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40화 (41/81)

<40. 그론-필라>

케르발 옆의 중소도시, 쿠핀은 소란스러웠다. 케르발이 거대괴수의 침입으로 멸망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법도회에서는 준비되고 있던 워프게이트 법진을 활용해 그 괴수를 죽였다고 발표했다.

모두가 환호했다, 역시 엑자일-대법도회라고. 케르발이 멸망한 것은 안타깝지만 그 괴수가 죽지 않았더라면 수많은 피해가 추가적으로 발생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 죽은 녀석은 조사 결과 뿔이 여섯 개 달린 녀석. 그 시체라면 할 수 있는 것이 무궁무진하다.

비록 케르발을 잃은 것은 안타깝지만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된 것은 모두 법도회의 덕이라고 입을 모아 칭송했다.

진실을 아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살아남은 이가 거의 없었기에.

살아남은 이들 대부분도 미쳐버린 상태였다. 사람들은 그들이 괴수를 보고 놀라 미쳤다고 결론을 내렸다.

몇 안 되는 진실을 아는 사람들 중 여섯이 쿠핀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우선은 집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시안은 스틸 양에게 갑작스럽게 말했다. 어젯밤에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내린 결정이다.

여행을 그만두겠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번에 산 선물도 주고, 다음 목적지를 가려면 티안을 거쳐 가야 하기 때문에 잠시 수도에 들렀다 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가족들도 보고 싶었고.

의외로 스틸 양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오… 동생, 그런데 안 쫓아가나 봐?”

“음? 뭘 쫓아갑니까?”

“후후. 동생, 기억 안 나는 척하기는. 분명 그렇게 외쳤잖아. ‘이거 연 자식 다 죽여 버리겠다아아아아~’라고.”

울부짖는 흉내를 내며 스틸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 말에 시안이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아, 좀… 그거야 워낙 열 받아서 그랬던 거고… 뭘 쫓아갑니까, 쫓아가긴.”

사실이 그랬다. 붉은 구체를 연 것은 엑자일 대법도회였지만 풍문으로 들으니 저 소환진은 원래 저 목적으로 설계된 것이 아니라 계산 실수로 잘못 열린 것이라고 한다.

설령 엑자일 대법도회가 붉은 구체를 불러낼 목적이었다고 하여도 자신을 공격한 덩치와 붉은 구체 안의 짐승들은 자신이 죽여 버렸는데 굳이 대법도회를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번에는 누가 봐도 자신은 정말 재수 없게 휩쓸린 것이니.

화가 좀 난다고 대법도회를 모조리 쫓아가 죽이는 행위는 분풀이밖에 되지 않는다.

“후후. 가끔 보면 너무 합리적인 것 같아, 동생. 감정에 따라 행동해도 될 텐데. 뭐, 동생 편한 대로 해.”

스틸은 예상했다는 듯 시안을 보며 웃었다.

“네. 스틸 양은 그러면 타란으로 돌아가실 겁니까?”

시안이 되묻자 스틸이 무슨 소리를 하냐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무슨 소리야. 동생이 집으로 돌아간다고 나도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법은 없잖아.”

“그건 그렇군요. 어디로 여행을 가실 생각입니까?”

시안은 호기심이 생겨 물어보았다.

“티안.”

“…….”

“로아-티안.”

“…….”

“마침 방향도 같으니 같이 가면 되겠다, 그치?”

시안은 걱정이 앞섰지만 생각해보니 이제까지 스틸 양이 사고 친 적은 없었기에 같이 가기로 했다. 여행 중 정이 많이 들었기에 이제 스틸 양이 없으면 뭔가 허전할 것 같다는 생각도 거기에 힘을 더했다.

“뭐… 나쁘지 않겠지요. 잘 부탁드립니다.”

“후후. 그래그래. 가면 안내 좀 해 줘.”

그리고 시안은 자신들 옆에 멀뚱히 서 있는 1남 3녀를 바라보았다.

“아… 그리고 여러분.”

“아… 네… 무슨 일이신가요?”

“어제 돌봐주신 거 감사합니다. 목걸이 문제는… 좀 미안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제 나름대로 갚았다고 생각합니다.”

시안은 어제 자신이 혼절해 있을 때 이들이 수발을 들어준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고마움의 인사를 건넸다.

“아닙니다. 살려주신 것만 해도 감사하지요. 그러면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명의 기세는 어제보다 훨씬 수그러든 기세였다. 사실 넷은 어떻게든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스틸이라는 여자가 자신들을 우격다짐으로 끌고 오지만 앉았어도 진작 이 도시를 떴을 것이다.

눈앞의 이 남자가 두려워서만은 아니었다.

도시를 부수는 괴수. 그런 괴수를 때려잡는 초인.

이런 자들이 돌아다니니 자신들이 너무 초라해져 견딜 수가 없었고, 비현실적인 이들을 떠나 어서 현실로 복귀하고 싶었다.

“어? 뭐야, 얘들 안 데려가?”

스틸은 어제 이 넷을 부린 결과 몸종이 있으면 상당히 편하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넷에게는 안타깝게도 말이다.

실제로 그 말을 듣는 순간 움찔거리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걸 본 시안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제 제 갈 길 가야죠, 스틸 양. 여러분들과는 이만 헤어지면 되겠군요. 앞으로 여정 마무리 잘 하시길 바랍니다.”

작별인사를 한 시안은 뒤돌아서 스틸을 이끌고 라-샤르-로아로 향했다.

“후후. 동생, 너무 착한 거 아니야? 저 정도 되는 아이들은 어디 가서 구하기도 힘든데.”

스틸이 뭔가 아쉬운지 계속 입맛을 다셨다.

실제로 라-반더 정도 되는 강자의 수발을 들려면 하인도 강해야 마땅하다. 움직임이나 변덕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스틸 양이 열 받아서 던진 베개라도 맞고 죽지 않으려면 적어도 저 여인 셋 정도는 되어야 한다.

“이제까지 잘 다녀놓고서 왜 그러십니까. 둘이 오붓하게 다니는 것도 좋지 않습니까.”

“후후… 오붓하게라… 동생 감동적인데.”

시안은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지만 스틸은 거기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히죽히죽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 ☆ ☆

외간여자를 집으로 들일 수는 없기에 시안은 수도로 돌아와 스틸에게 숙소를 잡아주고 따로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 다녀왔습니다.”

“어머! 시안, 엄청 일찍 돌아왔구나. 예정대로라면 훨씬 더 오래 돌아다닐 것 아니었니?”

일 년은 떠나있을 거라고 하며 집을 나간 시안이 일찍 들어오자 셀린느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후후. 일이 생겨서요. 잠시 집에 들렀다 가려고 왔어요. 형이랑 아버지는 아직 안 돌아왔나요?”

그러자 셀린느는 웃으며 말했다.

“후후. 너는 아직 모르겠구나. 네 형이랑 아버지는 지금 수도에 없단다.”

“네? 수도에 안 계신다면… 국경 지역에 배치되신 건가요?”

“아… 여행을 가 있는 동안 많은 것이 바뀌었단다. 시안, 우선 천천히 이야기하자꾸나. 밥은 먹었니? 들어와서 식사라도 하자꾸나.”

“네, 어머니. 아, 그리고 이거…….”

“이게 뭐니 시안?”

“후후. 엄청 맛있는 고기예요. 이걸로 요리해보시죠.”

‘고맙습니다, 스틸 양.’

시안은 꼼꼼하게도 소 대가리 녀석의 고기를 챙긴 스틸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며 식사를 하러 들어갔다.

그러고는 그 안에서 놀라운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형이… 보모가 되었다고요?”

“얘는… 보모가 뭐니. <그론-필라> 교관이란다.”

‘그게 그거 아닙니까…….’

시안은 속으로 말하며 한 마디 더 물었다.

“그리고… 지금은 라그랑에 있고요?”

“그렇단다. 호호, 그래서 말인데…….”

그동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셨는지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하는 어머니를 보며 시안은 생각에 잠겼다.

‘아… 생뚱맞게 이게 뭐지… 갑자기 웬 아카데미고, 웬 교관… 그럼 선물 주러 라그랑까지 또 가야 하는 건가…….’

시안은 자신이 없는 사이 많은 것이 바뀌어버린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 ☆ ☆

“후후. 인재들은 잘 모집되고 있는가?”

“네, 폐하. 그론-필라는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라그랑 지방을 통합한 후 그 지역의 발전가능성을 아깝게 여긴 나라샤는 그곳에 무장들을 교육시킬 아카데미를 세웠다.

그 아카데미의 이름은 그론-필라. 고대어로 ‘자라나는 기둥’

무럭무럭 자라나서 티안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라는 뜻이다.

사실 이제까지 아카데미라는 개념은 엑자일의 대법도회를 제외하고 무장들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반데르-로아는 비전 중의 비전. 그렇게 함부로 내돌리면 언제 등에 칼이 꽂힐지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말 믿을 수 있는 혈족만을 모아 반데르-로아를 전수한다. 믿을 수 없는 강대한 힘은 없는 것만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다. 아무도 자신들의 반데르-로아와 비전 검술을 아카데미에 제공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 남들이 제공하지 않는데 자신만 제공한다면 이는 자신의 약점을 공개하고 상대의 힘만 불려주겠다는 뜻이니.

하지만 나라샤 국왕은 더 이상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제 아래로 굴만 파내려가는 시절은 지나갔다. 나아가려면 동굴에서 나와 뭉쳐야 한다.

그래서 세 명의 그랑-반더와 의논 끝에 자신들부터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최상층부가 먼저 모범을 보이고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아무도 새로운 아카데미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을 그랑-반더로 만들어 준 위대한 수련법, 반데르-로아를 아카데미에 제공하고 가르치기로 결정했다.

더 놀라운 것은 티안의 인재뿐 아니라 외국의 인재도 아낌없이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

사람들 사이에서는 국왕폐하가 자신의 권력을 믿고 너무 자만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기도 하였다.

실제로 7왕국 중 아카데미라는 개념을 시도한 곳은 많았지만 아직까지 아카데미라는 개념을 성공적으로 도입시킨 곳은 대법도회 말고는 아무 데도 없었다. 대법도회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모두 실패했다는 뜻과 같다.

하지만 나라샤 국왕을 잘 아는 사람은 뒤에서 속닥거렸다.

분명 저 너구리가 또 뒤로 무슨 생각이 있다고…

실제로도 그랬고.

“후후. 라그랑 지방은 그냥 우연히 좋은 품종이 자라나길 바라기에는 너무 아까운 땅이지. 직접 좋은 씨앗을 뿌리고 보살펴야 마땅한 곳인데.”

라그랑 지방을 통합한 후 나라샤 국왕이 가장 먼저 실행한 것은 그 땅에 아카데미를 세우는 것이다.

태양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할 만큼 반데르의 유동이 풍부한 곳.

가만히 놓아두어도 최상의 인재가 태어나는 그곳을 나라샤 국왕이 그대로 놀리고 있을 리 없다. 애초에 나라샤 국왕은 라그랑 지방을 통합하게 되면 가장 먼저 아카데미를 세울 생각부터 하고 있었다.

단순한 아카데미가 아니다. 그곳에서 티안을 지탱할 모든 인재가 새로이 자라나게 될 것이다.

“각 귀족 가문 인재들도 빠르게 참여하고 있습니다. 자신들만 뒤쳐질 수는 없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래… 이제 각 가문에 인재 육성을 맡겨놓고 뽑아 쓰는 시대는 지났다. 그렇게 하면 그놈들은 너무 이기적이어서 써먹기가 힘들어.”

이번 드라고나 사태로 나라샤 국왕은 여실히 느낀 바가 있었다.

각 가문에 맡겨놓고 인재를 육성하는 방식은 가문 간의 경쟁을 유도함으로써 더 나은 인재를 육성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보다 더 안 좋은 단점이 있었다.

서로 간의 경쟁심이 너무 강하고 단합이 잘 되지 않았다.

게다가 틈만 나면 전체의 이익보다 가문의 이익, 개인의 영달을 위해 움직이려고 하니 지도자 입장에서 이보다 써먹기 까다로운 게 없다.

그리고 이렇게 모아서 키우는 것보다 강하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바로 옆에 경쟁대상이 없으면 사람은 나태해지기 마련이다. 경쟁을 통한 스트레스야말로 인재를 강하게 키우는 방법 중 하나였으니까. 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할 나약한 종자들은 자연스럽게 걸러져 나갈 것이다.

“교육 프로그램 및 교사와 교관들의 모집 및 교육도 거의 완료된 상태입니다.”

애초에 나라샤 국왕은 라그랑 지방을 점령하면 아카데미부터 운영할 계획을 진작부터 세우고 있었기에 전쟁 중에도 따로 전담 행정관과 보좌관들을 돌려 미리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빠르게 아카데미를 건설할 수 있었다.

“그래… 별 특이사항은 없고?”

“타국의 학생들을 받아들이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냐는 건의가 들어오고 있습니다만…….”

“무시하도록.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인데 그걸 막겠다니, 원…….”

“그리고… 로만가의 기술이나 키라인 검공의 비전을 공유하는 것은 너무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돌고 있습니다.”

“잘 달래보도록 해. 그 녀석들 그렇게 하는 게 더 좋은 거 알면서도 한번 찔러보는 거야.”

나라샤는 능구렁이 같은 귀족 녀석들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시안 공자가 돌아왔습니다.”

“음… 별일은 없겠지?”

“조사에 의하면 미모의 여성을 데리고 귀환했다고 하는군요.”

“허허? 신붓감이라도 찾아온 건가?”

나라샤 국왕은 안도의 표정과 걱정의 표정을 동시에 지었다.

안도의 표정은 그 아이가 얽매일 것이 많아진다는 것 때문에 지은 것이고, 걱정의 표정은 치맛바람에 티안 전체가 들썩이지 않을까 걱정하여 지은 것이다.

“그런 건 아닌 듯합니다. 집으로 데리고 가지 않은 것을 보니……. 신붓감이었다면 데리고 부모님께 보이러 갔겠지요.”

“그도 그렇군… 혹시 모르니 그 여성에 대해 조사를 해보도록 하게.”

“네, 폐하.”

“아… 그리고 이번에 이 아이가 혹시 어디에 다녀왔는지는 알 수 있었나?”

“라-샤르-로아의 이동 기록과 기타 흔적을 조사해보면… 마르가란과 케르발을 거쳐 온 것 같더군요.”

“마르가란과 케르발이면… 내가 어제 보고받은 그 마르가란과 케르발을 말하는 건가?”

“네.”

“하루 만에 가루가 되었다는 그 마르가란과 케르발?”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

나라샤 국왕이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바깥에서 또 한 명의 행정관이 들어왔다.

“급보입니다, 국왕폐하.”

“무슨 일이지?”

“시안 폰 로만 경이 라-샤르-로아를 타고 라그랑 지방으로 향했다는 소리가 들어왔습니다.”

“…리안 그 아이는 지금 그론-필라에 가있지?”

“네. 로만 백작을 대신하여 그곳으로 가 있는 상태입니다.”

로만 백작은 고작 아카데미의 교관으로 갈 수준이 아니었기에 로만 백작가의 ‘사자의 길’을 비롯한 비전을 전수하기 위한 교관으로 리안 폰 로만이 가있었다.

“형을 보러 갔나 보군…….”

시안의 행적을 들은 나라샤 국왕은 갑자기 엄청나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자꾸만 마르가란과 케르발의 모습이 라그랑 지방에 투영되기 시작했다.

‘별일 없을 것이다…….’

형을 그렇게 아끼는 아이인데 설마 그곳에서 사고를 치기야 하겠는가?

나라샤 국왕은 애써 자신을 다독이며 카란의 정세 변화에 대하여 토론하기 위해 넘어갔지만 쉽사리 집중이 되지 않았다.

☆ ☆ ☆

“이 아저씨… 작정했나 보네… 라-샤르-로아까지 새로 설치하고…….”

하나를 설치하는 데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는 라-샤르-로아.

나라샤 국왕은 라그랑 지방을 점령하자마자 이 라-샤르-로아의 건설에 들어갔고, 그라나인들의 도움을 받아 빠른 시간 내에 건설을 완료할 수 있었다.

나라샤 국왕이 라그랑 지방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후후. 다른 나라 사람들까지 오니까 라-샤르-로아가 없으면 오히려 곤란하겠지. 바깥부터 훑고 들어오면 관문이나 요충지가 정찰당할 우려가 있으니까. 차라리 이렇게 안쪽으로 바로 끌고 들어오면 감시하기도 편하잖아.”

옆에서 스틸이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호오, 그것도 그렇군요. 그런데 왜 다른 나라의 인재들까지 이렇게 끌고 오는 걸까요? 이야기를 들어 보니 높은 수준의 반데르-로아를 가르쳐준다는데.”

상당한 수준이 아니다.

로만 백작가의 ‘사자의 길’을 비롯한 비전 반데르-로아.

키라인 검공을 만들어 낸, 그리고 키라인 검공이 만들어 낸 반데르-로아 ‘푸른 명예’

그 외에 수도 없는 비전과 반데르-로아가 공유되고 베풀어진다.

심지어 이번 아카데미는 귀족들만 참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반은 따로 운영되지만 평민들도 같이 참여할 수 있다. 교육받는 내용은 동일하다.

여러모로 파격적인 아카데미. 너무나 파격적이어서 실제로 나라샤 국왕을 존경하는 자들조차도 여론이 분분한 상태이다.

“후후. 그 아이가 멀리 보는 거지. 스탄탈 그 꼬맹이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진짜 잡아먹히겠는걸.”

“멀리 보다니요?”

“자극을 팍팍 주고 있어. 어지간히 강하게 키울 생각인가 봐.”

나라샤 국왕은 제국에 걸맞은 인재를 가득가득 채워 넣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맹렬하게 자극을 주고 있다.

<모두에게 충분히 베풀겠다. 이제 너만 열심히 하면 된다. 이제까지 너만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을 옆의 귀족들도, 심지어 평민들도 고스란히 가지고 시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미친 듯이 달려라, 도태되고 싶지 않으면.>

이게 나라샤 국왕이 이번 아카데미를 세운 목표였다. 이제까지 반데르-로아만 움켜쥐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티안의 정신을 잊지 말아라. 미친 듯이 달리고 잡아먹으며 살아남아라.

타국의 인재들을 모은 것은 티안 내부의 인재들에게 자극을 주기 위한 방편이다.

<옆에 나라들은 이 정도다. 너희가 자랑스러운 티안의 인재라면 이 정도는 이겨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또 다른 의미도 있다.

나라샤 국왕이 처음 아카데미를 만들 때 걱정했던 것은 내부의 과도한 경쟁이다. 경쟁은 서로를 자극하여 개개인의 능률을 끌어올리지만 반대로 전체의 힘을 떨어트릴 위험이 있다.

그래서 결심했다. 다소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외부인을 끌어들이자고.

내부를 결속시키는 가장 간단한 방법.

외부의 적을 만든다.

“오호… 간단하지만 좋은 방법이군요.”

“그렇지. 아무래도 애국심이란 게 무시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거든.”

“그런데 타국에서도 인재를 보낼까요?”

“뭐… 리스크는 조금 있지만 결국 다른 곳에서도 자신들의 인재를 많이 보낼 거야, 이런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인재들과 경쟁하며 스스로를 담금질할, 이런 장소와 기회는 흔치 않다.

그렇기에 각국에서도 티안의 하론에 해당하는 인재들을 보낼 것이다. 나라샤 국왕이 제정신이라면 겨우 하론 급 인재들을 인질로 잡는 행위는 하지 않을 테니.

“만약 배신을 하게 되면요?”

“후후. 배신할 녀석이라면 강한 힘이 있건 약한 힘이 있건 하게 되지. 차라리 보이는 데에 몽땅 모아놓고 처음부터 감시하는 것이 훨씬 낫지.”

나라샤 국왕은 이기적인 귀족가들의 전력을 모두 뽑아내어 나라를 위해 쓰도록 착실하게 계획을 진행 중이었다.

나라샤 국왕이 생각하는 대로 된다면 이 나라는 장기적으로 훌륭한 인재를 계속해서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경쟁과 협력이 균형을 이룬 조직은 강력하다. 그리고 스틸 자신이 보기에 나라샤 그 꼬맹이는 충분히 그럴 만한 역량이 있다.

그리고 그 힘이 축적되고 축적되다가 터지기 직전까지 간다면… 한 번 더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스틸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음… 그러면 마스터나 이런 사람들은 오지 않겠군요?”

“하하. 걔들이 여기 와서 뭘 배워간다고. 그 정도 되면 이제 알아서 해야지. 아니면 가르치러 오거나.”

“그건 맞습니다. 하… 그나저나 형은 정말 의욕이 넘치는 것 같습니다. 교관이라니… 그런 걸 어떻게 하는 건지, 참.”

“후후. 형을 엄청 아끼는 걸 보니 보기 좋네, 동생. 굳이 여기까지 온 것도 선물 주려고 온 거잖아.”

“후… 제가 이번에 여행 다니면서 느낀 건데.”

“음?”

“세상이 너무 위험합니다. 저조차 죽을 뻔하다니. 형 같은 경우는 먹을 것을 사러 가다가도 죽을 위기에 마주칠 수 있다고요.”

“…….”

“제가 수도 안에만 있어서 그런지 세상의 위험함을 이제까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 바깥에는 망둥이 1호나 소 대가리 같은 녀석이 흔하게 돌아다니는군요. 한 달 안에 그런 걸 두 번이나 만나다니… 여행을 계속 다녔다면 더 강한 놈도 언젠가는 만났겠지요?”

“…….”

스틸은 이 아이가 뭔가 심각한 착각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지만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도 안 잡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형도 이제 수도 바깥에 있으니 그럴 수 있겠지요.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이 선물을 주고 와야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동생, 섭섭하다. 나는 그런 거 안 줘?”

“네?”

“나도 죽을 위기에 처할 수 있잖아.”

“…스틸 양을요?”

“그럼그럼.”

“…누가요?”

“음… 분명 있지 않을까? 저번에 그 소 대가리 같은 녀석은 나도 위험하다고.”

“걱정 안 해 드려도 될 것 같던데요. 정말 엄청난 속도로 도망가시던데.”

그때의 상황이 생각났는지 시안이 불퉁하게 말하자 스틸이 민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흠… 흠… 동생,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리고 동생이 그 넷을 살려야 한다며. 내가 네 명을 안전하게 지키고 있었던 거 잊었어?”

“…뭐, 그렇다고 치지요. 언약의 목걸이라… 이런 거 딱 두 개만 더 만들었으면 좋겠군요.”

“어머… 동생, 하나는 나고 하나는 누구지?”

스틸은 어떤 년이라고 물을 뻔하다가 너무 상스러워 보였기에 목 안으로 삼켰다.

그러자 시안이 무슨 소리 하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하나는 아버지 드릴 거고 하나는 어머니 드릴 겁니다만.”

“…너무하네.”

티격태격하며 걸어가던 스틸과 시안은 거대한 담장에 도착했다.

아카데미라고 하여 거대한 건물 몇 개로 이루어져 있다거나 한 것이 아니었다.

이 구역 안쪽으로, 모든 공간이 그론-필라다.

각 구역별로 아카데미를 따로 건설해 놓았고, 원하는 인재들은 정규적으로 참가해야 하는 수업 외에는 자신들 스스로가 교관이나 교사를 선택하여 수업을 받을 수 있다.

무장들을 위한 수업뿐 아니라 정치학이나 외교학, 전쟁학, 화술, 심지어는 교양 수업까지 다양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이적 같은 경우야 엑자일-대법도회의 아카데미 수준을 이길 수 없으니 따로 설치하지 않았고, 엑서의 경우 통일시켜 수업을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기에 역시 창설되지 않았다.

단순한 무장들이 아닌, 각 가문을 책임져야 할 인재들인 만큼 무장 수업뿐 아니고 다른 수업도 인기가 많았고 케르벨 백작의 <왕국 정치균형학>이나 탈린 자작의 <인재경영학 개론>은 정말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들은 워낙 바쁜지라 일주일에 단 한 번만 수업을 진행하기에 아카데미가 창설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수업 때마다 항상 강의실이 터질 정도였고 이들의 강의를 녹음한 영상 수정이 돌아다니기도 했다.

“한산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엄청 붐비는군요.”

개설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활기에 가득 찬 그론-필라를 보며 시안이 말했다.

“후후. 나라샤 그 아이가 애초에 이걸 준비하고 있었다는 거겠지. 기다렸다는 듯이 폭발적으로 커지는 것을 보니.”

미리 준비한 시스템과 교사, 그리고 훌륭한 내실. 거기다 적극적인 홍보와 인재 유입을 위한 노력까지.

단기간에 커진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리고 앞으로는 훨씬 더 커지게 될 것이다.

현재 간만 보고 있는 거북이들조차 자신들이 뒤처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깨달으면 적극적으로 뛰어들 것이니까.

“그런데 이렇게 타국의 인재들에 평민까지 모아놓으면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후후, 설마 나라샤 그 꼬맹이가 그런 상황까지…….”

와장창. 우당탕.

“죽어라! 카란의 미치광이 녀석들아!”

“우리 나라에서 꺼져버려!”

“개자식들이 어디서 텃세야!”

스틸이 말을 하던 도중 가게 하나가 박살 나며 한 무더기의 인물들이 뒤엉켜 나뒹굴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셨습니까, 스틸 양?”

“나라샤 그 꼬맹이가 이런 상황까지는 예상하지 못 했을 거라고 하려고 그랬지, 동생.”

“아닌 것 같은데요.”

“후… 후후, 아니라니.”

‘이상하다… 나라샤 이 꼬맹이가 이런 걸 예상 못했을 리 없는데…….’

혈기왕성한 나이에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애송이들을 모조리 모아놓으면 사고가 안 나는 것이 이상하다. 너무 싸우게 되고 골이 깊어지면 단합이 힘들어지기에 어느 정도 제어를 해놓았을 줄 알았거늘.

시안과 스틸은 그론-필라의 외부 거주구역을 지나 교관 및 교사들이 수업을 진행하는 구역으로 갈 때까지 그런 광경을 한두 번은 더 구경할 수 있었다.

형의 수업이 어디서 진행되는지를 물어본 시안은 그쪽으로 향하며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다들 혈기왕성할 나이군요. 저렇게 에너지가 넘친다니 말입니다.”

“후후. 저 나이 때면 저게 정상이지.”

“저희 형은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너희 형도 분명 경쟁심이란 게 있을걸. 단지 그만한 상대가 없어서 그랬을 뿐이지.”

무장에게 경쟁심이 없으면 발전이 없다. 자신을 자극하는 훌륭한 상대가 곁에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시안은 자신의 형에게 경쟁자가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시안 네가 가장 큰 자극이 되었겠지.’

어린 동생.

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막대한 힘과 하늘이 내린 재능.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을 보면 사람은 둘 중 하나의 자극을 보인다.

좌절하고 관심을 끄든가,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을 알지만 죽기 살기로 쫓아가든가.

리안이라는 아이는 분명 후자를 택했으리라.

“그나저나 형이 교관이라니… 상상이 잘 안 가는군요.”

“왜? 너희 형 정도라면 충분하지.”

젊은 나이지만 경험도 어느 정도 있고 마스터. 거기다 로만가. 교관의 자격은 차고도 넘친다.

‘설마 약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가?’

“형은 강압적으로 제재하거나 그런 걸 잘 못할 텐데 말입니다. 말을 안 들으면 매도 좀 들고, 반항을 하면 좀 체벌도 가해야 수업에 잘 참여할 텐데 형은 그러지 않을 테니까요.”

“흐음… 그럴 수도 있겠군.”

“저번 드라고나 때도 말을 듣지를 않는데 계속 말로 하더군요. 제가 대신 나서고 싶었습니다.”

“후후. 멋진 생각인데, 그거.”

스틸은 오랜만에 시안 동생과 생각이 일치하는 것을 느꼈다. 교관이 너무 부드러우면 교관 역할을 잘 하지 못한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말로 해야 할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는데 혹독한 무력을 쌓아야 하는 무장 수업에서는 매가 가장 효과가 빠르다는 것이 오랜 세월 동안 입증되어 왔다.

하지만 리안이 수업을 담당하고 있는 구역에 도착했을 때 시안은 자신의 예상과는 조금 다른 광경을 보게 되었다.

“야, 이 버러지들아! 너희는 벌레다!”

뻐억! 빠악! 뻐억!

“…….”

“어머… 동생, 이제까지 형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야.”

시안은 손에 들고 있던 목걸이가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너희는 벌레다! 따라 해라!”

“정신 상태가 썩어빠졌구나!”

“이따위로밖에 못 하면서 뭘 하겠다는 건가!”

리안의 구역으로 배정되어 있는 연무장은 난리도 아니었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끊임없이 대련을 하고 있었고 구석에서는 체벌인지 무엇인지 모를 기묘한 자세를 하며 힘들어하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그리고 리안은 구석에서 끊임없이 사람들을 두드려 패고 있었다. 두들겨 맞아 구석에 쓰러져 있는 인재들도 상당수 있었다.

“후후. 동생이 뭘 보고 배웠는지 이제 알 것 같네. 그럼 그렇지. 나를 두드려 패던 실력이 예사롭지 않더라고.”

스틸이 즐거운 듯 미소를 지었다.

“…뭔가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렇게 믿고 싶은 거 아닐까?”

“…우선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요.”

수업 도중에 방해를 할 수는 없기에 시안은 멀리서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아직 형은 자신이 온 것을 모르고 있었다.

놀란 감정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시안은 스틸 양과 함께 수업을 받고 있는 학생들을 쭈욱 훑어보았다.

다양한 학생들이 있었다. 악에 받쳐 형이 하는 대로 따라 하는 자도 있었고, 수업에 따라가지 못해 뒤로 처지는 자도 있었고.

그중 특이한 학생 하나가 눈에 띄었다.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서 있는 사람은 그 혼자밖에 없을뿐더러 혹독한 리안의 수업을 모조리 여유 있게 따라가니 눈에 안 들어올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걸 지켜보는 스틸과 시안은 별 놈 다 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틸 양, 분명 그라나인이라는 자들은 따로 살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지. 동맹이라고는 하지만 생활하는 방식과 문화는 완전 다르니. 섞여 살기 힘들지.”

“…그러면 저 친구는 왜 저기에 들어가 있지요?”

“그러게.”

시안이 어처구니없어한 이유는 그라나인이 저 안에 섞여있었기 때문이다.

그라나인이라면 인간과는 다르기에 그런 점이 더 심할 텐데 저기에 섞여 열심히 형의 강의를 듣고 있었다. 아직 마스터의 단계는 아닌 듯했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상당히 실력 차가 나기에 다른 사람들에 맞추어진 훈련강도는 저자에게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마스터 바로 직전으로 보였다.

“뭐, 상관이야 없겠지요. 형도 어느 정도 감을 잡고 있는 듯하니까.”

“그래그래. 후후. 그나저나 난 동생 이야기만 듣고 젠틀한 신사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저런 걸 보면 유전이라는 게 있나 봐.”

“누구 들으면 제가 폭력적인 줄 알겠습니다. 그리고 분명 뭔가 사연이 있을 겁니다.”

시안은 아직도 믿을 수 없었기에 스틸 양의 말을 한 귀로 흘리고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 ☆ ☆

“하하… 시안 왔구나. 언제 왔니?”

“음… 한 시간 전쯤?”

“이런, 오래 기다렸구나. 미안하다.”

리안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시안을 맞이해 주었다.

“그런데 옆에 계신 미인분은 누구시니?”

그러자 시안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스틸을 돌아보았다. 스틸은 라-반더 이하는 인간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틸의 반응은 자신의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후후. 안녕하세요. 스틸이라고 불러주세요.”

“반갑습니다, 스틸 양. 저희 동생과는 어떤…….”

“같이 여행을 다니는 동료랍니다.”

‘아직까지는 말이지…….’

스틸의 속마음을 알 수 없는 리안은 동생을 보더니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시안, 혹시……?”

“형이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닐 거야, 아마.”

생각보다 예의 바른 스틸의 반응이 수상했지만 시안은 좋은 게 좋은 거니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나저나 형… 아까 그…….”

“이런… 한 시간 전에 왔다면 다 보고 있었겠구나. 하하! 민망한데, 이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기에 시안이 말을 얼버무리자 리안이 겸연쩍은 듯 웃으며 대답했다.

“어… 형 요즘 혹시 내가 모를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거나… 아니면 마음속에 숨겨두었던 가학적인 본능이…….”

“절대 아니란다, 시안. 단지 국왕폐하께서 말하신 대로 하고 있었던 것뿐이지.”

“음? 그 아저씨가?”

시안이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을 때 스틸은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하!”

“음? 스틸 양? 뭔가 이해하셨습니까?”

시안이 스틸을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가 오면서 봤잖니, 시안 동생. 패거리 나누어 엄청 싸우고 있던 걸.”

“음, 그렇지요.”

“그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니? 이런 학교에서 계속 싸우도록 놓아두는 것을.”

“…그런 생각도 하셨습니까?”

“…….”

“…….”

리안과 스틸이 동시에 자신을 바라보자 시안은 뭐가 문제냐는 듯 어서 대답해 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학생들에게 공공의 적을 만드는 거지.”

“스틸 양, 정확하십니다.”

“후후. 뭘 이 정도 가지고요.”

리안이 스틸을 보며 감탄한 표정을 지었고 스틸은 겸양의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잘 이해 못한 시안을 보며 추가적으로 설명을 해 주었고 그제야 시안은 이해한 표정을 지었다.

“음… 그러니까 형을 비롯한 교관들이 일부러 악역을 맡는다는 거지요?”

“그렇지. 후후. 저 나이 녀석들을 강제로 친해지게 하려고 해 봤자 그게 얼마나 효과가 있겠어.”

시안은 오며 보았던 패거리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친하게 만들려고 해도 힘들 것 같았다.

“그렇겠군요.”

“이럴 때 가장 간단한 게 공공의 적을 만드는 것이지. 가장 간단한 것은 외부의 적이지만 아카데미에 그런 건 없으니 교관이 그 역할을 대신하면 되지.”

“아하! 그렇게 되면 학생들끼리 뭉치게 되겠군요.”

“뭐, 당장은 싸우겠지만 점차 줄어들게 될 거야. 강제로 억누르는 것보단 효과적이지.”

“그런데 그렇게 되면 교관들이 너무 학생들에게 미움을 사지 않습니까?”

그러자 스틸이 웃으며 대답했다.

“후후. 원래 아랫사람에게 좋은 소리 듣는 윗사람은 조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아니지.”

그 뒤에 리안도 한 마디 덧붙였다.

“저번 드라고나 때 느낀 점이 많았단다. 내가 평소 욕을 좀 먹더라도… 저들이 강해진다면 결국 저들이 살아남을 확률이 훨씬 높아진다는 것을 말이지. 그렇다면 나는 얼마든지 악역을 감수할 수 있단다.”

시안은 정의의 사도 났다는 표정을 지었다. 걱정되기는 하지만 이게 자신이 형을 좋아하는 이유다.

“뭐… 그렇다면 다행이지. 나는 또 형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해서 놀랐었는데.”

시안은 형의 변화된 모습의 원인이 밝혀지자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원래의 목적을 떠올렸다.

“아! 맞아, 형. 선물이 있어.”

“오… 뭔데 그러니, 시안?”

“자, 이거.”

시안은 작은 목걸이를 내밀었다.

“이거 껴.”

“음… 이게 뭐니, 시안?”

동생이 단순한 장식을 줄 리가 없기에 리안은 되물었다.

“음… 별건 아니고, 형이 위험한 순간에 처하면 이게 도와줄 거야.”

시안은 구구절절 설명해주기는 조금 부끄러웠기에 간단한 용도만 말했다.

“하하. 시안,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이런 것까지 써야 할 일이 있을까 싶구나.”

그라나인들의 보호를 받고 군사적 요충지로 지정되어 있는 라그랑 지방은 가장 철저하게 보호받고 있는 지역 중 하나였다.

“아니야, 형. 내가 이번에 여행을 다녀왔는데… 세상에 정말 무시무시한 것들이 많더라고. 꼭 끼고 다녀.”

“하하! 알겠다. 네가 주는 건데 기쁜 마음으로 받아야지. 고맙다, 시안.”

리안은 웃으며 목걸이를 목에 걸었고 시안은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된다는 듯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항상 끼고 다녀, 형. 그나저나… 이번에 교관 하면서 힘든 건 없어?”

항상 모든 걸 잘 했던 형이지만 저번에 드라고나를 가르치면서 고생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걱정이 된 시안이 물어보았다.

“후후. 나는 별문제 없단다. 오히려 이곳에서 수련을 하니 기운이 활성화되는 게 상태가 좋구나. 아, 여기 온 김에 셀린 경도 만나보고 가렴. 네가 없어서 많이 심심해하더구나.”

“음? 셀린 양도 여기 있어?”

“그렇지. 내가 로만가의 비전을 전하러 왔다면 셀린 양은 키라인가의 비전을 전하러 왔단다.”

“그럼 온 김에 보고 가야겠네.”

“그래. 이쪽으로 쭉 가면 셀린 양의 교육 구역이 나올 거란다. 지금쯤이면 거의 끝났을 테니 가서 얼굴이라도 보고 오려무나. 나는 다음 수업이 있어서 들어가 보아야 한단다. 이야기는 저녁에 더 하자꾸나.”

“알겠어. 형, 수고해.”

당분간은 급한 일이 없기에 시안은 이곳, 그론-필라에 머무를 예정이었다. 형도 보러 온 김에 자신이 이번에 새로 얻은 힘에 적응할 기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새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체크할 시간이 필요했다.

아마 자신들이 저번에 싸우면서 박살 내 놓은 운석 구덩이라면 충분할 것이다. 그곳은 아무도 접근하지 않을 테니.

‘셀린 양을 보고 한번 가 봐야겠군…….’

“스틸 양은 어쩌실 겁니까?”

“음… 나는 잠깐 어디 가 볼 데가 있어서. 후후. 좀 이따 보자고, 동생.”

그 말을 마지막으로 스틸은 훌쩍 몸을 날렸고 시안은 어깨를 으쓱이며 셀린 양이 있다는 구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허… 저 친구 여기도 있네…….’

시안은 아까 봤던 그 그라나인을 보며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다른 생각이 있는 건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기반 사정을 모르니 섣불리 판단할 수도 없었기에 조용히 구경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더 보고 있으니 몇 가지는 깨달을 수 있었다.

‘궁금한 게 엄청 많나 보구나…….’

그라나인은 궁금한 게 어찌나 많은지 엄청나게 많은 질문을 퍼부어대고 있었다.

<왜 이런 방식으로 힘을 운용합니까?>

<어떤 상황을 상정하고 이 검예를 사용합니까?>

<왜 하필 푸른빛을 띠게 만들어 놓은 것이지요?>

다른 학생들은 따라가기도 벅차 힘들어하고 있는데 실력 차가 심해 여유가 있으니 저런 질문을 할 시간도 있었다.

‘저런… 벌써 미움 받고 있나 보군.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주위 학생들은 안 그래도 힘든데 혼자 저렇게 튀고 있는 녀석이 있으니 굉장히 마음에 안 든다는 눈치로 쳐다보고 있었다.

신기한 점은 그럼에도 별다른 마찰이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점. 보통 혈기왕성한 나이에 저렇게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 게다가 국적도 아닌 종족이 다르다면 어떻게든 시비가 걸리는 것이 정상이다. 실제로도 아까 다른 국적의 인재들이 길거리에서 치고받고 있지 않았는가.

한데 저렇게 노려보기만 하지 다들 시비를 안 거는 것이 이상했다. 실력 차이가 난다고 해도 다른 학생들도 모두 난다 긴다 하는 인재들, 뭉쳐서 두들기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는 차이였다.

시안이 궁금해하던 이유는 조금 이따 밝혀졌다.

“커억!”

“야야, 로데발! 중지, 중지!”

‘와… 그냥 아주 맹수네, 맹수.’

그러고 보니 시안은 이곳에 오면서 들었던 사실이 생각났다. 나라샤 국왕을 돕고 라그랑을 점령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 그라나인에 대한 소문은 이미 널리 퍼져 있었으니까.

수백 년에 걸쳐 하리쟌들과 싸우며 북대수림을 건너온 그라나인. 전쟁 중 그들의 흉폭한 기세를 접한 사람들 중 아직도 밤에 잠을 설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과한데…….’

대련인데도 상대를 저렇게 죽일 듯이 달려드니 다른 사람들은 실력 차 이상으로 로데발이라는 자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미친개는 피하는 게 상책이다.

특히 작은 개도 아닌, 사나운 맹견이라면 더욱더.

이미 저 로데발이라는 그라나인은 고립된 것처럼 보였지만 본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수업이 끝난 것을 보고 시안은 셀린에게 다가갔다.

“셀린 양, 오랜만입니다.”

“어, 시안? 네가 여기 왜 있어? 여행 갔다며?”

셀린은 무언가 기대에 찬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잠시 형도 좀 볼 겸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대에 찬 표정으로 보지 마십시오. 선물 못 사왔습니다.”

“형이라… 그리고 그런 거 아니거든, 이 멍청아.”

이상하게 화가 나 있는 것 같은 셀린 양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시안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 특이한 친구는 누구입니까?”

“누구? 아, 로데발 말하는 건가?”

“네. 기세가 강렬하군요.”

“음… 이번에 인간의 사회에 대해 알고 싶다고 해서 온 것 같아.”

“호오, 인간의 사회요?”

“그렇지. 그라나인들이 강력하지만 인간을 무시하고 살 수는 없으니까. 우리에 대해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겠지. 그런 면에서 이 아카데미는 훌륭한 장소지. 로데발이라는 친구가 시작인 것 같아.”

“그러면… 차츰 더 많은 사람들이 오겠군요.”

“아마도 그렇겠지. 그런데 걱정이야. 평소에는 엄청 얌전한데 저렇게 싸움에만 들어가면 저러네…….”

셀린이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면 그냥 무장 훈련은 빼고 해도 되지 않습니까? 저 정도 실력이라면 이미 스스로 해야 할 수준인데요. 게다가 평균 무력 수준은 그라나인들이 훨씬 높지 않습니까.”

“그럴 법도 한데… 이상하게 인간들의 무예에 관심이 많더라고. 특히 리안 경 강의는 엄청 열심히 들어.”

“뭐… 그들도 무언가 사정이 있겠지요.”

그들이 열심히 대화에 집중하고 있을 때 연무장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인간을 배우러 온 그라나인, 로데발이었다.

‘저자가 시안 폰 로만…….’

시안과 셀린, 특히 시안을 유심히 쳐다보던 로데발은 몸을 돌려 사라졌다.

☆ ☆ ☆

<혼자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은 초인뿐이다. 그러니 뭉치고 전하는 법을 배워라. 네가 잘난 줄 아느냐.>

-나라샤 국왕이 자식들에게 전한 한마디

☆ ☆ ☆

“잘 다녀오셨습니까, 스틸 양.”

시안은 숙소로 돌아온 스틸을 보며 인사했다.

“잘 다녀왔지. 후후. 그나저나… 오랜만에 오니까 많이 바뀌었네. 후후.”

“그러고 보니 낮에 어디 다녀오신 겁니까?”

“후후. 저번에 나랑 치고받았던 녀석들을 한번 보고 왔지. 인사라도 하는 게 예의가 아닐까 해서 말이야.”

“아… 그분들… 그라나인이라고 했던가요. 잘 살고 계신가요?”

이곳저곳에서 이야기를 들었기에 시안은 예전 자신과 치고받은 자들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도.

“아직도 축제분위기던데. 샘을 다시 찾은 것이 어지간하게 기쁜가 봐.”

“샘이라… 그러고 보니 그 샘이라는 것이 뭡니까?”

시안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음… 그러니까 녀석들은 환생이라는 것을 할 수 있거든. 죽으면 영혼이 그 안으로 돌아가나 봐. 그리고 시체는 썩고 뼈만 남는데.”

“오, 그리고요?”

“그 남은 뼈를 그 샘의 옆에 묻으면 그 뼈에 살이 붙고 혈관이 생기고 혼이 들어가며 다시 살아난다더군.”

그 말에 시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정말 보물 중의 보물 아닙니까? 왜 다들 그 샘을 이용하여 다시 살아나지 않지요?”

“들어보니… 그 그라나인이라는 종족만 그런 방식으로 되살아날 수 있다더군. 그리고 자신의 혼에 맞는 자신의 뼈가 아니면 살아날 수 없다고 하고. 여러모로 까다로운가 봐.”

“신기한 샘이군요. 그런데 그 샘은 왜 그런 신기한 효능을 가지고 있는 겁니까?”

“글쎄. 그들도 모르던데. 수천 년 전부터 그랬다고 하나 봐. 걔들은 역사란 걸 기록을 안 하니 잘 모르겠네.”

“역사를 왜 기록 안 합니까?”

시안이 신기하다는 듯 물어보았다.

“뭣하러? 그 시절 역사를 기억하는 놈들이 다 살아서 돌아오는데. 비록 제국의 전쟁에 끌려 나가 그런 놈들은 더 이상 남아있는 것 같지 않지만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시안은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허… 세상에 정말 신기한 종족들이 많군요, 칼-굴도 그렇고……. 그런데 스틸 양은 그런 걸 어찌 그리 잘 아십니까?”

그라나인족과 그렇게 친하지 않은 스틸 양이 너무나도 자세히 알고 있자 시안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전에 동생 만나기 전에 라그랑에 살 때 내가 그 샘 옆에 살았거든.”

“네.”

“그 샘을 잘 보면 그 안의 녀석들과 소통할 수 있어. 그때 그 녀석들이 얘기해 줬지.”

“오, 그 샘 안에 남아있는 그라나인이 있었군요.”

“그럼. 오래 살아온 녀석들이라 그런지 다들 ‘라-반더’더라구. 그중 셋은 나보다도 강했고. 동생만 한 녀석은 없었지만 말이야. 후후.”

그 말에 시안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왜 되살아나지 않습니까? 그 정도 되면 뼈를 바탕으로 계속 살아났으면 됐을 텐데요.”

라-반더도 수명이 있다. 하지만 그 정도로 강하면 뼈를 추리지 못할 정도로 강한 상대는 없었을 테고, 수명이 다 되어 죽어도 뼈를 바탕으로 다시 되살아나면 될 일이다.

“후후.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살과 근육, 피부와 혈관은 모조리 신비한 힘으로 재생되지만 그 근본이 되는 뼈는 점차 약해지고 그 힘을 잃는다고 하더라고. 뼈는 재생이 안 되고 계속 써야 하니까.”

“그렇다면 그 뼈가 모두 사그라지면 그들도 다시는 되살아날 수 없겠군요.”

“그렇지. 하지만 정말 길어. 수백 년은 아마 가뿐히 넘고, 수천 년 된 영혼도 그 안에 있었어. 비록 너무 오랜 세월 끝에 영혼이 마모되어 그런지 이성도 없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인간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월이군요.”

시안이 감탄한 듯 말했다.

“대단한 종족들이지. 유사인종이라고 하지만 특징만 보면 상위종족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지.”

“그렇게 강대한 종족들이 있는데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세상을 지배하는지 신기하군요.”

제국을 멸망시킨 칼-굴족.

태어나면 뼈가 사그라질 때까지 환생하며 강대해지는 그라나인족.

짐승의 힘과 인간의 지성을 가진 수인족.

그 외에도 인간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강대한 종족은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이 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최후까지 살아남은 종족은 결국 인간이다.

칼-굴족은 결국 제국과의 싸움에서 멸망했다.

그라나인족은 인간과 화합하는 길을 택했다.

수인족은 그 강력한 힘에도 불구하고 단합되지 못하고 콘-티안 산맥이나 브로샨 산맥에 숨어 지낸다.

결국 대륙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는 종족은 인간이다.

“글쎄. 뭐… 꼭 강하다고 살아남는 건 아니니까.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있거나. 후후. 중요한 건 아니지, 동생. 그나저나 저녁에 연습한다고 하지 않았어?”

“헉!”

시안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스틸 양의 이야기를 듣다가 중요한 걸 깜빡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서 나가시지요, 스틸 양.”

“그래그래. 동생과 인연이 시작된 곳으로 가게 되니 엄청 두근거리네. 후후. 동생이 참 나를 찰지게 두들겼는데.”

“…좀 잊어주시지요.”

“글쎄. 하는 거 봐서.”

둘은 투닥거리며 라그랑 지방, 이제는 전설로 남은 격전의 흔적지로 향했다.

“뭔가 바뀐 것 같은데…….”

스틸은 도착한 지역에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그런 스틸을 보며 시안이 어처구니없어했다.

“당연히 무언가 바뀌었지요. 원래 이 지형에 산맥이 두 자락쯤 더 있었으니까요.”

“동생, 내가 바보인 줄 알아? 그런 거 말고.”

“흠… 그러면?”

“뭔가 기운이 좀 더 활성화된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정확히 모르겠네.”

스틸의 말에 시안도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음… 원래 이곳의 반데르와 엑사르 유동은 다른 지역보다 활성화되어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시안이 듣기로 이곳의 기운은 다른 지역보다 훨씬 유동적이고 양도 많다고 들었다. 티안이 이곳에 그론-필라를 세운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안은 별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예전부터 그랬다는데 신기할 것이 없으니까.

하지만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던 스틸 양은 무언가 다른 느낌을 받은 모양이다.

“음… 예전보다 조금 더 활성화된 것 같아. 우리가 치고받아서 그런가?”

“그럴 가능성이 유력하겠군요. 아래 학교에는 도움이 되겠는걸요.”

지형이 바뀔 정도로 치고받았으니 엑사르나 반데르 같은 기운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론-필라의 학생들에게는 잘 된 일이다. 활성화된 기운들은 그들이 빠르게 실력을 쌓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니.

“뭐… 그나저나… 동생, 어서 보여줘.”

“…그런 표정으로 보여 달라고 하지 마십시오. 변태 같습니다.”

상기된 표정으로 가쁜 숨을 내뱉으며 자신을 묘한 눈초리로 쳐다보는 스틸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는지 시안이 한 마디 했다.

“어떡해, 그러면. 진짜 흥분된단 말이야.”

“…그런 표현도 좀 삼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시안은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푹 파인 구덩이 쪽으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자, 그럼… 뭐부터 해볼까요.”

“그런데 동생, 예전의 그랑-라의 손이나 전쟁신의 창 같은 거 좀 아쉽지 않아?”

스틸은 몸을 푸는 시안을 향해 뜬금없이 한마디를 던졌다.

“음… 아깝긴 하지요. 쓸 만했었으니까.”

“…쓸 만?”

“네. 저를 더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었으니까요. 사실 신기했었습니다. 저를 강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물건들이 존재했었다니. 아마 그것들이 없었다면 그 이상한 세상에서 죽었겠지요.”

“다행이야, 동생.”

스틸이 혹시 안타까운 기억을 꺼낸 것이 아닌가 하여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닙니다. 살아 돌아왔으니 그만이지요. 어쨌거나… 그것들이 아쉽지 않냐고 하셨지요?”

“응. 그리고 일곱 행성의 대갑주도. 그것도 부서졌잖아.”

그 말에 시안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후후. 이제는 아쉽지 않습니다. 마침 힘 쓰기로 했으니 보여드리면 되겠군요.”

시안의 몸 주변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한 겹, 두 겹, 세 겹… 어느덧 수십 겹에 이르는 장막들이 몸 주변에 일렁거렸다.

“어… 그거?”

스틸이 화들짝 놀라 외쳤다.

“네. 스틸 양이 가지고 있던 것과 비슷하지요?”

그 정도가 아니었다. 일곱 행성의 대갑주는 이름 그대로 일곱 겹의 차원 장막을 몸에 둘러주었으니까.

하지만 시안의 몸 주위에는 당장 열 겹이 넘는 장막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시안은 말을 마친 후 손 끝에 힘을 모았다.

이윽고 왼손에는 찬연한 황금빛이, 오른손에는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 같은 칠흑빛 장막이 둘러졌다.

“후우… 이것도 되는군요. 그다음에…….”

약간 버거운 표정을 지었지만 안정이 되었는지 바로 다른 것으로 넘어가려는 시안을 보고 스틸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몸 주위에 차원 장막을 두른 것까지는 놀랍지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저렇게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초인이라도 몸 안의 법칙과 계수는 한 방향으로 조율되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동시에 잘 할 수는 없다. 물론 여러 가지를 할 수야 있지만 자신의 ‘길’에 맞지 않는 다른 힘으로 다른 초인을 상대하려고 든다면 단번에 토막이 날 것이다.

저렇게 여러 가지의 힘을, 저것도 저런 강대한 위력으로 뽑아낸다는 것은 둘 중 하나를 의미한다.

하나는 동생이 굳이 최선을 다 하지 않아도 저 정도는 쉽게 뽑아낼 수 있는 수준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길’이 여러 가지 힘을 뽑아내는 데 특화되어 있다는 것.

첫 번째가 훨씬 대단하긴 하지만 두 번째도 무시할 건 아니다. 상대방의 상성을 공략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강점이니.

실제로 자신이 리비아스보다 경지에 들어선 시간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길’의 상성 면에서 유리하여 이기지 않았는가.

저러니 가지고 있던 아티팩트가 아쉬울 리가 없다. 맨몸으로 아티팩트의 성능을 더 강하게 사용할 수 있는데 왜 아티팩트가 필요하겠는가.

이것저것 실험해보고 있던 시안은 손을 허공에 쏘아보기도 하고 땅에 찍어보기도 하며 이것저것을 해보았다.

그럴 때마다 하늘이 쭉쭉 갈라지고 땅은 아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파여 나갔다. 극도로 힘이 밀집되어 손길이 스쳐 지나가는 곳에서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지나가는 곳마다 마치 허공을 지우개로 지워내듯이 배경이 사그라지고 있었다.

스틸은 등골이 오싹했다.

‘저번에 싸울 때 봐줬다는 게 진짜 많이 봐준 거였구나…….’

스틸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시안에게 물었다.

“동생, 그거 어떻게 하는 거야?”

“음? 뭘 말인가요?”

전신에서 수십 개의 기예를 선보이고 있던 시안은 무엇에 대해 물어보는지 몰라 스틸을 보고 되물었다.

“그거 있잖아, ‘길’을 여러 가지 동시에 발동시키는 거…….”

“음… 이거요? 이거 여러 가지 아닙니다.”

“그러면?”

“이게 하나의 ‘길’이에요. 저도 못 쓰다가 벽에 막히고 나서부터 쓸 수 있었는데 벽을 지나고 나니 훨씬 편하게 쓸 수 있네요.”

스틸의 예상은 틀렸다.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둘 다였던 것.

“진짜 대단하네. 동생, 평생 벽을 넘지 못할 수도 있겠는걸…….”

저걸 보니 차라리 수련을 해서 강해지는 게 더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동생의 말에 따르면 앞으로 몇 번이 될지 모르는 죽음의 기회를 넘어야 라-반더를 넘어선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다고 했다.

한데 저걸 도대체 누가 죽인단 말인가?

“후후. 제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지요. 저는 이렇게 평생 안빈낙도할 생각입니다.”

“후후. 취미로 도시나 부수면서 말이지?”

“…왜 이러십니까.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습니다.”

“그나저나 대단하다. 진짜 전설 속에나 나오는 일곱 뿔의 하리쟌도 잡을 것 같아.”

인간의 형태를 한 것 중 동생보다 강한 게 있으리라고는 상상이 가지 않았기에 스틸이 내뱉었다.

“그거야 전설 속에 나오는 것 아닙니까. 설령 나온다고 해도 전 무조건 도망갈 겁니다.”

‘못 이긴다는 소리는 하지 않네.’

실없이 웃는 시안을 보며 스틸은 피식 하고 웃었다. 저렇게 강한데 저런 마음가짐이라니. 저런 기묘한 태도가 더욱 사랑스러웠다.

한데 스틸은 갑자기 생각이 나서 물어보았다.

“아… 그런데 동생, 나는 왜 부른 거야?”

“네?”

“별로 내가 도와줄 게 없어 보이는데.”

“…아… 그게…….”

“…동생, 자랑하고 싶어서 불렀구나.”

“…….”

“후후. 너무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내가 아니면 누가 알아봐 주겠어. 부끄러워하지 말고 더 해봐.”

초인의 실력은 초인만이 알아본다. 일반인들 앞에서 힘자랑해 봤자 쇼에 불과하다.

“…그럴까요? 흐, 그러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어린아이 같은 면모에 스틸은 즐거워하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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