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33화 (34/81)

<33. 영웅을 꿈꾸는 자>

어제 스틸 양에게 가벼운 장마사지를 시술 받은 그 친구들이었다.

잘려서 그런지 대낮부터 삶의 여유를 얻은 그들은 몸도 성치 않을 텐데 여럿이서 한 청년과 여성을 둘러싸고 있었다.

‘음? 저 사람 어제 그 사람 아닌가?’

포위되어 있는 청년은 어제 로쿰을 다루던 그 청년이었다.

사라졌다더니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청년은 손에 들고 있는 몽둥인지 검집인지 모를 녀석으로 두세 녀석 때려눕힌 모양이었지만 결국에 따라잡혀 포위당한 모양이었다.

그 뒤에는 스무 살이 조금 넘어 보이는 여성이 분을 이기지 못하는 표정으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손에는 조그마한 단검을 하나 들고 있는 것을 보니 보통의 여염집 여성은 아닌 것 같았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저자들이 저 여성을 어떻게 해보려고 하다가 시비가 붙은 모양이었다.

실제로 여성이 꽤나 귀엽게 생겼으니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청년과 여성은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더 이상 빠져나갈 구석이 없어 긴장된 표정으로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야, 이것들아! 구경났어? 썩 꺼져! 당장… 흐억!”

“뭐야. 너 왜 그래… 흐악!”

쫓아오느라 주위를 살피지 못하다 여유가 생겼는지 이제야 주위를 살필 여유가 생긴 그들은 사람들을 쫓아내다가 그제야 뒤에서 이 사건을 보고 있는 시안과 스틸을 발견하였다.

시안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여러분들도 참 근면성실하게 사회악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시는군요. 대단합니다. 마르가란 치안대의 존재 이유를 만들어 주시는 건가요?”

“흐어… 흐어어…….”

“그러게. 지금쯤 창자 꼬인 게 아직 덜 풀렸을 텐데……. 후후후. 동생, 거봐. 어제 제대로 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고.”

“그러게요. 저도 저분들이 저렇게 맷집이 좋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하였습니다.”

라-반더의 구타를 당한 지 하루 만에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니… 그랑-반더도 저러진 못할 것이다.

시안은 저들의 의지가 굉장히 강인하다고 느꼈다.

“…크윽.”

녀석들은 스틸을 보자마자 어제의 악몽이 생각나는지 배를 움켜쥐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본 여자는 포위망에 빈틈이 생기자마자 잽싸게 스틸의 뒤로 가서 숨었다.

“야! 라므란! 너도 이리 와!”

제 딴에는 저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스틸이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 뒤에 있으면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숨은 모양인데 번지수를 아주 잘못 찾았다.

“뭐, 알아서 하라지. 나랑은 이제 상관없으니까. 가던 길 가자. 식당 거의 다 왔지?”

“그러지요.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어? 어어어어? 어? 그냥 가면 어떻게 해요? 안 돼!”

그 여자는 갑자기 떠나가려고 하는 스틸의 허리를 부여잡았다.

‘헉…….’

그 광경을 보던 시안은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저런 용감한 짓을 하다니…….

‘뭐야, 이거. 사람 몸 맞아?’

여자는 부드러울 줄 알았던 여자의 허리를 감았을 때 무슨 강철 기둥을 만지는 느낌이 들자 놀라서 자신이 껴안은 허리를 보더니 스틸의 몸을 위 아래로 쳐다보기 시작하였고…

이윽고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는 스틸과 눈이 마주쳤다.

풀썩.

“히이익! 히… 히이익!”

여자는 스틸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그 자리에서 뒤로 쓰러져 버렸다.

‘어이구… 그래도 오줌 안 싼 게 어디야.’

시안은 그걸 보더니 그렇게 될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애초에 스틸 양을 이용하려고 한 게 큰 실수이다.

스틸은 그런 여자를 보더니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쪼그리고 앉았다지만 워낙 체구 차이가 컸기에 여성은 어른 앞의 아이처럼 보였다.

“흐흐흐… 개미… 아니, 아이야. 남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댄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아니?”

“으아… 으아아아…….”

여성은 이미 공포에 질려 정신이 없었는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암살을 시도하겠다는 뜻이란다. 그런 면에서 너는 아주 잘못했다고 할 수 있지.”

‘도대체 어느 환경에서 살아오셨길래 그런 결론이 나오는 겁니까…….’

시안은 옆에서 한숨을 쉬었다.

저 여성이 껴안고 자폭을 시도했어도 스틸 양의 몸에는 흠집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남의 몸에는 항상 손대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라고 이 어르신이 아주 따끔한 교훈을…….”

“…스틸 양, 그러다 진짜 오줌 싸겠습니다.”

“…….”

“그쯤 하고 가시지요. 식사에 늦겠습니다…….”

“에잉, 동생은 너무 착해서 탈이야.”

저러다 어떻게 될지 몰랐기에 시안은 과잉방어를 막기 위해 중간에 중재를 하였고 스틸은 흥이 깨졌는지 투덜대며 일어섰지만 뭔가 아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스윽.

먹잇감을 찾는 듯한 그 표정을 본 용병 패거리는 기겁을 하였고, 라므란이라는 청년과 여성을 놔두고 허겁지겁 도망가고 말았다.

“…후. 정말 감사드립니다.”

“…….”

비록 자신의 동행이 험한 꼴을 당하긴 했지만 저들에게 둘러싸였으면 더 안 좋은 꼴을 당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라므란이라는 청년은 스틸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결과적으로는 도와준 꼴이 되어버린 것이 스틸은 영 마음에 안 드는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스틸 양, 식사하러 가시지요.”

시안은 스틸 양이 더 심기가 불편해지기 전에 식당으로 이끌었고 둘이 떠난 후 라므란이란 청년은 동행인 여성을 챙겨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야심한 밤, 작동하고 있는 제단 쪽으로 접근하는 기묘한 인영 둘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제단 근처의 한 조그마한 언덕으로 향하고 있었다.

제단의 경비야 삼엄했지만 제단에서 몇백 미터 떨어진 해변가의 작은 언덕까지는 신경 쓸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인영 둘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야, 라므란! 어서 와.”

야심한 밤, 여성이 라므란이라는 청년을 재촉하였다.

“리리아… 위험해. 조심해.”

“너 내 직업이 뭔지 잊은 거야? 이 정도야, 뭐. 훗!”

그러면서 리리아라고 불린 여자는 바위 위를 가볍게 기어 올라가더니 훌쩍 뛰어내렸다.

라므란은 못 말리겠다는 듯 그 뒤를 따라 힘들게 바위를 넘어갔다.

“그런데… 진짜 여기 있는 게 맞아?”

“아마도……. 이제까지는 모두 그자의 말이 맞았으니… 준비도 거의 끝났어. 오늘은 그냥 살펴보러 온 거니 어서 살피고 가자.”

“알겠어 알겠어. 히히.”

라므란은 앞서 걸어가는 리리아를 보며 고맙다는 표정을 짓곤 말했다.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 리리아. 바쁠 텐데.”

리리아는 가지고 있는바 능력 때문에 꽤나 인기 있는 모험가였다. 자신과는 달리.

우정을 생각하여 여기까지 와 준 리리아가 라므란은 너무나 고마웠다.

“히히. 우리 사이에, 뭘. 그리고 이거 공짜 아닌 거 알지? 톡톡히 갚아야 한다. 명심해.”

“후후. 당연하지.”

“후… 그나저나 낮에는 위험했어. 용병치고는 수준이 상당하던데. 뭐… 차라리 그 녀석들이랑 치고받는 게 나았을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야.”

소녀의 직업은 전투에 특화되어 있지 않기에 오전의 그 상황은 위험한 상황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눈을 마주친 그 여자를 떠올리니 차라리 용병들과 치고받는 것이 수백 배는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기에 리리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리리아를 보던 라므란 역시 낮의 일을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예전부터 느끼고 있던 것이지만 자신은 엑서인데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약했다.

그렇기에 어서 이곳에서 목적을 달성하여야 한다.

라므란.

마르가란 근방의 작은 어촌마을에 살던 그는 평범한 꼬맹이에 불과했다.

꿈 많고 호기심 많고 세상에 대한 모든 것이 궁금한 그런 평범한 아이.

그러면서 꿈을 키웠다. 자신도 언젠가는 유명한 영웅들처럼 대륙을 누비고 싶다고.

하지만 현실은 지극히 냉정했다. 평범한 꼬마인 자신은 숨겨진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많은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의 집안은 지극히 가난한 편이었다.

그렇기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도와 시장에서 잡일을 도우며 하루하루를 평범하게 보내고 꿈만 키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라므란은 멍하니 바다를 쳐다보던 중 자신의 앞을 지나다니는 물고기를 보았다.

<흠… 야, 저리가 봐, 저리.>

장난삼아 한 생각이었지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물고기가 자신의 손짓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던 것!

처음에 이 능력을 깨닫게 되었을 때는 너무나도 흥분했다. 드디어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드디어 자신도 평범한 일반인에서 벗어나 대륙을 종횡하는 멋진 모험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라므란은 흥분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능력을 개발하려고 수련에 수련을 거듭했다. 새를 부려보고… 동물도 부려보고… 물고기도 움직여보고…….

이윽고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을 때 라므란은 집을 박차고 나왔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을 얽어매고 있는 너무나도 평범한 현실을 박차고 떠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을 박차고 떠난 그가 현실의 굴레에 다시 묶이게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하! 야, 이거 봐 봐! 호랑이 가지고 공격하는데?>

<크흐흐… 너는 그래도 좀 재미있겠다. 나는 멧돼지랑 놀고 있다고.>

촌구석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세상으로 나와 처음 만나게 된 무장이라는 자들.

그런 반더들의 앞에 자신의 능력은 가히 보잘것없었다.

<아… 그렇게 비둘기로 보내는 것보다는 이런 통신 이적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더…….>

<흠… 박쥐로 정찰이라… 그냥 <관찰>을 사용하면 되는데 무엇하러?>

세상의 법칙을 주물러 이미 현실 세계를 편하게 바꾸어 버린 법도사들.

법도사들이 축적한 지식과 기술은 자신의 가치를 훌쩍 뛰어넘었다. 훨씬 효율적이고 훨씬 더 유용했다.

라므란은 절망에 빠졌다.

자신의 능력 개발도 자체는 낮지 않다. 동물을 스무 기 넘게 부릴 수 있고 전달할 수 있는 명령의 종류도 다양하다.

검술도 어느 정도 수련했다. 자신은 반데르도 어느 정도 다룰 수 있는 특이체질이었다. 강하지는 않지만.

하지만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없다. 로쿰 쇼 같은 흥미를 돋우는 쇼 말고는…….

한동안 세상을 떠돌며 눈앞의 리리아 같은 동료도 모으고 모험을 지속했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한계만 명확히 깨닫게 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 이후로 자신감을 모조리 잃어버린 후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진 자신은 동료들을 떠나 다시 고향, 마르가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의 특기를 살려 동물을 다루는 쇼를 진행하였다.

수입 자체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저런 쇼 같은 경우는 귀족들에게는 인기가 많았기에 돈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생활은 모험 시절보다 훨씬 더 풍요롭고 평안했다. 더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좋은 집도 구했다.

하지만 라므란은 전혀 만족할 수 없었다. 여기서 머무르면 적응하게 될 줄 알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자신은 이런 곳에서 썩어가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키워온 꿈은 이곳에 머무르면서도 전혀 식지 않고 점점 더 마음속에서 응어리지고 커지기만 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안주하던 그를 얼마 전 누군가가 찾아왔다.

절망에 빠져가던 그에게 그자는 희망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날을 기점으로 자신은 다시 꿈을 불태울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생각보다 기회는 가까이에 있었다.

자신은 홀연히 찾아온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절대 없었다.

반드시 꿈을 이루고 말리라 다시 한 번 다짐한 라므란은 리리아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 ☆ ☆

<도전이 없다면 얻는 것은 없다. 하지만 명심하라. 도전이 없으면 잃는 것도 없다. 기회와 위기는 동전의 앞뒤 면과 같아 어느 면을 뽑을지는 너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우샤란을 안정적으로 운영한 명재상, 리가체프

☆ ☆ ☆

어느 날 나타난 그는 신비롭지만 너무나 수상한 사람이었다.

온몸에 망토를 두르고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것이 딱 보아도 무언가 정체를 감추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람.

평소 같으면 단호하게 거절하였을 것이다.

비록 수준은 낮았지만 모험가로 돌아다니면서 정체 모를 것을 가까이하면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으니.

하지만 이상하게도 라므란은 그 사람과의 대화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리고 대화를 하면서 몰입은 점점 더 심해졌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주위 사람에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적이 없었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착실하게 현실에 안주해 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된 일인지 자신의 안에 응어리진 불만을 알고 찾아왔다.

그리고 물었다.

‘너는 네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

내가 누구인지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이 어떻게 존재한단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어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소 흥분된 상태로 대화를 진행하였다.

그러더니 그는 한마디 더 던졌다.

‘역시 모르고 있구나.’

그러면서 라므란, 자신도 몰랐던 자신에 대해 말해주기 시작하였다.

그 말을 들으며 라므란은 자신의 안에서 사그라지던 불꽃이 다시 타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괴인의 의미 모를 친절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흥분하는 자신을 보며 미소 짓던 그자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가르쳐 주었다.

‘이 지도를 가지고… 예전 동료인…….’

라므란은 처음에는 눈앞의 이 정체 모를 자가 누구인지,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이야기를 들으며 그런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음을 점점 더 깨닫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도 드디어 길이 나타났다는 것.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의 희망을 실천할 방법은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도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건 오로지 자신만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괴인도 자신을 찾아와 제안을 한 것이리라. 아무리 신비로운 그라도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건 자신만이 가능했다.

사실 너무나도 수상한 구석이 많았다. 괴인은 이것저것 이유를 붙여 자신을 안심시켰지만 불안한 구석이 많았다.

그렇기에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결국엔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여차하면 미친놈의 헛소리였다고 해도, 그리고 설령 이자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라고 하여도 자신은 이 기회를 결코 놓칠 수 없었다.

인생을 바꿀, 꿈을 이룰 마지막 기회이니…….

그렇게 생각하고 실행한 지 몇 달. 이제 거의 다 되었다.

리리아와 오늘 와서 확인한 결과 준비는 거의 완료되었다.

얼추 이틀 후면 모든 것이 마무리가 되리라.

그때를 생각하며 라므란은 흥분에 몸을 떨었다.

자신도 영웅이 될 것이다.

☆ ☆ ☆

“시안 동생.”

“네. 말씀하시지요, 스틸 양.”

축제를 구경하고 언덕에서 멍하니 누워 마르가란을 내려다보는 시안에게 스틸은 말을 걸었다.

“시안 동생은 수련 안 하는 거야?”

“흠… 수련이라니요?”

“그냥… 같이 다니는데 한 번도 수련하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라-반더들이 속세에 잘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쪽에 관심이 없어서도 있지만 더 큰 것에 관심이 있는 이유가 크다.

도전할 것을 찾는 것.

그리고 그중 가장 찾기 쉽고 가장 매력적인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방금 전의 자신을 뛰어넘고 끊임없이 강해지는 것은 라-반더가 된 자들에게는 너무나 매력적이다.

자신과 동급의 상대, 예를 들어 같은 라-반더나 초인, 여섯 뿔의 하리쟌을 찾아 싸우는 것도 좋지만 그건 너무나도 힘들기 때문이다.

서로 숨으려고 작정하면 절대로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여섯 뿔의 하리쟌은 그 넓은 대수림에서도 흔하지 않다.

스틸도 지금은 더 관심 있는 대상인 시안이 나타났기에 수련을 쉬엄쉬엄하고 있는 것이지, 라그랑 지방에 있는 동안은 정말 하루 종일 수련만을 반복했다.

“음… 한계예요, 한계.”

“한계? 그걸 어떻게 알아?”

“스틸 양 그랑-반더였던 적이 있지요?”

“당연하지.”

“라-반더로 넘어가기 전에 느낌이 어떠셨어요?”

“그거야… 허? 동생 설마?”

“네, 생각하시는 그겁니다.”

‘이 녀석… 저번에 바다 쪼갤 수 있다는 그거 거짓말 아니라 진짜 할 수 있는 거 아냐?’

스틸은 진심으로 놀랐다.

익스퍼트 초입과 익스퍼트 마지막의 벽은 가깝다. 노력만 하면 누구나 갈 수 있다.

마스터 사이의 간격은 그것보다 조금 더 늘어난다. 하지만 일단 마스터에 올랐다면, 죽을 때까지 노력하면 그랑-반더의 벽을 볼 수 있기는 하다. 물론 넘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이지만.

그랑-반더 정도 되면 처음과 끝이 너무나 멀어진다. 그랑-반더에 올라 평생 수련해도 벽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절망에 빠진 채로 수명이 다하는 그랑-반더가 대다수이다.

벽을 보기만 해도 정말 운이 좋은 것이다. 실제로 벽을 마주친 그랑-반더의 대부분이 기쁨의 환호성을 지른다.

하물며 라-반더라니.

자신은 경지에 오른 후 170년간을 단련해도 벽이 보이지 않았다. 벽은커녕 계속계속 강해지는 것이 라-반더의 경지가 마지막인 줄 알았다.

그런데 벽이 있다는 건…

“훔… 그 연구가 사실이었어? 라-반더 다음에 다른 경지가 있다고 하는…….”

“연구라니요?”

“그… 예전에 제국 시절에 연구된 기록을 대법도회에서 찾아 발표한 적이 있었거든… 라-반더 다음에 경지가 있을 거라고…….”

어디서, 누가 연구한 기록인지는 모르지만 그 기록물은 아주 소중히 보관되어 있었다.

하지만 모조리 허튼소리 취급당했다. 책상놀음 하는 녀석들이라 라-반더의 위대함을 모른다고.

애초에 연구할 대상도 너무 부족했다. 천년 동안 열둘이 나온 라-반더를 녀석들이 무슨 수로 연구한단 말인가.

“호오… 그 사람들 똑똑하네요.”

역시 세상에 똑똑한 사람들이 많다고 찬사를 날리는 시안을 보며 스틸은 의문이 하나 들었다.

“그러면… 그 벽을 넘고 싶거나 그러지 않아? 아예 넘을 방법이 없어?”

그러자 시안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툭 하고 내뱉었다.

“아니요? 방법도 알아요. 하면 될걸요?”

“뭐! 근데 왜 안 해!”

스틸은 흥분해서 크게 소리쳤고 그 바람에 주위에 심어져 있던 잔디와 작은 풀들이 모조리 뽑혀 날아간 바람에 시안은 그걸 모조리 뒤집어썼다.

“…퉷퉷…….”

“아… 아니… 미안… 그래도 궁금하잖아. 도대체 왜 안 하는 거야?”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방법이 있다니!

스틸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단순히 자신이 그 방법을 알아두고 나중에 그 벽을 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애초에 자신이 그 벽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위대한, 자신이 존경할 만한 ‘신’의 탄생을 보고 싶었다.

천년 인간의 역사에 아무도 달성하지 못했던 그 경지를 달성한 자를.

“하… 그게…….”

그리고 시안은 주저리주저리 자신의 사정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죽을 위기를 넘겨야 한다고?”

“네.”

“…동생은 한 번도 죽을 뻔한 적이 없어?”

스틸 자신은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라-반더에 이르기 전까지 죽을 뻔한 적은 셀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아마 다른 라-반더도 비슷할 것이다. 그 정도의 재능과 강함을 가진 인재를 세상은 절대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다.

크기 전에 밟아 죽이거나 이용하려고 들지.

하지만 시안은 완전 특별한 케이스였다.

“하하. 누가 저를요?”

“…….”

스틸은 속으로 살짝 재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뭐… 죽을 위기가 찾아온다면 모르겠지만 제가 찾아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그래도…….”

너무나 맞는 말이긴 한데 왜 이리 아쉬운지 모르겠다.

“스틸 양 표정이… 제가 죽을 정도로 위험해졌으면 좋겠다는 표정인데요.”

“아냐, 아냐! 하하… 하하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애써 부인하는 스틸이었지만 이미 표정에서 눈치챈 시안은 못 말리겠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뭐… 애초에 그런 일이 생기면 도망갈 거지만… 그래도 혹시 제가 도망도 못 갈 정도로 위험해지고 죽을 위기가 오면… 도망가세요.”

“어머! 지금 나 걱정해주는 거야, 동생? 후후후.”

스틸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방해됩니다.”

“…….”

어디 가서 종결자 취급을 안 받아 본 적이 없는데 이런 대접을 받자 굉장히 신선했다.

<파괴의 여신>이니 <타란의 재앙>이라는 호칭이 붙어있던 자신을 이렇게 대하다니.

하지만 동시에 이해는 갔다.

벽에 막힌 녀석이 위험할 정도라면… 자신은 반드시 죽을 것이다.

이것도 나름 녀석이 나를 걱정하는 방식이라고 합리화하자 기분이 좀 나아진 스틸은 그래도 오늘 이 녀석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 ☆ ☆

“흐음… 완성된 거야?”

리리아는 눈앞에서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자신의 옛 동료, 라므란을 보며 물었다.

라므란은 어제 다녀왔던 작은 언덕 앞에 서서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

라므란은 대답할 정신이 없는지 더더욱 정신을 집중했고, 이윽고 작은 변화가 그들의 앞에 일어났다.

언덕의 한 부분이 들썩거리기 시작한 것.

작은 균열은 점점 더 그 크기를 키우더니 어느새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언덕의 균열을 뚫고 무언가가 라므란을 향해 튀어나왔다.

끄륵. 끄르륵. 끄륵.

단단한 언덕을 뚫고 나온 것은 두더지를 닮은 모양의 동물이었다.

물론 두더지는 아니었다. 두더지는 저렇게 어른 허벅지만큼 크지 않으니까.

“이 녀석들을 부려서 땅을 판 거구나. 언제 봐도 신기해.”

동물을 부리는 라므란을 보고 리리아가 신기하며 살펴보았다.

“그래. <쿠쿠란>이라는 녀석들이지. 땅속에서 사는…….”

“귀엽게 생긴 녀석들이네. 그러면 이 통로가… 저기 저 제단 아래까지 연결되어 있는 거야?”

라므란의 제어가 풀리자 허겁지겁 도망가는 녀석들을 리리아는 신기한 듯 쳐다보다가 목적이 생각났는지 저 멀리 제단을 보며 라므란에게 물었다.

“그렇지. 다행히도 이곳에서는 쿠쿠란을 찾기가 쉬워서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어.”

평소 밭을 모조리 망가트리고 심하면 둑의 보를 터트려버리는 녀석들이기에 농촌지역에서는 사람들은 눈에 띄는 족족 이 녀석을 잡아 죽였다.

하지만 이곳, 마르가란에서는 농업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라므란은 이 녀석들의 숫자를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었고, 훨씬 더 수월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제단으로 접근해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제단의 지하.

하지만 제단의 경비는 삼엄하기 그지없다.

예전에 한 정신 나간 법도사들이 제단을 부수고 연구를 하려고 한 뒤로 항상 경비를 강화한 것이다.

그 이후에도 마르가란의 발전을 시기한 주변 영지들이 때때로 제단을 부수려고 들었기 때문에 제단의 근처는 오히려 마르가란의 영주성보다도 더 삼엄하게 지켜지고 있다.

이곳의 제단이 부서지면 이곳의 해로는 더 이상 매력을 잃고 많은 무역물자들이 다른 귀족령의 육로를 통해 이동하게 될 것이기에.

제단의 주변에는 온갖 탐지 기구들이 설치되어 있어 수상한 반데르나 엑사르의 흐름은 바로 감지해 낸다.

그리고 그 근처에는 항상 마르가란의 치안대와 기사단이 교대해가며 제단을 지킨다.

그렇기에 제단까지 접근하기 힘들다.

하지만 자신의 조종능력은 일단 지시를 내려놓으면 엑사르의 작용이 크게 없기 때문에 무리 없이 제단의 지하까지 땅굴을 연결할 수 있었다.

라므란은 긴장되는지 숨을 크게 들이켰고, 이윽고 리리아를 바라보았다.

첫 단추는 잘 꿰어졌다.

이제부터는 자신의 동료를 믿어야 한다.

“자… 들어가자고, 리리아.”

“응. 히히! 오랜만이네.”

그리고 둘은 언덕에 뚫린 동굴을 향해 사라져갔고, 그 자리는 라므란의 지시를 받은 쿠쿠란들에 의해 메워졌다.

마음이 급했던 라므란은 하루빨리 통로를 완성하고 싶었다.

그랬기에 쿠쿠란에게 땅굴을 파라는 명령을 내릴 때 정말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굴만 파라고 했기 때문에 굴을 통과하는 동안 리리아와 라므란은 상당히 불편한 자세를 감수해야 했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지나자 라므란과 리리아는 좀 더 넓은 동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동굴은 꽤나 넓었다. 애초에 쿠쿠란들이 판 동굴이 아니라 원래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동굴이기 때문이다.

“으아… 허리야. 야, 라므란, 너 무슨 굴을 이렇게 파놓은 거야… 나 허리 나가면 네가 업고 다닐 거야?”

“쉿… 쉿… 리리아.”

소리가 지상까지 들릴 리는 없었지만 괜히 불안했기에 라므란은 리리아를 보며 조용하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그나저나… 내가 여기서 뭘 해주면 되는 거야?”

“음… 여기서부터 길을 찾아가야 돼.”

일단 괴인이 말한 대로 동굴에 도착하기는 했지만 이제 첫 단계를 통과한 것에 불과하다. 제단 아래까지는 아직도 많은 길이 남아있었다.

두 번째 단계는 바로 이 동굴을 뚫고 지나가는 것이다.

웬만하면 제단 바로 아래까지 땅을 파 들어가고 싶었지만 쿠쿠란으로 더는 무리였다.

지반이 단단한 암석이기에 부드러운 해변가의 지반과는 달리 쿠쿠란으로 길을 뚫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괴인은 동시에 고민하는 라므란에게 추가적인 정보도 주었다.

그 암반층에는 동굴이 형성되어 있다고…….

제단 아래의 언덕 깊숙이 위치한 동굴은 오랜 시간,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이었다.

괴인은 어떻게 이런 것까지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그러한 정보를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 복잡한 동굴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뚫을 수 없을 것이란 것까지…….

그렇기에 여기서부터는 자신의 옛 동료인 리리아가 필요했다.

“리리아, 부탁해.”

“후후… 알겠다고, 라므란. 이런 거야 내 전공이지.”

그리고 리리아는 자신감에 찬 표정으로 라므란의 앞으로 나섰다.

“후… 라므란 너 진짜… 여기서 뭐 안 나오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리리아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 옆에서 라므란도 잔뜩 미안하단 표정을 지으며 리리아를 바라보았다.

이 복잡한 동굴은 단순히 복잡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선객이 이 단단한 지반의 자연동굴에 살고 있었다.

아니, 이 지반 자체가 그 녀석들이 파놓은 것이었다.

<로룬-타크>

광물을 파먹고 사는, 큰 개만 한 이 개미들은 빛을 극도로 싫어하기에 일반인들은 그 정체를 잘 알지 못한다.

지하에서 광물을 파먹고 해를 두려워하여 지상 근처로는 가지도 않기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예전에 모험을 하며 한 번 이 녀석들을 만난 적이 있던 라므란과 리리아는 금방 이 녀석들이 동굴에 존재하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렇게 사람도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크게 굴을 파는 녀석들은 흔치 않으니까.

그리고 극도로 조심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 지하에 사는 녀석들은 굉장히 흉폭하다. 하나하나는 약하기에 하리쟌 등급까지 받지는 않았지만 동굴 안에 들어온 침입자들을 엄청난 숫자로 몰아서 공격하기에 매우 위험하다.

게다가 여왕의 명령을 받기 때문에 라므란의 능력도 먹히지 않는다.

여기서 리리아의 능력이 빛을 발했다.

엑서인 리리아의 능력은 <길잡이>이다.

엑서 중에서는 상당히 흔한 능력 중 하나이다.

머릿속으로 강렬하게 목적을 떠올리며 앞으로 나아가면 어느 선택을 하는 것이 유리한지 알 수 있게 되는 능력 ‘길잡이’

이 능력을 가지게 된다면 결정적인 판단의 순간에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이로울 것인지 본능적으로 아는 수준이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게 된다.

무수한 정보를 조합하여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본능적으로, 느낌과 엑사르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다.

길잡이의 능력은 흔하긴 하지만 그 수준은 천차만별이라 최고 수준의 길잡이 능력을 지닌 엑서들은 전장이나 국가에서 매우 귀한 대접을 받았다.

리리아는 그 정도로 수준이 높지는 않지만 모험가들 중에서는 상당한 편이었고 다른 자들은 믿을 수 없었기에 리리아를 불렀다.

과연 리리아는 자신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발휘하며 개미들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안내하며 자신을 제단의 바로 아래 동굴로 데려다주었다.

하지만 이 길잡이 능력이라는 것이 상당한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에 항상 발동하기에는 무리가 있는데, 오는 길 내내 정신을 집중한 리리아는 완전 녹초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후아! 다 왔다!”

리리아는 어느 순간 큰 한숨을 내뱉더니 지쳤다는 듯 풀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본 라므란이 기겁을 했다.

“어, 어어! 그러면 개미들이 몰려오지 않아?”

그러자 리리아가 안심하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걱정 말라고. 내 판단에는 여기는 안전해. 아마 개미들이 접근하지 못 할 거야.”

그 말에 라므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과연 자신들이 도착한 곳은 이제까지 지나온 동굴과는 조금 달랐다.

한 면이 30미터는 되어 보이는 넓은 직사각형 모양 공간의 벽면은 누가 보아도 개미의 턱으로 깎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투박하지만 강렬한 힘이 한순간 작용하여 파낸 기색이 역력했다.

개미들은 여기까지 파 들어오긴 했지만 무언가가 두려운 듯 이 방을 더 이상은 파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 무언가가 아직 존재한다면 개미들은 이곳까지는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직사각형 공간의 가운데에는 커다란, 직경이 족히 10미터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둥근 모양의 기둥이 동굴의 천장을 뚫고 아래로 박혀 있었다.

‘이 기둥은…….’

어디서 본 것 같은 모양새이더니 제단의 윗부분으로 솟아 나와 있는 기둥이 틀림없었다.

매 해 라가오페 축제 때마다 항상 이 기둥의 윗부분에 사람들이 탈릭 스톤을 쌓아 놓고 의식을 진행하였기에 마르가란에서 오래 살아 온 라므란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무런 문양도 없이 제단 위로 삐죽 솟아나와 있던 윗부분의 기둥과는 다르게 아래에는 무언가 기묘한 선이 새겨진 채로 끊임없이 푸른빛이 그 선을 지나다니고 있다는 것.

그리고 위로부터 내려온 기둥은 땅바닥에, 아니 정확히 말하면 동굴 한쪽 면에 고여 있는 바닷물에 담겨 있었다.

거기에 고인 바닷물은 끊임없이 진동하는 기둥에 의해 잔잔하게 떨리고 있었고, 기둥으로부터 나온 파동은 바깥의 바다로 연결되어 있을 것이 분명한 수면 아래의 통로를 통해 끊임없이 바깥 바다로 새어나가고 있었다.

‘이 기둥은 뭐지…….’

모르긴 몰라도 바닷물이 이 방을 가득 메우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방은 해수면과 비슷한 높이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제단이 있는 언덕은 여기로부터 수십 미터 위의 언덕에 지어져 있다. 그 정도 깊이에 위치해 있으니 아무도 이 방의 정체를 몰랐으리라.

이런 거대한 기둥이 이렇게 깊숙이 박혀 있다니… 누가 보아도 수상하다.

하지만 라므란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한숨 돌리고 진행해도 되겠지만 마음이 급했다.

눈앞에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줄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하니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잠시 기둥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라므란은 녹초가 되어 쉬고 있는 리리아를 뒤에 두고 천천히 기둥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누가 봐도 기둥으로 가라고 만들어 놓은, 고인 바닷물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천천히 걸어서 건넜다.

기둥까지 걸어가니 아주 작은, 손톱만 한 보석이 박혀 있었다.

거대한 흑색 기둥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구슬.

하지만 푸른색으로 찬연하게 빛나고 있는 구슬의 존재감은 흑색 기둥 못지않았다.

홀린 듯 구슬을 바라보던 라므란은 이윽고 자신의 손끝을 칼로 살짝 그었다.

이 단계를 거치기 위해서는 자신이 필요했다.

정확히 말하면 갓 혈관에서 새어 나온 자신의 생생한 피.

그렇기에 괴인은 자신이 필요했으리라. 그리고 그에게 줄 대가는 자신이 얻을 것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줄 수 있다.

스악!

이윽고 라므란의 손에서 핏방울이 똑똑 떨어지기 시작했고 라므란은 망설임 없이 그 피를 작은 구슬에 가져다 대었다.

쿠르르르르르르르르!

이윽고 기둥 전체에서 기묘한 진동이 일어나면서 라므란의 피를 머금은 밝은 구슬에서 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빛을 보며 라므란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드디어 자신의 손에 들어온다.

위대한 개척자, 라가오페가 후손인 자신에게 남긴 유산이.

☆ ☆ ☆

갑자기 제단 근처에서 진동이 느껴지자 시안과 스틸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제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묘한 파동을 느낀 스틸이 입을 열었다.

“시안 동생, 저 진동 느꼈어?”

“네, 당연하지요. 저거 보아하니…….”

“그래… 저거…….”

스틸이 신기한 표정으로 기둥을 바라보며 입을 열려고 할 때 시안이 먼저 선수를 쳤다.

“보아하니 드디어 폭죽놀이를 시작하나 보군요! 하하하! 그 검은 기둥 안에 뭐가 있나 했더니 폭죽이 준비되어 있었나 봅니다. 이거 기대되는데요.”

“…….”

스틸은 시안을 무시하고 기둥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엑사르의 파동이 주를 이루었기에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좀 더 지켜봐야겠군…….’

거기까지 생각한 스틸은 엄청 기대하는 표정으로 제단을 보고 있는 시안을 질질 끌고 예약해 놓은 식당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 ☆

엄청난 빛이 공간 안을 가득 메운 후 천천히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폭발해 나온 빛에 놀란 리리아는 빛이 사그라지자 기둥 쪽을 보았다.

흠 하나 없던 흑색의 기둥에는 어느새 사람 하나 지나가기에는 충분한 커다란 문이 뚫려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옛 동료인 라므란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그 문을 통해 흑색의 기둥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뭐지?’

기둥 안에 공간이 있자 그것이 신기했던 리리아는 그 기둥 안을 살펴보려고 하였다.

기둥 안을 살펴본 리리아는 그 안이 공간의 넓이에 비해 덩그러니 비어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단지 기둥 안의 공간, 가운데에 작은 기둥 하나가 사람 가슴 높이로 솟아있었고 그 위에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뭐지?’

자세히 살펴보니 왕관처럼 생겼지만 훨씬 투박한 관이 그 위에 있었다.

아무런 특징도 없는 상아빛의, 마치 뼈를 깎아 만든 듯한 관.

‘불안한데…….’

리리아는 그 관을 보며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자 오히려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길잡이 능력의 치명적인 단점이자 장점.

길잡이는 자신의 능력 수준을 넘는 거대한 위험이나 판단할 필요도 없는 정말 사소한 것은 감지할 수 없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는 정말 사소한 것인 이유가 많았다.

자신의 수준은 모험가들 중에서는 제법이었기에 자신이 감지할 수 없는 거대한 위협은 거의 없었다.

저번에 그 위험한 여자를 껴안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안전할 줄 알고 갔는데 너무나 거대한 위협이었기에 자신의 느낌으로는 감지를 못 한 것이다.

이번처럼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다는 것 역시 둘 중 하나라는 뜻이다.

저걸 가져가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거나,

혹은 저걸 가져가면 정말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 벌어지기에 자신의 능력으로는 감지할 수가 없다는 것.

리리아는 너무나도 좋아하는 라므란을 도저히 말릴 수가 없었기에 제발 전자이기를 바랐다.

☆ ☆ ☆

“음?”

“왜 그래, 또.”

리비아스가 수련을 하다 옆의 남자를 보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리비아스는 힘이 너무 약해진 상태여서 지금 상태로는 빚도 못 갚을 처지라 수련을 해서 열심히 예전의 수준을 되찾고 있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음… 아냐… 예전에 하나 두고 온 게 있었거든. 사실 이번에도 그거 가지러 간 거였는데 쉬느라 까먹었어.”

“허… 잘 하는 짓이다. 두고 와? 뭘? 어디에?”

리비아스는 그런 남자를 한심하단 듯이 쳐다보며 물었다.

“마르가란에. 리비아스 너도 오래 살아봐, 기억이 간당간당한다니까.”

“아… 너 그 왕관 말하는 거야?”

“오, 어떻게 알아?”

“네가 처음 봤을 때 그렇게 자랑을 했는데 어떻게 몰라. 그거 써서 지름길 하나 뚫었다며.”

“흐음… 그랬나… 어쨌건… 근데 누가 그거 들고 갔나봐.”

“흠… 그래? 별거 아니었네.”

리비아스는 흥미를 잃었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 벌어지게 될 일은 속세를 떠난 리비아스에게는 별 관심 없는 일이었다.

사실 남자도 관심 없는 건 비슷했다.

하지만…

‘그거 써서 별로 좋을 건 없을 텐데 말이지…….’

이윽고 남자도 그 일을 잊어버렸다. 관은 중요했지만 우선 이번 일이 끝난 다음에 필요하다.

나중에라도 되찾아오면 된다.

당장은 눈앞의 일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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