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만의 검공-42화 (43/81)

<42. 경비병>

“워우… 어디서 이런 녀석들이…….”

스틸 양이 휘말릴까 봐 다소 떨어진 곳으로 녀석들을 유인한 시안은 감탄하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 태어난 뉴버전 장로들은 허약하던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힘을 쓰는 데 낭비가 없었다. 몸 안의 법칙도 더욱 강력하게 재배열되었고 힘을 쓰는 방법도 더욱 능숙해져 겉모습만 똑같지, 완전 다른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전투력 자체가 차이가 너무 심했다.

벽을 넘기 전이었다면 아마 생명의 위협을 이 녀석들에게 느꼈을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일찍 와서 다행이군… 혼이 제대로 안착된 상태에서 스틸 양이 맞붙었다면 죽었겠는걸…….’

혼이 안착되면서 그 전투력은 점차 강해지고 있었기에 더욱 위협적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자신이 벽을 넘기 전의 이야기이다.

벽을 넘은 자신은 방심할 여유까지는 없었지만 이들을 객관적으로 살피며 싸움을 주도할 정도의 여유는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대장로였던 자와 2장로였던 자.

‘대장로라는 자의 몸에 들어간 혼은… 왠지 여성체 같은데…….’

왜 여성체냐고 물으면 정확한 이유를 대답할 수는 없었지만 느낌이 그랬다. 전투방식이 여성스럽다는 뜻이 아니었다. 흉폭하기는 오히려 옆의 2장로보다 더했으니까.

단지 혼에서 울려 퍼지는 파장이 왠지 저 혼이 살아있을 당시에는 여성체가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분명 같은 종족이라고 했지만 힘을 쓰는 방식은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공통점은 둘 다 매우 흉폭하다는 점. 그라나인이라면 분명 유사인종으로 분류되어 있고 지성과 이성이 확고한 종족일 텐데 싸우는 것을 보니 인간보다는 하리쟌에 훨씬 가까워 보였다.

하지만 시안은 급한 것이 없었다. 오히려 지금의 이 상황이 매우 기꺼웠다.

조금 귀찮긴 하지만 새로 얻은 힘을 모조리 풀어낼 만한 상대를 만났다.

녀석들이 먼저 습격했기에 인간적으로 거리낄 것도 없다.

형도 안전한 곳에 두고 왔기에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고 시간도 많다.

상대가 강하긴 하지만 내가 질 염려는 전혀 없다.

이 모든 조건이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외침과 완벽하게 부합하고 있었다.

<짓밟고 증명해라. 내가 최강이다!>

거리낌 없이 초인으로서의 면모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

시안은 악마처럼 웃으며 내면의 새로 얻은 힘을 주욱 끌어올리며 달려들었다.

☆ ☆ ☆

<…여긴 어디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동류들만이 존재할 뿐.

대부분의 기억을 잃어버렸지만 아주 드문드문 기억을 더듬으며 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라브네의 안인가…….>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죽은 지 몇 년이나 흘렀지?>

<뼈는… 남아있지 않겠지…….>

<…내 자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기억을 더듬고 생각을 하는 작업을 하자 사고에 가속이 붙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수많은 생각이 피어나고 사라졌지만 갑자기 머리를 치고 들어오는 강렬한 외침이 모든 사고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따르라…….>

<본능에 따르라…….>

하지만 머릿속의 울림은 무시해버렸다. 본능에 따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육체도 없는데 말이다.

그렇게 떠돌아다니다가 문득 자신의 의식이 어딘가로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아니, 자신의 의식이 어딘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의식과 혼이 담겨있는 라브네의 물이 어딘가로 새어 내려가고 있었다. 아마 최근의 흔들림 때문에 샘의 바닥에 구멍이라도 났는가 보다.

땅을 통해 이곳저곳으로 스며들다가 어딘가에 도착하게 되었다. 어디를 통해 어디로 왔는지는 몰랐지만 도착하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아아… 도착했구나… 우리들의 근원.>

육체가 없기에, 뼈가 삭아 없어졌기에 살아날 수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근원을 바탕으로 하면 살아날 수 있다.

방법이 눈앞에 보이자 마음이 급해졌다. 이미 자신과 같이 흘러들어온 동류들은 앞다투어 눈앞에 보이는 근원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자신도 뒤쳐질 수 없기에 허겁지겁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사라졌던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눈이 있던 부위로 빛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언가 시끄러운 소리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예전의 느낌을 살려 팔을 움직이려고 하니 팔이 움직였다.

칼이 한 자루 필요할 것 같아 머릿속으로 떠올렸더니 칼도 한 자루 뻗어 나와 자신의 손에 잡혔다.

<맙소사… 살아난다.>

살 만큼 살았기에 더 이상 삶에 대한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밀려드는 감각에 혼의 상태로 샘물 안을 떠돌 때에는 절대 맛볼 수 없는 충만함이 몸 구석구석까지 밀려들었다.

동시에 알 수 있었다. 머릿속의 외침을, 본능에 따르라는 내면의 울림을 거역하지 않는다면 이 충만함을 계속해서 맛볼 수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망설임 없이 결정했다. 이 감각을, 이 충만함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오랜 시간, 사회를 형성하며 함께 살아가기 위해 묻어두었던 본능에 따라주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침입자를 죽이고 먹어치워라.>

애초에 그것이 우리가 핏속에 가지고 태어난 본질이었으니.

그리고 다시 태어난 그는 머릿속의 다른 사고와 이성, 기억은 모조리 지워버린 채 본능을 좇기 위해 근원을 바탕으로 새로이 얻은 몸을 일으켰다.

☆ ☆ ☆

레이놀드는 점점 더 강렬해지는 소리와 음성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해.”

“……음?”

저 멀리서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며 크게 외치고 있었지만 굉음에 파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레이놀드는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청력을 끌어올렸다.

“…심해!”

차차 소리가 잘 들리기 시작하자 레이놀드는 더욱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이윽고 그 소리가 뭐라고 하고 있는지를 들을 수 있었다.

“조심하라고! 멍청아!”

푸욱

“…어?”

하지만 그 소리를 들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자신의 배를 뚫고 나온 한 자루의 칼끝을 보며 레이놀드는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지만 곧 그럴 필요도 없게 되었다.

옆에서 날아온 다른 칼 한 자루가 목을 날려버렸으니까.

저 멀리서 그걸 지켜보며 달려가던 크틸은 결국 레이놀드를 구하지 못하게 되자 쌍욕을 내뱉었다.

“제기랄! 조심하라니까! 저것들은 대체 뭐야!”

레이놀드가 서있던 뒤쪽, 깊숙이 파인 틈 속에서 무언가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근육도, 살도, 혈관도 없이 뼈만 남아 움직이고 있는 녀석들.

뼈를 지탱할 연조직들이 단 하나도 없으니 널브러져야 마땅한데 녀석들은 몸에 기괴한 붉은 기운을 두르고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감각기관조차 하나도 남아있지 않는데 녀석들을 구성하는 뼈를 감싸 안고 있는 붉은 기운은 마치 눈과 귀를 대신하기라도 하는 듯 움푹 파인 안구를 비롯한 두개골에 서려있었고, 녀석도 마치 눈이 있는 양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뼈밖에 안 남아 있지만 전혀 약해 보이지 않았다. 녀석의 두꺼운 뼈다귀와 소름 끼치는 안광을 보고 만만하게 볼 수 있을 정도로 간이 큰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러던 와중, 맨 앞에 서 있던 녀석의 붉은 안광이 크틸을 향했다.

크틸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녀석의 눈이 전하고자 하는 바가 명백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개자식이… 날 잡아먹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죽여버리겠다!”

크틸은 고함을 지르며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두 녀석 정도야 자신도 얼마든지 해치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레이놀드의 복수를 하기 위해 달려들던 크틸은 잽싸게 몸을 돌려 리안 경이 있는 곳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두 녀석이 끝이 아니었다. 두 녀석의 뒤로 수십 기의 붉은 안광이 검은 틈을 통과하여 바깥으로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달려오던 크틸을 발견하고 맹렬하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달려오는 크틸 경과 그 뒤의 괴상한 해골 수십 기를 본 리안은 빠르게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모았다.

“진형을 정비해라!”

가벼운 마음으로 왔다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하게 된 리안은 이를 악물었다. 저기 달려오는 녀석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약한 상태였다. 하지만 점차 더 강해지고 있었다.

도망가기에도 늦었다. 자신은 충분히 도망갈 수 있었지만 익스퍼트 급들은 모조리 따라잡힐 것이다. 녀석들은 뼈만 남아서 그런지 엄청나게 빨랐으니까.

“5장로님,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한번… 해보겠네……. 하지만… 많은 기대는 하지 말게…….>

점점 더 고통이 심해지는지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5장로가 손에 힘을 집중시키며 앞으로 나섰다.

이윽고 진형을 갖춘 조사단과 새롭게 태어난 붉은 해골들이 거칠게 충돌했다.

☆ ☆ ☆

“하하하하!”

쿠드드득. 꾸드득.

칼을 휘둘러 단숨에 상대를 산맥에 처박아버린 시안은 호쾌한 웃음을 지었다. 전력을 펼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다.

게다가 이 녀석들은 특이하게도 계속해서 되살아났다. 팔이 잘려도, 다리가 토막 나도 잠시만 뒤로 빠지면 순식간에 뼈가 자라고 그 위로 근육이 붙고 혈관이 엉기며 살이 돋았다.

눈앞의 대장로와 2장로의 몸을 차지한 녀석들이 강대하기는 했지만, 그리고 뼈와 샘물만 있으면 되살아날 수 있다는 그라나인이라고는 하지만 이는 상식 밖의 일이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시안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오래 오래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왼쪽의 대장로가 잘린 팔을 재생시키며 쭈욱 뻗어왔다. 순식간에 손에 밀집된 푸른빛이 공간을 찢으며 날아들었다.

시안은 그쪽으로 칼을 휘두르지도 않았다. 오히려 대장로가 자신을 공격하는 틈을 타 2장로를 전력으로 몰아붙였다.

그리고 대장로가 한 공격은 시안의 머리를 정확히 후려쳤다, 아니 정확히 후려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착각이었다. 시안의 머리 주변으로 무언가가 겹겹이 둘러쳐져 있었고 대장로는 그곳을 가격했다. 분명 장막과 시안의 머리는 손가락 한마디만큼도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 마치 그 거리가 마치 산맥의 산봉우리까지 가는 길처럼 멀게 느껴졌다. 대장로가 가한 공격은 산을 부술 만한 위력을 가졌었지만 모조리 흩어지고 분쇄되어 시안에게 닿을 때쯤에는 어린아이의 주먹질처럼 변해버렸다.

대장로는 자신의 공격이 막혔음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까부터 그러고 있었으니까.

포기하지 않고 다시 달려드는 대장로와 2장로를 후려친 시안은 갑자기 자신의 몸에 무슨 기묘한 힘이 작용하려는 것을 느꼈다.

“어떤 건방진 자식이…….”

자신에게 이적을 적용하려고 하는지 주위를 살펴본 시안은 주위에 아무도 없고 오히려 그 이적이 자신의 몸 가까이에서 발생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엑사르 유동의 근원지는 자신의 손가락에 끼어진 반지였다.

언약의 목걸이와 함께 세트를 이루는, 목걸이의 주인이 위험해지면 반지의 주인을 소환한다는, 그 반지가 작동하려 하고 있었다.

이를 본 시안의 안색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쪽에 놓아두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줄 알았는데 형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이 소환에 응했을 것이다. 형은 누구보다 소중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가면 스틸 양은 반드시 죽는다.’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지금 이 소환에 응하면 스틸 양은 자신이 돌아오기 전에 반드시 죽는다. 저기 한 녀석에게 발이 붙잡혀 있어 도망도 가지 못 할 것이다.

그제야 마음이 급해진 시안은 맹렬하게 칼을 휘둘렀다. 소환 전에 반병신이라도 만들어두고 가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시안을 즐겁게 해주던 불사에 가까운 재생력이 이제는 시안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부숴도 부숴도 끝없이 되살아나는 녀석들을 완전히 박살을 내놓으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기이이이잉!

“젠장!”

반지에서 맹렬하게 뿜어져 나오는 녹색 빛이 더 이상 소환을 늦출 수 없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결국 시안은 결정을 내렸다.

☆ ☆ ☆

쿠웅! 쿠드득!

“질긴 자식…….”

스틸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4장로를 보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샘에 있을 때는 강한 녀석이었지만 다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고 그랑-반더의 육체를 빌려 다시 태어났기에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았다.

점점 더 힘을 사용하는 것이 능숙해지는 것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재생속도였다. 예전에 같이 싸울 때는 이런 능력은 없었는데 샘에 흠뻑 몸을 담그고 와서 그런지 상처가 나도 엄청난 속도로 재생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소멸시켜보아도 뼈에 새겨진 정보를 바탕으로 재생되는 것인지 그 부위가 고스란히 복원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재생속도는 말도 안 되는데… 동생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싸우던 도중 살짝 여유가 생긴 스틸은 시안 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시안 동생은 엄청나게 당황하고 있었다.

‘어?’

저기 동생과 싸우고 있는 둘은 라-반더의 육체를 기반으로 태어난 데다 영혼 자체도 자신이 싸우고 있는 녀석보다 훨씬 강했기에 전투력이 막강하기는 했다.

하지만 시안 동생은 그보다 훨씬 괴물이기에 별로 당황하지 않고 싸울 줄 알았는데 저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다니.

‘예상보다 저 녀석들이 훨씬 강한가……? 싸우는 모습을 보니 그래 보이지도 않는데…….’

그 순간, 시안 동생이 엄청난 속도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어… 어?”

스틸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시안을 보고 깜짝 놀라 눈앞의 녀석의 움직임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눈앞의 녀석은 그걸 놔둘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제기랄…….’

예상외의 상황에 당황한 스틸은 팔 한쪽을 내어줄 각오를 하고 오른팔에 잔뜩 힘을 주고 녀석의 공격을 받아갔다.

빠악!

하지만 예상했던 충격이 오지 않자 스틸은 당황해서 팔을 치우고 앞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다가온 시안이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녀석을 후려쳐서 쫓아오고 있던 대장로와 2장로에게 날려버린 것이었다.

“어머. 동생, 설마 나를 구하러 온…….”

“스틸 양! 시간이 없습니다!”

“어… 어?”

다짜고짜 자신의 손목을 잡아채는 시안에게 놀란 스틸은 시안이 자신의 손에 반지를 하나 껴주자 어안이 벙벙했지만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동생… 설마 여기서 프로포즈하는 거야? 어머, 로맨틱하네. 이렇게 안 서둘러도 되는데.”

“무슨 소리를… 형을 잘 부탁드립니다.”

“뭐?”

스틸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반지에서 녹색 빛이 터져 나왔고 잠시 후 스틸의 모습은 사라진 채 시안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시안은 이제야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스틸 양이라면 적어도 형을 구해서 도망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면 된 것이다.

“후… 이제 급한 불은 껐으니까… 다시 한 번 놀아보자, 망할 자식들아.”

그리고 시안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셋을 덮쳐갔다.

☆ ☆ ☆

“헉… 헉… 조금만 더 버티시오, 다들!”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해골들의 공격에 리안은 점차 지쳐가고 있었다. 그가 이제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동생이 주고 간 목걸이 덕분이었다.

처음 해골의 공격을 맞는 순간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다. 하지만 동생이 주고 간 목걸이에서 기묘한 빛이 새어 나오더니 자신의 몸 주위에 회색빛이 도는 구름을 형성했다.

단순한 구름이 아니었다. 자신을 공격한 무기에 강력한 전격을 걸고 더 나아가 공격한 자에게까지 뇌전을 쏘아대는 신묘한 구름. 이 아티팩트의 효능을 확인한 리안은 앞에서 더 열심히 싸웠다. 자신이 열심히 싸울수록 한 명이라도 더 살아날 가능성이 커지니까.

하지만 계속해서 밀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전력의 차이가 너무 심했다. 5장로는 몸에 이상이 있는지 적극적으로 싸우지를 못 하고 있었고 다른 조사단의 인원들은 분투하고 있었지만 밀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나둘씩 쓰러져갔고 리안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스아악!

리안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칼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저 칼은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후우…….’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을 때, 갑자기 자신의 목걸이 앞에서 찬연한 녹색 빛이 폭발했다. 이제까지 회색빛 구름만 내뿜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

녹색 빛은 갑작스럽게 날아들던 칼을 튕겨낸 후에도 한동안 그 빛을 유지했다.

갑작스런 변화에 리안이 무슨 상황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때 녹색 빛이 사그라지며 그 안에서 가녀린, 하지만 길쭉하게 뻗은 손 하나가 뻗어 나왔다.

☆ ☆ ☆

“아… 뭐야?”

갑작스럽게 자신의 몸을 휘감아오는 엑사르의 흐름을 거부할 수도 있었지만 동생이 자신에게 이상한 짓을 할 리도 없고, 워낙 다급해 보였기에 그대로 몸을 맡긴 스틸은 갑작스럽게 주변의 환경이 변한 것을 느꼈다.

‘단거리 공간이동 아티팩트였군…….’

옆을 보니 시안의 형이라는 리안이라는 아이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손에 끼고 있는 이 반지는 예전에 시안이 자랑했던 그 반지였다. 언약의 목걸이와 세트를 이룬다는 반지. 워낙 목걸이에만 신경을 썼기에 반지의 디자인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기랄! 괜히 설레었네.”

주변을 살펴보니 웬 이상한 해골 녀석들이 리안이라는 아이 주변을 둘러싸고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아마 시안이 이 광경을 봤으면 이 녀석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후회하게 되었을 것이다.

‘아… 해골이라 그럴 리는 없으려나.’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해결책은 명확했다. 입 밖으로 투덜거림을 내뱉은 스틸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해골을 짜증을 담아 툭 하고 쳤다.

하지만 그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투쾅!

대포에 맞은 듯 날아간 해골의 머리는 경로에 있던 다른 해골까지 박살 낸 후 저 멀리 땅에 가서 처박혔다.

그 모습을 본 리안은 어안이 벙벙했다. 시안이 준 목걸이에서 저번에 시안이 소개해 준 여성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때의 조신하던 모습은 간데없고 마치 한 마리의 사나운 맹수 같은 기세를 사방으로 뿌려대고 있었다. 앞뒤 모르고 덤벼들던 해골들조차 뒤로 물러설 정도로 말이다.

“후후. 너무 걱정하지 마요, 리안 경. 아, 리안 경이라 불러도 되지요?”

“아… 그러십시오, 스틸 양.”

“나는… 음, 시안 동생이 리안 경을 지키라고 보내준… 수호천사 정도가 되겠군요.”

그리고 스틸은 짜증을 가득 담아 눈앞의 해골 녀석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녀석들에게는 별로 안 좋겠지만요.”

말을 마무리한 스틸은 눈앞의 해골들에게 기운을 폭발시키며 뛰어들었다.

☆ ☆ ☆

<크허허헉!>

빠악!

경쾌한 소리와 함께 날아간 5장로를 보며 스틸은 리안에게 말을 걸었다.

“이 정도면 되겠지요?”

“아… 감사합니다, 스틸 양.”

“그나저나 이 노친네는 도대체 왜 갑자기 달려드는 건지…….”

해골을 거의 다 처리해가고 있을 때 머리를 부여잡던 5장로도 갑작스럽게 달려들었다. 혹시 이 녀석도 영혼을 바뀌었나 하여 조심스럽게 접근한 스틸이었지만 이 녀석은 그냥 이성이 나간 것뿐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두들겨 패도 재생하며 미친 듯이 달려들기에 스틸은 우선 전신을 가루로 만들어놓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장로의 몸은 계속해서 재생되는 중이었다.

‘후후. 그래, 나 아직 안 죽었어.’

자신을 경이로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주변 시선을 느끼던 스틸은 갑자기 울적해짐을 느꼈다. 요즘 도망을 다니기는 많이 다녔나 보다. 저런 아이들의 시선에 우쭐함을 느끼다니.

“이 정도면 마무리가 된 것 같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스틸 양. 그나저나 저것들은 갑자기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갑자기 미쳐 날뛰는 그라나인족에 되살아난 라-반더, 심지어 해골들이 일어나서 공격하는 모양새까지… 공통점은 없었지만 동시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 매우 수상했다.

분명 무언가 원인이 있을 텐데 잘 모르는 것이 답답했다.

“저… 리안 경.”

“음… 크틸 경, 무슨 일이십니까?”

“저 녀석들이 나온 구멍을 한번 살펴보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혹시 크틸 경은… 저 녀석들이 처음에 어디서 튀어나오는지를 보았습니까?”

“네. 저기 레이놀드 시체의 뒤에 있는 구멍… 저기에서 처음으로 튀어나왔습니다.”

그러면서 크틸은 저 멀리 목이 없이 쓰러져 있는 레이놀드의 뒤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무언가 불그스름한 것이 보였다.

“저런 게 있었다니… 왜 몰랐지?”

딱 보아도 수상해 보이는 물체가 땅에 파묻혀 있었는데 이제까지 아무도 찾지 못한 것이 신기했던지 리안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게… 원래대로라면 지상에서 수십 미터, 수백 미터 아래 떨어진 깊이입니다. 저번의 대격전으로 인해 여기까지 파여 나온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제까지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 이해가 되는군요.”

원래 라그랑 지방에 살던 한 인재가 대답했고 이를 크틸 경이 받았다.

“한번 가보도록 하지요.”

“저… 그런데 리안 경…….”

“무슨 일입니까, 크틸 경?”

“저기 5장로라는 자가 저렇게 미쳐버렸다면… 그라나인들이 살고 있는 마을은 괜찮은 것입니까?”

“이런!”

리안은 생각을 못하였다는 듯 머리를 쳤다. 생각해보니 5장로가 이 정도라면 나머지 장로들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다는 보장이 없다.

“빨리 가보도록 하지요. 저기 그리고… 스틸 양.”

“후후. 무슨 일인가요, 리안 경?”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조금만 도와주셔도 괜찮겠습니까?”

스틸은 그라나인과 인간들이 싸우다 모조리 죽어도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푹 파인 산맥 안에 있는 저 수상한 물체에 관심이 많았다.

다른 녀석이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당장 모가지가 뽑혀나갔을 것이지만 행동은 언제나 장소와 대상, 상황에 따라 바뀌는 법. 이 아이가 시안 동생이 엄청나게 아끼는 형이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후후. 이번 기회에 점수 좀 따볼까?’

게다가 거기 남아있을 3장로와 6장로라는 녀석들이 난장을 피우고 있다면 마을의 상황은 굉장히 위험할 것이고, 그런 곳에 리안을 혼자 보낸다면…….

‘으… 그래도 많이 친해졌는데 죽이기야 하겠어……?’

확신할 수 없기에 스틸은 위험부담을 짊어지지 않는 방향으로 행동하기로 했다.

“후후. 좋아요, 리안 경. 그 대신 나중에 제가 확실히 도왔다고 동생에게 말 좀 잘 해줘요.”

“이를 말씀이십니까. 저희가 지금 살아있는 것도 다 스틸 양 덕분인데요.”

만족스러운 리안의 답변에 스틸은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몸을 날렸다.

“리안 경, 아무리 뒤져보아도 마을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군요. 다들 어디 간 것일까요?”

신지, 그랑-라트라로 간 조사단은 마을이 모조리 비어있는 것을 보고 의아함을 느꼈다.

비록 그라나인족의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조용한 것은 이상했다. 특히 5장로처럼 미쳐버렸다면 이미 도시 쪽으로 뛰어갔어야 맞다.

그걸 걱정한 리안은 스틸에게 부탁하여 도시 쪽부터 들렀다 왔지만 도시 쪽은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제야 조금 여유가 생긴 리안은 스틸과 함께 마을 쪽으로 왔지만 아무도 없었다.

“흠…….”

“스틸 양,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습니까?”

“있기는 한데… 리안 경은 우선 도시로 돌아가세요. 이 뒤는 제가 알아보지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스틸은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스틸은 아까 시안이 싸우던 곳으로 뛰어갔다. 자신의 예측이 맞다면 아마 모두 그곳에 있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섬광도 뿜어져 나오고 있지 않았고 산이 무너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상황이 마무리되어 간다는 뜻.

때문에 스틸은 마음 편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하늘이 무너지면 무너졌지 시안이 지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역시…….”

스틸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아까 자신이 공간이동하기 전에는 분명 산이었는데 이제는 더 깊은 구덩이가 생겨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시안과 그라나인으로 보이는 인영들이 모조리 널브러져 있었다.

“시안 동생… 하하, 이번에도 거하게 했네. 하늘산맥이라는 이름 대신 시안 대협곡이라는 이름이 붙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겠어.”

“오셨습니까. 형은 어떻게 되었지요?”

시안은 지친 표정이었지만 스틸을 보자마자 형의 안부부터 물었다.

“후후. 내가 누군데. 다 구해냈지. 네 형은 생채기도 안 났다고.”

“휴우… 다행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스틸 양.”

“후후. 동생 형인데 내가 아니면 누가 챙기겠어.”

스틸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도 몸 푸니까 기분 좋지? 저번에 보여줄 때 보니까 어디 한번 쓰고 싶어도 몸이 뒤틀리는 것 같던데.”

산과 하늘에 대고 새로 얻은 힘을 갈겨대던 시안을 떠올리며 스틸이 웃었다.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았습니다. 이거 보세요.”

그러면서 시안은 덜렁거리는 칼 한 자루를 보여주었다. 이제는 시안의 독문병기가 된, 크로나-폰이었다. 그리고 그런 크로나-폰에는 쩍 하고 금이 가 있었다.

“이번 녀석들이 강하긴 강했구나…….”

“이거 이제 식어서 모양 잡기도 힘든데… 에잉, 조심조심 써야겠어요. 이만한 녀석이 없는데.”

“그러고 보니 그거 어떻게 구한 거야?”

스틸이 궁금하단 듯이 물었다. 저 강대한 힘을 무리 없이 받아들이는 칠흑처럼 시커먼 칼. 별다른 기능은 없었지만 그 강도와 무게만으로도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보구와 동급에 놓일 정도였다. 이제까지 저런 걸 자신이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음… 그러니까…….”

그리고 시안은 자신이 이 칼을 얻게 된 경위를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들은 스틸은 별로라는 표정을 지었다.

“으… 그러면 그 안에 사람이고 뭐고 다 갈아 넣은 칼이잖아. 악취미네, 동생. 생각보다.”

“…….”

“크로나-폰이라니. 그것보다 콩티앙-반죽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겠는걸.”

스틸의 말에 시안도 영 찝찝한지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은 칼을 바라보았지만 이윽고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스틸 양이 뭐라고 해도 전 쓸 겁니다. 그리고 스틸 양, 이거 제가 버리면 주워서 쓰려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쳇.”

“그럴 줄 알았습니다.”

‘얘가 갈수록 눈치가 빨라지네…….’

스틸은 궁지에 몰렸다고 생각했는지 화제 돌리기를 시도했다.

“그나저나… 저기 아래 있는 애들 다 죽은 거야?”

“흠… 처음에는 그러려고 했는데… 패도 패도 안 죽던데요. 머리를 으스러트렸는데도 살아나길래 우선은 팔다리만 분질러 놓았는데… 아마 다시 붙을 거예요. 몇 번을 죽였는데도 안 죽어요… 뼈도 진짜 엄청나게 단단하고… 상황이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말하는 시안의 말에 스틸이 아래를 보니 과연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 셋 말고 나머지 그라나인들은?”

“그자들은… 아까 셋이 두들겨 맞고 있으니까 갑자기 우르르 몰려와서 돕던데요. 저 치들도 안 죽어요. 계속 살아나려고 해서 우선 몽땅 뼈만 부러트려 놨습니다.”

“아, 맞다. 동생, 그것 때문에 말인데…….”

스틸은 아까 리안을 구하러 갔다가 자신이 살핀 것을 시안에게 말해주었다.

“그거 참 수상한데요.”

“그렇지? 한번 살펴보자고. 뭐가 원인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힌트는 될 것 같아.”

“그러도록 하지요. 이렇게 해서는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다 놓아두고 가기도 좀 그런데…….”

시안은 저 아래서 발버둥 치고 있는 그라나인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다시 움직일까 봐 그러는 거야?”

“흠… 저희가 다녀올 때까지는 괜찮을 것 같지만… 조금 찝찝하니까…….”

시안은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셋을 차곡차곡 쌓은 다음에 그 위에 크로나-폰을 올려놓았다.

우두두둑!

“자… 이제는 못 움직이겠지요. 재생은 되더라도 힘이 돌아올 때까지는 시간을 벌어 줄 겁니다.”

“동생은 가끔 보면 특이한 데서 머리가 좋아.”

“칭찬이겠지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빨리 다녀오지요.”

“아니야, 동생. 잠깐. 더 확실하게 하자고.”

그리고 스틸은 움푹 파인 구덩이 옆을 후려쳤다. 그러자 굉음이 울리며 구덩이 옆의 산맥이 몽땅 무너지기 시작했고 그 흙더미들은 쓰러져있던 그라나인들을 모조리 묻어버렸다.

“이 정도 되면… 시간은 벌어주겠지. 그리고 셋 아니면 빠져나오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릴 거야.”

“잘하셨습니다. 그럼 가시지요.”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한 시안과 스틸은 아까 형이 있었다는 장소로 몸을 날렸다.

시안과 스틸이 도착한 자리에는 아까 부숴놓은 해골들이 예의 그 붉은 기운을 두르고 꿈틀대고 있었다.

“와… 얘들도 그렇고… 안에 정말 뭐가 있긴 있나 봅니다.”

“그러게… 뭔가 사람을 불사로 만들어 주는 거라도 있나?”

스틸 양이 손을 썼는데도 아직도 꿈틀대고 있다니. 이 기묘한 광경이 믿기지가 않는지 시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확인해 보면 알겠지요. 어디입니까?”

“흠… 분명 목이 날아간 시체 뒤라고 했는데…….”

“여기 목이 날아간 시체가 한둘이 아닌데요.”

“기다려봐. 저쪽 근처였는데… 아, 저기다!”

깎여나간 절벽 앞에 쓰러져 있는 시체를 본 시안과 스틸은 몸을 날렸고, 그 뒤에 있는 깊숙한 틈새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곳으로 조금 들어가 보니 붉은빛을 띠는 무언가가 흙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엄청 매끈하게 생겼는데.”

스틸의 눈앞에는 매끈한 붉은 벽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벽이 아니었다. 좁은 틈 사이를 가득 메운 붉은색의 조각들.

그러한 조각들 수백 장이 일렬로 정렬되어 스틸과 시안의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피니 붉은 조각들 중 몇 조각이 떨어져 나온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음… 몇 조각 떨어져 나왔네? 근데 시안 동생, 왜 이렇게 조용해?”

“…….”

시안은 말없이 붉은 벽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틸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물었다.

“이거 뭐 있어?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손대지 마십시오, 스틸 양.”

“음?”

동생이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런 소리를 할 자가 아니기 때문에 스틸은 뻗어가던 손을 가볍게 뒤로 빼냈다.

“무슨 일인데? 이게 뭔지 알아?”

“잠깐 바깥으로 나가보시지요.”

“궁금하게 하네.”

스틸은 벽을 만져보려고 했지만 시안의 손에 잡혀 바깥으로 질질 끌려 나왔다.

“아니… 어차피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보려면 그 붉은 벽을 지나가야 할 거 아냐? 왜 막은 거야?”

시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양손에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양손의 공간이 사정없이 일그러지기 시작했고, 찌그러진 틈새에서 어두운 광채가 찌그러진 틈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자신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양의 에너지를 보고 스틸이 기가 질려있을 때 시안이 손을 풍차처럼 휘돌렸다.

그리고 자신들의 눈앞에 남아있던 산이 마치 거죽이 벗겨지듯이 통째로 벗겨져 나가기 시작했다.

쿠드드드드득!

산 거죽이 벗겨지고 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스틸은 그 안에 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게…….”

“네. 이게 아까 스틸 양이 본 붉은 벽의 정체입니다.”

스틸은 눈앞에 펼쳐져 있는 광경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 ☆ ☆

<…여긴 어디지?>

로데발은 꿈을 꾸고 있었다.

아니, 꿈이 아니었다.

로데발은 누군가의 기억을 체험하고 있었다. 자신의 피로, 자신의 뼈와 영혼, 샘으로 전해져 내려온, 고대의 기억.

본질 위를 뒤덮고 있던 얄팍한 이성을 모두 걷어내고 나서야 알 수 있었던, 유전되어 온 그 기억을 로데발은 체험하고 있었다.

<크르르르르!>

<이게 기억의 주인인가…….>

로데발은 자신의 눈으로 보이는 광경을 보며 뇌까렸다.

기억 속의 자신은 그라나인이 아니었다.

좀 더 거대하지만, 아직은 약한 사족 보행의 생명체.

하지만 누구보다 사나웠고, 누구보다 생존에 탁월했다.

생명체는 먹고, 먹고 또 먹어치우며 강해졌다.

위험한 상대는 피하고 약한 상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먹었다. 그리고 장차 자신보다 강해질 가능성이 보이는 상대가 보이면 끝까지 쫓아가 잡아먹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어갔고, 자연스럽게 강해졌다.

머리의 뿔도 하나씩 늘어났다.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셋으로… 그리고 마침내 여섯 개로.

마침내 나약한 생명체에서 거대한 대륙을 좌지우지할 만한 강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결코 방심하지 않았다. 여섯 개의 뿔을 가지게 된 후에도 자신의 상대가 될 만한 녀석은 많으니까. 오히려 어설프게 강하면 좋은 먹잇감이 된다. 강한 녀석을 먹어치울 수록 빠르게 강해질 수 있으니까.

강해진 다음에는 더욱 조심했다. 이제까지 자신을 살려준 생활 패턴을 결코 바꾸지 않았다.

강한 녀석은 피하고, 약한 녀석은 잡아먹고, 죽을 것 같으면 무조건 피한다.

강해지고 강해지다 보니 어느 순간 깨달았다. 이제까지의 여섯 개의 뿔이 아닌, 새로운 존재로 태어날 때가 되었음을.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강해지는 순간 자신은 항상 약해졌다. 비할 데 없는 강자인 자신의 유일한 약점.

이제까지는 숨어서 조심스럽게 그 과정을 거쳤지만 더 이상은 불가능하다. 이번의 과정을 거치면 아마 대륙의 모든 존재가 자신의 변화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 위에 무언가가 생기는 것을 바라는 놈들은 아무도 없다. 자신을 공격하러 올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필요한 존재를 만들기로 하였다. 마침 자신에게는 알맞은 능력이 있었다. 자신의 권능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잡아먹은 웬 날파리 같은 녀석의 권능이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것이다.

<크르르르르!>

자신이 영역으로 삼은 산맥의 중턱, 작은 샘에 자신의 침을 뱉어내었다. 단순한 침이 아니다. 생명체를 움직이게 만드는 근원인 ‘무언가’를 가두고 못 나가게 한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꼬리뼈를 떼어 내었다. 많이 떼어내면 아까우니까 조금만.

조금이라고 해도 자신의 덩치가 있으니 꽤나 많은 양을 마련할 수 있었다.

떼어낸 꼬리뼈에 자신이 잡아먹은 녀석을 이용해 무언가를 새겼다. 주술과도 같고, 기적과도 같은 능력.

이 뼈를 바탕으로 하고 샘을 이용하여 ‘무언가’를 집어넣었다. 그다음에는 일사천리였다.

자신의 꼬리뼈 조각을 바탕으로 근육이 붙고 혈관이 생기고 피부가 덮였다.

새로 만들어진 존재는 꽤나 만족스러웠다. 자신의 힘만 계속 공급되면 죽지도 않고, 죽어도 다시 되살아날 수 있다. 비록 약하기 그지없었지만 저렇게 죽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힘을 쌓을 것이고 꽤나 쓸 만한 경비병이 될 것이다. 게다가 번식도 가능하니 일석이조이다.

녀석들을 만든 후 준비단계에 들기 전에 단 하나의 명령을 심어 넣었다. 경비병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하도록.

<내가 공격받으면 너희는 나를 통해 거대한 힘과 생명력을 얻을 것이다. 그 힘으로 나를 지켜라.>

녀석들의 존재목적이자 본질, 절대로 거역할 수 없다. 뼈와 혼에 새겼기에 대를 지나도 계속해서 이어질 종속의 명령.

기억은 여기까지였다. 그 존재가 다음 단계로 넘어갔는지, 아니면 살해당했는지는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여기까지의 기억도 아마 혼을 통해 전달되던 힘과 명령에 묻어 온 잔재일 것이다. 이번에 그 본질이 드러나니 기억도 끌어올려진 것이리라.

로데발은 허탈감에 빠졌다.

<우리가 고작 경비를 위해 태어난 존재였다니…….>

강대한 자신들 종족, 그라나인.

자신들의 종족은 결국 어떤 하리쟌이 자신이 약해질 때를 대비하여 만들어진 경비병에 불과했던 것이다.

자신들이 미쳐 날뛴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하리쟌의 육체가 공격받았기에 뼈와 혼에 새겨진 명령이 반응한 것이다. 자신이 위험하니 너희들의 임무에 충실하라고.

허탈에 빠져있던 로데발에게 다른 기억이 전해져 왔다.

<그 존재는 결국 다른 존재로 태어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허물만을 남긴 채 떠났다. 우리를 수백, 수천 년 동안 허물에 묶어놓은 채로 남겨놓고 말이지…….>

<드라고나. 일곱 뿔을 가진 하늘산맥의 지배자.>

로데발은 갑자기 자신에게 전해져 온 기억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누구십니까?>

<이곳으로 오라. 시간이 없다.>

로데발은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자신이 의식세계를 벗어나 현실로 돌아온 것을 느꼈다. 자신은 구속구에 묶여있는 상태였지만 이를 찢고 풀어내는 데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아까 자신을 지배하던 광기도 모두 사라져있었다.

건물 안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구속구를 풀어낸 로데발은 방해 받지 않고 가볍게 건물 바깥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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