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34화 (35/81)

<34. 심해의 섬>

시안은 스틸 양과 같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다양한 상점들이 이곳, 아쿨란 거리에서 맛있는 음식을 파는데, 휴양지로 유명한 마르가란에서도 내로라하는 명인들만이 이곳에 한 자리를 얻을 수 있었기에 이곳은 굳이 라가오페 시즌이 아니더라도 많은 여행객들로 항상 붐비는 곳이었다.

시안은 이곳의 명물인 해상 조개구이를 먹으며 섬을 바라보았다.

“흠… 왜 폭죽이 나오지 않을까요.”

“후후. 엄청 기대하고 있었나 보네.”

“뭐… 아니라고는 못 하겠습니다.”

가이드북에는 분명 장관이라고 쓰여 있었기에 기대하고 있었지만 오늘은 아닌 모양이었다.

음식을 먹던 시안은 갑자기 말을 멈추고 해변 방향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해변에 있는 언덕 위의 제단을.

제단의 작동이 멈추려면 아직은 며칠 더 남았다고 들었다.

하지만 제단에서 아래로 흘러들어가던 엑사르가 어느 순간부터 튕겨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던 파동이 어느 순간부터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 ☆ ☆

“오오… 이것이…….”

라므란은 빛이 사라진 후 자신의 눈에 들어온 광경에 감격했다.

가슴까지 올라오는 기둥 위에 놓여 있는 상아빛의 투박한 관.

이 관이야말로 마르가란의 부의 근원, 라가오포라를 몇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지시켜 오던 엄청난 아티팩트이다.

흥분한 라므란은 눈앞의 기둥에서 뽑아낸 상아빛 관을 머리에 썼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제야 흥분한 나머지 그자가 말해준, 잊고 있던 사실이 생각났다.

‘그곳의 유산을 얻게 되면…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피를 묻혀라. 그 관은 라가오페의 후손만이 다룰 수 있기에 그 후손임을 인증해야 하니까…….’

이런 것까지 알고 있는 괴인에게 약간 두려움이 들었지만, 이 관을 얻게 된다면 관계는 역전될 것이다.

라므란은 아직 피가 마르지 않은 손가락을 들어 맺혀 있는 핏방울을 관에 발랐다.

그 순간 상아빛 관이 살짝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붉게 물든 관이 다시 원상태의 색으로 가라앉을 때쯤 기묘한 일이 생겼다.

기둥에서 관으로 흘러들고 있던 기묘한 엑사르의 흐름이 뚝 끊긴 것이다.

동시에 관에서 기둥 전체로, 기둥 전체에서 바다로 흘러들고 있던 묘한 파동도 뚝 하고 그쳐버렸다.

‘음……?’

이런 건 그자도 말해주지 않았다.

진동하던 기둥이 별안간 조용해지자 그 넓은 방 전체에 조용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라므란은 왠지 기분이 나빠져 손에 든 관을 쓰지도 못한 채로 리리아를 바라보았다.

만약 이 판단이 치명적이라면 리리아의 길잡이가 먼저 반응할 테니까.

하지만 리리아는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제야 안심이 조금 된 라므란은 동시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수상하던 그자도 모든 사실을 알고 있지 못했다니 왠지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이제까지 모든 것을 척척 맞히던 그자도 모르는 게 있다니 그 위압감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제야 온전히 눈앞에 있는 관에 정신을 집중할 수 있게 된 라므란은 조심스럽게 머리 위로 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머리 위에 관을 썼다.

우웅!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자신의 오감이 미친 듯이 확장되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오감이 확장된 것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는 모든 생명체의 감각을 자신의 뇌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으윽.”

갑작스럽게 머리에 과부하가 걸렸지만 금방 적응되었다. 아니, 적응되었다기보다는 자신의 뇌가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만 관의 인지범위가 줄어들었다는 것이 맞으리라.

아마 자신보다 더 뛰어난 자가 사용했다면 더 놀라운 효과를 발휘했겠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이제 이 힘은 내 것이니까.

자신의 주위에 있는 모든 생명체의 감각이 자신의 감각처럼 느껴졌다.

비록 고등생명체인 인간은 되지 않는 모양이지만 그 외의 모든 생명체의 감각을 같이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마치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것과 같았다.

바다에서 돌아다니는 물고기가 보고 있는 플랑크톤이 자신에게도 보였다.

아까 자신이 풀어 준 쿠쿠란이 먹고 있는 농작물의 맛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는 엄청난 수의 로룬-타크의 분노 또한 느껴졌다.

자신들은 엄청난 위기상황이었다. 수천 마리의 로룬-타크가 기둥이 작동을 멈추자마자 이 방으로 짓쳐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라므란은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이제 여왕의 <지배력> 따위는 관을 통해 증폭된 자신의 <지배력>에 비하면 상대도 되지 않으니.

마치 자신의 능력은 이 아티팩트를 다루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오히려 잘 되었다. 이 기회에 이 이름 모를 관의 위력을 실험해 볼 좋은 기회이니.

라므란은 머릿속으로 명령을 내렸다.

아니, 명령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저기 있는 로룬-타크들은 또 다른 ‘나’였으니까.

수천의 로룬-타크, 아니 수천의 라므란은 순식간에 아직 라므란의 능력으로는 지배하기 힘든 옆의 로룬-타크들을 물어뜯었다.

일대 장관이 펼쳐졌다.

수천 마리의 로룬-타크가 서로 물어뜯고 싸우며 상대를 찢어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 몇 마리는 엄청난 속도로 달려와 라므란과 리리아의 앞에 안착했다.

“…뭐야, 이거!”

리리아는 놀라며 로룬-타크를 처리하기 위해 단검을 뽑아 들었다.

“안심해, 리리아. 후후…….”

하지만 뒤에서 라므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로룬-타크 몇 마리가 서로 얽히더니 리리아의 앞에 납작 엎드렸다. 마치 자신의 위에 타라는 듯이.

그 모습을 본 리리아가 놀라며 라므란 쪽을 돌아보았다.

상아빛이었던, 이제는 은은한 적색 빛을 뿜어내고 있는 관을 쓴 라므란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이제 나가자고, 리리아. 나갈 때는 편하게 나갈 수 있을 거야.”

순식간에 로룬-타크들을 모두 처리한 라므란은 그들을 통해 지상까지 통로를 뚫고 있었다.

라므란은 지금 너무 기뻐 미칠 지경이었다.

이 힘이라면 누구도 자신을 무시할 수 없으리라.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자신도 예전 자신의 동료였던, 하지만 자신을 절망시킨 그 녀석처럼 될 수 있다.

리리아와 같이 로룬-타크를 타고 바깥으로 향하며 라므란은 행복한 상상에 젖었다.

그와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괴인에게 전해들을 때는 와 닿지 않았지만 이렇게 손에 넣게 되니 이건 상상 이상이었다.

그 괴인은 누구이길래 대가 없이 자신에게 이런 거대한 힘을 양보했단 말인가?

아니, 대가가 없지는 않았다. 한 가지가 있기는 했다.

자신이 필요할 때, 그 힘으로 자신을 한 번 도와달라고 했다.

못 할 것도 없었지만 궁금했다. 그렇기에 물어보았다.

만약 자신이 배신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그러자 괴인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 로브에 가려 잘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분명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괴인은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따라 하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서로를 배신할 수 없다고. 신뢰로 얽힌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신빙성이 가진 않았지만 만약 저자의 수단이 효력이 없다면 자신은 좋은 것이니 수락하였다.

동시에 다른 의문이 살짝 들었다.

저 기둥은 저기에서 이 관을 이용하여 무슨 작용을 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라가오포라를 수백 년간 유지해왔는지.

하지만 라므란은 그 의문에 대하여 잊어버리기로 했다.

괴인은 분명 아무 일도 없을 터이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그 안의 것을 가지고 나오라고 했으니까.

괴인의 다른 모든 말을 의심하였지만 라므란은 무의식적으로 그 말만은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믿기 위해 노력했다.

괴인은 언제나 자신에게 옳은 정보만을 주지 않았는가?

이번에도 그 말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라므란은 마음이 한결 더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누구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는다면 자신이 이 관을 가져가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으니.

자신은 위대한 개척자 라가오페의 후손. 이 관의 정당한 후계자이다. 이것을 가질 자격은 충분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라므란은 머리에 쓰고 있는 관을 다시 한 번 쓰다듬으며 자신이 원래 나왔던 출구를 향해 로룬-타크를 조종했다.

이제 자신은… 새로이 다시 태어났다.

☆ ☆ ☆

……!

마르가란 근처의 바다.

바닷속의 물살을 가르며 무언가가 천천히 마르가란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아니,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속도는 매우 빨랐다.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 동체가 너무나도 거대하였기 때문이다.

<바쿠론>

고대어로 ‘심해의 섬’

그것이 바다를 헤엄쳐 마르가란으로 접근해가는 녀석의 이름이었다.

섬이란 것은 어느 정도 과장된 표현이 있지만 이름을 잘 붙인 것은 틀림없다.

녀석의 덩치는 정말 어마어마했으니까.

몇백 년 전에는 꽤나 유명했지만 지금은 이 녀석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져 버렸다.

유명했던 이유는 이 녀석이 키아란 해를 가로지르는 항로를 뚫으려던 그랑-반더를 수장시켜 버렸기에.

아는 사람이 없어진 이유는 몇백 년간 사고를 치지 않아 잊혀 버렸기에.

바쿠론은 별 생각이 없었다.

이 거대한 심해 하리쟌의 두뇌 속에 들어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정해진 길을 영역으로 삼고 수면 위를 떠가는 것은 내버려두고 그 아래로 가는 것들은 모조리 잡아먹어라.>

아주 간단한 명령이었지만 그렇기에 그 효과는 강렬했다.

언제부터 이런 울림이 뇌리 속을 점령하고 있었는지 바쿠론은 기억나지 않았다.

뇌리를 점령한 이 울림을 듣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기에 바쿠론은 본능보다도 머릿속의 울림을 우선시하며 몇백 년 동안 정해진 길을 왔다 갔다 하며 물 위로 떠가는 것은 잡아먹지 않고 물 아래로 지나가는 녀석들은 모조리 잡아먹었다.

이 일을 꾸준히 반복하자 바쿠론의 영역에 침입하는 녀석들은 이제 아무도 없어졌다.

심해의 섬, 바쿠론은 자신을 낳아준 모체를 제외하면 적수가 없는, 키아란 해의 작은 지배자였기에.

계절이 반복되고 새로운 계절이 오면 길을 지키라는 머릿속의 울림은 약해졌지만 대신 또 다른 울림이 들려왔다.

<길의 시작점으로 가라.>

그 울림에 따라 바쿠론은 충실하게 길의 시작점으로 가고 있었다. 수백 년간 해왔던 행위이기에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그곳에 가면 다시 처음의 울림이 강하게 뇌리를 점령하였고, 또다시 길을 지나가는 다른 녀석들을 잡아먹는 행위를 수백 년간 반복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언가 좀 달랐다.

바쿠론의 머릿속에 울림을 심던, 기묘한 파동이 들려오지 않았다.

울림을 심던 기묘한 파동이 멈추어버리자 바쿠론의 머릿속에서는 빠르게 다른 생각이 치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배고프다.>

본능 중의 본능. 이제까지는 울림에 막혀 나오지 못하고 있던 본능이 울림이 사라지자마자 단번에 치고 올라왔다.

마침 바쿠론이 매번 다니던 길의 끝에는 아주 조그마한 먹이들이 몰려 살고 있었다.

수면 위에 있었기에 먹지 못하고 매번 입맛만 다시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왠지 먹어도 될 듯하다.

여기까지 떠올린 바쿠론은 빠르게 작은 먹이들이 있는 도시를 향해 헤엄쳐갔다.

비록 작지만 그 수가 많기에 기분 좋게 포식할 수 있을 것이다.

바쿠론은 몇백 년 동안 많이 자라 이제는 육지도 올라갈 수 있었다.

자신의 성장에 뿌듯함을 느끼며 바쿠론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해변가를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 ☆ ☆

바깥으로 나온 리리아와 라므란은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었다.

라므란은 흥분이 조금 가라앉았는지 관은 가방 안에 숨겨둔 상태였다.

관을 벗자 찾아오는 상실감에 허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제 자신의 손에 들려있으니 언제든지 그 능력을 되찾을 수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안심시켰다.

“라므란,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아직까지도 무언가가 찝찝한지 리리아는 걱정되는 표정으로 물었다.

“흐음… 글쎄. 우선 대북벽에라도 가볼까 고민 중이야. 하리쟌 정도는 데리고 다녀야 하지 않을까 해서.”

보물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화를 부른다.

게다가 특이해 보이는 관을 머리에 쓰고 다닌다면 누가 봐도 수상해보이리라.

강한 힘을 얻었지만 라므란은 바보가 아니었다.

동물을 다루는 정도로는 이걸 지킬 수 없다.

하리쟌을 다룰 수 있어야 남들도 자신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테고, 그래야만 이 물건을 지킬 수 있다.

애초에 이 아티팩트는 겨우 맹수 정도나 다루기에는 너무 넘치는 물건이었다.

하리쟌을 상대로 할 때야 그 진가가 나타나리라.

하지만 대륙 내부에서는 하리쟌을 볼 수 없다. 대부분이 소탕되었기에.

그렇기에 라므란은 우선적으로 대북벽으로 가서 강력한 하리쟌을 자신의 아래로 넣을 계획을 세우는 중이었다.

“그래? 대북벽까지 가지 않아도 되지 않아? 바다에도 하리쟌이 살잖아.”

인간이 활동하기 힘든 바다의 특성상 하리쟌을 다룰 수 있다면 라므란의 가치는 더욱 올라갈 것이다.

“흐음… 그것도 좋은 생각이지만… 이 근해에는 라가오포라가 뚫린 후 하리쟌은 한 마리도 남아있지 않잖아.”

“음… 그건 그래 …….”

“이런 말 하면 안 되지만… 엄청 강한 녀석이 한 마리 짠 하고 나타났으면 좋겠네… 후후, 그러면 그 녀석을 길들일 수 있을 텐데.”

“후후. 라므란, 인생이 그렇게 편하지 않다고.”

둘은 모험을 하며 현실이란 장벽을 뼈저리게 겪었기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강한 힘을 얻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었기에 라므란과 리리아는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열흘 가까이 지속되던 라가오페도 어느덧 끝나가고 있었다.

제단의 작동이 멈춘 바람에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별다른 일이 발생하지 않았기에 축제는 계속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는 축제기간 중 사람들이 혼란을 일으키면 위험하기에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

시안의 감각에 법도사들과 반더들이 계속 들락날락거리는 것으로 추측해 보건대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닌 듯 보였다.

물론 이는 시안과 스틸에게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자신들은 떠날 것이니.

먹고 자고 놀면서 축제를 몽땅 즐긴 시안은 굉장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해변가에서 디저트를 먹고 있었다.

키아란에서 건너왔다는 과일로 만들어진 이 디저트는 굉장히 달콤했기에 시안은 키아란에 가게 되면 이걸 배부르게 먹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옆에서 그런 시안을 보던 스틸이 말을 걸었다.

“시안 동생, 이제 슬슬 축제가 끝나가는데 어쩔 거야?”

“음… 볼 건 다 봤으니… 이대로 배를 타고 키아란으로 한번 가볼까 고민 중입니다.”

육로로 가는 도중에는 별것이 없다. 마르가란에서 브로샨의 다른 관광지로 이동하기에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

오히려 이 배를 타고 키아란으로 가서 구경한 후 라-샤르-로아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어차피 라-샤르-로아를 이용하면 나라 간 이동이 편리하기 때문에 시안은 나중에 브로샨에 한 번 더 들르기로 하고 우선은 배를 타고 키라안을 구경해볼까 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호오… 키아란이라. 나도 그곳은 한 번도 안 가봤는데.”

“음… 그러실 수 있겠군요. 대륙의 끝과 끝이니…….”

타란이 대륙의 서쪽 끝 바다를 끼고 있다면 키아란은 대륙의 동쪽 끝 바다를 끼고 있다.

거리가 먼 만큼 스틸도 키아란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여객선을 타고 가도록 하지요. 구경도 할 겸 편하게 가는 게 나을 듯합니다.”

어차피 마르가란은 굉장히 유명한 관광도시였기에 키아란에서 오는 귀족 및 상인들을 위한 여객선들이 많았다.

그걸 타고 가면 편안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으리라.

게다가 여객선의 안에는 귀족들을 위한 다양한 흥미요소가 준비되어 있다고 하니 지루하지도 않을 것이다.

시안은 개인적으로 이 여객선 관광을 굉장히 기대하고 있었다.

물 위를 뛰어서 라가오포라를 건너려면 엄청나게 귀찮을 것이기에 여객선을 타고 가기로 한 그들은 저택에 도착하면 관리인을 시켜 배를 예약하기로 했다.

그러던 와중 시안이 바다 저 건너편을 보았다.

“…여기에는 괴수나… 이런 건 안 나타났다고 하지 않았나요, 몇백 년간?”

“호오, 그러게. 신기하네. 저 기세면 얼마 안 가 오겠는데.”

저 멀리에서, 본능에 충실한 흉폭한 기세가 마르가란 근해의 배 몇 척을 씹어 먹으며 해변가를 향해 맹렬히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은 시안과 스틸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거리가 멀고, 또 배를 씹어 먹고 있기에 속도가 좀 느려진 상태이지만… 얼마 안 있으면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저 녀석을 본 시안은 굉장히 불안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뭔가 본능적으로 꼬이기 시작한 것을 알아챈 것이다.

☆ ☆ ☆

“도대체… 제단이 왜 갑자기 작동을 멈춘 것이오?”

마르가란을 다스리는 귀족, 탈루크 후작은 2급 법도사인 바빌을 재촉하였다.

큰돈을 들여 초빙한 바빌은 제단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애초에 제단의 축을 이루는 기둥 자체가 엑사르의 흐름을 거부하는 데다 제단을 해체할 수도 없었기에 조사가 힘들었다.

더 큰 걱정은 그게 아니었다. 이게 라가오포라를 어떤 방식으로 유지하고 있는지를 몰랐기에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예측이 안 되었던 것이다.

대충 라가오포라로 하리쟌을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 정도만 알았지, 정확한 작동 구조를 몰랐기에 제단이 멈출 경우 어떤 방식으로 부작용이 나타날지 몰랐다.

“우선… 경계를 강화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마침 축제도 끝나가니… 치안 유지라는 목적으로 경계를 강화하시지요.”

“음… 그래야겠군. 나는 나대로 힘을 쓸 테니 어서 조사를 서둘러주게.”

하지만 그들은 경계를 강화할 필요는 없었다.

“후작님! 큰일 났습니다!”

“뭐? 무슨 일인가?”

허겁지겁 달려온 반더를 본 탈루크 후작은 불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라가오포라를 통해 이쪽으로 오던 배가… 일곱 척이 침몰했다고 통신이 들어왔습니다.”

통신 이적을 쓸 수 있는 아티팩트는 큰 배에만 탑재되어 있다.

그 말은… 큰 배만 일곱 척이고 더 작은 배는 훨씬 더 많이 침몰했다는 뜻이다.

후작은 당황하였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대처하려고 하였다. 여기서 자신까지 놀란다면 마르가란 전체는 혼돈에 빠지게 된다.

“어떻게 침몰하였다고 했는가?”

“통신에 의하면… 무슨 거대한 섬 같은 게 배를 씹어 먹었다고… 게다가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고 합니다.”

“젠장…….”

후작은 평정을 유지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이제는 제단이 어떤 방식으로 라가오포라를 유지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예전에 탈릭 스톤을 사용하지 않았을 때 어떤 참사가 일어났는지 후작은 똑똑히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탈릭 스톤을 투입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또 육지까지 그 참사가 번진 적은 없었기에 후작은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지 않게 조용히 치안대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더 이상 감출 수 없다.

“무장들과 치안대를 모조리 동원해라. 축제는 끝이다… 육지까지 위험하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혹시 모르니 모든 사람들을 고지대로 대피시켜라.”

“네! 알겠습니다.”

“출항은 무조건 금지다. 키아란 쪽에도 연락하고 모든 배들은 즉시 항구로 회항하라고 일러라. 혹시 모르지만… 이번 사태가 어디서 끝날지 알 수가 없다.”

예전과 같은 일이 일어나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이상한 소문을 내서 혼란을 가중시키는 녀석은 무조건 잡고 백성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키는 것에 주력하도록. 서둘러라!”

“네!”

무장들을 모조리 보낸 탈루크 후작은 법도사 쪽을 보며 말했다.

“바빌, 서둘러 주시오. 모든 지원을 약속하리다. 그리고… 이곳이 위험해질 것 같으면 즉시 피하시오.”

“알겠습니다, 후작님. 모두들 어서 서둘러라!”

바빌은 아래 법도사들을 재촉하며 제단에 대해 빠르게 대처하기 시작했고, 탈루크는 서둘러 영주성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최악의 상황에는… 국가에 지원을 요청해야 할 수도 있다.

☆ ☆ ☆

“이런… 이런 결과가 나타나다니…….”

혼돈에 빠진 마르가란을 보며 라므란은 죄책감에 빠졌다.

리리아까지 휩쓸리게 할 수는 없기에 리리아는 대피하는 인파에 섞어 같이 보냈다.

사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는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최악의 결과로 나타날 줄은 몰랐다.

저런 녀석이 달려오다니.

아마도 관은 어떤 방식으로든 저 녀석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저 녀석을 통해 라가오포라를 유지하고 있던 것이었겠지.

지금 마르가란을 혼돈에 빠트리고 있는 저 녀석은 분명 자신이 이 관을 꺼내온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결과로 나타나니 더는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관을 다시 가져다 두어야 하나…….’

관을 다시 가져다 둔다면 원상태로 복구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은 다시 예전의 그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번 힘을 맛본 라므란은 도저히 이 관을 포기하기 힘들었다.

그런 라므란의 머릿속에 갑자기 굉장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위기에 빠진 마르가란을 구하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입증할, 영웅이 될 수 있는 방법.

대북벽까지 가지 않고도 자신을 입증할 수 있는 방법.

‘그래… 내가 저 녀석을 길들여 보이겠다…….’

이제까지 이 관이 무슨 작용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굉장한 녀석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였으면… 자신도 할 수 있으리라.

자신은 위대한 라가오페의 후손이니까.

어차피 자신이 이 관을 빼온 것은 아무도 모른다. 나올 때 동굴을 모조리 무너트려버렸으니.

그렇기에 저 녀석을 지배할 수만 있다면 자신은 마르가란을 구한 영웅이 된다.

그리고 키아란 해의, 아니 모든 바다의 지배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은 아직 관의 사용에 익숙하지 않기에 거리가 멀면 녀석을 지배할 수 없다.

하지만 가까이만 온다면… 저 녀석은 자신의 노예가 될 것이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을 떠올린 라므란은 녀석이 어서 해안가로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우선 시야에 들어오기만 한다면… 시도해 볼 수 있으리라.

☆ ☆ ☆

“역시… 배가 몽땅 출항을 멈추었군요.”

시안은 혼란에 빠진 마르가란을 보며 말했다.

최대한 통제를 하며 빠지고 있었지만 평화에 익숙해진 마르가란 사람들과 귀족들은 불안에 빠져 너도나도 먼저 빠져나가겠다고 아우성이었다.

바다에 저런 녀석이 다가오고 있는데 배가 뜰 리가 없다.

유람선을 포함하여 모든 배가 출항을 멈추었다.

“아… 웬 망둥이 한 마리 때문에…….”

시안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이제 선택을 해야 한다.

1. 육로로 돌아간다.

2. 바다를 뛰어 건넌다.

3. 목적지를 바꾼다.

4. …저 망둥이를 때려잡거나 쫓아내고 배를 띄우라고 한다.

이미 선택지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가장 쉬운 방법을 택하는 것이 베스트 아니겠는가.

적어도 자신에게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1, 2, 3보다도 4가 훨씬 쉬웠고, 바다에서 돌아다니는 녀석을 때려잡는 것보다도 쫓아내는 것이 훨씬 쉬웠다.

그렇기에 시안은 저 녀석을 쫓아내 버리기로 결정했다.

저 녀석을 좀 몰아낸 다음에… 스틸 양의 아는 아이에게 부탁해서 배를 띄우면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타고 있으면 저 망둥이가 쫓아올 생각이나 하겠는가?

그렇게 판단을 내린 시안은 당장 행동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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