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41화 (42/81)

<41. 전조>

로데발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움켜잡았다.

‘또 이러는군… 왜 이러지.’

신지, 그랑-라트라에 도착한 이후로 지끈거림이 심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어제까지는 괜찮은 편이었는데 무슨 일 때문인지 어제부터 머리의 통증이 조금씩 심해지고 있었다.

‘설마… 어제 그 인간을 봐서 그런가.’

인간에 대해 배우기 위해 자신이 인간계로 나왔을 때 장로들이 자신에게 주지시켜 준 두 명의 인간이 있었다.

리안 폰 로만과 시안 폰 로만.

이 두 명의 인간은 절대 건드리지 말 것.

장로들이 말하지 않아도 건드릴 생각은 없었다. 자신들을 비롯한 종족 모두가 신지 옆의 산맥이 어떻게 박살 나는지 똑똑히 지켜보았으니까. 심지어 자신들을 이끈 대장로님과 2장로님은 가지고 있던 대보구까지 모조리 강탈당했지만 복수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도대체 뭘 배워 그렇게 강해졌는지 너무나 궁금하여 인간들의 무술에 대해 공부해보았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상당한 수준이기는 했지만 그런 괴물을 키워내기에는 턱도 없었다.

시안이라는 인간을 생각할 때마다 더욱더 강함에 대한 욕구는 강해졌다. 그 옛날, 여왕님이 살아계셨다는 수백 년 전에는 아무도 자신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제국조차도.

우선은 줄어든 세력을 확대해야 한다. 그 강대한 제국과도 자웅을 겨룰 정도로 강대했던 자신들의 종족은 신지와 영혼의 샘을 잃고 수백 년의 세월을 떠도느라 그 세력이 모조리 꺾이고 말았다. 신지를 회복하는 데 인간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이래서는 안 된다. 위대한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는 우선 샘을 기반으로 모두가 강해질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이렇게 자신이 인간세상으로 나왔다. 사나워진 동족들 중 로데발 자신이 가장 얌전했으니까. 인간 속에 섞여 살며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을 파악해야 한다. 지금이야 각 나라 간의 힘의 균형 사이에서 동맹을 이루고 있지만 이 균형이 무너지면 언제 어떻게 태도가 돌변할지 모른다.

인간에 대해 믿을 만한 건 그들이 못 믿을 종자들이란 것 하나뿐이니까. 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강해져서 종족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로데발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다음 수업장소인 <왕국 정치 균형학>이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 이 수업은 오히려 무장 수업보다 더 도움이 많이 되었으니 빠르게 가서 앞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래서 현재 7왕국은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강연장은 굉장히 조용했다. 앞에서 강연하고 있는 케르벨 백작의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이다. 평소에 왕실을 잘 떠나지 않으며 왕가를 위한 조언을 하는 케르벨 백작의 조언은 금보다도 무거웠다. 이렇게 일주일에 단 한번이라도 나와 강의를 한다는 것은 자라나는 동량들에게는 엄청난 기회였다.

“카란의 경우 가장 훌륭하게 균형을 유지한 나라 중 하나입니다. 현재 대북벽과 접해 있는 나라는 카란 하나뿐입니다. 카란의 상황은 타국과 접하는 국경 면적이 좁을수록, 그리고 그 수가 적을수록 방어하는 데 유리하단 것을 생각하면 최악에 가깝습니다. 동쪽에는 키아란, 서쪽에는 티안, 남쪽에는 브로샨, 북쪽에는 대북벽을 두고 있으니까요. 사방이 적이지요.”

모두가 케르벨 백작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카란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더욱 훌륭하게 국경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다른 나라들은 먼 옛날을 제외하고는 카란을 침범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지요. 어떻게 카란은 훌륭하게 국경을 방어해낼 수 있었을까요? 국경에 많은 세력을 배치해서? 아니면 다른 나라보다 무장들의 세력이 강력해서 그럴까요?”

모두가 그 답을 알고 있다. 하지만 민감한 발언이라 말을 하지 못 하고 있을 때 로데발이 손을 들고 입을 열었다.

“그야… 카란이라는 나라가 자신들의 병력을 모조리 대북벽 쪽으로 집결시켰기 때문 아닌가?”

카란이 살아남기 위해 전 대륙을 대상으로 시도한 협박.

몇백 년도 전, 사방에서 침략하는 나라들 때문에 카란은 상당히 많은 영토를 잃어버렸다. 동맹을 맺고 버텨보려고 해도 겉으로만 동맹을 맺는 척만 할 뿐, 모두가 호시탐탐 카란의 영토를 노렸다. 전쟁으로 다져져 한 명 한 명이 용맹한 전사인 카란 왕국이었지만, 쪽수에 장사 없다고… 세 군데에서 압박을 하는데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백성들은 고통으로 울부짖었고 국력은 나날이 감소해갔으며 주변 나라들의 횡포는 더더욱 심해졌다.

더 이상 백성들이 고통 받는 걸 참을 수 없었던 그 당시의 대장군, 켈단 드 로펠하임은 결단을 내렸다.

그는 모든 국경에서 병력을 철수시켰다. 그들이 자랑하는 모든 무장 병단도, 카란을 지탱하던 정예병들도.

주위 나라는 이게 웬 떡이냐 싶어 앞다투어 국경을 침범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진 카란의 경고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개자식들아, 만약 너희들이 우리 나라를 단 한 발짝이라도 침공하면… 우리는 대북벽을 공격하겠다.>

단순히 코웃음치고 넘기기에는 너무나 무서운 협박. 대북벽은 외부 대수림의 공격을 겨우겨우 막아내고 있을 뿐, 결코 여유가 넘치는 수준이 아니었다.

만약 카란이 그들의 전 병력을 집결시켜 공격한다면 뚫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 전 대륙이 쑥대밭이 된다. 녀석들의 번식력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고, 먹이가 척박한 대수림에서 서로 물고 뜯기에 버티고 있을 뿐, 만약 대북벽을 넘어 인간을 먹어치우며 번식하게 된다면 대재앙이 일어난다.

그렇기에 코웃음을 친 왕이 있었다.

그 당시 키아란의 왕 로자일 3세.

<웃기는 놈들이로구나. 어디 해볼 테면 해보아라. 다 같이 죽을 용기가 네놈들에게 있겠느냐?>

그 말을 하고 키아란은 거칠 것 없이 카란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하지만 키아란은 악에 받힌 카란의 경고를 좀 더 귀담아 들었어야 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대북벽의 동쪽, 키아란 국경과 가까웠던 아시탈 3구역은 카란의 포격에 박살이 났다. 그날 수많은 반더가 목숨을 잃었다.

카란은 미리 자신들의 인구를 대피시킨 상태였기 때문에 하리쟌들은 그대로 키아란으로 몰려들었고, 그때의 대참사로 키아란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보았다.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티안과 브로샨은 화들짝 놀라 모든 병력을 기존 카란의 국경 바깥으로 빼내었다. 카란도 그 이후로 협박을 중지하고 세 곳과 모두 동맹을 맺은 후 내실을 다지는 데 집중했다. 패 하나 움켜쥐었다고 너무 설치면 삼국도 참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카란은 결코 대북벽 쪽에서 병력을 빼지 않았다. 명목상으로야 동맹을 믿고 혹시나 하여 대북벽이 밀릴 경우 대북벽을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위치시켰다지만 그 의도는 뻔했다.

대장군 켈단의 놀라운 결단 이후 카란은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고, 지금은 그 성세를 회복한 지 오래였다.

“훌륭한 대답입니다, 로데발.”

케르벨 백작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다음 대화를 이어나갔다.

“지금의 평화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균형 아래 이루어져 있습니다. 만약 조그마한 변수라도 투입된다면 각국의 국경선은 언제라도 새롭게 그어질 것입니다. 지금의 국경은 힘의 균형을 나타내는 지표일 뿐, 세력의 변화에 따라 언제든지 변할 수 있지요. 여러분이 지금 강의를 듣고 있는 라그랑 지방처럼요.”

타란 왕국의 인재들이 발끈하는 게 느껴졌지만 케르벨 백작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한 명 한 명의 기분을 다 신경 쓰면 어떻게 강의를 진행하겠는가.

“그래도 다행입니다. 지금은 인간만 변수에 넣으면 되니 말입니다. 예측할 수 없는 하리쟌들까지 변수에 넣었더라면, 하리쟌들이 하늘산맥까지 넘을 수 있었다면, 국제 정세는 더욱 복잡하게 진행되었겠지요? 여러분들이 숙제하기는 더욱 편할 것입니다.”

케르벨 백작의 가벼운 농담에 모두들 실소를 터트렸다.

“그러면 다음 주까지 생각해 올 거리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이번에 마르가란과 케르발이 폐허가 되었다는 것은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곳을 연결하던 라가오포라도 사라졌지요.”

그 말에 모두가 침음을 흘렸다. 이 소식을 아직 전해 듣지 못한 귀족가의 인재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라가오포라가…….”

“세상에… 케르발까지…….”

“큰 변화가 오겠군.”

예상된 반응을 보며 케르벨 백작이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번 사태로 인해 각국의 균형이 어떻게 변할지 생각해 오십시오. 아마 작은 변화는 아니겠지요? 이것이 이번 주의 과제입니다. 이것으로 수업을 마치도록 하지요.”

강의장을 뒤로하고 나온 백작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인물을 발견하고 의외의 표정을 지었다.

“오, 시안 군. 벌써 여행에서 돌아왔는가?”

상당히 장기간 여행을 떠났다고 알고 있었기에 시안의 등장을 예상 못했던 케르벨 백작이 멈칫했지만 이내 반가운 얼굴로 맞이해주었다.

그런 케르벨 백작을 보며 시안도 마주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잠시 볼일이 있어서요. 여기도 여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 여기서 며칠 머물다가 다시 떠날 겁니다. 오늘 오신다길래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하하! 반갑네. 여행은 어디를 들렀다가 왔나?”

“레노르바와 마르가란, 케르발까지 들렀다 도착했습니다.”

“…혹시 거기가 내가 알고 있는 마르가란과 케르발인가?”

“맞습니다.”

“…제발 이곳에서만은 참아주길 바라네.”

나라샤 국왕을 비롯한 최상층부는 라그랑 사태가 누구의 소행인지 알고 있었고, 그중에는 케르벨 백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거 굉장한 오해십니다. 저는 손도 안 댔다고요.”

시안은 굉장히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케르벨 백작은 미심쩍다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도시 두 개가 한 달 사이에 통째로 날아가는 것은 있기 힘든 일이니까.

게다가 그곳에 초인이 방문했다면 더욱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케르벨 백작이 말을 이으려고 할 때 뒤에서 뭔가 소란이 일어났다.

“크악! 이 자식, 뭐 하는 거야!”

“컥… 막아!”

“이 미친 자식… !”

강의장의 입구 쪽에서 격한 타격음과 외침이 울려 퍼졌다.

시안이 무슨 일인가 하고 그쪽을 보니 패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패거리가 한 명을 두고 둘러싸고 있었으니 패싸움은 아니었다.

게다가 한 명은 패거리를 사정없이 밀어붙이고 있었다.

“흐음… 로데발이라는 친구 아닌가? 왜 저러지?”

케르벨 백작이 바라본 강의장 한구석에서 로데발이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 ☆ ☆

강의장 바깥을 나가던 로데발은 갑작스럽게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격한 감정에 흠칫했다.

어제부터 머리가 점점 아파지고는 있었지만 이런 변화는 처음이었다.

<…해라.>

<…여라.>

동시에 머리 어딘가에서 무언가 수상한 울림이 흘러나왔다.

‘정신계… 이적인가?’

로데발은 당황했다. 자신들 종족의 특성상 정신계 이적에 굉장히 강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 울림은 점차 머릿속을 좀먹어 들어오고 있었다.

마치 바깥쪽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닌, 안쪽 깊숙한 곳에서 울려오는 듯한 소리.

그리고 온 사방이 자신을 적대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크으윽…….’

로데발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강의장 입구에 주저앉았다.

동시에 누군가가 그를 툭 치고 지나갔다.

“뭐야… 이 친구 왜 여기 주저앉아 있지? 이봐, 일어나.”

누군가 자신에게 손을 뻗는 순간, 로데발은 마지막으로 부여잡던 이성이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공격이다.>

로데발은 번개같이 자신을 도와주려고 오는 손을 낚아채었다.

그러고는 머리의 울림에 따라 거리낌 없이 상대를 후려쳐 날려버렸다.

“크아아악!”

“이런 미친 자식이……!”

카란에서 그론-필라를 살피기 위해 파견된 레카르도는 갑자기 미친 듯이 달려드는 로데발이라는 녀석을 보며 쌍욕을 내뱉었다.

이제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었지만 딱히 피해를 주는 것은 없기에 건드리지 않았다. 서로 소 닭 보듯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달려들다니. 게다가 이 녀석과는 원한 진 것도 없다.

잠깐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동료 한 명을 저 멀리 처박아버린 녀석이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우두둑!

“크윽…….”

놀라 칼을 뽑을 틈도 없었던 레카르도는 급히 왼팔을 들어 막았지만 그 대가로 왼팔이 부러진 채로 튕겨 날아가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다행이었다. 그 대가로 그는 미쳐 날뛰는 야수가 있는 전장에서 빠져나와 사태를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볼 시간을 벌 수 있었으니까.

로데발.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여러모로 인간의 상위종족은 맞는 것 같다는 느낌을 주던 녀석은 마치 짐승처럼 변해있었다.

‘제기랄… 싸울 때 흉폭한 느낌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대수림에 오래 살다 와서 기세가 사나운 건 알았지만 평소에는 워낙 얌전했기에 그저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다 생긴 습관인 줄 알았다.

큰 착각이었다. 로데발이란 녀석이 날뛰는 것을 보니 오히려 저게 녀석의 본질에 가까웠다.

한없이 자유로워 보이는 표정이 그 증거이다. 이제까지는 그저 강력한 이성으로 억누르고 있었을 뿐이었고.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은 거의 이성이 나간 것 같았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면서 더 강해졌다는 것. 억누르던 이성이 나가서 그런지 녀석은 본연의 육체를 100퍼센트 활용하고 있었고, 마치 한 마리의 하리쟌처럼 사람들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크악!”

“저 자식 발부터 묶어!”

“제기랄 놈. 미치려면 곱게 미칠 것이지!”

사방에서 욕지거리가 난무했다. 다행히 아직 녀석은 칼을 뽑지는 않아서 죽은 자는 나오고 있지 않았지만 이대로라면 멀지도 않았다. 저 주먹에 정통으로 맞는다면 어디 한 군데는 으스러질 테니까.

그리고 그 맞은 장소가 머리나 배가 되면 그대로 죽는 것이다. 그걸 아는 학생들은 모두 급소만 피하며 차륜전으로 압박해 녀석을 몰아넣고 있었다.

어느 순간, 녀석이 몸을 웅크리며 구석으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입에서 기묘한 소리를 내며 방어태세를 취했다. 마치 겁에 질린 것처럼.

“…뭐지?”

녀석을 둘러싸고는 있었지만 방금 전까지 호되게 당한 터라 다들 접근하지 못하고 있을 때 사람들을 헤치고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하… 이 양반은 또 왜 이런데…….”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가자 그에 맞추어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던 로데발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곳까지 밀렸다. 사람들은 이제 곧 로데발이 남자를 덮쳐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물기 마련이고 하물며 저 로데발이라는 녀석은 쥐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로데발은 물러날 곳이 없자 점점 더 몸을 숙이기 시작했다. 둥글게, 점점 더 둥글게.

그릉.

마침내 더 이상 몸을 말 수도 없어지자 기묘한 소리를 내며 혼절했다.

“백작님, 이렇게 하면 되지요?”

“고맙네, 시안.”

자신을 바라보는 묘한 시선을 무시한 채 바깥으로 나간 시안은 가란-티아 시절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지…….’

저 멀리, 그라나인들이 살고 있는 거주구역에서 불길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이곳, 그론-필라까지 흉포한 기운이 뻗쳐오고 있었다.

☆ ☆ ☆

<헉… 헉…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3장로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움켜잡고 있었다.

신지, 그랑-라트라에 도착한 이후부터 시작된 가슴의 두근거림이 이제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거세어지고 심지어 머리가 아픈 수준에 이르렀다. 신지가 예전과 다름을 느낀 장로들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의논하여 대책을 세우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어제부터 기묘한 가슴속 두근거림이 너무나 심해져 대책을 세우기도 전에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크아아악!

자신이 머물고 있는 집 바깥, 마을에서도 기묘한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분명 가슴속 울림을 이기지 못한 종족들의 울부짖음일 것이다.

‘이대로라면… 큰일이 난다.’

아직까지 참고는 있지만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묘한 감정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심지어 3장로는 자신의 안에 아직도 이런 흉폭한 본능이 내재되어 있었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살의, 폭력에 대한 갈망, 식욕, 무절제…

모두가 평상시에는 전혀 자신을 자극하지 못하는 것들이었지만 지금은 마음속에서 미친 듯이 자신의 행위를 촉구하고 있었다.

<죽이고, 부수고, 찢어 먹어라!>

‘맙소사… 이건 마치… 하리쟌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자신들 종족이 그토록 혐오하던 하리쟌과 같은 본능이 자신들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어서 종족을 억눌러야 한다. 자신이 이 정도이면 자신보다 약한 이들은 아마 안에서 치밀어 오른 본능의 외침에 이성이 꺾였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주위에 습격할 것을 찾을 것이다.

가까운 곳에는 인간들의 거주지가 있다. 그렇게 되면 전쟁이다. 전쟁이야 상관없지만 아직 자신들은 인간들과 싸워 이길 만한 힘이 없다. 멸족만은 피해야 한다.

여기까지 생각한 3장로는 빠르게 몸을 바깥으로 날렸다. 바깥으로 나가보니 생각한 대로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떤 자는 가슴을, 어떤 자는 머리를 움켜쥐고 쓰러져있었고 몇몇은 정신이 나간 표정으로 주위를 희번덕거리며 둘러보고 있었다. 공격할 대상을 찾는 것이리라. 주변에 공격할 대상이 없자 몇몇은 기억에 따라 인간들의 도시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크윽… 안 되지, 그러면…….>

3장로는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바깥으로 나온 장로들과 함께 상황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뛰어가려는 녀석은 기절시키고 아직 이성을 잃지 않은 자들은 엑사르를 흘려보내며 정신을 차리도록 도왔다.

<5장로… 는 …저들에게 지원을 요청해라… 지금 마을이 이상하고…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그리고 4장로는… 대장로님과 2장로님을 찾아 도움을 청해라.>

<…알겠습니다…….>

5장로는 인간들이 살고 있는 쪽으로 몸을 날렸고 4장로는 영혼의 샘, 라브네 쪽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그리고 남은 장로들은 서둘러 마을을 컨트롤하며 그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는 몰라도… 억누르는 데는 한계가 있다. 당장 자신들도 점점 더 억누르기 힘들어지고 있으니.

그 전에 원인을 찾아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전쟁이다.

☆ ☆ ☆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리안과 셀린은 갑작스레 뻗쳐오는 불길한 기운에 몸을 일으켜 숙소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그 기운의 근원은 저 멀리, 그라나인들이 성지라고 부르는 그랑-라트라 쪽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랑-라트라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곳에서 한 인영이 맹렬하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자신들과 소통을 하고 있던 5장로였다.

“모두 흩어져라! 구경하지 말고 최대한 멀리 도망가라!”

리안이 다급하게 외쳤다. 만약 5장로까지 미쳐서 달려온다면 여기 있는 자들로는 감당이 안 된다. 모조리 몰살당할 것이다.

리안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저 멀리 달려오는 자의 강대한 기세는 딱 보아도 자신들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니까. 여기서 용감하게 달려드는 것은 개죽음밖에 되지 않는다.

리안도 최악의 사태를 가정하고 몸을 피하려 했지만 다행히 그 전에 자신의 동생이 먼저 도착했다.

“형, 괜찮아?”

“그래. 그나저나… 무슨 일인지 모르겠구나.”

시안이 도착하자 한숨 돌린 리안은 자리를 지키고 5장로가 달려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저 멀리 달려오던 5장로는 어느덧 가까이에 도착해있었다. 다행히 5장로는 기세가 흐트러져있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이성을 잃지는 않은 것 같았다.

<…너희들의… 책임자를… 불러다오… 지금… 마을에… 이상이 생겼다… 동맹으로서 도움을 요청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리안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우리 종족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크윽… 기묘한 기분은 느끼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시간이 있을 줄 알았는데 어제부터 갑작스럽게 진행이 빨라져서…….>

“어제요?”

리안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나 상기해보았지만 적어도 이 근처에서는 별일 없었다. 이 근방, 라그랑 지역은 모두 철저하게 감시되고 통제되고 있었다. 혹시라도 자라나는 인재들의 신변에 위협이 될 만한 사태가 발생한다면 빠른 대처를 하기 위해서이다.

리안은 고민하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생을 발견했다.

‘혹시…….’

“시안, 혹시 어제 무엇을 본 게 있느냐?”

리안이 다급하게 물었다. 자신들은 보지 못하였다고 하여도 동생이라면 보았을 수도 있다.

“아… 음… 그게 아니고…….”

“짚이는 게 있다면 어서 말해다오.”

“어제… 내가… 그 저번에 만들어 놓은 구덩이 있잖아.”

“그렇지.”

“어제 내가 거기서 연습을 좀 했는데… 그거랑 혹시 무슨 상관이 있지 않나 해서…….”

시안이 조금 찔린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제 있었던 큰 사건이라면 자신이 알기로는 그것밖에 없었다.

“연습이라니? 무슨 연습? 시안, 넌 연습을 한 적이 없지 않느냐?”

리안이 묘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아… 이번에 뭔가 새로 할 수 있는 게 생겨서… 그거 좀 실험해보느라고… 저번에 파놓은 구덩이를 좀 썼지.”

그 말에 5장로는 고민하다가 시안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혹시… 이곳에 언제… 도착하였소?>

“음… 한 이틀 정도 되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아닐 거요.>

5장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시안이라는 저자의 힘이 강대하기는 하지만 자신들에게 이렇게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었다. 설령 어제 발현한 그 힘이 무언가 연관이 있다고 해도 저자가 이틀 전에 도착했다면 그 전부터 자신들에게 영향을 미치던 기묘한 울림이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구덩이를 조사할 조사단을 꾸리겠습니다. 현재 마을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현재 장로들이 미숙한 종족들을 억누르고 통제하고 있지만… 오래가지는 않을 거다… 당장 우리도 조금씩 힘들어지고 있으니… 그 전에 원인을 찾아야 하니 서둘러 다오. 우리는… 전쟁을 바라지 않으니…….>

5장로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리안에게 말했고 리안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빠르게 몸을 옮겼다.

라그랑 지역을 탈환하는 데 엄청난 공을 세운 저들의 전력.

네 명의 그랑-반더와 두 명의 라-반더, 그리고 셀 수 없는 마스터들.

저들이 미쳐 날뛰면… 티안 서북부 지역에는 재앙이 찾아온다. 그 전에 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형, 갈 거면 나도 같이 가자.”

“그래, 시안. 고맙구나. 좀 도와다오.”

리안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기에 시안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았다. 조사를 도울 사람 몇을 모은 리안은 빠르게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대장로님… 2장로님… 방해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마을에 큰일이 생겼습니다…….>

4장로는 <라브네>에 머물러 있는 두 분의 장로를 뵙기 위해 한쪽 머리를 움켜잡으며 올라왔다.

<…….>

<…….>

<…장로님?>

4장로는 멍하니 샘의 안쪽을 바라보고 있는 대장로와 2장로를 보고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무슨…….>

자신이 왔음에도 반응조차 안하는 두 장로님을 보고 이상함을 느낀 4장로는 대장로와 2장로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하여 아픈 머리를 감싸 쥐고 샘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자신도 그 샘의 안쪽을 바라보았다.

<…….>

4장로는 이곳을 급하게 찾아왔던 이유가 머릿속에서 서서히 잊혀 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별로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그것보다는 샘 안쪽에서 자신을 향해 말하는 목소리에 집중해야 했으니까.

이윽고 4장로 역시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하니 샘물만을 바라보게 되었다.

☆ ☆ ☆

“허… 뭔가 이상한데…….”

시안 동생이 아는 사람을 만나고 오겠다고 하여 숙소에서 쉬고 있던 스틸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기운에 한달음에 라브네 쪽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이상한 광경을 보게 되었다.

자신과 드잡이질 하던 두 명의 그라나인 녀석들이 멍하니 샘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던 것.

게다가 아래에서 허겁지겁 달려온 웬 그라나인 녀석도 그 둘을 보고 이상한 걸 느꼈는지 조심스럽게 접근하다가 샘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똑같은 꼴이 되어 앞의 두 녀석과 같이 멍하니 샘을 바라보고 있었다.

졸지에 샘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세 명의 그라나인을 바라보던 스틸은 문득 궁금해졌다.

저 안에 녀석들의 영혼이 들어있는 것은 알고 있다. 이백 년을 살펴왔으니까.

하지만 녀석들은 자아가 없는 녀석이 대부분이었고, 특히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대한, 자신도 이기지 못한 세 명의 영혼은 수천 년의 세월 끝에 이성이 마모되어 정말 본능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현세에는 별 영향을 끼칠 수 없을 터인데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저 녀석들이 고개를 처박고 샘을 보고 있는지 궁금해진 스틸은, 자신도 보고 싶었지만 저 녀석들과 똑같은 꼴이 될까 봐 멀리서만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 모르겠다.”

어차피 저 세 녀석이 미쳐서 자신을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도저히 궁금함을 참을 수 없었던 스틸이 몸을 훌쩍 날려 샘 안을 보고 오려던 찰나, 변화가 일어났다.

멍하니 샘을 바라보고 있던 세 명의 그라나인이 천천히 샘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

‘…뭐지? 집단자살이라도 하는 건가?’

그 기괴한 광경에 잠시 발걸음을 옮기는 것도 잊은 스틸은 천천히 녀석들을 지켜보았다.

천천히 걸어 들어가던 녀석들은 이윽고 머리까지 잠겼고 녀석들이 들어간 자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그마한 기포만이 방금 전 세 사람이 들어갔던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라브네가 잔잔하게 남아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들어갔던 세 사람은 생각이 바뀐 듯 다시 샘 바깥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으니까.

누가 보면 숨을 참는 연습이라도 한 줄 알았을 정도로 짧은 시간.

하지만 녀석들을 보는 순간 스틸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아이 씨… 요즘 왜 이렇게 도망갈 일이 많지… 체면 구기게…….”

자신을 바라보는 녀석들의 눈초리를 확인한 순간, 스틸은 잽싸게 몸을 날렸다. 초인 중에서도 느린 편인 자신이 도망치려면 빠르게 도망가야 한다.

아까의 세 녀석들은 이길 수 있었지만, 지금의 세 녀석들은 이길 수 없다. 어서 시안 동생을 찾아가 합류해야 한다.

스틸은 판단이 서자마자 빠르게 몸을 날렸고, 서로를 쳐다보던 대장로와 2장로, 4장로는 빠르게 그 뒤를 쫓아 몸을 날렸다.

모두가 사라진 자리에는 그들의 신지를 지탱하는 샘, 라브네만이 조그맣게 남아있었다.

아니, 이제 샘조차 사라질 듯 보였다.

샘은 바닥에 구멍이라도 난 듯 조금씩 그 물이 줄어들고 있었으니까.

☆ ☆ ☆

“음… 갑자기 느낌이 좋지 않은데…….”

“무슨 일이니, 시안?”

“음… 아니야, 형. 갑자기 강렬한 느낌이 드는데…….”

리안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네가 그럴 정도면…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자리에 무언가 위험한 게 있는 것이 아니니?”

“음… 거기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어서 가야 한다… 점점 통증이… 심해진다…….>

리안과 시안, 5장로를 비롯한 몇몇은 현재 시안이 만들어놓은 격전지의 흔적으로 향하고 있었다.

5장로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딱히 짚히는 원인이 없었기에 도시 내부는 다른 사람들에게 조사를 맡겨두고 우선적으로 구덩이부터 살피기로 한 것이다.

거리가 멀지 않았기에 금방 도착한 조사단은 그 거대한 흔적에 다시 한 번 전율했다. 이게 인간들끼리 부딪쳐서 만들어 낸 흔적이라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마치 하늘에서 운석이라도 직격한 듯 푹 파인 지면.

지진이라도 난 듯 쩍쩍 갈라져 있는 지표면. 균열은 무저갱인 양 밑바닥이 보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누군가 움푹 베어 문 듯 깎여 있는 산맥까지.

대자연의 변덕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을 듯한 기괴한 지형들.

하지만 이를 살피던 리안은 살며시 눈매를 좁혔다.

“…저건 처음 보는 흔적인데…….”

“…헤헤.”

“연습 한번 거하게 했구나.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느끼지 못한 거지…….”

한숨을 쉬는 리안을 보며 시안은 머리를 긁적였다.

신이 나서 새로운 힘을 쓰다 보니 생각보다 힘이 과하게 들어갔는지 지형은 처음 자신이 스틸 양과 싸웠을 때보다 더 많이 변해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힘을 흘리는 일은 거의 없기에 자신과 스틸 양을 제외하면 느낄 수 있을 리 없다.

“어떻게… 5장로님, 좀 다른 것을 알아보시겠습니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곳에 뭔가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5장로는 점점 더 머리가 아파지는지 인상을 찡그리며 주위를 살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변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모두 2인 1조로 주변 지형을 살펴보시고 도중에 수상한 물건이 발견된다면 접촉하지 말고 즉시 알려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조사단이 흩어져 사방을 훑는 사이 시안은 산맥 너머 저 멀리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후우… 형,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어.”

“음? 시안? 어디 가려고 그러니?”

“그냥… 동료 좀 챙겨야 할 듯해서. 혹시 위험한 일 생기면 싸울 생각 말고 꼭 도망가고.”

“그래. 걱정해줘서 고맙다, 시안. 잘 다녀오렴.”

자신을 걱정해주는 시안이 기특한 듯 미소 지은 리안은 조사를 진행하기 위해 사라졌고 시안은 빠르게 몸을 날렸다. 여기서 맞붙으면 백 프로 형이 휩쓸린다. 최대한 먼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휴우… 그래도 마음은 편하네. 여기는 케르발이나 마르가란과 달리 싸움이 붙어도 인명피해가 안 나겠지.’

☆ ☆ ☆

콰앙!

“큭…….”

뒤를 따라 잡힌 스틸은 자신의 몸이 주욱 튕겨나가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제길… 조금만 더 버티자.’

이렇게 치고받고 있으니 시안 동생이 곧 있으면 달려올 것이다. 하지만 스틸은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샘 안으로 들어갔다 나온 녀석은 그 허약한 녀석들이 아니었다. 스틸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녀석들을 몰아내고 새로 저 몸을 차지한 녀석들은 스틸에게 익숙한 녀석들이었으니까.

“아, 진짜… 어떻게 몸을 빼앗아서 나온 거야, 샘에 있던 녀석들이!”

자신이 이기지 못한 세 명의 초인. 그 녀석들이 어떻게 된 연유인지 몰라도 바깥으로 기어 나온 것이다. 아직까지는 새로 얻은 몸에 적응하지 못한 상태라 버티며 도망가고 있었지만 공격이 점점 더 정교해지고 있었다. 몸에 새로운 혼이 점차 안착하고 있다는 뜻이다. 숫자도 많은데 이제 한 명 한 명이 점점 더 강해지니 도망도 힘들었다.

더 큰 문제는 녀석들의 한계가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것.

“후… 내가 시안 동생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보고 싶은 적은 또 처음이네… 더 좋아하는 쪽이 을이라던데…….”

끊임없이 격돌하면서도 불평을 내뱉던 스틸은 저 멀리서 달려오는 기운을 느끼고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왔구나!”

엄청난 속도로 익숙한 기운이 달려오고 있었다. 시안 동생이리라.

스틸이 미소 짓고 있을 때 시안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더니 이윽고 코앞까지 다가왔다.

“동생! 반가워… 헉?”

“여기서 싸우면 안 됩니다. 이쪽으로 오세요.”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고 그대로 스틸을 낚아챈 시안은 그대로 격전지 반대방향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어머, 동생, 꽤나 과감하네. 공주님 안기라니. 후후.”

“…급해서 그런 겁니다. 그나저나 어디서 저런 걸 달고 온 겁니까.”

시안은 방향을 바꿔 자신을 맹렬하게 쫓아오는 세 명의 그라나인을 보며 혀를 찼다. 다른 사람들은 평생 초인이나 괴수 한번 보기 힘들다는데 자신에게는 어찌 이렇게 잘 엮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후후. 내가 말했잖아, 동생. 이 몸은 인기가 대단하다고. 이 미모는 종족조차 초월하지.”

“여유가 생기셨군요, 농담도 하시고.”

“동생이 지켜줄 거잖아. 아니야?”

“아이고…….”

이제는 발을 뺄 수도 없다. 스틸 양을 내버려둘 수도 없거니와 저기서 달려오는 녀석들은 도시를 모조리 쓸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형과 셀린 경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그나저나… 저분들 저렇게까지 안 강했던 것 같은데요. 뭐, 몸에 좋은 거라도 드셨답니까?”

혼의 기질이 바뀐 거야 저들의 종족특성 탓인가 했지만 갑작스럽게 증폭된 저 강함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에 시안이 달리며 질문했다.

“음… 나도 잘 모르겠는데… 그냥 샘에서 목욕하고 나오니까 저렇게 되던데?”

“…목욕을 하니까요?”

“응.”

“그 샘 어딥니까. 저도 이번 기회에 목욕 한번 하고 벽이나 하나 더 뚫어봐야겠군요. 세 번쯤 더하고 이번 기회에 초초초인도 한번 돼 보고요.”

“동생, 농담 아니야. 진짜라니까.”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일에 농담하실 필요는 없겠지요. 답답해서 그럽니다.”

“영혼의 샘 안에 다른 녀석들이 있었는데 저 녀석들 몸을 빼앗아서 나온 모양이야.”

“허… 뼈가 있어야 살아날 수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다시 살아난 게 아니라 몸을 빼앗은 거니까 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

“음… 아주 사기적인 종족이군요. 저렇게 라-반더를 찍어낼 수 있다니…….”

“그러게… 죽어야 할 녀석들이 왜 이렇게 돌아다니다니… 다시 처넣어 주어야겠네.”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시안과 스틸은 산맥 중턱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뒤따라온 세 명의 그라나인을 바라보았다.

“음… 대화로 해결할 생각은 없겠죠?”

“의미 없을걸. 쟤들 혼은 수천 년도 더 돼서 이미 이성은 사라지고 본능만 남았다고.”

어차피 라-반더들은 이성으로 싸우는 게 아니라 본능으로 싸웠기 때문에 그 강함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얽어매는 것이 없었기에 전투력 자체는 더욱 높았다.

“스틸 양은 맨 왼쪽을 맡아 주십시오. 저는 나머지 둘을 해결하지요.”

“좋아. 후후. 하나 정도라면 문제없지.”

말을 마친 시안은 크로나-폰을 꺼내 들며 달려들었고 스틸도 질세라 달려들었다.

이윽고 하늘산맥 자락에 운석이 떨어진 듯 거대한 굉음과 빛이 발생했다.

☆ ☆ ☆

“음? 이건 뭐지?”

사방이 난자되어 있는 격전지를 경이로운 눈으로 쳐다보던 조사단 소속, 레이놀드는 무언가 붉은빛을 띠는 것이 흙 사이에서 보이자 의아해하며 접근했다.

쿠아아아앙!

갑자기 저 멀리서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고 그에 깜짝 놀란 레이놀드는 다가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저 멀리,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엄청난 소리가 난 곳에서 눈이 멀 듯한 찬연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아름다우면서도 장엄한 빛에 현혹된 레이놀드는 자신이 살피려고 접근하던 것이 무엇인지도 잊고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레이놀드는 자신이 살피려던 물체가 달그락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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