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단서>
쿠크락샤는 처음 시안이 무언가를 보여주겠다고 했을 때 흥미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대단한 강자는 결코 아무것이나 자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표정을 보아하니 자신의 도련님이라는 자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이제부터 보여줄 물건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뜻.
‘전설 속에 나오는 일곱 행성의 대갑주인가? 아니면 전쟁신의 창?’
항상 자신이 어릴 적부터 가지고 싶어 했지만 그 흔적도 찾을 수 없었던 대보구를 오늘 구경하게 되나 하는 생각에 쿠크락샤는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변화는 자신이 전혀 예상치 못 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동시에 어릴 적의 기억이 떠올랐다.
선조 때부터 전해 내려온, 수천 년도 더 전에 살던 놀라운 괴물의 이야기.
<우리 종족은 예전에 하늘산맥 쪽에 자리를 잡고 살았단다. 하지만 어느 순간… 미친 괴물이 나타나 우리 종족을 모조리 몰아내고 그 넓은 하늘산맥을 몽땅 차지했지. 그때 이후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하늘산맥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더구나. 그 괴물은 더 깊숙한 곳으로 사라진 것 같지만… 들어가기만 해도 너무나 무서운 기운이 느껴진단다. 인간들은 조금 둔해서 잘 못 느끼는 모양이지만… 우리 같은 수인이나 하리쟌들은 그 산맥에 결코 발을 들여놓지 못 하지.>
그 이야기를 들은 쿠크락샤는 어린 시절 치기로 반항심에 가득 차 인간들의 왕국을 가로질러 하늘산맥에 발을 디뎠다. 강대한 타르강 부족의 선조들이 겁에 질려 있는 것이 너무나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다.
자신이 나서서 이 역사를 바꾸고 싶었다. 그리고 예전 자신들이 살던 대지를 되찾고 싶었다.
하지만 하늘산맥에 한 발 들여놓는 순간 아버지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또 왜 선조들이 이 땅에 발을 들여놓지 못 했는지도.
발을 들여놓는 순간, 자신을 찢어먹을 듯한 흉포한 기운이 사방에서 느껴졌다.
단순한 반데르나 기세를 통한 느낌이 아닌, 선조 때부터 물려받은 포식자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
<으아아악!>
어떻게 그 안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쿠크락샤는 미친 듯이 안쪽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하늘산맥 근처로는 한 발자국도 가지 않았다.
다시는 그런 기운을 느끼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그 기운을 느끼게 되었다.
그것도 도련님이라는 자에게서!
다른 자들은 아무도 느끼지 못 하는 모양이지만 자신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더불어 알 수 있었다. 진실을 보는 코라-둠이 무엇을 보고 기절초풍했는지도.
“으으… 끄윽…….”
어린 시절의 그때와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련을 통해 자신의 이마에도 다섯 개의 줄무늬가 생겼으니까. 다섯 개의 줄무늬면 수인족들도 한 명의 전사로 인정을 해 준다. 하늘산맥을 찾아 간 애송이 시절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렇기에 도련님이란 자의 변화와 함께 흘러나오기 시작한 기운을 느끼면서도 도망가지 않았다. 그게 엄청난 실수였다.
붉은 비늘이 목을 타고 올라오는 순간 성 바깥으로 도망가야 했다.
후회가 시작되었을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전신에 힘이 풀려 도망도 칠 수 없었다.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은 공포와 함께 쿠크락샤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끄응…….”
“동생, 정신이 들어요?”
“언니, 괜찮아요?”
쿠크락샤가 눈을 뜨자 주위에는 코라둠과 베로니카가 서 있었다.
“후. 괜찮아. 걱정해줘서 고마워. 동생이랑 언니는 다들 괜찮고?”
“저는 괜찮아요.”
“저도요.”
비록 순서에서는 두 번째였지만 이 중 나이가 가장 많았기에 쿠크락샤는 서로 기묘한 존대와 존칭을 섞어 쓰는 주위의 어린 친구들을 안심시키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후…….”
셋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셋 다 정신적인 충격이 컸는지 쉽게 회복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베로니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두 분은 무슨 일로… 그러신 건가요?”
자신이야 동생을 잃은 충격 때문에 그렇다지만 다른 언니 둘은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첫째 언니는 도련님을 보자마자 쓰러졌고, 둘째 언니는 들어보니 도련님이 무엇을 보여주자마자 쓰러졌다고 했다.
자신은 도련님에게서 전혀 특이한 점을 느낄 수 없었기에 베로니카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그 말에 둘은 자신이 느낀 것을 최대한 자세하게 풀어 베로니카에게 설명해 주었다. 베로니카는 아직 인간이니 아무것도 모를 테지만 자신들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그 이야기를 다 들은 베로니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보았다.
“언니들… 괜찮으시겠어요?”
“음? 뭐가?”
“도련님이라는 분이… 계속 이곳에서 사신다면…….”
그러자 코라-둠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평소에는 안 느껴지니 괜찮지 않을까요? 보아하니 그 갑옷이라는 것도 꺼내지만 않으면 둘째 동생도 괜찮은 것 같고… 저도 깊숙이 들여다보려고 하지만 않으면 별문제 없어요.”
“끄응… 맞아. 그 요상한 변신만 안 하면… 나도 딱히…….”
하지만 베로니카가 걱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게 아니라… 정말 괜찮으세요? 그렇게 무서운 분이 옆에 같이 살아도?”
“음…….”
그 말에 코라둠과 쿠크락샤 모두 침음성을 흘렸다.
이성적으로는 결코 위험하지 않을 것을 안다. 도련님이란 분은 자신의 형을 끔찍하게 아낀다고 하였고 그렇다면 자신들도 아껴줄 것이다. 그리고 만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흉폭해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직 어린아이 같은 느낌이 남아있다고나 할까.
그리고 자신들을 위협할 만한 기세나 기운도 전혀 풍겨 나오지 않았다. 모조리 안쪽으로 갈무리되어 있었기에 자신들이 무리만 하지 않으면 아마 자신들이 보고 느꼈던 것들을 다시 느끼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공포는 결코 이성으로 컨트롤되는 것이 아니다.
터지지 않는 것을 알아도 폭탄은 무섭고 배부르고 졸린 사자라도 곁에 사자가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베로니카라면 몰라도 이미 한 번 도련님의 본질을 보게 된 코라-둠과 쿠크락샤는 그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후… 그렇다고 도련님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 아마 익숙해질 거예요.”
아무 죄도 없는 도련님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수도 없기에 코라-둠이 한숨을 쉬며 말했고 쿠크락샤도 옆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 ☆ ☆
시안이 도착하고 빠르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동안 시안이 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동안 갇혀 있던 5년을 맹렬하게 보상받으려는 듯 굉장히 격렬하게 뒹굴거렸다.
한 가지 차이라면 시안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
예전에는 주변 사람들 모두가 로만가에서 개망나니가 나왔다고 경멸의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시안의 요란한 도착을 지켜본 라빌란의 거주민들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강자의 여유 그 자체로 비춰졌던 것.
그렇기에 내성의 성벽 사이에 거대한 해먹을 치고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시안을 무장들은 훈련 중에 존경의 시선으로 쳐다보고는 했다.
시안은 과일을 베어 물며 이런 현실이 신기하다는 듯 내뱉었다.
“이래서 세상이 재미있다고 하는군요. 저는 변한 게 단 하나도 없는데 말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형수님?”
“후후. 원래 무슨 행동을 하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랍니다. 어떤 사람이 했는가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이지요.”
옆에서 베로니카가 시안을 바라보며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형수님은 훈련 안 합니까?”
아래서 열심히 훈련을 하고 있는 리안과 쿠크락샤, 셀린을 보며 시안이 물었다.
“뭐, 제 능력이 훈련을 해도 강해지지만… 위기를 겪을수록 더 빠르게 개발이 돼요. 그런데 남편도 그렇고 저한테 손쓰는 것을 주저해서… 더는 개발이 안 되더라고요. 그냥 혼자서 차근차근 연습하고 있어요.”
“위기라… 저랑 공통점이 있으시군요.”
시안은 자신의 특성을 떠올리며 베로니카의 말을 받았다.
“후우. 그나저나 어서 소식을 듣고 싶은데… 동생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어 큰일이네요.”
“허… 나라샤 그 아저씨가 부탁했는데도 아직입니까?”
시안은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때 그 리마이누라는 친구는 그렇게 엄청난 고위급 인사 같지는 않았다. 고위급 인사라면 그렇게 암시장에서 발품을 뛰고 있었을 리 없으니.
시체가 되었다면 모르겠지만 분명 케르발이 무너지기 전 근처 도시의 라-샤르-로아를 타고 이동한 기록이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결코 티안 왕국 정보부의 눈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나라샤 국왕은 항상 정보야말로 가장 강대한 힘이라는 것을 항상 강조했으니까. 그런 나라샤 국왕의 사상이 반영된 티안 왕국의 정보부에는 한 해 엄청난 예산이 들어가지만 그 예산 이상의 능력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도적 길드나 정보길드 같은 허접쓰레기 같은 것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
그렇기에 시안은 스틸의 행적을 조사해달라는 자신의 부탁은 몰라도 리마이누라는 자의 행적을 찾는 것은 순식간에 가능할 줄 알았다.
하지만 2주가 지난 지금까지 그 행적을 찾지 못한 것은 이상했다.
“네. 아직 추적 중인가 봐요. 도련님은 그 스틸… 이라는 분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나요?”
“흐음… 그러게요. 이것도 좀 이상하군요.”
시안은 좀 유치하지만 나라샤 아저씨에게 자신이 돌아왔다는 소문을 흘려달라고 했다. 실종되었던 로만가의 2공자가 돌아온 기념으로 로만가에서 조촐하게 연회를 주최한다고.
초인의 행적은 일반인이 쫓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시안은 자신이 돌아온 것을 알려 스틸 양이 스스로 오도록 하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지지부진했다. 이 말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스틸 양이 찾아올 수 없는 상황이거나, 혹은 스틸 양이 찾아올 생각이 없는 경우이거나.
첫 번째보다는 두 번째의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스틸 양이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는 건 상상이 가지 않았으니.
하지만 두 번째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초인이 자기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한다지만 같은 초인을 상대로 할 때는 어느 정도 선을 지킨다. 자신과 연을 끊을 생각이었다면 자신의 가족들을 배려해주고 떠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정말 무슨 일이 생겼나…….’
시안은 이해가 안 가는 상황에 대해 머리를 굴리다가 이게 의미 없음을 깨달았다. 아는 게 너무 없으니 머리를 굴려 봤자 결론이 나지 않는 것이다.
시안은 결정을 내렸다.
라빌란에서 벌어지는 조촐한 연회 때까지 스틸 양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자신이 찾아 나서기로.
형이 목에 걸고 있는 언약의 목걸이를 발동시켜 보았지만 고장이 난 건지 거부하는 것인지 귀환 기능이 작동하지 않았다.
‘설마… 크로나-폰이랑 니츠마탄을 먹고 튄 건 아니겠지…….’
절대로 스틸 양이 가지고 있는 아티팩트들을 되찾아야 돼서 그런 건 아니었다.
시안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해먹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회까지 남은 시간은 1주. 그때까지 오지 않으면 스틸 양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 전에 더 격렬하게 쉬어두어야 한다.
그리고 누워서 해먹을 흔들기 시작한 시안을 못 말리겠다는 눈으로 쳐다본 베로니카는 수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남편을 맞이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한 남자가 손에 어떤 편지를 들고 웃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편지가 아니었다. 티안의 고위귀족들에게 배포되는 연회의 초청장.
“허허. 오 년간 아무리 찾아도 없다가 이제야 나왔네. 어디 박혀 있었던 거야.”
그리고 편지를 읽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후. 로만가의 2공자의 귀환 연회라…….”
파레온은 나라샤 국왕에게서 온 초대장을 보며 웃었다. 그때의 기억이 생각나서이다.
처음 시안이라는 자가 실종되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무슨 정치적인 수작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자가 위기에 처한다는 것이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신경을 껐다. 어차피 그자가 있건 없건 자신과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 지금은 세력을 불릴 때였다.
흔히들 하는 말 중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으란 말이 있다.
지금은 물이 들어오는 수준이 아닌, 홍수가 나는 수준이었다.
티안은 강대한 힘을 갖추어 주변 왕국들에 대해 갑의 위치를 확보했고 폭발적인 성장세에 들어가 신진 세력들에게도 엄청난 기회를 제공했다.
로가디스 지방을 모조리 통합하고 내실을 다지며 도약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파레온에게는 절호의 기회. 게다가 이런 상황이면 먼저 주워 먹는 것이 임자다. 굳이 영지전이 아니더라도 무역과 정치를 통해 세력을 확장할 수 있다.
이제 영지전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시기는 갔다. 그런 짓을 하다가는 당장에 마스터들이 자신들의 영지를 썰어버리겠다고 달려들 것이다. 쿨란 기사단의 무력이 상당히 강해졌고 반더들과 일반병의 수준과 규모도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여전히 절대강자의 수는 부족했다. 방어야 할 수 있지만 무력만 믿고 다른 영지를 침범하기는 힘들었다.
비록 셀라인 백작을 비롯한 다른 영지들도 만만치 않아 독식을 할 수는 없었지만 10년 전 영지와는 비교도 불가능한 크기로 성장을 이루어 내며 명실상부 티안을 움직이는 대귀족의 반열로 올라섰다.
그렇기에 이번 연회는 큰 의미가 있었다. 안 그래도 예전, 왕권 이양전 후 거대 귀족들이 모일 만한 연회가 없기는 했다.
이번 기회에 인사나 하고 서로를 살펴두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게다가 이번에는 자신의 영지를 떠나 북쪽에서 무기 개발에 치중하고 있던 라카-둠 님도 참석한다고 한다. 오랜만에 딸을 보러 온다고 하니 이번 기회에 인사를 하고 안부를 하면 좋으리라.
간 김에 시안이라는 자도 좀 만나보고 말이다.
‘오랜만이라 기억을 하려나… 그것도 모르겠군…….’
자신도 나중에야 알았다. 자신들의 영지를 방문한 시안이 로만가의 2공자라는 것을.
자신에게는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지만 그자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었기에 파레온은 쓴웃음을 지었다.
☆ ☆ ☆
“라카-둠 님, 떠나십니까?”
“그래. 오랜만에 딸아이나 한번 보고 오려고.”
북쪽, 티안의 방벽에서 하리쟌에 대한 방어를 책임지고 있는 칼-티안이 무기 개발 총책임자, 라카-둠을 보며 물었다.
어디서 얻었는지 모르는, 무기에 대한 놀라운 지식과 드콘족 특유의 재능을 결합하여 티안의 북쪽 경계를 지키는 데 큰 공헌을 한 병기 개발자, 라카-둠.
그가 개발한 걸작, ‘가이라’는 지금도 일선에 보급되어 하리쟌을 제압하는 데 혁신적인 공을 세우고 있었다. 쿨라렌의 명중률과 파괴력을 혁신적으로 개선한 걸작. 덕분에 움직임이 빠르고 단단한 갑주를 가진 하리쟌들도 성공적으로 제압할 수 있었다.
그 위력이 어찌나 대단한지 네 개의 뿔 이하의 하리쟌들에게까지 피해를 입힐 수 있을 정도였다. 다섯 개의 뿔에게까지는 무리지만 그 정도만 해도 엄청났기에 라카-둠은 현재 무기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현재 티안의 국경은 북쪽의 하리쟌을 잡아서 나온 탈릭 스톤을 이용하여 쿨라렌을 가이라로 교체하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쓸 곳이 없어진 쿨라렌은 전쟁 중인 우샤란과 타란에 골고루 팔아버리고 그 대가로 탈릭 스톤을 받아 또 가이라를 만드는 작업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라카-둠의 손에는 그런 가이라를 소형화한 특제품이 두 자루 들려있었다.
소형화하였기에 위력은 다소 줄어들었지만 제대로만 맞추면 마스터조차 불구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괴물 같은 무기. 비록 들어가는 제작비가 너무 비쌌기에 라카-둠도 두 자루밖에 제조하지 못한 걸작 중의 걸작인데 그걸 이번에 들고 가는 것이다.
“그건 따님의 호신무기로 선물하려는 것입니까?”
“그렇지. 똑똑한 아이지만 무력은 없으니 영 불안해서……. 그리고… 개인적으로 사용할 일도 있고 말이지. 빠드득!”
그 말을 하며 라카-둠은 이를 갈았다. 그리고 그걸 보며 칼-티안이 불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걸 설마 사람에게 쏘실 생각은 아니겠지요?”
“그럼, 사람에게 쏠 생각은 없지. 부인을 두고 새 부인을 둘이나 더 들인 짐승 새끼한테 쏠 생각이니 말이야.”
“…하아…….”
“빠드득… 그 자식이 내 딸을 데려가겠다고 했을 때 이 개량형 가이라만 완성되어 있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죽여버릴 수 있었을 텐데…….”
칼-티안은 한숨을 쉬었다. 남의 연회에 가면서 연회 주인공의 형을 쏴버릴 생각을 하고 있다니. 칼-티안은 농담이겠거니 하고 더 말하는 것을 포기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라카-둠 님도 설마 진심은 아닐 것이다.
안타깝게도 칼-티안은 예전 리안이 결혼 허락을 받으려고 라카-둠을 찾아왔을 때 실제로 라카-둠이 눈이 돌아가 리안을 향해 개발 중이던 소형 가이라를 쏴 버린 것을 알지 못 하고 있었다. 그때 가이라의 개량이 끝났었다면 리안은 정말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문득 궁금한 점이 생각난 칼-티안은 라카-둠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이번 연회의 주인공은 시안 폰 로만 경에 대해서는 알고 계십니까?”
“아니?”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냐는 표정으로 대답하는 라카-둠을 보며 칼-티안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연회에 참가하러 가시는데 누군지 정도는 아셔야…….”
“아, 몰라… 인간 애송이 따위. 들어보니 고작 스물둘이라며. 내가 그런 녀석까지 신경 써야 해? 게다가 산맥 무너질 때 실종되었을 정도면 허접하겠구먼.”
“…….”
뭔가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분노에 들어찬 라카-둠에게는 안 들릴 것 같기에 칼-티안은 이만 배웅해주기로 결정했다.
“알겠습니다, 라카-둠 님. 잘 다녀오시고 몸조심하십시오. 이곳은 저희가 지키고 있겠습니다.”
“그래그래, 다녀올 동안 잘 지키고 있으라고. 아래 애송이들 닦달해서 기본적인 건 몽땅 숙지시켜 놨으니 문제 생기면 우선 그녀석들 들볶고, 그래도 안 되면 나에게 연락해.”
“알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겠지…….’
길을 떠나는 라카-둠의 뒷모습이 왠지 모르게 불안했지만 칼-티안은 신경을 끄기로 했다.
로만가의 보호 아래서 개최되는 연회는 그 어떤 연회보다도 안전할 테니.
☆ ☆ ☆
“흐음… 생각보다 연회의 규모가 상당하군요. 내일부터였지요?”
시안은 라빌란의 내성에서 진행되고 있는 연회 준비 광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이번 연회의 목표는 스틸 양에게 자신의 귀환을 알리는 것이기 때문에 크게 할 필요는 없었는데 생각보다 상당한 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후후. 최근에 축하할 일이 별로 없었거든. 그리고 실종되었던 로만가의 2공자의 귀환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그렇게 큰 규모는 아니라고.”
옆에서 셀린이 맞받았다.
티안에서 로만가가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하면 이 정도의 규모는 결코 크다고 할 수 없었다. 게다가 한창 성장 중인 티안을 괴롭히려고 드는 타국들과 하리쟌에 대한 반감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티안을 지키는 수호무장 가문인 로만가의 경사는 국민들에게도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그걸 알기에 나라샤 국왕도 시안의 부탁도 들어줄 겸 고위 귀족들에게 초대장을 쭈욱 돌리고 한편으로는 백성들의 사기를 진작시킬 축제를 준비했다. 큰 규모는 아니더라도 사람들의 기분을 풀어주는 데는 분명 효과적일 것이다.
“음… 조용조용하게 갔으면 좋겠는데…….”
“후후. 초대장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가지 않았어. 아마 내성에서 벌어지는 연회에는 소수만 참석하게 될 거야. 이미 많이들 도착했을걸.”
실제로 내성에서는 도착하는 귀족들을 위한 숙소를 확보하고 배치하는 데 신경을 쓰고 있었다. 모두가 고만고만한 가문들이 아니다 보니 세심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써야 했다. 물론 시안은 신경 쓰지 않았지만.
“뭐, 그렇다면 괜찮겠지요. 그나저나 셋째 형수님은 좀 괜찮은지요?”
셋째 형수님은 나라샤 아저씨가 열심히 찾고 있음에도 라-샤르-로아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소식을 찾을 수가 없자 상당히 마음이 조급해진 상태였다.
“음… 베로니카 양이 마음이 급하긴 한 모양인데… 너무 힌트가 없으니… 지금 찾으러 나가려고 당장 뛰쳐나가려는 것을 다들 뜯어말리고 있어.”
“허… 그것참.”
“아마 지금도 말리고 있을걸. 애초에 베로니카 양 혼자 돌아다니기에는 너무 위험하기도 하고 말이야.”
베로니카가 리안을 만나 안식을 얻기 전까지 결코 편한 여정을 거쳐 온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목숨의 위협을 겪어야 했다. 베로니카 정도의 이국적인 미모는 모두가 탐낼 만한 수준이었으니까.
게다가 무력이 없었기에 능력이 뛰어나도 위기를 헤쳐 나가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뭐… 나라샤 그 아저씨가 노력하고 있으니 결과가 나오겠지요. 그나저나… 손님 중에 제가 아는 사람들도 있군요.”
“음? 어떻게 알아?”
“라-샤르-로아에서 기억하고 있는 파장이 나왔거든요.”
그 말을 들은 셀린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셀라인 백작령의 서쪽에 라-샤르-로아가 위치하고 있다고 해도 거기서부터의 파동을 이곳, 라빌란에서 느끼다니.
“그게 느껴져?”
“뭐… 라-샤르-로아가 작동할 때 발동하는 에너지는 작은 수준이 아니니까요. 나라샤 아저씨 정도의 파동이 작은 것도 아니고…….”
“헉… 폐하도 오시는구나.”
“그러게요. 소문에 의하면 일에 파묻혀 있다고 하시더니 그 정도는 아니었나 봅니다… 음?”
시안은 하품을 하며 불경죄에 해당하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더니 어느 순간 무언가를 느꼈는지 해먹에서 일어나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어? 시안, 무슨 일이야?”
“잠시만요. 허허. 이게 무슨 일이지.”
시안은 허허로운 웃음을 내뱉으며 해먹 바깥으로 풀쩍 뛰어내렸고 이윽고 땅을 박차며 내성 어딘가로 날아가버렸다.
그리고 셀린은 그런 시안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졸지에 대화상대를 잃어버린 셀린은 시안이 떠나고 허공에서 흔들거리고 있는 해먹을 바라보았다.
“음… 저게 그렇게 편한가?”
시안은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저 해먹을 떠난 적이 거의 없었다. 아니, 하루 종일 저 해먹 위에 있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리라.
가족들과 식사를 하며 대화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시안이 누워 있는 해먹을 빤히 바라보던 셀린은 조심스럽게 시안이 올라가 있던 해먹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 위에 누워서 천천히 좌우로 몸을 흔들어 보았다.
“흠… 흠… 편하긴 하네.”
그러고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시안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아마 문제가 해결되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 아이는 해먹을 떠나있는 시간이 별로 없으니.
☆ ☆ ☆
라카-둠은 셀라인 백작령의 라-샤르-로아를 통과하자마자 자신의 아공간에서 자신이 개발한 이동수단을 꺼냈다.
자신의 무기 개발에 필요한 각종 공구 및 재료들을 넣어 두는 2급 아공간은 가로세로, 높이 10미터에 가까운 저장 용량을 자랑하기에 자신 혼자 탈 1인용 이동수단 정도를 넣고 다니는 데에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자신이 개발한 것이기에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은 이 이륜구동 아티팩트는 효율적으로 잘 만들어져 있어 사용자의 반데르나 탈릭 스톤으로 이동이 가능하다. 예전에 자신이 만났던 어떤 법도사의 제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제작했는데 처음에는 자신도 확신이 없었지만 만들어 놓으니 그 효율성이 놀라워 자주 이용하고 있었다.
자신은 반데르를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으니 탈릭 스톤을 이용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판단한 라카-둠은 아공간에서 작은 초록색 탈릭 스톤을 꺼내 구동부에 집어넣었다. 초록색 탈릭 스톤은 결코 싼 가격은 아니지만 한번 넣어두면 1년은 족히 가동할 수 있기에 마차 탑승 가격이나 시간 등을 계산해 보면 손해 보는 장사는 결코 아니었다.
부르르릉.
요상한 시동음을 내며 움직이기 시작한 2륜구동 아티팩트에 올라탄 라카-둠은 허리춤에 찬 가이라를 쓰다듬으며 핸들을 잡았다.
“후우… 기다려라.”
라카-둠은 딸에게 하는 소리인지 사위에게 하는 소리인지 모를 한 마디를 내뱉으며 시동을 걸었다.
그러고는 탈릭 스톤을 바탕으로 맹렬한 배기음을 내뿜기 시작한 2륜구동 아티팩트는 맹렬한 소음을 내며 라빌란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 이동수단을 타고 가면 마차로는 열흘 가까이 걸리는 라빌란까지 넉넉잡아 하루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 ☆ ☆
“안녕하십니까. 신원 조회를 하겠습니다. 신분패를 제시해 주십시오.”
정문을 지키는 위사들은 몰려드는 고위귀족들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헉… 북부의 호랑이, 레바단 경이다.’
‘셀라인 백작까지…….’
로만가가 주최하는 파티이니 와서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고위 귀족들의 생각이고 이를 접대하고 있는 위사들은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던 도중 멀리서 굉음을 내며 이상한 물체가 달려왔다.
그 순간 당황하고 있던 위사들의 눈빛이 일순간에 바뀌었다.
“비상! 이상 물체 접근!”
“3급 경보 울려라!”
“이쪽으로 대피하십시오!”
성문의 고위귀족들과 백성들을 차례대로 대피시킨 병사들은 엄청난 속도로 성문 근처에 밀집 대형을 쌓기 시작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성문 담당 기사 그레고리는 저 멀리 다가오는 물체를 안력을 돋워 살폈다.
‘음… 뭐지… 말도 아니고…….’
말치고는 너무 빨랐고 하리쟌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작은 괴상한 물체.
이럴 때 대처방법은 정해져 있다. 이미 포격을 가하기에는 너무 가까워 졌다.
“전 대원 투척 병기 준비!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 곧바로 발사한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전 대원들이 무섭게 소지하고 있던 개인용 투척병기를 준비했다.
이윽고 점점 더 그 물체가 가까워졌다.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을 때 갑자기 그 괴상한 물체는 투척무기 사정거리의 바깥에서 바로 정지했다.
“……?”
병사들이 당황하고 있을 때 괴상한 물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한 인영이 흙먼지를 헤치며 걸어 나왔다.
그레고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애쓰고 있을 때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라카-둠 님도 참 여전하시군.”
‘라카-둠?’
그레고리가 목소리의 근원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그 옆에는 로가디스 지방을 통합하고 새로운 패자로 떠오른 젊은 맹자, 파레온 백작이 서 있었다.
“아시는 분이십니까?”
신원 파악이 안 될 경우 가장 좋은 방법은 확실한 신원 보증인이다. 그리고 파레온 백작이라면 그 자격이 충분하다.
“네, 그렇습니다. 제가 신원 보증인이 되지요. 저분은 제가 아는 분입니다.”
“어이! 애… 영주! 오랜만이야!”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라카-둠의 목소리에 파레온은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오랜만입니다, 라카-둠 님. 그나저나 조심하십시오. 조금만 더 다가왔으면 투척 병기에 맞으셨을 겁니다.”
그러자 라카-둠이 콧방귀를 끼었다.
“내가 만든 투척 병기 사정거리를 내가 모르겠냐? 다 알고 거기서 딱 멈춘 거라고.”
‘어쩐지…….’
그레고리는 의문점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너무나 절묘한 거리에서 정지하기에 의아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사정거리를 알고 있었던 것.
“그나저나… 신원 보증은 제가 했으니 들어가시지요. 따님을 보러 오신 것이지요?”
“후후. 그렇지. 저번에 날 보러 왔지만 기회 될 때마다 자주 봐야지. 이런 기회 아니면 언제 보겠어.”
로만가의 대공자, 리안 폰 로만의 결혼은 티안 전역에 알려졌다. 그리고 그 대상이 자신이 가르치던 소녀, 게다가 드콘족이라는 것은 화제가 되기에 충분한 소재였다.
파레온은 라카-둠과 친했기에 그 화려한 결혼식 뒤의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걱정이 앞섰다.
“…이번에는 뭘 쏘시면 안 됩니다. 로만 백작님이 열 받으면 어쩌시려고요.”
그때도 리안이 가이라의 포격을 튕겨냈기에 망정이지, 큰 상처라도 입었으면 정말 큰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다.
“죽지는 않을걸. 로만 백작은 애송이 네가 좀 막아 봐.”
“…그랑-반더를요? 제 몸으로 막고 제가 토막 나면 한 칼 정도는 멈춰 주시긴 하겠군요. 두 번째 칼은 라카-둠 님이 맞으시겠지만요.”
같은 백작이라지만 차원이 달랐다. 로만 백작가는 원래는 공작가여도 모자랐다. 단지 필요가 없으니 그저 백작가에 머물러 있을 뿐.
자신이 아무리 백작이고 세력이 강성하다지만 로만 백작이 한번 해보겠다고 사람을 모으고 달려들면 자신의 영지는 한 달도 안 걸려 10년 전으로 후퇴할 것이다.
어쩌면 사람을 모을 필요도 없을지 몰랐다. 로만 백작 혼자 달려들어도 충분할 수도.
그 정도로 그랑-반더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에잉. 알겠어.”
“…믿겠습니다.”
워낙 다혈질인 라카-둠이라 어떤 사고를 칠지 몰랐기에 파레온은 자신이 동행하며 미리미리 제어하기로 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라카-둠이 이상한 걸 가져와서 리안 경에게 쏘기라도 하면 대참사다.
“빠드득… 빠드득…….”
“…….”
‘이런…….’
파레온은 저 멀리 보이는 리안 경을 터질 듯한 얼굴로 노려보는 라카-둠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나라도 열 받기는 하겠다.’
일부다처제가 어느 정도 허용되는 인간사회와는 달리 라카-둠과 코라-둠이 속해 있는 드콘족은 일부일처제가 주를 이룬다.
아무리 서로 동의하에 결혼을 했다지만 애지중지 키운 딸을 열넷에 덥석 집어가 버린 사위가 옆에 새로운 부인 둘을 끼고 있으면 열이 안 받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 증거로 라카-둠은 예전보다 더 열이 받은 표정으로 자신의 옆에서 손목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목에 라카-둠 님의 아공간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을 아는 파레온은 도대체 저기서 무엇이 튀어나올지가 두려울 따름이었다.
“라카-둠 님.”
“알아, 애송아.”
“…지금 옆에 로만 백작님이 있나 없나 살피고 계시지 않습니까.”
“…쳇.”
라카-둠을 보며 한숨짓던 파레온은 저 멀리서 리안이 라카-둠 님과 자신을 발견하고 이곳으로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세 명의 부인이 붙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다른 두 명의 부인은 이쪽을 보더니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는 것.
이윽고 리안과 코라-둠, 둘만이 파레온과 라카-둠의 앞에 도착했다.
리안은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며 라카-둠에게 인사를 했다.
“장인어른, 여기까지 무사히 도착하셔서 다행입니다. 어떻게… 불편하신 점은 없으십니까?”
“…….”
“아빠.”
코라-둠이 재촉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하자 라카-둠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불편한 거라… 딱 하나 있지.”
“…….”
리안은 그 불편한 점이 무엇인지 잘 알았기에 쓴웃음만 짓고 있었다.
“네 녀석… 그때 내 딸 데리고 가면서 뭐라고 했었지?”
“그때…….”
리안이 입을 열기도 전에 라카-둠이 먼저 말을 열었다.
“분명 우리 딸을 최고로 아끼고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었나?”
“아빠…….”
“넌 조용히 해라. 그런데 셋이라니… 사랑이 아주 넘치는가 보구나? 셋에게 분산 투자를 해도 수익이 남을 정도로 말이야.”
“…….”
리안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기에 가만히 있었다.
분명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정도는 아니었다. 로만가의 대공자라면 부인이 열이 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강자가 많은 것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시대이고, 로만가의 대공자라면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다.
강제로 맺은 관계도 아니었다. 처음에는 넷 모두 서먹서먹했지만 지금은 상황을 인정하고 서로를 챙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할 말은 없다. 자신은 딸이 없지만 딸이 있다면 분명 저런 느낌이 들 테니까.
“죄송합니다, 장인어른.”
“후우… 됐다, 됐어. 코라야, 넌 잠깐 이리 와 봐라. 그리고 파레온 너도.”
“장인어른?”
“넌 잠깐 거기 있어 봐. 셋이서 할 말이 있으니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파레온과 코라-둠은 라카-둠의 뒤를 따라갔다.
“라카-둠 님, 할 이야기라는 것이…….”
“아빠, 셋이 할 이야기가 뭐가 있다는 거예요?”
“흠. 좋아,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의미 불명의 소리를 중얼거리는 라카-둠을 본 파레온은 불안한 표정으로 라카-둠의 얼굴을 살폈다.
‘…이런!’
라카-둠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이성이 나갈 만큼 나갔다는 소리.
하지만 파레온이 말릴 새도 없었다.
라카-둠은 파레온과 코라-둠이 말릴 새도 없이 오른손으로 재빠르게 목을 훑었다.
잠시 붉은빛이 번쩍이더니 라카-둠의 손에는 기다란 지팡이 모양의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라카-둠이 자랑하는 걸작, 가이라를 기반으로 예전에 만난 법도사 녀석에게 영감을 얻어 소형화시킨 데 성공한 특제품이었다.
“안 됩니다!”
파레온이 외치는 순간 라카-둠은 손에 들린 물체를 들고 리안에게 돌린 뒤 그대로 무언가를 손가락에 걸고 당겼다.
쿠아앙!
지팡이만 한 얄팍한 물체에서 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굉음과 빛이 라카-둠을 중심으로 뻗어 나왔다.
하지만 그 굉음은 포격의 방향에 서 있던 리안에게서 울려 퍼진 굉음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리안이 서 있던 방향은 엄청난 흙먼지를 날리며 폭발했고 이를 본 파레온은 기겁을 했다.
“무슨 짓이십니까! 이 뒷감당을 어떻게 하시려고!”
“시끄러, 애송아. 어깨를 노리고 쐈으니까 괜찮아… 그나저나 이상한데.”
“당연히 이상하지요! 어깨면 괜찮습니까? 이게 지금 무슨…….”
하지만 라카-둠의 의문은 다른 데 있었다.
‘웬 흙먼지가……?’
자신이 만든 소형 가이라는 발사 시에는 엄청난 굉음이 발생되지만 포격과 달리 탄환에 극한의 에너지를 응축시켰기에 광범위한 파괴를 불러오지 않는다. 애초에 가이라와는 달리 대하리쟌용이 아닌 대인용 무기로 제작한 것이니 파괴 범위가 클 이유가 없다.
제작 초점은 오직 엄청난 관통력과 목표를 맞히기 위한 속도에 맞추어져 있다. 즉, 저렇게 엄청난 흙먼지를 뿜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곧 그 이유가 밝혀졌다. 흙먼지의 속에서 번뜩이는 붉은 안광이 보였기 때문이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흙먼지는 저 붉은 안광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파레온이 의문스런 표정을 지을 때 라카-둠은 숨이 넘어가기 일보직전이었다. 흙먼지 속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커억… 허흑…….”
“빠드득… 미친 영감탱이가… 이딴 걸 형한테 갈겨?”
순식간에 날아와 굉음을 내며 착지한 시안이 형을 향해 날아오던 탄환을 잡아챈 채 흙먼지를 헤치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
“…….”
현재 리안과 코라-둠은 내성에 마련된 응접실에 앉아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 외에 둘이 더 있었다.
리안은 불편한 상태로 앉아 있는 라카-둠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장인어른, 괜찮으십니까?”
“끄으… 괜찮네. 다친 데도 없는데.”
시안의 주먹이 맹렬하게 날아들기 전, 리안이 시안을 부둥켜 앉고 말렸기에 유혈사태는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괜찮다는 말과 달리 라카-둠의 상태는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옆에서 무언가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라카-둠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는 시안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시안의 내면에 있는 ‘무언가’가 자신을 계속 노려보고 있어 라카-둠은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다. 그 강대하면서도 흉폭한 눈동자의 시선을 느끼고 있는 라카-둠은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내면을 볼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이 이렇게 저주스러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차라리 두드려 맞는 게 낫지 이건 고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시안, 그만하거라. 나는 괜찮단다.”
“나 아무것도 안 했어, 형.”
“…시안.”
“후…….”
그제야 시안은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풀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던 거대한 무엇인가가 더 이상 자신을 노려보지 않게 되자 라카-둠도 긴장이 풀린 듯 큰 한숨을 내쉬었다.
“허억…….”
“아빠, 괜찮으세요?”
코라-둠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챙겼고 리안도 그런 장인어른을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모르긴 몰라도 시안 저 아이에게 찍히면 정말 좋지 않다. 다른 건 다 넘어가지만 가족은 끔찍하게 아끼는 아이이니…
이 정도로 마무리된 것이 천만다행이다.
“장인어른…….”
“…저 녀석이 네 동생이었느냐?”
“맞습니다만… 시안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마치 자신의 동생을 아는 듯한 말투에 리안이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뭐… 아니다. 후…….”
라카-둠은 시안의 눈동자가 떠오르며 모든 이성이 한순간에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한 번 더 이런 짓을 하면 자신의 딸까지는 무사하겠지만 자신의 종족이 통째로 날아갈 수도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빌어먹을 녀석. 동생 잘 둔 줄 알아라.”
자신의 손을 떠난 재수 없는 사위 녀석을 보며 라카-둠은 허탈하게 내뱉으며 응접실 바깥으로 향했다.
“…장인어른, 돌아가실 겁니까?”
“그래. 네 녀석 따위 꼴도 보기 싫다. 다음에는 딸보고 만나러 오라고 그래.”
“…죄송합니다.”
“그리고… 코라야.”
“네?”
“선물이다. 세상이 험악하니 잘 챙겨 다니거라. 한 자루는… 예비용이다.”
자신의 것은 또 만들면 되기에 라카-둠은 가지고 온 특제 가이라 두 자루를 모두 딸에게 넘겨주었다. 자신의 딸도 자랑스러운 드콘의 딸이니 어렵지 않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커스텀을 주며 라카-둠은 작게 속삭였다.
“혹시 저 녀석이 바람이라도 피우면… 이걸로 쏴 버려라. 네가 쏘면 저기 시안이라는 녀석도 별말 안하겠지.”
“…아빠.”
“긴 이야기는 다음에 하자꾸나. 오늘은 너무 힘들구나.”
당황하는 표정을 짓는 딸을 두고 라카-둠은 발길을 옮겼다. 딸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정신이 너무 피곤했다. 딸과의 대화는 앞으로도 기회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피곤한 발걸음을 옮기던 라카-둠은 한 인영의 방해로 그 앞길이 가로막히고 말았다.
“저기요!”
“흠?”
누군가 살펴보았더니 아까 사위 녀석과 같이 있던 여자였다. 두 번째 부인이었는지 세 번째 부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둘 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똑같으니.
“비켜라.”
“하나만… 단 하나만 여쭤 볼게요!”
표정을 보니 말하기 전에는 결코 비키지 않을 것 같았기에 라카-둠은 빨리 말해주고 지나가기로 했다.
“후… 어서 물어봐라. 피곤하니까.”
“아까 타고 오신 그 오토바이랑… 총… 그거 어디서 구하셨어요?”
난데없는 그 물음에 라카-둠이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오토바이? 총? 무슨 소리 하는 거냐? 내가 타고 온 건 아직 이름도 없다만. 그리고 총이라는 건 또 무엇이고?”
그제야 라카-둠 앞을 가로막은 인영, 베로니카는 자신이 당황하여 두서없이 말을 했음을 깨달았다. 이곳의 사람들은 오토바이나 총에 대해 알 리가 없으니.
“아까 타고 오신 이륜구동 아티팩트와 제 남편에게 쏜 그 물체를 말하는 겁니다.”
제 남편이라는 말에 라카-둠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말싸움하는 것도 피곤했기에 라카-둠은 입을 열었다.
“구하다니? 둘 다 내가 만든 거다. 할 말 끝났으면 비켜라.”
“그럴 리가…….”
허탈한 표정을 짓는 베로니카를 지나쳐 성큼성큼 걸어가던 라카-둠은 문득 자신이 지나온 인간 계집이 자신이 예전에 보았던 어떤 녀석과 비슷한 느낌을 풍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흑발, 흑안의 이국적인 외모. 그리고 성은 다르지만 군데군데 닮아 있는 얼굴.
여기까지 생각난 라카-둠은 돌아서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베로니카를 보여 물었다.
“거기, 너. 혹시 네 이름이 리-미이나인가… 이런 거냐?”
“……!”
예상치 못한 라카-둠의 대답에 베로니카의 얼굴에는 화색이 감돌았고 그 광경을 본 리안과 코라-둠, 시안도 라카-둠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응접실의 입구 쪽으로 모였다.
☆ ☆ ☆
라카-둠이 그 녀석, 리마이누를 만난 것은 5년 전의 일이었다.
흥미를 위해 파레온의 영지에 남아 있던 라카-둠은 녀석의 창고 안에 있던 유산에 대한 연구가 모조리 끝나자 흥미를 잃고 로가디스 지방을 떠났다. 파레온은 굉장히 아쉬워했지만 떠나겠다는 라카-둠의 의지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떠돌던 라카-둠은 대법도회의 제안을 받게 된다.
<저희는 현재 유능한 분들을 대거 모집하고 있습니다. 저희와 함께 가셔서 연구에 참여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분명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로운 기술을 접하게 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지식과 새로운 기술에 목말라 있는 라카-둠에게는 너무나 매력적인 제안. 대법도회의 제안을 들고 온 녀석의 내면에서도 거짓은 보이지 않았고, 또 대륙에 영향력을 미치는 거대한 대법도회가 겨우 드콘족 하나 가지고 사기를 칠 리도 없었기에 라카-둠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과연 대법도회가 장담한 대로 그곳은 신세계였다. 비록 비밀스러운 곳에서 진행되는 연구라 신상이 비밀에 부쳐지고 격리된 상태로 지내야 하는 것이 조금 불만스럽기는 했지만 애초에 그러지 않았어도 라카-둠은 바깥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너무나도 놀라운 새로운 지식들. 자신도 대법도회의 논문을 꾸준히 읽었지만 그런 것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대륙에서 손꼽힐 만한 실력을 가진 장인들과 기술자, 법도사들.
없는 게 없는 재료창고에 엄청난 자원, 풍부한 인력까지.
생각도 못한 모든 것을 떠올릴 수 있었고 생각만 하던 모든 것을 만들 수 있었다.
태생이 장인인 라카-둠에게는 천국이나 마찬가지였고 그곳의 생활 1분 1초가 귀했다. 자신의 딸은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그론-필라에 맡겨두었기에 라카-둠은 아무런 걱정 없이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대법도회의 비밀 프로젝트에 참가하던 와중, 라카-둠은 그 녀석을 만나게 되었다.
리마이누, 특이하고 똑똑한 녀석들만 모아 놓은 그곳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던 녀석.
그 녀석보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많았고 그 녀석보다 높은 수준의 이적을 구사할 수 있는 법도사는 발에 채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특별했다. 원래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원하느냐에 의해 정해지는 법. 그렇게 계산하면 녀석의 가치는 법도회의 회장이라는 타키온에 비견될 정도였다.
대법도사는 그래도 몇 있었지만 녀석은 이 대륙에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지식은 난데없이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반드시 주위의 필요와 그 이전의 지식, 그 사회의 사상을 기반으로 발전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 녀석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전혀 다른 체계를 기반으로 발전해 온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능숙하게 응용할 수 있었다.
애초에 녀석은 이 프로젝트를 도와주러 온 것일 뿐, 법도회가 아닌 다른 상위 조직에 소속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런 거대한 조직보다도 더 위에 존재하는.
그 증거가 보안의 정도였다. 라카-둠을 비롯한 다른 인원들은 비밀프로젝트라고는 하지만 기밀 유지 이적만 걸고 이 프로젝트에 관련된 내용만 말하지 않는다면 바깥세상과의 연결은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리마이누는 달랐다. 아예 세상에서 존재가 지워진 채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다.
프로젝트 도중 라카-둠과 리마이누는 업무상 만날 일이 많았기에 그 와중에 자연스럽게 어느 정도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녀석의 간단한 과거사, 잃어버린 혈연의 이름, 그리고 이것저것.
<애송이, 너 바깥에 나가고 싶지는 않니?>
<후후. 어차피 바깥에 아는 사람도 없고 이곳의 일이 체질에 맞는걸요… 그리고 저는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이 프로젝트를 마무리 짓고 세상을 더 좋게 만들어 낸다면 제가 지은 죄를 조금이나마 속죄할 수 있겠지요.>
무슨 죄를 지었는지 궁금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이 녀석이 핵심 인력으로 참여한 프로젝트가 잘못되어 수십만 명의 목숨이 날아갔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알기로 근래에 수십만의 목숨이 날아간 사건은 단 하나뿐이었다.
‘케르발의 프로젝트에 이 녀석이 개입했던 것이군……. 그나저나 바보같이 착한데… 천성인가.’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 녀석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수십만이 죽었다는 죄책감을 완전히 떨쳐 낼 수는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것까지 자신이 어떻게 해 줄 영역은 아니었기에 라카-둠은 신경을 끄고 자신의 할 일에 매진했다.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겨우 2년 남짓. 원래는 더 남아있고 싶었지만 중요한 일이 생겼기에 어쩔 수 없이 바깥으로 나오게 되었다.
자신의 딸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자신이 딸을 맡긴 나이는 열둘. 그리고 지금은 열넷.
하지만 자신에게 전해진 소식은 틀림없이 진짜였다.
프로젝트 수행의 상위 조직에 속해 있던 리마이누와는 다르게 자신은 편지 정도는 주고받을 수 있었으니. 물론 철저한 검열을 거쳐야 하지만 말이다.
이 소식을 들은 라카-둠은 자신이 연구 중에 심심풀이로 만들던 소형 가이라를 챙겨 들고 바깥으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물론 이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는 기밀 유지 이적을 자신에게 건 다음에 말이다.
애초에 비밀스럽게 진행되는 프로젝트라고 하지만 규모가 상당했기에 일하는 인원의 수도 많았다. 직장 좀 그만두겠다고 모조리 죽인다면 오히려 비밀이 유지되지 않을 것이다.
그다음부터는 모두가 알고 있는 대로였다.
나와서 리안에게 소형 가이라를 갈겨 버린 라카-둠은 그 위력을 보고 반한 나라샤 국왕의 꼬임에 넘어가 그 사건을 무마하는 대가로 대북벽의 병기창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자신의 실력을 여실히 뽐내었다.
애초에 가이라나 이륜구동 아티팩트를 만드는 데 쓰이는 기술은 그곳에서 쓰이던 기술에 비하면 허접하기 그지없는지라 기밀 유지 이적에도 걸리지 않았고, 라카-둠은 무난하게 가이라 및 각종 무기의 제작에 성공하여 그 명성을 드높이게 되었다.
“…해서 여기까지가 내가 아는 사실이다.”
라카-둠의 이야기가 끝나고 응접실은 침묵에 잠겼다.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고 새로운 문제가 생겼기에 다들 고민에 빠진 것이다.
한 가지 문제는 해결되었다. 왜 이제까지 아무리 티안의 정보부가 찾아도 리마이누란 자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는지.
하지만 다른 문제가 생겼다. 알아도 찾아갈 방법이 없다.
그렇기에 모두가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