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35화 (36/81)

<35. 영웅의 책임>

오는 길에 수면 위에 떠있는 간식을 씹어 먹으며 해변가에 도착한 바쿠론은 두 가지의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하나는 굉장히 공포스러운 감정.

하나는 굉장히 불쾌한 감정.

자신에게 이런 상반된 느낌을 주는 존재 둘 모두가 해변가에 존재하고 있었다.

공포스러운 감정은… 마치 자신의 모체를 볼 때의 느낌이 들었다.

너무나도 거대하고 압도적이어서,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느낌.

그 기운은 노골적으로 해변으로 다가가던 자신을 협박하고 있었다.

다행이라는 점은 육지생물인 것 같다는 점과 자신을 쫓아올 생각은 별로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그리고 불쾌한 감정은… 이제까지 자신을 지배해온 울림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의 울림은 저번보다 훨씬 약하고… 그런 주제에 자신을 완전 복종시키려 하고 있다는 점.

계속해서 자신을 발아래에 두려고 하고 있었다.

건방지기 짝이 없었기에 이제껏 바다에 적수가 없었던 바쿠론의 불쾌한 감정은 더더욱 커졌다.

그렇기에 바쿠론은 고민했다.

도망갈 것인가, 아니면 습격할 것인가.

습격하기에는 해변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너무 무서웠고, 도망가기에는 저기에서 흘러나오는 약한 울림이 너무 불쾌했다.

이런 경험은 없었기에 바쿠론은 도망칠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하며 조금 더 해안가에 머물기로 했다.

☆ ☆ ☆

“미치겠군… 녀석이 왜 더 다가오지 않는 거지.”

리리아를 대피시키고 로룬-타크를 이용하여 홀로 관이 놓여 있던 기둥으로 돌아와 있던 라므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라므란은 현재 원래의 관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바다의 녀석에게 지배력을 행사하는 중이었다.

엑사르의 흐름이 눈에 띌 염려는 없었다. 이 관은 엑사르를 소모하여 작동하기는 하지만 일단 작동하면 지배의 파동은 매우 은밀하게 뻗어나갔다.

하지만 치안대의 대피명령을 피하기 위한 곳이 필요했기에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최대한 녀석에게 가까운 해변가로 와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자신의 명령에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었다.

좀 더 가까이 다가온다면 자신의 아래로 들어올 것 같은데 해변에서 몇 킬로미터를 남긴 지점에서 가까이 다가오지를 않는 것이다.

‘설마 날 두려워하는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원인은 그것뿐이었다. 녀석은 자신에게 지배될 것이 두려워 더 이상 다가오고 있지 않은 것이리라.

하지만 이래서는 곤란했다. 녀석을 아예 손아귀에 넣어야 한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라므란은 그렇게 결심하고 더더욱 정신을 집중했다.

점점 더 힘을 쓰는 것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녀석이 자신의 발아래 들어오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 나는 마르가란을 구한 영웅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모두가 자신을 좋아하고 인정해줄 것이다.

☆ ☆ ☆

“후후… 시안 동생, 잘 되어가?”

스틸은 답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안을 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저 녀석, 꽤나 영리하네요.”

시안의 계획은 생각대로 잘 풀리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는 없기에 기운을 바다 쪽으로 집중했다.

할 거면 확실하게 해야 했기에 저 망둥이가 정말 놀라 자빠질 정도의 기운을 쏘아 보냈다. 갓 뿔 여섯 개에 오른 저 녀석은 꼬리가 빠지게 도망가야 할 정도로.

그런데 저 녀석이 이상하게 도망가지 않고 있었다.

분명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는 것을 보아하니 자신의 기운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 마르가란에서 보일 정도의 거리에 머무른 상태로 더 이상 도망가지는 않고 있었다.

덕분에 도시 사람들은 도망갈 시간을 벌었지만 오히려 더 공포에 질려있었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녀석의 덩치가 워낙 컸기에 사람들은 대피한 고지대에서 녀석을 명확하게 살필 수 있었다.

물 위로 작은 산만 한 녀석이 숨을 내뿜고 있는데 안 무서울 리 있겠는가. 그것도 자신이 살던 도시 근처에서.

녀석이 하는 짓을 보면 마치 도망간 도시락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새였다.

덕분에 시안은 배를 띄우자는 소리도 못 하고 있었다.

‘원래 하리쟌이라는 녀석들은 다 저런가……?’

시안은 하리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신기했다.

자고로 생물이라면 식욕보다도 생존이 우선일 텐데 저 녀석이 배가 고파서 떠나지 않고 있나 궁금해진 것이다.

시안은 슬슬 고민하고 있었다.

여기서 기운만 한번 쏘아 보내주면 당장에 도망갈 줄 알았는데 녀석이 생각보다 끈질겼다.

“으아… 귀찮아… 저 녀석은 왜 안 도망가는 거야…….”

스틸은 고민하는 시안이 진짜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쳐다보고 있었다.

“동생, 왜 안 죽여?”

“음… 딱히… 길 좀 막았다고… 죽이기는 좀…….”

“그래? 인간을 해쳤는데?”

“뭐… 별 상관 없는데요. 쟤도 먹고살아야죠.”

‘역시…….’

스틸은 점점 시안이라는 아이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인간이건 하리쟌이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자신의 영역을 침범해 들어오느냐 안 들어오느냐.

안 들어오는 자에게는 관대하고 들어오는 자에게는 자비가 없다.

그렇게 선을 명확히 그어놓았기에 바깥으로 남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피해를 주지 말라고 교육한 부모의 힘이리라.

지금도 그렇다.

자신 같았으면 당장 달려 나가 저 물고기 비스무리한 놈을 회쳐 놓았을 것이다.

다른 잘못을 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길을 가로막았으니 죽는 것이다.

초인이란 자신과 같아야 한다.

초인은 손 뻗는 곳, 발 가는 곳이 모두 내 영역이어야 한다. 그래야 모두에게 좋다.

지금도 보라.

울타리를 너무 좁게 설정해놓으니 손만 뻗으면 건드린 놈들이 죽을까 봐 이렇게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 아이는 실력은 초인과 신의 사이에 있지만, 마음가짐은 인간과 초인의 사이에 있었다.

이런 특이한 경우는 스틸도 처음 보는 것이라 속단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답답해하는 걸 보는 것도 재미있었기에 스틸은 당분간 지켜보는 방향을 택했다.

“그래서 계속 참게?”

“흠… 저거 안 도망가겠지요?”

결국 인내심이 먼저 바닥난 것은 시안이었다.

적당히 겁주면 도망갈 것이지 참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죽이진 않겠지만 적당히 두들겨 패주기로 한 시안은 힘을 폭발시키며 창밖으로 뛰어 나갔다.

거리가 꽤 있었기에 어느 정도 힘을 써야 따라잡을 수 있다.

그 순간이었다.

저 멀리서 구경만 하고 있던 녀석이 정말 엄청난 속도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쿠오오오오! 쿠오오오오!

“허허허…….”

시안은 어이가 없었다.

저 녀석 그냥 대충 저기 서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알고 보니 자신이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리에 머무르고 있었나 보다.

실제로 녀석의 생각이 틀리지는 않았다.

시안이 잠깐 멈칫한 사이에 녀석은 정말 멀리까지 도망가 있었다.

덩치는 산만 한 녀석이 빠르기는 어찌나 빠른지, 섬 하나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문제는 녀석이 그렇게 급하면서 남겨놓은 흔적이다.

쿠아아아아아아!

산만 한 녀석이 저런 속도로 도망가는데 바다가 조용할 리가 없다.

녀석이 도망가며 몸을 퍼덕인 순간 엄청난 파동이 발생했다.

그리고 그 파동은 해변 쪽으로 밀려오면서 점점 더 커졌다.

그렇게 커진 해일은 도시로 몰려오더니 그대로 도시와 해변을 몽땅 덮쳤다.

꽈드드드득.

우드득.

그리고 아름답던 마르가란의 해변가와 무역항에 정박해있던 배라는 배는 모조리 박살이 나버리고 말았다.

남아있는 건 골조와 잔해뿐… 아름답던 도시가 몸부림 한 방에 폐허가 되어버린 것이다.

워낙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라 막을 수도 없었다.

“…저기에 배가 남아있지는 않겠지요?”

“후후, 아마도 그렇겠지.”

“…설령 남아있어도 저걸 보고 떠나려는 선원이 있지는 않겠지요?”

“후후. 아는 아이에게 부탁하면 모르겠지만… 아마 없지 않을까?”

“…하아, 땅으로 가야겠군요.”

육로로 키아란으로 가려면 정말 엄청나게 돌아가야 한다.

그 때문에 자신이 무리를 해서라도 배를 타고 가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키아란으로 갈 수 있는 큰 배는 근방에 이곳 마르가란밖에는 없다.

저 녀석이 선택의 여지를 없애놓은 것이다.

시안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도망간 녀석을 따라가기도 힘들었기에 그냥 포기하고 육로로 여행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빠드득…….”

쿠오오오!

시안은 같은 위치에서 해변가를 여유 있게 쳐다보고 있는 작은 섬을 보고 이를 갈았다.

녀석은 자신이 쫓아가지 않자 도망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나가려고 하면 도망치고 시안이 떠날 준비를 하고 있으면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보다 훨씬 여유 있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리쟌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녀석은 장난을 치듯이 꼬리인지 등뼈인지 모를 정체불명의 기관을 빙글빙글 휘저으며 해변 쪽으로 파동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녀석이 장난스럽게 꼬리를 휘저을 때마다 파동이 쭉쭉 뻗어 나와 해변가를 강타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도시였던 마르가란은 이미 해변가는 모조리 박살 났고 해변 안쪽의 도시도 반쯤 파괴되었다.

“…안 되겠다.”

참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아버지, 저는 참을 만큼 참았습니다.’

시안은 목걸이를 만졌다. 그리고 손에 검은색의 크로나-폰을 소환했다.

여기서 저 녀석을 썰어주기에 거리가 조금 있기는 하지만 못 할 것도 없다.

죽일 수는 있지만 잡을 수는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

저 정도 거리를 타격하려면 본신의 힘이 들어갈 것이기에 녀석은 죽을 수도 있겠지만… 다 자업자득이다.

“빠드득! 재수 좋으면 꼬리만 썰리고 끝날 거다…….”

그때 시안이 칼을 뽑는 것을 보고 어딘가를 나갔다 왔던 스틸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어머! 동생, 회치게?”

“…숙녀가 표현이 그게 뭡니까, 회를 친다니요.”

“후후… 이거나 저거나, 알아들으면 그만이지. 그나저나 어제는 죽이기에는 좀 뭐하다고 하더니?”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참았습니다. 저 녀석 하는 걸 보세요.”

녀석은 도망갈 수 있는 거리 바로 바깥에서 그 큰 덩치를 빙글빙글 돌리며 꼬리를 퍼덕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무서워하더니 그간 익숙해졌는지 간이 배 바깥으로 나온 것이 틀림없다.

“후후… 하긴, 동생도 이 정도면 많이 참았지. 그런데 그냥 죽이는 건 너무 사치 아닐까?”

“무슨 소리십니까?”

“동생이 지금 저 녀석 죽이려고 하는데 저 녀석은 자신의 죄를 깨달을 새도 없이 한 번에 토막이 날 거 아냐.”

“…그렇다고 두들겨 패기에는 저 녀석 도망가는 속도가 너무 빠른데요.”

“나한테 엄청 좋은 생각이 있는데 한번 들어볼래? 후후, 이거 들으면 동생은 나한테 엄청 고마워하게 될 거야.”

시안은 스틸의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열 받긴 했지만 그래도 죽이기에는 조금 그랬는데 스틸에게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고 하니 궁금해진 것이다.

“음… 뭡니까, 스틸 양?”

그리고 스틸은 자신의 생각을 설명해주기 시작했고 시안은 그 놀라운 계획에 스틸 양을 존경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세상에! 정말 놀랍습니다. 그런 건 또 언제 준비하셨습니까.”

“후후… 이 정도야, 뭘.”

“당장 실행에 들어가야겠군요. 고맙습니다.”

“뭘… 후후후.”

스틸 양의 계획에 적극 찬성한 시안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시안이 해안가에서 약 올리는 녀석을 보고 이를 갈고 있는 동안 스틸은 궁금해졌다.

시안이야 하리쟌이라는 녀석을 처음 보았다고 했으니 원래 저런가 보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스틸은 이제까지 하리쟌과 많이 싸워보았고, 그렇기에 녀석들의 습성을 잘 알았다.

저 녀석들은 흉폭하지만 무엇보다 생존에 집착했다.

무언가가 없다면 저렇게 이곳에 죽치고 있을 녀석들이 아니었다.

특히 저렇게 강자에게 까불대는 행동을 할 리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며칠 전 제단이 멈춘 것과 연관이 있음을 깨달은 스틸은 제단의 근처를 샅샅이 살폈고 그 지하에 무언가가 있음을 어렵지 않게 살필 수 있었다.

관심이 없으면 모르겠지만 집중하면 라-반더의 눈길을 피할 수는 없다.

지면을 박살 내고 그 아래로 들어갔더니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 보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 로쿰을 조종하는 녀석이었다.

이 녀석이 왜 여기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저기 바깥의 하리쟌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 이 녀석이라는 것.

녀석은 엄청나게 집중했는지 자신이 들어온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안녕, 꼬마야.>

<…누구냐? 여긴 어떻게 알고!>

녀석은 자신을 엄청나게 경계했지만 몇 번 어루만져 주니 금세 얌전해졌다.

녀석이 대답할 준비가 완료되자 스틸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지를 물어보았고 녀석은 금세 실토했다.

<흐음… 그래서 저 녀석을 길들이기 위해 여기 있었다고? 그리고 조금만 더 있으면 될 것 같다고?>

<커… 흑… 네. 저 녀석을 보십시오. 저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제길… 거리만 더 가까웠어도 이미 녀석을 지배하고 마르가란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지배라니! 저 녀석이 머리에 쓰고 있는 것이 상당히 대단한 수준임에는 틀림없지만 모든 아티팩트는 사용자의 수준이 가장 중요하다.

이 녀석 깜냥으로는 저기 바깥의 녀석을 화만 나게 할 뿐이다.

스틸은 그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갔다.

바깥의 녀석은 당장이라도 시안이 무서워 도망가고 싶은데 이 녀석 때문에 열 받아서 도망도 안 가고 저기에서 죽치고 있었던 것이다.

같잖은 녀석이 자신의 머리 위에 올라서려고 하니 아무리 괴수라도 열이 안 받을 수 없을 것이다.

‘후후후…….’

아마 도시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이 아이는 그 자리에서 맞아죽었을 것이다.

스틸은 속으로 도시 하나를 말아먹은 이 영웅 지망생이 웃겨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그러고는 외쳤다.

<오오, 잘 되었구나. 우리는 마침 이 마르가란을 지켜줄 영웅이 필요했는데. 만약 우리가 너를 저 괴물 가까이에 데려다주면 괴물을 지배할 수 있겠는가?>

<…저 괴물에게로 데려다준다고요?>

<그럼, 너도 보았겠지만 이 몸은 상당히 능력 있단다.>

<그렇다면… 문제없습니다. 이제까지 거리가 문제였을 뿐이니까요.>

스틸이 보기에 저 녀석이 쓰고 있는 아티팩트의 문제점이 이거였다.

제 수준을 넘는 능력을 사용하려고 하면 뇌에 부하가 너무 걸리기 때문에 다른 곳에 뇌를 쓸 용량이 적어졌다.

즉, 멍청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의심스러운 제안을 덥석 물게 하다니.

이미 청년의 뇌는 상당부분 퇴화가 진행된 상태였다.

저 아티팩트가 유용할지는 몰라도 마물 중의 마물이었다. 사람이 오래 쓸 만한 물건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는 아주 유용했기에 스틸은 녀석의 뒷덜미를 잡고 저택으로 바로 끌고 왔다.

그리고 저택 한구석에 박아놓고 열 받아 있는 시안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제안한 것이다.

☆ ☆ ☆

“후후. 시안, 그럼 다른 준비는 내가 할 테니… 동생은 내가 요구한 걸 만들어 와.”

“흐음… 알겠습니다. 스틸 양은 미끼를 구해오신다고요?”

“그렇지. 저 녀석을 꼬실 미끼를 구하는 게 더 힘들지 않겠어? 아니면 바꿔도 되고.”

“아닙니다. 그럼 기다리시지요.”

자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저런 녀석을 꼬드길 미끼를 구할 자신이 없었기에 시안은 스틸이 요구한 것을 만들기 위해 해변으로 향했다.

재료는 넘쳤다. 이미 항구의 배라는 배는 모조리 박살이 나 있었으니까.

시안은 항구로 날아가서 가라앉아 있는 배의 앞부분에 안착했다.

그리고 배에 있는 닻과 사슬을 모조리 뜯어내기 시작했다.

작은 배들이야 줄로 된 닻을 썼지만 커다란 배의 경우는 닻의 무게를 견뎌야 했기 때문에 쇠사슬을 사용하였다.

시안은 그러한 배들만 골라 닻과 쇠사슬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봉쇄령이 떨어진 후 모든 배는 항구에 머물러 있었고, 또 거리가 상당한 라가오포라를 오가는 무역선들인 만큼 커다란 배가 많았기에 침몰한 곳에서 충분한 양의 쇠사슬을 구할 수 있었다.

항구 한구석에 닻과 쇠사슬을 모조리 쌓은 후 시안은 닻을 뜯어내고 쇠사슬만 따로 모으기 시작했다.

빠드득. 우드득. 뚜둑.

그리고 자신의 생각만큼 쇠사슬이 모이자 시안은 쇠사슬을 이어 붙이고 비비 꼬기 시작했다.

얇은 부분은 두껍게 만들고.

두꺼운 부분은 다른 곳과 연결하고.

이런 식으로 만들기 시작하자 금방 엄청나게 긴 쇠사슬이 만들어졌다.

낚싯줄은 만들었으니 이제는 낚싯바늘이다.

시안은 구석에 모아놓은 닻을 모으더니 하나로 빚기 시작하였다.

쇠사슬이야 조금 가늘어도 자신의 힘이 담기면 안 끊어질 것이니 상관없지만 바늘은 이야기가 달랐다.

작으면 털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닻을 모두 사용하고도 모자라 남은 쇠사슬까지 이용해야 했다.

고생한 보람이 있는지 상당히 괜찮은 모양의 바늘이 만들어졌다.

이제 이걸 여기에 놓아두고 미끼만 가지고 오면 된다.

‘그런데 스틸 양은 어디서 미끼를 구한다는 거지?’

상당히 궁금했지만 저택에 가면 준비되어 있을 것이기에 가서 확인해보기로 했다.

“음… 왠지 저분은 어디선가 봤던 분 같은데요.”

“오, 동생 맞아. 기억력이 좋구나. 난 간신히 기억해냈는데.”

“뭐… 인상 깊게 보았으니까요. 그런데 저분은 여기에 왜 있는 건가요?”

“음? 무슨 소리야. 내가 준비하겠다고 했잖아.”

“네. 그런데 미끼를 준비한다고 하셨잖아요.”

“후후, 어때?”

“…….”

“동생, 이건 내가 강제로 한 게 아니야.”

시안이 어이없는 표정을 짓자 스틸이 서둘러 변명했다.

“말이 됩니까. 딱 봐도 두들겨 맞은 것이 보이는데.”

“흠… 흠… 그건 다른 이유고. 저 아이는 분명 스스로 지원한 거라고. 볼래?”

그러더니 스틸은 방 한구석에서 여전히 바다를 향해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라므란을 불러서 깨웠다.

“영웅이 될 준비는 되었니?”

“후후, 맡겨주십시오. 녀석의 앞에 데려만 주신다면… 제가 반드시 녀석을 지배하고 이곳의 평화를 지켜내겠습니다.”

그걸 본 시안은 스틸을 잠시 방구석으로 데리고 왔다.

“…저분 지금 살짝 어디가 이상한데요.”

“후후. 저 머리에 쓰고 있는 관이 문제지. 약간 사람을 모자라게 만들거든.”

“…안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아직 살아있는 사람을 어찌 미끼로…….”

“진짜? 저 아이가 저기 저 녀석을 열 받게 하고 있는 장본인인데?”

그리고 스틸은 시안에게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시안은 이제야 바다에서 까불거리는 녀석의 행동이 이해되었다.

“흠… 쌍방과실이군요. 저 녀석이랑 라므란이라는 분… 그나저나 이분 큰 사고 치셨네…….”

이자가 저 녀석을 열 받게만 안했으면 시안이 쫓아냈을 때 도망갔을 것이고, 그렇게만 되었다면 이렇게 도시가 박살 날 일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후후, 죽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동생 둘 다 죽일 생각은 없잖아?”

“…….”

“걱정하지 마, 절대 안 죽으니까. 그리고 저 녀석은 저 아이가 불러온 거라고. 그러면 저 친구가 해결하는 것이 맞지 않겠어?”

그 말에 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이 반파된 것은 저자의 책임이니 어느 정도 위험을 나누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 동의한 것이다.

죽지는 않더라도 저 사람에게는 이 사태를 어느 정도 마무리할 책임은 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지요.”

“탁월한 선택이야. 후후.”

그리고 시안과 스틸은 낚시의 마지막 단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시안은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녀석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자 녀석은 평소와 같이 달아나버렸다.

처음에는 화들짝 놀라며 달아난 것과는 달리 상당히 여유 있게 빠져나갔다.

녀석이 도망가는 것을 보자 시안은 고민에 빠졌다.

그냥 저대로 도망가게 내버려두고 청년의 머리에서 관을 벗기면 되지 않을까 고민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윽고 생각을 접었다.

저 참상을 저 녀석과 라므란이라는 청년이 만들어낸 만큼 둘 다 책임을 질 필요가 있다.

자신에게도, 그리고 마르가란이라는 도시에게도.

이제는 자신의 편안한 미래를 위해서라도 녀석은 꼭 필요했다.

그렇게 생각한 시안은 녀석이 도망간 사이에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꾸드득!

마침 근처에 작은 섬이 하나 있었기에 시안은 니츠마탄에서 가져온 낚싯줄과 바늘을 꺼내 들었다.

낚싯바늘에는 사람이 하나 들어갈 수 있는 커다란 홈이 파여 있었고 닫을 수 있도록 문도 만들어져 있었다.

워낙 낚싯바늘이 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시안은 자신이 어깨에 메고 온 라므란을 낚싯바늘의 홈에 집어넣었다.

스틸 양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기에 낚시가 끝날 때까지는 이 안에 있으면 안전할 것이다.

여전히 정신을 집중하느라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라므란을 잘 넣어둔 후 이미 낚싯바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녀석을 시안은 섬을 파고 모래밭에 잘 묻었다.

그리고 바다 밑으로 쇠사슬을 늘어트리며 해안으로 걸어 돌아왔다.

“끝났어?”

“예.”

“좋아, 좋아. 그럼 우리는 이제… 숨어볼까.”

“그것참.”

“음? 왜 그래, 동생?”

“이거 낚시란 게 참 손이 많이 가는 취미군요.”

“…….”

시안과 스틸은 쇠사슬의 끝을 잡고 기운을 모조리 갈무리했다.

가까이 다가오면 들키겠지만… 그걸 감안하여 상당히 길게 만들었으니 괜찮을 것이다.

☆ ☆ ☆

쿠르르르!

바쿠론은 해변가를 보며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흉악한 기운을 피해 다녀왔더니 기운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런 기운에 굉장히 민감한 바쿠론은 조심스럽게 돌아왔지만 적어도 이 정도의 먼 거리에서는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조종하려는 아주 불쾌한 울림은 반면에 훨씬 더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

바쿠론은 잠시 고민했다.

수상한 이 상황에 우선 몸을 피해야 하는 것인지.

하지만 그러기에는 자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기운은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고민하던 바쿠론은 슬금슬금 기운이 다가오는 곳으로 접근했다.

아직도 흉폭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설령 숨어있다고 해도 이 정도 거리면 아직 도망갈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바쿠론은 기분 나쁜 울림이 새어 나오는 작은 흙덩어리를 덥석 베어 물었다.

입안에서 으깨어 버린 후 도망가리라.

철컹.

까드득.

그 순간, 입에서 이상한 것이 씹혔다.

부수려고 했지만 그 순간 씹은 것에서 기묘한 기운이 흐르며 단단해졌기에 부술 수도 없었다.

무언가 불길함을 느낀 바쿠론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틀어 도망가려고 했다. 그 순간, 해안가로부터 흉악한 기운이 폭발해 나왔다.

그리고 생전 겪어본 적도 없는 엄청난 힘이 자신을 해변가 쪽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 ☆ ☆

“으라차!”

시안은 저 멀리서 녀석이 섬을 덥석 삼키는 것을 보자마자 숨겨왔던 기운을 폭발시켰다.

쇠사슬 없이 달려들었다면 저 녀석은 도망갔겠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손에 잡고 있는 쇠사슬에 맹렬하게 반데르를 불어넣으며 잡아당겼다.

그리고 이어서 기묘한 줄다리기가 벌어졌다.

쇠사슬을 양쪽에 두고 집채만 한 섬과 작은 인간이 벌이는 줄다리기.

아무리 인간 쪽이 강하다고 해도 이러면 질량의 차이 때문에 인간이 끌려갈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시안이 밟고 있는 모래사장은 움푹 파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옆에서 이걸 보고 있던 스틸은 또 한 번 놀랐다.

같은 라-반더가 맞나 싶을 정도로 저 아이는 밑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초인이라지만 저 정도로 법칙을 많이 무시하다니…

라-반더의 육체가 적용 받는 법칙과 상수는 자신의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경지와 ‘길’에 따라 정해져 있는 것이다.

자신도 줄다리기에서 이길 자신은 있지만 아마 바다 쪽으로 상당히 끌려갔을 것이다.

그 덕에 여차하면 도와줄 준비를 하고 있었던 스틸은 그냥 조용히 구경만 하게 되었다.

“와아! 이거 상당히 재미있네요? 흐하하! 이 맛에 낚시를 하는군요, 다들.”

“…….”

쇠사슬을 끊지도 못하는 채로 이리저리 발버둥 치던 녀석은 이제는 난동에 가까운 몸부림을 부리고 있었다.

시안이 반데르로 라므란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입안에 있던 그는 강철로 둘러싸여있다고 해도 반동에 의해 진작 온몸이 으스러졌을 것이다.

물론 전신을 두드려 맞는 느낌이야 들고 있겠지만.

쿠과과광!

우드득!

끌려 들어올수록 수심은 얕아졌기에 녀석이 난동을 부리자 바닥이 울리고 가운데 있던 작은 섬들이 모조리 박살 나기 시작하였다.

왼쪽으로 구르니 해변가에 움푹 구덩이가 파였다.

오른쪽으로 구르니 휴양용 저택을 지어놓은 섬 하나가 통째로 박살 났다.

그 진동은 저 멀리 고지대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마르가란의 사람들에게도 똑똑히 전해졌다.

“맙소사…….”

“신이시여……!”

작은 산만 한 괴수가 육지로 질질 끌려 나오는 광경은 어디에서도 흔하게 볼 수 없는 광경임이 틀림없다.

마치 섬이 육지로 점점 이동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물론 섬이라면 저렇게 주위를 모조리 박살 내며 끌려오진 않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난동도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힘이 빠진 건지, 아니면 도망가려고 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인지 녀석의 반항은 점차 줄어들고 있었고, 이윽고 해안가로 절반 정도 끌어올려졌다.

이제 시안은 더 여유 있게 녀석을 끌어당기고 있었고, 그 뒤 해변가에는 녀석이 끌려온 자리가 묵직하게 남아있었다.

난동과 상관없이 끌어당기는 속도는 일정했다.

반쯤 끌어올려진 녀석을 본 사람들은 모두가 섬뜩함에 몸을 떨었다.

끌려온 녀석은 전체적으로 해양생물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몸에는 당장에라도 사용 가능해 보이는 튼튼한 여섯 개의 다리가 붙어 있었다.

게다가 육지에서의 호흡이 가능한지 얼굴 쪽에 나 있는 거대한 입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이렇게 고지대에 올라와 있으면 안전할 줄 알았건만 자칫하면 모조리 잡아먹힐 뻔했던 것이다.

저런 녀석이 쫓아오면 어디 도망가지도 못한다.

산을 뭉개며 쫓아올 것인데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반항도 소용없었을 것이다.

괴수의 머리 위에는 커다란 다섯 개의 뿔과 살짝 자라고 있는 작은 하나의 뿔이 보였다.

여섯 뿔의 하리쟌으로 진화하기 직전의 녀석이라는 것이다.

예전에 그랑-반더를 수장시켰다는 그 녀석, 바쿠론이 틀림없다.

동시에 저 쇠사슬의 반대편에 머물러있는 자는 과연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전설 속의 대제, 브록시안이 자신들을 지켜주려고 현신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저럴 수는 없는 법이다.

사람들은 물 바깥으로 끌려 나온 하리쟌이 꼼짝도 못하는 것을 보고서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하리쟌보다 쇠사슬 반대쪽의 인간이 더욱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은 한동안 멍하니 반쯤 박살 난 도시와 괴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읏차!”

시안은 잡혀온 괴수의 입을 벌렸다.

괴수는 한 번쯤 반항을 해볼 법도 한데 여덟 개의 눈만 뒤룩뒤룩 굴리고 있었다.

멀리서 볼 때는 그나마 버틸 만했지만 이렇게 코앞까지 끌려와 그 존재감을 느끼니 공포에 질려 생각이 정지한 것이다.

거기다 자신이 까불거린 것이 생각나 괴수는 눈치를 보며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시안은 녀석의 입안 쪽에 깊숙이 박혀 있던 낚싯바늘을 꺼낸 후 거기에 달린 문을 열고 라므란을 꺼내었다.

라므란은 기절한 상태였지만 시안이 신경 써서 보호했던 터라 전신 타박상을 빼고는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손에는 왕관을 꼭 쥐고 있었다.

저것도 들고 갈까 했지만 사용자를 백치로 만들어버리려고 하는 저런 흉물스런 아티팩트는 줄 사람도 없고, 쓸 생각도 없었기에 관심을 끄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라므란을 뒤에 밀어둔 시안은 눈앞에 끌려온 망둥이 녀석을 올려다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후후… 친구, 해줄 일이 있습니다.”

스틸 양은 정말 천재라고 중얼거린 시안은 손에 이제는 낚싯줄로서의 용도를 다한 쇠사슬을 들고 천천히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망둥이, 바쿠론은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백사장에 누워 숨을 헐떡이며 눈만 뒤룩뒤룩 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저 존재는 자신을 해칠 생각이 없어 보이니.

“아, 까먹을 뻔했네.”

시안은 쇠사슬을 들고 가다가 크로나-폰을 소환하고 흉악하게 웃었다.

“우선 좀 맞아야지.”

꾸어어어엉!

시안은 구슬프게 울부짖는 녀석을 보며 야차 같은 표정을 지었다.

무게가 많이 나가니 맞고 어디 날아가지 않아서 편할 것이다.

“후후. 좋아, 완성입니다.”

“…동생은 정말 전투에 재능이 있구나.”

“…칭찬이 아닌 것 같은데요. 전 방금 창조적인 제작을 했습니다만.”

전신에 멍이 들어있는 바쿠론, 아니 이제는 망둥이 1호의 등은 시안이 낚시에 사용한 쇠사슬이 칭칭 감겨있었다.

포박을 위한 용도가 아니었다.

칭칭 감긴 쇠사슬에는 작은 집만 한 강철의 상자가 하나 달려있었다.

쇠사슬은 망둥이 1호의 등에 저 강철의 상자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쓰고 남은 낚싯바늘과 쇠사슬을 손으로 빚어 만든 상자였다.

“후후. 스틸 양, 어찌 되었든 고맙습니다. 어떻게 이 녀석을 타고 바다를 건널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렇다. 저 위의 상자는 거주용으로 제작된 상자였다.

시안과 스틸은 망둥이 1호를 타고 키아란 해를 건널 생각이었다.

이 녀석을 타고 건너면 귀찮은 하리쟌 녀석들은 감히 덤비지도 못할 것이다.

게다가 배보다 속도도 훨씬 빠를 것이고, 이 녀석 자체가 진미이니 따로 먹을 것을 싣고 갈 필요도 없다.

그 자리에서 상자 옆을 회를 뜨면 그만이니 말이다.

하리쟌 고기는 맛있기로 유명했고 그 뿔의 개수가 많을수록 진미였다.

아마 녀석의 고기 맛은 굉장할 것이다.

그리고 좀 퍼낸다고 하여도 이 녀석 덩치에는 표도 나지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수송용이었던 것이다.

시안은 저 녀석을 보자마자 그 생각을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이 녀석을 토막 쳤으면 땅 위로든, 물 위로든 꼼짝없이 걸어서 키아란까지 가야 했을 것이다.

“후후후. 말했잖아, 동생. 이 몸은 모든 방면에서 다재다능하다고 말이야.”

“그럼 저 강철 상자도 좀 직접 만드시지 그러셨습니까.”

“동생… 분업 몰라, 분업? 나는 아이디어를 제공했잖아. 노동력은 동생이 제공해야지.”

“쩝… 그나저나 만들어놓고 보니 좀 투박하긴 하군요.”

강철 상자는 시안의 계획보다 크게 제작되었다.

스틸이 굳이 저택의 정원만 한 침대를 집어넣어야 한다고 우겼기 때문이다.

시안도 그 침대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그에 동의했고 강철상자는 생각보다 좀 더 크게 제작되었다.

“흠… 그 라므란이라는 분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뭐… 좋지는 않던데. 아까 그 치안대라는 녀석들이 데리고 가던데.”

시안은 살짝 불쌍하긴 하였지만 이번에 이 청년이 불러일으킨 결과를 생각하면 인과응보라는 표현도 모자랐다.

이번의 사태로 마르가란이 받은 피해는 천문학적이라는 표현으로도 부족했다.

해변가 완파.

해변도시 위 거주구역 반파.

귀족가 별장구역 반파.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단의 작동 중단.

다른 것보다 마지막의 요소는 어머어마한 타격이었다.

앞으로 이곳은 무역도시로서 작동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관광도시로서도 활성화되기 힘들 것이다.

라가오포라가 사라졌으니 재기할 수도 없다.

한 청년의 무모한 행위로 인해 번성하던 도시가 단 한 순간에 망해버린 것이다.

이 청년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무장들은 모조리 달라붙어 누구와 공모했는지를 조사하고 있었다.

애초에 아무도 밝히지 못했던 제단의 비밀을 서커스나 하던 청년이 안다는 것 자체가 수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라므란이라는 청년의 두뇌는 완전 어린아이 수준으로 퇴화하였기에 수사 자체가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관을 다시 제단 위에 올려놓아도 작동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 때문에 현재 관에는 바빌의 지휘 아래 모든 법도사들이 달라붙어 있지만 도무지 진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여러모로 마르가란은 절망에 빠져들고 있었다.

탈루크 후작의 발 빠른 대처와 시안의 낚시가 없었다면 절망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절망할 사람이 남아있지 않았을 테니.

그나마 사람을 잃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자위한 탈루크 후작은 이 도시를 어떤 식으로 재기시킬지 열심히 연구하고 있었지만 예전의 성세를 되찾기는 힘들 것처럼 보였다.

시안은 이쯤에서 생각을 멈추고 식료품을 비롯한 물자들을 싣기 위해 망둥이 1호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퍽!

그러자 신기하게도 망둥이 1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는 것처럼 꼬리의 촉수를 이용하여 물자를 등 위로 실어 날랐다.

“이 녀석 영특하네요, 보기보다.”

생긴 건 흉측하게 생긴 데다 크기는 작은 섬만 한 녀석이 하는 짓은 똘똘한 강아지를 보는 것 같았다.

“후후. 하리쟌들은 기본적으로 강할수록 영리하다고. 멍청하면 강해질 때까지 살아남을 수 없으니.”

“오, 그렇군요.”

“그리고 그 정도 맞으면 누구나 말을 잘 듣는다고. 후후.”

“…준비되셨으면 출발하지요.”

강철상자에 올라탄 시안은 스틸이 타자 다시 한 번 발로 등을 걷어찼고 망둥이 1호는 구슬픈 소리를 내며 바닷속으로 첨벙첨벙 들어갔다.

그리고 상자가 매달려있는 등만을 수면 위로 내놓은 채 유유히 키아란 해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 ☆ ☆

“후… 도무지 모르겠군, 이건.”

바빌은 관을 연구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무슨 재질로 만들었는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어떤 기술이 적용되었는지 알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역사 속의 기록도 찾아봤지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알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유일하게 사용이 가능한 자는 백치가 되어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도 없었다.

“피곤하군… 자야겠어.”

주위의 법도사들은 모두 퇴근한 지 오래였다.

이곳은 무장들이 경호를 서고 있기에 바빌은 관을 기둥 위에 놓아두고 휴식을 취하러 돌아갔다.

그리고 바빌이 사라진 지 얼마 후.

무언가 작은 일렁거림이 관을 올려둔 기둥의 상을 일그러트렸다.

그러고는 그 자리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기둥을 향해 손이 불쑥 뻗어 나왔다.

손의 주인은 유심히 허공을 쳐다보았다.

아니, 허공이 아니었다.

라므란이 괴인이라고 부른 자의 눈에는 명확한 글자들이 보이고 있었으니까.

[퀘스트: <?로 만든 관>을 찾아라.]

-사용할 수 없는 관을 라가오페의 후손을 통해 얻어라.

-보상: <?로 만든 관>, 경험치 380,000

“…좋아.”

괴인, 칼-키라트는 미소를 지었다.

처음 이 퀘스트를 받았을 때 보상으로 지급되는 아이템을 처음 보고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지만 추가적으로 붙어있는 흉악한 옵션에 자신은 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사용자의 능력을 초과해서 사용할 경우 지능을 맹렬하게 퇴화시킨다.>

게다가 그 관은 라가오페의 후손의 피를 머금어야만 기존의 명령어를 변경하고 리셋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렇게 복잡하게 일을 꾸민 것이다.

녀석의 손에 관이 들어가게 하고 명령어를 리셋시키기 위해서.

라가오포라를 유지하는 명령어는 자신에게는 하등 쓸모가 없다.

다행히도 일이 모두 잘 풀렸다.

명령어는 훌륭하게 리셋되었고, 자신은 <동료> 기능으로 녀석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관의 행방을 알아내고 이렇게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의외의 소득.

‘으드득… 이런 곳에 있었다니…….’

처음에는 녀석의 가족에게 복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최근 종족의 숙원을 이룬 대장로님의 말을 듣고 포기하였다.

<경지에 이르면 가족은 의미가 없어진다. 괜히 건드렸다가 경계심만 돋우지 말고 본인을 노려라.>

경지에 이른 대장로님의 말이기에 틀림없을 것이다.

왠지 목소리가 조금 떨리긴 했지만… 종족의 숙원을 이룬 것이 기뻐서 그런 것이 틀림없으리라.

이번에 얻은, 이 관은 복수에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그 반쪽짜리 후손은 이 관을 모두 활용하지 못하였지만, 자신의 스킬을 활용하면 부작용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모조리 그 힘을 끌어낼 수 있으리라.

낚시로 치면 이번 낚시는 대성공이었다. 월척을 낚은 셈이다.

그렇게 생각한 키라트는 관을 챙겨 넣고 나타났던 때와 같이 다시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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