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마르가란>
시안과 스틸은 레노르바의 관광이 끝난 후, 동쪽으로 향했다.
정확히 말하면 레노르바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브로샨의 동부 해안으로 향했다.
다음 여행지를 결정하던 도중 이곳이 시안의 마음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시안은 이제 동행이 된 스틸 양에게도 양해를 구했지만 스틸은 어차피 시안이 가는 곳이라면 아무 곳이나 상관없었기 때문에 가볍게 동의했다.
그렇게 해서 출발한 그들의 목표는 브로샨 동부해안의 거대 도시 마르가란이었다.
“흠… 스틸 양은 바다를 본 지 오래되었습니까?”
“음… 그런 것도 있고, 업무 외의 일로 간 적은 한 번도 없거든.”
“업무라니요?”
“뭐… 해전이나… 해적 소탕이나… 상륙전이나… 그런 것?”
“…….”
“그래도 바다는 엄청 편하다고. 시체가 안 남잖아. 한 방에 침몰시켜 버리면 되니까. 하하! 피 묻어도 처리하기도 좋고.”
“…….”
이럴 때는 정말 한 마리의 육식동물 같았기에 시안은 한숨을 쉬며 쳐다보았다.
“동생, 왜 그런 눈으로 보지? 후후, 동생도 그럴 텐데? 죽이겠다고 덤벼드는 녀석 보내준 적 없잖아.”
“뭐, 그건 그렇군요.”
“그런 거야. 흐흐. 난 단지 좀 더 스케일이 컸을 뿐이라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마차는 목적지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언덕을 넘자마자 저 멀리 푸른 해양이 펼쳐졌고, 해안가로는 엄청난 규모의 도시와 해변이 형성되어 있었다.
<마르가란>
브로샨 동부해안 최대의 무역도시이자 최고의 휴양지였다.
게다가 키아란 해의 해변가에 자리 잡고 있는 이 활기찬 도시는 두 가지로 유명했다.
첫 번째는 하루에 수백 척의 배가 드나들며 사람과 물자를 교환하는, 키아란과 브로샨을 연결하는 최대 규모의 무역항이기에.
두 번째는 귀족들이 여행 오고 싶어 하는 여행지 중 항상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라시안 대륙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아름다운 휴양지이기에.
도시의 북쪽은 무역을 담당하는 무역항과 도시가 발달하여 있었고 도시의 남쪽은 귀족들이 숙박할 수 있는 별장이나 관광지가 크게 발달하여 있었다.
브로샨은 중립국이기에 각 나라의 귀족들은 이곳, 마르가란의 휴양지에 별장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가 자랑거리가 되고는 했다.
그 정도로 이곳의 별장은 귀하였고, 상단에서 상업용으로 지어놓은 숙박업소들은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비수기에도 항상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성수기 중의 성수기.
멀리서 보아도 도시 전체에 사람이 북적거리는 것이 한눈에 보였다.
마르가란을 대표하는 거대한 축제 <라가오페>가 열리는 시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걸 모르고 갔던 시안과 스틸은 한 가지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여기도 방이 없다고요……?”
“네, 손님. 라가오페 시즌에 예약을 안 하시면…….”
말끝을 흐리는 점원의 표정에는 ‘예약을 안 하고 오시다니 꽤나 대담하시군요’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 쓰여 있었다.
“후아! 몽땅 가득 찼네… 도착했더니 축제기간인 건 좋은데…….”
볼 게 많아진 것은 좋았지만 머물 곳이 없다는 건 큰 문제이다.
아마 다른 곳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실제로 거리에는 방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이 넘쳐났으니까.
“후후… 동생, 부탁 한마디만 하면 될 걸 왜 그리 어렵게 돌아갈까? 그냥 한마디만 하면 된다고. 한. 마. 디.”
“윽…….”
옆에서 음흉하게 웃는 스틸을 보며 시안이 움찔했다.
옆의 스틸 양은 무슨 수가 있는지 계속 천하태평이었다.
마치 네가 언제까지 부탁 안하고 있을까 지켜보겠다는 여유 있는 태도였다.
시안은 스틸 양에게 부탁하면 이걸 반드시 어딘가에서 들먹이며 무언가를 요구할 것을 알았기에 영 꺼림칙해서 부탁하지 못 했다.
하지만 사태를 보아하니 방을 구하는 건 힘들 것 같았다.
결국 시안은 항복 선언을 하였다.
“…후, 알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스틸 양.”
“후하하하! 동생의 부! 탁! 이라면 들어줘야지. 슬슬 나를 데려온 게 아주 적절한 판단이었다고 느끼고 있을 듯도 한데?”
‘하아…….’
스틸은 웃으며 앞장섰고 시안은 그 뒤를 따라갔다.
“어… 스틸 양? 여기 맞나요?”
“그럼그럼.”
엑자일-대법도회에서 운영하는 도시 간 장거리 연락센터, <코른>에 들어간 스틸은 어디론가 연락을 하더니 바로 나와 도시의 남쪽으로 직진했다.
그리고 해변가를 따라 우뚝 솟아있는 귀족들의 휴양 별장을 쭉 가로질러 가더니 이윽고 사유지로 통제되고 있어 아무도 없는 백사장을 관통했다.
이 모든 길을 거쳐 도착한 곳에는… 정말 집채만 한, 별장이라고 하기에도 미안한 저택에 가까운 건물 하나가 우뚝 서있었다.
게다가 정원은 어찌나 넓은지 부지가 비싸기로 유명한 마르가란 도시 남쪽의 한 귀퉁이를 통째로 차지하고 사유지로 삼고 있었다.
“음… 스틸 양, 저는 이곳 화장실 정도에 머무를 돈밖에 없습니다만…….”
드라고나 시절 돈을 좀 챙겨놓기는 했지만 벌어보았자 얼마나 벌었겠는가?
보기만 해도 입이 떡 벌어지는 별장에 머물 여력이 시안에게는 없었다.
“후후, 걱정 말라고. 내가 아는 아이가 이걸 공짜로 빌려줬으니까 말이지.”
“음… 아는 아이요?”
“그럼그럼.”
시안은 오다가 이곳 팻말에 무엇이라고 붙어있었는지를 곰곰이 떠올렸다.
<이곳은 타란 왕국, 스탄탈 4세의 소유입니다. 치외법권이니 무단으로 침입할 시 즉결 처단됩니다.>
‘아는 아이라…….’
시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스틸 양을 바라보았다.
“후후, 들어가자고.”
스틸은 앞장서며 저택의 안으로 들어갔다.
☆ ☆ ☆
“스틸 양, 이 저택 같은 별장은 참 거대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후후. 너무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이렇게 크다면 방도 엄청나게 많겠군요?”
“음… 99개라고 들었는데 잘 기억은 안 나네.”
“그리고 현재 숙박 중인 사람은 관리인들을 제외하고 저와 스틸 양, 단둘이지요?”
“그렇지. 내가 여기 있는데 감히 누가 같이 별장을 사용하겠어.”
“…그렇다면 왜 저와 스틸 양이 한방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지요?”
시안이 명확한 논법에 의거해 일반 가정집의 정원만 한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스틸 양을 압박했다.
“아… 글쎄. 나도 참 안타까운데. 어쩔 수 없다는 걸 어떻게 해. 나도 여기 빌린 거라고. 여기 룰에 따라야지.”
“…….”
“아! 아까 못 들었나 보구나? 그럼 한 번 더 들려줄게.”
그러더니 스틸은 손가락을 딱 하고 튀겼고 이윽고 문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관리인이 정중하게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내가 알기로 분명 우리 둘이 머무를 수 있는 방은 여기 하나뿐이지?”
“그렇습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관리인을 보고 시안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저기요? 정말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아까 분명 여기 올 때 서른 개 정도 빈방을 본 것 같은데요?”
“창고로 사용 중입니다.”
“무슨 창고요?”
“의자와 침대, 식탁과 장롱을 보관하지요.”
“…그러면 여기도 창고 아닌가요?”
“아닙니다.”
“하아…….”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의 관리인들은 모두 스틸 양의 편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노예에 가까워 보였지만.
부탁해서 얻어 숙박하는 주제에 투덜거릴 수도 없었던 시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후, 어쩔 수 없겠지? 남녀가 유별하다지만 특별한 케이스이니 괜찮다고.”
스틸은 의기양양하게 시안을 쳐다보았다.
“…어쩔 수 없지요. 어찌 되었건 감사합니다, 스틸 양. 이제 숙소도 잡았으니 축제를 보러 나가지요.”
시안은 그래도 침대가 엄청나게 넓다는 것을 위안 삼으며 바깥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 ☆ ☆
마르가란에서 1년에 한 번 열리는 축제, 라가오페는 수백 년 전 처음으로 키아란과 브로샨을 연결하는 해로를 관통하는 데 성공한 해상 영웅 ‘라가오페’를 기리는 축제이다.
키아란과 브로샨을 연결하는 구간은 땅으로 가면 엄청나게 돌아가야 하지만 바다로 가면 훨씬 빠르게 가로지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해로를 통하여 무역을 하지 못하였다.
그 해로가 바다에 사는 하리쟌 천지였기 때문이다.
덩치가 어마어마하기에 해변까지 오지는 않았지만 바다를 건너려고 하는 배들은 몽땅 침몰하고 그 밥이 되었다.
바다는 육지와 또 다르기에 많은 반더와 법도사들이 그 길을 뚫어보려고 했지만 실패하였고, 그 옛날 브로샨의 그랑-반더 중 하나가 당당하게 도전했다가 물고기 밥이 된 후 모두들 해로를 포기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랑-반더마저 실패했는데 그 누가 험난한 해로를 뚫어낼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라가오페는 그 길을 뚫어냈다.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방법을 사용하였는지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라가오페는 하리쟌으로부터 침범 받지 않는 안전한 단 하나의 항로를 알아내고 이를 브로샨과 키아란 모두에게 알렸다.
그 항로의 시작 지점에는 마르가란이 있었다.
위대한 개척자, 라가오페의 이름을 붙인 항로, <라가오포라>가 발견되었으니 마르가란의 부흥은 예정된 수순이었고, 이후 마르가란을 부흥시킨 영웅 라가오페의 이름을 붙인 축제, 라가오페가 매년 마르가란에서 열리게 되었다.
“…라고 이렇게 책자에 설명되어 있군요. 흥미롭네요.”
“후음… 들어본 적이 있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위대한 개척을 해낸 사람이 대륙 동쪽에 있다고. 라가오페라는 자가 그 사람이었나 보군.”
“새로운 라-반더였을까요?”
“후후후. 그렇진 않을걸. 라-반더가 된 후에 종적을 감출 수는 있어도 라-반더가 된 걸 감출 수는 없다고.”
주머니의 송곳은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하물며 라-반더가 될 정도의 인재라면 송곳이 아니다. 그런 자가 라-반더가 될 때까지 수십 년을 돌아다니는데 소문이 안 나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면 특이한 엑서이거나… 그럴 가능성도 있겠군요.”
“음… 뭐, 별로 상관없지 않나. 그리고 만약 라-반더였다면 항로 하나만 뚫지는 않았을걸. 자, 이거나 먹어봐. 맛있다.”
그러면서 스틸은 손에 잡힌 마르가란 특산품인 꼬치를 쭉 하고 시안 입으로 들이밀었다.
시안은 그걸 한입 베어 물며 우물거리더니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라-반더라면 키아란 해 안의 모든 하리쟌을 찢어 죽이려고 들었을 것이다. 그 정도는 되어야 도전가치가 있으니까.
“흠. 이번에는 이곳으로 가보아야겠군요. <로쿰 쇼>. 귀여운 로쿰들의 재롱잔치라……. 그런데 스틸 양, 이거 줄 서야 할 것 같은데 여기는 혹시 아는 아이 없습니까?”
로쿰 쇼는 그 인기가 대단하여 줄을 서야 하기 때문에 시안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았다.
“…….”
“없으면 어쩔 수 없지요. 음?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볼 것이 많기에 시안은 스틸의 어이없다는 눈초리를 무시하고 서둘러 사람들을 헤치며 발걸음을 옮겼다.
<4권에서 계속>
4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