 무인, 태양검 리비아스를 배출한 롤랑가는 현재 몰락한 상태였다.
이유는 역설적으로 태양검이 너무나 뛰어난 인재였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영세했던 롤랑 가문은 태양검이라는 위대한 무인을 정말 우연히 배출해 내었다.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가문 비전의 반데르-로아가 없어도 스스로 지고의 성취를 개척해 낸 태양검에게는 안타깝게도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너무나 천재였기에 다른 사람의 수준에 맞추어 설명을 할 수 없었던 것.
홀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낸 태양검은 자신의 성취를 후손들에게 한 푼도 전하지 못하였다.
애초에 숨만 쉬면 모이는 반데르를 왜 방법까지 연구해야 하는지를 몰랐고, 몇 번만 연습하면 할 수 있는 칼질을 왜 순서에 맞추어 수련해야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롤랑 가문은 태양검이 80살이 되기 전까지는 번창하였다. 그때까지는 태양검이 그랑-반더였기에 그래도 어느 정도 가문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태양검, 리비아스가 라-반더의 경지에 오르자마자 그는 가문을 훌쩍 떠나버렸다.
당연히 위대한 무인의 수련법을 하나도 전수받지 못한 롤랑 가문은 급속도로 몰락하였고, 이윽고 가문의 저택조차 유지할 힘이 없자 그 저택을 팔고 떠났다.
그때 경매에 올라온 저택을 산 브로샨 왕국의 왕실은 위대한 무인의 흔적을 많은 사람들이 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개방하였고, 현재는 꽤나 짭짤한 왕실의 수입원이 되고 있었다.
벽에 막힌 무인들이 답답한 나머지 비싼 입장료(200탈란트)를 내고서라도 태양검의 흔적을 통해 막힌 벽을 뚫어보려고 했던 것이다.
시안이 당연히 자신의 벽을 뚫어보고자 그 흔적을 보러 가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다른 라-반더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나갔는지 호기심이 생겼기에 한번 둘러보려고 가는 것이다.
롤랑가로 들어와 저택을 거니는 도중 스틸이 아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태양검이라… 추억의 이름이네.”
옆에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 말하는 스틸을 보며 시안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태양검은 자그마치 300년 전에 태어난 인물이었다.
그런데 스틸 양은 태양검이 마치 자신의 추억 속에 존재하는 듯 말하고 있었다.
“아십니까?”
“그럼, 내가 열 살 정도까지 그는 벽을 뚫지 못했었으니까. 왕실 축제에 참전한 것을 보았지.”
“……?”
“하하! 뭘 그리 신기하게 봐. 예전에 한판 붙어보기도… 헙!”
그제야 스틸은 자신이 무슨 실수를 하고 있는지 깨달았는지 황급히 입을 닫았다.
“…별 차이 안 나신다더니? 전 170살이 아닌 17살인데요?”
“하… 하하하… 후하하하하…….”
민망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스틸 양을 보며 시안은 한숨을 쉬었다.
“뭐, 됐습니다. 중요한 것도 아니고.”
“흐하하… 뭐, 어찌 됐건…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라고. 나만큼 그 아저씨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니 이곳까지 올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애초에 이번 여행의 목적은 관광이었기에 기왕 온 김에 즐겁게 살피기로 했다.
게다가 이곳에 들어오는 200탈란트도 옆의 스틸 양이 내주었다.
계속 잡담을 하며 걷던 도중 어느덧 롤랑가의 저택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에 도착하였다.
태양검이 경지에 오른 직후 자신이 수련하던 연무장 뒤편의 조그마한 산에 남겨놓았다는 흔적.
‘라-바쉬’였다.
<라-바쉬>
태양검이 어느 날 수련을 하다 경지에 오른 후, 가장 처음 세상에 남긴 흔적.
연무장에서 침식 수련을 하던 태양검이 너무나 오랜 시간 연무장에서 나오지 않자 방해하지 않기 위해 접근하지 않던 가족들은 걱정이 되어 연무장으로 가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태양검은 사라지고 그가 경지에 오른 후 남긴 흔적만이 남아있었다.
가족들은 너무나 놀라 사방으로 수소문을 하고 찾아보았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고, 결국 태양검은 롤랑 가문을 다시는 찾지 않았다.
경지에 오르는 순간, 속세가 너무나 허망해짐을 느끼고 가문을 위한 가르침만을 남긴 채 자신에게 자극을 줄 수 있는 곳으로 떠나버렸다는 것이 세인들의 추측이다.
자신을 지켜주던 위대한 무인이 없어지자 롤랑 가문은 당황했지만 즉시 자신들이 해야 할 것을 알아냈다.
위대한 무인이 남긴 흔적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드는 것. 저 안에 담겨 있는 심득과 검법을 얻어야 자신들의 가문은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위대한 라-반더의 흔적을 이해하기에 롤랑가의 인물들은 너무나 재능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목숨을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문을 지켜주던 거인이 사라지자 주변 세력들이 태양검이 남기고 간 흔적을 탐내기 시작한 것.
결국 이를 지킬 힘이 없던 롤랑가는 외부의 괴롭힘에 점점 더 쇠약해져 가다가 결국 모든 저택과 가산을 정리하고 쓸쓸하게 사라졌다.
더 이상 버티다가는 정말 아닌 밤중에 의문의 습격을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후 왕실이 롤랑가의 저택을 사들였고 그 이후에 여러 과정을 거치다가 결국에는 관광지로 개발이 되었다.
라-바쉬는 라-반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흔치 않은 장소이기 때문에 타국의 무장들도 종종 와서 보고 가곤 했다.
브로샨 왕국이 완전중립을 표방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안과 스틸이 도착하니 라-바쉬의 앞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각국의 수많은 무장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곳은 얼핏 보면 연무장의 뒷산을 거칠게 할퀴고 지나간 몇 줄기의 선에 불과하다.
이리저리, 마치 하늘에서 신이 손가락을 가지고 흙바닥을 긁은 것처럼 거칠게 나있는 몇 줄기의 고랑.
하지만 이 흔적은 라-반더인 태양검이 남긴 것.
그렇기에 특별하고 그렇기에 벽에 막힌 무장들이 이곳에서 단 하나의 단서라도 얻고 싶어 항상 머무는 것이다.
“크아! 왜 안 보이는 거야! 이 벽만 넘으면 마스터가 되는 건데… 크흐흐흑…….”
“크윽… 그랑-반더는 정녕 선택된 자만이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수많은 무장들이 탄식을 토하며 뒷산의 거칠게 파인 도랑을 살피고 있었다.
그중에는 숙식과 수련을 병행하며 몇 년을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자도 있었다.
혹여 흔적이 상할까 두려워 모두 연무장에 머무르며 뒷산을 쪼갤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라-바쉬로부터 무언가를 얻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안은 궁금하단 표정으로 뒷산의 흔적을 훑어보았지만 곧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그 옆의 스틸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뭡니까, 저거.”
“후후, 그러게. 그냥 나한테 물어보라니까.”
“에잉… 그래야겠군요. 천천히 이야기해주세요.”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시안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연무장에 있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그런 시안의 눈에 특이한 아이 하나가 들어왔다.
‘…음?’
열 살을 간신히 넘긴 듯 보이는 아이는 이곳에서 수련하는 이들의 식사와 음료를 배달하는 일을 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유니폼을 입은 아이는 화를 내고 있는 무장에게 조심스레 음료수를 전달한 뒤 식당으로 돌아가지 않고 멍하니 라-바쉬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손끝에 들고 있는 식사용 나이프를 움찔움찔하고 있는 것이 무언가 사연이 있어 보였다.
‘하긴… 사연 없는 아이가 어디 있겠는가.’
시안은 거기까지 하고 관심을 끄고자 했지만 스틸은 조금 달랐다.
시안이 무엇을 보나 관찰하던 스틸은 이윽고 그 시선이 어떤 꼬마아이에게 머물러 있음을 깨달았다.
어린 꼬마 따위 관심이 없었지만 곧이어 스틸은 재미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꼬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꼬마야, 너 거기서 뭘 하니?”
“……!”
멍하니 뒷산을 쳐다보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란 소년은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쳐다보았다.
훤칠하고 늘씬한 미녀 하나가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소년은 이런 일에 대해 내성이 없는지 잠깐 얼굴을 붉히더니 서둘러 식당으로 돌아가려 했다.
“…아닙니다. 그냥… 바라보고 있었어요. 위대한 태양검의 흔적이라고 하길래…….”
“오우! 아니야, 아니야, 소년. 이 누나는 딱 봐도 알 수 있단다. 너에게 무슨 고민이 있다는 것을.”
“…어… 음…….”
자신을 누나라고 하는 스틸의 말에 어처구니없어하고 있는 시안의 표정을 본 스틸은 이마에 인상을 팍 쓴 후 다시 소년을 보고 입을 열었다.
“저기 있는 저 형은 아~ 주 대단한 검사란다. 너도 뭔가 검술에 대한 고민이 있는 것 아니니?
“…어떻게 아셨지요?”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데! 라는 표정으로 되묻는 소년을 보며 시안은 한숨을 쉬었다.
거기서 그렇게 나이프 들고 태양검이란 자의 흔적을 바라보며 움찔움찔하면 누구라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후후. 말했잖니, 딱 알 수 있다고. 저기 저 형한테 가서 도와달라고 하렴. 어서.”
‘어서 거절하렴. 어서, 어서…….’
시안은 딱 봐도 수상한 여자가 와서 수상한 제안을 하는 것을 수락할 리 없다고 굳게 믿었지만 생각보다 미녀와 족집게의 조합은 소년에게 강렬하게 다가왔나 보다.
주춤주춤하며 다가오는 소년을 보며 시안은 작은 한숨을 쉬었다.
“흠, 그러니까… 익스퍼트의 벽을 넘지 못하여… 여기 왔다고요? 돈이 없어서 취직해서 들어왔고?”
자신을 데카론이라고 밝힌 열두 살의 소년을 보며 시안은 되물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주변 무장들이 제법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열두 살에 익스퍼트의 벽에 막혔다면 상당한 수준이다.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 중 절반도 그 나이에 그 성취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벽을 넘는 게 몇 살이 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그걸 감안해도 괜찮은 수준이었다.
여기서 심부름이나 하는 아이기에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그 정도 경지에 올랐을 줄은 다들 몰랐다.
“후후. 열두 살이라… 추억이 새록새록 돋네. 나는 그때 마스터에 올랐었는데.”
추억에 빠져 있는 그녀의 감상을 짓밟아버리기는 싫어서 자신이 그때 무엇이 되었는지는 시안은 말하지 않기로 했다.
“흠… 그래서 저 라-바쉬라는 걸 보고 있던 건가요?”
“네… 답답해서……. 빨리 강해져야 하는데…….”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지만 무언가 급한 모양인지 소년은 꽤나 조급해 보였다.
시안은 그걸 보고 잠시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결심한 듯 아이에게 무언가를 속닥이며 가르쳐 줬다.
이왕 엮인 김에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조금 도와주는 즐거움을 알아보는 것도 좋으리라.
소곤소곤.
그 이야기를 들은 소년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안과 라-바쉬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큰 소리로 외치려 했다.
“믿을 수 없… 읍!”
“쉿. 쉿. 쉿!”
시안은 당황하며 소년의 입을 막았다.
그러자 소년이 당황하면서도 불신에 가득 찬 표정으로 외쳤다.
“왜 말을 못 하게 하시는 거예요? 진짜라면?”
“아니… 그게…….”
시안이 이마를 부여잡고 있을 때 소년이 외쳤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라-바쉬가 아무것도 아니라니! 저거 볼 시간에 다른 수련을 하라니!”
‘아이고… 아버지… 이게 쉬운 게 아니네요…….’
“파하하하하! 아이고!”
그 말에 시안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고 스틸은 옆에서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웅성웅성.
“…저게 무슨 뜻인가?”
“저자가 그런 말을 한 것인가?”
주변의 모든 무장들이 이쪽을 바라보며 수군대고 있었고 천천히 시안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왜 말을 하지 말라고 했냐 하면… 이렇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흐휴…….”
시안은 차마 어린 꼬마에게까지 화를 낼 수는 없었기에 당황하는 소년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봐, 그게 무슨 소리야. 라-바쉬가 아무것도 아니라니.”
추레한 것이, 적어도 일주는 넘게 여기 머물고 있던 것처럼 보이는 무장이 거칠게 물어보았다.
위대한 무인, 태양검이 남긴 흔적이 아무것도 아니라니! 그럼 여기서 고생하고 있던 자신들은 무엇이 된다는 말인가!
이왕 이렇게 된 것, 시안은 친절하게 설명해 주기로 했다.
어려운 것도 아니고 일박에 100탈란트나 하는 이곳에서 머물며 삽질하는 저들이 아까부터 조금 안타깝기는 했으니.
‘도와주면 모두에게 이득… 모두에게 이득… 후… 심호흡… 심호흡…….’
물론 이런 상태로 이야기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거니까 조금 위엄을 갖추기로 하였다.
쿠드드득!
시안은 기세를 조금 풀어 올리며 일어섰다.
“……!”
흥분한 상태로 다가오던 주위의 무장 모두가 조용해졌다.
자신을 스치며 지나간 무언가에 다들 전율한 것이다.
“말 그대로입니다. 저건 태양검의 흔적도, 그 무엇도 아닙니다.”
시안이 주위를 둘러보며 판결을 내리듯 선언했다.
무장들 중 정신을 차린 하나는 겁에 질렸지만 이제까지의 모든 노력이 부정되는 것을 믿을 수가 없는지 악을 쓰며 물었다.
“그… 그러면 저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오?”
“후… 저건 그냥… 낙서예요, 낙서. 무슨 깨달음이 담긴 검격이 아닌, 심심해서 그린 낙서.”
“후후… 들었지, 소년? 그러니까 저거 보면서 그렇게 노력해봤자 아무 소용 없다고.”
그리고 그 말에 담긴 진심을 느낀 무장들 모두가 당황한, 혹은 절망한 표정을 지었다.
저런 ‘존재’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음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라-바쉬>에 담긴 진실.
그것은 그저 낙서였다.
태양검이 라-반더에 오른 것은 맞다. 하지만 그자가 무슨 깨달음을 담고 가문을 위해 검격을 남긴 것은 아니다.
그저 갑작스런 자아의 변화에 가문을 비롯한 모든 것이 허망해지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칼로 뒷산을 죽죽 그으며 고민한 흔적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다가 방향을 정하고 떠나버린 것이고.
평범한 사람들이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그으며 고민하는 것에 비하면 확실히 스케일이 크긴 하지만 그래 봤자 저것이 낙서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시안과 스틸은 그것을 보고 자신들이 헛걸음을 했다고 여긴 것이다.
무장들은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이후 두 패로 갈리었다.
가볍게 왔기에 가볍게 포기하고 떠나가는 사람.
너무도 막막하여 절박한 심정으로 왔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뒷산을 쳐다보는 사람들.
대처는 달랐지만 느낌은 비슷했다.
‘실망’
하지만 소년의 반응은 또 달랐다.
지금 나이에 익스퍼트에 도달했다면 노력하면 언젠가 뚫을 수 있을 것이다. 익스퍼트의 벽이 그렇게 두꺼운 편은 아니니 말이다.
그렇기에 저 소년은 저 뒤의 무장들보다 실망을 덜 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소년이 보인 반응은 그게 아니었다.
‘절망’
소년의 표정은 정말 나락으로 떨어진 듯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될 이유가 없기에 찝찝해진 시안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가능성을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 혹시… 성이 롤랑입니까?”
그 말에 절망에 빠져 있던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데카론 드 롤랑.
몰락한, 하지만 태양검의 후손이기에 그 성만은 빼앗기지 않은 비참한 귀족가.
데카론은 그 롤랑가의 후손이었다.
그렇기에 절망하리라. 유일하게 남은 선조의 흔적이 고작 낙서에 불과하다니.
시안은 유심히 그 아이를 바라보더니 옆의 스틸을 보았다.
“음? 왜?”
“태양검이랑 한판 붙어봤다고 하셨죠?”
“음… 좀 되긴 했는데 한판 붙긴 했었지.”
“저 벽에 하나 새겨줘요. 적당히 알아볼 만한 걸로.”
“허… 너무 착한 거 아냐?”
스틸이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렇게 인간적이라니.
개미에게 동정을 보이는 경우는 초인에게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자신이 아까 질문을 던진 건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재미있을 것 같아 던진 것이지, 소년을 위한 건 아니었다.
“뭐, 어려운 것도 아니고… 손해 볼 것도 없는데요. 전 효자라 아버지 말을 잘 듣는 편이지요.”
시안의 아버지라면 로만 백작이리라.
‘호오… 무슨 말을 해 준거지.’
스틸은 궁금했지만 물어보기도 애매했기에 천천히 알아보기로 했다.
“음… 우리 동생 부탁이라면 못해줄 것도 없지. 이거 나중에 갚아야 한다?”
“아까 일부러 저 아이한테 말 건 거 알아요. 그걸로 퉁 쳐요.”
“…쳇.”
딱히 할 말이 없었는지 스틸은 손을 풀며 뒷산 쪽으로 향했다.
“보자… 얘들이 알아볼 만한 수준이면…….”
그러더니 스틸은 양손에 막대한 힘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태양검의 ‘길’을 자신이 완벽히 따라 할 수는 없다. 그는 그만의 길을 걷고 있었고 자신은 자신의 길에 최적화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저런 조무래기들이 알아볼 수 있어야 하는 수준 정도로 새기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워낙 저급해야 알아볼 수 있을 테니.
이윽고 스틸의 손에서 태양검 말고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그렇기에 사장된 태양검, 리비아스의 검법, <빛나는 길>이 펼쳐져 절벽을 향해 날아갔다.
성의 없는 손끝에서 피어나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면서도 아름다운 그 길을 보며 소년은 멍하니 눈을 떼지 못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