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라가오페>
<로쿰 쇼>
마르가란의 해안가에 사는, 작은 강아지만 한 해수류이다.
귀여운 외모와는 달리 엄연히 맹수이며 물속에서는 상당히 빠른 움직임을 보이기에 민간인들이 물속에서 로쿰 무리에게 공격을 받으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로쿰 쇼에 등장하는 로쿰들은 조금 달랐다.
어떻게 조련하였는지 그 외모에 걸맞게 사랑스러운 동작들을 무리를 지어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정기적으로 벌어지는 로쿰 쇼는 순식간에 마르가란의 명물이 되었고 언제나 사람들로 붐비었다.
라가오페 기간에는 하루 두 번 열리던 로쿰 쇼를 하루 네 번으로 늘려서 진행하기에 더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여 볼 수 있다.
“꺄악! 귀여워!”
“우와! 대단하다!”
사방에서 묘기와 애교를 부리는 로쿰들에 대한 찬탄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중에는 시안도 껴 있었다.
“으와! 우와! 잘한다!”
“…….”
“스틸 양, 신기하지 않습니까? 저 녀석들 하는 것 좀 보세요. 오우!”
제발 좀 닥치고 앉아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초인에 걸맞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낸 스틸은 꼬치를 들어 한입 먹여주며 말했다.
“후… 후후후. 동생, 그런데 지금 동생이 먹고 있는 꼬치는 뭘로 만든 건지 알아?”
“음… 모르겠는데요. 오우, 맛있네! 뭔가요, 이거?”
우물거리며 대답하는 시안을 보고 스틸은 사악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로쿰.”
“…퉤! 퉷퉷퉷!”
“거짓말이야.”
“…….”
아까운 꼬치 하나를 다 뱉어버린 시안은 스틸을 한번 흘겨보고는 다시 로쿰 쇼를 관람하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조용해지자 스틸은 만족스러운 미소로 자신도 쇼가 벌어지는 무대를 바라보았다.
사실 스틸 자신 입장에서는 로쿰이나 인간이나 똑같았지만 처음 보는 것이기에 나름 재미는 있었다.
무대 위에는 한 젊은 청년이 열심히 로쿰들을 이리저리 능숙하게 몰며 묘기를 진행하고 있었다.
“흠… 저분이 조련사인가 보군요?”
“그렇지.”
“엑서군요.”
“엑서네.”
둘은 동시에 대답하였다.
하지만 뒤이어진 둘의 대답은 조금 달랐다.
“동물을 다루는 능력이 있나 보군요. 편리하겠네요.”
“요즘 엑서들 밥 벌어 먹기 힘든가 봐. 여기서 저런 거나 하고 있고…….”
“…….”
“…….”
“흠… 흠흠… 그래도 저런 능력이 있으면 편리하지 않을까요? 여러모로 쓰임새가 많을 것 같은데요.”
시안은 멋진 비행 맹수류를 다루며 날아다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말하였다.
“후후. 글쎄… 하리쟌 정도 다룰 수 있다면 모를까, 동물이 한계라면 저기서 저런 걸 하는 게 다겠지. 그래도 저 정도면 꽤 열심히 연습한 것 같네. 다룰 수 있는 수가 스물을 넘는 걸 보니.”
동물을 다루는 능력은 엑서 중에는 몇 없는 능력이다. 하지만 가치는 없다.
정찰, 빠른 이동, 통신 등 동물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이득은 모두 엑사르로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치가 있으려면 하리쟌 정도는 조종할 수 있어야 하지만 순수한 살의로 똘똘 뭉쳐 있는 하리쟌은 엑서의 이능으로는 다룰 수 없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었다.
드르르륵!
그 순간, 땅을 통해 아주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일반인이라면 결코 모를 진동.
그렇기에 초인 둘은 알아차렸다.
“흠… 인위적인 거였는데… 방금.”
“오오! 설마 폭죽이라도 준비하는 걸까요? 전 폭죽이 대해서는 좀 안 좋은 기억이 있긴 한데… 축제의 폭죽이라니. 기대되는군요.”
시안은 가란-티아 시절이 생각나는지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축제에서의 폭죽은 처음 보기 때문에 이내 기대에 찬 표정을 지었다.
“폭죽이라… 나도 오랜만에 보네. 후후. 예전에 봤던 폭죽이 참 성대했는데.”
“스틸 양은 어디서 보셨나요?”
“예전에 어떤 해적 소굴을 토벌하러 갔는데 꽁꽁 숨어 있길래 멀리서 아르타곤을 쏴버렸지. 그런데 거기에 화약고가 있더라고. 아주 장관이었지. 하하하!”
“어… 그것참 멋진 광경이었겠군요…….”
자신이 스틸 양보다 강해서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 시안은 사소한 진동은 잊어버리고 쇼가 끝난 후 라가오페를 기리는 의식에 참여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마르가란을 부흥시킨 개척자, 라가오페.
몇백 년 전의 일이기도 하고, 갑자기 나타난 인물이기에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좋다.
우상화는 아는 게 없을수록 유리하니.
도시 북쪽에 우뚝 서 있는 라가오페 형상을 한 등대는 그러한 우상화의 일부였다.
“…라가오페라는 사람의 눈에서 빛이 나오네요. 아이디어 좋네요, 저거.”
키가 10미터는 훌쩍 넘는 라가오페 등대는 발뒤꿈치로 사람이 들어가 머리 부근까지 올라갈 수 있는 구조였다.
그리고 머릿속에 사람이 들어가 등대를 작동시키면 등대 안의 탈릭 스톤과 법진이 작동하며 눈을 통해 저 멀리까지 빛을 비출 수 있는 구조였다.
“후후. 상상력이 부족해, 동생. 나 같으면 입으로 빛이 뿜어져 나오게 했을 거라고. 전설 속의 드라고나처럼.”
“오! 그것도 괜찮군요.”
“후후. 그렇지? 전투에 재능만 없었어도 위대한 예술가가 되었을 수도 있을 텐데. 내가 워낙 싸움을 잘해서 말이야.”
“스틸 양과 공통점이 있었군요. 저도 진짜 칼질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겠더라고요. 하하! 예전에 선생님들이 모두 도망갈 정도였다니까요.”
“아… 미안, 동생. 난 그래도 다른 부분도 천재였어. 전투만큼 아니어서 그렇지.”
“…이럴 겁니까, 스틸 양.”
투닥거리며 의식 쪽으로 걸어가던 둘은 사람이 너무 많아지자 답답함을 느꼈다.
“시안 동생, 우리 그냥 저택에 가서 보면 안 될까? 솔직히 거기서도 다 볼 수 있잖아.”
“…그러려면 뭐 하러 여행을 다니겠어요. 그건 그냥 스캔이잖아요, 스캔.”
“그래도… 봐 봐, 이런 일도 생기잖아. 매력적인 여자의 숙명이긴 하지만, 내가 요조숙녀였으면 지금쯤 무슨 일이 벌어졌겠어.”
또각!
스틸은 자신의 옆을 지나가던 남자의 손목을 잡더니 바로 두 동강내버렸다.
“으아아악! 이런 미친 계집이! 지금 뭐 하는 거야!”
손목이 부러진 털북숭이 사내는 자신의 오른 손목을 부여잡으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하지만 시안은 전혀 동정의 표정을 짓지 않았다.
저 손이 스틸 양의 어디로 향하는지를 다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내가 먼저 사고 친 거 아닌 거 알지? 약속 안 어겼다고.”
“…웬만하면 죽이지만 말아주세요.”
“우후후후. 나 그런 야만적인 여자 아니라고.”
퍼억!
“커억!”
‘…거짓말.’
방금 자신이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저 발길질에 남자는 등대 버전 라가오페의 머리에 부딪혔을 것이다.
아주 가벼운 내장 파열로 끝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자신의 행동은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법이니 별로 불쌍하지는 않았다.
지금 저기서 스틸 양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불쌍한 영혼들은 좀 더 불쌍해질 수도 있지만 말이다.
“이년이! 지금 우리 동료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미친년 아닌가! 멀쩡하게 지나가는 사람 손목을 부러트리다니!”
‘…나도 모르겠다.’
스틸 양이 그랑-반더나 마스터 정도만 되었어도 알아보고 피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라-반더는 기세가 나타나지 않는다.
호랑이 무서운 줄은 알지만 거대괴수, 크로나의 아가리는 마치 동굴처럼 보이기 때문에 겁도 없이 걸어 들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저 그러면 저기서 꼬치 좀 사올 테니까 적당히 하고 계세요.”
“후후. 그럼그럼.”
시안 따라다니느라 팔자에도 없는 고생을 하고 있던 스틸은 여기서 쌓인 스트레스를 모두 풀어버리겠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무리를 향해 걸어갔다.
“걱정 마, 얘들아. 살살 할게.”
그러면서 스틸은 우아한 표범처럼 무리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우물우물.
“아까 그 사람들 안 죽은 거 맞죠?”
시안이 꼬치를 먹으며 말했다. 그들은 해변가의 높은 언덕에서 치러지는 의식의 맨 앞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상태였다.
스틸 양의 우아한 파괴 행위를 본 사람들이 슬금슬금 길을 내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시안과 스틸은 가장 잘 보이는 위치에서 기원 의식을 관람할 수 있었다.
“후후. 걱정 마. 걔들 그래 봬도 반더였다고. 반더면 내장 파열 한 번쯤은 당해 봐야 하는 거 아냐? 나도 서른 살쯤에 한번 당해봤는데… 그 느낌이 그냥……!”
“…전 평생 겪고 싶지 않네요. 그런데 반더요?”
“응. 맞던 도중에 자기들이 누군지 아냐고 물어보더라고.”
“…그래서요?”
“안 궁금한데 굳이 맞으면서 알려주더라고. 뭐라더라… 마르… 마르…….”
“마르가란 치안대입니다.”
“아, 맞다! 시안, 어떻게 알았어?”
“저 아닙니다. 아마 지금 저 사람들이 한 말일 거예요.”
어느새 바글거리던 사람들은 모조리 빠져 있었고, 사이좋게 꼬치를 나누어 먹고 있던 시안과 스틸만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갑옷으로 무장한 사내들이 줄을 서 있었다.
그리고 시안 옆의 스틸은… 신나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사건이 터진 것이 어지간히 좋은 모양이다.
“크흐흐흐흐흐…….”
“잠깐! 스틸 양, 잠깐 저랑 이야기 좀 하시지요.”
당장에라도 뛰어들려고 하는 스틸을 붙잡고 시안은 소곤거렸다.
“스틸 양.”
“음? 왜 그래, 동생?”
“빨리 아는 아이한테 연락해요, 그 별장 빌려준.”
“…….”
“권력 좋다는 게 뭡니까.”
“…….”
스틸은 시안을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라-반더가 무력 말고 다른 수단을 문제해결의 방법으로 떠올리다니.
이건 손으로 물컵을 들어 올리지 않고 혀로 들어 올리겠다는 거랑 똑같은 거다.
권력이라니.
자신들의 힘에 비하면 그건 정말 알량하기 그지없는 힘이다.
‘폭력을 쓰는 걸 두려워하는가?’
하지만 스틸은 자신이 너무 앞서 나갔음을 깨달았다.
“끝나고 패세요, 끝나고. 저거 보고 싶은데 싸우다가 취소되면 어떻게 합니까.”
“후후후후후… 좋아, 좋아. 그러자고, 동생.”
그 정도 부탁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다.
스틸은 기분이 좋아져 뒤에 서있는 마르가란 치안대에게 걸어갔다.
“지금 가서…….”
“아까 일은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레이디. 알고 보니 저희가 용병으로 고용한 자들이 사고를 쳤더군요. 축제기간이라 일손이 모자라 고용한 녀석들이라 관리가 부족하였습니다. 그 녀석들은 무거운 벌금을 물리고 해고하였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사과드립니다!”
앞의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꾸벅 고개를 숙였고 그 뒤로 도열해 있던 치안대의 일원들 모두가 따라 고개를 숙이며 소리쳤다.
스틸은 예상외의 전개에 멈칫했지만 나름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받아들였다.
“흐응… 뭐, 그래… 좋아. 가봐도 좋아.”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오니 시안이 들고 있던 꼬치를 스틸의 입에 물려주었다.
“하하, 잘 하셨습니다. 폭력은 가장 마지막에 쓰는 수단이라고요.”
“호오~ 그 말도 아버지가 해 준 거야?”
“아니요, 어머니가 해 줬지요.”
이제야 스틸은 어느 정도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괴수에게 목줄을 잘 채워놨군…….’
아직 어려서 그런지 조기교육이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스틸은 이 아이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다.
강자에게는, 강자에 걸맞은 태도와 삶이 있다고.
괴수가 강아지 목줄에 얽혀 있는 것도 웃기지 않는가?
라-반더의 강자는 그랑-반더 정도와는 전혀 다른 생활태도를 가져야 한다.
실제로 저번에 라그랑에서 치고받을 때 그 목줄을 뜯어버린 시안은 강자에게 어울리는 태도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그 오만함! 그 자신감! 망설임 없는 폭력!
스틸은 시안에게 그러한 삶을 되찾아주고 싶었다. 적어도 자신의 짝이 될 사람은 그래야 한다.
하지만 급한 건 아니니 천천히 진행할 생각이다.
이 아이의 부모님이 이 아이를 교육시킨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며 스틸은 눈앞에서 진행되기 시작한 의식에 눈을 돌렸다.
라가오페를 기리는 의식.
단순한 의식이 아니었다.
해변가의 높은 언덕 위에 마련되어 있는 제단에는 엄청난 양의 탈릭 스톤이 가득 쌓여 있었고, 제단의 밑에는 1년 동안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길 바라는 상인들과 마르가란의 행정가, 귀족들이 고루고루 모여 의식에 참여하고 있었다.
모두 라가오포라로 인하여 막대한 이득을 얻고 있는 자들이었다.
애초에 마르가란의 자들 중 그렇지 않은 자는 거의 없지만 저들은 특히 더 그러하리라.
사람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지시하고 순서에 따라 제단을 조작하자 서서히 의식이 시작되려는 듯 탈릭 스톤의 주변으로 미묘한 엑사르의 흐름이 감지되고 있었다.
시안과 스틸은 가장 앞자리에 앉아있었기에 이 모든 광경을 흥미로이 지켜볼 수 있었다.
“오, 상징적 의미만 있는 의식이 아니었군요. 보자… 가이드북에는 ‘옛날에 라페오라가 저 제단을 지어 놓고 매년 일정량의 탈릭 스톤을 바친다면 길은 닫히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 사라졌다는군요.”
“법도사였던 걸까. 제물을 바치는 의식 비슷하네.”
“차라리 제물이 나을 것 같은데요. 저기 쌓여있는 탈릭 스톤의 양이면…….”
“후후. 예전에도 동생 같은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더라고.”
그 생각을 예전 마르가란의 사람들도 했던 적이 있었다.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벌어들이지만 한 푼이라도 덜 쓰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
그 말이 현재는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 말이면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한 해는 축제를 열었지만 의식은 치르지 않았다.
한 상인이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다. 이 제단이 무슨 작동을 하는지 안 하는지도 모르는데 자신은 탈릭 스톤을 투자하기 아깝다고.
이성적으로 보면 위험한 제안이었지만 마침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같이 탈릭 스톤을 부담하고 있던 상인들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그의 의견은 급속도로 동의를 얻고 만장일치로 그 해는 의식이 아닌, 축제만 치러지게 되었다.
과연 의식을 치르지 않았는데도 근 일주일간 항로를 통과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하리쟌들이 침범해 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상인들은 의기양양해하며 도전하는 정신이 필요하다고 떠들고 다녔다.
<보아라! 수십 년이 지났으니 하리쟌들도 더 이상 라가오포라를 침범해 오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출항했던 모든 배가 침몰했다는 소식이 마르가란과 키아란에 들려올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출발했던 배 930척이 모조리 수장되었다.
웬만한 큰 배는 통신용 아티팩트를 달고 있는 지금과는 달리 통신 이적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이기에 그 피해는 더욱 컸다.
그 피해액은 탈릭 스톤 가격의 수천 배였다.
사람들은 라가오페 님의 말을 듣지 않아 그렇게 되었다고 분노에 가득 차 그 당시 제물을 바치지 말자고 강하게 주장했던 상인들을 모조리 때려죽이고 불태운 후 그들의 제물을 모아 다시 의식을 펼쳤다.
그 이후로는 의식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어졌다. 설령 있어도 곧 없어졌고.
“그럼 저게 어떤 작용을 해서 바닷길을 연다… 이거군요.”
“그렇겠지? 그런데 아무도 알아낸 사람은 없다고 하나 봐. 만약 알면 해운 수송의 혁명이 일어날 텐데 말이지.”
“아, 그렇군요. 그것도 가이드북에 적혀있는지 한번 찾아봐야겠군요.”
그리고 다시 가이드북을 들고 빠르게 페이지를 넘기는 시안을 보며 스틸은 여기 오기 전 스탄탈 4세 그 녀석이 조사했던 보고서의 한 문장이 떠올랐다.
<항상 근무 중 매뉴얼을 지참하고 읽고 있음>
‘의외네…….’
전혀 책을 좋아할 것 같지 않았기에 스틸은 문득 궁금해졌다.
“시안 동생? 책 좋아해?”
“아, 저요? 하하! 엄청 좋아하죠. 책은 정말 위대한 발명품이에요.”
“흐응… 독서광인가 보네.”
“아니요? 이게 있으면 기억을 안 해도 되잖아요. 하하하! 저에게 딱이죠.”
‘…아하.’
스틸은 이제부터 이 아이를 너무 복잡하게 생각 안 해도 되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동생, 책 그만 보고 저기 의식 봐 봐. 이제 시작하나 보다.”
“오호.”
그 말에 시안은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앞을 바라보았다.
탈릭 스톤에서 천천히 새어 나오던 엑사르는 어느새 엄청난 속도로 탈릭 스톤에서 뽑혀 나와 제단으로 맹렬하게 흘러들고 있었고, 제단은 그 엑사르를 모조리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면서 기묘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윽고 제단이 쿠르르르 하고 떨리더니…
“…아무 일도 없는데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더니……. 하지만 제법인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제단에서 퍼져 나오는 기묘한 엑사르의 흐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 흐름은 육지 쪽으로는 전혀 흐르지 않고 지하로 끊임없이 흘러들더니 어딘가를 거쳐 바다의 물을 매질로 하여 끝없이 끝없이 바다로 퍼져 나갔다.
지하에 무슨 특별한 구조가 존재하는지 엑사르는 끊임없이 흘러들어갔고, 절벽 아래쪽의 바다에서는 기묘한 울림이 울리며 바다 쪽으로 퍼져 나갔다.
“흐음… 저걸로 하리쟌들을 쫓거나… 그런 작용을 하나 보네요. 저야 뭐, 법도 쪽은 문외한이라 알 수가 없지만.”
“흠… 저 울림이 키아란까지 갈 것 같지는 않은데…….”
그 똑똑하다던 법도사들이 달려들었음에도 무슨 작용을 하는지 밝히지 못하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이 조사 자체를 하지 못하게 막았다.
제단의 구조가 조사를 하려면 분해를 해야 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한 번은 용감한 법도사 몇몇이 몰래 뜯어내고 연구를 하려다가 마르가란의 치안대와 상인들, 시민들에게 걸려 호되게 곤욕을 치른 뒤 제단에 대한 연구는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애초에 워낙 튼튼한 구조인지라 뜯지도 못하였지만 만약 뜯었다가 저 제단이 작동을 멈추게 된다면… 마르가란은 그날로 망하는 것이다.
관광지로서의 수입이 크다고 하지만 그건 무역 수입에 비하면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한다.
대법도회도 그 정도 배상금을 물어주면서까지 연구를 할 생각은 없었기에 이제까지 제대로 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이후로 마르가란을 지탱하는 제단의 수수께끼는 여전히 비밀로 남아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현재로도 제단은 충분히 마르가란을 지탱해주고 있으니까.
아니, 오히려 비밀이 밝혀지지 않았기에 더 좋았다. 라가오포라는 오직 이곳, 마르가란에만 있었으니까.
“에이… 시시하네. 난 무슨 라가오페 빔 이런 게 키아란까지 쭉 뻗어나가면서 경로에 있는 모든 하리쟌들을 태워 죽이는 줄 알았구먼…….”
“…그건 스틸 양도 못 하지 않습니까.”
육로에 비해 가깝다는 것이지 절대적인 거리가 가까운 것은 아니다.
라가오포라는 직선거리가 아니었고 그렇기에 1,000킬로미터를 가볍게 넘는다. 어떤 대이적이라도 그 정도의 사정거리는 가지지 않는다.
아니, 한 가지가 있기는 하다.
그 예전 제국을 멸망시켰던, 이적.
제국을 지탱하던 열다섯의 대법도사가 제국의 모든 힘을 모아 실행했다는 그 이적은, 단 한 방에 그 드넓던 제국의 영토를 박살 내 버렸다.
그리고 원래의 목적대로 그 안으로 침입해 들어왔던 모든 하리쟌들과 칼-굴족도 모조리 녹여버렸다.
그야말로 궁극의 극대소멸이적.
하지만 그건 전설로만 전해져 오기에 누구도 확인하지 못했다.
그걸 증명해 줄 제국민도, 그리고 그 이적을 실행한 대법도사들도 모조리 죽었기 때문에.
심지어 요즘 학회에서는 그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가설이 힘을 얻고 있다.
도대체 어떤 기술과 얼마만큼의 탈릭 스톤, 그리고 어느 수준의 법도사들이 참가해야 하는지 도무지 상상도 가지 않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법도 수준이 제국 시절을 따라가고 있지 못하다고는 하지만 그런 것을 감안하여도 불가능한 수준이라는 것이 현재의 엑자일-대법도회의 판단이다.
“흠? 동생도 못 하잖아? 애초에 그런 걸 누가…….”
“전 할 수 있는데요?”
“뭐! 진짜?”
시안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자 스틸은 깜짝 놀랐다.
아무리 이 녀석이라고 해도 한계가 있을 텐데 여기서 키아란까지 검으로 바다를 두 쪽을 내는, 그런 짓까지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건 이미 초인도 무엇도 아니다. 초인은 말 그대로 인간을 넘었다는 뜻이지 신이라는 뜻이 아니니까.
그 사이에는 엄연한 벽이 존재한다.
‘미친… ‘길’이 그런 거에 특화되어 있는 건가…….’
스틸은 말도 안 되는 이적을 행할 수 있다는 시안의 말에 놀라고 말았다.
“거짓말입니다.”
“…….”
“하하. 순진하시군요, 스틸 양. 아까 거짓말에 대한 복수입니다.”
내가 순진한 게 아니라 그런 게 가능해 보일 정도로 강한 네가 비정상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스틸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 뒤로 이어진 의식을 모두 구경하고 나니 어느덧 해가 지고 있었다.
오늘의 의식은 축제의 시작에 불과하다. 내일부터는 더 성대하게 라가오페 축제가 열리게 된다.
제단에서 퍼져 나가는 저 파동은 앞으로 열흘간 더 계속된다고 한다. 그 파동이 모조리 끝날 때까지 축제를 즐기는 것이다.
“그만 들어가자고, 동생. 후후. 더 관광할 것 없지? 빠르게 가자.”
“그러지요. 아주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시안과 스틸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오늘 점심은… <라잔느의 향기>라는 집이었지요?”
시안은 지도를 뒤적거리며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인 <마르가란 맛집 10선> 중 하나인 라잔느의 향기로 향했다.
마르가란에서만 나는 특제 해산물을 키아란의 향신료, 라잔느로 맛을 낸 집으로 유명한 이 음식점은 가격이 상당히 비싼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맛 때문에 귀족들 사이에 인기가 높아 예약을 하지 않으면 먹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미 별장의 관리인들이 모두 예약을 해 놓았기에 시안과 스틸은 여유 있게 걸어갔다.
“저도 어디 아는 아이 하나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 편하군요.”
“후후. 하나 있으면 편리하긴 하지.”
‘흠… 아는 아저씨는 있는데…….’
나라샤 아저씨를 떠올렸지만 그렇게 노골적으로 사소한 부탁을 하기에는 민망했던 터라 금방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들이 향하고 있는 라잔느의 향기는 마르가란의 북쪽, 도시 중심에서 해변이 잘 보이는 지대에 위치해 있었기에 더욱 인기가 높았다.
식사를 하며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마르가란의 정광은 이미 귀족이나 상인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다.
라잔느의 향기를 가려면 언덕에 형성되어 있는 시장을 지나가야 하기에 시안과 스틸은 조금 일찍 나온 김에 시장에서 군것질을 하며 올라갔다.
시장을 지나며 군것질에 집중하고 있는 시안의 눈에 사람들이 무언가를 둘러싸고 있는 듯한 모양새가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이 그곳의 무언가를 피해서 서있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었다.
무시하고 싶었지만 식당으로 가려면 그 길을 지나야 했기에 사람을 헤치며 지나갔는데 어디서 본 익숙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자식들… 헉헉. 이제 도망칠 곳도 없겠지? 감히 우리 동료를 건드려?”
“웃기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먼저 제 동료를 추행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자식이… 그렇다고 사람을 그렇게 두들겨 패? 흐흐… 팰 때는 좋았겠지만 이제 반대쪽 기분도 느껴봐야지?”
시안은 궁금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살폈다.
신기하게도 포위한 측이나 포위된 측이나 시안에게 익숙한 얼굴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