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껍질>
스틸은 눈앞에 드러난 광경에 입을 벌렸다.
거대한 동체. 그리고 그 동체를 빼곡하게 덮고 있는 붉은 조각들.
산 아래 묻혀있었다면 적은 시간은 아니었을 텐데 마치 대장간에서 바로 뽑아낸 강철의 방패처럼 맨질거리는 붉은 비늘이 수천, 수만 개가 빼곡하게 덮여 있는 장면은 보기만 해도 위압감을 뽐냈다.
그리고 머리에 나있는 여섯 개의 뿔. 저번의 망둥이 1호처럼 어설픈 뿔이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터질 듯 자라나고 자라나 배배 꼬이고 꼬여 마치 수천 년은 묵은 고목의 둥치와 같은 자태를 뽐내고 있는 뿔.
그런 뿔이 여섯 개나 괴수의 머리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 녀석은 지금 빈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만 같은 자태를 뽐내고 있는 녀석은 단지 껍데기에 불과했다.
마치 매미가 탈피를 하고 허물을 남겨놓듯, 어떤 존재가 남겨놓고 간 거대한 허물.
단지 허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스틸은 그제야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자신이 눈앞의 허물에 긴장하고 있느라 숨도 제대로 쉬지 못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왜 아무것도 안 느껴졌나 했더니 빈 껍질이었네… 어쩐지 코앞에 있어도 못 느끼겠더라…….”
이백 년을 라그랑 지방에 살면서 이런 게 땅에 묻혀 있는 것을 처음 안 스틸은 신음을 토해냈다.
“빈 껍질이 아닙니다.”
“어?”
“모든 힘을 고스란히 압축하고 있어요, 단 한 푼도 흘려내지 않고. 저나 스틸 양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 하는 이유는 그것 때문입니다.”
시안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느 정도의 기운인데?”
“저보다도 훨씬 더 위예요.”
“엉?”
“그래도 세월이 많이 흘러서 그런지 힘이 많이 약해졌어요. 처음에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강했을 겁니다. 아무래도 라그랑 지방이 풍요로운 이유는 이 껍질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안의 말에 스틸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수백, 혹은 수천 년에 걸쳐 거대한 영토를 풍요롭게 만들 정도의 기운이라니. 상상도 가지 않는 강대한 힘이다.
“그러면 더 말이 안 되잖아. 그 정도의 기운을 왜 껍질에 버려놓고 간 거야?”
“둘 중 하나겠지요. 어쩔 수 없었다거나…….”
“또는?”
“아니면 이 정도의 기운은 새로 태어난 존재에게는 한 푼의 도움도 되지 않는다거나.”
“…….”
“후후… 일곱 뿔의 하리쟌이 있다는 건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말이죠.”
“하하…….”
스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아까 그놈들 죽여도 죽여도 계속 살아나는 이유가 여기 있었군요. 이런 거에서 힘을 공급받고 있다면… 아마 몇백 번은 더 죽였어야 할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데?”
아까 그 녀석들을 가둬놓았다고 하지만 금방 튀어나올 것이다. 라-반더에게 그런 것은 의미가 없다. 튀어나와서 대학살을 벌일 것이다.
몇백 번이나 되살아난다고 하면 아무리 시안이라도 힘들다. 실제로 시안의 무기는 금도 간 데다 아까 보니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시안이 없다면, 그리고 저 녀석이 아까처럼 계속해서 난동을 부린다면 이 근처 생명체는 모두 전멸이다.
“후후. 스틸 양, 평소에 저보고 촉이 좋지 않다고 맨날 놀렸죠?”
“…그렇지?”
“맞는 말씀입니다.”
“갑자기 무슨…….”
실없는 말을 하냐고 핀잔을 주려던 스틸은 시안이 짓고 있는 묘한 표정을 보고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런데… 제가 촉이 좋을 때가 있거든요. 흐흐.”
“야, 너 이상한 생각 하지 마라.”
스틸은 시안이 무슨 짓을 하려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말려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게 아주 가끔 있는 일인데… 유일하게 해결책이 있을 때, 제가 선택을 피할 수 없을 때 느낌이 딱 오거든요.”
“무슨…….”
“거참, 죽을 자리 안 찾아가기로 했는데… 이러면 방법도 없네요.”
“너 지금 무슨 짓 하려는 거야?”
스틸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저놈들 계속 살아나면 저도 집니다. 강한 데다 불사면 저도 방법이 없지요. 제가 힘이 떨어지는 순간… 밀리겠지요. 게다가 저놈들은 계속 저를 쫓아올 거예요. 저뿐만이 아니겠군요. 스틸 양도 쫓아갈 겁니다. 저 녀석들이 깨어난 건… 저랑 스틸 양이 치고받다가 이 허물을 자극해서 그렇게 된 거니까. 며칠 전에 연습하다가 더 자극한 것도 실수예요.”
앞뒤를 맞춰보니 얼추 각이 나왔다. 그라나인들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허물을 지키는 경비병의 역할을 하고 있고, 그 대가로 여기로부터 힘을 공급받는다.
저들이 갑자기 미쳐 날뛰는 건 분명 자신이 이 근처에서 힘을 사용한 것과 관련이 있으리라. 자신의 힘이 땅속 깊숙이 묻혀있던 이 허물을 자극했기에 저렇게 날뛰는 것이다. 만약 저런 게 있다는 걸 알았다면 절대 이쪽에서 연습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
“뭐…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죽지는 않을 겁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죽을 자리 안 찾아가는 거.”
“너 인마, 아까랑 말이 다르잖아. 그리고 그냥 도망가면 되잖아!”
스틸은 흥분하여 말이 멋대로 튀어나왔다. 아까 이 녀석은 분명 죽을 자리로 가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흐흐. 아까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쫓아올 거라고. 도망 못 갑니다. 그리고 자기가 한 일에 책임은 져야지요. 그리고 누가 들으면 죽으러 가는 줄 알겠습니다. 전 더 강해지러 가는 겁니다.”
이제까지와는 완전 다르다. 멀쩡하게 잘 자고 있던 녀석을 들쑤셔놓은 것도 자신. 그리고 앞으로 죽어나갈 사람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도 자신.
“미친 새끼가… 니가 그러고도 초인이야? 버려!”
스틸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소리쳤다. 인간에 대한 책임이라니… 그것도 그렇게 목숨을 아끼는 녀석이.
“흐흐. 그런 게 초인이라면 차라리 초인 안 하렵니다. 어쨌건… 그동안 재미있었습니다. 저희 가족 좀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거 가져가세요.”
시안은 씨익 웃으며 목에 걸고 있던 니츠마탄을 풀러 스틸 양의 목에 걸어주었다.
“이 새끼… 안 죽으러 간다면서…….”
“부서질까 봐 맡겨두는 겁니다. 잘 보관해두세요. 그거 제겁니다. 제일 아끼는 거라고요.”
시안은 붉은 비늘 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스틸이 말릴 틈도 없이 그 위에 손을 얹었다.
<…먹을 것…….>
“흐… 누구 맘대로?”
갑자기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던 허물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강대한, 이름 모를 존재가 남기고 떠나간 허물. 너무나 강대한 존재가 남기고 간 탓에 약간이나마 의지를 가진 이 녀석은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공격에 잠에서 깨어난 후로 미친 듯이 허기를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자고 있는 동안 너무나 많은 기운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손을 얹은 이 고에너지 덩어리를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허물은 자신을 지키던 ‘경비병’ 녀석들에게 보내던 기운의 공급을 모조리 정지하고 자신과 접촉한 존재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쿠드드드득!
허물 전체가 더욱 거칠게 떨리더니 이윽고 맹렬한 속도로 시안을 집어삼켰다.
“…무슨?”
눈앞에서 일어난 괴사에 스틸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엄청나게 거대한 붉은 비늘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시안을 감싸고 있었다. 시안이 손을 대고 있는 부분에서 시작하여 팔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한 붉은 물결은 이윽고 시안을 집어삼키고도 모자라 그 거대한 껍질 전체가 시안을 먹어치우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소용돌이치는 붉은 바다처럼. 심지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해골들도 그 모습을 바꾸더니 비늘로 돌아가 대열에 합류했다. 뿔은 꼬이고 꼬이더니 마치 철사처럼 변해 비늘과 함께 그 소용돌이를 둘둘 휘감았다.
비늘은 집어삼킨 시안을 중심으로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며 거대한 붉은 구체를 형성했다. 구체를 이룬 후에도 회전은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고 엄청난 크기의 붉은 구는 조금씩 조금씩 그 크기를 줄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압축되던 구는 그 크기가 줄어들면서 회전 속도도 줄어들더니 직경 1미터 정도로 줄어들었을 때는 기괴한 소리를 내며 더는 압축되지 못했다.
까드드득. 까드득.
더 작아져서 무언가를 으스러트리려는 붉은 비늘의 알과 그에 대항하는 안쪽의 무언가.
겉으로는 아무런 기운도 새어나오지 않는, 평범해 보이는 붉은 알에 불과했다.
하지만 저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는 스틸은 붉은 구체에 도저히 손을 가져다 댈 수 없었다. 자신은 손을 대어봤자 저 허물이라는 녀석의 영양분만 될 것이고, 그건 시안 동생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자신도 손을 못 대고 애먼 녀석이 건드려서 방해만 한다면… 아예 묻어버리는 것이 답이다.
“동생, 후후. 혼자 멋있는 척하겠다면 내조를 잘 해주는 게 안사람의 역할 아니겠어? 둘만 싸우게 해 줄 테니… 이기고 돌아오라고.”
그렇게 읊조린 스틸은 전신에 반데르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우드드득. 우드득.
그리고 전신에 힘이 터질 것처럼 모이자 온몸을 비틀며 땅바닥을 거세게 내리찍었다.
쿠아앙.
주먹과 땅이 충돌했는데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대지가 흔들렸다. 아니, 실제로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시안과 그라나인들의 격돌로 약해지고 붉은 허물이 빠져나오며 엉성해진 지반은 스틸의 일격을 견딜 수 없었고, 주변의 지반과 하늘산맥 자락은 붉은 구체를 중심으로 모조리 무너지기 시작했다.
쿠르르릉. 콰르릉.
붉은 구체는 수백 미터 지하로 파묻혀 버렸고 그 자리에는 산맥이 무너지고 남은 흔적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뭐, 좋아. 깔끔하군. 동생 나오면 나에게 정말 잘해야 할 거야.”
하지만 마무리까지 깔끔해야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법.
스틸은 아까 묻어버린 녀석들을 확인하기 위해 몸을 날렸다.
스틸은 아까 그라나인 녀석들을 묻어놓은 장소로 도착하여 사방을 꼼꼼하게 살폈다. 이 녀석들이 살아서 돌아다니면 시안이 아까 그 껍질 녀석과 치고받게 된 의미가 없다.
산을 무너트려 놓았지만 이미 재생을 마친 녀석들이 사방에서 땅을 파고 기어 나오려고 한 흔적들이 있었다. 하지만 힘을 공급해주는 원천이 모조리 없어져서 그런지, 아니면 과도한 재생의 후유증인지 녀석들은 뼈가 가루가 된 상태로 몽땅 쓰러져 있었다.
“흠… 다 죽은 건가…….”
나머지야 상관없지만 아까 그 세 녀석은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스틸은 땅을 헤집으며 셋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안으로 파들어갔다.
다행히도 셋은 목숨이 모두 끊어진 상태였다. 재생 중에 에너지의 공급이 끊겨 모두 죽은 것이다.
스틸은 녀석들 몸 위에 놓여 있던 크로나-폰을 회수하고 아까 받은 목걸이 안에 챙겨 넣었다.
“좋아. 마무리도 깔끔해.”
스틸은 만족한 표정을 짓다가 무엇이 찝찝했는지 구덩이를 모조리 무너트려 버리고 몸을 날렸다.
그리고 스틸이 사라진 자리를 멀리서 지켜보던 하나의 인영이 있었다.
로데발이었다.
“후… 조금만 늦었다면 큰일 날 뻔했군요…….”
<이제 일족의 부흥은 너에게 달렸다. 오직 너만이 살아남았으니.>
“알고 있습니다.”
로데발은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기묘한 울림에 대답했다.
괴물 같은 여성이 완전히 사라진지 확신할 수 없었던 로데발은 하루를 기다린 후 여자가 무너트린 땅을 파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뼈를 차곡차곡 모아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순백의 영역인 하늘산맥 쪽으로 몸을 옮겼다.
하늘산맥의 지배자, 드라고나의 영역.
크로나의 영역에 사는 하리쟌들도, 라이오나의 영역에 속해있는 인간들도 침범할 수 없는 이 구역이라면… 아무도 자신이 힘을 키울 때까지 찾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