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39화 (40/81)

<39. 아펜탈>

“뭐야… 이거 갑자기 왜… 키라트, 어떻게 된 거야, 어?”

갑자기 미친 듯이 화를 내더니 도시를 향해 냅다 브레스를 갈겨버리는 바라쿠나를 보고 라가오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잘 조종되고 있던 녀석이 갑자기 왜 이런단 말인가. 예상 못한 사태에 당황한 라가오페가 키라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키라트는 어찌 된 일인지 혼절한 상태였다.

“허허… 이거 참…….”

자신이 조종하려고 관을 다시 써보았지만 작동을 하지 않았다. 아직 키라트 이 아이와 연결이 되어 있다는 뜻이다.

라가오페는 도통 이해를 할 수 없었기에 우선 키라트를 등에 업었다. 바라쿠나 녀석이 미친 듯이 케르발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 진동이면 키라트라는 아이는 내장이 진탕되어 죽을 수도 있기에 라가오페는 키라트를 업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라가오페가 뛰어내리자마자 무언가가 쏜살같이 날아오면서 바라쿠나의 뺨을 후려갈겼다.

쿠아아아앙!

바라쿠나에서 멀어지려던 라가오페는 순간 후폭풍에 휘말렸기에 당황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쿠어어엉!

바라쿠나가 그 큰 덩치를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무언가가 딱 봐도 별로 호감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 기세를 풍기며 날아들고 있었다.

“이런…….”

이대로 휩쓸리면 자신은 몰라도 등 뒤의 키라트는 꼼짝없이 죽는다.

그렇게 생각한 라가오페는 손목의 작은 팔찌를 가동시켰다.

그러자 라가오페의 몸 주위 공간이 일렁이더니 순식간에 라가오페와 키라트를 집어삼켰고, 그 자리로 바라쿠나의 거대한 동체가 지나갔다.

쿠아아아앙!

대기를 쭈욱 찢으며 날아간 크로나-폰이 녀석의 얼굴에 명중하는 것을 본 시안은 바로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덩치를 향해 몸을 날렸다.

바다 위로 우뚝 서있는 산이 넘어가는 모양새는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장관이었다.

게다가 그 산이 움직이기까지 한다면 말이다.

옆으로 넘어가고 있던 녀석은 빠르게 그 피해를 회복해내고 옆의 바다를 자신의 발로 짚었다.

쿠우웅!

발로 땅을 지탱했을 뿐이지만 그 때문에 생겨난 거대한 해일은 반쯤 부서진 케르발을 한 번 더 휩쓸었다.

시안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저 도시는 첫 폭발에 망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다리가 여덟 개라 그런지 순식간에 균형을 잡은 녀석은 그대로 남은 다리를 들어 시안을 후려갈겼다.

망둥이 1호보다 훨씬 큰 덩치였지만 오히려 더 빨라 보였다.

시안은 녀석의 앞발을 크로나-폰으로 계속해서 후려쳤다.

시안이 들고 있는 칼은 강력한 힘이 담겨져 있지만 녀석의 덩치에 비하면 정말 생채기를 내는 수준에 불과해야 했다…….

그래야 맞았다.

하지만 시안이 칼로 후려칠 때마다 녀석은 마치 운석에라도 맞은 듯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달려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 녀석… 왜 이리 끈질기게…….’

시안은 처음 겪어보는 하리쟌과의 싸움이 여러모로 신기했다.

하나는 그 특이한 강함에.

하나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그 맹목적인 흉포함에.

인간을 벗어났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초인들과는 또 다르다.

기술도 없다.

반데르나 엑사르를 운용하는 것도 아니다.

배운 것도 없다.

본능에 따라 적을 쫓고 타고난 힘으로 후려친다.

그렇지만 강하다.

아마 라그랑의 삼인조로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상대는 아니다.

시안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이 부분이었다.

애초에 이 녀석도 어렴풋이 이런 것을 알고 있을 텐데 마치 철전지 원수라도 만난 듯 거칠게 달려들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녀석을 놓아둘 수 없는 법.

시안은 손목에 반데르를 맹렬하게 불어넣었다.

이윽고 온갖 광채가 손목부터 시작하여 전신을 휘감았다.

그리고 마치 하늘을 가르는 혜성처럼, 길게 빛의 꼬리를 이끌며 쭈욱 뻗어나갔다.

☆ ☆ ☆

<죽인다… 죽인다…….>

<찢어 먹는다…….>

<삼킨다…….>

키라트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바라쿠나의 감정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실제로 바깥, 자신의 본체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게다가 바깥에서 시안 저 자식에게서 끊임없이 두들겨 맞는 고통이 가감 없이 전해지고 있어 더욱 괴로웠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 녀석을 조종할 수 있었다.

파괴의 화신 같은 이 녀석은 원래 자신의 수준으로 조종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다. 그렇기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제어를 풀었다. 그리고 억눌려 있다 폭발하는 바라쿠나에게 관을 사용하여 자신의 감정을 옮겼다.

정확히는 시안에 대한 자신의 기억과 감정.

그러자 안 그래도 자신이 제어되던 상황에 미치려고 하던 녀석은 그 분노를 모조리 시안에게 돌렸다.

그리고 그 분노는 시안에게 두들겨 맞으며 점점 더 증폭되고 있었다. 이 녀석의 생존본능마저 억누를 정도로.

지금 하고 있는 공격은 자신이 조종하는 것이 아닌, 이 녀석이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는 모자랐다. 이 녀석으로는 이길 수 없다. 그렇기에 더욱 퀘스트를 완료해야 한다.

[천고의 기회]

-목적지인 케르발에 당신의 목표가 있습니다. 정말 흔치 않은 기회. 복수를 하고 싶다면 이번 기회에 성공시켜야 합니다.

-<바라쿠나>를 조종하여 상대를 <던전: 아펜탈로 가는 문>에 밀어 넣으십시오.

-에너지 공급이 멈추었기 때문에 <아펜탈로 가는 문>은 곧 닫힙니다. 그 전에 미션을 완수하십시오.

-시간 제한: 15분 (7:21/15:00)

-보상: 경험치 420,000, <?로 만든 관> 숙련도 3.1% 증가.

-주의: 절대 <아펜탈로 가는 문>에 휩쓸리지 말 것. 귀환 사용 불가 지역.

퀘스트창을 본 키라트는 <아펜탈로 가는 문>이 무엇인지를 몰랐지만 곧 알게 되었다.

저 멀리 보이는, 바라쿠나도 충분히 들어갈 만한 거대한 붉은 구체. 저것이 아펜탈로 가는 문이리라.

하지만 의아했다. 도대체 어떤 곳이길래 저 안으로 밀어 넣기만 해도 미션이 성공이라는 것인지.

그렇기에 저 붉은 구체를 향해 그랑-라의 눈을 한번 써보았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설명에 쓰여 있는 단 한 줄로 확신이 섰다.

이길 필요는 없다.

반드시 저 자식을 저 안에 처넣는다.

<아펜탈로 가는 문>

……

-레벨제한: 399

……

-접속자 수준으로는 매우 위험하니 절대 접근하지 마시오.

☆ ☆ ☆

“아…….”

쿠린은 사방에서 울리는 진동에 뒤통수를 만지며 눈을 떴다.

‘…무슨 일이지.’

분명 시민들을 조금이라도 더 대피시키려고 도시로 가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하지만 그 부분에서 기억이 끊겼다.

‘설마, 휩쓸린 건가……?’

정체불명의 산이 걸어 다니는데 그 녀석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살아있음에 감사하던 쿠린은 그제야 동료들이 생각났는지 허겁지겁 주위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주위를 돌아보니 레카와 린나, 켈빈 모두 깨어나 있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자신이 깨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을 보고 있다는 것.

쿠린은 그들의 안부를 물을 생각도 못 하고 그들이 보는 방향을 쳐다보려고 할 때 자신에게 들려오는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후후, 일어났니.”

목소리의 출처를 바라보니 그 스틸이라는 맹수 같은 여자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 여성은 매우 즐거운 듯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인가요?”

“보면 모르니. 흐흐. 너희가 가지고 있던 목걸이 값을 동생이랑 내가 지불했지, 뭐. 한 명만 구할 수 있는 목걸이로 넷이나 구했으니 우리가 거스름돈이라도 받아야 할 것 같지만… 기분이 좋으니 봐주도록 하지.”

‘…목걸이 값?’

그제야 쿠린은 정황이 없던 와중에 이 여자가 자신들과 했던 약속이 생각났다.

‘목걸이 값 대신 너희들의 목숨을 구해주마.’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어 저 말이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은 쿠린은 다시 한 번 입을 열려고 했다.

도대체 자신들을 어떤 식으로 구해주었다는 것인지.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갑자기 엄청난 굉음에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쿠린은 자신들의 동료가 보고 있던 광경을 그대로 보게 되었으니까.

“후후… 목걸이 값은 확실하지?”

그 말에 쿠린은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있던, 그리고 자신들이 머물려고 했던 도시는 이미 가루가 되어있었으니까.

저 산만 한 녀석이 박살 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저 녀석은 피해자에 가까웠다.

저 덩치 녀석은 두들겨 맞다가 도시 쪽으로 튕겨 나와 데굴데굴 굴렀을 뿐이니.

그리고 그 반대쪽에는, 이 먼 거리에서도 보일 만큼 빛나는 존재가 하늘에 떠있었다.

“…설마?”

“후후. 동생 정말 멋지지 않니? 진짜… 매일 저렇게 살면 좀 좋을까… 하아…….”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아련하게 허공의 빛을 바라보던 여성이 말했다.

쿠린은 직감적으로 그녀가 말하는 동생이라는 존재가 자신이 시비를 걸던 남자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쿠린은 저 말에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저런 힘을 가진 자는 결코 자신의 멋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

적어도 그것이 자신들에게는 이로웠다.

하지만 너무 무서웠기에 그 말은 입 바깥으로 꺼내지도 못한 채로 쿠린은 동료들과 같이 으스러지고 있는 해변가를 쳐다보기만 하였다.

쿠린이 일어날 때쯤에는 이미 상황은 점점 종료되어 가고 있었다.

붉은 구체는 나타날 때의 그 놀라운 존재감과는 달리 점차 그 크기를 좁히며 사그라지고 있었고, 여섯 개의 뿔이 위풍당당했던 괴수는 이제 뿔이 세 개만 남고 전신이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숨만 몰아쉬고 있었다.

허공에 떠 있는 빛도 이제 상황이 종료되었다고 여기는지 점차 그 빛을 꺼트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 순간이었다.

괴수가 미친 듯이 붉은 구체로 달려들었다.

“허허… 저 소 대가리가 뭐 하는 거지…….”

부러진 뿔에 여러 가지 생김새가 마치 소와 같았기에 소 대가리라고 명명한 스틸이 녀석이 하는 우스꽝스러운 짓을 보며 웃었다.

녀석이 하는 짓이 마치 좁은 항아리에 몸을 숨기려는 문어와 흡사했기 때문이다.

이미 붉은 구체는 많이 좁아져 있는 상태였기에 저 상태로는 녀석의 머리까지밖에 안 들어간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붉은 구체에 머리를 박은 소는 그 틈에 머리가 끼어버리고 말았다.

“하하… 별 웃기는 녀석 다 보겠네.”

그 우스꽝스러운 광경에 켈빈을 비롯한 네 명도 긴장이 풀려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쿠아아아아앙!

붉은 구체에서, 정확히 말하면 그 안에 머리를 박고 있던 소 대가리의 입에서 굉장한 수준의 푸른 에너지가 방출되었다.

아까 도시를 반파시켰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력.

도대체 이제까지 밀리며 저걸 왜 쏘지 않았나 할 정도였다.

그 순간, 붉은 구체를 중심으로 어마어마하게 흉측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커억!”

“흐아아악!”

엄청나게 멀리 있었는데도 그 사악한 기운을 그대로 뒤집어쓴 네 명은 단말마의 비명을 내뱉으며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스틸이 갑작스런 상황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 좁아지고 있는 붉은 구체로 인해 으스러지고 있던 바라쿠나의 머리를 뚫고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뻗어 나왔다.

“무슨……?”

자세히 보니 길게 늘어나고 있는 팔이었다. 너무나 빠르고 길었기에 마치 붉은 선으로 보였다.

정말 엄청난 속도였다. 스틸의 눈에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수준.

그 붉은 손은 쭈욱 하늘로 뻗어나가더니 그대로 허공에 떠 있는 시안을 낚아챘다.

시안은 엇 하는 사이에 그대로 그 손에 움켜쥐어지고 말았다.

촤아아아악!

그리고 붉은 손은 뻗어 나온 속도보다도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붉은 구멍 안으로 되돌아갔고, 붉은 손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구멍은 그 힘을 다했다는 듯 완전히 닫혀버렸다.

그 순간, 사람을 미치게 만들 정도로 사악한 기운이 언제 있었냐는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머리가 없어진 바라쿠나만이 덩그러니 쓰러진 채로 무언가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 ☆ ☆

“…저 자식 뭐였지.”

리비아스가 옆에 서 있는 라가오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라가오페도 무언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처음 보는 라-반더였다.

이제까지 자신들이 파악하지 못한 라-반더가 있을 리 없는데.

하지만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뭐… 신경 안 써도 되지 않나, 저 안에 들어갔는데. 이제 없는 거나 똑같지.”

실험은 대성공이었다.

비록 붉은 구체, 타샤-다곤의 위력은 잠시만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바라쿠나가 잠시 저 차원의 벽을 깨버린 사이 라가오페와 리비아스는 저 건너편 녀석들이 어느 정도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으니까.

만약 타샤-다곤이 깨진 상태로 조금만 더 지속되었다면 위험했을 것이다.

“타키온에게 차원 경계를 좀 더 강화하라고 해야겠군. 저 정도로 부서지면 곤란해.”

“뭐, 바깥에서 공격한 거고… 안에서는 못 부술걸.”

“항상 만일의 사태는 대비해야지.”

그 외에도 수정할 부분이 몇 가지 보였지만 타샤-다곤의 위력을 확인했으니 그런 부분을 수정하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다.

거기까지 떠올린 라가오페는 다른 생각을 했다.

‘키라트…….’

키라트가 정신을 잃은 채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아직 어떻게 된 일인지 확실한 게 없기에 돌아가서 천천히 살펴보기로 했다.

“나는 할 일이 많아 먼저 돌아갈 테니… 정리 좀 하고 오라고, 리비아스.”

“후후. 산책치곤 얻은 게 많군.”

리비아스가 즐거운 표정으로 말했고, 라가오페 또한 그에 동의했다.

악사라이의 접속자부터 타사-다곤의 관찰자료, 사라졌지만 새로 나타난 초인의 존재까지.

바라쿠나가 허무하게 죽어버린 것은 아깝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라가오페가 키라트라는 신입을 데리고 돌아가고 난 뒤, 리비아스는 타샤-다곤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힘을 과하게 썼나 보다.

저 멀리서 자신을 알아보고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흠… 그냥 가지는 못하겠는데.”

리비아스는 저 멀리서 날아오는 흉폭한 기세를 보며 말했다.

스탄탈이었다.

쿠와와왕!

운석처럼 날아와 땅을 박살 내며 착지한 스탄탈이 리비아스를 잡아먹을 듯 쳐다보았다.

“스탄탈 꼬맹이. 오랜만이네.”

리비아스는 예전에 치고받았던 기억이 있지만 악감정은 없었기에 반갑게 인사했다.

어차피 별 다툼도 아니었고 이 드넓은 대륙에서 서로를 원수로 삼기에는 초인들은 서로가 너무나 소중했다.

“…열어.”

“음? 뭐라고?”

“당장 저 시뻘건 거 다시 열라고! 이 음흉한 영감탱이가!”

스탄탈이 열이 받을 대로 받아 소리쳤다.

“허허, 꼬맹이… 왜 이래, 이거. 난 아무 관련 없어.”

리비아스는 어처구니가 없어 소리쳤다.

어떤 상황인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 저기서 바라쿠나를 두들겨 패던 초인이 아는 사이인가 본데 저 안으로 끌려갔으니 저러는 것일 터다.

하지만 명확한 증거는 없을 터. 발뺌하고 우기면 그만이다.

“까드득… 어디서 거짓말이야. 이런 거 열 수 있는 사람이 영감탱이 말고 어디 있다고. 아까 여기 한가운데 서서 ‘길’ 준비하는 것도 다 봤거든?”

스틸이 이를 박박 갈면서 외쳤다.

‘이런… 몰래 살펴보고 있었나…….’

스탄탈 성격에 몰래 보고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우겨봤는데 다 보고 있었나 보다.

리비아스는 순순히 자백하기로 했다.

“아… 나야 뭐, 그냥 힘만 공급했지. 내가 뭘 안다고 저걸 다시 열겠어. 법진 다 박살 난 거 안 보여?”

“그러면 저거 만든 놈들 다시 모아오면 되지. 그나저나 저런 흉악한 건 누가 만든 거야.”

“그리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다시 열어서 어쩌려고?”

“꺼내 와야지!”

“…아까 그 안에서?”

“…….”

스틸은 그 순간 말문이 턱 하고 막혀버렸다.

“너도 저 안에 뭐 들어있는지 봤잖아. 그런데 저걸 다시 열라고?”

어처구니없어하는 리비아스의 말에 스틸은 할 말이 없었다.

저걸 여는 순간 지옥이다.

아까 소 대가리 녀석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붉은 구체가 일부 깨져나갈 때 스틸 역시 그 안을 똑똑히 살필 수 있었으니까.

정체를 모르겠는 녀석들.

하지만 스틸은 녀석들을 바라보며 소름이 쫘악 돋았다.

아무런 표정도 없다.

오로지 먹잇감을 보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시안을 끌고 간 것도 그런 이유이리라.

녀석들은 붉은 구체 안에서 어떤 먹이가 가장 맛있을지 계속 살피고 있었을 테니까.

만약 구체가 닫히는 시간이 조금만 늦었어도 자신이나 리비아스도 끌려갔을 수도 있다.

녀석들을 생각하니 갑자기 자신감이 사라졌다.

다시 열어도 도저히 시안을 구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스틸의 표정을 본 리비아스가 그것 보라는 듯 말했다.

“봐 봐, 열 수 있다 해도 그 안에서 어떻게 데리고 나오겠어. 게다가 다시 열 수도 없다니까?”

리비아스는 이렇게 변명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해 짜증이 날 지경이었지만 조심하기로 했다.

이 개망나니 꼬맹이가 눈 돌아가면 장유유서고 뭐고 없으니까.

당장 화를 풀겠다고 눈앞의 자신을 두들기려고 달려들 것이다.

그리고 리비아스는 부끄럽지만 이 꼬맹이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아… 진짜 오늘 체면 구기네. 그냥 라가오페 그 녀석 따라갈걸…….’

“으으… 으으아아!”

스틸은 열이 받을 대로 받아 이미 땅을 구르고 난리였다.

쿠앙! 쿠왕! 쿠르르릉!

땅을 구를 때마다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파이고 안 그래도 박살이 난 케르발 지역이 모조리 무너지고 있었다.

리비아스는 찔끔해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저런다는 것은 정말 터지기 일보직전이라는 뜻이니까.

자신이 샘물 좀 가져가겠다고 덤볐을 때도 딱 저러다가 달려들었다.

“난 그럼 간다, 꼬맹아. 뭐… 힘내라.”

그리고 발걸음을 돌리던 리비아스는 순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쩌적.

분명 흔적도 없이 사라진 붉은 구체가 있던 허공에 금이 가고 있었다.

“오, 시안 동생!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스틸이 옆에서 기쁨에 가득 차 소리쳤다.

역시 자신과는 차원이 다른 강자.

살아 돌아오는 것이리라.

하지만 곧 표정이 굳었다.

리비아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고는 아까 투닥거리던 것도 잊은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 씨…….”

“이 망할 꼬맹이! 말이 씨가 됐잖아!”

그리고 둘은 미친 듯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둘이 도망간 뒤로, 계속해서 무언가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빠자작, 까드득, 아작!

이윽고, 둘이 보고 있던 허공이 완전히 쪼개졌다.

빠직!

그리고 그 안에서 아까 시안을 끌어당겼던 붉은 손이 불쑥 하고 튀어나왔다.

그 손은 허공을 찢어버리는 듯한 모양새로 허공의 틈을 붙잡고 있었다.

이윽고 허공이 완전히 갈라지고 붉은 손이 모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손은 아까 시안을 낚아챘던 모습 그대로 흉험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충분히 리비아스와 스틸이 도망갈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리비아스와 스틸은 그 녀석들 때문에 도망간 것이 아니었다.

분명 그 녀석들도 공포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 뒤에서 느껴지는 소름 돋는 기운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붉은 손은 본체가 없었다.

오로지 손만이 어딘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자신이 쪼갠 허공의 틈을 붙잡고 있었고 그 뒤로는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뒤로 스틸과 리비아스를 도망가게 만든 분노가 섞인 울부짖음이 무저갱 같은 붉은 구멍에서 울려 퍼져 나왔다.

“으아아아! 이거 연 개자식 어떤 자식이야! 진짜 다 죽여 버린다!”

으아아아아아!

저 멀리 뒤에서 울려 퍼져 나오는 소리에 리비아스는 소름이 돋은 팔을 쓸어 내렸다.

그 잠깐 사이에 엄청나게 멀리 도망갔는데도 그 흉험한 기세가 여기까지 퍼져 나온다.

‘미친…….’

강한 녀석인 줄을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녀석이었다.

바라쿠나와 싸울 때는 손속에 여유를 가지고 싸웠기에 몰랐다.

원래 사람이 밑바닥까지 끌어내려지지 않으면 별로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

생물의 가장 흉폭한 공격본능은 가장 위험한 상황에서 나오기 마련이니.

그리고 자신이 보기에도 녀석의 밑바닥이 드러날 상황은 별로 없어 보였다.

하지만 타샤-다곤은 아마 녀석의 밑바닥을 보여주기 충분했을 것이다.

그게 저 결과이다.

마땅히 지옥에 있어야 할 만한 녀석이 흉폭해질 대로 흉폭해져 지옥도 뚫고 기어 올라온 것이다.

미친 괴수가 날뛰니 자신 같은 선량한 사람은 피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야, 꼬맹이, 넌 왜 도망가냐? 너 저 괴물이랑 친구 아냐?”

“아… 그건 그런데… 솔직히 좀…….”

스탄탈이 살짝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리비아스는 그런 스탄탈을 굉장히 신선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이 녀석이 이런 표정을 지은 적은 처음 본 것이다.

항상 여유 있는 표정 아니면 야차 같은 표정. 둘 중 하나만 보아왔는데.

자신의 추측이지만 아마 저런 표정을 태어나서 처음 지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리비아스는 스탄탈 꼬맹이를 놀리거나 하지 않았다.

자신이라고 다를 바 없었을 테니.

자신이라도 저런 녀석이 저렇게 미쳐 날뛰고 있으면 도망가고 싶을 것이다.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말이다.

“후… 난 모르겠다. 난 이제 저 녀석이랑 볼 일 없으니… 내 갈 길 가련다. 넌 어쩔 거야?”

적당히 100킬로미터쯤 거리를 벌린 리비아스가 이제는 보이지도 않는 케르발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자신은 케르발 쪽으로는 오지도 않을 것이다.

“후… 그래도 좀 가라앉으면 돌아가 봐야지… 보니까 슬슬 진정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천천히 약해지고 있는 기세를 느끼며 스탄탈이 말했다.

바깥으로 나온 시안은 위험한 상황에서 빠져나오자 천천히 그 기세가 진정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가까이 다가가기 껄끄러웠기에 조금 더 있다가 돌아가서 챙기기로 했다.

“야, 꼬맹아, 그런데 저거 뭐야. 나 처음 봤는데…….”

리비아스는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저런 녀석이 있으면 알아두는 것이 좋으리란 판단하에서이다.

스틸은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어차피 감추어도 드러나게 될 것이다.

저 녀석이 지금 한 달도 안 되어 부순 도시만 두 개이다.

차라리 말해주고 피해 가라고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어차피 돌아갈 때까지 시간이 있으니 스틸은 말할 것은 말해주고 감출 것은 감추기로 한 채 말문을 열었다.

‘후후… 시안 동생, 진짜 나한테 잘해야 돼.’

자신이 내조의 여왕이라고 생각한 스틸은 대화를 마친 후 시안을 챙기기 위해 케르발 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스틸은 멀리서 살금살금 접근했다.

상처 입은 야수는 누구보다도 난폭하다. 특히 죽을 위기를 겪고 나왔다면 더욱.

죽을 위기를 처음 겪어봤을 동생의 상태가 어떨지 누구도 몰랐기에 평소 시안의 성격을 아는 스틸이지만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혹시 열 받아서 한 칼이라도 날리면 자신에게는 치명적이다.

저 멀리 붉은 구체가 있던 곳에 앉아있는 시안이 보였다.

붉은 구체는 이미 닫힌 상태인지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별로 위험하지 않을 것 같자 스틸은 시안에게로 빠르게 다가갔다. 그리고 시안의 상태를 보고 놀랐다. 시안은 앉아있는 채로 혼절한 상태였다.

손에 들고 있는 검은 칼 한 자루 빼고는 모조리 망가져 있었다. 자신이 아끼던 일곱 행성의 대갑주도 모조리 잿빛으로 변해 있었고, 팔찌의 보석도 쪼개져 있었다. 라그랑의 녀석들이 가지고 있던 전쟁신의 창과 그랑-라의 손도 모조리 조각이 나 그 형태만 유지하고 있을 뿐 그 휘황찬란하던 빛을 잃은 상태였다. 옷은 이미 넝마가 된 지 오래였고 전신도 상처투성이였다. 차츰 나아지고 있는데 이 정도라면 저 붉은 문에서 나왔을 때는 훨씬 심각했을 것이다. 얼마나 흉험한 전투를 겪고 나왔는지 한눈에 보였기에 스틸은 안쓰러웠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더 강해졌다.

맨몸에 상처투성이인데도 불구하고 일곱 행성의 대갑주를 두르고, 손에 검은빛과 황금빛을 두르며 싸우던, 바라쿠나를 때려잡던 그때보다도 더 강해진 느낌이 들었다. 수준이 훨씬 낮은 자신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맙소사… 그 이야기가 진짜였구나…….’

죽을 위기를 겪으면 더 강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 벽에 막혀 더 나아가지 못하는 시안이 강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스틸은 갑자기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 감정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주체할 수 없었다. 단순한 연애감정 따위가 아니다. 눈앞에서 자신이 존경할 만한 영웅, 혹은 신이 태어나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 어린 시절 전설 속의 대제를 동경하던 그 느낌이 이백 년도 더 지난 지금 다시 느껴지고 있었다. 이 아이에 대해 알아갈수록 새로운 감정이 새록새록 솟아올랐다.

스틸은 가슴속의 묘한 감정을 곱씹으며 시안을 업고 몸을 날렸다.

한창 몸을 날려 달리고 있는데 가는 길에 아까 방치해 두고 온 네 녀석이 보였다. 녀석들은 남자 하나를 데리고 열심히 가까운 도시로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아… 저 녀석들 살아있었나?’

급히 도망가느라 잊어버렸었는데 이제 상황이 종료되니 저 네 녀석이 생각났다. 생각해보니 시안이 나오자마자 기절했다면 딱히 추가적으로 위험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스틸은 기분이 너무나도 좋았기 때문에 녀석들도 데리고 가기로 했다. 절대로 수발들 녀석들이 필요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 ☆ ☆

키라안의 북쪽, 카란과의 국경 지역에 접하고 있는 도시 쿠라이트. 그 한복판에는 하나의 거대한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엑자일-대법도회의 본산.

<라-인타로>

‘지혜의 빛을 찾는 곳’이라는 뜻을 가진 고대어이다.

말 그대로 이곳은 라시안 대륙의 내로라하는 모든 지성들이 모여 서로의 지혜를 나누고 새로운 지식을 쌓기 위하여 불철주야 노력하는 곳이다.

그런 지성들의 정점에 올라있는 자.

엑자일 대법도회의 수장, 타키온.

그는 라-인타로의 가장 가운데에 위치한, 높은 탑에 항상 머무르고 있었다.

집단 연구를 제외하고는 평소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그의 연구실에는 언제나 적막만이 감돌았는데, 오늘은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타키온의 앞에 다른 사람이 서있었으니 말이다.

“흐음… 그랬단 말이지?”

법도회의 수장 타키온은 자신의 오랜 친구인 라가오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주된 관심사는 이번에 이 친구가 데리고 온 키라트라는 아이. 돌아가는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해서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그래. 갑자기 픽 쓰러지더니 바라쿠나 녀석이 미쳐서 날뛰더라고.”

“그리고 바라쿠나가 저쪽 공간에 머리를 처박고 죽었다고?”

“응. 머리는 잘려서 그쪽으로 넘어갔어. 아마… 모두 뜯어 먹혔겠지.”

라가오페가 건너편의 그 녀석들을 생각하며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오랜 생애 중에도 그 정도 녀석들은 몇 번 본 적이 없다.

“자네, 이 아이가 그라나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나?”

“당연하지. 게다가 악사라이의 접속자라니. 그 가능성을 보고 데리고 온 거라고.”

“그리고 그 관을 사용하게 했고?”

“응. 별문제 없을 줄 알았는데 이러네…….”

라가오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양 머리를 긁적였다.

“흐음… 잠시만 기다려 보게.”

말을 마친 후 엑사르와 각종 이적을 통해 키라트라는 아이를 조금 더 살핀 타키온은 라가오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선 결론부터 말해주겠네. 키라트라는 아이는… 사라졌어.”

“으잉? 그러면 안 되는데? 왜?”

키라트가 가진 능력은 정말 소중한 능력이었다. 이렇게 쉽게 사라져서는 안 된다. 당황한 라가오페가 타키온에게 물어보았다.

“이 아이… 관을 무리하게 사용하려다가 실수로 혼을 실었어, 바라쿠나에.”

“으잉? 그게 돼?”

“그라나인이라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네. 애초에 이 아이 수준으로 그렇게 바라쿠나를 난폭하게 만들 수 있을 리 없지.”

키라트는 관의 능력을 빌려 바라쿠나를 난폭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바라쿠나는 그렇게 녹록한 녀석이 아니다. 단지 관의 능력과 그라나인의 특성이 합쳐져 상승효과를 내면서 바라쿠나를 일시적으로 흥분시키고 정체불명의 초인을 공격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마지막에 바라쿠나로 타샤-다곤을 부순 것도 그 아이의 계획이었을 것이다. 생존본능이 강한 하리쟌이 거기에 스스로 머리를 처박았을 리 없으니까.

“그런데… 그러면 어차피 마지막에 빠져나오면 되는 거 아니야?”

“마지막에 타샤-다곤 너머로 머리를 들이밀지만 않았다면 그랬겠지. 엄청나게 고통스러웠겠군…….”

그 아이는 마지막에 돌아오려고 계획했겠지만… 머리가 딸려간 것이 큰 실수였다. 타샤-다곤으로 연결된 그곳은 영혼이라고 해도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곳이니까. 아마 그곳에서 혼조차 갈기갈기 찢겨나갔으리라.

“아… 큰일이네…….”

혼이 찢겨나갔다는데 라가오페는 동정심이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 없는, 단지 엄청 아쉽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그런 라가오페를 보며 타키온이 미소 지었다.

“키라트라는 아이는 분명 사라졌네. 하지만 악사라이의 접속자는 사라지지 않았네.”

그 말을 들은 라가오페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 뭐야? 그러면?”

“그렇다네. 원래 악사라이의 접속자는 심장과 뇌를 통해 발현되는 이능이니. 이 육체만 잘 보존하고 새로운 혼을 싣는다면 다시 살릴 수 있네.”

“하하하하하! 뭐야, 뭐야! 그러면 됐어! 좋아, 좋아. 이 기회에 한 명 더 살리면 되겠어.”

라가오페가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아주 좋다. 타샤-다곤을 성공시킨 것만 해도 만족스러운데 이런 결과라니.

키라트라는 아이는 능력은 좋지만 허약 그 자체였는데, 이렇게 되면 일석이조이다. 자신은 칼-키라트가 필요한 게 아니라 악사라이의 접속자가 필요한 것이었으니. 게다가 그라나인이니 혼의 안착률도 매우 좋을 것이다.

여러모로 일진이 좋은 하루였다.

“한동안은… 준비해야 할 게 많겠구나.”

라가오페는 타키온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라가오페는 전혼을 준비해야 하고, 타키온은 타샤-다곤의 강화 및 개량에 들어가야 한다. 둘 다 적은 시간이 걸리는 문제가 아니었기에 한동안은 이 일에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전혀 문제 될 건 없다. 자신들에게 남는 것이 시간이니.

‘그런데 리비아스 이 친구는 왜 이렇게 안 돌아오지…….’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라가오페는 돌아올 시간이 한참 지난 리비아스를 떠올리며 의문에 찬 표정을 지었다.

☆ ☆ ☆

모두가 자러 간 밤 시안은 잠을 이루지 못 하고 있었다. 분노는 어느덧 가라앉은 상태였다. 아까는 죽음에 대한 방어본능 때문에 눈이 돌아간 상태였지만 안전한 곳으로 돌아오니 빠르게 분노가 가라앉기도 했고, 그보다 더 흥미로운 관심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안은 이번에 새로운 경지에 올라선 육체를 살피고 있었다.

온몸에 힘이 넘쳤다. 더 이상 강해질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 정체불명의 흉악한 녀석들과 치고받고 일주간 싸우며 벽을 넘게 된 자신은 그 전의 자신과는 또 다른 강함을 가지게 되었다. 상처는 이미 회복된 지 오래였지만 시안은 다른 고민에 빠져있었다.

벽을 넘었다.

하지만 벽을 넘지 못 했다.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하나의 벽만 넘으면 또 다른 경지에 오를 줄 알았는데 이는 자신의 착각이었다.

하나의 벽을 넘은 것은 맞다. 하지만 그랑-반더와 라-반더처럼 완전하게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해서 넘어야 할 벽이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의 벽을 넘자마자 바로 또 다른 벽이 있었다. 아마 여러 개가 있을 것이다. 벽 사이 사이에도 현저한 차이가 있기는 했다. 아마 벽을 부술 때마다 훨씬 강해질 것이다. 지금처럼.

수련으로 강해지는 것이 아닌, 벽을 깰 때마다 계단식으로 강해지는 구조.

하지만 몇 개의 벽을 넘어야 할지 전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시안은 더 강하게 결심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생기면 반경 100킬로미터 안으로는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다. 무조건 달아난다, 무조건!

솔직히 이제까지는 약간 안일하게 생각한 면도 있었다. 자신도 가끔 답답했기에 차라리 이럴 거면 몇 번 죽을 위기를 넘기고 후련해지는 것이 낫지 않을까 라는 이유로부터 비롯된 아주 안일한 생각. 그리고 내심 대북벽만 넘어가지 않으면 누가 나를 죽일까 라는 생각도 있었다.

다 자신이 죽을 위기를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해서 그런 것이었다.

이번에 정말 죽을 뻔하고 나니 그런 생각이 정말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평생 단 한 번도 겪고 싶지 않은 끔찍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소설책의 모든 이야기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이걸 매번 겪으면서도 강해지기 위해 또 이런 상황을 찾아간다고?’

그럴 리가 없다. 아마 소설을 쓴 녀석 배에 칼침을 푸욱 놓아주면 앞으로 그런 글을 쓰게 되는 일은 평생 없을 거라고 시안은 자신할 수 있었다. 앞으로 자신이 벽을 넘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절대 죽을 위기에 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뭐… 앞으로 또 위험한 일이 있으려나…….’

자신이 생각해도 앞으로는 죽을 일이 없을 것 같았다.

‘후후. 나 너무 강한 거 아니야?’

자아도취에 빠진 채 시안은 하루를 마무리하는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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