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재회>
라빌란의 남쪽 망루를 지키는 일반병, 크라상은 하늘을 보며 하품을 했다.
“흐아아… 타란 녀석들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라빌란 서쪽에 위치한 타란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티안 지역 쪽은 경계만 하고 있을 뿐, 딱히 쳐들어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5년 전에야 그라나인들 때문에 그런가 보다 했지만, 그라나인들이 모조리 사라진 지금도 경계만 할 뿐 침략의 의지는 없어 보였다.
그런 건 일반병인 크라상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그가 근무한 지 5년간 단 한 번의 도발행위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자신들, 티안 왕국이 그런 식으로 적을 방심시킨 후 타란의 라그랑 지방을 잡아먹었던 전투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크라상은 하품을 하면서도 경계 근무 시 방심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늘을 바라보던 크라상의 눈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잡혔다.
라빌란의 동쪽 방향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보인 것.
크라상은 자신이 잘못 보았나 했지만 그 빛은 점점 더 그 크기를 더하더니 맹렬하게 라빌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미친… 저게 뭐야… 비상! 비상!”
동쪽이라면 타란의 국경 방향도 아니지만 저런 수상한 물체가 맹렬한 속도로 날아온다면 땅에 처박히기만 해도 엄청난 피해를 입힐 것이다.
크라상은 비상종을 울리면서도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뭐야… 저게 왜 나라 안쪽에서 날아오지… 셀라인이 점령당했나? 아니면 적국의 새로운 이적?’
하지만 크라상이 미친 듯이 비상종을 울린 보람도 없이 붉은 물체는 너무나 빠르게 지상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그 크기는 크지 않지만 저 정도 속도로 추락하면 내성은 박살이 난다.
“미친! 또 왜 이쪽으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망루 근처로 날아오는 혜성을 보며 크라상은 눈을 질끈 감고 바닥에 엎드렸다.
평소에 훈련 받은 대로 갑작스러운 진동이나 폭발에 대처하는 자세였다.
쿠우우웅!
“으아아아… 음?”
소리는 났지만 생각보다 그 후폭풍이 발생하지 않자 눈을 질끈 감았던 크라상은 천천히 눈을 뜨고 혜성이 처박힌 장소를 바라보았다.
땅에서는 흙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크라상이 예상한 대폭발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크라상이 눈을 가늘게 뜨고 흙먼지 속을 살피던 도중 흙먼지가 가라앉으며 장대한 체구의 인영 하나가 보였다.
‘몬스터인가… 무슨 어깨넓이가…….’
하지만 그건 크라상의 착각이었다. 단지 흙먼지 속에서 나온 인영은 양 어깨에 사람을 하나씩 메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양쪽에서 구토를 하면서 말이다.
웨에에엑. 우웨에엑
‘윽…….’
어찌나 격하게 구토를 하는지 수십 미터 떨어진 크라상조차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하지만 크라상은 즉각 자신이 새로 해야 할 일을 찾았다.
“흐압!”
칼 한 자루를 꼬나들고 거칠게 뛰어간 크라상은 이미 자신들의 믿음직스러운 동료들이 이미 괴인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우웨엑… 미친… 이럴 거면 말을 해줘야죠!”
“왜 이러십니까, 도대체! 천천히 와도 되는 문제 아니었습니까!”
“아니… 그게…….”
괴인은 주위를 포위하고 있는 막대한 병력이 보이지도 않는지 어깨에 메고 있던 두 명과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크라상은 저 안에서도 티격태격하는 저들을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제압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저렇게 하늘을 날아와 땅에 착지한 정체불명의 괴인들에게 용감하게 달려들 수 있는 자가 누가 있단 말인가?
모르긴 몰라도 달려드는 순서대로 도륙이 될 것이다.
순간, 크라상은 먼지 속의 인영의 얼굴이 어딘가 눈에 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선이 굵은 것이 마치 티안의 수호무장이신 로만 백작을 연상케 하는 얼굴.
그 얼굴을 본 순간, 5년도 더 전에 자신이 참여했던 대전쟁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당시보다 체격은 더 커지고 선은 굵어졌지만 그때의 기억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시안 경! 혹시 시안 폰 로만 경이 아니십니까?”
“음? 절 아십니까?”
“네. 예전 전쟁에 참가했을 때 뵌 적이 있습니다.”
“호오! 반갑습니다.”
시안은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자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실종되셨다고 들었는데…….”
“아, 사정이 있었는데 이렇게 잘 도착했습니다. 형을 불러 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크라상은 몸을 돌려 내성으로 향하려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하하하하! 시안! 오랜만이구나! 엄청난 등장이구나. 따로 아버지에게 연락을 안 드려도 되겠어.”
저렇게 거창한 등장을 그랑-반더인 아버지가 모를 리 없었기에 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흐흐흐. 형도 오랜만이야!”
5년 만에 만난 형제는 한동안 부둥켜 끌어안은 상태로 떨어지지 않았다. 잠시 후 리안은 격한 인사를 끝내고 시안을 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서 하기에는 그간 있던 이야기가 너무 많겠지.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하자꾸나.”
“그래. 나도 물어보고 싶은 게 많다고, 형. 부인이 셋이라니.”
“이런… 이야기가 길단다. 들어가서 이야기해주마. 하하! 그런데 저 친구들은……?”
“아… 형수님의 친구라는데 오는 길에 같이 데리고 왔어. 같이 들어가자. 걸으실 수 있습니까?”
“으으… 손대지 마세요. 혼자 걸어갈 거예요.”
“하하…….”
멋쩍게 웃는 시안과 두 친구들을 이끌고 리안은 성안으로 자리를 옮겼고 모였던 병사들은 다시 자신의 자리를 사수하러 돌아갔다.
“인사해, 시안. 이쪽은 내 안사람, 코라-둠이야.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드콘의 딸이란다.”
“드콘족이라. 한번 뵈었던 적이 있지요. 반갑습니다. 시안입니다.”
“안녕하세요. 코라-둠입니다.”
시안은 쿨란의 영지를 떠올리며 인사를 했고 코라-둠은 그런 도련님을 유심히 살폈다.
자신의 남편, 리안에게 전해 듣기만 하던 도련님.
남편이 해 준 이야기는 도무지 믿지 못할 일들투성이였다.
‘후후. 저기 우리가 수업하고 있는 라그랑 지방 뒤의 웅덩이… 저게 제 동생이 만들어 놓은 겁니다. 산자락 네 개를 없애버렸지요.’
‘동생은… 우리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다는군요. 그렇게 죽기를 싫어하는 아이가 그런 선택을 했다니… 가슴이 아픕니다. 하지만 전 동생을 믿습니다. 그 아이가 누구한테 당한다는 게… 도저히 상상조차 가지 않는군요.’
‘사람들이 저보고 천재라고 하지만… 그건 동생을 못 봐서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소문이 나지 않았으니 얼마나 대단한 아이입니까?’
자신의 남편인 리안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천재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도련님은 인간이 아니었다. 이야기의 반의반만 사실이라고 해도 전쟁신이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내려온 것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
그렇기에 항상 궁금했다. 그리고 항상 보고 싶었다.
드콘의 눈은 모든 것을 밝히니까. 나쁜 의도는 없지만 그렇게 자신의 남편이 자랑스러워하는 도련님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직접 보면 한눈에 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상황은 예상과는 조금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후… 그래서 날 갉아먹으려고 하는 껍질 녀석이랑 치고받는데…….”
“세상에… 고생 많았겠구나, 시안.”
‘음… 뭐지…….’
코라-둠은 자신의 눈앞에서 리안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시안을 보며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보이긴 보이는데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보이긴 보였다. 노란색의 거대한 무언가가. 그리고 그 노란색은 움찔움찔하며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도대체 그 정체가 무엇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기에 코라-둠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리안이 코라-둠에게 말을 걸었다.
“하하! 부인, 동생 얼굴 뚫어지겠습니다. 동생이 잘생기긴 했지만 숫기가 없는 아이이니 그렇게 보면 부끄러울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코라-둠은 그 노란색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노란색의 거대한 무언가가 휘리릭 회전하면서 보인 그것이 노란 것의 정체를 말해주었다.
노란 구체를 가운데로 십자 형태로 길쭉하게 찢어져 있는 틈새.
그리고 그 안에서 타는 듯 불타고 있는 거대한 붉은빛의 무언가.
시안이 자신을 보는 동시에 자신을 응시하는 거대한, 그리고 너무나도 압도적인 눈동자를 보며 코라-둠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아… 아아아…….”
“음? 왜 그러십니까, 부인?”
“으음… 아니에요.”
코라-둠은 괜찮다고 했지만 바닥에 주저앉아 헐떡이는 모습은 누가 봐도 멀쩡해 보이는 모습이 아니었다.
“이런… 피곤한가 봅니다.”
“…긴장해서 그런가 봐요. 들어가서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테니 두 분 계속 이야기 나누세요.”
리안은 걱정 어린 눈길로 코라-둠을 바라보았고 코라-둠은 비틀거리며 옆에 서 있던 친구들과 함께 안쪽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왜 그러는지 모르겠구나.”
“형, 들어가 봐.”
“…미안하다, 시안. 가서 좀 챙겨주고 오마. 방을 안내해 줄 테니 잠깐 쉬고 있으렴. 좀 이따 아버지까지 오시면 그때 같이 이야기 나누자꾸나.”
그 말을 끝으로 리안은 자신의 아내를 따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시안은 하인들의 안내를 받아 쉬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허허… 드콘족이라는 게 대단하네. 못 볼 줄 알았는데…….”
초인이 되면 세상과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내부가 외부의 차원과 격리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 경지가 올라갈수록 격리는 더욱 심해져 시안 정도의 경지에 오르게 되면 어지간한 초인들조차 자신과 일반인의 차이를 느끼지 못 한다. 그런데 형수는 자신의 안에 있는 무언가를 본 것이다.
앞으로 놀라게 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한 시안은 오랜만의 휴식을 취하러 발걸음을 옮겼다. 형과 아버지가 올 때까지 짐이라도 풀며 휴식을 취하면 될 것이다.
“쩝… 그나저나 참 보기 좋네. 내 짝은 어디에 있나…….”
시안은 아까 서로를 챙기던 둘의 모습을 보며 부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 ☆ ☆
“시안! 네가 무사히 돌아와 정말 다행이구나!”
“후후. 아버지도 잘 지내셨어요?”
“허허. 매일 똑같지. 타란 쪽 성벽 바라보다 수련하고 또 성벽 바라보다 수련하고… 이제 벽돌이 몇 개인지 외울 지경이란다.”
“하하하! 잘 지내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랑-반더의 초인적인 시력과 순간기억력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기에 시안은 크게 웃었다. 로만 백작은 덤덤하게 다행이라는 말을 하고 있었지만 눈에 뜨일 정도로 안심하는 것이 겉으로 보였다. 그렇기에 시안은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리안을 기다리는 동안 로만 백작과 시안은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몸은 괜찮은지, 고민은 없는지…
대화가 이어지다 이윽고 가장 중요한 소식이 도마 위에 올라왔다.
“그나저나… 네 형 소식은 들었니? 편지에 다 써 놓기는 했다만…….”
“후… 정말 놀랐습니다. 하하, 정말 축하할 일입니다. 결혼식에 참가하지 못 한 것이 아쉽군요.”
“그래. 셋 다 만나보았니?”
“아니요. 아직 첫째 형수님만 만나보았습니다. 나머지 두 분은 여기 안 계신지요?”
“음…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훈련 중이었지. 아마 네가 날아오는 걸 보았으니… 금방 올 게다.”
자신도 이쪽으로 격하게 날아오는 유성을 보고 이곳으로 달려왔다. 며느리들도 눈이 좋으니 금방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시안은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우선 편지함에 있던 두 명이 떠올랐기에 둘의 안부를 물었다.
“셀린 경과 스틸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편지를 보니 이곳에 계신 듯하던데요.”
“셀린 그 아이는 며느리 둘과 훈련 중이었으니 올 것이고… 그리고 스틸 경? 스탄탈 1세를 말하는 것이니?”
“네. 분명 편지에는…….”
“그분이 여기 있다는 게 무슨 말이니?”
“네?”
영문을 모르겠다는 아버지의 말에 시안은 저도 모르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스틸 양이 연락이 아예 되지 않는다고요?”
“그렇단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동안 스틸 양이 무슨 일을 해 주었는지 쭈욱 말해주었다.
5년 전, 국경을 지키고 있던 로만 백작의 방에 누군가가 찾아들었다. 철통같은 경비로 지켜지고 있던 군사적 요충지였지만 로만 백작을 찾아온 자에게 그런 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인간 위의 존재, 초인이었으니.
<시안의 아버지 되시지요? 스틸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스탄탈 1세 아니십니까… 여기에는 무슨 일로…….>
리안은 아직 그 정도 정보에 접근할 수준이 되지 않아 몰랐지만 그랑-반더인 로만 백작은 스틸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처음 스틸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자신의 아들과 함께 산맥을 박살 낸 위대한 초인이 자신을 찾아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로만 백작은 자신에게 화풀이를 하러 온 줄 알고 죽음을 각오했었다.
<제발 가족만은… 살려주십시오.>
<후후. 저에 대해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그러고는 믿기 힘든 이야기를 해 주었다.
시안이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흉악한 존재와 싸우기로 결심했다는 점.
그리고 그 싸움이 언제 끝날지는 자신도 모른다는 점.
스틸은 이 사실을 전해주러 왔다고 웃으며 말했다.
들으면서도 로만 백작은 어안이 벙벙했다.
나라샤 국왕 폐하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기에 자신은 초인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사람을 개미처럼 여긴다는 것도.
게다가 스탄탈 1세는 인간 시절일 때도 흉폭하기로 소문이 자자했었는데 자신들에게 이런 친절을 베풀 이유가 없다.
그렇기에 로만 백작은 위험을 무릅쓰고 스탄탈 1세에게 질문을 했다. 어차피 죽이려면 이미 죽였을 것이다.
<우리에게 이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후후. 가족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막 대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아…….>
그제야 로만 백작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목이 아직도 붙어있는 이유도.
<혹시 이 사실을 더 알아야 할 사람들이 있다면 알려주도록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 말을 마지막으로 스탄탈 1세는 훌쩍 사라졌고 로만 백작은 이 사실을 리안과 부인인 셀린느에게 알리고 평소 시안이 친하게 지냈던 셀린 경에게도 전달해주었다. 모두가 슬퍼했지만 동시에 절망에 빠지지는 않았다. 그들이 아는 시안은 어디서도 죽을 것 같지 않았으니까.
국왕폐하는 이 사실을 몰라도 될 것 같았기에 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알고 찾아오셨다.
그러고는 제안을 하셨다.
<저 대지는 이제 위험하겠군. 하지만 들어가지 말라고 하면 더 들어가고 싶어지는 게 사람 심리이니 위험하다는 소문을 은근슬쩍 퍼트리게.>
<그리고… 나오게 될 경우 세상에 적응을 쉽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좀 도와줍시다.>
그리고 나라샤 국왕폐하는 잘 보일 것 같은 강철 기둥 하나를 만들어 오더니 그 안에 신분패를 비롯한 옷가지, 돈, 가방 등을 챙겨 넣고 그 위에 세워놓았다.
그 기둥을 시안이 묻혀있다는 대지 위에 세우려는데 어디선가 스탄탈 1세가 홀연히 나타나 말했다.
<하… 요즘 아이들은 낭만이 없어. 나라샤 꼬맹아, 다시 가서 여기다가 서랍 몇 개만 만들어 와.>
<…무슨 이유로…….>
<너희들, 편지 안 쓸 거야?>
스탄탈 1세의 강력한 주장으로 원래 계획에 없던 편지함이 생겼고 가족들은 이 아이디어가 나쁘지 않았는지 모두 찬성했다. 이는 시안이 나왔을 경우 흘러간 세월에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니.
“…그리고 이렇게 네가 찾아온 것이란다. 우리는 그 이후로 스틸 경을 본 적이 없구나.”
“…허…….”
시안은 편지에 쓰여 있는 상황과 다르자 당황했다. 비록 단 한 장뿐인 스틸 양의 편지였지만 분명 지금과는 다른 내용이 쓰여 있었다.
<후후. 동생, 내가 적당히 뒤처리는 알아서 해 놨어. 스탄탈 그 꼬맹이한테 티안 건드리지 말라고 해 놓았고, 나라샤 그 꼬맹이한테도 가족들을 타란 국경에 배치해 놓으라고 했지. 아마 여기보다 안전한 곳은 없을 테니 안심하라고. …<중략>… 동생이 어서 나왔으면 좋겠네. 나는 그냥 동생 가족들이랑 있을게. 그게 더 찾아오기 편하지 않겠어? 후후.>
‘어떻게 된 건지 조금 더 알아봐야겠군.’
스틸 양 성격상 숨어서 가족들을 보호한다거나 그러는 궁상맞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 정도면 스틸 양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굳이 개미들과 엮여서 좋을 것이 없으니까.
그렇기에 시안은 아마 스틸 양이 나라샤 아저씨의 접대를 받으며 아주 편안하게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도착해보니 가족들을 비롯한 관계자들은 그 이후로 스틸 양의 그림자도 못 보았다고 하니 이상했다.
하지만 초인이 숨기로 하면 자신도 방법이 없다. 그리고 어딘가에 있다면 소식을 듣고 찾아올 것이기에 시안은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험… 험… 시안.”
고민에 빠져있는 시안을 보며 로만 백작이 말을 걸었다.
“네, 아버지?”
“나는… 그분이라면 찬성이란다.”
“…….”
“아니… 거… 너도 이제 슬슬 짝을 찾을 나이가 되지 않았니?”
로만 백작이 얼버무렸지만 로만 백의 걱정은 진심이었다.
자신의 아들은 아직은 인간처럼 살고 있지만 로만 백작은 항상 아들이 걱정되었다.
언제 인간으로서의 마음을 버리고 초인으로 살아갈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이 넓은 세상, 아직 많이 남은 생에 시안 홀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초인이라고 하지만 로만 백작인 아버지가 보기에는 아직 가족이 필요한 아이였다. 그렇기에 보살펴 줄 사람이 필요했다.
하지만 인간인 자신들로는 무리다. 현재에 최선을 다할 뿐. 듣기로 초인은 수백 년을 살아간다고 한다. 그 긴 세월을 함께할 수 있는 존재는 초인뿐이다. 셀린 그 아이도 로만 백작의 마음에 들지만 안타깝게도 초인으로서 시안의 곁을 지켜줄 수는 없었다.
자신이 보기에 시안 저 아이도 마음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연애 경험이 없어 자신은 모르는 듯했지만, 혹은 스스로는 부정하고 있지만 로만 백작이 보기에는 시안 역시 스탄탈 1세에게 마음이 어느 정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가족 말고 관심 없는 저 아이가 스틸을 찾지는 않았을 것이다.
“에이… 제 나이에 무슨……. 그리고 대는 형이 이을 것 같으니 마음이 편해지는군요. 셋이라니…….”
“허허! 뭐, 천천히 생각해 보거라, 급한 건 아니니. 이제 슬슬 다 모였을 것 같으니 내려가 보자꾸나.”
“네, 아버지.”
그리고 로만 백작과 시안은 자리를 옮겼다.
아래층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생각보다 많이 놀란 것인지 코라-둠 양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 데려온 친구들도. 아마 코라-둠 양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반가운 얼굴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시안! 역시 살아 돌아왔구나. 하하!”
“흐… 제가 죽을 자리 찾아가는 것 보셨습니까?”
셀린은 오랜만에 본 시안을 반갑게 맞이했고 시안 역시 우스갯소리로 대꾸했다. 정말 죽을 뻔했지만 굳이 이런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꺼내 모두를 걱정시킬 필요는 없다. 적어도 여기 있는 모두는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해 주고, 또 자신이 진심으로 챙겨주어야 할 사람들이니.
“하하. 형님 편지에서 이야기는 들었지만 뵙는 건 처음이군요.”
“아, 그렇지! 시안, 인사시켜 주마. 이쪽은… 왕국어로 하면 이름이 쿠크락샤란다.”
“…반갑습니다, 쿠크락샤 양.”
“후후. 반갑구나.”
시안은 눈앞에 있는 쿠크락샤 양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사랑이 종족을 초월한다지만.
“수인족이시군요. 혹시 타르강 부족이십니까?”
“알아보는구나. 후후.”
‘스틸 양의 느낌이 나는 분이네…….’
자신의 두 번째 형수 될 사람은 수인족, 그것도 개개인의 무력이 강대하기로 유명한 타르강 부족의 수인족이었다.
수인족은 비록 무리 짓지 않고 가족단위로 살아가기에 세력 면에서 인간에게 밀려 현재는 콘-티안 산맥이나 브로샨 산맥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개개인의 무력은 인간과 비교하는 게 미안할 수준으로 강대하다.
태어날 때부터 엄청난 완력과 반사신경, 체력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강해지며 이마에 일곱 개의 줄무늬가 생길 정도의 나이가 되면 그랑-반더와도 자웅을 겨룰 정도의 강대한 종족이 된다.
눈앞의 쿠크락샤 양은 그 정도는 아닌 듯 보였지만 이마에 선명하게 나 있는 다섯 개의 줄무늬는 그녀가 무시할 수 없는 강자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기세를 재어보니 형과 맞붙어도 별로 밀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기에 시안은 너무나 신기했다. 수인족, 그중에서도 강대하고 사납기로 소문난 타르강 부족은 쉽게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수가 적지만 인간들과 조화롭게 살고 있는 드콘족과는 다르게 숲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들은 평생 살면서 단 한 번도 마주하지 못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타르강 부족의 여인과 결혼까지 하게 된 형의 사정이 너무나 궁금했다.
시안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저… 형과는 어떻게 만나게 된 사이이신지요?”
“하하… 그게…….”
“아, 곤란하면 이야기 안 해주셔도 됩니다.”
난처해하는 쿠크락샤 양을 대신하여 리안이 나섰다.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 동생인 너도 알아야겠지. 내가 예전에 왕명으로 트라안 거리로 갔을 때…….”
그러면서 리안은 한 편의 대서사시를 말해주었다. 하지만 시안은 간단하게 요약을 하는 데 성공했다.
‘뭐야, 그러니까 트라안 거리에 있는 암시장을 탈탈 털었는데 그 와중에 갇혀 있던 쿠크락샤 양을 구출하고 그러다가 눈이 맞았다는 것 아냐?’
시안은 어이가 없었다. 예전에 분명 스틸 양이 말하길 노예시장이나 암시장에는 수인족이나 귀족가의 여식 같은 존재는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시안이 보기에도 그게 사실 같았다.
그런데 형은 코앞에 있는 트라안 거리를 털어보니 짠! 하고 수인족이 나왔고, 그것도 모자라 수인족과 결혼까지 하게 된 것이다.
마치 뒷마당을 팠는데 금은보화가 30센티미터 깊이에 잔뜩 묻혀있는 것과 같은 상황.
‘아니… 진짜 주인공이라도 되나…….’
그래도 학생과의 로맨스까지는 이해가 갔다. 자신이 보기에도 형은 멋진 사람이었으니 로맨스가 생기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다. 하지만 이건 심하지 않은가?
시안이 속으로 어이없어하고 있을 때 리안은 다른 사람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나섰다.
“그래. 그리고 이쪽은… 시안 너도 편지에서 읽었지? 이번에 결혼하게 된 베로니카 양이란다.”
“안녕하세요, 시안 도련님. 말씀은 많이 들었어요. 후후. 처음 뵙겠습니다.”
‘어……?’
어디서 맡아 본 익숙한 향기.
“혹시… 리마이누라고… 아십니까?”
“음… 리마이누요?”
“네. 그러니까…….”
그리고 시안은 구구절절 인상착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말을 듣던 베로니카는 점점 더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참지 못하고 입을 열고 말았다.
“도련님이 말하는 사람이 제가 아는 사람과 맞는 것 같군요. 도대체 동생을 어디서 보신 거죠?”
‘와아…….’
베로니카는 시안의 말에 깜짝 놀라며 바라보았고, 원래부터 좋아하는 형이었지만 이제부터는 형을 존경하기로 마음먹은 시안이 형 쪽을 바라보았다.
베로니카.
자신이 원래 있던 세계에서 쓰던 세례명.
딱히 종교를 착실하게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곳에 떨어져서 찾을 존재는 신밖에 없었고, 또 이곳에서 쓸 이름이 필요했기에 찾다가 생각난 이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다른 차원에서 왔다고. 그런 말을 했다가는 미친년 취급 받기에 딱 좋거니와 재수 없으면 대법도회라는 곳에 끌려가 실험용 모르모트가 될 수도 있으니까.
이곳은 여성이, 그것도 자신 같은 미모의 여성이 살기에 딱히 좋은 곳은 아니었다.
흑발에 흑안은 다양한 종족이 사는 이 차원에서도 찾기 쉽지 않은 특징이었고 폭력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여성의 위치는 상대적으로 더 낮았다. 실제로 자신이 이곳에 떨어진 지 3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위협을 겪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몸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단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이 이곳에 떨어지면서 가지게 된 특별한 능력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곳에서 1년 전에 만난 새로운 인연, 자신의 남편 때문이었다. 자신의 남편을 만난 후 자신은 완벽한 보금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하… 언제 봐도 잘생겼다.’
그쪽 세상에 살 때도 얼굴을 심하게 밝혔던 자신이지만 자신의 남편, 리안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이제까지 만난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 중 자신의 남편보다 잘생긴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능력 좋고 가문도 좋고 성격도 좋은, 신이 빚어 내린 것 같은 남편.
비록 아내가 둘이 있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안할 수 있었다. 비록 자신이 살던 곳에서는 특별한 문화이지만 일단 이곳에 넘어왔으니 이곳에 적응하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도 셋 모두가 종족이 달라 그런지 질투나 시기 같은 것도 크지 않고 지금은 서먹서먹하지만 셋 모두 어느 정도 친해진 상태였다.
서로가 친해지고 한집에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대화할 기회도 많아졌다.
어느 날 대화를 하다 보니 셋 모두가 궁금해하던, 하지만 물어보기 애매하여 마음속에만 묻어두고 있던 주제를 꺼내게 되었다.
<과연 도련님이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도련님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건 확실했다.
이 세상에 도착해서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의 자신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로만가의 명성은 사방에 자자했다.
폭력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그 정점에 서서 사회를 굽어보는 가문.
수는 적지만, 그렇기에 더욱 위대한 티안의 무장가문, 로만가.
티안의 수호무장, 위대한 그랑-반더, 카인 폰 로만.
로만가가 낳은 대천재, 리안 폰 로만.
둘 모두 티안의 사람이라면 모르는 자가 없었다. 아니, 타국까지도 그 명성이 자자했다. 대륙 전체의 연예인인 셈.
하지만 둘째인 시안 폰 로만에 대한 소문은 그다지 퍼져있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퍼져는 있지만 그 정체가 확실치 않았다. 워낙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많았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들 세상에서 떠돌던 인터넷 루머나 도시 괴담에 가까운 소문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걸어 다니는 전술 핵병기다. 아니, 그 이상이다. 아무리 핵병기라도 그 널따란 산맥을 지워버리지는 못하니까.
자신은 처음에 남편이 보여 준 라그랑 지방의 구덩이가 무슨 운석이라도 떨어진 자국인 줄 알았다. 하지만 뒤이어진 남편의 말이 귀를 의심했다.
‘하하. 비밀인데 당신도 이제 가족이 될 것이면 알아두어야 할 것 같아서요. 사실은…….’
‘미친… 그걸 인간이 만들었다고?’
처음에는 남편이 한 새로운 농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진지한 표정을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작정하고 파낸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저 투닥거리며 싸우다 보니 움푹 파인 자국에 불과하다는 것.
그 이후로 얼굴도 본 적 없는 도련님에 대한 궁금증은 점점 더 커져갔다. 그리고 그건 자신의 나이 다른 언니들도 비슷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서로 아는 것이 워낙 없었기에, 정확히 말하면 서로 아는 게 거기서 거기였기에 시원하게 해결된 것은 없이 궁금증만 커져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인 쿠크락샤와 드라고나의 셀린 경과 멀리서 수련을 하고 있었는데 저 멀리서 붉은 혜성 같은 것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자신과 쿠크락샤가 화들짝 놀라 남편을 걱정할 때 셀린 경은 화색에 가득 찬 표정으로 외쳤다.
‘왔구나!’
그러고는 무엇이 왔다고 말도 해주지 않은 채 혜성이 떨어지고 있는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자신과 쿠크락샤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그 뒤를 쫓았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착해서 놀라운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자신들이 궁금해하던 도련님이 5년 만에 도착했다는 것. 말 그대로 혜성처럼 말이다.
‘흠… 평범한데?’
첫인상을 그렇게 특별하지 않았다.
자신은 무슨 키는 3미터가 넘고 우락부락한 인상에 손에는 거대한 용의 뼈로 만든 해머 같은 것을 쥐고 있을 줄 알았다. 적어도 자신이 생각하기에 맨손으로 산맥을 때려 부술 사내라면 그런 이미지여야 했다.
하지만 지극히 평범했다. 오히려 보기만 하면 숨이 막힐 것 같은 시아버지나 강렬한 위압감을 가지는 자신의 남편에 비하면 너무나 평범한 외견. 이야기 듣던 것보다 체격이 좀 크긴 했지만 한창 성장기였으니 이해할 수 있는 변화였다.
그렇지만 과연 범상치는 않은 사람인가 보다. 자신을 보자마자 툭 던진 말에 자신은 너무나 놀랐다.
<혹시 리마이누라고 아십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설명. 이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한 사람의 설명과 정확히 일치했다.
리마이누, 본명 이만우.
자신들이 차를 타고 절벽으로 이동 중 떨어진, 하지만 찾아도 찾아도 어디 있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자신의 친동생의 이름을 듣고 이민아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러니까… 5년 전에 케르발에서 보셨다고요?”
“네. 그 이후로는 본 적이 없지만… 그때는 확실히 거기 있었습니다.”
“하… 살아있었구나.”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안도의 한숨을 짓던 베로니카는 순간 안색이 변했다.
“잠깐… 케르발이라면… 완전 폐허가 된 그 도시 말인가요?”
베로니카가 알기로 케르발은 자신이 이 세상에 도착하기 전 이미 완벽하게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곳은 현재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무지였는데 그곳에서 동생을 보았다니… 베로니카는 무언가 안 좋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요.”
“그 아이를 언제 보셨습니까?”
“음… 그게… 그곳이 가루가 되기 삼 일 전에…….”
“헉…….”
순간적으로 베로니카는 몸을 비틀거렸다. 엑서로서 강대한 정신력을 가진 그녀였지만 이 외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살아있을 혈육이 죽었을 수도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맨 정신을 유지할 정도는 아니었다.
차라리 살아있는 걸 몰랐다면 또 모르겠지만,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들은 소식이라 그 충격이 배가 되었다.
“부인, 괜찮으시오?”
“후… 아닙니다. 조금 놀라서…….”
“조금 들어가서 쉬도록 하거라. 앞으로 자주 볼 사이이니 오늘은 인사 정도만 하고.”
“맞습니다. 들어가십시오, 형수님.”
로만 백작이 이야기하고 시안도 거들었다. 딱 보아도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것이 충격이 커보였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이런… 다들 저렇게 정신력이 약해서야…….’
쿠크락샤가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베로니카를 보며 혀를 찼다.
‘그나저나… 그렇게 강하다는 말이야? 잘 모르겠는데…….’
벌써 코라-둠과 베로니카 둘을 무찌른 것을 보아 정신 공격에는 상당히 능숙한 듯 보였지만 겉으로는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물론 강하단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쿠크락샤가 궁금한 점은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도련님은 계속 그쪽에 계셨다면… 그라나인들은 어찌 된 건지 다들 알고 있나?”
아직 인간 문화에 적응이 덜 되었는지 요상한 표현을 써가면서 쿠크락샤가 한 질문.
모두가 궁금했기에 다들 시선을 집중했다.
강대한 종족이었던 그라나인. 그들이 하루아침에 모조리 사라진 것은 아직도 의견이 분분했다.
“음… 아마 몽땅 죽었을 겁니다.”
“그들이?”
“뭐… 전신이 가루가 되었는데 살아있지는 않겠지요.”
게다가 그들에게 불멸의 생을 공급해 주던 에너지원은 자신이 먹어치운 지 오래였다. 자신도 그런 경비병을 만들 수 있나 궁금하여 해보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허… 전신이 가루라니. 도대체 누가 평화롭게 살던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하하… 그러게요…….”
원래 자신이 그들을 물리쳤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려고 했는데 사람들 분위기를 보니 자신을 무슨 연쇄살인마로 여길 것 같은 분위기라 시안은 입을 다물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그 현장에 없었던 이들은 그라나인이 어떤 상태인지 전혀 몰랐을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크로나-폰을 스틸 양이 챙겼을지 모르겠군. 이제는 필요 없는데 그냥 스틸 양에게 주고 올 걸 그랬나…….’
그때 스틸 양이 탐내고 있었는데 그냥 주고 왔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이제 시안에게는 더 이상 필요 없는 물건이니.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다가 리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질문했다.
“그런데 시안… 네가 이상한 껍질과 싸우고 왔다는 것은 들었다. 네가 위험할 정도라면 굉장히 위험한 물질일 텐데… 그건 어떻게 된 거니? 네가 모조리 부숴버린 것이니?”
그 말을 들은 주위 사람들 모두가 시안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듣고 보니 그랬다. 초인인 시안을 위험하게 만들 정도의 껍질. 자세한 이야기까지야 듣지 못하였지만 그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굉장히 위험한 물질임에는 틀림없고, 그런 게 여전히 라그랑 지방 쪽에 남아있다면 안심할 수 없다.
여차하면 그 주위의 주민들과 그론-필라 전체를 들어내어 옮겨야 하는 상황.
하지만 시안은 여유 있게 웃었다.
“후후. 형, 걱정 안 해도 된다고.”
‘그리고 어차피 그 녀석을 다 먹어치우지 않고서는 나올 수도 없다고…….’
그 녀석을 자신이 먹어치우지 않았으면 애초에 아직까지 땅 아래 박혀 있을 것이다.
‘한번 보여줄까?’
시안은 이번에 자신이 얻은 것을 자랑하고 싶었다.
자신에게 크로나-폰을 쓸데없게 만들어 준 새로운 힘.
힘자랑이야 해도 다른 사람들에게 협박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테지만 이거라면 보여주기에도 좋고,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코라-둠 형수에게야 걸렸지만 다른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 할 것이다.
여전히 걱정스러워하는 사람들의 긴장도 풀어줄 겸 시안은 살짝만 보여주기로 했다.
“그건 내가 다 해결하고 왔어. 보여줄게. 다들 뒤로 조금만 물러나 주세요.”
의아해하는 사람들을 뒤로 잠깐 물린 시안은 식탁을 치우고 사람들의 중앙에 섰다.
이윽고 시안은 심호흡을 하고 힘을 끌어올렸다.
보여주기 위해 천천히 끌어올렸기에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시안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똑똑히 관찰할 수 있었다.
시안의 목 뒤쪽에 있던, 이제까지 아무도 보지 못했던 작은 비늘.
그 비늘이 빠른 속도로 불어나고 있었다.
너무나 작은 크기의 비늘이었기에 빠른 속도로 불어나도 몸을 덮는 데 시간이 걸렸지만 몸을 덮는 면적이 점점 더 넓어질수록 비늘이 몸을 덮는 속도도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이윽고 비늘이 목을 덮고 가슴을 타고 내려와 복부, 다리, 팔까지 덮었을 때 시안은 잠깐 전과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매끈한 붉은 피부. 분명 비늘로 덮였지만 비늘 하나하나의 크기가 워낙 작았기에 파충류의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붉은 금속이 피부를 빈틈없이 감싸고 있는 느낌.
몸 전체에는 기묘한 빛을 띠는 상아빛 판이 자라나 몸 전체를 보강하고 있었다. 붉은 금속이 체인 메일이라면 상아빛 판은 마치 풀플레이트처럼 붉은 비늘 위를 두껍게 덮고 있었다.
순식간에 사람이라기보다 중무장한 전투병기 같은 모습으로 변모한 시안을 보며 로만 백작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기… 시안, 그게 도대체 뭐니?”
“후후. 그 껍질 녀석을 먹어치우니 제 몸에서 자라나더군요.”
정확히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라났다.
엄청난 부피를 자랑했던 비늘은 압축되고 압축되어 자신의 몸을 뒤덮었다.
보기만 해도 튼튼했던 녀석의 뿔은 단단하게 뭉쳐지고 자그마한 씨앗처럼 변하더니 자신의 몸을 뒤덮은 비늘을 기반으로 한 번 더 자신의 몸을 덮었다. 마치 갑옷처럼.
‘흐흐흐흐…….’
시안은 사실 한 단계 더 벽을 넘은 본연의 힘보다도 이번에 얻은 이 갑옷이 더 마음에 들었다. 전투력을 증강시켜 준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지만 그보다는 너무나 멋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라나서 그런지 시안은 이 갑옷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시안은 몸을 덮은 비늘 사이로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곳에 남아있는 건 이제 아무것도 없으니 안심하셔도… 엉?”
“무슨 일이니? 시안? 헉!”
리안이 얕은 신음 소리를 내는 시안을 바라보는 방향을 바라보니 거기엔 쓰러져서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쿠크락샤가 보였다.
“이런! 무슨 일이오?”
“끄응… 으으…….”
몸을 떨며 계속 끙끙대는 쿠크락샤를 살핀 리안은 가벼운 혼절 증상만 있는 것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기에 쿠크락샤를 안고 서둘러 치료실로 옮겨갔다.
그런 리안을 따라 로만 백작과 어머니인 셀린느도 따라 들어갔고 응접실에는 셀린과 시안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이야! 시안, 대단하다.”
“…….”
“첫 대면식날 형수 세 명을 혼절시킨 사람은 아마 너밖에 없을 거야.”
“…….”
시안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떠올리고 있다가 셀린의 말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6권에서 계속>
6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