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귀환>
“야, 론. 어서 올라와 봐.”
“네가 너무 빠른 거라고, 미리안. 근데 우리 여기 와도 되는 거야?”
텅 빈 대지, 이곳저곳 파헤쳐진 땅. 곳곳의 무너진 흔적.
황량하기 그지없는 산 중턱일 뿐 위험해 보이는 요소는 전혀 없건만 론이라는 청년은 못내 불안한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말에 미리안이 신경질 내며 말했다.
“야, 남자가 뭐 그리 겁이 많아! 그리고 교관님들도 이곳에 오지 말란 말은 안 했다고. 단지 사람들이 껄끄러우니 이곳에 오지 않는 거잖아.”
“…분명 오지 말라고 했었는데, 추가 붕괴의 위험이 있다고.”
5년 전의 사고로 이곳의 지반이 극히 불안정하기 때문에 오지 말라고 한 크틸 교관님의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계속 괜찮다고 하는 미리안을 론은 어이없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아, 말이 많네. 넌 그럼 가! 난 꼭 봐야할 게 있다고.”
“음? 뭔데?”
“후후. 궁금하면 따라와.”
그 말을 끝으로 미리안은 성큼성큼 바위와 무너진 토사를 건너뛰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미리안을 바라보던 론은 그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이 더 걸려 해가 산 중턱에 걸리고 뉘엿뉘엿 석양이 질 때쯤 론은 미리안이 말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야?”
“응. 후후. 저번에 관외 교육을 나갔다가 멀리 보였다고. 이게 뭔지 궁금해서 잠도 안 왔어.”
“음… 특이해 보이긴 하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딱히 별 게 있지는 않았다. 하나의 물체를 제외하고는.
미리안이 가리킨 곳에는 사람 크기만 한 하나의 기둥이 땅에 꽂혀있었고 그 기둥에는 서랍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이거… 주인 있는 거 아냐?”
“음?”
“아니… 서랍마다 이름이 쓰여 있어서…….”
잠겨있었지만 기둥의 서랍마다 이름이 쓰여 있었다. 하지만 이 서랍의 주인은 친구는 별로 없었는지 이름이 있는 칸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아… 그래? 그럼 곤란한데…….”
“음? 미리안, 뭐가 곤란하다는 거야?”
“난 이 안에 무슨 절세의 보구나… 그런 게 들어있을 줄 알았단 말이야. 그런 게 있으니까 교관들이 여기 가지 말라고 하는 줄 알았고. 그런데 저렇게 생긴 통에 그런 게 들어있을 리가 없잖아!”
미리안의 말에 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절세의 보구가 들어있는 기둥이 저렇게 이름이 붙여져 있는 서랍일 리 없다. 문득 론은 저 서랍에 붙어있는 사람들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살피다가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야… 미리안… 여기 진짜 네가 원하는 보물 같은 게 들어있을 수도 있겠다.”
“뭐?”
미리안은 실망한 표정을 짓다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론을 돌아보았다.
“여기 있는 이름 봐 봐…….”
그 말에 미리안은 자신이 서랍에 붙어 있는 이름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음을 깨닫고 기둥에 붙어 있는 이름을 살피기 시작했다.
<나라샤 쿤 티안>
<리안 폰 로만>
<카인 폰 로만>
<스틸>
<셀린 드 키라인>
“우와…….”
실망감에 가득했던 미리안의 얼굴은 다시 흥분으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스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머지는 이름만 들어도 쟁쟁했다.
티안 최고의 성세를 구현해 낸 나라샤 쿤 티안 1세.
왕국의 수호무장, 위대한 그랑-반더 카인 폰 로만.
티안 왕국의 강력한 돌격집단, 드라고나를 맡고 있는 리안 폰 로만과 셀린 드 키라인.
모두가 티안을 지탱하고 이끌어가는 자들이었다.
“후후. 여기에는 저들의 심득이 몽땅 들어있는 비전 같은 게 있는 것 아닐까? 익히기만 해도 그랑-반더가 될 수 있다거나…….”
“음… 그건 좀 오바 같은데. 그런 걸 여기 왜 둬. 그리고 비전은 이미 그론-필라에서 모조리 공유되고 있잖아.”
“바보야! 그게 전부인지 어떻게 알아?”
“그런가…….”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것투성이였지만 이미 흥분에 찬 미리안은 그런 게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철컥철컥!
“야! 미리안, 뭐하는 거야?”
“열어보려고.”
“무슨… 딱 봐도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은데… 주인이 있는 거잖아?”
“주인이 누군데?”
“음?”
“내가 이걸 본 게 벌써 몇 달 전이야. 주인이 있었다면 이미 가져갔겠지. 그리고 여기에 뒀다는 건… 별로 신경 안 쓴다는 뜻일 거야.”
“그렇지만…….”
“야, 내가 언제 가져간데? 그냥 열어만 볼 거야, 열어만. 여기까지 왔는데 궁금하지도 않아?”
“…….”
그 한마디에 론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론도 엄청 궁금했다. 저 안에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는지. 절도행위 같아 손을 대지 못 하고 있었지만 론은 점점 미리안의 설득에 넘어감을 느꼈다.
“넌 가만있어. 흐흐흐… 어디 보자.”
잘 열리지 않자 주머니에서 철사 같은 것을 꺼내어 부스럭대던 미리안은 기어코 기둥의 서랍을 열어내었다. 무장인지라 로만 백작의 서랍이 가장 궁금했던 것인지 ‘카인 폰 로만’이라고 적힌 서랍부터 열어낸 미리안은 안쪽을 뒤적거리다가 실망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뭐야!”
“음? 뭔데?”
“아냐… 잠시만 기다려 봐… 다른 데는 뭔가 다르겠지…….”
그러고는 다른 서랍도 차근차근 열기 시작한 미리안은 안쪽을 모조리 살펴보더니 풀이 한껏 죽어버린 표정이 되었다.
“흐아아아아…….”
미리안의 반응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론은 도대체 안에 무엇이 들었길래 저런 반응을 보이나 싶어 옆으로 주저앉는 미리안을 지나 서랍의 안을 살펴보았다.
‘…편지?’
안에 다른 건 없었다. 오직 편지만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저 이름이 붙어있는 게… 발신인이었구나.’
‘카인 폰 로만’이라고 쓰인 서랍 안에는 로만 백작이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로 가득했다. 아마 다른 서랍도 비슷할 것이다.
저 수상한 기둥의 정체는 편지함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론은 다른 의문이 생겼다.
‘그러면… 수신인은 누구지?’
편지를 읽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건 너무 무례한 짓이라 관두기로 하였다.
하지만 미리안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그래… 저 편지가 속임수일 수도 있어. 저 안에 무언가 비밀스러운 내용이 있을 거야… 흐흐흐.”
넋 나간 표정으로 뭐라고 중얼거리던 미리안은 벌떡 일어나더니 서랍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비켜, 론.”
“야, 미리안! 너 뭐하려고?”
“읽어볼 거야.”
“그런 무례한 짓을! 안 돼! 그리고 발신인들이 알면 어떻게 하려고!”
정말 비밀스러운 내용이면 큰 문제다. 그럴 가능성은 낮지만 저기 적힌 정보가 남들이 알아서는 안 되는 정보라면 자신들은 자다가 목이 따일 수도 있다. 이 내용을 설명해주자 미리안은 금세 수그러든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는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저 ‘스틸’이라는 사람 것만 한번 읽어보자. 저 사람은 처음 들어보니까 유명인도 아닐 거고… 비밀스러운 내용도 없을 거야.”
“무슨 그런…….”
그러고는 론이 말릴 새도 없이 성큼성큼 기둥 쪽으로 미리안이 걸어갔다.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그러시는 게 좋을 겁니다. 죽을 수도 있거든요.”
“……!”
론과 미리안은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처음 보는 남자가 보였다. 한눈에 보아도 매우 특이한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흙 속에 파묻혀 있는 채로 머리만 내놓고 있지 않을 테니까.
“언제부터 거기 계셨습니까?”
“음… 여러분이 저 서랍을 따고 유사절도행위를 하고 있을 때부터지요.”
“…오해이실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뭐하시는 거지요? 왜 파묻혀 계신 겁니까?”
말이 궁해진 론이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왜냐하면… 제가 지금 옷이 없거든요. 그런데 여러분이 계시니 나갈 수가 없군요. 하하.”
시원하게 웃는 얼굴을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당황한 론과 달리 미리안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왜 저 편지를 읽어보면 죽는다는 거죠? 뭔가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건가요?”
“하하. 그런 건 책에서나 그렇겠지요? 저도 읽어보진 않았지만 그런 건 아닐 겁니다. 다만…….”
말끝을 흐리는 남자를 보며 미리안은 대답을 촉구했다.
“편지의 주인이 부끄러움을 좀 탈 수도 있거든요. 아마 저 말고 다른 사람이 편지를 읽는다면 쳐 죽이려고 들 겁니다.”
“…….”
미리안은 말을 들으며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세상에 그런 흉폭한 사람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님을 깨달았다. 저 남자의 말에서 중요한 힌트를 들었기 때문에.
“저 편지함의 주인이 당신이군요.”
“잘 모르지만 아마 제 것일 듯합니다. 그런데 혹시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제 생각이 맞다면… 거기 기둥 살펴보면 아마 옷가지 같은 게 있을 겁니다. 그것 좀 던져주십시오.”
남자의 말에 기둥의 서랍 이곳저곳을 뒤져보니 과연 옷가지가 몇 벌 나왔다. 이 기둥을 만들어놓은 사람은 이런 상황이 생길 줄을 예측하고 있었던 듯하다.
“여기요.”
“감사합니다.”
옷가지를 받아 든 남자는 구덩이 안쪽에서 엎치락뒤치락하더니 옷을 모두 입고 난 다음에야 바깥으로 나왔다.
“으아!”
무엇이 그렇게 찌뿌둥했는지 괴성을 지르며 몸을 이리저리 푸는 남자를 보고 론은 별 미친놈 다 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후우. 못 볼 꼴을 보였군요. 그런데 여러분은 여기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기둥 말고는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은 남자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론과 미리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 그게…….”
“그냥 산책 온 거예요, 산책. 그렇게 치면 아저씨가 더 수상하다고요. 이런 곳에 머리만 파묻고 있다니.”
그러자 사내가 발끈하며 외쳤다.
“아저씨라니! 전 이제… 전 이제… 음…….”
사내는 자신의 나이를 말하려다 무언가 곤란한 문제가 생겼는지 말을 더듬더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올해가 몇 년입니까?”
“…….”
“미친놈 보는 듯한 표정 짓지 마시고요.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올해는 1017년입니다.”
“1017년이라… 그렇다면 저는 이제 겨우 22살입니다! 아저씨라고 불릴 나이가 아니라고요!”
그 말을 들은 미리안과 론은 사내를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폈다. 그러고 보니 선이 좀 굵고 체격이 크기는 했지만 피부가 좋고 얼굴에 아직 젊은 티가 많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미리안은 인정하기 싫었는지 쏘아붙였다.
“헹! 그래도 아저씨지요. 전 이제 열일곱이라고요.”
“윽…….”
사내는 뭔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는지 미리안과 론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구덩이 안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바깥으로 나오니 골격이 거대하고 선이 굵은 게 위압감이 대단했기에 미리안과 론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사내는 둘을 지나쳐 그대로 기둥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기둥의 서랍 이곳저곳을 열어보았다. 분명 잠겨 있을 텐데 사내의 손은 거침없이 서랍을 척척 열어젖혔다.
“캬… 역시 형이야. 저런 게 있을 때부터 알아봤지. 준비가 완벽하구먼.”
중얼거리며 서랍을 열더니 그 안에서 돈을 찾아낸 사내는 마찬가지로 기둥 안에서 나온 가방에 기둥 안의 편지를 몽땅 쓸어 담기 시작했다.
자신의 여행가방을 챙기는 듯한 너무나 자연스러운 손놀림에 미리안과 론은 아무 말도 못하고 사내가 기둥 안을 탈탈 털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모든 짐을 챙겼는지 사내는 기둥은 버려둔 채 가방을 둘러메고 도시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미리안은 고민 끝에 저 남자를 따라가기로 했다. 마침 방향도 같았고 엄청나게 수상한 정체불명의 저 남자가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다. 넌 제발 그 호기심을 좀 죽여야 한다고 항상 강조하던 아버지가 떠올랐지만 미리안은 참을 수가 없었다.
“저기요! 아저씨!”
하지만 사내가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가자 미리안은 이를 뿌드득 갈더니 외쳤다.
“오빠!”
“음, 왜 그러십니까?”
기다렸다는 듯 돌아보는 사내를 얄밉단 표정으로 쳐다보던 미리안은 입을 열었다.
“같이 가요.”
“음?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그건 아니고, 그냥 우리도 도시로 가야 하니까 말동무나 하자고요.”
남자가 고민을 하다 입을 열었다.
“뭐, 좋습니다. 마침 저도 적적했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궁금하니까요.”
“후후. 결정한 거죠? 좋아요. 야, 론! 가자!”
미리안은 아직까지 멍하고 있는 론을 챙겨 도시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 그런데 통성명도 안 했네요. 저는 미리안이고 이쪽은 론이에요.”
“반갑습니다. 저는 론이라고 합니다.”
인사를 받은 사내는 살짝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호오! 미리안 양, 론 군, 반갑습니다. 저는… 시안이라고 합니다. 도시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시안이라고 밝힌 남자는 저 멀리 보이는 라그랑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론과 미리안은 그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도시로 돌아온 시안은 바로 식당부터 찾았다. 그리고 맹렬하게 음식을 섭취하며 론, 미리안과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었다. 오는 동안 경계심이 조금 풀린 터라 대화는 상당히 가벼운 수준까지도 진행되었다.
“그런데 여러분은 왜 여기 계십니까? 이야기를 들어보니 방학이라고 하던데요.”
“저희는… 하하, 조금 볼일이 있었습니다.”
차마 어제 그 기둥을 확인하려고 그론-필라의 사람 수가 줄어드는 방학을 기다렸다는 이야기를 못하겠는지 론은 식사를 하며 대답했다.
“하하. 그렇군요. 그나저나… 여기 음식이 엄청나게 맛있군요.”
“…그 학식이 맛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럼요. 하하. 정말 오랜만이네요.”
우물우물.
시안은 오랜만에 먹어보는 음식이 너무나 맛있었다.
거한 녀석을 먹어치우기는 했지만 입으로 먹은 것이 아니었기에 항상 미각이 심심했는데 이렇게 5년 만에 미각을 충족시키니 살 것 같았다.
묘한 표정으로 시안을 바라보던 미리안은 아까부터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저기… 시안 오빠.”
“말씀하십시오.”
오빠란 소리가 듣기 좋았기에 시안이 밥을 먹으면서도 얼굴에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저기… 아까 기둥에 들어있던 편지 말이에요. 그거 다 오빠한테 온 건가요?”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럴 겁니다.”
“그러면 거기 기둥에 쓰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오빠랑 친한 건가요?”
그러자 시안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친하다니요, 아니지요.”
“아… 역시…….”
미리안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산에서 흙 찜질이나 하고 있던 아저씨랑 친하다고 보기에는 거기 적혀있던 인물들이 너무 쟁쟁했다.
하지만 뒤이어진 시안의 말에 놀라고 말았다.
“가족인데 친하다고 하지는 않지요.”
“……!”
그제야 미리안은 시안이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어보았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애초에 예전 리안 교관님의 수업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는데 떠올리지 못 한 이유는 워낙 당황해서였다. 시안이라는 이름은 흔한 편이기도 하고.
시안 폰 로만.
실종된 로만가의 2공자.
5년 전, 하늘산맥이 거대한 붕괴를 일으키고 그 지역에 살던 그라나인들이 정체불명의 실종사고를 당했을 때 같이 사라졌다고 하던 2공자에 대해서는 많은 루머가 있었다.
애초에 2공자에 대해서는 확실한 소문이 하나도 없었다. 소문이 극과 극을 달렸기에 무엇이 진실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소문의 반의반만 맞는다고 해도 인간이 아니었기에 헛소문이라는 판단이 났다.
게다가 그 당시 사건도 수상한 점이 많았다. 목격자 중에는 산맥 아래서 튀어나온 거대한 괴수를 보았다고 하는 자도 있었다. 물론 괴수의 비늘 한 조각도 찾을 수 없었기에 헛것을 보았다는 결론이 내려졌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라나인들의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적은 것도 아니었는데 사라진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여러모로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많은 사건이었지만 그 뒤에 일어난 대사건들 때문에 흐지부지 묻혀버리고 말았다. 인간들은 그 뒤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으니까.
“세상에… 그 사건이 5년 전이라고 들었는데… 어디 다녀온 건가요?”
“뭐… 별일은 없었습니다. 어디 좀 갇혀 있다 왔다고 하면 되겠네요.”
시안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는 들어가고 싶지 않은 곳. 시안은 오 년 내내 자신을 으깨어버리고 잘게 부수어 흡수하려는 녀석과 힘 대결을 하며 보내야 했다.
짐승의 배 속에서 소화가 되어가는 듯한 기분은 썩 좋은 느낌이 아니었다. 녀석이 힘은 강했지만 본능만이 남았기에 이길 수 있었다.
“세상에… 그 소문이 진짜였나요?”
“…무슨 소문이요?”
“그라나인이 로만가의 2공자를 납치해서 인체실험을 하려고 했다는 거요! 이게 제일 인기가 많아요.”
“…절대 아닙니다.”
“어… 그러면 그라나인의 공주와 사랑에 빠져 도피했다는 설은요?”
“…그라나인족에 제가 알기로 공주라는 계급은 없는데…….”
“에이, 뭐야. 소문이 다 틀렸네.”
미리안은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뭐… 소문이라는 것이 항상 대중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니까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론은 눈앞의 시안을 보며 물었다.
“음… 급한 거야 없지만 우선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혹시 아직도 여기서 형이 교관을 하고 있습니까?”
“음… 리안 대공자라면 지금 이곳에는 안 계십니다. 드라고나로 다시 복귀하셨지요.”
“아… 이 아저씨 진짜… 3기사단에 넣으라니까.”
“아저씨라는 분이 상당한 지위에 있으신가 봅니다.”
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리안 대공자 정도 되는 자의 직위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면 그 힘이 상당할 테니.
“뭐… 좀 그렇죠?”
국왕보다 높은 지위는 자신이 알기로는 없었기에 시안이 수긍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3기사단에 넣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3기사단은 해체되었으니까요.”
“음? 왜 그렇지요?”
수도의 치안은 언제나 중요했다. 그렇기에 3기사단은 티안이 생긴 이래로 규모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항상 존재해왔다.
그런데 해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시안은 이유를 되물었다.
그러자 론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기까지 투자할 여력이 없으니까요… 현재 티안은 일손이 많이 모자랍니다.”
“어… 전쟁이라도 터졌나요?”
“아니요. 이제 우리 나라를 건드릴 만한 국가는 없지요.”
론이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실제로 나라샤 국왕 폐하가 왕위에 오른 지 채 10년도 되지 않아 티안은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론-필라에서 나오는 인재들은 티안의 전역에 배치되었고, 라그랑 지방에서 나오는 풍부한 물자와 식량은 한창 성장기에 들어간 티안 전역에 물자를 보급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게다가 변방의 로가디스 지방을 통일한 파레온 백작은 성장세를 탄 티안의 상황을 적극 활용하여 주변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며 무서운 속도로 치고 올라와 겨우 몇 년 만에 티안 서남부의 패자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티안을 건드릴 국가는 없지만… 하리쟌 녀석들은 그런 걸 따지지 않으니까요.”
론을 대신해 옆에서 미리안이 대답했다.
“음? 하리쟌이요? 혹시 대북벽이 무너지기라도 했나요?”
시안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건 아니지만… 5년 전… 하늘산맥이 무너진 이후로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론은 설명을 시작했다.
☆ ☆ ☆
“후… 머리 아프구먼…….”
“좀 쉬었다 하시지요, 폐하.”
“후후. 저기 쌓인 문서들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가.”
탈린 자작을 보며 나라샤가 웃으며 대답했다.
연일 이어지는 회의며 결제에 나라샤 국왕은 상당히 피곤한 상태였다. 자신이 그랑-반더인 게 이렇게 다행일 수 없을 정도로.
잠시 숨을 돌릴 틈을 얻은 나라샤는 언제부터 자신이 이렇게 바빠졌는지를 떠올렸다.
‘5년 전…….’
라그랑 지방에서 엄청난 지각 변동이 있었다는 소리를 들은 나라샤 국왕은 벌떡 일어나 그론-필라의 안위부터 물었다. 각국의 인재들과 유력 귀족가의 자제들이 모여 있는 그곳이 날아갔다면 바로 전쟁이다.
시안 그 아이가 그쪽으로 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불안불안하기는 했지만 간 지 며칠 되지도 않아 그런 대형사고가 터지다니!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그론-필라는 그 거대한 지각 변동에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쉰 나라샤는 그다음으로 그라나인의 안부를 물었다. 동맹인 그들에게 문제가 생겨도 갈등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조사관은 나쁜 소식 하나와 좋은 소식 하나를 가져왔다.
나쁜 소식은 그라나인들이 통째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것.
좋은 소식은 차라리 그들이 몽땅 사라져버렸기에 갈등이 생길 일은 없다는 것.
여기까진 아주 괜찮았다. 아무 일도 없는 것이 가장 좋지만 이 정도라면 수습이 가능한 범위였다.
산맥의 굉장히 넓은 부분이 붕괴되었지만 아무도 살지 않는 하늘산맥이었기에 인명피해는 거의 없었고, 그라나인이 사라졌다고 해도 타란이 침략해올 일은 없을 것이다. 타란은 우샤란과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옆에 너무 강력한 녀석들이 살고 있어서 불안했는데 사라지니 후련하기까지 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미치겠군… 하리쟌 녀석들이 도대체 하늘산맥을 통해서 왜 넘어오는 거야…….”
하늘산맥. 고고한 성지.
아무도 살지 않고, 아무도 지날 수 없다.
인간도, 하리쟌도… 그 어느 누구도.
어떻게 보면 지금 라시안 대륙에 평화도 하늘산맥이 대륙의 북쪽 대부분을 틀어막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인간들은 하늘산맥을 제외한 대수림의 동쪽 일부만을 틀어막으면 되었으니.
하지만 5년 전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비록 하늘산맥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녀석들이 슬금슬금 대수림에서 하늘산맥의 가장자리를 지나 기어 나오기 시작한 것.
처음에는 모르고 당했기에 그 타격이 상당했다. 제국이 멸망하고 대북벽이 세워진 이래로 400년간 하리쟌이라고 찾아볼 수도 없었기에 아무런 대비도 안 해 놓았는데 하리쟌들이 마을을 습격했으니.
빠르게 대처했지만 이미 작은 영지 몇 개는 통째로 녀석들의 배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티안은 우선 모든 여유병력을 동원하여 티안 북쪽에 배치하고 하리쟌들을 틀어막았다. 다행히도 넘어오는 수가 많지 않았지만 티안의 북쪽은 하늘산맥과 모조리 접하고 있었기에 수비해야 할 범위가 너무 넓었다.
당연히 나라샤 국왕은 수호대 및 각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 문제는 대북벽과 마찬가지로 티안이 혼자서 책임져야 할 문제가 아니었기에.
물론 각국의 반응은 ‘돕겠다’였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지만.
“개자식들이… 말로만 돕겠다고 하고… 지원을 해야 할 것 아니야…….”
나라샤는 왕이 된 이후로 내뱉은 적이 없는 쌍욕이 입에서 절로 나왔다. 각국은 너무 빠른 시간 동안 강성해지고 있는 티안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티안의 힘을 깎아먹을 이번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타란과 우샤란은 서로가 간을 보며 치고받다가 결국 전쟁에 돌입했다. 이게 벌써 몇 년 전 이야기이다. 티안을 경계하느라 서로 간만 보고 있었는데 하늘산맥이 뚫렸다는 말을 듣자마자 티안이 이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것을 알고 바로 전쟁에 들어간 것이다.
콘 왕국을 병합하고 강대한 왕국으로 거듭난 우샤란이었지만 아직 내부 레지스탕스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고, 라그랑을 빼았겼지만 타란의 강대한 전력은 여전했기에 타란과 우샤란의 접전은 팽팽하기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카란과 키아란, 브로샨은 라가오포라가 무너진 후 오히려 더 똘똘 뭉쳤다. 각자의 국력이 감소하자 티안을 경계하여 셋이 힘을 뭉친 것이다. 대놓고 티를 내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교류는 점점 더 긴밀해지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니 티안에 신경 쓸 겨를이 있을 리 없다. 수호대가 차근차근 그 수비범위를 늘려가고 있지만 성벽과 인재라는 게 그렇게 뚝딱뚝딱 생겨나는 것들이 아니었기에 상당히 더딘 속도로 진척이 되고 있었다. 이 상태로라면 티안의 북쪽 전역에 새로운 방벽을 세우는 데 십 년도 훌쩍 넘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결국 대북벽이 연장될 때까지 티안은 성장한 국력을 모조리 북쪽에 때려 박아야 한다. 그나마 아직까지는 다른 나라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후… 어쩌다 이렇게 꼬였는지… 십 년이면 우샤란은 몰라도 타란은 집어삼킬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시안 그 아이는 별 생각 없이 돌아다니지만 그때마다 대륙의 판도가 바뀌고 있었다. 차라리 시안이 없는 5년 동안은 그나마 예측 가능한 사고들이 터지고 있어 머리가 덜 아팠다.
하지만 이런 티를 냈다가는 바로 어디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는 스탄탈 1세에게 어디 한 군데가 부러질 것이기에 나라샤는 항상 조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1년에 한 번씩이라도 편지를 쓰는 것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편지를 쓴 지 오래됐군… 오랜만에 하나 써볼까…….”
자신은 로만 백작이나 리안 그 아이처럼 자주 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1년에 한 번씩 각국의 정세를 담은 편지를 담아 편지함에 보내고 있었다. 언제 그 붉은 알에서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이런 현 상황을 한 번이라도 감안하고 움직여줬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담아서.
하지만 나라샤는 쓰면서도 알고 있었다. 그 아이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아니, 애초에 이해도 못 할 것이다.
“하아… 제발 거기 오래 있어다오, 제발…….”
나라샤는 이 말을 편지에 쓸 뻔했다가 이성을 부여잡고 현 국제 정세에 대한 편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이야… 별일이 다 있었구나…….”
시안은 론과 미리안과 헤어진 후 숙소를 잡고 편지를 읽어보고 있었다. 우선 어떻게 세상이 변하였는지를 알아보고 가족을 만나러 가도 늦지 않을 거란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보고 싶긴 했지만 애초에 지금 가족들이 어디 있는지도 제대로 몰랐기에 편지는 꼭 읽어야 했다.
편지는 5년 동안 쌓여서 그런지 양이 엄청났다. 시안은 편지를 날짜순으로 정리한 뒤 차근차근 앞에서부터 읽어가기 시작했다.
가장 많은 편지는 역시 아버지와 어머니, 형에게서 온 편지였다. 편지 한 장 한 장마다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이 듬뿍 담겨있었기에 시안은 가슴 한쪽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다음이 셀린 경, 나라샤 아저씨, 스틸 양 순이었다. 스틸 양은 부끄러움을 타는지 처음에 쓴 편지 한 장 이후로는 쓰지를 않았고 나라샤 아저씨는 단 네 장의 편지만 와있었지만 한 장 한 장이 엄청나게 장문이었기에 나중에 읽으려고 저 뒤로 미루어 두었다.
감정을 추스르고 편지를 읽어보니 자신이 허물 녀석과 치고받는 5년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셀린 경은 다시 드라고나로 들어가고… 스틸 양은 자신이 뒷정리를 잘 해놨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써 놨고… 형은…….
“으잉? 결혼?”
시안은 깜짝 놀랐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무장들은 일반인과는 나이 개념이 아예 다르다. 워낙 젊어 보이고, 또 강건하기에 나이 차이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강대한 무장은 100살이 되어도 마흔도 안 되어 보이고, 반더가 아닌 평민들은 나이 사십만 되어도 육십처럼 보일 수도 있다. 심지어 스틸 양 같은 경우는 생긴 건 스물을 간신히 넘지만 나이가 200도 넘지 않은가? 말하면 두들겨 맞겠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결혼을 할 때 나이를 보는 사람은 없다. 말 그대로 숫자에 불과하기에. 무예 수련을 하다 오십 넘어 결혼을 하는 무장들도 아주 흔했다. 이건 여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자신이 잠든 지 5년이 지났으면 형의 나이도 이제 29살이다. 손이 귀한 로만가의 특성상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을 시기가 되었다고 해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것참… 나도 언젠가는 해야 할 텐데… 어디 보자… 상대가 코라-둠?”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시안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하지만 편지를 조금 더 읽어보고 정색했다.
“…결혼한 3년 전에 열넷? 그리고 지금 열일곱?”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시안, 오랜만이구나. 네가 사라진 지 벌써 3년이구나… 네가 어서 돌아와야 한 텐데 …<중략>… 두 번째 부인을 얻었단다… 이름은…….>
<시안, 네가 보고 싶구나. 4년이나 지났는데 언제 돌아오는 거니 …<중략>… 셋째 부인… 나이는…….>
“허허… 형수님이 셋이라니…….”
시안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축하해줘야 하는데 너무 예상치 못한 상황을 겪게 되니 무언가가 세게 뒤통수를 후린 것 같았다.
시안은 정신을 추스르기 위해 침대 뒤로 풀썩 넘어갔다.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던 시안은 가슴 한구석에서 치밀어 오르는 무언지 모를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편지를 잡았다.
편지에는 많은 내용이 쓰여 있었다. 가족들의 근황… 스틸 양이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셀린 경은 얼마나 바쁜지… 나라샤 아저씨가 보낸 편지는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파 첫 줄을 읽고 뒤에 미루어 두었다. 대충 보니 대륙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라고 보내준 것 같은데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았다.
편지를 다 읽은 시안은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해 곰곰이 고민해보았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자신이 만나 보아야 할 사람은 지금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으니까. 오랜만에 깨어나니 다들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나라샤 그 아저씨는 빼고. 그 아저씨는 나중에 시간 되면 한번 보면 된다.
2주 전에 온 마지막 편지에 형과 가족들이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지가 쓰여 있었다. 시안은 라-샤르-로아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도 강철기둥 안에는 충분한 돈과 신분증까지 있었으니 이동하는 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음? 어쩐 일이십니까?”
시안은 문 바깥을 나가자마자 기다리고 있는 미리안과 론을 보며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제 저들은 자신과 볼 일이 없을 터인데.
그러자 우물쭈물하고 있던 론을 대신하여 미리안이 입을 열었다.
“오빠, 혹시 형은 보러 언제 출발하실 건가요?”
“지금 나가는 길이었습니다. 라-샤르-로아를 타고 이동해야지요.”
형이 머무는 지역, <라빌란>까지 바로 이어지는 라-샤르-로아는 없기에 시안은 셀라인 백작령으로 라-샤르-로아를 타고 이동한 후 걸어서 갈 생각이었다.
그 말을 들은 미리안은 굉장히 잘 되었다는 표정을 짓더니 시안의 곁으로 찰싹 달라붙었다.
“우와! 잘 되었네요! 같이 가요!”
“싫습니다.”
단칼에 거절하는 시안을 보며 미리안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 고민도 안 하고 저렇게 내뱉다니!
하지만 시안에게는 시안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라-샤르-로아가 있는 셀라인 백작령에서 라빌란까지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자신이 뛰어가면 순식간에 도착할 거리이지만 저런 어린 친구들까지 데리고 간다면 시간이 지체된다. 급한 게 있는 건 아니지만 자신은 하루라도 빨리 형을 보고 싶었다.
“아, 좀… 치사하게……. 이야기 좀 더 들어봐요. 이건 시안 오빠랑도 무관한 이야기는 아니라고요.”
자신이 관계있을 거라는 미리안의 말에 시안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혹시 저희 형을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이십니까?”
“음… 이야기가 좀 복잡한데…….”
그리고 미리안과 론은 줄줄이 설명을 시작했다.
그론-필라의 방학. 이 방학은 정확히 말하면 학생들을 위해서가 아닌, 교관이나 교사들을 위해 진행된다.
각 행정기관과 업무처가 가장 바빠지는 3월에서 4월 동안은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진행하고 있는 교관 및 교사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기 때문에 전임교사가 아닌 다음에야 아카데미에 집중하기가 힘들어진다. 그리고 그론-필라는 전임교사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교육을 한 달에서 두 달 정도 쉬고 각국의 인재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낸다. 이 기간 동안 인재들은 집에 가서 재충전을 하고 자신이 전수받은 것을 가문 및 조직에게 전수하는 시간을 보낸다. 그렇기에 3월에서 4월은 그론-필라가 텅텅 비게 된다.
그리고 그건 미리안과 론도 마찬가지였다. 미리안과 론은 기둥 탐사라는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자 그다음 계획인 여행을 실행하기로 한 것. 이미 목적지도 다 정해놓은 상태였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던 중 놀러오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그곳을 방문하기로 한 것.
“친구라면…….”
“오빠의 형수님 되실 분이지요. 코라-둠이라고… 걔가 제 친구예요. 운명 같지 않나요? 히히. 이럴 때 시안 오빠를 만나게 된 것이요.”
“허허… 허허허허…….”
눈앞의 조막만한 꼬맹이를 보니 자신의 형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이해가 더 명확하게 되었다.
사실 편지로 열일곱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확 와 닿지가 않았다. 자신만 해도 그 나이에 성실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전 세계를 누비며 여행을 다니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첫째 형수가 열일곱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당황하기는 했지만 말이 안 된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니…
‘허허… 범죄네, 범죄. 형 혹시 장인 되실 분에게 두들겨 맞은 건 아닐까?’
이 정도 되면 아무리 시안 자신이 형을 아낀다고 해도 지켜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됐건 시안은 이렇게 되면 자신의 계획을 조금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형수 될 분의 친구라면 데리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이다.
형의 부인이라면 이제 자신에게도 가족이 될 터인데 벌써부터 안 좋은 이미지를 심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시안은 여행 일정을 조금 늦추기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좋습니다. 같이 가도록 하지요. 짐은 다 챙겨… 오셨군요.”
자신이 수락하자마자 저 구석에 놓아두었던 가방을 메고 오는 미리안과 론을 보며 시안은 마음에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행동력이 있는 친구들이었다. 저 정도라면 앞으로 여행 일정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리라.
동시에 형의 결혼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된 것인지에 대한 자신의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편지에는 그런 내용까지는 적혀있지 않았던 터라 매우 궁금했는데 옆의 소녀라면 그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방학 때 서로를 초대할 정도의 친구라면 분명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테니.
시안 일행은 라-샤르-로아를 타고 티안 서부 최대의 영지인 셀라인 백작령에 도착했다. 최근 맹렬하게 추격해오고 있는 로가디스 지방과 비교되고는 있었지만 아직까지 셀라인 백작령은 티안 서부 최대, 최고 규모의 영지 자리를 확고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아니, 어찌 보면 로가디스 지방이 빠르게 치고 올라오면서 그 성세가 더 커진 부분도 있었다.
타란과 로가디스 지방을 연결하는 길목에 셀라인 백작령이 정확히 위치해 있었으니 말이다. 늘어난 교역량과 물자의 이동은 안 그래도 부유했던 셀라인 지방을 더욱 부유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비싼 라-샤르-로아를 이용하는 사람도 하루 수백 명이 넘었다.
라-샤르-로아 셀라인 백작령 검문소를 걸어 나오면서 미리안과 론은 시안을 존경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우와… 로만가는 라-샤르-로아 이용도 공짜예요?”
“아니… 예전에는 분명 안 이랬습니다. 좋긴 하지만 신기하군요.”
시안이 아까의 사태에 대하여 고민하며 대답했다.
시안이 라-샤르-로아를 이용하려고 신분패와 돈을 내밀자 검문소에서 난리가 났다.
어리둥절해하는 시안 일행이 그 소동을 바라보는 사이 검문소에 서 있던 기사는 어딘가로 급하게 연락을 하더니 시안에게 돈 한 푼도 받지 않고 라-샤르-로아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심지어 동행이던 미리안과 론까지 말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나라샤 이 아저씨가 신분패에다가 뭘 해놓았나 본데… 편하니까 좋긴 한데, 이 아저씨 또 뭘 해놓은 거지…….’
그 생각이 들어 이제까지 자세히 보지 않았던 신분패를 자세히 살피니 평범해 보이는 신분패의 뒤에 무언가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다섯 마리의 붉은 사자. 이건 예전에 자신이 여행 다닐 때에는 없던 표시이다.
시안은 몰랐겠지만 그 표식은 시안을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진 것이었다. 언제 등장할지 모르는 시안을 찾아내기 위해 나라샤 국왕이 고안한 방법.
<이 표식이 새겨진 신분패를 가진 자가 온다면 즉시 직통 회선을 통해 연락하고 그 소지인이 불편을 겪지 않도록 하라.>
이런 사정까지야 몰랐지만 시안은 마음 편하게 먹기로 했다. 그 아저씨가 자신의 위치 알아내어 나쁜 짓을 할 것도 아닐 테니 말이다.
“그나저나… 저희 형은 형수님과 어떻게 만나게 된 것입니까? 미리안 양과 동갑이라면…….”
자잘한 연애사는 편지에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어떻게 만났는지 상상도 가지 않았던 시안은 미리안 양에게 물어보았다.
형도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마스터라는 위치는 나이를 뛰어넘게 해 주기에 열 살도 넘게 차이 나는 여성과 얽힐 일은 없을 텐데.
아니, 딱 하나 있긴 했지만 시안은 그 가능성만은 부정하고 싶었다.
“후후. 뭐겠어요.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저랑 친구라고.”
“으… 설마…….”
“히히. 그 유명한 리안 교관님이 학생과 결혼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지요.”
시안은 양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 ☆ ☆
타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셀라인 백작령의 서쪽에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 라빌란.
타란과의 무역이 이루어지는 상업적 요충지인 동시에 타란으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는 이곳은 지리적 이점과 풍부한 물자로 인해 북부에서 가장 거대한 영지로 자라나 주변에 그 성세를 뽐내었다.
그런 라빌란의 내성 지역 연무장에서 한 사내가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사내는 힘들 법도 한데 기운이 넘치는지 사방으로 반데르를 뿌려대며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수련 중인 사내에게 다가가 말을 거는 한 여성이 있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여보.”
“음… 이상하게 오늘따라 기분이 좋군요.”
기분이 좋아 보이는 자신의 남편, 리안을 보니 코라-둠은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도련님을 떠올릴 때마다 남편은 항상 쓸쓸한 표정을 짓고는 했는데 오늘은 그런 게 전혀 없어 보였다.
“다행이에요. 요즘 뭐 힘든 건 없으세요?”
“나야 뭐 늘 수련하고 싸우고… 그게 다인데 무엇이 힘들겠습니까. 부인은 힘들지 않습니까?”
“괜찮아요. 동… 생들이랑도 많이 친해졌고.”
코라-둠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동생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한지 말을 흐렸다. 그 모습이 귀여웠기에 리안은 미소를 지었다.
“익숙해질 겁니다. 사이좋게 지내줘서 고마워요.”
“참… 말 편하게 해도 되는데…….”
“존대가 익숙하니 어쩔 수 있나요. 부인이 익숙해지는 게 빠를 겁니다. 그나저나… 오늘은 별문제 없었나요?”
코라-둠은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예의가 바른 모습이 좋긴 했지만 부인인 자신에게까지 이러는 걸 보면 천성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아직 신혼이라 그렇거나.
“오늘도 조용해요. 타란은 이쪽을 별로 공격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오히려 북쪽 지방은 하리쟌들의 공격이 계속 거세어진다고 해요.”
코라-둠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진실을 보는 드콘의 딸인 코라-둠. 그녀는 심지어 하리쟌의 마음속도 어느 정도 살필 수가 있었다.
하리쟌의 내면은 항상 비슷했다.
<흉폭함, 식욕, 생존, 번식…>
하지만 하늘산맥을 넘어오는 하리쟌들에게는 조금 다른 감정이 하나 더 내재되어 있었다.
<두려움>
종합적으로 보면 배가 고파서 대수림에서 먹잇감이 풍부한 티안으로 넘어오긴 하지만 무언가를 꺼리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건 하늘산맥의 서쪽으로 가면 더더욱 심해져 그론-필라쯤 가면 아무리 강대한 하리쟌도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아버지를 보러 다녀온 김에 북쪽을 살펴보니 그런 두려움이 하리쟌들에게서 점점 더 사라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굳이 내면을 살펴볼 필요도 없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광경만 살펴도 바로 알 수 있었다. 대북벽이 추가로 건설되고 더 많은 병력들이 티안의 북부에 모여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점점 더 많은, 그리고 강한 하리쟌들이 슬금슬금 하늘산맥을 통해 건너오고 있었다. 이 녀석들은 최근에는 대북벽보다 이쪽이 더 뚫기가 간단하고 먹을 것이 많다고 판단했는지 아예 먼 길을 돌아 이곳을 습격하러 오는 녀석들도 있었다.
“음… 그거 큰일인데…….”
리안은 침음성을 삼켰다. 저번에 다섯 뿔의 하리쟌이라는 녀석이 난동을 부렸다는 소식은 자신도 들었다. 다행히 키라인 검공을 필두로 무장병단이 모조리 달려들어 녀석을 때려잡았기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도시의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을 것이다.
수도에서도 그것을 알기에 끊임없이 막대한 양의 물자와 군사물품을 보내주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인재가 모자랐다. 그론-필라에서 자라난 인재들이 더 쓸 만해지려면 아직도 시간을 더 많이 벌어야 했다. 대북벽이 이곳까지 연결되면 적어도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정말 걱정이군… 후… 내가 여기서 이렇게 편하게 있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근심 없던 남편의 얼굴이 다시 고민으로 차는 것을 본 코라-둠은 위로하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그래도 아버님과 당신이 이렇게 타란의 국경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으니 타란이 얌전한 것 아니겠어요? 국왕폐하도 꼭 이곳을 지켜달라고 말씀하셨잖아요.”
현재 타란과의 국경은 로만 백작과 리안, 그리고 드라고나가 배치되어 수비를 맡고 있다. 아무리 이쪽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하여도 국경을 비워둘 수는 없다고 판단한 나라샤 국왕이 그들에게 이곳의 수비를 맡긴 것이다.
“후… 그건 그렇긴 한데 답답해서 그렇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쪽은 아버지가 도와주고 계시니… 괜찮을 거예요. 이번에 혼자 뵈러 가서 안타까웠는데 다음에 꼭 같이 가요.”
“후… 아직도 찾아뵙게도 못하게 하시니…….”
리안은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야, 이 도둑놈의 자식아! 양심이 있어야지! 내 딸이 이제 겨우 열넷이다! 학교에 보내놨더니 교사라는 자식이! 죽여버리겠다!’
그때 장인어른이 들고 와서 갈긴 <가이라>에 맞고 죽을 뻔했다. 아무리 성장이 빠르고 성숙한 드콘족이라지만 열넷은 사회적으로 금기에 가까운 나이였으니.
“그래도 지금은 많이 풀리셨을 거예요. 이번에 갔을 때도 많이 좋아하셨는걸요. 후후. 딸 이기는 아버지 없다고 하잖아요.”
아마 아직은 아닐 거라는 이야기를 입안에서 삼킨 채 리안은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그나저나… 당신 친구들이 놀러 온다고 했지요?”
“네. 당신도 알잖아요, 미리안과 론…….”
“아… 그 친구들.”
리안은 자신이 교관으로 있던 시절 항상 붙어 다니던 그 둘을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천성이 나쁜 아이들은 아니었지만 어찌나 호기심이 많고 에너지가 넘치는지 그 둘이 친 사고를 수습하느라 꽤나 힘들었던 때가 생각이 났다.
불안한 표정을 짓는 자신의 남편을 본 코라-둠도 그때가 떠올랐는지 작게 웃었다.
“후후. 설마 이 짧은 거리 오는데 무슨 문제가 생기겠어요.”
“하긴 그렇겠지요. 괜한 걱정이었나 봅니다. 후후. 이제 식사시간인데 들어갑시다.”
리안은 코라-둠을 데리고 나머지 부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기 위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 ☆ ☆
우당탕! 쿠당탕탕!
“야, 이 자식들아! 선량한 시민을 괴롭히다니!”
“으… 이 미친년이! 죽여버려!”
시안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난장판에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몰렸는지를 곰곰이 떠올렸다.
‘분명 시내를 지나… 마차를 빌리러 가는 곳까지는 참 좋았는데…….’
시장을 지나던 도중 문제가 발생했다. 시장에서 자릿세를 걷고 있던 건달들을 발견한 것.
셀라인 백작령은 치안이 좋은 편이었지만 저런 사소한 것까지 영지에서 간섭할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저런 지역 왈패들이 오랫동안 자리 잡는 것이 행정관들 입장에서는 더 편리했다. 알아서 눈치껏 선을 넘지 않고 행동하며 새로 들어오는 질 나쁜 녀석들을 걸러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저런 왈패들을 때려잡지 않고 놓아두었는데 미리안 양의 생각은 조금 달랐던 모양이다.
<이 자식들! 너희가 뭔데!>
<허허… 아가씨가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윽!>
<닥쳐라!>
왈패들은 시장 영세상인들을 대상으로나 왕 노릇을 할 수 있을 뿐이지, 사회적으로 볼 때는 거의 식물성 플랑크톤을 먹고사는 동물성 플랑크톤에 불과했다. 특히 길거리에 무장들이 판치는 사회라면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왈패들은 행동을 할 때마다 항상 시비가 안 붙도록 조심한다.
하지만 미리안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딱 보아도 뭔가 있어 보이는 꼬마 계집이 뒤에 보호자를 달고 있기에 좋게 좋게 넘어가려고 했던 왈패의 턱주가리를 돌려버린 미리안은 마치 정의의 용사라도 된 양 왈패들을 모조리 때려잡고 있었다.
왈패들 역시 이대로 밀리면 그대로 굶어죽기에 필사적으로 대항하고 있었다.
“…허허…….”
시안은 한숨을 쉬고 있었고 옆에서 론이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부여잡으며 옆에서 주머니를 꺼내 치료비랑 파괴된 좌판의 보상비를 세고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어본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음… 론 군, 여행은 이번이 처음인가요?”
“네… 시안 경. 오해하지 마십시오. 미리안이 평소에 저 정도는 아닌데… 여행 중이라 아마 흥분해서 그럴 겁니다.”
필사적으로 변명하고 있었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평소에 저 정도가 아닐지라도 사고는 꾸준히 쳤다는 뜻으로 들렸다.
시안은 맹렬하게 고민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딱 보아도 사건 사고를 줄줄 달고 다닐 느낌이 매우 강했다. 평온을 지향하는 자신과는 매우 사상이 맞지 않는다는 뜻.
평소대로라면 거리낌 없이 분리되어 가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문제였다. 만약 따로 간다고 해도 라빌란까지 저런 식으로 간다면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시안은 머릿속으로 조용히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다.
<오! 시안, 오랜만이구나. 너무 너무 너무 반갑다 …<중략>… 그런데 라-샤르-로아에서 온 연락에 따르면 동행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디로 갔니?>
<하하, 너무 사고를 많이 쳐서 따로 왔지요. 그나저나 형수님, 반갑습니다.>
<저는 반갑지 않군요. 도련님과 중간에 헤어진 제 친구들이 중간에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군요.>
<헉……!>
<시안, 어린 친구 둘 데리고 오는 게 그리 힘들었니. 그래도 형수의 친구들인데.>
<도련님, 너무해요…….>
<…….>
어디까지나 자신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예상에 불과했지만 충분히 실현가능성이 있었다. 형이나 형수 모두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매우 슬퍼할 것이다.
“으아…….”
시안은 이제 정리가 되어가는 좌판을 보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완전 외통수에 걸렸다.
시안은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미리안을 조용히 불렀다.
“저기… 미리안 양.”
그러자 미리안이 기다렸다는 듯 시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히히. 이번에는 오빠가 나서기 전에 제가 다 처리했어요. 이런 일에 손쓰기도 민망하실 것 같아서.”
“…….”
“히히. 너무 섭섭한 표정 짓지 마세요. 제 일은 그래도 제가 책임질 테니.”
“음…….”
이렇게 나오자 시안도 할 말이 궁해졌다. 객관적으로 이 아이가 나쁜 일을 했다고 보기도 힘들기에 뭐라고 하기도 그랬다.
겨우 열흘 같이 있을 건데 선생님 역할까지 하기가 굉장히 귀찮았던 시안은 결국 결정을 내렸다. 자신은 때려서 하는 교육 말고 말로 하는 교육은 매우 취약했다.
‘안 되겠군…….’
“저기… 론 군, 이리로 와 보시겠습니까? 그리고 미리안 양도 이쪽으로 와보시지요.”
갑작스럽게 자신을 부르는 시안의 말에 미리안과 론은 의아해하면서도 옆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질문 하나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말씀하시지요.”
“음… 혹시 고소공포증이나 이런 것 있으신가요? 아니면 몸이 격렬하게 흔들리면 구토를 한다거나… 실례를 한다거나…….”
굉장히 미안하다는 듯 시안이 물어보자 미리안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하하. 저흴 너무 무시하시는 것 아닌가요? 무장이 그런 게 있으면 어찌 싸운다고.”
“휴… 다행입니다.”
그러더니 시안은 한쪽 어깨에 미리안을, 그리고 다른 어깨에 론을 들어 걸쳐놓았다.
미리안과 론은 당황하며 외쳤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뭐예요? 이거 왜 이래요?”
“납치하는 거 아니니 걱정 말고… 꽉 붙잡으십시오.”
그 말을 끝마치자마자 시안은 잽싸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워낙 빠른 속도로 달려갔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뭐가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그 움직임을 놓치고 말았다.
미리안과 론은 뒤에 매달려 가면서도 이게 무슨 일인가 했지만 곧 시안의 뜻을 알아채고 어이없다는 듯 말을 걸었다.
“저기… 시안 경, 설마 저희를 메고 라빌란까지 뛰어가시겠다는 건가요?”
그러자 시안이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그럴 리가 있나요.”
“그러면 도대체 왜…….”
“후후후후후.”
시안은 사람이 없는 뒷산에 도착하자마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어깨의 두 사람을 꽉 붙잡았다.
“어… 어어어?”
“어느 세월에 도착하겠습니까, 그러면.”
쿠우우우웅!
으아아아아악!
어깨에 둘러져 있는 론과 미리안이 반응도 하기 전에 시안은 한껏 몸을 웅크렸다가 땅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그리고 시안이 뛰어오른 자리는 마치 폭탄이라도 터진 듯 굉음을 내며 푹 하고 가라앉았고, 마치 폭죽이라도 발사된 듯 붉은 혜성이 비명 소리를 뒤에 달고 셀라인에서 라빌란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