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태양의 흔적>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 뭐… 내가 고생한 것도 아니고…….”
“아닙니다! 정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제 매일 가서 보고 배울 수 있으니까요.”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소년이 부담스러워 시안은 말꼬리를 흐리고 공을 옆의 스틸에게 돌렸다.
시안과 스틸은 현재 데카론이라는 롤랑가의 소년과 같이 다니고 있었다.
필요 없다고 하였는데 극구 보답을 하고 싶다던 소년은 열심히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시안이 관광차 이곳에 들른 것을 알고 레노르바를 직접 소개해 주겠다고 하였다.
이곳 토박이인 데다 먹을 것이 떨어졌을 때 가이드를 한 적이 있기 때문에 해박하다는 것이었다.
이 정도 성의는 받아들여도 될 것 같아 시안은 수락했고 셋은 이렇게 레노르바의 관광 명소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곳은 <쿠론의 점심>이라는 집입니다. 외지인들은 모르는, 아주 맛있는 집이지요. 여기 주방장 겸 주인이신 쿠론 씨 실력이 정말 대단하거든요.”
그 말에 시안은 귀가 솔깃했다.
“그러면 여기서 먹고 갈까요? 제가 사지요. 데카론 군도 같이 먹도록 해요.”
“뭐… 나야 상관없어. 후후.”
“저야 그러면 감사하지요.”
식당에 들어간 셋은 이윽고 대화를 시작하였다.
외지인들이 모르는 식당이라 그런지 사람도 많지 않았고, 맛도 훌륭했기에 셋은 기분이 좋아진 상태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대화를 하던 도중 시안은 데카론에 대해 몇 가지 더 알 수 있었다.
하나, 이미 알고 있었지만 집이 정말 가난해서 무너지기 직전이라는 것.
둘, 그런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데카론을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것.
온갖 잡일을 하고 생계를 유지하려면 수련 시간이 길지 않았을 터인데 제대로 된 스승도 없이 익스퍼트의 벽에 막힐 정도까지 온 것은 정말 상당한 재능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눈앞의 스틸과 시안은 그보다 수백 배, 수천 배는 더 희귀한 재능의 소유자였던지라 별로 감흥이 없었다.
한창 대화를 이어나가던 중 소년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꺼내기 어려운지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였다.
“음… 데카론 군? 무슨 일입니까?”
그러자 데카론은 힘들게 말을 꺼냈다.
“혹시 이곳에 얼마나 머무르실 예정이신지요?”
“음… 관광할 것도 많아 보이니 일주일 정도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 레노르바란 도시는 정말 좋군요.”
그 말을 들은 데카론이 반색을 하며 되물었다.
“저… 그러면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여기서 머무르시는 동안 제 검술을 좀 봐주시면 안 될까요?”
그 말에 시안이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음… 안타깝지만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요.”
“아… 죄송합니다, 부담 끼쳐드려서. 역시 무리한 요구였군요.”
낙담한 표정을 짓는 데카론을 보자 시안은 황급히 덧붙였다.
“아… 그게 무리한 요구인 건 아닌데… 무리인 것이… 저는 누구한테 배워본 적도 없고 누구를 가르칠 수도 없어요.”
“네?”
싫으면 싫다고 하지 왜 치사하게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냐는 표정을 짓는 데카론을 보고 시안은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함을 느꼈다.
“…진짜입니다. 예전에 제 형을 좀 도와주려고 했는데 안 되더군요.”
자신의 형인 리안도 자신의 말을 단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였다. 눈앞의 아이가 자신의 형보다 높은 재능의 소유자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후후후후… 당연하지. 누가 우리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옆에서 스틸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라-반더 정도 되는 이들의 말과 생각은 라-반더의 경지에 오르기 전에도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힘들다.
하늘이 내린 재능을 타고난 자들이기에.
어떻게 팔을 움직이고 어떻게 숨을 쉬는지 무슨 수로 설명한다는 말인가.
그냥 해 보니까 되기에 하는 것일 뿐이다.
태양검도 그랬고 스틸도 그랬다. 시안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렇기에 더욱 빛난다. 만들 수도 없고 자신의 것을 전할 수도 없기에 고고하고 빛나는 존재들.
“태양검이 가문에 남긴 것이 없지요? 검술이라든가…….”
“…네.”
“그게 다 의미가 없어서 그럽니다. 자신 정도의 재능을 가지지 못하면 이해하지 못 할 것이고, 자신 정도의 재능이 있다면 그런 것 필요 없이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낼 테니까요.”
“아…….”
그 말을 들은 데카론은 절망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가문이 이백 년간 해온 것은 헛수고였다는 말인가!
태양검의 검술을 익히기 위해 가문이 몰락하는 와중에서도 힘들게 노력했지만 눈앞의 인물들은 그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꼬마야, 그래서 내가 너 정도도 쉽게 익힐 수 있게 새겨놨잖니, 벽면에. 그거 보고 익히면 된단다.”
“아……!”
그 말을 들은 데카론은 희망에 찬 표정을 지었고 시안은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사람의 희망이 무너지는 것을 보는 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니까.
기쁨에 찬 표정을 짓던 데카론은 갑자기 고뇌에 빠지더니 고개를 들려 시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저… 아까 말씀 안 드린 것이 있는데… 태양검 선조께서 100년도 더 전쯤에 저희 가문에 들러 전한 것이 있긴 해요.”
“음?”
“그 아저씨가?”
시안과 스틸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라-반더가 다시 가문에 찾아와서 관여했다는 것이 신기했던 것이다.
시안은 의외의 곳에서 라-반더의 흔적을 찾게 되자 흥미가 생겼다.
“그런데 꼬마야, 너 꽤 용기 있구나. 우리가 빼앗으려고 들면 어쩌려고.”
“…별로 그러지 않으실 것 같으니까요.”
데카론은 어릴 적부터 눈치가 빨랐기에 금방 알 수 있었다.
아까부터 태양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느낀 건데, 이 둘은 자신의 위대한 선조인 태양검에 대한 존경심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정체가 무엇인지, 얼마나 강한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오히려 아래로 보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아까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다.
이제까지는 자신의 집에 태양검이 남긴 유물이 있다는 것을 꽁꽁 숨겨왔다.
힘도 없는 가문에 그런 걸 가지고 있다는 것이 들통 나면 하루아침에 몰살을 당하고 털려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그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기에 고민하다 말해주었다.
어차피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무도 해독하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쓸모없이 집 안에 쟁여두느니 이 기회에 이 두 사람에게 보여 주는 게 낫다.
예상했던 대로, 그리고 매우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의 눈에는 탐욕이 아님 호기심만이 담겨있을 뿐이었다.
“궁금하시면 한번 보고 가시겠어요? 저희 집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요.”
“음… 그래도 괜찮다면 고맙지요. 궁금했는데.”
“그러게. 리비아스 이 음흉한 아저씨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하하하.”
식사를 마친 셋은 자리를 일어나 데카론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롤랑가로 향했다.
“여기입니다.”
도착한 곳은 허름한 주택이었다. 그 위세 높던 리비아스의 롤랑 가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롤랑가는 그 정도로 완전하게 몰락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200년의 시간에 걸친 몰락이 그들에게 태양검이 남긴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증명해 준 것이다.
시안이나 스틸에게는 별 상관 없었다. 왕궁이나, 대저택이나, 이런 허름한 주택이나 그게 그거였다.
저택으로 들어간 데카론은 자신의 어머니를 소개했다.
“어머니, 이분들은 어제 저를 도와주신 분들이에요.”
“시안입니다.”
“스틸.”
“롤랑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크게 대접할 것은 없지만… 편히 쉬다 가십시오.”
많은 풍파를 겪어 그런지 데카론의 어머니는 기운이 없어 보였다.
“들어가 쉬세요, 어머니. 두 분은 이쪽으로 오세요.”
데카론은 둘을 그나마 가장 깔끔한 방으로 안내한 후 지하실에서 물건을 가져오겠다며 내려갔다.
이윽고 데카론은 손에 자그마한 상자를 들고 왔다.
너무나 허름하고 볼품없게 생긴, 그래서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그런 상자.
하지만 데카론이 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서는 상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 나왔다.
백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휘황찬란한 빛을 내뿜는, 엄지손톱만 한 자그마한 돌.
작은 돌의 표면에는 기묘하게, 하지만 매우 정밀하게 선이 이리저리 새겨져 있었고 이 선을 따라 반짝이는 입자들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반투명한 돌의 안쪽에서는 끊임없이 무엇인가 유동하고 있었다.
롤랑가가 숨기고 있던 것도 이해가 갔다.
딱 봐도 귀하게 생긴 것이, 들통 났으면 이런 허름한 주택에 강도가 하루에 일곱 번은 침입하는 불상사가 생겼을 것이다.
시안은 돌을 들고 이리저리 유심히 살피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이건…….”
데카론은 한 마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귀를 쫑긋 세웠다.
“전혀 모르겠군요.”
“네?”
“이거 진짜 태양검이란 분이 주고 간 것 맞습니까?”
“네. 분명 기록에는 태양검께서 사람을 시켜 보내왔다고…….”
“이상한데…….”
시안은 중얼거렸고 스틸 역시 이에 동의했다.
이건 무인의 흔적이 아니었다. 반데르나 ‘길’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끊임없이 엑사르가 유동하고 있는 것이, 어느 법도사의 흔적과 같았다.
게다가 안에 있는 것은 무엇인지 잘 짐작도 가지 않았다.
흐름이야 느낄 수 있지만 워낙 법도 쪽에 문외한이니 이게 어떤 효과를 낼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먹는 용도 같은데…….”
“…먹는 것이요?”
100년 동안 선조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였지만 애초에 몰락해가는 가문에서 그런 걸 알 수 있을 인재나 정보가 있을 리 없었다.
“음… 이게 잘 만들어 놓은 게…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이나 재능이 있으면 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계속 먹으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거든요. 아마… 잘은 모르겠지만 영약처럼 실력의 상승을 이루어 주는 용도 같습니다.”
그 말에 데카론도 돌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까 벽을 보고 약간 깨달은 바가 있어 그런지 정신을 집중하자 그런 느낌이 살짝살짝 인지되었다.
데카론은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선조이신 리비아스께서는 가문을 버리지 않은 것이다!
무엇인지, 무슨 용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위대한 라-반더가 주고 간 물건이 평범한 것일 리 없고, 엄청난 영약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옆의 스틸은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허… 그렇게 친절한 아저씨가 아닌데…….’
예전에 한번 샘 위, 하늘산맥에서 신나게 리비아스와 드잡이질을 한 스틸은 리비아스의 성격을 대충 알고 있었기에 그가 후손을 위해 영약 같은 것을 친절하게 남겨놓았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 아저씨의 생각을 완전히 아는 것은 아니기에 오지랖 넓게 참견하긴 뭐 했던지라 스틸은 그냥 옆에서 가만히 서있기로 결정했다.
게다가 저건 자신들의 수준에는 큰 도움이 되는 물건도 아니다. 애초에 무슨 작용을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어느새 해가 졌고 내일 다시 보기로 약속을 잡은 시안과 스틸은 예약해 두었던 숙소로 돌아갔다.
모두가 돌아가고 어머니도 주무시자 방 안에 홀로 남은 데카론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돌을 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아까 시안이라는 분이 해 준 이야기도 떠올랐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수상한 거 같은데……. 저도 좀 확실하진 않으니 무턱대고 드시는 건 안 좋을 듯합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돌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 마음이 끌려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내면에서도 끊임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까지 잡일하며 수련할 거니… 가문을 부흥시켜야지.]
[선조가 남겨준 것인데 무슨 일이 있겠어.]
[먹는 순간… 너도 빛나는 존재가 될 수 있단다.]
고민을 하던 데카론은 무언가에 홀린 듯 손을 뻗더니 이윽고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엄지손톱만 한 작은 돌을 삼켜버렸다.
☆ ☆ ☆
브로샨 왕국의 동쪽, 키아란 해에 위치한 휴양지, <마르가란>의 한 섬.
레노르바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이 섬에 주인을 모를 저택이 하나 위치하고 있었다.
섬의 휴양용 저택 앞 의자에 누워 햇살을 즐기고 있던 남자는 졸고 있다가 번쩍 하고 몸을 일으켰다.
“호오… 이제야 먹는구먼. 태양검 그 친구도 고생이 많았겠어. 후손 중 이렇게 재능 있는 아이가 없었다니…….”
남자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서쪽을 바라보았고 이윽고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남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키아란 해의 이름 모를 섬에는 덩그러니 작은 저택만이 남게 되었다.
☆ ☆ ☆
시안과 스틸은 약속한 장소에 데카론이 나타나지 않자 늦잠을 자나 하여 조금 더 기다려 보았지만 오지 않았다.
하지만 기다려도 데카론은 나오지 않았다.
약속을 어길 것 같은 아이가 아니었기에 시안은 씁쓸한 표정으로 내뱉었다.
“그걸 먹었나 보군요…….”
“뭐… 그래도 동생은 하는 데까지 했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말아.”
정체불명의 돌은 일정 경지 이상에 오르는 자를 유혹하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버섯에는 독이 있다.
돌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람을 유혹하는 돌이 좋은 목적을 가지고 있을 리는 없다.
그렇기에 시안은 그 돌에 살짝 손을 써 사람을 미혹하는 효과는 억눌러 놓았다.
그렇다면 그 돌을 먹은 것은 데카론 자신의 선택이리라.
그것까지는 자신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 안내인도 사라졌으니 오붓하게 다녀 보자구. 후후.”
“으헉…….”
자신의 팔짱을 껴오는 스틸에게 화들짝 놀라며 시안은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호오…….’
그 뒤를 바라보던 스틸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번뜩였다.
“그러면… 다음 목적지는… 태양검이 쓰던 무기가 꽂혀 있는 광장이군요?”
“음… 그 아저씨가 쓰던 칼이라… <그랑조드>였던가… 제법 괜찮았지. 내 것보다는 허접하지만.”
그러면서 못내 아쉬운지 스틸은 시안의 팔목을 힐끔 돌아보았다.
“안 됩니다.”
“쳇.”
그 시선은 눈치챈 시안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고, 스틸은 불평을 내뱉었다.
“흠… 그랑조드라… 스틸 양이 그리 말할 정도면 상당한 무기겠군요.”
시안은 어서 보고 싶다는 표정을 지었다.
태양검이 쓰던 애병, 그랑조드는 220년 전, 태양검이 롤랑가에서 자취를 감추면서 같이 모습을 감춘 무기였다.
별다른 기능은 없다.
단 한 가지 특징은 운석을 벼려 만든 금속 <코란>을 사용했기에 사용자의 힘을 고스란히 받아낼 수 있다는 점.
그렇기에 그랑-반더 중에서도 남다른 반데르 수치를 자랑했던 리비아스의 막대한 에너지를 견딜 수 있었고, 그렇기에 유명해졌다.
속세에 관여하지 않는 라-반더의 특성상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백년도 더 전 어느 날, 레노르바의 대광장 한가운데에 턱 하니 꽂혀 있었다.
신기하게도 광장의 한가운데인데 아무도 누가 꽂아 놓았는지는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 누가 꽂아 놓았겠는가? 태양검의 애병이니 당연히 태양검이다!
레노르바뿐 아니라 브로샨의 모두가 흥분하였다. 이는 위대한 리비아스가 아직도 자신들, 브로샨을 지켜보고 수호하고 있다는 뜻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물론 그랑-반더들 정도 되면 그게 아니란 걸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도 진실을 몰랐고 사기를 고취시키는 데 좋았기에 어물쩍 넘어갔다.
그리고 브로샨 왕실은 국민들의 사기 진작을 위하여 대놓고 광장을 공개하며 많은 사람들이 그 검을 볼 수 있도록 홍보하였다.
도둑이 들어 그것을 뽑아가려고 한 적도 있다. 그랑조드는 탐나는 보구임이 분명하니까.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고작 광장 바닥에 꽂혀 있는 검을 도무지 뽑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힘에는 자신 있다던 브로샨의 그랑-반더, 타구론이 뽑아보겠다고 달려들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 이후로 검을 꽂아놓고 간 사람이 리비아스일 것이라는 추측은 더욱 명확해졌고 이곳은 레노르바의 명물이 되었다.
그런 정보를 떠올리며 광장으로 가던 중 시안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광장 근처의 모든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스틸도 이걸 보았기에 귀를 기울였고 이윽고 시안에게 재미있다는 듯 말을 걸었다.
“하하! 시안, 그랑조드를 도둑맞았다는데? 사라졌다고 하네. 어떤 할 일 없는 녀석이 그런 걸 가져갔지.”
“허…….”
그렇다면 이러한 웅성거림도 이해는 갔다.
시안은 여기 와서 보려고 했던 게 몽땅 사라지자 어처구니가 없었다.
“후후. 너무 실망하지 말라고. 내가 다 얘기해 주면 되지, 그 아저씨에 대해서는.”
“끄응… 그래도 궁금했는데… 어쩔 수 없군요. 관광은 계속해야 되니 다음 목적지로 갑시다.”
시안은 니츠마탄에서 지도를 꺼내더니 다음 목적지인 <하랑겔의 탑>을 손으로 가리켰다.
스틸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동생은 이 도시 범위 정도는 보려고 하면 다 볼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전망대로 가려는 거야? 나야 조금 힘들지만 동생은 될 거 아냐.”
“…기분 내려고 합니다, 기분. 어째 스틸 양은 낭만이 없습니까.”
‘찔러봤는데 진짜 할 수 있단 말이야?’
차마 소설에서 본 대로 하랑겐의 탑에서의 낭만적인 만남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었던 시안은 툭 하고 내뱉고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시안의 대답에 어이없어하던 스틸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 뒤를 따라갔다.
☆ ☆ ☆
관광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시안은 굳이 따로 잡은 방을 놔두고 자신의 방에서 뒹굴거리고 있는 스틸을 보며 말을 걸었다.
“그 리비아스라는 분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흐음… 그런 음흉한 아저씨 신경 안 써도 되지 않나. 동생보다 약한데, 뭐.”
“붙어 보지도 않았는데 제가 더 강한지 어떻게 압니까. 그래도 엄청 오래 사신 분 아닙니까.”
“나한테도 졌으니까. 후후. 당연히 동생보단 약한 거 아니겠어?”
“으잉?”
예상치 못한 대답에 시안은 당황했다.
태양검이 라-반더에 올랐을 때 스틸 양은 어렸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중에 스틸 양이 라-반더에 올랐다고 해도 리비아스라는 사람이 더 강할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당황하는 반응을 보고 기분이 좋아진 스틸은 흥을 내며 말을 이었다.
“그래. 한 백… 아니, 아니, 예전에 한판 붙었었지. 하늘산맥 자락에서.”
그 말에 시안은 150년 전 쯤 라그랑 지방 하늘산맥에 운석이 떨어졌다는 기록을 책에서 본 것 같았지만 그냥 모른 척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음? 왜 그러셨습니까?”
“그 아저씨가 내 소중한 샘을 탐냈거든. 어쩌겠어, 난 줄 생각이 없으니 한판 붙어야지.”
“그거 참… 조금 나눠 쓰면 되지. 샘에 주인이 어디 있습니까.”
시안이 못 말리겠다는 듯 말했다.
“후후… 난 내가 탐내고 있는 것을 빼앗겨 본 적이 없거든… 누구에게도…….”
말을 마치며 위아래로 훑어보는 스틸의 시선에 왠지 모를 오싹함을 느낀 시안은 서둘러 화제를 옮겼다.
“흠흠… 그래서 이긴 건 그렇다 치고. 그 태양검이란 분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몰라. 밀리다가 기어코 샘물 한 바가지 떠서 도망가더구먼. 내가 라-반더 중에는 좀 느린 편이라 쫓지도 못하겠고… 그래서 포기했지. 흠… 어쩌면 살아있을 수도 있고… 죽었을 수도 있고… 라-반더들이 숨기로 작정하면 서로가 찾기 힘들어. 나도 우리 동생이랑 그 이상한 두 녀석 만나기 전에는 대륙에 둘만 남아있는 줄 알았다고. 태양검 그 아저씨는 죽었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
“흠… 그렇습니까.”
“당연한 거 아니야. 아무리 우리가 강하다고 해도 치고받은 걸 누가 소문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고. 우리가 신도 아니고 대륙 전체에서 벌어지는 일을 어떻게 알겠어.”
하긴 그건 맞았다. 아무리 거대한 힘이 충돌한다고 해도, 그리고 라-반더들이 아무리 감지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초인들은 분포도가 너무 낮았다.
게다가 보통 사람들이 없는 오지에서 충돌하거나, 사람들이 보아도 믿지를 못하기 때문에 소문도 잘 퍼지지 않았다.
“맞는 말이군요.”
“그래. 그러니 내가 얼마나 반가웠겠어. 나한테 좀 더 다정하게 대하라고. 내가 알기로는 우리 동류는 이제 딱 다섯이라고, 이 넓은 라시안 대륙에.”
아마 시안 자신과 스틸 양, 라그랑의 둘, 그리고 대북벽에 있다는 그로인이라는 분까지 센 것이리라.
하지만…
“뭐… 그건 모르는 것 아닙니까. 대륙에 얼마나 숨어있을지. 방금 스틸 양 입으로 말했듯이 숨으면 찾기 힘들다면서요.”
“그거야 그렇지만… 후후 모르는 건 없는 거랑 다른 게 없다고.”
그러면서 자신을 보고 싱글벙글 웃는 스틸에게 도저히 매정하게 대할 수 없었던 시안은 작게 한숨을 쉬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뭐, 그래도… 그 태양검이란 분의 ‘길’은 어땠습니까?”
“그 아저씨, 그래도 그쪽에 재능이 좀 있기는 했지… 그랑조드랑 상성도 잘 맞았고. 가지고 있던 에너지 양 하나는 엄청 났거든. 나야 뭐… 상성상 조금 유리했기 때문에 이긴 거지.”
“오… 그 정도였습니까?”
“후후… 워낙 예전 일이니까. 그때는 내가 라-반더 오른 지 얼마 안 된 시절이기도 하고. 그때 입은 화상이 아직도 있는 느낌이라고… 볼래?”
“으헉!”
장난스럽게 웃으며 상의를 훌쩍 걷어버리는 시늉을 하는 스틸을 보며 깜짝 놀란 시안은 화들짝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자신을 보며 키득키득 웃는 스틸을 보며 타박을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라-반더의 몸에 상처가 남아있을 리 없었다. 장난을 친 것이다.
“스틸 양! 어허! 뭐하시는 겁니까? 제가 이런 거에 넘어갈 줄 아십니까?”
“후후후후… 동생, 아쉬운 거 다 알아… 벗는 시늉만 해서. 방금 반데르로 이쪽 살피려는 거 다 느꼈거든.”
“험… 험… 아닙니다. 저를 어떻게 보고. 저는 명문가의 교육을 받았다고요.”
“그래그래.”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스틸을 보며 시안은 왠지 앞으로 여정이 험난해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 ☆ ☆
“후우… 진짜 불쾌하군. 완전 병신이 된 느낌이야. 게다가 도대체 몇 년이 흐른 거야.”
데카론 드 롤랑, 아니 이제는 다른 ‘무언가’가 된 존재는 자신의 칼에 묻어 있는 돌가루를 털며 터벅터벅 산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입으로는 끊임없이 투덜거리며.
“에잉… 그 녀석. 아주 깊숙이도 박아놨네. 그래 봤자 누가 훔쳐 갈 수 있다고. 뽑는 순간 타 죽을 텐데.”
자신의 힘을 잔뜩 담아놓았기에 원래는 손을 대는 순간 타 죽어야 했지만 그 녀석은 무슨 생각인지 광장 한가운데 자신의 검을 봉인시켜 놓은 것이다.
그 덕에 도둑질하려던 녀석들은 모두 실패하기는 했지만 목숨을 건진 것이다.
‘그나저나 의외인데… 스탄탈 그 망할 꼬맹이가 아직도 살아있었다니… 으드득!’
인격은 바뀌었지만 데카론이라는 아이의 기억은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데카론이라는 아이 앞에 나타난 스탄탈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직도 살아있다니.
기억 속의 그 곱상한 얼굴로 자신을 두들겨 패던 것이 아직까지 선명하게 기억났다.
이 소년의 기억에 따르면 자신이 가문에서 사라진 지 220년이 지났으니까… 단순 계산으로 스탄탈 그 아이도 230이 되어 있어야 한다.
뭐, 라-반더가 되면 수명이 대폭 증가하니 살아있는 것도 이해가 안 되지는 않지만…….
‘그때까지 ‘그 자’가 안 찾아간 건가…….’
현존하는 라-반더와 초인들 중 스탄탈 그 꼬맹이의 위치는 그나마 알려진 편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뭐, 그자야 원래 예측불허이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신도 알 수는 없다.
‘치사한 자식. 그럼 나만 죽인 건가?’
투덜거리던 데카론은 칼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옆으로 쭈욱 휘둘렀다.
순식간에 주변 모든 나무가 화르륵 타버리며 재가 되어 버리고 그 안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뭘 그렇게 숨어 보고 있어. 나 맞아.”
“하하! 오랜만이야, 리비아스. 봉인이 풀렸길래 달려왔는데 너무 약해져서 긴가민가하고 있었지.”
그 놀라운 위력을 보고도 데카론을 약하다고 폄하한 남자는 놀랍게도 데카론을 리비아스라고 불렀다.
“…내 핏줄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젠장… 100년도 넘게 지났는데 변변찮은 재능 하나 안 나오다니. 결국에는 얼빵한 녀석 몸을 빌려서 <전혼>을 했잖아.”
분명 일정 수준 이상의 인재만이 볼 수 있도록 주술을 걸어놓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얼빵한 녀석이 먹어버리고 말았다.
그 탓에 칼에 모아두었던 힘을 가지고도 아직 생전의 힘을 모두 찾지 못한 상태였다.
“크흐흐… 그래도 보험 하나 들어놓기를 잘했지, 내 말대로?”
“쩝… 그건 그렇군. 고맙다. 덕분에 칼도 쉽게 찾아왔어.”
“그럼 이제 빚을 갚아야지.”
“…그러지. 안내하라고.”
싱글벙글 웃던 남자는 허공으로 몸을 날렸고 데카론, 아니 이제는 다시 태어난 리비아스는 그자를 따라 사라졌다.
‘아, 그걸 남겨두고 왔네……. 뭐… 별일 없겠지.’
살짝 고민하던 남자는 머리를 털어버리고 리비아스를 이끌며 다시 앞으로 나가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